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교포 손원태와 한 담화 

1991년 5월 15일, 31일, 6월 2일 

손원태선생이 부인과 함께 먼길을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겠습니다.

선생과 헤여진지 60여년만에 이렇게 다시 만나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선생도 이제는 여든을 바라보는 고령이지만 어렸을 때의 모습이 좀 남아있어 알아보겠습니다. 나는 선생을 만나 감회깊은 회포를 나누게 된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선생은 일제시기에 고향을 떠나 이국땅에서 살면서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세계적으로 제일 간악한것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였습니다. 일제는 조선사람들이 조선말도 하지 못하게 하였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때 조선사람들은 자기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쳐야 밥벌이도 할수 있었고 학교에도 갈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사람들은 민족적절개를 꿋꿋이 지켜왔습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조선사람들이 민족적절개를 지켜온것은 참으로 장한 일입니다. 나는 그처럼 어렵고 복잡한 환경속에서도 조선독립운동에 한생을 바친 손정도목사의 아들답게 민족의 넋을 간직하고 살아온 선생을 만나게 되여 더없이 기쁩니다. 만일 선생이 민족적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살아왔더라면 우리들이 이처럼 기쁜 마음으로 만나지 못할것입니다.

선생이 나를 늘 그리워하였다고 하는데 나 역시 선생이 보고싶었습니다. 그래서 여러곳에 수소문해보았으나 선생을 찾을수 없었습니다. 나는 미국에서 사는 김성락목사가 조국에 왔을 때에도 그에게 선생과 선생의 누이동생 손인실의 소식을 물어보았습니다.

김성락목사의 아버지는 3. 1인민봉기 지도자의 한사람이였습니다. 김성락목사는 우리 아버지와 평양숭실중학교에 같이 다녔기때문에 나는 오래전부터 그를 알고있었습니다. 그는 해방전에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는 리유로 박해를 받다가 그후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국적을 바꾼것 같습니다. 김성락목사는 1981년과 1982년 두번에 걸쳐 조국을 방문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그를 만나 담화를 하면서 선생이 미국에서 살고있지 않는가고 물었더니 자기가 목사촌에서 미국목사들과 같이 살고있다고 하면서 선생의 행처에 대하여 잘 모르겠는데 후에 알아서 소식을 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김성락목사는 선생에 대해서는 몰라도 손정도목사에 대해서는 알고있었습니다. 그후에 그가 세상을 떠나다보니 선생의 행처를 알아서 전하지 못한것 같습니다.

선생이 오래전부터 나를 찾아올 생각을 하였으며 4년전에는 어느 한 나라 주재 우리 대사관일군을 만나 나와 연고관계가 있다는것을 이야기하고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있었습니다. 아마 그 일군이 우리들사이의 내막을 잘 모르다보니 보고를 하지 않은것 같습니다. 내가 그 편지를 받아보았더라면 선생이 좀더 일찌기 조국에 올수 있었을것입니다.

이번에 해당 부문에서 보고해서야 선생에 대하여 알게 되였습니다. 얼마전에 해당 부문에서 보고한데 의하면 지난 4월에 우리 나라에 왔던 재미조선인축하단 단장이 조국을 떠날 림박에 자기를 안내하던 우리 일군에게 선생의 편지를 주었다고 합니다. 해당 부문에서는 그 편지가 나와 관계되는 편지이므로 나에게 인차 보고하고 선생에게 초청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우리 일군들이 나에게서 손정도목사와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때문에 선생에게 초청장을 보낸것 같습니다. 나는 해당 부문에서 선생에게 초청장을 보냈다고 하기에 아주 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선생이 조국에 온다는 소식을 받고 기쁜 마음을 금할수 없었습니다.

선생과 이렇게 만나고보니 선생의 아버지인 손정도목사에 대한 생각이 더 나고 길림시절에 있었던 여러가지 일들이 감회깊이 추억됩니다. 손목사는 내가 길림에서 활동할 때 나를 각별히 대해주고 물심량면으로 적극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해방후부터 오늘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손목사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하군 합니다.

손목사는 우리 아버지와 친한 사이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평양숭실중학교에 다니실 때부터 손목사를 잘 알고있은것 같습니다. 그때 평양에 광성중학교가 있었고 그 맞은편에 녀자고등보통학교가 있었습니다. 광성중학교는 빨간 벽돌로 지었는데 그 건물이 해방후에도 있었습니다. 해방전에 평양에는 대학이 없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평양에서 《105인사건》 때 일제경찰에 체포되였는데 그때 손목사도 감옥에 잡혀들어갔습니다. 일제경찰놈들은 먼저 잡혀들어간 사람들이 비밀을 대지 않아 마지막에 체포된 우리 아버지에게 비밀을 대라고 혹독한 고문을 들이댔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매를 제일 많이 맞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때부터 병을 얻어가지고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감옥에서 나온 다음 중강으로 가시였습니다. 중강에는 강기락을 비롯하여 아버지의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거기에서 오동진과 손목사를 비롯한 여러 동지들과 련계를 가지고 활동하시였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우리 아버지와 친한 사람이 일제경찰의 요시찰명부에 아버지의 이름이 있다는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동북지방인 림강으로 가시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거기에서 《순천의원》을 차려놓고 독립운동자들과 련계를 가지면서 혁명활동을 하시였습니다. 그런데 림강에서도 적들의 감시가 아주 심하였습니다. 아버지는 할수없이 림강을 떠나 장백현 팔도구로 가시였습니다. 팔도구는 김형직군 맞은편인데 거기에는 조선사람들이 많이 살고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곳에서도 의원을 하면서 혁명활동을 하시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평양감옥에 있을 때 자습으로 의술을 배웠으며 그후에 동지들이 구해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증을 가지고 의원을 차려놓았습니다. 그때 우리 아버지는 조선사람들에게서 비싼 약만 돈을 좀 받고 다른 약은 돈을 받지 않고 치료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조선사람들과 독립운동자들이 우리 아버지를 찾아왔으며 아버지는 그들과 련계를 가지고 독립운동을 벌렸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8살 때 중국에 가서 한 6개월간 중국사람한테서 중국말을 배운 다음 소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나는 팔도구에서 소학교를 마쳤습니다. 소학교를 마치자 아버지는 나에게 나라를 독립하자면 조국의 현실을 잘 알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조국에 나가 공부하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12살 때 조국에 나와 창덕학교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내가 창덕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기 시작한지 거의 2년이 되였을 때 아버지가 다시 일제경찰에 체포되였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독립운동자들과 련계를 맺기 위하여 포평에 나왔다가 일제경찰에 체포되였는데 호송도중에 동지들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시였습니다. 그 과정에 아버지는 심한 동상을 입으시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무송에서 활동하시면서 1925년에 앓는 몸으로 조선독립운동의 분렬을 막고 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화전과 길림, 류하, 삼원포, 홍경을 거쳐 남만일대를 한바퀴 돌아오시였습니다. 길림에 가시였을 때 우리 아버지는 손목사를 만나보시였습니다. 그때의 과로로 하여 우리 아버지의 병세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1926년에 세상을 떠나시였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그해 여름에 오동진과 량세봉, 장철호, 김시우를 비롯한 아버지 친우들의 주선으로 화전에 있는 화성의숙에 입학하였습니다. 화성의숙은 독립군지휘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운영하는 학교였는데 최동오가 숙장을 하였습니다. 화성의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독립군에서 추천되여온 청년들이였으므로 대체로 나이가 든 사람들이였습니다. 나는 김시우의 집에서 밥을 먹으며 화성의숙에 다녔습니다. 김시우, 강제하를 비롯하여 화전에 있던 독립운동자들은 대부분이 《상해림시정부》와도 관계가 있었고 《국민부》와도 관계가 있던 사람들인데 모두 우리 아버지와 친한 사이였습니다. 강제하는 《정의부》 재정부장을 하였습니다. 나는 화성의숙에 다닐 때 그의 집에 자주 다녔습니다. 강제하의 아들 강병선은 타도제국주의동맹 성원으로서 활동하였습니다. 그후 그는 북만에서 활동하다가 사망하였습니다. 강병선의 안해는 나의 생일 79돐 때 편지와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화성의숙 숙장이였던 최동오의 아들 최덕신은 미국에서 살고있을 때 조국을 여러번 방문하였습니다. 한번은 그가 나에게 이제는 나이가 많은데 이국에서 살다가 죽으면 이국땅에 묻히게 된다, 조국에 와서 살다가 조국땅에 묻히고싶다고 하면서 조국에 오면 골프장주인이나 시켜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조국에 오겠으면 오라, 조국에 오면 일자리는 얼마든지 있을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후 그는 조국에 와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헌신적으로 사업하다가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병은 취장암이였습니다. 취장암은 고치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는 독일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사는 과정에 병에 걸렸습니다. 그의 병을 고쳐주려고 애를 많이 썼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그가 다른 나라에 가서 치료를 받도록 하였지만 그 나라 사람들도 그의 병을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최덕신선생의 부인이 선생에게 조국을 다시 방문하면 자기집에 또 오라고 하였다는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올해에도 최덕신선생의 부인을 만나 그와 함께 식사를 한 일이 있습니다. 그는 류동열의 딸입니다. 류동열은 민족주의운동을 하면서 상해에서 많이 활동하였습니다.

나는 화성의숙에서 몇달동안 공부하여보니 교육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화성의숙을 그만두고 무송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씀드리고 길림으로 갔습니다.

나는 길림에 가서 우리 아버지와 친한 사이였고 련계가 깊었던 손목사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손목사의 집은 길림시 우마항에 있었습니다. 내가 찾아가니 손목사는 몹시 반가와하였습니다. 나는 길림에서 아버지의 친구들인 독립운동자들의 소개로 길림육문중학교에서 영어교원을 하는 김강을 만났습니다. 나는 김강의 소개로 시험도 치지 않고 길림육문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한학년을 뛰여넘어 2학년에 편입하였습니다.

길림육문중학교는 유지들이 운영하는 사립학교였지만 길림시에서 제일 괜찮은 학교였습니다. 길림육문중학교 교장은 주은래와 중학교동창생이고 중국민족주의좌파에 속해있던 리광한이라는 사람이였는데 그는 조선인학생가운데서도 나를 특별히 사랑하였습니다. 길림시에서 길림육문중학교 다음으로 괜찮은 학교는 기독교신자들이 운영하는 문광중학교였습니다.

김강은 그후 길림제5중학교에 가서 영어교원을 하였습니다. 그는 교원을 하면서 중국사람들로부터 조선사람이라고 수모를 받았습니다. 나도 그때 영어를 배울수 있었지만 중국사람들이 조선사람을 깔보기때문에 배우지 않았습니다. 김강에 대해서는 선생의 형인 손원일도 잘 알것입니다. 최덕신의 말에 의하면 김강은 해방후에 남조선에 가서 해군영어통역원을 하였다고 합니다. 길림육문중학교시절에 나는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였습니다.

나는 길림육문중학교에 다닐 때 손목사의 집에 여러번 갔댔습니다. 그때마다 손목사는 나를 친절히 대해주었고 선생의 어머니도 나를 극진히 사랑해주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선생의 어머니가 해준 쫀드기떡을 먹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느날 내가 신영근과 같이 손목사의 집에 가니 선생의 어머니가 북산공원에서 손인실이 뜯어온 쫀드기풀로 만든 떡이라고 하면서 먹어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쫀드기떡을 먹으면서 맛있다고 하였더니 선생의 어머니는 평양에 가면 쫀드기풀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쫀드기풀은 잎에 보드라운 털이 있는데 냄새도 없고 독도 없습니다. 해방후에 나는 선생의 어머니가 쫀드기떡을 해주면서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서 우리 사람들에게 쫀드기떡을 만들어보라고 하였더니 그들은 쫀드기떡이라는 말조차 몰랐습니다. 나는 선생의 어머니가 해준 쫀드기떡을 먹어본 다음 지금까지 60여년이 지나도록 그 떡을 먹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선생이 손인실을 만나면 그에게 그전에 길림에서 살 때 쫀드기떡을 해먹던 일을 물어보면 아마 그가 기억할수 있을것입니다. 손인실은 그때 있었던 여러가지 일을 많이 알수 있을것입니다. 그는 아주 똑똑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나를 많이 찾아다녔습니다.

손목사네 집에서는 집안에 토끼를 놓아길렀습니다. 손목사네 집에는 흰토끼와 검은토끼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색의 토끼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신영근과 같이 손목사의 집에 갔더니 선생의 어머니가 토끼를 잡아 두부장을 해주었습니다. 토끼고기를 넣고 만든 두부장이 별맛이였는데 닭고기료리와 다름없었습니다. 나는 선생의 어머니가 토끼고기를 넣고 만든 두부장을 둬번 먹어보았습니다.

해방후에 나는 그전에 손목사네 집에서 토끼를 기르던것을 본 생각이 나서 우리 사람들에게 토끼를 집안에 놓아길러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지린내가 나서 못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손목사네 집에서 토끼를 기르는것을 본 생각은 나는데 어떤 방법으로 집안에서 토끼를 놓아길렀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나는 손목사의 집에 가서 까나리반찬을 먹은 일도 있습니다. 까나리는 황해도사람들이 많이 먹습니다. 그때 중국 동북지방에서 까나리를 먹어본다는것이 쉬운 일이 아니였습니다. 장철호의 집에 가서도 까나리반찬을 먹어보았습니다. 장철호의 집에서는 내가 까나리를 좋아한다는것을 알고 내가 가면 까나리반찬을 내놓군하였습니다.

