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민보”가 “항일격전지 장백현과 보천보전투”라는 제하로 글을 실었다.

그 내용을 소개한다.

“만산에 단풍이 막 물들기 시작한 10월 초 연변 객운장(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아침 버스로 출발하여 이도백하에서 점심을 간단히 먹었다. 버스는 무송 인근 만량에서 만강으로 꺾어 끝도 없이 이어진 고갯길을 올라갔다.

그렇게 해발 2000여미터의 장백산 봉우리들 사이 추색이 완연한 절경의 19도구하 골짜기를 타고 고개를 넘어 오후 4시 쯤 목적지 장백현에 도착하였다.

그 고개 옆으로는 자작나무, 박달나무, 가문비나무 등 천고의 밀림이 아득히 펼쳐져 있었다.

연변박물관 혁명역사부 전 주임으로 근무한 리송덕 학자는 고개 옆의 산봉우리를 가리키며 곰의골밀영, 홍두산(해발 2010미터)밀영있는 봉우리라고 말해주었다.

1936년 남호두회의 이후 본격적으로 조국으로 진출할 것을 결정한  김일성주석의 조선인민혁명군은 이 높고 깊은 밀림 한 가운데 이런 여러 밀영을 건설해놓고 장백현 일대을 돌아치며 일제토벌대를 무리로 쓸어버렸으며 곳곳 마을에 있는 일본통치기관을 요정내버림으로써 사실상 장백현 거의 모든 마을을 장악하고 곳곳에 조국광복회라는 반일혁명조직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김일성주석이 길림 육문중학교를 다니며 혁명조직을 건설하던 시기부터, 장차 조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도문 등 두만강지구와 압록강 상류 장백현을 반드시 혁명화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그때부터 비밀 반일조직을 이 지역에 수없이 건설하였다고 한다.

그때,  김일성주석의 삼촌 김형권 투사도 이 장백현 일대에서 비밀조직건설에 힘썼으며 국내까지 진출하여 조직사업을 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결국 옥사했다고 한다.

지도로만 봐도 장백현은 압록강변 국경 중에서 가장 우리 한반도 쪽으로 깊숙하게 들어온 곳에 위치해있다.

이 장백현에서 압록강만 건너면 바로 혜산이고 혜산에서 남쪽의 낭림산맥, 북쪽의 마천령산맥과 그 사이 개마고원을 타면 조국 곳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청진, 성진, 함흥, 원산 등 당시 주요 항구도시와 태백산맥을 타면 지리산까지도 진출할 수가 있는 곳이 장백현이다.

항일유적지를 취재하다보면  김일성주석이 한반도와 그 주변 지리를 꿰고 있으며 이를 능숙하게 활용했음을 여러 차례느낄 수 있었는데 장백현을 거점으로 삼은 것도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바로 그 장백현에서 압록강 넘어 북녘 땅을 바라보니 만단정회를 금할 수 없었다.

얼마나 많은 우리 선조들이 일본제국주의자들에 대한 복수의 일념을 안고 이 압록강을 건너 여기 장백으로 왔던가.

또 얼마나 많은 독립투사들이 민족의 가슴에 독립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 압록강을 건너 조국으로 들어갔던가. 또 그 순결하고 뜨거운 피 얼마나 흘렸던가. 장백현 골골마다 전투는 또 얼마나 치열했던가.

역사가가 들려준  김일성부대가 이 장백현 일대에서 일제를 족쳐버린 대규모 전투만해도 20가지가 넘었다. 실제로는 장백현 일대에서 100번도 넘는 전투가 벌어졌고 김일성부대는 전투마다 모두 이겼다고 한다.

