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김일성주석님을 존경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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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 김현환 -

내가 김일성주석님을 만나뵈온 것은 1989년 평양에서 진행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때였다.

재미동포들도 약 70여명이 참석하였고 그때 나는 재미동포 대표들과 함께 김일성주석님을 직접 뵙는 기회를 가졌다. 주석께서는 우리 대표들을 보시자 반갑습니다, 우리 연설은 생략하고 식사나 같이합시다 라고 하시면서 우리를 식탁으로 안내하시었다.

나는 그때 대표들 중에서 나이도 제일 어렸고 코수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제일 말석 자리에 앉다보니 주석님과 바로 마주보며 앉게 되였다. 주석님께서는 긴장한 우리들을 의식하시고 여기 까만 감자떡이 있는데 한번 맛을 보라고 하시며 감자는 얼어도 먹고 썩어도 먹습니다, 감자는 버릴게 없습니다, 나는 감자박사입니다라고 큰소리로 말씀하시면서 손수 감자떡을 우리에게 권하시었다. 그러시면서 항일무장투쟁시기 인민들이 산에서 감자를 캐는 척 하면서 유격대를 위하여 남겨놓은 것을 알면서도 적과 대치한 상태에서 감자를 캐러 내려가지 못해 감자가 썩는 경우가 있으나 나중에 적들이 후퇴한 후 썩은 감자를 캐서 떡도 해먹고 국수도 해먹던 일을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시었다.

주석님은 국가원수라기보다는 가까운 이웃 할아버지처럼 느껴졌다. 그날 주석님께서는 우리 재미동포 대표들에게 많은 동포대중을 묶어 세워 애국사업에 기여하도록 하라고 하시면서 단결해야 힘이 있다고 강조하시었다.

나는 1991년 4월명절과 1992년 주석님 생신 80돌이 되는 4월 명절때 조국통일 북아메리카주협회 대표들과 함께 주석님을 다시 만나 식사를 같이하는 기회를 가졌다. 주석님을 뵈올 때마다 계속 강조하신 것은 재미동포들의 통일단결이었다.

주석님을 마지막으로 뵈옵고난지 2년후 뜻하지 않게 주석께서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평양을 향하여 달려갔다. 주석님의 영구 앞에 나는 엎디어 엉엉 울었다.

인자하신 주석님의 영상은 내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계신다.

나는 주석님을 생각하며 자주 그분의 회고록과 전집, 그리고 전기를 읽으며 역사에는 결코 우연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였다.

주석님께서 민중의 지도자로서 그렇게 존경을 받으시게 된 것은 우선 그분의 가족의 전통적인 애국심 특히 아버님이신 김형직선생님과 어머님 강반석여사의 애국심의 영향이 컸다.

김형직선생님의 지원의 사상은 개인의 출세를 위한 원대한 뜻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 참된 보람과 행복을 찾는 혁명적 인생관을 가지고 대를 이어가며 투쟁하여 기어이 나라의 해방을 이룩해야 한다는 백절불굴의 혁명정신을 뜻한다.

언제인가 김형직선생님은 아드님이신 주석님과 주석님의 할아버님, 할머님 앞에서 다음과 같이 지원의 사상을 말씀하신적이 있다.

《나라를 독립시키지 못할 바에야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내 몸이 찢기여 가루가 될지언정 일본놈들과 싸워이겨야 하겠습니다. 내가 싸우다 쓰러지면 아들이 하고 아들이 싸우다 못하면 손자가 싸워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김형직선생님의 사상을 주석님자신이 그대로 이어받아 항일혁명투쟁을 전개하시었고 현재 김정일국방위원장께서 대를 이어 민족의 자주위업을 수행해 나가고 계신다.

또한 김형직선생님으로부터 주석님께서 가장 깊게 받으신 교훈은 혁명동지에 대한 사상이다.

주석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님께서 조선독립을 위한 길에서 동지 한명을 얻기 위하여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다니시는 것을 보시었다.

주석님께서는 《나는 어려서부터 이렇게 아버지를 통하여 동지를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도리를 배웠다.》라고 자신의 회고록에 쓰시었다.

또한 주석님께서는 회고록에서 나라와 민중을 위한 진심만 있으면 좋은 동지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문제는 뜻이고 마음이다, 돈은 없어도 뜻만 통하면 서로 동지가 될 수 있다, 동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만이 좋은 동지를 얻을 수 있다고 하신 아버님의 동지애의 사상에 대한 말씀을 회고하시면서 그때 아버님께서 해준 말씀은 지금도 자신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다고 쓰시었다.

그분께서는 아버님께서 한평생 어느 당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어떤 권력도 추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나라의 해방과 근로민중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한몸을 서슴없이 바치었다고 회고하시었다. 그리고 아버님은 물욕과 사리사욕도 없었으며 자신을 생각하기에 앞서 민족을 생각하고 자신의 가정을 생각하기에 앞서 조국을 먼저 생각하며 찬바람을 맞받아 일생을 쉬임없이 걸어가심으로써 인간으로서도 청렴하게 살았고 혁명가로서도 결백하게 살았다고 회고하시었다.

그래서 주석님께서는 어떻게 하나 아버지의 뜻을 이어 한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겠다는 이념을 갖게 되었다고 쓰시었다.

위에서 언급된바와 같이 주석님께서는 아버님의 혁명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으시었고 아버님이 조직하신 조선국민회 조직원들의 도움을 받으시었다.