나는 장철호, 오동진을 비롯한 아버지친구들의 집에 많이 다녔는데 그들은 우리 아버지를 생각하여 나를 극진히 대해주었습니다.

장철호에게는 윤선호와 윤양호라는 두 딸이 있었는데 모두 이붓딸이였습니다. 윤선호의 친아버지는 상해에서 길림에 와 살다가 병으로 죽었습니다. 윤선호의 어머니는 남편이 죽은 다음 혼자 살기가 힘들어 그때 독립군중대장이였던 장철호와 결혼하였습니다. 윤선호는 일본 도꾜에 가서 음악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는 인물도 잘나고 피아노도 잘 쳤습니다. 해방후에 나는 윤선호를 만나보았습니다. 그는 우리 집에 자주 놀러다녔습니다.

선생이 내가 기억력이 좋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도 길림시절에 있었던 일들을 곰곰히 되새겨보면 사람들의 이름까지도 다 생각납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길림에서 김옥분이라는 녀자가 남편과 감격적으로 만나던 일입니다. 원래 김옥분과 그의 남편되는 사람의 부모들은 경상남도 김해에서 살았는데 그들은 부모들에 의하여 지복결혼을 한 사이였습니다. 지복결혼이라는것은 배속에 있는 아이들을 놓고 부모들이 미리 약속하여 결혼하는것을 말합니다. 그전에 우리 나라에는 가까운 사람들끼리 아이가 어머니의 배속에 있을 때 한 집에서는 남자애를 낳을것을 예견하고 다른 집에서는 녀자애를 낳을것을 예견하여 결혼을 약속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만일 두 집에서 다 남자를 낳든가 녀자를 낳으면 의형제를 맺어주었습니다. 김옥분이 8살 나던 해에 그의 부모들이 살길을 찾아 압록강을 건넜는데 생활이 너무 어려워 단동에서 딸을 어느 중국녀자에게 팔았다고 합니다. 김옥분의 어머니는 딸과 헤여질 때 그에게 절반 남은 명주수건을 주면서 이 명주수건은 네가 지복결혼을 하였다는 표적인데 절반은 남편이 가지고있으니 큰 다음에 이것을 가지고 남편을 찾으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김옥분은 중국녀자한테서 창시를 배워가지고 여러 지방에 다니면서 공연을 하였습니다. 창시는 한문자로 부를 창자에 희롱 희자를 씁니다. 창시는 경극이라고도 하는데 청나라때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창시를 아주 좋아하였습니다. 김옥분은 키가 큰 녀자였는데 창시를 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신문들에 그의 이름이 여러번 소개되였습니다. 김옥분의 남편되는 사람은 최아무개였는데 부모를 따라 일찌기 길림에 와서 살면서 문광중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때 삼풍려관곁에 태풍합정미소가 있었고 조양문밖에 정미소가 또하나 있었는데 그 정미소가 최아무개의 아버지가 차려놓은것이였습니다. 나는 그가 살던 집은 생각나지만 이름은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김옥분은 장춘을 비롯하여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창시공연을 하였는데 그때마다 조선사람들을 찾아가 자기 남편되는 사람의 행처를 알아보군하였습니다. 한번은 그가 길림에 와서 창시공연을 하였습니다. 나는 길림육문중학교와 문광중학교의 여러 학생들과 같이 가서 구경하였는데 김옥분이 창시를 아주 잘하였습니다. 우리가 창시공연을 본 다음 음식점에 들려 우동을 사먹고있었는데 그가 거기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가 중국녀자인줄 알고 조선말로 창시를 아주 잘한다고 하였는데 우리곁에 와서 당신들은 조선사람인가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부산자를 입고있었지만 조선말을 하였기때문에 그가 인차 조선사람이라는것을 알아보았던것 같습니다. 우리가 조선사람이라고 하자 그는 자기 남편되는 사람과 그의 아버지 이름을 부르면서 그런 사람을 모르는가고 하였습니다. 마침 그자리에는 그의 남편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그 이름이 자기와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옥분은 남편되는 사람을 와락 그러안고 너무 기뻐서 소리내여 울었습니다. 8살 때 헤여졌다가 18살에 만났으니 결국 10년만에 다시 만나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김옥분을 키운 중국녀자가 들어와서 무엇때문에 자기 딸을 울리는가고 벅적 떠들기때문에 우리는 음식점을 나오고말았습니다. 그후에 김옥분은 남편되는 사람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남편되는 사람의 부모들은 그가 배우생활을 한다고 하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김옥분은 자기가 배우생활은 하지만 정조는 지키고있다고 하면서 중국녀자한테서 자기를 빼내려면 돈을 내야 하는데 그 돈은 자기가 마련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후부터 공연을 하면서 번 돈을 중국녀자에게 다 주지 않고 누구도 모르게 화분에 조금씩 감추어두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 남편되는 사람은 김옥분과 같이 살것을 결심하고 중국녀자를 찾아가 돈을 물어주고 그를 데려왔습니다. 그때까지 그의 남편되는 사람은 장가를 가지 않고있었는데 이름난 녀자를 안해로 맞게 되였습니다. 선생은 그때 베이징에 있었기때문에 소설같은 이 사실을 잘 모를것입니다.

선생도 젊었을 때 부인의 이름과 나이도 모르고 약혼하였다고 하는데 아마 어머니가 배필을 무어주었을것입니다. 어머니가 정해준 녀자와 결혼하였으니 선생은 복을 많이 받을것입니다.

선생의 부인이 이번에 나를 만나게 된것은 선생에게 시집을 왔기때문이라고 하는데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이 화목하여야 행복합니다. 그래서 나는 젊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가화만사성》이라고 말하여주군 합니다. 《가화만사성》이라는것은 가정이 화목하여야 만가지 일이 다 잘된다는 뜻입니다.

선생이 길림에서 살 때 같이 놀던 리동선이 생각난다고 하는데 그는 삼풍려관집 둘째아들입니다. 리동선은 리동화의 동생입니다. 리동선의 누이인 리경은은 안붕에게 시집갔습니다. 안붕과 박훈은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이였는데 그들이 잘 싸웠습니다. 그때 황포군관학교 교장은 장개석이고 정치부주임은 주은래였습니다. 그 학교에 조선청년들이 많았습니다. 광주폭동도 황포군관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되여 일으켰습니다. 안붕과 박훈은 광주폭동에 참가하였다가 폭동이 실패하자 도망쳐온 사람들입니다. 안붕은 후에 소식이 없는것을 보면 일제놈들에게 체포되여 희생된것 같습니다. 박훈은 혁명영화 《조선의 별》에 나오는 박송입니다. 그는 싸움할 때 두손에 권총을 쥐고 쏘군하였는데 총을 아주 잘 쐈습니다.

선생이 내가 길림육문중학교에 다닐 때 다른 학생들보다 키도 크고 인물도 잘 생겨 다른 사람들의 눈에 인차 띠웠다고 하는데 나는 체격이 남달리 컸기때문에 지하혁명투쟁을 할 때 위장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중국반동군벌들은 나를 잡으려고 체격이 큰 사람들을 다 단속하였습니다.

나는 길림시에서 조선인길림소년회와 조선인류길학우회를 조직하고 지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실지로는 그 조직을 내세우면서 비밀리에 공청사업을 지도하였습니다. 나는 소년회와 학우회성원들로 연예선전대를 무어가지고 길림시주변 농촌에 자주 나가군하였는데 그것은 다 공청사업을 위장하기 위한것이였습니다. 그때 조선인길림소년회에는 김온순이라는 녀성도 있었습니다.

이번에 선생이 길림소년회시절에 찍은 사진을 가지고왔는데 그 사진에 최진무, 신영근, 안신영, 손원일, 박일파가 있습니다. 안신영은 강동에 있는 조선인부락에서 살았는데 일본말을 할줄 몰랐습니다. 선생의 형인 손원일은 이 사진을 찍을 때 문광중학교에 다녔을것입니다.

손원일은 길림육문중학교에 다니다가 인차 문광중학교로 전학하였습니다. 그가 길림육문중학교에 다닐 때 한동안 기숙사에 있었던것 같습니다. 선생의 형이 문광중학교를 나온 다음 상해에 가서 중앙대학 항해과를 나왔다고 하는데 나는 그가 어디로 갔다는 말만 들었지 구체적인 내막은 모르고있었습니다. 그후 길림에 온 그를 한번 만나본 일이 있습니다. 그도 길림에서 공부할 때 맑스-레닌주의서적을 많이 읽었을것입니다. 나는 1947년에 평양에서 박일파를 만났습니다. 박일파는 길림법정대학을 나온 사람인데 해방될 때까지 할빈에서 변호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박일파의 누이동생은 고재림에게 시집갔습니다. 고재림은 만철의학전문학교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내가 고재림과 고재봉도 해방후에 만나보았습니다. 선생이 가지고 온 사진에 나는 없습니다. 나는 길림에서 활동할 때 나의 사진이 적들의 손에 들어가면 재미없기때문에 될수록 사진을 찍지 않았습니다. 언제인가 소년회에서 조직한 등산놀이에 참가하기 위하여 강동에 있는 룡담산에 갔을 때에도 나는 동무들이 사진을 찍을 때 자리를 피하였습니다.

선생이 내가 자기 집에 와서 자기와 손인실을 데리고 거리에 나가 쨩즈궈즈를 사주어 먹던 생각이 난다고 하는데 감회깊은 이야기입니다. 선생과 손인실을 데리고 송화강을 건너가 강남공원에서 유희놀이를 하며 놀던 일도 생각납니다. 내가 북산공원에서 소년회성원들을 모여놓고 조선혁명에 대하여 이야기한것을 손인실이 기억하고있다고 하는데 그럴수 있습니다. 지금 중국사람들이 북산공원을 비롯하여 나와 관련된 길림시안의 사적지들을 잘 꾸려놓고 관리하고있습니다. 내가 공청원들과 반제청년동맹원들의 비밀모임을 가지군하던 약왕묘도 원상대로 보존하고있고 길림육문중학교에 나의 동상을 세웠다고 합니다.

손목사는 내가 길림에서 활동할 때 나를 적극적으로 옹호해주었습니다. 혁명영화 《조선의 별》에도 나오지만 초기혁명활동시기에 손목사는 나를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현묵관에게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나를 옹호하였습니다. 손목사는 원래 수염을 기르지 않았는데 영화에는 수염이 있는것으로 형상하였습니다. 아마 우리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게 형상한것 같습니다. 그때 손목사는 상고머리를 하고 다녔는데 인물도 잘 생겼댔습니다. 선생이 다부작혁명영화 《조선의 별》을 보고있으면 계속 보는것이 좋겠습니다.

현묵관은 장사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최덕신의 말에 의하면 그는 싸우다 죽은것이 아니라 장사에서 암살되였다고 합니다. 현묵관에게 숙자라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어떻게 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현묵관의 안해는 일찌기 중국 동북지방에 들어가 현묵관과 같이 살았습니다.

나는 길림에 있을 때 현묵관의 집에서 얼마동안 생활하였습니다. 그때 현묵관은 남만 왕청문에 많이 가있었고 길림에는 그의 안해와 딸이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생활이 곤난하여 그의 안해가 복흥태정미소에 가서 쌀을 고르는 일을 해주고 쌀을 좀 얻어다가 끼니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때 현숙자는 우리의 심부름을 많이 해주었고 그의 어머니는 우리에게 밥을 지어주었습니다.

나는 길림에 있을 때 선생의 누이인 손진실의 혼사문제때문에 곤경에 빠졌던 손목사를 도와준 일이 있습니다. 손진실이 윤치호의 동생 윤치창과 눈이 맞아 돌아가자 독립운동자들속에서 그들의 혼사문제가 화제거리로 되였습니다. 독립운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이 친일파의 집에 딸을 준다고 하면서 손목사를 시비하였습니다. 지어 그들은 윤치창이 손목사를 만나러 길림에 왔을 때 그를 인질로 잡아두고 군자금을 받아낸 다음에야 내놓겠다고 야단법석하였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한 소문이 길림시안에 쭉 퍼지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 말려들어 손목사는 매우 난감한 처지에 빠지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장철호, 고원암, 김사헌을 비롯한 독립운동자들을 찾아가 손목사와의 우정을 보아서라도 그러면 되겠는가, 지금은 자유련애를 하는때인데 젊은이들이 서로 좋아하면 그만이지 독립군에서 무엇때문에 이래라저래라 하는가고 하면서 윤치창을 놓아주는것이 좋겠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후 독립운동자들은 자기들이 너무한것 같다고 하면서 윤치창을 놓아주었습니다. 그들이 나의 말을 들은것은 우리 아버지의 신세를 진것도 있고 또 내가 학생들속에서 영향력이 있었기때문인것 같습니다. 나는 그때 학생이였지만 정치활동을 하고있었습니다. 아마 내가 나서서 손정도목사를 옹호하고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그가 곤경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을것입니다. 지금 손진실의 나이가 89살인데 아직도 그가 살아있으면 좋은 일입니다.

