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미제의 조선침략전쟁에 적극 가담한 특등참전국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력사학학회 비망록
 

지금으로부터 61년전 미제가 도발한 조선전쟁은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이였지만 미국에 있어서는 부정의의 침략전쟁이였다.

미제는 제2차 세계대전말기에 책정한 세계제패전략에 따라 남조선을 강점한 첫시기에 벌써 조선반도를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만들기 위한 조선전쟁도발계획을 작성해놓았으며 일본을 그 주요기지로, 하수인으로 써먹으려고 획책하였다.

패망후에도 아시아제패의 야망을 버리지 않고있던 일본은 이것을 절호의 계기로 간주하고 미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가담함으로써 당시 유엔에 가입하지 못한것으로 하여 미제가 조작한 《유엔군》에 공식적으로 참가하지 못하였지만 다국적침략무력으로서의 《유엔군》에서 미국 다음으로 주력을 이룬 참전국으로 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제와 일본군국주의자들은 국제여론의 비난과 규탄이 두려워 일본이 조선전쟁에 참가한 사실을 극력 비밀에 붙이였으며 일본인포로, 사상자가 로출되고 전쟁참가행위가 폭로되였을 당시에도 그것을 한사코 부인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전쟁이 끝난지 수십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조선전쟁참전국으로서의 일본의 범죄적정체가 정확히 밝혀지지 못하고있다.

최근 일본의 언론들에서 자기 나라를 17번째 참전국으로 하자는 문제가 제기되고있으나 그것도 당시의 사실과 맞지 않는 제기이다.

《유엔군》의 감투를 쓰고 조선전쟁에 참가한 미제의 15개 추종국들과 대비하여 볼 때 일본은 정규무력의 병력수에서는 영국 다음이지만 참전절대인원수와 전쟁임무수행에서는 《유엔군》에서 미국과 함께 결정적역할을 하였다.

이 비망록에서는 력사학계의 연구에 기초하여 일본이 미제의 조선침략전쟁의 특등참전국이였음을 밝히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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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미제의 조선침략전쟁에 적극 가담한 참전국이라는것은 무엇보다도 일본이 조선전쟁에서 미제침략군의 돌격대, 출동기지, 보급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는데서 찾아볼수 있다.

미제의 지령에 따라 일본은 조선전쟁이 일어나기전에 이전 일제침략군참모본부 차장 가와베를 비롯한 수많은 작전참모들을 조선침략전쟁도발계획인 《AL-3》과 《A, B, C계획》의 작성에 가담하게 하였다.

1949년 한해동안에도 4만정의 보병총과 2 000여문의 바주카포를 비롯한 수많은 각종 포와 수십만발의 포탄, 화염방사기, 2 000여정의 기관총과 기관단총, 4 900여대의 자동차를 남조선괴뢰군에 넘겨줌으로써 미제의 조선침략전쟁준비를 적극 도와준 일본은 미제가 전쟁을 일으키자 수만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유엔군》의 앞장에서 침략의 돌격대로 활약하였으며 미군의 출동기지, 병참기지, 보급기지, 수리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일본도서 《조선의 통일과 인권》 1976년 118페지)

일본은 우선 미제의 추종국들중에서 제일먼저 많은 병력을 조선전선에 투입하여 직접 전투를 벌리도록 하였으며 고문, 참모의 자격으로 미군과 남조선괴뢰군의 작전, 전투를 도와주게 하였다.

