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61)



전선은 사상계에도 형성되어야 한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사상의 빈곤에 시달리다

사람들이 흔히 학계라 부르는 지적 활동공간이 있다. 사람들은 사상과 지식을 구분하지 않지만, 원래 사상이란 지식의 세계관적 기초이므로 사상과 지식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객관세계에 대한 사람의 인식활동은 정보→지식→사상→세계관으로 체계화되고, 심화되고, 발전되어간다. 사람의 인식활동은 사상을 통해 정보와 지식을 받아들이고, 세계관을 통해 객관세계의 본질 및 사람 자신의 본성과 운명을 파악한다. 그러므로 사상부문의 지적 활동공간인 사상계는 다종다양한 일반지식을 다루는 지적 활동공간인 학계와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이 땅에서 아직 전쟁의 포성이 들리던 1953년 4월 서울에 창간되어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폭압의 공포를 들씌우던 1970년 5월까지 장준하 선생이 펴낸 '사상계'라는 월간지가 있었는데, 반공광신자들이 설치던 광란의 1960년대에 '사상계'는 월간지 '청맥'과 함께 진보적 사상운동의 한 축이었다. '사상계'와 '청맥'을 중심으로 전개된 진보적 사상운동의 역사적 경험은 사상계가 사회변혁운동이 진출해야 할 중요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무릇 사회변혁운동이란 진보적이고 변혁적인 사상이 수구적이고 반동적인 사상을 제압하고 척결하는 사상계의 치열한 투쟁 곧 사상운동이다. 사회변혁운동이 사상운동으로 되는 까닭은, 과학적 변혁담론이 진보적이고 변혁적인 사상을 뿌리로 하여 자라나기 때문이다. 뿌리가 있어야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진보적이고 변혁적인 사상이 정립되지 않으면 사회변혁운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뿌리 깊은 나무가 거목으로 커갈 수 있는 것처럼, 진보적이고 변혁적인 사상을 깊이 체득한 사회변혁운동이 실패와 침체를 모르고 성장할 수 있다.

다른 사회운동들과 달리, 낡은 세상을 새로운 세상으로 바꾸는 사회변혁운동은 오로지 사상운동에서 생성하고 발전하며, 오로지 사상운동에서 공급받은 동력으로 전진하고 투쟁하며, 오로지 사상의 힘으로 승리한다. 사회변혁운동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모체는 진보적이고 변혁적인 사상이며, 사회변혁운동을 전진시키는 동력원천은 사상운동이다. 낡고 썩은 세상을 새롭고 살맛나는 세상으로 바꾸는 변혁운동현장에서 사상활동의 숨결과 사상투쟁의 열기가 느껴져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땅에서 사상운동의 형편은 어떠한가? 선거전술과 복지담론이 곳곳에서 요란하고, 진보적 정권교체의 구호소리가 드높지만, 사상운동은 잠잠하다. 1960년대 이 땅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활발히 활동하였던 '사상계'와 '청맥' 같은 사상운동의 전략거점이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이 땅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늘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불행하다. 그것은 그들 자신이 겪는 불행이며 동시에 이 땅의 사회변혁운동에 찾아온 불행이다.

인쇄용지를 넉넉히 구하기 힘들어 애태우던 궁핍한 시절 1960년대 이 땅에서는 사상운동이 전개되었지만, 도서출판시대를 뛰어넘어 정보와 지식이 인터넷 공간에서 거의 무제한으로 양산되고 확산되는 정보화시대의 이 땅에서는 지금 사상운동이라는 말조차 생소한 느낌을 안겨주고 있다.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그들 자신이 미처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사상의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눈앞에서 진행되는 악순환

진보정치활동가들만 사상의 빈곤에 시달리는 게 아니라, 이 사회 전체가 사상의 빈곤에 빠져있다. 과학적 사고능력이 저하되고 선정적인 상품문화에 나포된 천박한 세태, 논리적 사고를 접어두고 장난기 어린 감성표출에 열광하는 세태, 읽을 만한 사회과학서적도 찾아보기 힘들지만, 사회과학서적을 읽는 사람을 시대에 뒤떨어진 바보처럼 취급하기 십상이고, '나가수'보다 조금 수준을 높여 '나꼼수'나 들여다보며 헐렁한 잡담을 즐기는 세태.