무송현성전투, 도천리전투, 대덕수전투, 소덕수전투, 천교구전투, 삼문구전투, 리명수전투, 23도구전투, 신방자전투, 14도구전투, 태양촌 전투, 간삼봉전투 등등등

정말 가는 곳마다에서 노인들을 만나보면 김일성장군이 부대를 이끌고 마을을 공격하여 일본군경들을 족치고 일제의 상점과 창고를 털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물자를 지고 바람처럼 사라졌다는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 그 전투를 직접 경험한 노인도 있었고 부모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가을단풍 붉게 물들어가는 저 산하를 어찌 무심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아, 장백현!

역사의 눈과 귀로 보고 듣노라면,  그날의 용맹한 청년장군의 단호한 공격개시 권총 신호탄소리,  원수 일제 격멸의 의지로 불을 뿜는 기관총소리,  천둥이 울리고 징벌의 번개가 대지를 찢어 놓을 듯 터져나오는 유격대원들의 몰사격소리, 돌격명령에 비호처럼 돌격하는 유격대원들의 함성소리…

포대가 작탄 불벼락에 산산조각이 난다.  일제 군인과 경찰들이 비명을 지르며 막 쓰러진다.

조국광복회 회원들이 ‘조선은 살아있다.’, ‘끝까지 싸워 기어이 강도 일제를 성스런 조국 땅에서 기어이 쓸어버리자’ 구호를 외친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 삐라가 함박눈처럼 온 거리에 쏟아져 내린다.

터져나오는 만세의 함성, 함성!

이런 전투가 때로는 매일같이 연이어 이 장백현 일대를 휩쓸었다.

역사가들도, 백성들도 그 중에 첫 손가락에 꼽고 있는 전투가 있으니 바로 보천보전투이다.

장백현에서 압록강 따라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다보면 북과 교역을 하는 세관 조금 못 간 곳에 북측 압록강 가에 아담한 동산이 있었는데 그 봉우리에 붉은색의 거대한 보천보전투 기념탑이 서 있었다.

나무에 가려 그 모습을 다 볼 수는 없었지만 자못 웅장한 규모였다.

김일성주석이 조국에서 첫 총성을 울렸던 보천보 마을도 장백현 건너편 압록강 인근 마을이다.

이에 대해 리송덕 역사학자는 국내신문뿐만 아니라 일본의 여러 출판보도물들과 소련의 타스통신은 물론, 프라우다 등 해외 언론에서도 이 보천보전투를 중요하게 보도했다고 말했다.

특히 소련에서 발간되는 ‘태평양’이라는 잡지에서는 ‘북부조선지역에서의 빨치산투쟁’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보천보전투뿐만  김일성 항일무장투쟁 전반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보도했다고 한다.

바로 보천보전투부터 소련 보도출판물에 ‘김일성’이름과 조선인민혁명군이 본격적으로 보도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계는  보천보에 왜 주목했던 것일까.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먹어치운 일제는 1937년 7월 중국 전체를 먹자고 중일전쟁까지 도발했다.

중국 전선에서 승승장구하던 일제는 당시 세계 반파쇼연합 진영에 크나큰 위협이었다. 소련만 하더라도 나찌독일이 호시탐탐 서부전선의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일제의 중일전쟁 발발은 시간문제로 부상했으니 얼마나 위기의식이 컸겠는가.

바로 그러한 때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대륙진출의 교두보이자 가장 안전한 보루라던 조선 땅에 수백명의 조선혁명인민군이 나타나 일본 뒤통수를 호되게 후려쳤으니 일제도 경악했고 전 세계가 충격적 경탄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30년 후반의 국내 사정은 암흑 그 자체였다.

20년대 문화통치 가면도 벗어던진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자 보라 이 강대한 일본을 그 누가 꺾을 수 있는가’하며 일본과 조선은 한 뿌리이니 이제 일본제국의 신민이 되어야 한다며 성도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고 학교에서 조선말을 쓰면 가혹한 벌을 내리던 바로 그 살벌한 압제의 시기였으며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세력들도 모두 숨을 죽이고 있는 암흑의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새 군복을 척 떨쳐입은 김일성부대가 압록강을 넘어와 보천보 국경도시를 족쳤으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바로 보천보의 총성은 조선의 독립군은 살아있다는 선포였으며 보천보 경찰서에서 타오른 화염은 일어나 일제와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의 횃불이었다.