당시 《유엔군》에 망라된 추종국들의 무력구성을 보면 미국 다음으로 큰 규모의 무력을 조선전선에 파견한 나라는 영국이였고(보병려단 3개, 기갑려단 1개, 포병련대 2개, 공병련대 2개, 항공모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8척) 그 다음은 카나다(보병려단 1개, 포병련대 1개, 기타 기갑지원부대, 반땅크부대들과 구축함 3척, 공군수송중대 1개 등), 뛰르끼예(1개의 보병려단에 6 000명), 오스트랄리아(보병대대 2개, 전투기중대 1개, 항공수송중대 1개, 항공모함 1척, 순양함 1척, 구축함 2척), 타이(4 000명 병력에 쾌속정 2척, 항공수송대 1개), 필리핀(5 000명) 등이였으며 프랑스, 그리스, 뉴질랜드, 네데를란드, 꼴롬비아 등이 각기 1개의 련대 또는 대대규모의 병력에 순양함이나 구축함 1~2척으로서 그 다음이고 나머지 벨지끄와 에티오피아는 보병 1개 대대, 남아프리카련방(당시)은 전투기 1개 중대, 룩셈부르그는 보병 1개 중대정도였다.

그밖에 《유엔군》에 병원선이나 의무부대, 의약품 등을 보낸 단마르크와 스웨리예, 노르웨이, 이딸리아, 인디아를 비롯한 영련방국들은 참전국이외의지원국으로 취급되고있다. 그러나 일본만은 참전국에서는 물론 지원국명단에서도 제외되고있다.

우의 실태를 보면 대대 또는 중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한 벨지끄, 에티오피아, 룩셈부르그 등은 13~16번째 참전국으로 규정되고 대대 혹은 련대규모의 병력을 보낸 프랑스, 그리스, 뉴질랜드, 네데를란드, 꼴롬비아 등은 1~2척의 함선 등을 더 증파한것으로 하여 8~12번째자리에 앉히고있다.

그런데 일본은 이 나라들에 비하여 훨씬 더 많은 륙, 해, 공군병력을 파견하여 전투행동에 참가하였을뿐아니라 미군을 비롯한 다국적무력의 각종 군수 및 후방물자공급과 무장장비의 수리, 제작 및 의료부문까지 맡아 수행하여 그야말로 조선전쟁에서 미국 다음가는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참전국으로 규정하지 않거나 참전국으로 보자고 하면서도 《17번째》로 규정하려고 하는것은 공정한 평가가 아니다.

력사적사실은 일본이 미국 다음가는 침략전쟁의 참전국이며 특등범죄자라는것을 말해주고있다.

참전여부를 판정하는 기본징표는 전선에 파견하는 전투력의 작전참가여부이다. 미국의 조선전쟁도발계획은 처음부터 일본의 참전을 필수적인 전제로 하고있었다. 때문에 일본점령 미군사령부는 조선전쟁도발전야에 이미 일본의 해당 기관들에 동원준비를 갖출것을 명령하였다.

미제가 거수기를 발동하여 유엔이 6월 27일 부당한 《결의》를 채택하게 한지 1주일후인 7월 4일 일본수상 요시다는 미군에 대한 지원을 공식성명하고 내각회의에서 《조선에서의 미군의 군사행동에 행정조치의 범위안에서 협력》할 방침을 토의결정하였는데 겉으로는 《일본상선에 의한 한국행 수송, 국내통신망, 특정로동자(군수공장로동자)들의 초과근무대책범위안》에 속하는것이라고 하였지만 그후의 《행정조치》들은 이 결정이 사실상 조선에 대한 일본정부의 은페된 형태의 선전포고였다는것을 확증해주고있다.

일본은 이때부터 자기 나라의 병력, 군사장비를 비롯한 모든 군사, 경제적잠재력을 총동원하여 미제의 조선침략전쟁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다른 《유엔군》성원국들이 수행할수 없는 미군의 출동기지, 병참기지, 후방기지로서의 역할까지 충실히 집행하였다. 다만 그것이 전패국으로서 국제협정들을 묵살한 비법행위로 되기때문에 모든것을 비밀리에 감행하였을뿐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참전실태가 아직 미국, 일본의 공식문건으로 발표되지 않고있으며 일본은 의연히 참전국대렬에서 빠져있다.

그러나 진실은 감출수 없다. 당시 출판보도물에 발표된 자료들과 전쟁마당에서 나타난 사실들은 일본이 미제의 조선침략전쟁도발에 쌍수를 들어 지지하고 그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가한 특등참전국이라는것을 립증해주고있다.