윤치창을 억류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독립군안에서 낡은 세력과 진보적세력이 갈라지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인질사건을 일으킨것은 낡은 세력이였는데 그들은 군자금을 모아들이거나 남의 돈을 빼앗아먹는 놀음을 일삼고있었습니다. 김사헌, 고원암 같은 사람들은 낡은 세력을 반대하는 진보적인 세력에 속해있었습니다. 고원암은 고려약방을 운영하였는데 량심적인 사람이였습니다.

손목사는 나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손목사는 내가 길림에서 중국반동군벌에 체포되여 감옥에 갇혀있을 때 나를 빼내기 위한 구출운동을 적극 벌렸습니다. 선생도 생각나겠는지 모르겠지만 1929년 가을에 길림시에서는 큰 학생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학생사건으로 하여 길림제5중학교와 제1중학교, 길림육문중학교의 많은 학생들이 체포되여 길림감옥에 갇혔습니다. 내가 중국반동군벌들에게 체포되여 감옥에 갇힌것도 바로 그 학생사건때문이였습니다. 그때 길림감옥에 갇힌 학생들은 대부분이 중국인학생들이였는데 제5중학교 학생들이 제일 많았습니다.

나는 길림감옥에 들어가있으면서 중국인학생들을 많이 알게 되였습니다. 그가운데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은 감옥당국의 악행과 박해를 반대하는 투쟁의 앞장에 섰던 황수전이라는 사람입니다. 길림감옥에는 수감자들에게 못된짓을 많이 하는 간수장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놈의 못된 버릇을 떼주기로 하고 그 일을 누구에게 맡길것인가 하는것을 토론하였습니다. 나는 그 문제를 감방안에서 토론할수 없기때문에 파악있는 동무들에게 련락하여 변소에 가는척하고 밖에 나가서 토론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경향성이 좋은 간수가 당직을 설 때에는 이 감방에서 저 감방으로 마음대로 다닐수 있었고 그들을 통하여 다른 감방에 련락도 할수 있었습니다. 나는 동무들에게 간수장이 제일 못되게 노는데 한번 단단히 혼쌀을 내주자, 그러면 다시는 못되게 놀지 못할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길림제5중학교 3학년생인 황수전이 그 일을 자기가 맡아하겠다고 하기에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고 물어보니 그는 방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그놈을 혼내주면 독감방에 갇히워 한 5개월동안은 더 고생해야 할것이라고 하였더니 그는 동무들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황수전에게 그 일을 맡기기로 하고 제각기 자기 감방으로 돌아왔습니다. 황수전은 감방으로 돌아와서 참대저가락끝을 뾰족하게 깎아가지고있다가 어느날 간수장이 감방문구멍으로 감방안을 들여다볼 때 그의 눈을 쿡 찔렀습니다. 감방문마다에 수감자들을 감시하는 동그란 작은 구멍이 하나씩 있었는데 간수장은 그 구멍에 한쪽 눈을 대고 감방안을 들여다보다가 봉변을 당했습니다. 간수장의 눈에서는 피와 먹물이 쏟아져나왔으며 결국 그의 한쪽 눈이 멀게 되였습니다. 그때 수감자들은 모두 가슴이 후련해서 황수전을 보고 장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일때문에 황수전은 겨울에 불도 때지 않는 독감방에 끌려가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간수들에게 황수전을 독감방에서 빨리 내놓지 않으면 네놈들의 눈을 다 찔러놓겠다고 을러댔습니다. 우리들의 항변기세에 겁을 먹은 감옥당국은 하는수없이 그를 독감방에서 내놓았으며 우리가 하자는대로 하였습니다. 그후부터 우리는 감방안에서 모임을 비롯하여 하고싶은것을 다하였고 다른 감방에도 마음대로 다녔습니다. 나는 감옥에서 학생들의 투쟁을 지도하였는데 간수들은 내가 어느 감방에 가겠다고 하면 아무말없이 문을 열어주군하였습니다.

선생이 길림제5중학교에 다녔으면 상월선생을 알수 있을것입니다. 그는 길림제5중학교에서 사중무라는 가명을 가지고 교편을 잡고있었습니다. 상월선생은 원래 공산주의운동에 관여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절강성에서 중국공산당원들과 련계를 가지고 공산주의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중국반동군벌의 탄압이 심해지자 하남과 대련을 거쳐 길림에 피신해와서 사위를 얻어가지고 살았습니다. 학생사건이 일어나자 상월선생은 주모자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여있었습니다. 그때 상월선생과 가까이 지내던 학생들은 거의 다 체포되였는데 나도 그와 련계가 있다고하여 체포되였습니다. 나는 상월선생을 길림육문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알게되였는데 그는 한문과 문학을 배워주었습니다. 중국반동군벌은 상월선생과 가깝게 지내던 학생들과 나를 체포하기는 하였지만 공산주의운동을 했다는 증거는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잡았다고 하는 증거라는것은 좌익서적을 많이 읽는다는것뿐인데 그것으로는 학생들이 공산주의운동을 하였다고 확증할수 없었습니다. 당시 길림에는 련공을 주장하면서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은 국민당좌파세력이 많이 들어와있었기때문에 학생들이 그들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습니다. 길림육문중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들에서 학생들에게 손중산의 신삼민주의까지 배워주었습니다. 상월선생의 자녀들가운데서 두딸이 몇해전에 우리 나라에 왔다갔습니다.

나는 혁명동지들의 적극적인 투쟁과 손목사를 비롯한 진보적인사들의 도움으로 길림감옥에서 나올수 있었습니다. 선생의 아버지는 내가 길림감옥에 갇혔을 때 나를 어떻게 하면 구출하겠는가 하여 속을 많이 태웠습니다. 손목사는 우리 아버지를 보아서라도 나를 감옥에서 구출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던것 같습니다. 손목사는 나를 빼내기 위하여 장작상과 장학량을 비롯한 중국 길림성정부와 길림독군서의 실권자들과 교섭도 많이 하고 그들에게 돈도 많이 먹였습니다. 장작상과 장학량은 중국동북지방의 실권자로서 군벌통치를 하고있었습니다. 그들은 국민당의 말도 잘 듣지 않았습니다. 장작상은 코대가 센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일제놈들이 남만철도를 가로타고앉아 전횡을 부리자 그것을 리용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길림에서 봉천까지 철길을 따로 놓았습니다. 장학량은 장작상의 조카입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인 장작림이 베이징에서 동북으로 들어오다가 일제가 조작한 렬차폭파사건으로 죽었으므로 일제를 몹시 증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장작상, 장학량과 교섭을 잘하면 국민당과 일제 특무기관에서 주목하는 대상도 감옥에서 빼내올수 있었습니다.

손목사가 나를 빼내기 위한 운동을 벌리는데는 유리한 점도 있었습니다. 내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순진한 학생이라는것만 증명하면 감옥에서 빼내는데서 크게 문제될것이 없었습니다. 손목사는 장작상과 장학량에게 김성주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것을 내가 보증한다, 그는 학생사건련루자들과 관계가 없기때문에 따로 취급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나를 구출하기 위한 운동에는 박일파의 아버지와 고원암, 김사헌, 오상헌, 오인화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참가하였는데 손목사가 주동적인 인물이였습니다. 최덕신의 아버지 최동오도 구출운동에 참가하였습니다. 한번은 내가 감방에서 끌려나가 심문을 받고있는데 간막이뒤에서 얼굴을 내밀고 나를 쳐다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최동오였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한번 히쭉 웃고는 감옥장이 있는 방쪽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서 간수들은 나를 심문하면서 연필을 손가락사이에 끼우고 비틀던 고문을 중지하고 점심을 먹으라고 하는것이였습니다. 나는 간수들이 왜 이렇게 친절하게 대하는가 하는것을 의심하면서도 차려온 음식을 다 먹었습니다. 점심을 먹고나니 간수들은 나를 감방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나는 감방에 돌아와서 간수들이 왜 심문을 하지 않을가, 최동오가 와서 무엇이라고 말했을가, 그가 누구의 부탁을 받고 왔댔을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후 나는 차광수를 비롯한 여러 동무들을 통하여 손목사가 나를 구출하기 위한 운동을 벌리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손목사가 구출운동을 벌리고있는데 며칠만 있으면 감옥에서 나올수 있을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최동오가 길림감옥에 왔다간것은 내가 김성주가 옳은가 하는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던것 같습니다. 그는 길림감옥에 와서 나를 본 다음 길림독군서와 감옥당국에 저 학생은 화성의숙에 다니던 김형직선생의 아들 김성주가 옳다고 확인해준것 같습니다. 그가 누구의 부탁을 받고 왔댔는가 하는것은 잘 모르겠는데 손정도목사를 비롯한 독립운동자들이 보내서 왔을수도 있고 길림독군서에서 시켜서 왔을수도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길림독군서 사법관리들이 손목사가 자꾸 돈을 먹이면서 내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보증하니 나에 대하여 잘 아는 최동오를 불러다 손목사의 말이 사실인가 하는것을 확인하느라고 그렇게 했던것 같습니다. 최동오가 어떻게 되여 감옥에 왔다갔는지는 알수 없지만 그가 왔다간 다음부터 나는 심문도 받지 않고 고문도 받지 않았습니다.

해방후에 있은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대표자련석회의때 나는 거기에 참가하였던 최동오를 만났는데 그는 길림감옥에 어떻게 되여 나타났다는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하지 않으므로 나도 그에 대하여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후에 다시 만나면 물어보려고 하였는데 그가 그만 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손목사의 적극적인 구출활동이 없었더라면 나는 감옥에서 나오기 힘들었을것입니다. 1930년 가을에 오가자에 있으면서 황수전을 비롯한 학생사건관계자들이 다 석방되였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내가 그때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고 5. 30폭동련루자들과 같이 있었더라면 큰일날번하였습니다.

나는 길림감옥에서 나온 다음 그곳에 있는것이 여러모로 재미없을것 같아 인차 돈화로 갔습니다. 내가 돈화에 있는 고재봉의 집에서 쇠약해진 몸을 추세우기 위하여 치료를 하고있을 때 5. 30폭동이 일어났습니다.

5. 30폭동은 소위 공산주의운동을 한다고 하던 종파사대주의자들이 저들의 정치적야욕을 실현하기 위하여 일으킨 좌경모험주의적폭동이였습니다. 원래 인민대중에게 의거하여 혁명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만주총국이요, 당재건그루빠요 하면서 파벌싸움만 일삼던 종파분자들은 국제공산당이 일국일당원칙을 내놓자 제각기 중국공산당에 들어가기 위한 각축전을 벌렸습니다. 그때 중국공산당에서 실권을 쥐고있던 리립삼은 일국일당원칙에 따라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에 들어와야 하며 그러자면 실천투쟁을 통하여 검열받고 공로를 세워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자 종파사대주의자들은 조성된 혁명정세와 혁명력량의 준비정도를 고려하지 않고 동만일대의 조선사람들을 무모한 폭동에로 내몰았습니다. 중국반동군벌은 이것을 구실로 폭동참가자들과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닥치는대로 체포구금하였으며 수많은 조선청년들을 학살하였습니다. 온 동만땅을 흽쓴 검거선풍으로 하여 나는 지하로 들어가 활동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습니다. 내가 5. 30폭동이 일어나기전에 감옥에서 나온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후 일제놈들은 만주를 강점하자마자 길림감옥에 가서 나부터 찾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내가 이미 감옥에서 나간것을 알고는 한발 늦었다고 한탄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그때 내가 손정도목사를 비롯한 독립운동자들의 도움으로 석방되지 못하고 감옥에 한 1년만 더 갇혀있었어도 일제놈들의 손에 넘어갈수 있었습니다. 내가 일제놈들의 손에 넘어갔더라면 큰죄는 없었지만 김형직의 아들이라고 하여 한 10년동안은 감옥생활을 시켰을것이며 그렇게 되였더라면 나는 항일무장투쟁을 벌릴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을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손목사를 은인으로 생각하면서 잊지 않고있는것입니다.

내가 손목사를 마지막으로 본것은 1930년 5월 7일경입니다. 나는 길림감옥에서 나오자 곧바로 손목사를 찾아가 인사를 하고 한시간정도 이야기를 나눈 다음 인차 떠났습니다. 그후에는 지하활동을 하다보니 손목사를 다시 만날수 없었습니다. 선생의 아버지는 1931년에 길림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나이가 52살이였습니다. 너무 일찍 돌아갔습니다.

선생이 1930년경부터 베이징에 가있었으면 아버지가 돌아가는것을 보지 못하였을것입니다. 베이징에 있을 때 아버지한테서 받은 편지에 아버지가 중국 동북지방에서 사는 조선사람들에게 땅을 팔아달라는 문제를 가지고 장작상과 교섭한것이 성공하였다는 내용이 씌여있었으면 손목사가 장작상과 교섭을 많이 한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손목사가 나를 길림감옥에서 구출하기 위해서만 장작상과 교섭한것으로 알고있었습니다. 그때 길림에서는 장작상을 독군이라고 하였습니다. 안창호가 길림에 와서 강연을 하다가 중국반동군벌에 체포되였을 때에도 길림독군서와 교섭하여 석방하도록 하였다는데 그 일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압니다. 그때 우리는 손목사를 찾아가서 안창호를 석방하기 위한 투쟁을 벌리자고 하였습니다. 손목사는 우리의 제의에 찬성하고 이 일에 적극 나섰습니다. 아마 그때 손목사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더라면 안창호를 빼내기 힘들었을것입니다. 길림독군서의 관리로 있던 오인화라는 사람이 많은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독군서에서 관리로 있었으면 둥그런 모자를 쓰고 다녔을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모자를 쪽달바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선생의 가족은 그후에 중국에서 나와 서울로 갔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마 손진실이 서울에서 살고있었기때문일것입니다. 그때 손목사가 살아있었더라면 선생은 서울에 가지 않았을수도 있었을것입니다.

