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48)

프랑스의 좌파정치와 우리의 진보정치, 뭐가 다를까?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말도 꺼내지 못할 프랑스 좌파연합의 집권 시나리오
 
<한겨레> 2011년 9월 26일 부에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낭보 한 편이 실렸다. 기사제목은 '프랑스 좌파 50년만에 상원 장악...격변 예고'라고 되어 있다.

설레는 심정으로 기사본문을 찬찬히 읽어보았더니, 지난 9월 25일에 프랑스 상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대유권자 72,000여 명이 투표하여 170명을 새로 선출하는 간접선거에서 선전한 사회당-공산당-녹색당 3당 선거연합이 상원의원 348석 가운데 절반이 넘는 177석을 차지하였다는 것이다.

프랑스 대선은 2012년 4월에 실시되고, 총선도 그로부터 두 달 뒤에 실시되는데, 사회당, 공산당, 녹색당은 이번에 자기들의 3당 선거연합이 선전한 여세를 밀고 나가 내년 두 선거에서도 연승하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감추지 않고 있다.

위의 기사제목은 사회당-공산당-녹색당의 3당 선거연합을 분별 없이 '좌파연합'이라 불렀지만, 그것은 오류다. 프랑스 사회당과 녹색당은 좌파정당이 아니라 중도정당이고, 프랑스 공산당도 당명만 공산당일 뿐 '좌파색깔'이 퇴색한 유로꼬뮤니즘(Eurocommunism)을 당이념으로 채택하였으니 엄밀한 의미에서 좌파정당이라 하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2개 중도정당과 1개 '변색된' 좌파정당이 연합하였고, 더욱이 당세를 비교하면 프랑스공산당이 사회당에 비해 크게 약하므로, 사회당 주도의 중도연합이라 하면 더 정확할 것이다.

프랑스의 좌파정당들은 따로 있다. 2007년에 실시된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출전한 4개 좌파정당들은 혁명적공산주의동맹, 프랑스공산당, 노동자투쟁, 노동자당이다. 이 4개 정당이 정치연합을 결성해야 그것을 좌파연합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프랑스공산당은 왜 다른 중도정당들과 중도연합을 실현하면서도 다른 좌파정당들과는 좌파연합을 실현하지 못한 것일까? 사태의 심각성이 드러난 2007년 프랑스 대선결과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07년 대선에서 대중운동연합 니꼴라 사르코지 후보는 31.18%, 사회당 세골렌 루아얄 후보는 25.87% 각각 얻었는데, 사르코지와 루아얄 두 후보만이 맞붙은 결선투표에서 사르코지가 이겨 결국 우파정권이 들어서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 대선에서 4개 좌파정당들이 거둔 성적표는 어떠했을까? 득표율을 보면, 혁명적공산주의동맹 후보가 4.08%, 프랑스공산당 후보가 1.93%, 노동자투쟁 후보가 1.33%, 노동자당 후보가 0.34%였다. 민주노동당 2007년 대선결과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4개 좌파정당 후보들이 각각 거둔 득표율을 모두 합해도 7.68%밖에 되지 않는다.
 
2007년 대선 득표율만 가지고 따져보면, 4개 좌파정당들이 합당하여 좌파단일정당을 건설하는 경우 득표율을 10%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현 집권당인 대중운동연합, 그리고 제1야당인 사회당을 제외하고, 2007년 대선 득표율이 10%를 넘은 정당은 18.57%의 득표율을 거둔 프랑스민주연합과 10.44%의 득표율을 거둔 국민전선 뿐이다.

프랑스민주연합은 우파정당이고 국민전선은 극우정당이므로, 만일 좌파단일정당이 출현하여 대선 득표율을 10% 이상 끌어올리면, 사회당과 프랑스민주연합에 이어 제3야당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 좌파정당들은 합당하지 못했다. 좌파단일정당으로 합당하기 힘들다면, 최소한 좌파단일후보라도 선출했어야 하는데, 후보단일화마저도 시도하다가 실패로 끝났다.

