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38)

 

철군은 사회변혁의 결정적 계기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철군문제에 대한 발상을 확장하라

8.15 해방 이전 식민지 조선에서 일제의 조선주둔군이 그러하였듯이, 오늘 미국군도 이 땅에서 무기한 주둔을 획책하는 중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외국군이 주둔한 나라의 주권이 완전히 강탈당하거나 또는 심각하게 침해당하는 것은 복잡한 방정식으로 해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반상식이다.

이 땅의 주인인 국민대중 모두가 전쟁반대와 평화실현을 절실히 요구하는 데도, 미국이 자국 군대를 동원하여 위험천만한 북침전쟁연습을 끊임없이 강행하면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 자체가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범죄행위다. 미국의 그런 범죄행위를 뻔히 보면서도,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지 않는 것은 주권문제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 때문이다.

새삼스럽게 재론할 필요 없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주한미국군 철군을 반평화적 정전체제와 반통일적 분단체제를 해체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인식해왔다. 철군문제를 평화문제와 통일문제에 결부시켜 인식해온 것이다. 두루 알려진 바와 같이, 북측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철군문제를 평화문제와 통일문제에만 결부시키는 견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변혁문제에 결부시키는 쪽으로 발상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서 비핵평화를 실현하고,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중심과업으로 철군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철군문제를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의 발전경로에 포함시킬 이론적 해명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땅의 좌파정치활동가들은 철군문제와 사회변혁문제를 결부시키지 않는다. 독일의 좌파당이 주독미국군 철군과 독일의 사회변혁을 서로 무관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유럽식 사회변혁론을 공부한 이 땅의 좌파정치활동가들도 주한미국군 철군문제가 사회변혁과 동떨어진 민족주의 정치과업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우리의 사회변혁문제를 정확하게 해명해주지 못하는 유럽식 사회변혁론을 비판적 검토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생겨나는 오해와 편견이다. 이를테면, 미국-독일의 관계는 지배-예속관계가 아니라 전형적인 동맹관계이므로, 미국군의 독일 주둔이 독일의 사회변혁을 가로막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독일의 좌파당은 주독미국군 철군을 사회변혁경로에 포함시킬 필요가 없다. 독일의 좌파당만이 아니라, 이제까지 유럽에서 등장한 그 어떤 사회변혁론도 외국군 철군문제를 사회변혁론에 들여놓지 않았다. 그들의 사회변혁론은 외국군 철군문제를 시야 밖으로 밀어놓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사회변혁론은 우리 자신이 이 땅의 현실에 기초하여 주체적으로 탐구하는 것이지, 다른 나라의 사회변혁론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유럽의 좌파정당들과 좌파정치활동가들은 유럽주둔 미국군 철군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유럽식 사회변혁론을 따르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의 중요과업으로 제기한 우리식 사회변혁론을 따른다. 

자주적 선거를 향한 정치적 상상력

주한미국군 철군과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은 어떻게 결부되는 것일까? 블로그 '변혁과 진보'에서 여러 차례 논한 것처럼,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은 두 단계로 수행되는 사회변혁이며, 그 첫 단계는 사회성격을 개조하면서 사회체제개조를 준비하는 단계다.

사회성격을 개조하는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의 주체는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며,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사회변혁역량은 그들의 정치세력화를 실현한 정당으로 존재한다. 정치이념지형으로 보면, 그런 정당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강령으로 제시한 중도좌파정당이다. 여기까지는 진보정치활동가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강령으로 제시한 중도좌파정당이 집권하여 새로운 정권을 세우면, 그 정권이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을 추진궤도에 올려놓게 되는데,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중도좌파정당의 집권경로에 대한 전망이다.