바로 그런 척박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사상의 빈곤이 사상적 우민화를 재촉하고, 사상적 우민화가 또 다시 사상의 빈곤을 한층 더 악화시키는 사상적 빈곤과 우민화의 악순환이 우리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다.

우민화의 극치는 미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갖가지 통계자료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놀랍게도 미국은 우민대국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미국식 자본주의가 3억 명에 이르는 미국 국민을 그저 웃고 즐기기에만 열중하는 우민으로 만들었다.

이를테면, 2009년 3월 <유럽통신휘보(European Journal of Communication>가 미국, 영국, 덴마크, 핀란드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탈레반이 무엇인지 아는 응답자는 미국인 58%, 덴마크인 68%, 영국인 75%, 핀란드인 76%로 나타났다. 또한 미국 일간지 <유에스에이 투데이> 2008년 11월 19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인 10명 가운데 7명은 역사지식에서 낙제점을 받는 무지를 드러냈다. <뉴욕타임스> 2009년 12월 10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인의 정보접수량이 지난 30년 동안 350%나 급증하였는데도, 미국인들은 탈레반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미국 역사에도 무지한 우민으로 전락하였다.

고도로 정보화된 나라에 사는 미국인들이 왜 우민으로 전락하였을까? 그 까닭은, 그들이 받아들이는 정보라는 것이 잡담 수준의 정보이기 때문이다. 기존 인쇄매체를 통한 정보접수량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미국에서 사는 미국인들은 지금 전자우편이나 휴대전화를 통해 일상대화나 잡담을 주고받거나 비디오게임을 즐기는데 열중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정보접수량의 55%를 차지한 것은 비디오게임 사용이었다. 각종 잡다한 정보들만 폭증하고, 지식과 사상은 실종되고, 천박하고 선정적인 상품문화가 압도적인 사상정신적 황폐화, 바로 이것이 오늘 미국 사회의 숨막히는 현실이다.

그처럼 천박하고 선정적인 미국의 상품문화가 1980년대부터 이 땅에 밀물처럼 몰려와 이 땅의 국민대중을 우민화하였다. 1970년대부터 이 땅의 옷차림과 대중문화가 차츰 미국화되더니, 김영삼 정권이 '세계화 정책'을 밀어붙인 1990년대 이후에는 이 땅의 식생활과 언어생활과 문화생활과 사고방식마저 미국화되어버렸다.

<연합뉴스> 2009년 4월 6일 보도에 따르면, 이 땅의 국민들 가운데 6.25전쟁이 어느 해에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10대 응답자의 56.8%, 20대 응답자의 56.5%, 30대 응답자의 28.7%, 40대 응답자의 23.0%의 비율로 나타났다. 나이가 젊을수록, 다시 말해서 미국의 상품문화에 노출되고 감염된 정도가 심한 젊은 세대일수록 우민화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천박하고 선정적인 미국식 상품문화의 무분별한 도입이 이 땅의 국민대중을 우민화하고, 사상정신적 황폐화를 불러왔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불행하게도, 이 땅은 우민대국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반제자주사상 결핍과 자유주의 과잉

