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65)
 

깃발파와 대중파의 파쟁으로 와해된 인민민주당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깃발파와 대중파의 갈등

다른 나라 진보정당이 겪었던 역사적 경험에서 교훈을 찾는 것은, 사회변혁의 진로를 모색하고 있는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에게 도움을 준다. 다른 나라 진보정당이 겪은 다종다양한 경험들 속에는 성공과 승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도 있다.

성공과 승리의 경험은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에게 자신감을 안겨주고, 실패와 좌절의 경험은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이 글에서 논하는 인민민주당의 경험은, "그들처럼 하다가는 우리도 그런 꼴이 되겠구나" 하는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의 무력강점과 장기화된 내전으로 말할 수 없는 재앙과 불행을 겪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아프가니스탄 왕국이 세워진 때는 1926년이었다. 그로부터 근 40년이 지난 1965년에 봉건군주제를 타도하고 사회변혁을 실현하려는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이 창당되었다.

1965년 새해 첫날 27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모여 인민민주당을 창당하고,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Nur Mohammad Taraki, 1913-1979)를 총비서로, 바브락 카말(Babrak Karmal, 1929-1996)을 제2비서로 선출하였고, 5명으로 구성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을 내왔다.

총비서를 당의 영도자로 선출하면 되었는데도 구태여 제2비서까지 선출해야 했던 까닭은, 인민민주당이 두 정파로 갈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민민주당에는 깃발파(Parcham)와 대중파(Khalq)가 당권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다. 총비서로 선출된 모하마드 타라키는 대중파 수장이었고, 제2비서로 선출된 바브락 카말은 깃발파 수장이었다.

깃발파와 대중파는 서로 다른 사회변혁노선을 추구하였다. 이를테면, 깃발파는 봉건적 이슬람사상에 젖어있고 아직 산업화 수준이 낮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소수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급진적 사회변혁을 추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면서, 각계각층 대중을 대중정당으로 결집시켜 진보적 민주주의변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와 달리, 소련에서 레닌주의를 직수입한 대중파는 소수의 선진적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계급정당을 건설하여 급진적 사회변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너무도 치명적인 좌경급진주의 오류

1973년 7월 13일 아프가니스탄 왕국에서 정변이 일어났다. 모하메드 자히르 샤(Mohammed Zahir Shah, 1915-2007) 국왕이 신병치료차 이탈리아로 출국한 틈에 모하메드 다우드 칸(Mohammed Daoud Khan, 1909-1978)이 무혈정변을 일으켜 군주제를 폐지하고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을 세우고 대통령에 취임한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군주제 폐지와 민주공화국 수립을 강령으로 제기한 인민민주당은 다우드 칸이 주도한 정변에 협력하였다.

그런데 원래 왕족 출신인 다우드 칸은 아프가니스탄 왕국에서 군사령관, 국방장관, 내무장관, 총리를 지낸 사람이다. 이러한 사정은, 다우드 칸의 정변이 군주제 폐지와 공화국 수립이라는 변혁을 일으켰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왕족 내부의 권력투쟁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음을 말해준다.

무혈정변으로 세워진 새로운 공화국이 비록 그런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인민민주당은 정변으로 조성된 새로운 정세변화의 요구에 따라 공화국 수립에 참가하였다.

공화국 수립 이후 5년이 지난 1978년 4월 17일 인민민주당의 깃발파 지도자인 미르 아크바 카이버(Mir Akbar Khyber, 1925-1978)가 자기 집 앞에서 암살당했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지 못한채 미궁에 빠진 그 암살사건은 다우드 칸 정권의 우파관리인 당시 내무장관의 암살지령에 따라 자행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4월 19일에 열린 카이버의 장례식에 참석한, 인민민주당 당원과 지지자 15,000여 명이 시작한 군중시위는 자연스럽게 반정부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인민민주당이 강력한 반정부투쟁으로 다우드 칸 정권과 정면충돌을 빚게되자, 다우드 칸 당시 대통령은 인민민주당 수뇌부를 전격 체포하여 반정부투쟁을 초기에 진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정치탄압을 받은 인민민주당은 군부와 손잡고 1978년 4월 28일 정변을 일으켰다. 아프가니스탄 현대사에 쏘어 혁명(Saur Revolution)으로 기록된 사변이 바로 그 정변이다. 당시 아프가니스탄 군부는 중무장 전투병력과 전투기를 동원하여 대통령 경호병력과 교전하였으며, 그 교전에서 다우드 칸 대통령이 목숨을 잃었다. 정변에 성공한 인민민주당은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을 세우고 곧바로 사회변혁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인민민주당이 정변을 일으켰다고 하지만, 실제로 정변의 주도세력은 인민민주당 내의 대중파였다. 따라서 대중파가 인민민주당 집권과정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불가피하였다. 이처럼 대중파가 집권에 성공하였으나, 그들의 속좁은 자파중심주의와 그들이 추구한 급진주의 사회변혁은 이제 막 시작한 아프가니스탄 사회변혁을 실패와 좌절로 끌어간 치명적인 요인으로 되었다.

