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69)

정세발전추세에 둔감한 '19대 총선 평화.통일공약'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비핵화의 의미해석은 9.19 공동성명에 근거해야 한다

이 글을 집필하고 있는 지금, 제국주의깡패국가(imperialist rogue state) 미국은 '키 리졸브-독수리 연습'이라는 작전명으로 연례적인 북침전쟁연습을 이 땅에서 또 감행하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 사실 하나만 봐도 이 땅의 현실이 군사긴장과 전쟁위험으로 가득 찬 정전체제에 의해 규정되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런데 북측과 미국의 전면대결상태에서 조성된 한반도 군사정세에 누구보다 민감하여야 할 통합진보정당이 '핵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한반도 군사정세에 둔감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를테면, 통합진보당이 2012년 3월 1일에 발표한 '평화로운 한반도를 위한 3+1 과제와 15대 공약'을 읽어보면 그런 인상을 받게 된다.

그 발표내용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북한 핵무기 외국 이전"으로 인식한 것은 비핵화에 관한 초보지식도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다. 프랑스와 일본, 미국과 캐나다, 미국과 아르헨티나 등의 양국관계에서 드러난 것처럼, 쌍무협정에 따라 자국산 핵물질을 다른 나라에 넘겨주거나 다른 나라에 가공을 위탁하는 경우는 더러 있지만, 자국의 핵무기를 다른 나라에 넘겨주는 '바보나라'는 세상에 없다.

심지어 한반도 비핵화가 아니라 '북한 비핵화'라는 생억지를 부리는 미국조차도 북측이 자기들에게 핵무기를 넘겨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언필칭 진보정당을 자처하는 통합진보당이 9.19 공동성명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엉뚱하게도 소설적 상상력에 의존하여 "북한 핵무기 외국 이전"을 공식 발표한 것은 너무 창피한 노릇이다.

한반도 비핵화는 북측 핵무기를 다른 나라로 이전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반도를 근본적으로 위태롭게 만든 핵위협을 불가역적으로, 검증할 수 있게, 완전히 제거한다는 뜻이다. 한반도 비핵화는 철두철미 한반도 핵문제의 당사자인 북측과 미국이 쌍무적 합의에 의해서 등가적 동시행동의 원칙에 따라 실현되는 핵위협의 상호제거다.

바로 그런 목표와 원칙에 따라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해갈 기본방도를 밝혀준 불멸의 이정표가 2005년에 6자회담에서 채택된 9.19 공동성명이다. 그 역사적인 성명은 미국의 의무 불이행으로 이제껏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으나, 국제법적 효력을 상실한 종이장으로 전락한 것은 아니며, 이번에 북측이 미국을 강제하여 채택한 2.24 합의를 통해 결국 이행단계로 진입하였다.

9.19 공동성명에 규정된 한반도 비핵화의 의미는, 북측 핵무기를 미국에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북측과 미국이 서로에게 가해온 핵위협을 등가적 동시행동의 원칙에 따라 쌍무적 합의에 의거하여 순차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순차적 제거란 핵위협을 임시로 제거하는 1단계 조치에서 출발하여 영구히 제거하는 2단계 조치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을 인식하고 나면, 핵위협 제거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밝혀낼 필요가 생긴다.

평화협정 체결과 핵위협 제거는 어떻게 연관되는가?

미국이 요구하는 핵위협 제거란 북측이 지하핵실험을 중지하고, 녕변 핵시설단지의 우라늄농축을 중지하고,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중지하고,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을 통해 미국에게 생산량을 통보한 무기급 핵물질로 만든 '신고한 핵무기'를 자진 해체하는 것이다.

북측이 신고한 핵무기만 해체한다는 점과 국외 이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진 해체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자진 해체 여부를 검증하는 방식은 장차 북미양자회담에서 합의할 것인데, 이 검증단계가 한반도 비핵화의 마지막 단계다.

미국은 위에 열거한 것 이상으로 비핵화 수준을 높일 수도 없고, 높이려 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통합진보당이 위의 발표문에서 엉뚱하게 상상한 것처럼, 비핵화의 마지막 단계에 가서 만일 미국이 정말로 북측에게 핵무기를 넘겨달라고 요구한다고 가정하면, 북측도 등가적 동시행동 원칙에 따라 북측이 미국에게 넘겨줄 핵무기에 상당한 미국 핵무기를 넘겨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핵무기 상호교환은 아동만화에나 나올 법한 우스운 이야기다.
 
