박정희역도의 만고죄악을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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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의 추방은 거짓공약

박정희는 5.16직후에 민중의 환심을 사보려고 『참신한 정치』를 하여 『민생문제를 해결』하고 『명랑한 복지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감언이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10여년이 지난 뒤에도 민생은 도탄에서 구출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더 어려워졌다.

박정희 일당은 집권기간 세금을 계속 늘이고 물가를 올려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광범위한 서민대중의 고혈을 짜냈고 그것으로 침략적인 군비를 충당하고 일신의 안일과 영달을 꾀하였다.

그들이 도시와 농촌에서 긁어 간 세금총액은 1965년에 695억 9천만원이었다면 1968년에는 2182억 2천만원으로 대폭 늘었고 1972년에 그것은 무려 5437억원으로 천문학적 숫자를 기록하였다.

물가도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도매물가지수는 1960년을 100으로 할 때 1965년에는 200.8%로 상승했고 1968년에 208.7%로 대폭 뛰었다. 1969년에도 그것은 그 전해에 비하여 7.5%올랐다.

박정희 일당은 사회적 재부를 창조하는 생산자인 노동자계급의 생활을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었다.

물가고와 세금의 증대로 생계비는 올라만 가고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낮아만 갔다.

박정희 역도가 집권한 10여년간 실질임금은 해마다 떨어졌고 1970년에 그것은 5.16당시에 비하여 60%나 떨어졌다.

박정희 역적은 정권을 가로챈 3일 후인 1961년 5월 19일에 『경제의 침체회복에 관한 특별명령』을 공포하고 임금을 5월 15일 수준으로 동결시켜 놓았고 노동쟁의도 일체 금지시켰으며 1972년에 있었던 『8.3긴급명령』에서도 또 임금동결조치를 선포했다.

이처럼 박정희 도당은 처음부터 저임금정책을 썼으며 그것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별의별 수단을 다 썼다. 그리하여 노동임금수준은 세계에서 제일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또한 일자리가 없이 거리를 헤매는 실업자, 반실업자들이 실업대군을 이루었다.

박정희 역도는 『경제성장을 도모하여 고용을 늘이고 실업을 줄이겠다』고 호통을 쳤지만 그의 집권기간에 실업은 해와 더불어 늘어났다.

경제기획원이 줄여서 발표한 자료에 의해도 1972년 실업자수는 그 전해보다 18만 4천여명이 늘어났다. 이것은 1961년부터 1971년간에 평균실업자, 반실업자 증가수 10만명과 대비하면 엄청난 숫자이다.

노동자들의 주택사정도 말이 아니었다.

박정희 일당은 노동자들로부터 고혈을 짜내서 전쟁준비에 밀어 넣으면서도 서민대중의 주택문제해결에는 아예 외면하였다.

1972년 도시와 농촌을 대상으로 하여 조사한 공식자료에 의하면 주택 부족율은 25%이며 4가구당 1가구는 집이 없는 형편이었다.

서울시의 경우만 보아도 주택부족수는 약 70만동으로서 서울인구의 62.7%에 달하는 사람들이 집이 없거나 셋방살이하는 무주택자들이었다.

입에 풀칠조차 하기 힘든 근로대중의 태반은 셋방살이 아니면 판자집이나 움막과 같은 집 아닌 집에서 죽지 못해 살았다.

박정희 일당은 노동자뿐 아니라 농민도 못살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인구의 과반수를 점하고 있는 농민들의 환심을 사보려고 당치않게도 자신을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기만하면서 『중농정책』을 고창해 왔다.

그러나 박정희 일당은 처음부터 착취와 수탈의 대상을 농민으로 잡고 악착같이 달라붙어 계속 피땀을 빨고 뜯어내었다.

벌써 5.16직후에 「물납제」였던 「토지수득세」를 「금납제」인 「농지세」로 다시 부활시켰다. 그리고 「토지균등조사」에 따르는 「농지세」의 부과율과 「수세」를 비롯한 각종 세율도 올렸고 「농산물가격 유지법」을 만들어「저미가정책」을 계속 쓰면서 해마다 하곡과 추곡을 비롯한 양곡을 생산비의 절반이 되나 마나한 헐값으로 빼앗아 갔다.

악착하기 이를 데 없는 박정희 일당은 1968년과 같이 사상 보기 드문 흉년에도 매상의 명목으로 365만섬의 쌀을 긁어갔고 1972년도에도 314만섬의 추곡을 빼앗아 갔다. 이것은 5.16당시에 비하여 3배나 늘어난 막대한 양이다.

박정희 역도는 이밖에도 농민들에게 「농지세」와 「비료대」 등 여러가지 부담을 들씌워 혹독하게 뜯어갔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먹고살기 위해 부득불 고리채를 얻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늘어만 가는 것은 빚뿐이었다.

관계당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해도 농가호당 부채액은 1960년도의 6900원에서 1965년에는 20540원으로 늘었으며 1968년에는 32400원에 달하였다.

하여 농촌에서는 봄이 오면 의례히 춘궁이 뒤따르게 마련이고 보릿고개만 되면 백 여만호를 헤아리는 농민들이 절량에 아우성을 치며 초근목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가는 눈물겨운 참상이 빚어졌다.

박정희 역도가 떠벌리던 『새마을운동』도 농민들을 파국에로 몰아넣었다.

역도는 『농가소득의 증대』와 『생활환경의 개선』이라는 귀맛 좋은 구호를 내걸고 1972년도에만도 「새마을 계획비용」의 73%에 해당한 84억원을 농민들에게 내리 먹였고 가구당 지붕개량비용 27000원도 농민들에게 부담시키었다.

박정희역도는 도시영세민들의 생활도 궁핍하게 만들었다.

서울과 부산을 비롯한 대도시들의 무수한 판자집과 움막들에서는 수많은 영세민들이 가난에 떨고 병마에 시달리면서 내일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지 못해 살아갔다.

박정희역도는 수많은 도시영세민들에게 살길을 마련해주기는 고사하고 그들의 갸날픈 생활밑천마저 짓뭉개 버리는 횡포한 짓을 예사로 감행하였다.

살길이 막혀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자살참극도 매일과 같이 꼬리를 물었다.

1971년 9월 국회 앞에서 온 식솔이 분신자살한 참사도 생활고 때문에 빚어진 것이며 1972년 서울 영등포에 사는 이모씨가 분신자살한 것도, 1973년 2월 경상북도 영주에서 철도자살을 한 권모씨의 경우도 다 가난과 굶주림에 모대기다 한 많은 세상을 등진 것이다.

이처럼 박정희 일당은 이 땅의 경제를 말아 먹고 인구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노동자, 농민, 도시영세민들을 생활의 막바지로, 빈궁과 기아의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바로 이것이 박근혜와 새누리당 패거리들, 보수세력들이 그토록 떠드는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다.

절대다수 민중에게 빈궁과 고통만을 준 이런 「기적」을 오늘 박근혜패거리들이 그 무슨 본보기로 내세우는 것은 경제와 민생을 더욱 더 도탄에 빠뜨리겠다는 것 외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

전 국민은 민생을 구하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반박근혜, 반새누리당투쟁의 불길을 세차게 지펴올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