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64)

 
실업공포 속에 무너지는 '인민의 가정'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통계청이 만들어낸 신기루

자본가 1명과 노동자 99명이 사는 것으로 가상한 어떤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가의 소득이 노동자의 소득보다 100배가 많다고 가정해보자. 자산격차는 따지지 않고, 소득격차만 따졌을 때, 100배의 소득격차가 생긴 그 가상사회에서 자본가 1명의 소득이 1,000원이면, 노동자 99명은 각자 10원의 소득밖에 얻지 못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1인당 국민소득은 100배의 소득격차를 50배의 소득격차로 완화시켜주는 식으로 엉뚱하게 산정된다. 노동자 한 사람의 실제소득은 10원밖에 안 되는 데, 1인당 국민소득은 19.9원이라는 부풀려진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1인당 국민소득을 미국의 달러화로 환산하여 발표하기 때문에, 부풀려진 결과에 '환율효과'까지 덧씌워진다. 예컨대, 수출이 늘어나 경상수지에서 흑자를 보면, 외국계 자본의 국내투자가 늘어나 국내시장으로 달러가 쏟아져 들어오므로 자본수지에서도 흑자가 나고, 그에 따라 환율이 떨어지게 된다.

환율하락이란 달러화 가치에 대한 원화 가치가 올라간다는 뜻이므로, 1인당 국민소득을 달러로 표시할 때 실제보다 더 많아 표시되어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수출이 늘어나고 외국계 자본의 국내투자가 늘어나 달러화가 넘쳐날수록 1인당 국민소득은 실제보다 훨씬 더 크게 부풀려진 신기루로 변하는 것이다.

친자본 반노동 정권은 통계청을 만들어놓고, 국민소득을 실제보다 크게 부풀린 신기루를 만들어내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감쪽같이 속인다. 그러므로 국내총생산이니 1인당 국민소득이니 하는 따위의 각종 통계수치들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민생경제현실을 배반한 허구적 숫자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친자본 반노동 정권은 그런 허구적 숫자놀이로 국민을 기만하고 세상을 속이면서 극단적 빈부격차와 사회적 양극화, 다시 말해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존재하는 계급모순을 은폐하는 것이다.

실업률 변동을 주목하라

그러면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민생경제현실을 지표로 가늠할 만한 다른 방도는 없을까? 민생경제현실을 현실에 맞게 표시하는 지표를 손꼽으면, 실업률이 손꼽힌다.

국내총생산이니 1인당 국민소득이니 하는 허구적 숫자놀이에 속아넘어갈 것이 아니라, 실업률 변동을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명백하게도, 실업률이 높으면 국민경제가 그만큼 불안정한 상태에 빠진 것이고, 반대로 실업률이 낮으면 국민경제가 그만큼 안정적으로 발전된 것이다.

만일 실업률이 0%로 떨어져 완전고용이 실현되면, 그런 나라야말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실업공포와 궁핍고통에서 벗어난 가장 훌륭한 선진국일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계급모순이 존재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경제가 발전할수록 실업률이 등락을 거듭하면서 지속적으로 올라갈 뿐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출증대로 환율이 떨어지면 기업의 수출경쟁력이 함께 떨어지고, 달러화로 표시된 임금은 반대로 올라가므로 자본가는 생산을 감축할 수밖에 없고 생산감축조치로 노동자를 해고하여 실업률을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정반대의 원인으로 실업률이 오르고 있다. 자본주의세계시장에 경제공황이 몰아치는 지금, 자본가는 수출증대가 아니라 급격한 수출위축으로 생산을 대폭감축하거나 파산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노동자를 대량해고하여 실업률을 가파르게 끌어올리는 것이다.

수출증대를 원인으로 실업률이 높아지는 것보다 수출위축을 원인으로 실업률이 높아지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하고 치명적인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땅의 통계청은 매달 중순에 실업률을 발표한다. 통계청의 실업률은 어떻게 산출되는 것일까? 통계청은 매달 중순 1주간 동안 약 32,000가구를 표본으로 삼아 실업률을 조사하고 그 결과에 따라 월별 실업률을 발표한다.

그런데 통계청은 실업률을 조사할 때 경제활동인구와 비경제활동인구를 구분한다. 경제활동인구에는 취업자와 실업자가 포함되고, 비경제활동인구에는 그냥 쉬는 사람, 가사와 육아를 맡아보는 사람, 연로하여 일자리를 포기한 사람 등이 포함된다.

고시학원, 직업훈련기관 등에 다니거나 또는 홀로 취업준비를 하는 취업준비자는 명백한 실업자인데도, 통계청은 그들을 실업자로 분류하지 않고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한다. 통계청이 조작해놓은 실업자 개념은 자기들이 매달 중순 조사활동을 할 때, 그 이전 4주간 동안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한 사람들만 포함하는 매우 이상한 개념이다.

2011년 1월 현재 4주간 동안 구직활동을 포기한, 이 땅의 15세 이상 34세 이하 청년인구는 103만2,000명인데, 통계청은 그들을 실업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통계청이 이처럼 엉터리 통계기준을 꺼내놓으니까, 통계상 비경제활동인구가 엄청나게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2011년 1분기에 비경제활동인구는 1,639만2,000명이나 되었다.

통계청이 실업자 개념을 엉터리로 조작해놓았기 때문에, 2011년에 고용률은 58%대로 떨어졌는데도, 공식실업률은 연간 평균 3.4%에 머물러 있는, 앞뒤가 맞지 않는 통계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2012년 1월 19일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사실상 실업자'를 포함시켜 다시 산출하면, 2011년 실질실업률은 3.4%에서 11.3%로 3배 이상 급증한다고 한다.