젊은 시절에 헤여졌던 친구들이 요즘 많이 찾아오고있습니다. 나는 그들을 만날 때가 제일 기쁩니다. 선생은 내가 큰일을 하기때문에 친구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하는데 큰일은 다 인민들이 합니다. 나는 다만 인민의 힘을 믿고 인민에게 의거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뿐입니다. 인민대중의 힘은 무궁무진합니다. 인민대중의 힘만 발동하면 세상에 못해낼 일이 없으며 하늘도 능히 이길수 있습니다. 조국광복을 이룩하고 우리 나라에 우월한 사회주의제도를 세운것도 인민들이며 우리의 모든 사회적재부도 다 당의 령도에 충실한 인민들이 창조한것입니다.

이란에서 회교혁명이 승리한것은 인민대중의 힘을 그 무엇으로써도 당해낼수 없다는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좋은 실례로 됩니다. 1979년에 이란에서 회교혁명의 구호밑에 전인민적봉기를 일으켜 황제정권을 무너뜨리고 회교공화국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때 이란에는 황제의 군대도 많았고 미국군대도 수천명이나 들어가있었지만 인민대중이 들고일어나자 어쩌지 못하고 황제는 다른 나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신문에도 보도되였지만 며칠전에 나는 우리 나라를 방문한 이란 우편, 전신, 전화상을 만나주었는데 그때 그는 나에게 선물로 가져온 전화설비를 소개하면서 자기는 이미 대학에 다닐 때부터 주체사상을 학습하면서 김일성주석님을 신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주체사상은 사람이 모든것의 주인이며 모든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적원리에 기초하고있는 사람중심의 사상입니다. 주체사상은 혁명과 건설에서 자주적립장과 창조적립장을 견지할것을 요구합니다.

나는 혁명의 길에 나선 첫 시기부터 언제나 자주적립장에 서서 인민대중에 의거하여 혁명앞에 나선 모든 문제를 풀어왔습니다.

우리의 초기혁명활동시기에 국제당과 동지들이 나에게 국제공산당이 모스크바에서 운영하는 대학에 가서 공부할것을 권고하였지만 나는 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1930년대 초 어느해인가 박소심동무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거기에는 조직에서 나를 쏘련에 류학보내기로 결정하였다는것과 차광수동무도 찬성하였으니 떠날 준비를 하는것이 좋겠다는 내용이 씌여있었습니다. 나는 그 편지를 받아보고 인차 차광수동무가 있는 토로즈부근의 조선인부락으로 갔습니다. 그 마을에 도착하니 그곳에 차광수, 박소심을 비롯한 많은 동무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나에게 주려고 양복과 신발, 생활필수품, 학용품까지 다 사다놓고 나를 기다리고있었습니다. 차광수동무에게 어떻게 된 일인가고 물으니 그는 내가 찬성할것 같지 않아 자기들끼리 나를 쏘련에 류학보내기로 토론하고 결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그때 중국의 만주일대에 들어가 활동하던 조선공산주의자들속에서 쏘련에 류학을 가는 바람이 불고있었습니다. 그들은 쏘련에 공부하러 가는것을 응당한 일로, 큰 자랑으로 여기고있었으며 실지 쏘련에 가서 공부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우리 동무들도 내가 쏘련에 가서 공부를 많이 해가지고 돌아와 더 잘 지도해달라는 생각에서 나를 류학보내기로 하였던것 같습니다. 그들은 모두 내가 류학을 가게 된데 대하여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하면서 떠나기전에 작별인사를 하려고 기다리고있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나를 공부시키려고 하는 동무들의 심정은 리해할만하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쏘련에 가야 크게 배울것이 없다고 본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리론같은것은 쏘련에 가지 않고도 맑스나 레닌의 저서를 읽으면 얼마든지 배울수 있다, 쏘련에 가서 배울것이란 사회주의10월혁명과 사회주의건설경험밖에 없는데 그것은 우리 나라 실정에 맞지 않는다, 우리가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할것은 조선혁명의 전략과 전술인데 그것을 쏘련에 가서 배울수 없다, 쏘련사람들이 자기 나라 혁명에 대하여서는 잘 알수 있겠지만 우리 나라 혁명에 대하여서는 잘 모를것이다, 조선혁명에 대해서는 우리 인민들이 제일 잘 안다, 조선혁명에 관한 전략전술과 방법론을 찾자면 우리 인민들속에 들어가야 한다, 우리 인민들속에 들어가 그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조선혁명을 완성하기 위한 방법론을 찾아야 한다, 나는 쏘련에 가지 않고 동무들과 같이 우리 인민들속에 들어가 조선혁명의 리론과 방법을 배우겠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동무들은 너무 좋아서 어쩔줄 몰라하였습니다. 그후 나는 동무들과 같이 인민들속으로 들어갔으며 인민들속에서 주체의 진리를 더욱 확신하게 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 내가 쏘련에 류학을 가지 않기를 잘하였습니다. 만일 내가 쏘련에 류학을 갔더라면 엠엘파나 이르꾸쯔크파와 같은 로씨야파가 되였을수도 있습니다. 김찬, 박헌영과 같은 종파분자들은 다 모스크바에 가서 공부한 사람들입니다. 종파분자들은 우리 혁명에 막대한 해독을 끼쳤습니다.

5. 30폭동이후 동만일대의 정세는 매우 험악하였습니다. 5. 30폭동이 일어난 다음 꼬리를 물고 련이여 8. 1폭동이 일어나고 다음해에는 만보산사건과 9. 18사변이 일어났습니다. 만보산사건은 일제가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침략의 구실을 마련하고 조선사람들과 중국사람들을 리간시키기 위하여 저들에게 매수된 종파분자들을 부추겨 고의적으로 조작한 모략사건입니다.

그때 일본령사관 경찰에 체포되였던 종파분자들은 거의다 전향문을 쓰고 나와 일제의 특무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다보니 중국사람들이 조선사람은 다 일제의 앞잡이이다, 조선사람들이 일제놈들을 중국에 끌어들인다고 하면서 조선사람들을 더욱 적대시하게 되였습니다.

5. 30폭동이후 우리 조선공산주의자들은 그 후과를 가시고 혁명력량을 튼튼히 꾸리며 무장투쟁을 준비하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벌려나갔습니다. 나는 한영애, 한일광을 비롯한 혁명동지들의 도움으로 려비를 마련해가지고 할빈과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파괴된 혁명조직을 복구정비하고 무장투쟁준비를 갖추었으며 마침내 1932년에 안도에서 항일유격대를 창건하였습니다.

우리는 항일무장투쟁을 발전시키는데서 중국인반일부대들과의 련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독립군부대들과의 통일전선을 이룩하는것을 중요한 문제로 내세웠으며 그 실현을 위하여 애를 많이 썼습니다. 나는 먼저 량세봉의 독립군부대와 통일전선을 실현하기 위하여 갓 창건된 항일유격대의 주력을 거느리고 남만에 진출하였습니다. 량세봉은 우리 아버지와 친한 사이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통일전선로선에 공감하였지만 일제의 앞잡이인 참모놈이 한사코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부대가 남만에서 돌아와 소사하에 들려보니 남만진출기간에 우리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후 우리는 차광수를 비롯한 많은 혁명동지들을 잃었습니다.

량세봉은 좋은 사람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벗과 원쑤를 잘 가려보지 못한데로부터 일제놈들의 모해에 걸려 죽었습니다. 량세봉의 안해와 아들은 해방후 내가 조국으로 데려왔습니다.

아들은 만경대혁명학원에서 공부하고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비행사가 되였는데 그후에 사망하였습니다. 량세봉의 안해가 1988년에 사망하였는데 그는 살아있을 때 우리 집에 자주 다녔습니다.

량세봉이 죽은 다음에 독립군사령을 김활석이 하였는데 그는 장개석의 국민당과 련계를 가지려고 애를 썼습니다. 일제놈들은 그가 국민당과 련계를 가지려 한다는것을 알고 저들의 특무를 장개석이 파견한 사람으로 가장시켜 독립군부대에 박아넣었습니다. 김활석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일제의 특무를 따라 흥경으로 갔습니다. 그때 그는 어떤 집에 들어가면서 그집이 국민당계렬의 려관인줄 알았는데 자고일어나니 일제의 경찰서였다고 합니다. 일제놈들은 그에게 술과 마취약을 먹여 잠자게 하고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체포하였습니다. 그후 최윤구가 독립군사령을 하였는데 1938년 봄에 부대를 데리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독립군부대에 있던 사람들가운데서 김명준이 최근까지 살아있다가 지난해에 사망하였습니다. 오동진은 손목사가 길림에 있을 때 일제놈들에게 체포되였습니다. 그는 손목사의 말을 듣지 않고 장춘에 와있는 금광주와 교섭하여 운동자금을 해결하겠다고 하면서 그곳에 갔다가 체포되였습니다.

선생이 내가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을것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루 헤아릴수 없는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고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생한 사람들이 있었기때문에 일제를 때려부시고 나라를 찾을수 있었습니다. 나는 만난을 무릅쓰고 결단성있게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데 대하여 긍지높이 생각합니다. 우리가 반일민족통일전선로선과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내놓은 다음부터 항일무장투쟁은 더 활기있게 진행되였습니다.

선생이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우리가 누구한테서 경제적으로 방조를 받았는가고 하였는데 인민들로부터 많은 방조를 받았습니다. 식량과 군복같은것은 인민들의 지원을 받아 해결하기도 하고 적들의것을 빼앗아 해결하기도 하였습니다.

인민들은 농사를 지어 항일유격대에 식량을 보내주었습니다. 중국 장백현일대와 우리 나라 혜산, 갑산, 삼수일대 그리고 두만강연안일대의 농민들은 감자농사를 위주로 하였는데 식량이 넉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일제놈들이 공출을 받아가기 위하여 감자농사가 어떤가 하는것을 조사할 때 감자를 정보당 10t씩 냈어도 2∼3t밖에 내지 못했다고 속이고는 감자밭에서 감자넝쿨을 걷어내여 감자를 캔것처럼 한 다음 항일유격대에서 감자를 캐다 먹도록 하였습니다. 항일유격대원들은 농민들이 캐가라고한 감자를 다 캐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냥 두었다가 다음해 봄에 언감자를 캐다 먹군하였습니다. 선생은 언감자로 만든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겠는데 언감자음식이 별맛입니다. 지난해에 8. 15범민족대회에 참가한 해외동포들을 위하여 연회를 차리고 그들에게 언감자국수를 대접하였더니 많은 사람들이 언감자국수를 처음 먹어본다고 하면서 아주 맛있다고 하였습니다.

농민들은 강냉이도 한정보에서 5t정도 나면 일제놈들에게 1t쯤 났다고 하고는 나머지를 항일유격대원들이 가져다 먹도록 하였습니다. 강냉이는 산속에 창자를 만들어놓고 이삭채로 넣어두면 썩이지 않고 오래 보관할수 있습니다. 조국광복회회원들은 강냉이를 따서 이삭채로 창자에 넣어두고는 우리에게 어느산 어디에 강냉이창자가 있으니 가져다 먹으라고 련락하군하였습니다. 항일유격대원들은 농민들이 이런 식으로 원호해준 식량을 가지고 겨울을 나군하였습니다. 여름에는 산나물을 뜯어 식량보탬을 할수 있기때문에 식량문제를 해결하는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인민들은 항일유격대를 친혈육과 같이 사랑하였습니다. 인민들은 항일유격대 대원들이 행군을 하다가 마을에 들리면 따뜻이 맞이하고 각별히 대해주었습니다.

언제인가 한번은 우리 부대가 어느 한 부락에 들렸는데 주인집에서 풋강냉이를 삶아 내놓았습니다. 삶은풋강냉이를 보니 고향생각이 저절로 났습니다. 우리 고향에서는 풋강냉이를 먹을 때 풋고추를 건뎅이젓에 찍어먹는데 그것이 별맛입니다. 그래서 집주인에게 삶은 풋강냉이를 먹는데 건뎅이젓이 있으면 제격이겠다고 하였더니 그는 장군님께서도 건뎅이젓을 좋아하는가고 하였습니다. 그에게 건뎅이젓을 좋아한다고 하면서 나는 평안도사람인데 함경도사람들이 많이 와서 사는데 있다보니 건뎅이젓을 먹어본지 오래 되였다고 하였습니다. 평안도사람들은 건뎅이젓을 잘 먹지만 함경도사람들은 냄새가 난다고 하면서 잘 먹지 않습니다. 그 집 주인은 며느리가 고향에 갔다오면서 건뎅이젓을 가져온것이 좀 있는데 맛보라고 하면서 내놓았습니다. 그때 나는 건뎅이젓이 너무도 맛있어서 풋강냉이를 다섯이삭이나 먹었습니다. 나는 그 집에서 건뎅이젓을 병에다 넣어주기에 그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한동안 맛있게 먹었습니다.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창성지방의 강씨성을 가진 사람들도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들가운데는 천도교를 믿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강씨집안사람들은 애국심이 높았습니다. 우리는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창성지방의 천도교인들과 련계를 가지고 그곳에 조국광복회조직까지 내왔습니다.