미제가 전쟁을 도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1일 일본내각관방장관 오까사끼가 기자회견에서 조선전쟁에 미군이 출동한것은 《유엔의 경찰조치》인것만큼 일본이 미군을 《지원》하는것은 당연하다고 떠벌인데 이어 일본수상 요시다는 7월 14일 국회에서 한 발언에서 일본이 조선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할것》이라고 줴치였으며 일본외무성은 8월 19일에 발표한 《조선전쟁과 일본의 립장》이라는 문건에서 일본의 《안전》을 위해 조선전쟁에 적극 참가할데 대한 정부의 립장을 밝히였다.(일본도서 《일본력사》 22권〈현대1〉1977년 394~395페지)

이에 따라 일본정부는 조선전선에 침략무력을 직접 투입하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1950년 7월 5일 오산계선에서 미제24보병사단의 선견대가 녹아났을 때 그속에서 30여명에 달하는 구일본군 장교들의 시체가 나타난데 이어 그후 대전과 대구일대의 전투에서도 일본군인들의 시체가 발견된 사실이 잘 보여주고있다.

프랑스신문 《유마니떼》가 폭로한데 의하면 미국무장관 애치슨과 륙군성 우두머리들의 지령에 따라 일본정부는 조선전쟁개시직후에 제1진으로 200명의 이전 일본군출신 장성들과 장교들을 조선전선에 파견하였는데 그들은 남조선괴뢰군복을 입고 참모부 등에서 《고문》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후 제2진으로 파견된 4 000여명의 일본군은 태평양전쟁시기 중국, 말레이시아, 먄마 등지에서 전투경험을 쌓은 장병들로서 일본의 군마, 야마나시, 시즈오까에 있는 미군특수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은 다음 미제24보병사단과 미제1기병사단에 배속된 즉시로 전투에 진입하였다.

1950년 7월 27일 영국의 로이터통신에 의하면 일본군의 조선전쟁참가자수는 1950년 7월에 벌써 2만 5 000명에 달하였다.

1950년 11월 맥아더의 《크리스마스총공세》가 조선인민군의 강력한 반타격전에 의하여 파탄되였을 때 일본반동정부는 태평양전쟁시기의 실전경험이 있는 일본군출신장병 8 500명을 알라스카에서 내한훈련을 시킨 다음 《의용군》으로 가장시켜 미제침략군의 1951년 겨울작전에 투입시켰다.

1951년 2월에 한 외신기자가 전한데 의하면 일본정부는 조선전선에 파병하기 위하여 무려 14만명이나 징집하였다.(쏘련도서 《일본에 있는 미제국주의》 1951년 49페지)

일본정부는 이밖에도 1953년 3월에 《증산청년단》이라는 이름밑에 수천명의 일본청년들을 혹가이도에서 훈련시켜 미제10군단, 제16군단의 보충병으로 투입한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병력을 《의용군》, 《지원병》, 《재일조선인부대》 등으로 가장시켜 조선전선에 들이밀었다.

일본반동들은 지상병력만이 아니라 해, 공군무력도 조선전선에 투입하였다.

무엇보다도 일본해군의 많은 무력이 미군의 상륙작전에 참가하여 돌격대적역할을 수행하였다.

1950년 9월 15일 2 000여명의 첫 일본해병집단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데 이어 25일에 두번째 해병집단이 《한국구명의용대》라는 간판밑에 조선전선에 투입되였다.(쏘련신문 《쁘라우다》 1952년 11월 25일)

일본신문 《아까하다》 1970년 6월 25일부는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에 50척의 일본함선과 2 000명의 승무원들이 참가하였다고 밝히였다.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된 261척의 《유엔군》함선가운데서 일본함선은 미국(194척)다음으로 많이 참가하였는데 이것은 영국함선수의 4배이상에 달하였다.(일본 《아사히신붕》 1950년 9월 17일)

1950년 10월 미제침략군의 원산상륙작전시에는 10일부터 일본해상보안청 제1소해대의 소해정 2척과 48명, 제2소해대의 소해정 8척과 207명, 제3소해대의 소해정 8척과 152명이 동원되여 8일간 소해작업에 참가하였다.