다른 한 편, 북측이 요구하는 핵위협 제거란 미국이 대북핵공격을 상정한 북침전쟁연습을 중지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여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수립하고, 한반도를 겨냥한 '핵우산' 제공공약을 폐기하고, 북침전쟁 인계철선으로 존재하는 주한미국군을 철군하는 것이다.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문제는 다자간 평화회담에서 해결할 것이고,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는 북미양자회담에서 해결할 것이다. 주한미국군을 철군하는 단계가 한반도에서 미국의 핵위협을 제거하는 마지막 단계다.

북측은 위에 열거한 것 이상으로 비핵화 수준을 높일 수도 없고, 높이려 하지도 않는다. 북측이 미국 본토에서 북측을 겨냥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제거하라고 요구하거나 또는 태평양 바다밑에서 잠행하는 핵추진 잠수함에 배치된 전략미사일까지 제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한반도 비핵화 수준을 넘어서 전 세계 비핵화를 미국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전 세계를 비핵화하는 의제는 북미양자회담애서 논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9.19 공동성명에 들어가지 않았다.

북측과 미국이 서로에게 가하는 상호핵위협을 등가적 동시행동 원칙에 따라 순차적으로 제거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북측과 미국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기 위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즉시 실행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중요한 것은, 평화협정 체결을 선행하지 않는 한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이다. 평화협정 체결과 비핵화 실현의 상관성을 비유로 말하면, 서로 싸우지 않는다는 약속을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 총부터 성급히 내려놓을 어리석은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한반도 정세에서 최우선적으로 시급하게 풀어야 할 문제는, 한반도 비핵화를 앞두고 북측과 미국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는 합의를 내오는 것이다. 친미성향 수구언론매체들이 북미관계와 관련하여 퍼뜨리는 헛소리 같은 왜곡보도와 축소보도만 자꾸 읽다보면, 이 당면문제가 어떻게 해결되고 있는지 모르고 헷갈리게 된다. 저들의 헛소리를 듣고 헷갈리지 않으려면, 2012년 2월 29일 평양과 워싱턴 디씨에서 동시에 발표된 2.24 합의를 꼼꼼하게 정독할 필요가 있다.

잘라 말하면, 2.24 합의는 북측과 미국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기로 합의하였음을 천명한 매우 중대한 문서다. 길이가 제한된 이 글에서 그 합의사항을 상론하지는 못하지만, 제3차 북미고위급회담에서 그런 합의에 이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기로 한 2.24 합의는 미국의 정치적 패배이자 북측의 정치적 승리이므로, 미국은 그 합의사실을 자꾸 감추려 하고, 북측은 그 합의사실을 세상에 알리려 하는 바람에 서로 엇갈린 정보가 언론에 공개된 것이다.

북측과 미국이 2.24 합의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기로 합의한 것을 9.19 공동성명의 시각으로 다시 읽으면, 핵위협을 상호제거하는 한반도 비핵화가 속도를 내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북측과 미국이 핵위협을 서로 제거하는 비핵화 실현속도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는 평화실현 진척정도에 따라 빨라질 것이다.

미국의 계략을 간파하지 못하면 낭패다

주목하는 것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는 과정이 2.24 합의에 의해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한반도 정세는 여기까지 와 있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는 과정은 한반도 비핵화를 적극 추동할 것이며, 이제까지 진행해온 북미고위급회담보다 한 급 높은 북미고위급회담이 열리면 주한미국군 철군문제가 당연히 의제로 오를 것이다. 이처럼 평화협정 체결, 비핵화 실현, 철군을 포괄하는 일련의 전 과정을 가리켜 한반도 평화실현과정이라 한다.

그런데 통합진보당이 2012년 3월 1일에 발표한 '평화로운 한반도를 위한 3+1 과제와 15대 공약'에는 이상하게도 주한미국군 철군문제가 빠져있다. 철군문제가 나오면 이성을 잃고 과민반응을 하는 수구정당과 수구언론을 의식해서 철군문제에 대한 언급을 회피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에서 대선후보를 비롯한 일부 수구정객들도 철군을 주장하는 판인데, 정작 철군문제를 제기해야 할 통합진보당이 철군문제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면, 수구세력의 눈치를 너무 살피는 게 아니냐는 실망스러운 평가밖에 듣지 못할 것이다.