선생이 백두산지구혁명전적지에 가보아서 알겠지만 거기에는 우리가 생활하던 밀영이 그대로 보존되여있는것도 있고 자리만 남아있는것도 있으며 행군하다가 숙영한 자리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사적자료와 유물들이 있습니다. 구호나무도 많습니다. 우리는 백두산근거지를 창설한 다음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국내에서 적들의 《토벌》공세가 심해지면 중국땅에 건너가 싸우고 중국땅에서 적들의 《토벌》공세가 심해지면 조선땅으로 건너와 싸웠습니다. 그렇게 하느라니 힘든것만은 사실이였습니다.

선생이 학생시절에 항일유격대가 빨리 뛰기 위하여 바지가랭이에 모래를 넣고 훈련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사실 그때 인민들속에서 우리에 대한 전설같은 소문이 많이 돌았습니다.

그러나 적들은 항일유격대와 인민들을 리간시키기 위하여 별의별 악선전을 다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우리 항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하였는데 그 다음에는 공산군 또는 공비라고 불렀으며 나중에는 마적단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나에 대해서도 헛소문을 많이 퍼뜨렸습니다.

나에 대하여 신문에 구체적으로 소개된것은 보천보전투를 한 다음이였습니다. 보천보전투는 적들을 유인하여 무산방면으로 진출하였다가 적들에게 포위된 최현동무의 부대를 구출하려고 조직한 전투였습니다. 보천보전투가 있은 다음 적들이 우리를 추격하여왔는데 구시산에서 소멸해버렸습니다.

구시산전투가 끝난 다음 최현동무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때 최현동무는 한개 련대를 이끌고있었는데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목재소를 들이치고 일본사람 2명을 인질로 붙잡아왔습니다. 내가 무엇때문에 그들을 붙잡아왔는가고 하니 그는 놈들한테서 군복천을 좀 해결하려고 인질로 끌고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인질로 잡혀왔던 한 사람이 2. 000여명에게 군복을 해입힐 광목천을 가져왔습니다. 그가 놓여나가서 신문에 글을 냈는데 김일성은 본명이 김성주인데 평안도사람이며 나이는 25살이라고 하였습니다.

언제인가 《동아일보》도 나에 대하여 비교적 정확히 소개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동아일보》는 김일성의 본래 이름은 김성주이다, 집에서도 그렇게 불렀고 길림에서 공부할 때에도 그렇게 불렀는데 혁명활동을 하면서부터 김일성으로 불리우게 되였다고 썼습니다. 사실 김일성이라는 이름은 혁명동지들이 지어준것입니다. 초기혁명활동시기에 동지들은 나의 이름을 처음에는 조선혁명의 향도성이 되여달라는 의미에서 한일자에 별성자를 써서 한별이라고 불렀고 그 다음에는 민족의 운명을 구원해줄 태양이라는 의미에서 날일자에 이룰성자를 써서 김일성이라고 불렀습니다. 혁명동지들이 모두 나의 이름을 김일성이라고 부르는데 나혼자서는 어쩌는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이름이 김일성으로 되였습니다.

선생이 1939년경에 상해에 있을 때 영어로 발간되는 《대공보》에 독립운동가 김일성이 수천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항일무장투쟁을 한다고 소개한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럴수 있습니다. 그전에 주은래도 우리의 투쟁소식이 국민당신문에 계속 소개되였다고 하였습니다. 주은래는 중국공산당 뷰로가 중경에 있을 때 거기에 있었기때문에 우리의 투쟁에 대하여 잘 알고있었습니다.

내가 해방후에는 베이징에 여러번 가보았지만 그전에는 베이징에 가보지 못하였습니다. 항일무장투쟁을 할 때 우리는 베이징에 있는 왕덕림, 리두와 같은 사람들과 련계를 많이 가졌습니다. 그들은 쏘련에 넘어갔다가 베이징에 와있었습니다. 왕덕림은 우리와 련계를 가지기 위하여 이준산이라는 사람을 파견하였습니다. 이준산은 우리한테 와서 비서로 오래동안 있었는데 그를 이주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베이징에서 로어학원에도 다니고 일본에 건너가 제국대학에서도 공부하였기때문에 로어도 잘하고 일어도 잘하였습니다. 우리와 중국사람들과의 관계, 베이징과의 관계문제는 그가 많이 맡아보았습니다.

항일혁명투쟁시기 나에게는 생사를 같이한 중국동지들이 많았습니다.

장울화는 나의 혁명활동을 물심량면으로 도와주고 나를 목숨으로 지켜준 중국동지들가운데 한사람입니다. 장울화의 아버지는 무송지방에서 많은 땅과 가병들까지 가지고있는 자산가였습니다. 장울화는 비록 자산가의 아들이였지만 나와 친하게 지내면서 나의 혁명활동을 적극 도와주었습니다. 혁명영화 《조선의 별》을 보면 알수 있겠지만 나는 해룡으로 가던 도중 렬차안에서 장울화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적들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무사히 해룡역을 빠져나갈수 있었습니다. 그때 장울화는 심양으로 공부하러 가던 길에 나를 만나러 길림에 들렸으나 만나지 못하게 되자 영구지방에 가서 인삼을 팔고 돌아오는 아버지를 만나러 해룡으로 가던 도중 렬차에서 나를 만났던것입니다. 장울화는 그후 내가 오가자에서 활동할 때 자기네 가병들이 가지고있던 총 40정을 가지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때 장울화가 가져온 총 40정은 항일유격대를 창건하는데 큰 도움으로 되였습니다. 장울화는 고유수에 있는 삼광학교에서 교원도 하였습니다.

내가 항일유격대를 창건한 다음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남만으로 진출할 때 하루는 장울화가 나를 찾아와서 자기는 어떻게 하라는가고 하였습니다. 그때 장울화의 부인은 임신중이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돈많은 호부자의 자식이라는것을 고려하여 그에게 산에 들어와 고생하느라고 하지 말고 사진관을 차려놓고 운영하든지, 중학교에서 교원을 하든지 하면서 우리 사업을 지원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남호두회의 이후 나는 무송지방으로 나오다가 마안산밀영에 들렸는데 아동단원들의 옷이 말이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아동단원들의 옷감을 해결하기 위하여 장울화에게 김산호를 보냈는데 그가 옷감을 해결해주었습니다. 김산호는 지주집에서 머슴을 살던 사람이였습니다. 그가 지주집에 있을 때 작두날에 왼손 엄지손가락이 잘리워 고생하는것을 내가 데려다 치료해주었습니다. 그는 나를 따라다니다가 유격대에 입대하였는데 후에 8련대 정치위원으로 사업하였습니다. 나는 무송에 나와 장울화를 다시 만났는데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상봉이였습니다. 장울화가 나를 만난 다음 며칠후에 정학해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정학해는 백산청년동맹 무송현 책임자로 있다가 적들에게 변절하여 《귀순공작대》에서 주구노릇을 하고있었습니다. 정학해가 변절했다는것을 모르는 장울화는 그에게 나를 만난데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정학해는 이 사실을 곧 적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렇게 되여 장울화는 적들에게 체포되였습니다.

장울화는 자기가 적들의 고문에 못이겨 비밀을 부는 경우 내가 있는 장소가 적들에게 로출될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버지가 헌병대에 돈을 먹여 자기를 병보석으로 석방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장울화는 3일동안 병보석으로 집에 나와있었는데 안해에게 유서를 남긴 다음 사진현상약을 먹고 최후를 마쳤습니다. 장울화에게는 장금천이라는 아들과 장금록이라는 딸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습니다. 나는 우리 나라를 방문한 그들을 다 만나주었으며 김정일동지도 그들에게 커다란 배려를 돌려주었습니다.

나는 해방후 새사회건설에서 나서는 여러가지 문제들도 자주적립장에서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게 해결하였습니다.

해방직후 우리가 창건한 공산당은 당원이 항일혁명투쟁을 하던 사람들을 비롯하여 1만명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조만식이가 세운 민주당은 당원이 46만명이나 되였습니다. 나는 우리 나라에 조성된 정세와 혁명발전의 요구에 맞게 로동자, 농민, 근로인테리들속에서 당대렬을 확대하고 광범한 군중을 당의 두리에 묶어세우기 위하여 공산당을 신민당과 합당하여 근로인민의 대중적정당인 로동당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우리는 로동자, 농민과 함께 근로인테리를 우리 혁명의 동력으로 규정하고 우리 당에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뿐아니라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지지하는 로동자, 농민, 근로인테리들의 우수한 선진분자들을 널리 받아들이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당 마크에는 마치와 낫과 붓이 그려져있는데 이것은 우리 당을 구성하고있는 로동자, 농민, 근로인테리를 상징하는것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우리가 당마크에 마치와 낫과 함께 붓을 그려넣은것은 아주 독창적이고 현명한것이라고 말하고있습니다. 당마크에 마치와 낫과 함께 붓을 그려넣은것은 그 어느 나라 당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당마크에 마치와 낫과 함께 붓을 그려넣는 문제를 가지고 여러 사람들과 토론을 많이 하였습니다. 나와 함께 항일혁명투쟁을 한 사람들은 모두 당마크에 마치와 낫과 함께 붓을 그려넣는것을 찬성하였지만 화요파요, 엠엘파요 하면서 파쟁을 일삼던 오기섭, 리주하, 주녕하 같은 종파분자들은 그렇게 하는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인테리가 없이는 혁명도 할수 없고 나라도 건설할수 없다, 낡은 사회를 때려부시고 정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서도 인테리가 필요하고 새 사회를 건설하는데서도 인테리가 있어야 한다, 항일무장투쟁을 한 사람들은 총은 잘 쏘지만 지식은 부족하다, 그러니 지식과 기술이 있는 인테리들과 손을 잡아야 혁명도 하고 건설도 할수 있지 않는가고 말해주었습니다.

해방후 새 사회를 건설하는데서 제일 걸린 문제가 인테리문제였습니다. 해방전에 우리 나라에는 대학이 없었습니다. 대학이 있었다면 서울에 일본제국대학 분교가 하나 있었을뿐입니다. 평양에는 공업전문학교와 의학전문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나라에 대학을 나온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기술대학을 나온 사람이 강영창, 김두삼, 로태석, 오동욱동무들을 비롯하여 십여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밖에 법과를 나온 사람들이 몇명 있었는데 일본법을 배운 사람은 해방후에 써먹을데가 없었습니다.

나는 해방직후에 인테리문제를 풀기 위하여 전국각지에 흩어져있는 인테리들을 데려다가 우리와 같이 일하도록 하였습니다. 정준택동무도 그때에 데려왔습니다.

정준택동무는 아버지가 의학공부를 하라고 하는것을 마다하고 광산전문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광산기사가 되였습니다. 해방이 되자 일부사람들은 그가 일제에게 복무하였다고 시비하였지만 나는 그를 데려다가 겁나하지 말고 같이 일하자고 하였습니다. 정준택동무는 새조국건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였으며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의 중책까지 맡고 자기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습니다. 우리는 해방후에 서울에서 인테리들을 데려다가 김일성종합대학을 세우고 민족간부양성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지금도 김일성종합대학에는 그때 서울에서 들어온 교수들이 여러명 있습니다. 해방후에 서울에서 영화배우들과 음악가, 무용가들도 적지 않게 들어왔습니다. 우리 나라에 와서 본 다른 나라 사람들은 우리 당의 인테리정책이 매우 정당하다고 한결같이 말하고있습니다. 선생이 우리가 인테리들을 내세워주고있는데 감동되여 원주필을 선물로 가져왔다고 하는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당은 지금도 사람중심의 사상인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당건설과 당활동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고있으며 그것을 혁명과 건설에 철저히 구현하고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 당은 전체 인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신뢰를 받고있으며 인민들은 당의 두리에 굳게 뭉쳐 당과 운명을 같이 해나가고있습니다.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라는 구호는 전당과 전체 인민이 혼연일체를 이룬 우리 나라의 참모습과 불패의 위력을 보여주는 좋은 구호입니다. 이 구호에는 일심단결의 전통을 고수하고 일심단결의 위력으로 혁명을 끝까지 해나가려는 우리 당과 인민의 혁명적의지가 잘 반영되여있습니다. 주체사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주체혁명위업의 종국적승리를 이룩하기 위하여 싸워나가는 우리 당과 인민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은 구호는 없습니다.

우리 당에서는 김정일동지의 발기에 따라 다음해 4월 15일까지 평양시의 살림집문제를 원만히 풀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고 5만세대의 현대적인 살림집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을 벌리고있습니다. 지금 전당, 전국, 전민이 떨쳐나서 5만세대의 살림집건설을 힘있게 추진하고있습니다. 평양시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통일거리 살림집건설을 로력적으로, 물질적으로 적극 지원하고있습니다. 통일거리옆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누구나 다 건설장에 뛰어들어 흙을 한삽이라도 뜨고서야 가군 합니다. 우리 나라에 와있는 다른 나라 대사관성원들도 통일거리건설을 로력적으로 지원하고있습니다. 얼마전에는 꾸바대사관성원들이 통일거리건설장에 나가 건설자들의 일손을 도와주었습니다. 지금 온 건설장이 부글부글 끓고있습니다.