이밖에도 1950년 10월 2일 《해상보안청 소해정의 협력을 꼭 바란다.》는 미군측의 요구에 따라 소해정 20척에 순시선 4척, 시항선 1척 도합 25척으로 된 《특별소해대》를 10월 6일에 출동시킨것을 비롯하여 일본해상보안청산하 제4소해대 소해정 7척과 소해대원 101명이 11월 13일부터 12월 4일까지의 기간에 군산항, 제2소해대의 소해정 13척과 소해대원 348명이 해주항소해작업에 참가하였다.

일본점령 미해군사령부 고문이였던 젬스 아어의 증언에 의하면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1950년 10월 2일부터 12월 12일까지의 기간에 일본해상보안청소속 소해정 46척과 소해대원 1 200명이 인천, 원산, 군산, 남포, 해주연해 소해작업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일본도서 《되살아난 일본해군》 상 〈조선전쟁에서의 일본소해정의 활약〉)

소해작업을 지휘한 구일본군 해군장교들은 후에 《미군의 조선상륙작전을 성공시킨것은 일본의 기뢰소해활동이였다.》고 주장하였다.

일본해군무력의 참전행위는 지어 퇴각하는 미군을 구원해준데서도 볼수 있다. 일본은 전쟁 제2계단 마지막과 제3계단초에 미제1해병사단의 잔존부대와 원산-함흥일대에 포위되였던 미제7보병사단, 제3보병사단 등 10만 5 000명의 병력과 1만 750대의 차량, 35만t의 군수물자를 건져내기 위해 10척의 수송선으로 193차나 왕복하면서 작전수행을 보장해주었다. 여기에 동원된 일본인선원은 1만명정도였다고 한다.

일본은 또한 태평양전쟁시기 악명을 떨친 가미가제특공대원들을 비롯한 비행사들을 조선전쟁터에 내몰아 전쟁전기간 미제의 폭격과 공수작전에 복무시켰다.

프랑스주간잡지 《악쑝》은 《일본비행사들은 조선을 폭격하고있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군사령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의하면 미국은 조선인민을 반대하는 전쟁을 위하여 주로 폭격경험이 있는 구일본군 비행사들을 모집하고있다고 썼다.

이전 다나까비행학교 교장이였던 다나까 후지오를 비롯한 많은 비행사들이 징집되여 미제침략군의 《B-26》, 《B-17》기를 타고 서울, 대북, 마닐라 등지를 오가면서 군수물자를 공중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는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쏘련도서 《일본에 있는 미제국주의》 1951년 49페지)

일본은 또한 《유엔봉사단》의 명목으로 수많은 청년들을 조선전쟁터에 내몰았다.

《유엔봉사단》에 망라된 일본기술인원들은 남조선에 기여들어 철도, 항만, 발전소 등 여러 부문에서 미군의 군사행동에 동원되였다. 1950년 7월 수백명의 일본기술인원들이 후꾸오까-쯔시마-부산사이를 련결하는 해저통신선을 수리복구하는 등으로 미군사령부의 통신지휘체계를 보장한것은 그 하나의 대표적실례이다.

《유엔봉사단》에 모집된 일본간호원들은 《구호반》이라는 명색으로 미군야전병원들에 제공되였는데 일본 규슈지방에서만도 1 000여명의 간호원들이 징집되여 미군병원들에서 고역을 당하다가 나중에는 미군의 위안부로 전락되였다.(일본도서 《현대군사론》 1966년 101페지)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일본반동지배층은 1950년 9월부터 미제침략군 부상병들에게 피를 바치기 위한 《헌혈운동》까지 벌려 조선전쟁기간 30만L의 피를 미제상전에게 섬겨바쳤다.

일본은 미제의 세균전만행에도 적극 가담하였다.