만일 2007년 대선에 좌파단일정당이 출전하여 명실공히 제3야당으로 올라섰더라면, 2012년에 실시될 대선에서 좌파단일정당과 사회당이 좌파연합을 결성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하였더라면 2012년에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좌파정권이 세워졌을지 모른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2007년 대선에서 사회당 후보가 거둔 득표율 25.87%과 4개 좌파정당 후보들이 거둔 총득표율 7.68%를 합하면 33.55%가 되는데, 이것은 사르코지가 얻은 득표율 31.18%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좌파정당이 중도정당과 힘을 합해야 우파정당을 꺾을 수 있다는 진리는 중학생들도 안다.

그러나 좌파연합의 집권 시나리오는 프랑스 정치현실에서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들 좌파정당들끼리도 네 갈래로 흩어져 합당하지 못하는 주제에, 좌파단일정당이 사회당과 연합하는 것은 아예 말도 꺼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프랑스 좌파정당들은 앞으로 합당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그들이 지나온 정치경로를 살펴보면, 합당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프랑스 대중과 언론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4개 좌파정당들은 왜소정당의 처량한 신세를 벗지 못하고, 비좁은 당 사무실을 언제까지나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 사태의 원인은 무엇일까?

4개 좌파정당과 5개 노동조합

프랑스의 4개 좌파정당들이 통합을 거부하고 분열을 고집하면서 주변화, 왜소화, 고립화되어버린 원인은 그 당들을 이끄는 당지도부의 머리 속에 들어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좌파정당 지도부가 유럽식 좌파이론의 공식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유럽식 좌파이론의 공식이란 무엇일까? 거칠게 요약하면, 그 공식은 사회의 자본주의적 발전→노동계급 다수화→노조 건설→노조에 기반을 둔 좌파정당 창당→좌파정권 수립으로 이어지는 사회변혁의 경로를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공식이 프랑스의 사회정치현실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 공식을 창안해낸 유럽식 좌파이론은 착오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지적하자면, 그 공식에서 세 번째 단계로 나오는 노조 건설이 사회정치현실과 맞지 않는다.

유럽식 좌파이론은 노동계급이 다수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좌파노조가 건설될 것으로 상정하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유럽식 좌파이론이 예측한 것과 달리 좌파노조도 건설되고, 우파노조도 건설되었는데, 그나마 좌파노조들이 분열하여 전국적 총파업을 이끌지 못할만큼 무력화되었고, 때로 우경화되기도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프랑스 노동운동은 다섯 갈래로 분열되어 있다. 조합원 수를 비율로 하여 열거하면, 노동총연합(CGT)이 34.00%, 프랑스민주노동연합(CFDT)이 21.81%, 노동자의 힘(FO)이 15.81%, 프랑스기독교노동자연합(CFTC)이 8.69%, 프랑스관리직연합(CFE-CGC)이 8.19%다. 그 밖에도 존재감 없는 왜소노조가 세 개나 더 있다.

그 지경으로 분열되고 무력화되고 일부는 우경화된 노조에 기반을 두고 좌파정당을 창당하겠다는 발상은 현실과 동떨어진 '정치 무용담'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런 노조에 기반을 두고 좌파정당을 창당하는 경우, 그런 좌파정당이 강화, 발전하여 나중에 집권하기는커녕 빈약한 노조 기반만 지닌 왜소정당으로 전락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오늘 프랑스의 좌파정당과 노동운동의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노동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재검토해야

좌파정당과 노동운동이 처한 그러한 현실은 프랑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이 직감하는 것처럼, 오늘 이 땅의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처지도 대동소이하다.

우리의 현실과 프랑스의 현실 사이에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면, 이 땅에서 진보정당이 두 개로 분열되었고, 프랑스에서 좌파정당은 네 개로 분열되었으며, 이 땅에서 노동운동은 두 개로 분열되었고, 프랑스에서 노동운동은 다섯 개로 분열되었다는 점이다. 이 땅과 프랑스에서 각각 드러난 그런 분열과 무력화는 양적 차이일 뿐이지 질적 차이는 아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처지가 프랑스의 좌파정당 및 노동운동의 처지와 같아진 까닭은, 이 땅의 좌파노조활동가, 좌파정치활동가, 좌파지식인들이 습득한 유럽식 좌파이론의 공식을 노조건설과 당건설에 무비판적으로 도입하였기 때문이다.