'인민의 가정'은 무너지고 있다

'복지국가'라는 스웨덴의 실업률은 어떠할까? 스웨덴이 '복지국가'이므로 실업률이 당연히 낮을 것이라는 예상은 깨져나간다. 스웨덴의 실업률 변동추이를 보면, 2010년 7월에는 9.5%, 2011년 7월에는 8.8%, 2012년 1월 현재는 7.5%다. 이것은 공식실업률이다.

이 땅의 실질실업률이 공식실업률의 3배라고 하니, 스웨덴의 실질실업률도 그 정도 높지 않을까? 그렇다면 2012년 1월 현재 스웨덴의 실질실업률은 20% 이상으로 추산된다. 놀랍게도, 스웨덴은 이 땅의 실질실업률보다 근 2배나 높은 대량실업국가인 것이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누가 대량실업국가를 복지국가라고 부르면, 아이들이 들어도 웃을 것이다.

스웨덴은 1970년대에 유럽에서 국민소득이 가장 높은 고소득국가들 가운데 하나였고, 1980년대에는 실업률이 2-3% 선으로 떨어졌다. 그처럼 잘 나가던 복지국가 스웨덴이 어쩌다가 이 지경으로 몰락하였을까?

몰락의 결정적인 요인은, 스웨덴 경제가 파탄위기에 빠진 데 있다. 스웨덴 경제는 이 땅의 경제와 마찬가지로 수출주도형 시장경제다. 독일, 미국, 노르웨이, 영국, 덴마크, 핀란드 등이 스웨덴의 주요 무역대상국이다.

그런데 스웨덴의 수출주도형 시장경제가 파탄위기에 빠진 1990년부터 1993년 사이에 공식실업률은 평균 8%를 넘어섰다. 스웨덴 정부의 재정적자는 1993년에 국내총생산의 12%를 차지하였는데, 1994년에는 15%로 늘어났다.

스웨덴의 공공부채는 1990년에 국내총생산의 43%를 차지하였는데, 1994년에는 78%로 폭증하였다. 당시 스웨덴 정부는 사실상 파산당한 자국 은행들을 구하기 위해 183억 달러를 긴급투입하여 파탄위기를 간신히 모면했다.

스웨덴은 경제파탄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철강, 종이, 펄프 같은 원자재 수출 대신에 서비스, 정보통신, 무선통신 등의 부문에서 수출에 주력하였으나, 그만큼 수입이 더 늘어나는 바람에 수출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줄어들었다.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수출액은 4%가 줄었고, 수입액은 11%가 늘어나는 바람에 무역수지는 13%가 줄었다.
 
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말하는 복지라는 것은 조세제도에 의존하는 복지다. 그들은 복지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혈세를 짜내는 증세조치를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이를테면, 스웨덴 노동자는 자기가 받는 임금의 60%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2007년을 기준으로 스웨덴의 세수총액은 국내총생산의 51.1%를 차지한다. 스웨덴식 '복지국가'는 혈세국가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그처럼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려면 당연히 국민소득이 증가해야 하고, 국민소득이 증가하려면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요컨대, 스웨덴식 '복지국가'는 안정적 경제성장→국민소득 증가→증세→복지정책 유지로 연속되는 선순환과정 위에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스웨덴의 수출주도형 경제는 성장하기는커녕 차츰 쇠락할 운명에 처해 있다. 바로 이것이 스웨덴식 '복지국가'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중간지대'를 선택했던 스웨덴 사회민주당이 1932년부터 1976년까지 장기집권하면서 건설해놓은 스웨덴식 '복지국가'를 '인민의 가정(Folkhemmet)'이라 부르며 세상에 자랑해왔지만, 이제는 아니다.

1932년부터 1949년까지 스웨덴 재정장관으로 재직하였던 케인즈주의자 에른스트 비그포르쓰(Ernst Wigforss, 1881-1977)와 1932년부터 1946년까지 스웨덴 총리로 재직하였던 사민주의자 페르 알빈 한쏜(Per Albin Hansson, 1885-1946)이 설계하였던 '인민의 가정'은 무너지고 있다.
 
물론 스웨덴만 그런 슬픈 운명에 처한 것이 아니다. 복지재정이 대략 국내총생산의 30%를 차지하는 서유럽 '복지국가'들이 모두 스웨덴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복지의 종착역'으로 달려가는 중이다.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 및 근로대중 사이에 조성된 계급모순을 청산하지 않고 적당히 완화시킨, 다시 말해서 빈부격차와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지 못한 자본주의사회에서 스웨덴식 '복지국가'는 환상이다. 그런 사회에서 복지는 경제성장기에 일시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 뿐이다.

현실이 이러한 데도, 서구중심주의에 도취되어 진보를 자처하는 이 땅의 일부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오늘도 스웨덴식 '복지국가'를 주문처럼 열심히 외우고 있다.
 
스웨덴식 '복지국가'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우리식의 진정한 복지를 추구할 수 있다. 우리식의 진정한 복지는 스웨덴의 '혈세정책'과 실패전철을 밟는 것이 아니라, 외국계 자본과 국내 재벌이 장악한 중요산업을 국유화하여 실현되는 것이다.

우리식 중요산업 국유화에 대해 간단히 말하면, 자본주의시장경제에서 이탈하여 오직 이 땅의 국민대중을 위해 사회적, 협동적으로 경영되고, 생산관리체계가 민주화된 국유기업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우리식 중요산업 국유화를 실현하여야 서로 돕고 한 가족처럼 화목하게 사는 '인민의 가정'을 이 땅에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2012년 1월 27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