한창 혁명활동을 하시던 과정에서 철주동생과 형권삼촌을 잃으시었고 그리고 어머님도 병으로 잃으셨다. 그리고 그분을 지도자로 아끼며 따르던 김혁, 차광수, 최창걸 등 혁명동지들을 수 없이 잃으셨다.

그분의 위대성은 결코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요,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니라 그분의 희생적 민족해방운동과 항일투쟁이라는 혁명적 투쟁속에 이룩된 것이다. 주석님의 항일혁명활동에 대한 기록을 읽노라면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한 우리 민중의 투쟁의 역사가 소상히 눈에 어리여온다. 그러면 나는 김혁이 작사, 작곡한 《조선의 별》노래를 조용히 불러본다.

주석님의 일생을 돌이켜보면서 그분에 대한 한없는 경모심을 갖게 되는 점은 또한 그분의 민중에 대한 깊은 사랑의 정신때문이다.

그분의 위대성은 바로 민중을 하늘같이 여기시고 민중속에 들어가시어 민중과 더불어 민중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신데 있다. 이러한 민중을 하늘같이 여기는 사상에서 주체사상이 태동하였다.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자신의 민중사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시었다.

《<이민위천>, 인민을 하늘같이 여긴다는 이것이 나의 지론이고 좌우명이었다. 인민대중을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 믿고 그 힘에 의거할 데 대한 주체의 원리야말로 내가 가장 숭상하는 정치적신앙이며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한생을 인민을 위하여 바치게 한 생활의 본령이었다.》

이 이민위천 사상이야말로 주석님의 모든 노작의 매 폐지마다에 흐르는 근본사상으로서 그분께서 어려서부터 아버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상이다. 그분께서 어리셨을 때 중국으로 이주해서 사시게 되었지만 아버님은 그분을 일부러 고국에 보내어 학교를 다니시게 했다. 그 깊은 뜻은 바로 주석님께서 조선의 현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회고하시었다. 그분께서는 어려서 아버님의 권고로 조국에서 2년간 공부한 후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시었는데 당시의 우리 조선민중에 대한 감상을 다음과 같이 쓰시었다.

《가장 귀중한 체험은 우리 인민이 어떤 인민인가를 깊이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우리 인민은 소박하고 근면하면서도 용감하고 강의한 인민이었다. 어떤 곤난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억센 인민, 예절이 바르고 인정이 풍부하면서도 불의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비타협적인 인민이었다.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연정회의 간판을 가지고 반동적인 <자치>운동을 벌이고 있었으나 노동자와 농민, 청년학생들을 포함한 광범한 인민대중은 피를 흘리면서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 어떤 힘으로써도 훼손시킬 수 없는 민족의 존엄과 강철같은 독립의지를 뜨겁게 감수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 인민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인민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런 인민을 잘 조직동원한다면 얼마든지 나라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신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아버님의 의도대로 조선민족, 조선민중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된 주석님의 혁명사상은 민중을 우매하고 미개한 계몽대상으로만 보아오던 종래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 민중이야말로 스승이며 혁명을 추동하는 기본동력이라고 간주하게 되었다.

《인민들속으로 들어가라!》, 이 구호는 주석님의 전생애를 관통하는 좌우명이 되었다. 주석님께서는 실로 민중적 품격과 민중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지도자로서 민중 속에 들어가 직접 그들의 육성, 숨결, 눈빛, 표정, 말투, 손짓, 몸가짐을 자신의 눈과 귀, 손으로 손수 접촉하여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강조하시었다. 그것은 민중속에는 철학도 있고 문학도 있고 정치경제학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중 속에 들어가는 것은 보약을 먹는 것과 같고 들어가지 않는 것은 독약을 먹는 것과 같다고 믿고 계시던 주석님께서는 생전에 다음과 같이 생을 총화하시었다.

《나는 인민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혁명활동을 시작하였고 오늘도 인민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혁명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인민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인생을 총화하고 있다.》

주석님께서 자신의 생신때마다 민중 속에 들어가 현지지도하시면서 시간을 보내시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주석님께서는 두메산골, 외딴섬, 농장, 도시, 공장 등 이북 어느 곳이나 현지지도하지 않으신 곳이 없을 정도로 사면팔방을 오가시며 민중들과 대화하시고 부탁하시고 민중들에게서 배우시며 한생을 사셨다. 그분께서는 항일혁명당시에도 혁명을 한다는 사람들이 자꾸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당에 승인이나 받으려 하고 웃자리나 차지하려는 것을 비판하시면서 무산대중을 위한 혁명을 한다면서 대중을 떠나 자꾸 위로만 올라가면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자, 아래에 내려가 노동자 ,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자고 새 세대 청년혁명가들에게 당부하시었다.

그분께서는 《혁명가의 생명은 군중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되며 군중을 떠날 때 끝이 난다고 할 수 있다.》라고 강조하시였다.

수백만민중의 조직된 힘에 의거해야 일제를 타도할 수 있겠는데 지난 시기 운동가들은 혁명도 독립운동도 특수한 몇몇 사람들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초기 혁명운동가들도 기초축성은 하지 않고 몇몇 상층인물들로써 당중앙을 선포하는 방법으로 당을 쉽게 만들었으며 민중 속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3인1당, 5인1파식으로 서로 분열되어 헤게모니 싸움이나 벌였다.

혁명의 실패는 혁명의 주체이며 추동력인 민중의 힘을 믿지 않고 민중 속에 들어가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출신이 좋은 몇몇 사람들만으로는 혁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민중을 대담하게 믿고 그들을 조직사상적으로 조직해야 된다고 그분은 믿으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