첫째,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대중파는 당내 경쟁세력인 깃발파를 배제하였다. 이를테면, 대중파는 깃발파 수장인 바브락 카말을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밀어냈다. 대중파의 이러한 권력독점은 변혁역량을 스스로 축소시키는 결정적인 오류로 되었다. 
  
둘째, 권력을 독점한 대중파가 밀어붙인 급진적 사회변혁은 봉건적 이슬람 사상에 젖어 우경화된 아프가니스탄 사회에서 강력한 대중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를테면, 대중파는 지주가 소유한 토지만이 아니라 중농이 소유한 토지까지 무상몰수하는 급진적이고 좌경적인 토지개혁을 강행하여 대중의 원성과 저항을 자초하였다. 

대중파가 장악주도한 인민민주당 정권은 좌경급진주의 오류를 범하면서 대중적 지지를 얻기는커녕 되레 정치적으로 더욱 고립되었다.

인민민주당의 와해와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의 붕괴

인민민주당 정권이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고립된 기회를 놓칠세라,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을 반대하는 7개 이슬람 무장정파들과 아랍 각국에서 지원병으로 달려간 '아랍-아프간 의용군'이 총결집하여 무장반란을 일으켰고, 아프가니스탄은 내전상태에 빠져들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인민민주당 정권을 전복시킬 기회를 노려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1979년 7월 3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장반란을 일으킨 이슬람 정파들에게 재정과 무기를 지원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지원임무를 중앙정보국(CIA)에게 맡겼다.

가뜩이나 내부파쟁으로 역량을 소모하고 좌경급진주의 오류를 범해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한 인민민주당 정권은 미국의 강력한 배후지원을 받은 이슬람 무장정파의 집중공격으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소멸위기에 몰렸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개입한 것을 본 소련은 미국의 군사개입과 이슬람 무장정파들의 반란으로 인민민주당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친미정책에 매달린 이란의 팔레비 왕조가 건재하고, 1977년 7월 5일 친미군부세력의 정변으로 파키스탄의 부토 정권이 전복된 상황에서, 이란과 파키스탄 사이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민민주당 정권마저 미국의 배후지원을 받은 이슬람 무장정파들에 의해 무너지는 것은 서아시아지역에서 소련의 전략적 이익에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개입하기로 결정하였다. 1979년 12월 24일 소련이 파병한 700명의 특수전 병력과 54명의 KGB 요원들은 2,500명의 아프가니스탄 수비군 병력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이것이 '333-폭풍 작전(Operation Storm-333)'이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 1929-1979)은 교전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소련이 아민 정권을 무력으로 전복한 까닭은, 아민을 '쏘어 혁명의 배신자'로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원래 대중파 수뇌부에 속했던 아민은 쏘어 혁명 직후 자기에게 경쟁적이었던 깃발파 수뇌부를 모조리 숙청하여 변혁역량을 극도로 약화시켰고, 1979년 9월 14일에는 자신과 함께 쏘어 혁명을 이끌었던 대중파 수장인 무하마드 타라키 대통령마저 암살하고 정권을 찬탈하였다.