통합진보당은 철군문제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민주통합당과 똑같은 행동을 취할 것이 아니라, 민주통합당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가면서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어법으로 철군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명백하게도, 철군문제는 한반도 평화실현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다.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비핵화를 실현하는 목적은 주한미국군을 철군하기 위한 것이며, 철군 없이는 평화도 비핵화도 전혀 실현하지 못한다.

혹시 평화협정이 체결된 뒤에 정세가 호전되고 사회분위기가 바뀌면, 통합진보당이 그 때 가서 철군문제를 제기해도 되지 않겠는가 하고 안이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철군문제를 둘러싼 내외사정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미국은 평화협정 체결문제와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분리해놓고,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국군 지위를 '조정자 지위'로 변경하여 계속 주둔시킬 것이라는 소리를 이미 오래 전부터 꺼내놓았다. 이것은 미국이 평화협정을 체결하더라도 주한미국군은 철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평화협정을 체결하더라도 주한미국군이 계속 주둔하면 그 협정문은 사실상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하게 되므로, 북측이 계속주둔 의지를 드러낸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리 만무하다. 북측이 미국에게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국군 철군을 일괄타결방식으로 추진하자고 요구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북측과 미국이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로 합의하는 것은 오직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국군 철군을 일괄타결방식으로 합의하였을 때만 가능하다. 평화협정 체결문제가 이처럼 주한미국군 철군문제와 떼어놓을 수 없게 결부되었기 때문에, 평화협정 체결이 이제껏 59년 동안 지체되어온 것이다.

만일 평화협정 체결문제와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분리시켜놓고 평화협정만 체결하고 끝난다면, 그것은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왜냐하면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킬 확실한 국제법적 근거를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화협정 체결문제와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분리시키고 평화협정 체결문제만 제기하는 것은, 주한미국군 영구주둔을 획책하는 미국의 계략을 본의 아니게 따라가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이 미국의 계략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 계략을 멋모르고 따라가다니 세상에 이런 낭패가 또 어디 있을까!

진척시기를 너무 늦춰잡았다

이번에 통합진보당이 발표한 내용을 읽어보면, 한반도 평화실현 진척시기를 전망하는 데서도 통합진보당이 정세발전추세에 둔감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위의 발표문에 따르면, 통합진보당은 2020년에 가서야 한반도 평화체제를 수립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왜 그렇게 늦춰잡았을까?

2.24 합의가 나오기 전에는 진척시기를 그렇게 늦춰 전망할 수 있었으나, 2.24 합의로 정세발전속도가 빨라졌으니 이제는 2020년까지 늦춰잡을 필요는 없다. 물론 평화실현 진척시기를 전망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정보은폐로 잘 보이지 않는 정세발전추세를 예민하게 포착하는 감각을 가져야 평화실현 진척시기를 가늠할 수 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한반도 평화실현과정에서 2012년은 결정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2012년은 북측과 미국이 평화문제와 비핵화문제의 해결방도를 일괄타결방식으로 합의하는 시기이며, 남측에서 정권교체가 실현되는 시기이다.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수립되는 시기는 남측에 자주적 진보정권이 수립되는 시기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이 땅에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자주적 진보정권은 정전체제에서 수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미국이 남측에 대한 지배력을 정전체제에서 유지하고 있으므로, 정전체제가 남아있는 한 미국의 지배력이 강하게 관철되는 것이고, 따라서 그런 지배와 예속의 관계에서 민주통합당이 집권할 수는 있어도 통합진보당이 집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한미국군의 단계적 철군이 아직 완료되지는 않았더라도, 평화협정이 체결된 다음에 핵위협이 단계적으로 제거되는 발전추세에 조응하여 미국이 단계적으로 철군할 때, 다시 말해서 미국의 대남지배력이 현저히 위축되었을 때, 이 땅의 진보적 민중들이 그토록 염원해온 자주적 진보정권이 출현할 것이다.

2.24 합의로 이미 시작된 한반도 평화실현과정이 한껏 고조기에 이른 시점에서, 이 땅의 진보적 민중들은 자기들이 선택한 자주적 진보정권을 강력한 '무기'로 삼고 이 땅에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이며, 자주적 평화통일을 앞당길 것이다. (2012년 3월 9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