건설자들의 앙양된 기세로 보아 다음해 4월 15일까지 5만세대의 살림집건설을 능히 완공할수 있을것입니다. 지금 3만세대의 살림집건설이 완공단계에 있는것만큼 앞으로 2만세대만 완공하면 됩니다. 다음해 4월 15일까지는 11개월정도 남아있으므로 이 기간이면 2만세대의 살림집을 얼마든지 완공할수 있을것입니다.

오늘 세계의 많은 나라 인민들이 주체사상에 대하여 공감하고있으며 그것을 따라배우고있습니다. 물론 주체사상이 아직 세계적인 사조로 되였다고 말하기는 이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지금 세계의 이목은 주체사상의 기치를 높이 들고 변함없이 사회주의위업을 고수해나가고있는 우리 나라에 쏠리고있습니다. 많은 나라 사람들이 동구라파의 여러 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하루아침에 좌절되였는데 조선은 어떻게 되여 사회주의길로 확신성있게 계속 나아가고있는가, 정말 희한한 일이라고 하면서 우리 나라에 찾아오고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나라에 와서 현실을 보고서야 주체사상이 구현된 조선의 사회주의는 당과 인민대중이 하나의 사회정치적생명체로 굳게 결합되여있고 모든것이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참다운 인민의 사회라고 하면서 이런 사회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것이라고 말하고있습니다.

동구라파의 여러 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좌절된것을 보고 사회주의를 포기하였던 어느 한 자본주의나라 공산당지도자도 우리 나라에 왔다가서는 사회주의를 위하여 계속 투쟁하겠다고 하고있습니다. 사람들은 주체사상을 구현한 우리 나라의 현실을 다른 나라들과 대비적으로 보고 주체사상의 정당성과 생활력에 대하여 똑바른 인식을 가지는것 같습니다. 낮은 산이 있어야 높은 산이 알리는 법입니다. 주체사상은 모든것을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사람을 위하여 복무할것을 요구하는 사상으로서 날이 갈수록 그 정당성과 생활력이 더욱더 뚜렷이 실증되고있습니다.

얼마전에 평양에서 진행된 국제의회동맹 제85차총회에 참가하였던 여러 나라 대표들은 한결같이 우리 나라 사회주의에 대하여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국제의회동맹 제85차총회에 세계의 80여개나라와 여러 국제기구들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였는데 그들의 반영이 다 좋았습니다. 많은 나라 대표들은 자기네가 지금까지 조선에 대하여 잘 모르고있었다, 나쁜 선전만 듣다보니 조선이 뒤떨어지고 거지와 강도단이 많은 나라이며 조선사람들은 뿔이 나온 무서운 사람들인줄 알고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와보니 그것은 다 거짓말이다, 조선에는 거지와 강도단도 없고 공해와 큰물피해도 없으며 조선은 참으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나라이다, 조선사람들은 제일 점잖고 조직력과 단결력이 강한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국제의회동맹리사회 위원장은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이번에 다른 세상에 갔다온것 같다, 국제의회동맹총회를 여러번 하였지만 평양총회만큼 잘 진행된 총회는 없다, 이번 총회는 회의조직도 잘되고 회의운영도 잘되였으며 모든것이 다 제일 잘되였다, 그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규률이 강하고 째인 나라이기때문이다, 총회참가자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다보니 무질서한 현상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고 회의일정이 다 예정대로 순조롭게 잘 진행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평양에서 받은 가장 큰 인상은 그 나라에 사대주의가 없는것이다, 조선에서는 오직 자기 인민을 믿고 자기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모든 일을 해나가고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국제의회동맹 제85차총회 참가자들이 말한것처럼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나라이며 큰 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와 발전된 나라에 대한 숭배주의도 없는 나라입니다.

아세아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일부 나라들에는 아직 큰나라와 발전된 나라들에 대한 사대주의와 숭배주의가 적지 않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존엄을 고수하고 새 사회를 성과적으로 건설하려면 사대주의와 숭배주의를 철저히 없애야 합니다. 사대주의와 숭배주의를 없애지 않으면 나라와 민족의 존엄을 지킬수 없을뿐아니라 나중에는 나라와 민족이 망하게 됩니다. 지난날 우리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된것도 부패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이 자기 인민의 힘을 믿지 않고 큰 나라들에 대한 사대주의를 하였기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때 우리 나라를 방문한 쥴리어스 케이. 니에레레에게 남남협조를 발전시키자면 발전도상나라들이 사대주의를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가 그전에는 탄자니아대통령과 탄자니아혁명당 위원장으로 사업하였으며 얼마전까지는 남위원회 위원장사업을 하였습니다. 남위원회는 발전도상나라들사이의 협조와 그 나라들의 개발전략을 연구하고 건의하는 비정부적기구인데 남이라는것은 발전도상나라들을 념두에 두고 부르는 말입니다. 세계적으로 발전된 나라들은 주로 북쪽에 있고 발전도상나라들은 남쪽에 있다고 하여 발전도상나라들과 발전된 나라들사이의 관계를 남북관계, 발전도상나라들사이의 관계를 남남관계라고 부르게 되였습니다. 니에레레는 나와 친한 사이기때문에 우리 나라를 여러번 방문하였습니다. 내가 그에게 당신이 남위원회 위원장사업을 몇해동안 하였는데 얻은 결론이 무엇인가고 물었더니 그는 모든 발전도상나라들이 자력갱생하고 단결하여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것은 발전도상나라 집권자들속에서 큰 나라와 발전된 나라들에 대한 사대주의와 숭배주의를 없애는것이다, 발전도상나라 집권자들속에서 사대주의와 숭배주의를 없애지 않고서는 자력갱생도 할수 없고 단결도 하기 힘들다, 남위원회가 발전도상나라들의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이바지하려면 집권자들속에서 사대주의와 숭배주의를 없애기 위한 사업을 잘해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니에레레는 나의 말을 듣고 정말 옳은 말이라고 하면서 남남협조를 발전시키는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알게 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대주의를 없애고 자력갱생한다는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자력갱생이란 말자체도 리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자력갱생한다는데 대하여 사대주의와 숭배주의에 물젖어있는 사람들은 더 말할것도 없고 크고 발전된 나라 사람들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해갑문을 건설하고 세상에 공포한 다음 어느 한 발전된 나라에서 큰 자본가가 왔다간 일이 있는데 그는 서해갑문을 참관하면서 갑문을 누가 설계하였는가고 물었습니다. 우리 일군이 그에게 우리 자체로 설계하였다고 하자 그는 이런 갑문은 큰 나라 사람들도 설계하기 힘들것이다, 혹시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해주지 않았는가고 고개를 기웃거리면서 우리가 자체로 설계한데 대하여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서해갑문을 우리 자체의 힘으로 설계하여 건설한것이 사실이라는것을 알게 되자 이번에는 갑문을 건설하는데 자금이 얼마나 들었는가고 물었습니다. 우리 일군이 당신은 자본가인것만큼 돈계산을 잘하겠는데 자금이 얼마나 들었을것 같은가고 물으니 그는 다시 갑문을 쭉 훑어보고나서 한 70억US$ 들었을것 같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 일군이 그에게 이 갑문을 건설하는데 한 40억US$ 들었다고 하자 그는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났는가, 다른 나라에 빚을 많이 졌겠는데 자기가 돈을 좀 꿔줄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일군이 그에게 우리는 우리의 설비와 자재, 로력으로 갑문을 건설하였기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돈을 꿔쓴것이 없다, 당신이 우리한테 돈을 꿔주겠다고 하는데 얼마나 꿔주겠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당신네가 요구하면 한 10억US$ 꿔줄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일군이 그에게 10억US$같은것은 필요없다, 당신이 돈을 꿔주겠으면 한 2, 000억US$쯤 꿔달라고 하니 그는 입을 딱 벌리면서 자기한테 그만한 돈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조선에서 자체의 힘으로 훌륭한것을 건설하였다고 말하고 돌아갔습니다.

우리 당의 령도에 무한히 충실한 우리 인민들과 인민군군인들이 참말로 큰일을 하였습니다. 우리 일군들이 서해갑문에 기념비를 세우겠다고 하면서 나에게 거기에 새길 글을 써달라고 하기에 서해갑문은 우리 인민들과 인민군군인들이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을 높이 발휘하여 건설한 위대한 창조물이라는 내용으로 써주었습니다.

나는 한달에 10일정도 평양에서 사업하고 20일정도는 지방에 다니면서 현지에서 지도사업을 합니다. 그래서 함경북도와 함경남도, 량강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황해남도, 황해북도를 비롯한 전국의 모든 도들에 자주 나가군 합니다.

얼마후에 나는 자강도를 현지에서 지도하려고 합니다. 자강도는 농사를 지을 땅이 얼마 없고 산이 많은곳입니다. 그래서 나는 자강도에서 강냉이같은것만 심지말고 비탈밭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고치를 많이 생산할데 대한 과업을 주었습니다. 자강도에서 누에고치를 생산하여 비단실을 뽑아 팔거나 비단천을 짜서 팔면 잘살수 있습니다. 자강도에서 비탈밭에 강냉이를 심어서는 먹는 문제를 해결할수 없지만 뽕밭을 조성하고 누에를 치면 로력을 적게 들이면서도 먹는 문제를 쉽게 해결할수 있습니다. 자강도에 뽕밭이 한 1만정보 조성되여있습니다. 지금 누에고치를 뽕밭 1정보에서 300∼500kg정도 생산하는데 앞으로 뽕밭에 관수를 하고 비료를 넉넉히 주면 누에고치를 더 많이 생산할수 있습니다. 자강도에서 누에고치를 뽕밭정보당 1t씩 생산하면 1만t이상 생산할수 있습니다. 누에고치 1만t을 생산하면 쌀을 몇십만t 사올수 있는데 그것이면 자강도사람들이 먹고도 남을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늘 자강도사람들에게 강냉이만 심느라고 하지 말고 뽕밭을 많이 조성하여 누에고치생산을 늘이라고 강조하면서 그렇게 하면 흰쌀밥에 고기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을 쓰고 잘살수 있다고 말해주군 합니다.

우리가 사회주의건설에서 중요하게 내세우고있는 당면한 투쟁목표는 전체 인민들이 흰쌀밥에 고기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을 쓰고 살게 하자는것입니다. 이 목표가 실현되면 사회주의건설을 완성하였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선생이 내가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경제적타산이 밝다고 하는데 나는 늘 우리 인민들에게서 배웁니다. 나는 언제나 인민들속에 들어가 그들을 배워주기도 하고 그들로부터 배우기도 합니다. 선생이 나의 령도밑에 조선이 훌륭한 발전을 이룩하여 세계의 모범의 나라로 될것이라고 하는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지방에 내려가 현지에서 지도사업을 하면서 우리 나라를 찾아오는 다른 나라 사람들을 자주 만나군 합니다. 요즘에도 일본교도통신사 사장을 만나 그가 제기한 질문에 대답을 주었습니다.

그전에는 일본에서 출판보도계 인사들과 정계, 사회계 인사들이 우리 나라를 많이 방문하였는데 최근년간 일본정부가 우리 나라에 대한 《제재조치》를 취하면서부터 왕래가 적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에 가네마루 싱선생이 왔다간 다음 일본의 각계인사들이 우리 나라에 많이 찾아오고있습니다. 가네마루 싱선생은 한때 방위청장관도 하고 부수상도 한 사람으로서 자민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일본교도통신사 사장은 나에게 가네마루 싱선생의 인사를 전한 다음 조일 두 나라사이의 관계개선을 위하여 풀어야 할 문제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원래 조일국교정상화문제는 일본사람들이 먼저 우리에게 제기한 문제입니다. 지난해에 일본의 자유민주당대표단과 일본사회당대표단이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내가 그들을 만나주었습니다. 그때 가네마루 싱선생은 나에게 지난날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고 조선사람들에게 불행을 들씌운것은 잘못된것이라고 하면서 그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일본이 과거 36년간 조선인민에게 끼친 손해에 대하여 보상하며 해방후 45년동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끼친 손해에 대하여서도 보상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조일 두 나라사이의 관계를 정상화하자고 하였습니다.

나는 가네마루 싱선생이 거듭 사죄하면서 조일국교정상화문제를 제기하기때문에 과거 일본이 우리 인민에게 끼친 손실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고 조일국교정상화를 실현하자는 그의 제기에 동의를 주었습니다. 이렇게 되여 조일국교정상화문제가 일정에 오르게 되였습니다.