아민 대통령이 교전과정에서 피살당한 직후인 1979년 12월 28일 깃발파 수장 바브락 카말이 소련의 전폭적인 비호를 받으며 정권을 잡았다. 카말 대통령은 대중파 집권기에 무상몰수한 중농의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각계각층 대중들이 참가하는 광범위한 민족전선(National Front)을 구축하여 변혁역량을 강화하고, 소련 국기를 모방하여 만드는 바람에 대중의 비난을 자초한 아프가니스탄 국기를 대중의 요구에 맞게 다시 제정하는 등 이전에 대중파가 저질렀던 실책과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대중파와 깃발파의 파쟁과 대중파의 좌경급진주의 오류가 극심한 혼란을 몰아온 아프가니스탄 사회변혁은 대중으로부터 신뢰를 회복할 수 없었고, 더욱이 내전에 휘말려 소련의 파병과 정치간섭을 용인하고 말았으니, 인민민주당 정권이 다시 일어설 가망은 없었다.

소련은 그런 인민민주당 정권을 유지해주기 위해 50,000명 병력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하여 무자헤딘의 무장반란을 진압하려고 애썼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민족전선'을 창설한 지도성원 27명 전원이 '민족전선' 창설 직후 불과 한 달 안에 무자헤딘 반란군에게 모두 암살당하는 바람에 '민족전선' 자체가 붕괴되었다.
 
대규모 파병과 정치적 간섭으로 인민민주당 정권의 명맥을 간신히 유지해주던 소련에서 1985년 3월 11일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된 미하일 고르바쵸프(Mikhail Gorbachev)는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1988년 5월 15일부터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을 단계적으로 철군하기 시작하여 1989년 2월 15일 철군을 완료하였다.
 
1991년 12월 23일에 일어난 소련 붕괴와 함께 아프가니스탄 사회변혁도 종말을 고했다. 1980년대 후반기에 당원수가 160,000명이나 되었던 인민민주당은 1992년 3월에 맥없이 와해되었고,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은 1992년 4월 28일에 자기 존재를 끝마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불가피한 당권경쟁인가, 와해에 이르는 적대적 파쟁인가

인민민주당이 와해된 때로부터 꼭 20년이 지났다. 그런데 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오늘도 여전히 미국의 무력강점과 친미예속세력의 집권이 지속되는 아프가니스탄의 절망적 상황은 그 땅에서 사회변혁의 전망을 완전히 앗아가버린 듯하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진보정당의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기 나라 현실에 맞지 않는, 다른 나라에서 직수입한 급진주의 변혁노선을 떠받드는 급진주의 좌익정파가 당권을 장악하고 사회변혁을 급진적으로 밀어붙이면, 변혁의 주인으로 나서야 할 대중으로부터 외면과 배척을 받아 결국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이 좌절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의 좌경급진주의 오류가 말해주는 뼈저린 실패교훈이다.
 
두 단계 사회변혁노선을 추구하는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좌경급진주의 함정을 뛰어넘어 더 많은 진보정치역량을 묶어세우고 더 많은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 통합진보당을 건설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식 사회변혁의 머나먼 길에서 첫 걸음에 지나지 않는다.

통합진보당 깃발 아래 여러 정파들과 계파들이 결집하였으니 그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하다. 당권을 둘러싼 정파적, 계파적 내부갈등은 어느 정당에서나 일어날 수 있지만, 그런 내부갈등이 조절기능을 상실한 채 적대적 파쟁으로 변질, 악화되면 당의 역량이 급속히 소진되어 결국 당 자체가 와해될 수밖에 없다.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에서 당권경쟁을 벌였던 깃발파와 대중파가 조절기능을 상실한 내부파쟁으로 역량을 소모한 나머지 결국 와해되어버린 쓰라린 교훈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여긴다면, 그것은 통합진보당에 내재된 내부갈등요인을 너무 가볍게 보는 오판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최근 통합진보당이 드러낸 내부갈등은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창당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정당이 정적들과 격돌할 총선을 앞두고 내부갈등을 드러낸 것은 실로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통합진보당에 결집한 진보정치활동가들은 당내의 여러 정파 및 계파들의 당권경쟁이 자해적 파쟁으로 변질, 악화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와 날카로운 경각심을 가져야 하며, 당권경쟁을 합리적으로 조절하는 순기능과 상호타협적 분위기를 의식적으로, 부단히 강화할 필요가 있다. 통합진보당에서 당권경쟁은 불가피하지만, 적대적 파쟁은 와해의 지름길이다. (2012년 2월 10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