1960년 4월이나 1987년 6월에 이 땅에서 그러하였던 것처럼, 민중항쟁이 일어나 낡고 부패한 정권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권을 세우기 위해 실시되는 선거는, 민중항쟁이 일어나건 일어나지 않건 관계 없이 그 어떤 경우에도 피할 수 없는 민주주의적 절차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정권은 선거라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통해서 집권하는 것이며, 집권 이후 진보적 개헌을 추진함으로써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을 전면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도 진보정치활동가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제기하는 또 다른 문제는, 선거가 미국의 개입을 배제한 자주적 선거인가 아니면 미국이 개입한 비자주적 선거인가 하는 것이다. 미국이 개입한 비자주적 선거를 백 번 실시해도, 중도좌파정당은 선거를 통해 집권하지 못한다. 이것은 필연이다. 미국이 이 땅의 선거에 비밀리에 개입하는 목적은 중도좌파정당 집권을 저지하는 것에 집중되기 때문에 비자주적 선거는 언제나 무용지물인 것이다.

비록 미국이 개입하더라도 중도좌파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비과학적인 전망이야말로 선거혁명론을 부추기는 우경적 공상과 다르지 않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선거혁명론이라는 우경적 공상을 거부하는 것은, 모든 선거를 무분별하게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중도좌파정당 집권을 저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개입하는 비자주적 선거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미국의 개입을 차단한 자주적 선거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미국의 개입을 차단한 자주적 선거는 철군 이후에나 가능하다. 그렇게 판단하는 까닭은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철군은 동맹에서 벗어나는 탈동맹이다. 철군 이후 탈동맹상태에서도 여전히 주한미국대사관이 존재하고,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지부도 존재하겠지만, 그들의 정치개입과 비밀공작은 당연히 위축될 것이다.

지금 미국군을 주둔시킨 독일과 일본에서 간혹 드러나는 미국의 정치개입과 비밀공작보다 훨씬 더 미약한 수준으로 위축될 것이다. 미국의 정치개입과 비밀공작이 탈동맹 수준으로 위축된 조건에서 실시하는 선거라야 자주적 선거로 될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영구주둔을 요구해온 우파정당, 우파군부, 우파단체들이 매우 불리한 정세로 밀려가고, 전면철군을 요구해온 중도좌파정치세력이 매우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는 정치변화 속에서 자주적 선거를 실시하면, 중도좌파정당의 집권 가능성은 지금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높아진다. 그러므로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철군→탈동맹→자주적 선거→진보적 정권교체→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으로 이어지는 발전경로를 그려보는 정치적 상상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

철군의 제3조건은 누가 해결하는가?

마지막으로, 주한미국군 철군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철군은 군사적 패배의 결과다. 전쟁에서 패하거나 또는 군사적 대치상태에서 패하는 경우 철군은 불가피하다.

그런데 이 땅의 중도좌파정당이 미국과 군사적으로 대결하여 이길 가능성은 전무하다. 미국과 군사적으로 정면대결하며 백악관을 궁지에 몰아넣는 쪽은 북측이다. 그러므로 현재진행형인 북미대결에서 미국이 군사적으로 완패할 때, 철군문제를 해결할 북미 철군협상이 열리는 것은 정해진 이치다.

철군협상은 북미국교수립을 합의하는 북미정상회담에서 담판형식으로 진행될 것이고, 그 담판에서 철군과 한반도 비핵화를 상호합의한 밀약을 채택할 것으로 예견된다. 북미담판에서 채택될 밀약은, 향후 5년 정도 기간에 걸쳐 한반도를 비핵화하는 것에 상응하여 3단계 철군을 추진하는 내용을 담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전에 내가 발표한 여러 글들에서 논한 바 있으므로 재론을 피한다.

이 글에서 논하는 것은 철군의 3대 조건이다. 철군의 제1조건은 현재진행형인 북미대결에서 미국이 군사적으로 완패하였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군사정보를 분석하면, 앞으로 5년 안에 미국은 북미대결에서 완패하였음을 자인할 것으로 예견된다. 미국이 북미대결에서 완패하였음을 자인할 때, 그들은 북측과의 철군협상에 하는 수 없이 끌려나오게 된다.