이 땅의 지식인들이 활동하는 학계는 어떠할까? 누구나 아는 것처럼, 이 땅의 학계는 미국-유럽 중심주의에 도취되었다. 이 땅의 학계가 미국-유럽 중심주의에 도취된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려면, 미국과 유럽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 땅의 지식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연합뉴스> 2011년 9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1년까지 4년 동안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 땅의 지식인들 가운데서 58.5%가 미국에서, 14.7%가 일본에서, 6%가 영국에서, 5.8%가 중국에서, 5.7%가 독일에서 각각 박사학위를 받았다. 무려 70.2%가 미국과 유럽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 땅의 지식인들 가운데서 사회과학부문이 32.2%, 공학부문이 24.1%, 인문학부문이 18.4%, 자연과학부문이 11.8%, 예술 및 체육부문이 5%로 나타났다.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 땅의 지식인들 가운데서 무려 50.6%가 사상부문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지식인들인 것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 땅에 들어와 활동하는 진보적 지식인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거의 모두 미국-유럽 중심주의에 도취되었다. 미국-유럽 중심주의에 도취된 그들은 서구식 변혁담론을 논하고, 서구식 사회주의담론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런 그들의 시야에는 우리식 변혁담론이 변혁담론이 아닌 것처럼 보이고, 우리식 사회주의담론이 사회주의담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서구식 변혁담론과 서구식 사회주의담론이 벗지 못하는 사상적 질곡이 있으니, 그것은 반제자주사상 결핍과 자유주의 과잉이다. 반제자주사상이 결핍된 진보적 지식인은 반제자주사상과 민족주의를 혼동하여 반제자주사상에 거부감을 드러내고, 자유주의가 과잉된 진보적 지식인은 집단주의와 전체주의를 혼동하여 집단주의를 범죄시한다.

반제자주사상 결핍과 자유주의 과잉이라는 질곡에 갇힌 이 땅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남측의 우리식 변혁담론을 좌파민족주의담론으로 폄하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으며, 북측의 우리식 사회주의를 전체주의와 세습이라고 비난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에서 유학하는 동안 서구 사상계의 반제자주사상 결핍증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감염된 이 땅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근대국가건설이 계급투쟁의 전취물이라는 유럽의 역사적 경험만 중시할 뿐이고, 근대국가건설이 식민지민족해방운동의 전취물이라는 아시아의 역사적 경험은 외면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반제자주사상과 민족주의를 혼동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식 변혁담론이 왜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과 자주적 평화통일 강령을 실현하는 변혁단계를 제시하였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식 변혁담론이 왜 통합진보당 같은 진보적 대중정당을 건설하는 당건설이론을 제시하였는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의 사상적 질곡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서구 사상계의 자유주의 전통을 모방, 답습한 이 땅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계급소멸과 국가조락 이후의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주의를 절대기준으로 설정해놓기 때문에, 사회주의국가가 계급소멸과 함께 조락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주의국가가 왜 반제자주화의 보루가 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사회주의국가가 왜 집단주의 운명공동체로 건설되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수구적 지식인들과 똑같이 전체주의론과 세습론을 늘어놓는다.

이 땅의 진보적 지식인들 가운데서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과 자주적 평화통일 강령을 제시한 우리식 변혁담론을 논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고, 우리식 사회주의에서 말하는 반제자주사상과 집단주의를 이해하는 사람도 또한 찾아보기 힘들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대학가에서 사회과학서점이 자취를 감추었고, 진보정치활동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학습하고 토론하는 소리가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것은 진보적 사상운동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가 조성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진보적 사상운동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그 장애는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반드시 넘어야 할 걸림돌 가운데 하나다. 이 땅의 사상계에 전선을 형성할 필요가 제기되었다.

반동적 시장주의와 친미굴종사상의 어둠을 뚫고 진보적 민주주의와 반제자주사상을 전파할 사상전선을 형성하고, 우리식 변혁담론의 과학적 우월성과 위력적 실천으로 노쇠한 서구식 변혁담론을 제압할 사상전선을 형성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이 땅에서 변혁과 진보를 추구하는 문필가, 지식인, 연구자, 언론인들이 펼쳐야 할 진보적 사상운동의 당면과제다. 사회변혁운동에서 전환을 일으켜야 할 2012년 새해는 진보정치활동가들에게 또 하나 당면과제를 안겨주었다. (2012년 1월 6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