11년 전 민주노동당을 창당할 때 이 땅의 좌파노조활동가, 좌파정치활동가, 좌파지식인들이 굳게 믿었던, 그리고 지금도 굳게 믿고 있는 노동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는 유럽식 좌파이론의 공식을 우리말로 풀어쓴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경험과 현실에서 입증된 것처럼, 유럽식 좌파이론의 공식은 현실과 맞지 않는 착오를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땅의 좌파노조활동가, 좌파정치활동가, 좌파지식인들이 추구하는 노동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는, 지금처럼 노조가 분열되고 무력화된 조건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 조건에서 추진하는 노동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는 민주노동당의 주변화, 왜소화, 고립화라는 누구도 원치 않는 결말을 가져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자기 혁신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점은 민주노동당 지도부와 민주노총 지도부가 누구보다 더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자기 혁신의 출발점은 유럽식 좌파이론의 공식, 다시 말해서 노동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담론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우리의 계급적 현실과 정치현실에 맞게 우리의 머리로 생각하여 진보정치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요즈음 흔히 말하는 '진보의 재구성'이란 그런 방향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민주노조는 진보정당 건설의 주춧돌이다. 주춧돌을 놓지 않고 집을 지으면 쉽게 무너지고 마는 원리와 마찬가지로, 민주노조가 아무리 무력하다 하더라도 민주노조가 당건설의 주춧돌을 놓아주지 않으면 진보정당 건설은 불가능하다. 민주노동당의 당건설 과정이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이미 현실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집을 지을 때 주춧돌만 놓고 마는 것이 아니라, 기둥과 벽을 세우고 대들보와 석가래를 얹고 지붕을 씌워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노조를 주춧돌로 하여 건설된 진보정당은 각계각층 대중의 참여와 지지를 확대, 강화하여 지속적으로 당발전을 추진하여야 한다.

이것은 민주노조를 기초로 삼고 건설된 진보정당이 자기 기반을 노동운동에서 대중운동으로 더욱 확장하면서 각계각층 대중 속으로 들어가 자기 주위에 각계각층 대중을 결집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유럽식 좌파이론의 공식을 굳게 믿고 있는 좌파노조활동가, 좌파정치활동가, 좌파지식인들은, 진보정당이 자기의 대중적 기반을 확대, 강화하는 것을 민주노조와 결별하는 우경화라고 왜곡하면서 당의 대중화를 거부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당건설에서의 계급적 원칙 고수에 대해 말한다면, 장차 진보정당이 집권하여 이 땅에서도 프랑스처럼 좌파정당이 건설될 때, 바로 그 정당이 고수하여야 할 원칙이다. 사회변혁의 현 단계에서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계급적 원칙을 민주노동당에 적용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번에 합당문제에 대한 결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유럽식 좌파이론의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이 확실하다. 민주노동당은 국민참여당과의 합당을 거부하였고, 진보신당은 한 술 더 떠서 민주노동당과의 합당마저 거부하였다.

자기들은 진보정당이고 국민참여당은 '진보의 적'이라고 보는 독선도 버려야 하고, 진보정당과 함께 하겠다고 하는 국민참여당을 진보정치의 길로 견인하기는커녕 밀쳐내는 교만도 버려야 한다.

민주노총이라는 '주춧돌' 위에 건설된 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과 합당하는 것은 그 '주춧돌'을 파내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춧돌' 위에 더 많은 각계각층 대중이 들어올 '큰 집'을 지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민주노동당의 결정은 선택할 수 있는 몇 가지 시나리오들 가운데 최악의 선택이었다. 그러한 최악의 선택은 집을 짓겠다고 하는 사람이 주춧돌만 놓고 그 돌 위에 주저앉아 집이 세워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희망적 사고를 과감히 접고 진보정당의 대중화를 추구하지 못하는 한, 진보정당의 주변화, 왜소화, 고립화를 자초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민주노조의 주춧돌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그 위에 크고 넓은 대중의 집을 지어야 한다. 자기 혁신을 두려워하지 말라! (2011년 9월 28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