나는 일본교도통신사 사장에게 조일국교정상화문제가 제기된 경위에 대하여 말해주면서 조일 두 나라가 다같이 자주적립장에 튼튼히 서서 문제를 성실하게 협의해나간다면 조일관계정상화문제가 원만히 해결될수 있다, 조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이 아직 큰 진전을 가져오지 못하고있는데 물론 낯선 사람들끼리 마주앉아 회담을 하는 조건에서 론쟁문제도 있을수 있다, 그러나 조일관계를 개선하는것이 두 나라 인민들의 공동의 념원이고 두 나라가 사이좋게 지내려는데 목적이 있는것만큼 회담에서는 이러한 념원과 목적에 맞게 쌍방이 좋은 말부터 하여야 한다, 회담에서 상대방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거나 핵사찰문제와 같이 기본문제와 관계없는 문제를 들고나온다면 회담을 지연시키는 결과밖에 가져올것이 없다, 회담쌍방이 다같이 노력하여 우선 국교정상화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그 다음에 다른 문제들을 하나씩 협의해나간다면 모든 문제를 다 원만히 해결할수 있을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교도통신사 사장은 좋은 말씀을 해주어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교도통신사 사장은 조선의 통일문제와 동서독일의 통일문제사이에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가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동서독일이 하나로 통일된데 대하여 반대하지 않는다, 미국대통령 부쉬는 베를린장벽이 허물어진데 대해서는 환성을 올렸으나 조선의 북과 남을 갈라놓고있는 콩크리트장벽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있다고 까밝혔습니다. 군사분계선 남쪽에 콩크리트장벽이 있다는것은 세계 여러 나라의 저명한 인사들로 무어진 콩크리트장벽국제조사단이 우리 나라에 와서 그것을 촬영하여 공개하였기때문에 세상사람들이 다 알고있습니다. 일본교도통신사 사장도 콩크리트장벽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본과 구라파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미국의 압력이 두려워 이에 대하여 보도도 하지 않고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도통신사 사장에게 일본이 미국의 말이라면 겁이 나서 벌벌 떨지 말고 자주적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교도통신사 사장이 제기한 질문에 준 나의 대답전문이 인차 발표될것입니다.

일본이 자주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데 대해서는 그전에 우리 나라를 방문한 일본의 자유민주당유지의원단을 만났을 때에도 말해주었습니다. 그때 내가 그들과 담화하면서 일본은 자주성이 없는 나라라고 말하였더니 한 젊은 사람이 일어나서 일본이 왜 자주성이 없다고 하는가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나이많은 사람이 일어나서 김일성주석님의 말씀이 옳다, 일본사람들이 미국사람들에게 덮어놓고 굽실거리는데 무슨 자주성이 있는가고 그에게 면박을 주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남조선《정권》도 자주성이 없다고 하면서 갓에 비유하여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남조선《정권》이 옛날 조선사람들이 쓰고다니던 갓과 같다, 갓에는 끈이 두개 있는데 그것을 잡아매야 갓이 바람에 날려가지 않고 사람의 머리에 붙어있다, 남조선《정권》의 두끈가운데서 한끈은 미국이고 다른 한끈은 일본이다, 지금 남조선《정권》은 미국과 일본의 두끈에 의하여 유지되고있는데 한끈만 끊어져도 끈떨어진 갓처럼 되고 말것이라고 하였더니 그들은 나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 박수를 쳤습니다. 그때 한 젊은 사람이 일어서서 남조선《정권》의 두끈가운데서 일본끈을 끊어놓으면 미국끈만 남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남조선《정권》이 무너지게 될것이라고 하면서 일본끈은 자기네가 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대표단 단장이 아직은 일본끈을 끊을 힘이 없으므로 완전히 끊기는 어렵지만 투쟁을 벌려 일본끈을 허부룩하게 만들어놓을수는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일본이 군국주의길로 나아가지 말아야 한다는데 대해서도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되는것은 좋지만 군국주의길로 나아가는것은 좋지 않다, 지난날 수많은 아세아인민들이 일본사람들한테 피해를 입었는데 일본이 다시 군국주의길로 나아가면 아세아와 세계 인민들로부터 증오를 받을수 있다, 일본은 자그마한 섬나라로서 원료와 연료의 대부분을 다른 나라에서 사다쓰는데 일본이 군국주의길로 나아가면 제3세계나라들을 비롯한 진보적나라들이 일본을 봉쇄하게 될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의 공장굴뚝들에서 나는 연기가 며칠사이에 다 멎을수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일본의 자유민주당유지의원단에는 리향란이라는 녀성이 있었는데 그는 나의 말을 듣고 주석님께서 하신 말씀이 다 옳다고 하면서 자기는 주석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하였습니다.

리향란은 인물도 잘나고 젊었을 때 노래도 잘 불렀습니다. 그는 중국사람의 양딸로서 이전에 중국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일본관동군에 복무하였습니다. 내가 그에게 당신이 리향란이 아닌가고 물었더니 그는 주석님께서 어떻게 자기의 이름까지 아시는가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빨찌산투쟁을 할 때부터 당신에 대하여 잘 알고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날 저녁식사때 대표단 단장이 그에게 조선노래를 부르라고 하니 그는 조선노래를 준비하지 못하였는데 후에 잘 준비해가지고 와서 부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후에 리향란이 다시 우리 나라에 와서 나를 만났는데 그때 노래를 하나 부르겠다고 하기에 부르라고 하였더니 우리 나라 노래 《수령님 밤이 퍽 깊었습니다》를 불렀습니다.

나는 지난해에 가네마루 싱선생이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을 때에도 그에게 일본이 군국주의길로 나아가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그전에 일본의 자유민주당유지의원단을 만났을 때 일본이 군국주의길로 나아가는것은 좋지 않다고 하였는데 일본의 정치인들이 군국주의를 하지 않은것은 잘한 일이다, 만일 일본이 군국주의길로 나아갔더라면 지금처럼 부자가 되지 못하였을것이다, 미국이 그전에는 세계에서 제일 부자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일본의 채무국으로 되였다, 일본이 미국의 채권국으로 된것은 군국주의길로 나아가지 않았기때문이다, 미국은 《별세계전쟁》계획이요 뭐요 하면서 군비경쟁에 돈을 많이 밀어넣다보니 빈털터리가 되고말았다, 그러나 일본은 《별세계전쟁》계획과 같은 군비경쟁에 참가하지 않다보니 지금은 세계에서 큰 부자의 나라로 되지 않았는가, 일본이 더 발전하려면 앞으로도 군국주의를 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일본은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원료와 연료를 사들여다 가공공업을 발전시키고있는데 일본이 군국주의를 하여 세계적으로 신용을 잃으면 그때에는 미국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미국은 큰 나라이고 원료와 연료를 많이 가지고있기때문에 세계적으로 인심을 잃어도 어느 정도 살아나갈수 있지만 일본은 자그마한 섬나라로서 원료와 연료를 다른 나라에 의존하고있기때문에 세계적으로 신용을 잃으면 살아나갈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그전에 김일성주석께서 일본의 자유민주당유지의원단을 만나 일본이 군국주의를 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신 말씀이 옳다고 하면서 일본이 군국주의를 하지 않고있다고 하였습니다. 가네마루 싱은 일본에 돌아가서 자기가 최대의 경의를 표시하게 되는분은 김일성주석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회주의건설을 힘있게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민족의 최대의 숙원인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고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광범한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여 조국광복을 이룩한것처럼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여 조국을 통일하려고 합니다.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의 앞길에는 많은 난관과 장애가 가로놓여있습니다. 공화국북반부 인민들과 남조선인민들, 해외동포들이 다같이 조국통일을 바라고있지만 남조선당국자들은 조국통일을 한사코 반대하고있습니다.

지난해부터 북과 남사이에 고위급회담이 진행되고있습니다. 북남고위급회담에서 우리측은 남측에 북과 남사이에 불가침선언을 채택하자, 북이 《남침》하지 않고 남이 북침하지 않겠다고 하는 조건에서 그것을 담보하는 불가침선언을 채택하지 못할 조건이 없지 않는가, 당신들이 북과 남사이에 불가침선언을 채택하는것을 한사코 반대하면서 화해와 협력에 관한 기본관계합의서나 채택하자고 고집하는데 그러면 불가침선언과 기본관계합의서를 하나의 문건으로 채택하자고 들이댔습니다. 남측 수석대표는 불가침선언을 채택하는것은 최고위급회담에서 론의할 문제이지 총리회담에서 론의할 문제가 아니라고 하면서 그것을 채택하는것을 반대하기때문에 우리측 단장은 그에게 나는 김일성주석님의 위임을 받고 당신은 로태우《대통령》의 위임을 받고 회담장에 나오지 않았는가, 그러니 우리가 협의하여 불가침선언초안을 만들어 최고위급회담에 제기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남측 수석대표는 미국이 불가침선언을 채택하는것을 반대하리라는것이 뻔하기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습니다. 북과 남사이에 불가침선언이 채택되면 미군이 남조선에 더이상 주둔해있을 구실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미국은 《남침》을 막는다는 구실밑에 남조선에 계속 머물러있으려고 불가침선언을 채택하지 못하게 방해하고있습니다. 미국이 반대하면 남조선당국은 어쩌지 못합니다.

북남고위급회담은 미국과 남조선당국자들이 벌린 《팀 스피리트》합동군사연습으로 말미암아 중단되였는데 지금 재개하려고 하여도 그렇게 할 형편이 못됩니다. 제3차 북남고위급회담이 있은 다음 남조선에서는 《국무총리》가 두번이나 바뀌였습니다.

지금 남조선청년학생들이 조국통일을 위하여 잘 싸우고있습니다. 그들가운데는 남조선당국자들의 파쑈정책과 반통일정책에 항거하여 분신자결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습니다.

조국통일은 어떻게 하나 1990년대에 실현하여야 합니다.

선생이 이번에 백두산과 묘향산, 금강산을 비롯하여 조국의 여러곳을 돌아보았다고 하는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백두산천지는 아직 얼음이 풀리지 않았을것입니다. 백두산일대는 기온이 낮기때문에 5월말경에도 나무잎이 조금 돋아나는 정도이고 천지의 얼음은 녹지 않습니다. 어느해인가 혜산시에서 진행된 보천보전투승리기념행사에 참가하였던 총련 부의장이 백두산에 올라가보겠다고 하기에 사람들을 동원하여 눈을 치고 올라가보게 한 일이 있는데 그때에도 천지가 얼어붙어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백두산에 궤도식삭도를 놓았으므로 그것을 리용하면 백두산에 쉽게 올라갈수 있을것입니다.

선생이 삼지연대기념비가 걸작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김정일동지의 지도밑에 우리 당원들과 근로자들이 세운것입니다. 김정일동지는 해당 부문의 일군들을 데리고 현지에 가서 동상과 군상을 비롯한 삼지연기념비의 건축물들을 일떠세우는 사업을 직접 지도하였습니다. 대홍단에도 기념탑이 있는데 후에 오면 그것도 가보는것이 좋겠습니다.

선생이 묘향산의 상원암과 만폭동을 돌아보고 하비로입구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니 기쁩니다. 선생이 말한바와 같이 묘향산은 어느 모로 보나 절경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이름있는 중이였던 서산대사도 온 팔도강산을 돌아다니다가 묘향산이 제일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그곳에 있는 보현사에서 도를 닦았다고 합니다. 그는 묘향산에서 자기 생애를 마쳤는데 애국심이 높은 중이였습니다. 서산대사는 비록 불교를 믿는 중이였지만 임진왜란때 사명당과 같은 이름있는 중들까지 동원하여 승병부대를 조직해가지고 평양성을 탈환하는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원래 불교에는 불살생이라는 교리가 있지만 서산대사는 우리 나라에 들어온 외래침략자들을 가차없이 징벌하였습니다. 왜놈들이 쳐들어오자 의주 통군정까지 피난을 갔던 선조왕이 서울에 돌아가서 서산대사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고 그에게 큰 벼슬자리를 주려고 하였지만 그는 모든것을 다 사양하고 묘향산으로 되돌아와 조용히 한생을 보냈습니다. 묘향산에 금강굴이 있는데 그곳이 서산대사의 거처였다고 합니다.

묘향산에 대한 전설도 많습니다. 우리 나라의 시조왕이라고 하는 단군도 묘향산의 경치가 하도 좋아 하늘에서 거기에 내려와 나라를 다스렸다는 전설이 전해오고있습니다. 묘향산에 있는 단군굴이 단군이 살던곳이라고 하며 불영대 건너편의 산에 묘하게 서있는 바위가 단군이 활쏘기련습을 하던 표적이라고 합니다. 그 바위를 천주석이라고 부릅니다.

묘향산은 오늘 근로자들의 좋은 문화휴식터로 되였습니다. 지금 묘향산에는 매일 3, 000∼4, 000명, 많을 때에는 5, 000명이상의 탐승객들이 찾아오고있습니다. 묘향산에는 다른 나라 사람들도 많이 찾아오고있는데 그들도 거기에 와서 보고는 경치가 너무 좋아 모두 떠나기를 아쉬워한다고 합니다.

내가 해방직후에 묘향산에 와보니 일제놈들이 운영하던 금광이 있었습니다. 그 금광을 계속 운영하면 묘향산의 아름다운 경치가 파괴되고 맑은 강물도 오염될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금광을 페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경제지도일군들은 강물의 오염을 방지하면서 금광을 계속 운영하자고 제기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돈은 다른 방법으로 벌자, 묘향산의 금광에서 천만금이 나온다고 해도 묘향산의 아름다운 경치와 바꿀수 없고 조국의 명산에 손상을 줄수 없다, 그러니 금광은 페광하자고 하였습니다. 해방전에 일제놈들은 묘향산에 금광을 차려놓고 금을 략탈해갔을뿐아니라 거기에서 아름드리 좋은 나무도 마구 찍어갔습니다. 그들은 산림을 《보호》한다는 구실밑에 묘향산의 나무를 조선사람들은 한대도 찍지 못하게 하면서 자기들은 마음대로 찍어 썼습니다. 우리 조선사람들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노예의 처지에 있다보니 묘향산을 잘 보호하려고 하여도 그렇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제국주의자들은 자기의 리속을 채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무제한한 지배와 략탈은 그들의 생존방식입니다.