철군의 제2조건은, 미국이 한미동맹체제를 포기하고서도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자기의 지배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은 북측과의 철군협상에 나설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역내정세의 변화추이를 살펴보면, 지금 미국은 미일동맹체제, 미국-오스트레일리아동맹체제, 미국-필리핀동맹체제를 이전보다 더 강화하는 중이며, 이전에 외면하였던 베트남, 인도, 몽골과도 군사협력관계를 맺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주한미국군 철군으로 한미동맹체제를 포기한 뒤에라도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자기의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미국의 책략을 드러내는 것이다.  

철군의 제3조건은 남북관계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획기적으로, 공고하게 개선되어 남북 사이의 무력충돌위험이 사라지는 것이다. 남측과 북측의 무력충돌위험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미국이 철군명분을 찾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위에 열거한 철군의 3대 조건이 충족될 때, 실제로 철군이 추진되어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을 수행할 결정적 기회가 조성될 것이다. 위에 열거한 철군의 3대 조건 가운데서 제1조건은 북측이 해결하는 것이고, 제2조건은 미국이 해결하는 것이고, 제3조건은 남측 정권이 해결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철군문제는 '북미결정론' 따위의 조야한 단순논법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주목해야 하는 것은 철군의 제3조건이다. 철군의 제3조건을 조성하기 위한 남북관계 개선은,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이행할 정책적 의지가 있는 정당이 집권할 때 가능하다. 지금 이명박 정권 집권기에 겪고 있는 것처럼, 우파정권은 남북관계를 개선하기는 커녕 지난 시기 중도우파정권이 어느 정도 개선해놓은 남북관계마저도 대결의 원점으로 되돌려놓는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5년 안에 북측이 철군의 제1조건을 해결하고, 미국이 철군의 제2조건을 해결해도, 남측 정권이 철군의 제3조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철군의 제1조건과 제2조건만으로는 철군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2012년 대선에서 중도우파정당이 집권해야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 있고, 철군의 제1조건과 제2조건이 해결되는 향후 5년의 정세변화에 맞춰 철군의 제3조건을 해결할 수 있다. 물론 2012년 대선에서 중도좌파정당이 집권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없으므로 중도좌파정당 집권은 논하지 않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2012년 대선에서 중도우파정당이 집권하려면 반드시 야권연대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제까지 여러 차례 경험한 것처럼, 그리고 누구나 예상하는 것처럼, 대선국면에서 야권분열은 중도우파정당의 집권을 가로막는 치명적 패인이다.

그러므로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야권연대의 정치적 의미를 반한나라당 연합전선 구축으로 좁혀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철군의 제3조건을 마련하여 철군을 촉진시키고, 그에 따라 2017년에 중도좌파정당이 집권할 자주적 선거를 준비하는 선결적 요인으로 넓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철군문제를 사회변혁론에 들여놓지 못한 유럽식 사회변혁론의 한계를 모르는 이 땅의 좌파정치활동가들은 지금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야권연대의 기준을 신자유주의에 대한 찬반 입장만으로 규정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중도우파정당을 배척하지만, 그러한 배척은 현재진행중인 한반도 정세변화를 총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한 단견의 소산으로 보인다.

신자유주의 폐기는 중도우파정당을 배척하는 것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 중도좌파정당이 집권할 때 가능한 일인데, 중도좌파정당이 집권하려면 2012년 대선에서 야권연대라는 미흡하나 불가피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만일 2012년 대선에서 야권단일후보가 한나라당후보와 맞붙는 야권연대를 실현하지 못하면, 그 실패는 중도우파정당의 집권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철군의 제3조건이라는 결정적 기회를 잃어버리는 치명적 실패이며, 그로써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의 전망을 어둡게 만드는 전략적 실패인 것이다.

2012년 야권연대 실패→철군의 제3조건 해결 불가능→자주적 선거 불가능→진보적 정권교체 불가능으로 이어질 진보정치의 좌절기에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겪을 고통은 또 얼마나 뼈저린 것인가.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을 하루라도 더 앞당기기 위해 투쟁하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이른바 '독자노선'의 좌경적 오류에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2012년 야권연대 실현을 위해 전력해야 할 것이다. (2011년 6월 30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