그래서 여운형도 직접 달려가 불탄 보천보 경찰서 담벽을 쓸어보며 “조선은 살아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고 김구도  김일성부대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백방으로 파견원을 보냈던 것이다.

수천, 수만명이 폭동을 일으켜 일제 관공서를 들이쳤다고 해서 이런 정치적 파장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전 세계가 주목하고 전체 조선민족이  김일성장군의 이름을 독립의 희망으로 직결시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 것은 바로 당당한 수백명의 군대가 쳤기 때문이었다.

전설로만 듣던  김일성 장군이 실제 존재하는 조선민족의 사령관임을 명백히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었다.  

왜 혜산이 아니라 보천보를 쳤을까?

 김일성주석이 이끄는 주력부대는 혜산 맞으편 장백현으로 나갔고 최현이 이끄는 4사단을 장백현 북부로 진출시켜 무산 쪽을 치게 했으며 2사단 등 다른 부대는 장백현 남쪽 림강 쪽으로 진출시켰다.

그런데 그만 최현의 4사가 무산쪽에서 일제를 쓸어버리기 시작하자 일제는 주변 모든 부대를 동원하여 4사를 꽁꽁 포위하고 말았던 것이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주력부대가 조국진출을 포기하고 바로 4사를 구원하러 가야 할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강대한 일제 무력이 버티고 있는 혜산을 주력 일부를 4사 구원에 보내고 나머지만으로도 칠 경우 실패할 우려가 높았다.

그래서 지휘관들이 다들 조국진출을 포기하고 4사를 구원하러 가야 한다고 할 때  김일성주석은 사색을 거듭한 끝에 조국진출 효과도 얻으면서 4사도 동시에 구원할 절묘한 방안을 내놓았는데 혜산을 치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그 북쪽에 있는 보천보를 치자는 것이었다.

보천보는 무산쪽에 가깝기 때문에 4사를 포위하고 있는 일제군대의 뒤통수를 때리는 효과도 있으면서 명백한 압록강 너머 조국 땅이었으며 혜산과도 20킬로밖에 떨어져있지 않아 혜산을 친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 예상은 적중했다.

일제는 경악했고 세계는 경의적인 눈으로 보천보를 바라보았으며 4사를 포위하던 일제무력은 보천보의 총알이 자신들의 뒤통수로 바로 날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깜짝 놀라 포위를 풀고 도망치고 말았다.

후에 그렇게 포위를 뚫고 나온 최현은 지양개에서  김일성주석을 만나, 갑자기 일본군들이 포위를 풀고 황황히 도망가버리기에 “이게 무슨 귀신의 조화인가 했는데 그게  김일성사령관님의 조화였군요”라며 탄복했다고 한다.

그때 최현은 보천보에서 함께 싸우지 못한 것을 두고 안타까워했는데 그 한을 간삼봉전투에서 원 없이 풀었다.

보천보에서 얻어맞은 일제는 혜산과 인근의 모든 무력을 총출동시켜 김일성부대의 뒤를 쫓았고 이를 간삼봉에서 매복하고 기다리던 김일성부대가 아주 박살을 내버렸다.

작은 보천보를 치느라 일제 군경들에게 크게 타격을 가하지 못한 한을 이 간삼봉전투에서 다 풀었다고 한다.

족히 수백명의 일제군경이 사살되었다. 하도 시체가 많아 일제는 머리만 잘라서 운반했는데 주민들은 알고서도 마대 속의 머리를 보고 뭐냐고 물으면 일본군들은 ‘호박풍년이 들어서 호박을 따간다’고 둘러댔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간삼봉 전투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