조국해방전쟁시기에 미제의 무차별폭격으로 말미암아 묘향산의 력사유적과 나무가 많이 파괴되고 불타버렸습니다. 미제는 인민군대가 산에 숨지 못하게 하느라고 비행기로 폭탄과 소이탄을 마구 떨구어 나무를 없애버렸습니다. 정전이 된지 거의 40년이 되여오는데 그 기간에 나무들이 많이 자랐습니다. 묘향산의 골짜기에 흐르는 강물에 칠색송어가 많습니다. 해방전에 미국사람들이 운산에 와서 금을 캐갔는데 그때 그들이 칠색송어를 가져다 퍼뜨렸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일제가 망하자 일제의 잔재를 모조리 없애버린다고 하면서 칠색송어도 잡아없애려고 하였습니다. 아마 우리 사람들이 칠색송어를 일본사람들이 가져다 퍼뜨린줄로 알고있었던것 같습니다. 해방후에 칠색송어를 마구 잡았기때문에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내가 그 사실을 알고 나쁜것이야 제국주의이지 물고기야 왜 없애겠는가, 잘 길러 보호증식시켜야 한다고 말해주고 칠색송어를 널리 기르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은 칠색송어를 여러곳에서 많이 기르고있습니다. 선생이 삼지연군 포태양어장에 가보았으면 알겠지만 백두산지구에서도 칠색송어를 기르고있습니다. 칠색송어를 바다에서도 기를수 있습니다. 칠색송어는 찬물고기이기때문에 물온도가 20℃이상 되는곳에서는 기르기 힘듭니다. 칠색송어는 가시가 적고 맛이 아주 좋습니다. 칠색송어는 회를 쳐먹어도 맛있고 국을 끓여먹어도 맛있습니다.

해방전에 운산에 와서 금을 캐가던 미국사람들이 강냉이종자도 가져다 퍼뜨렸는데 미국은 강냉이농사를 하여 부자가 되였습니다. 물론 우리 나라에서도 옛날부터 강냉이를 조금씩 심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강냉이를 터밭같은데 조금 심었다가 풋강냉이로 먹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조와 수수, 피 같은것을 많이 심었는데 이런 작물은 다 수확고가 낮습니다. 조는 아무리 잘되여도 정보당 800kg 정도밖에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강냉이는 수확고가 높습니다. 나는 전후에 《강냉이는 밭곡식의 왕이다.》라는 구호를 내놓고 강냉이를 대대적으로 심도록 하였습니다. 그때만 하여도 우리 농민들이 강냉이를 심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조나 수수 농사만 해오던 나이많은 농민들을 설복하느라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지금은 누구도 강냉이농사를 하는데 대하여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강냉이를 많이 심는데 평지대에서는 정보당 8∼9t씩 내며 어떤데서는 10t이상 내고있습니다. 강냉이를 잘 가공하면 별의별 음식을 다 만들어먹을수 있습니다.

선생이 조선식건물의 건축미가 아주 훌륭하며 지붕에 청기와를 이은것이 무게가 있어보인다고 하는데 옳은 말입니다.

리조봉건시기에 주변의 큰 나라가 대국주의를 얼마나 심하게 하였던지 청기와를 자기들만 쓰고 우리 나라에서는 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경복궁과 창덕궁에도 청기와를 잇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리조봉건통치배들은 사대주의에 빠져 덮어놓고 큰 나라에 굴종하다보니 자기 나라 왕궁에도 검은 기와밖에 잇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은 우리 나라에서 청기와를 대대적으로 생산하고있습니다. 우리가 자체로 생산한 청기와를 인민대학습당을 비롯한 기념비적인 조선식건물들에 이었습니다. 조선식건축물에 청기와를 이으면 건축미가 더 나고 무게가 더 있어보입니다.

선생이 앞으로 조국에 다시 오면 함경북도에도 가보는것이 좋겠습니다. 함경북도는 우리 나라의 동북부에 위치하고있으므로 날씨가 좀 찬편이지만 백두산지구보다는 차지 않습니다. 함경북도의 날씨가 요즘 괜찮을것입니다. 함경북도는 바다를 끼고있어 경치가 좋은곳이 많은데 그가운데서도 칠보산의 경치가 제일 아름답습니다. 칠보산은 경치가 아름다운데다가 온천까지 있어 더욱 좋습니다. 칠보산에 있는 온천물의 온도는 60∼70℃입니다.

선생이 이번에 조국에 와서 많은것을 보았다고 하니 나도 기쁩니다. 선생과 부인이 아직 정정하고 걷는데도 지장이 없으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에게는 병이 없고 부인에게 눈병이 있는데 백내장초기라면 고려약으로 치료하여보는것이 좋겠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보약재로 만든 고려약은 백내장치료에도 좋고 암을 비롯한 여러가지 병을 예방하는데도 좋은 약입니다. 선생의 부인이 신약을 써보고 효과가 없으면 보약재로 만든 고려약을 써보는것이 좋겠습니다. 독일의 녀류작가 루이저 린저가 우리 나라에 해마다 오는데 처음에 왔을 때 눈이 나빠 영화를 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영화도 보지 못하면 사는 재미가 있는가, 내가 우리 의사들에게 말하여 고려약을 지어주도록 하겠으니 그약을 써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우리 의사들이 지어준 고려약을 몇년동안 먹었는데 눈이 좋아져 지금은 영화도 본다고 합니다. 루이저 린저는 독일에서 반파쑈투쟁에 참가한 유명한 작가입니다. 서방나라들에서 그 녀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올해에도 우리 나라에 오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11번째로 우리 나라를 방문하게 됩니다. 그는 해마다 7월경에 우리 나라에 와서 백두산과 금강산을 비롯하여 공기좋고 경치좋은곳에서 한달가량 휴식하다 가군 합니다. 그는 우리 나라에 오기 시작한 다음부터 남조선에 가지 않습니다. 그가 남조선에 갔을 때 남조선사람들이 그에게 밀정을 붙인것 같습니다. 그는 작가인 자기에게 정탐군을 붙였다고 하면서 다시는 남조선에 가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루이저 린저는 지금 로마에서 살고있는데 올해에 생일 80돐을 쇤다고 하기에 그에게 선물을 보내주었습니다.

우리 나라 고려의학은 서양의학보다 낫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서양의학에서 수술을 하거나 살균을 하는 기술은 발전하였으나 고려의학에서처럼 보약을 가지고 치료하는 기술은 발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고려의학에서는 여러가지 보약을 많이 쓰고있습니다. 고려의학은 병을 미리 막는 예방의학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우리 나라가 인구사망률이 제일 낮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의사담당구역제를 실시하여 사람들이 병에 걸리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기때문에 죽는 사람이 얼마 없습니다. 의사담당구역제는 의사가 일정한 주민세대를 맡아가지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진찰도 하고 치료도 해주면서 병을 미리 예방하는 제도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의사들은 자기가 맡은 세대들에서 병이 나지 않도록 책임적으로 돌봐줄 의무를 지니고있습니다. 의사담당구역제는 인민이 모든것의 주인으로 되고 모든것이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에서만 볼수 있는 우월한 보건제도입니다.

나는 재미교포 김성락목사가 조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를 만나 담화하면서 정상적으로 진찰을 받는가고 물어본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는 미국에서는 혈압을 한번 재자고 하여도 돈이 많이 들기때문에 자기가 받는 년금을 가지고서는 진찰을 정상적으로 받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하면서 자기는 혈압이 좀 높기때문에 혈압계를 하나 사다놓고 내외가 서로 혈압을 재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우리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라고 하였더니 감사하다고 하면서 조선은 주석님께서 무상치료제도를 세워주셨기때문에 천당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그와 점심식사를 같이하면서 선생은 목사인데 기도를 드려야 하지 않는가고 하였더니 그는 기도를 드리면서 이 땅우에 천국을 건설하신 김일성주석님의 만수무강을 간절히 빈다고 하였습니다.

손원태선생이 앞으로 조국에 자주 오는것이 좋겠습니다. 선생이 조국에 오면 나에게 페를 끼친다고 하는데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선생은 나의 손님이므로 마땅히 잘 대우해주어야 합니다.

선생이 지금 미국에 가지고있는 한 30정보 되는 땅을 팔면 려비도 생기고 몸도 자연스럽게 뺄수 있다고 하는데 앞으로 해마다 오는것이 좋겠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젊은 시절의 동지들이 그립습니다. 차광수를 비롯하여 혁명투쟁을 같이하다가 희생된 동지들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하게 납니다. 나는 초기혁명활동시기에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대상하였는데 그후 항일무장투쟁을 하느라고 그들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김정일동지가 당사업전반을 맡아 지도하면서부터 나의 혁명활동력사자료들을 발굴정리하여 선전하기 시작하였는데 연고자들도 많이 찾아내고 자료도 많이 발굴하였습니다. 그전에는 내가 이런 사업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나는 나의 혁명활동과 관련한 영화도 만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나의 혁명활동과 관련된 자료들을 발굴하고 정리하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한 15년 되는데 그 이전부터 이 사업을 전개하였더라면 연고자들을 더 많이 찾아내고 자료도 더 많이 발굴할수 있었을것입니다.

지금 조선인길림소년회 성원들가운데서 살아있는 사람은 선생과 황귀헌, 곽연봉밖에 없습니다. 나는 황귀헌동무와 1928년에 헤여진후 나라가 해방될 때까지는 한번도 만나보지 못하였습니다. 황귀헌동무를 해방직후에 만나보고 그후 그가 조국에 나온 다음 다시 만나보았습니다. 황귀헌동무가 1947년에 나를 만났다고 하는것을 보면 기억력이 좋습니다. 그는 시도 잘 씁니다. 언제인가 그가 시를 써서 나에게 보내온것을 본일이 있습니다.

나는 선생이 해마다 조국에 와서 나와 회포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선생이 다음해에 나의 생일 80돐에 오겠다고 하는데 부인과 함께 오는것이 좋겠습니다. 다음해에 올 때 아들딸들을 모두 데리고 오면 더욱 좋습니다.

선생의 부인이 이번에 조국에 오면 오빠인 리유성선생을 만나보게 되리라고 생각하였겠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 서운하게 되였습니다. 리유성선생은 나이가 많은데다 간경변으로 앓았기때문에 어쩔수 없었다고 합니다. 올해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참가하였던 재미교포예술인이 리유성선생의 집을 방문하여 그를 만나보고 갔는데 그때 벌써 그는 혼수상태에 있었다고 합니다. 간경변은 현대의학으로도 고치기 힘들다고 합니다.

리유성선생은 세상을 떠났지만 후대교육사업에서 공로가 있습니다. 그는 조국해방전쟁시기에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조선인민군협주단을 따라 우리 당의 품을 찾아왔으며 오래동안 평양음악무용대학 교원으로 일하면서 재능있는 예술인들을 많이 키워냈습니다. 그는 자기앞에 맡겨진 혁명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당과 인민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리유성의 안해가 선생에게 나를 만나면 자기의 인사를 전해달라고 하였다는데 그도 배우생활을 하였습니다.

선생이 나를 형님처럼 생각한다고 하는데 선생의 생일 80돐은 조국에 와서 쇠는것이 좋겠습니다. 선생의 생일이 8월 11일이면 8. 15명절도 끼우고 우리 나라의 계절도 아주 좋은 때입니다. 그때에 오면 내가 동생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마음으로 선생의 80돐생일상을 성의껏 차려주겠습니다. 그때에 와서 푹 쉬면서 낚시질도 하면 좋을것입니다.

선생이 해마다 조국에 오다가 늙어서 다니기 힘들면 조국에 와서 살아도 됩니다. 선생이 조국에 와서 우리와 함께 살면 좋을것입니다. 지금 나는 나이가 많기때문에 당과 국가의 전반사업을 김정일동지에게 맡기고 중요한 문제들만 김정일동지토론하여 처리하면서 대외활동을 많이 하고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정정하기때문에 100살은 넘어살것 같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도 10년은 더 일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선생은 나보다 두살 아래인데 머리가 하얗게 세였습니다. 아마 선생의 집안은 머리가 빨리 세는 집안인것 같습니다. 나도 이제는 머리가 많이 세였습니다. 우리 집안은 원래 머리가 세지 않는데 나만은 머리가 많이 세였습니다.

다음해에 리유성의 딸과 사위가 나의 생일 80돐에 오겠다고 하면 좋습니다. 그들을 다 오라고 하여야 하겠습니다. 미국에서 살고있는 의학박사가 우리 나라에 오겠다고 한다는데 그도 오라고 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미국에서 조선사람들이 조국을 방문하는데 대하여 통제하지 않으므로 오고싶은 사람은 누구나 다 올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에서 살고있는 동포들이 조국을 방문하면 언제나 환영할것입니다.

선생이 손인실을 만나면 나의 인사를 전해주기 바랍니다. 그의 나이가 74살이면 이제는 그도 늙었습니다.

선생이 사향가를 불렀는데 감사합니다. 나는 이번에 선생과의 뜻깊은 상봉을 기념하여 나의 이름이 새겨진 손목시계를 선물로 준비하였습니다. 다른 선물이 더 있지만 손목시계는 내가 직접 채워주겠습니다. 선생과 부인에게 나의 이름이 새겨진 손목시계를 선물로 주는것은 나를 영원히 친구로 생각하고 잊지 말라는것입니다.

선생이 돌아가면 편지를 자주 하는것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