이미 360여만명을 상대로 감행한 8 000여건의 세균, 독가스실험자료들과 여러가지 참고자료들, 사진자료, 환등자료, 세균탄설계도면, 일본에 있는 세균연구기관들과 설비들을 패망직후 미제에게 고스란히 넘겨준 일제의 악명높은 살인부대인 731부대 부대장이며 세균전전범자인 이시이 시로일당은 조선전쟁시기 미제의 세균전에 쓰인 세균매개체들을 전적으로 맡아 생산보장하였다.

이밖에도 세균탄투하에 참가한 미군비행사들에게 세균무기와 그 투하에 필요한 강의를 여러차례 해준 사실, 세균전결과에 대한 현지조사를 위해 수십차례 남조선에 기여들어 돌아친 사실 등은 미제의 야만적인 세균전만행의 충실한 협력자, 하수인으로서의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추악한 정체를 잘 보여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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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미국의 대조선침략전쟁에 필요한 병력과 무장장비, 군수품의 수송과 생산보장에서도 특등참전국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일반적으로 전쟁시기 전선부대들에 대한 병력과 군사장비, 군수품의 수송은 작전, 전투의 성과적진행을 담보하는 중요한 조건으로 된다. 이로부터 자기의 모든 수송력을 총동원하여 《유엔군》의 병력과 군사장비들, 탄약과 무기류들, 군량수송을 보장한 일본당국의 행위는 명백히 참전행위로 된다.

이미 조선전쟁이 개시되기 2일전인 1950년 6월 23일 미극동공군의 요구에 따라 일본인비행사의 양성훈련을 극비밀리에 시작한 나까무라는 같은해 10월에 일본인특설공수부대를 조직하고 1951년 1월부터 조선전선에 출동하여 극비의 군사수송임무를 수행하였다.(일본잡지 《슈깡산께이》 28페지)

조선전쟁시기 도꾜도 다찌가와기지에서 통역을 하고있던 아오모리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이 기지에서 미군수송기는 24시간 계속 리착륙을 반복하면서 물자를 실었다.》고 하며 《포탄 등 물자의 포장, 수송기에로의 적재 등을 맡아한 일본인종업원은 7 000명으로부터 2만명이상으로 증가하였다.》고 한다.(일본 《아사히신붕》 1997년 9월 3일)

일본해군에 의한 군수수송은 더욱 큰 규모에서 감행되였다.

구해군출신인 가무라는 자기가 1개월간 수송선 선원으로 복무하는 기간 사세보, 요꼬하마 등지에서 출항하여 제주도, 부산, 군산, 인천, 거제도 등지에 《무기, 탄약, 땅크, 군량 등 모든 군수물자에 군대까지 태워 그쪽(조선)에 날랐는데 인천에서는 함포사격의 비속을 뚫고 상륙시키였다.》고 회상하였다.

수송선 선장으로 조선전쟁과 윁남전쟁에 참가한 일본의 구해군출신인 하마자끼는 《셀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일본에서 조선의 동, 서해항구들을 왕복했는데 그 임무는 군수물자(식량, 탄약)의 수송과 병력수송이였다.》고 고백하였다.

또한 수송선 선원이였던 구해군출신 미나미의 증언에 의하면 요꼬하마, 사세보 등지에서 연유와 땅크 등을 부산, 제주도에 날랐는데 《그때에 수송선을 탄 (일본)선원은 약 5 000명정도였다.》고 하면서 많은 일본선원들이 미국시민권과 높은 월급을 탐내여 위험을 돈과 바꾼 어제날의 해군출신들이였다고 한다.

미일반동들은 이처럼 《사람잡이보상으로 미국시민권을 준다.》는것을 미끼로 하여 조선전쟁에 그들을 내몰았다.

일본선원 이찌무라의 고백에 의하면 관부련락선(시모노세끼-부산간의 련락선)의 《꽁고》호 등으로 《전쟁발발직전에 … 미군병사들을 부산으로 수송하였는데 그 수송인원은 약 5 000명이였다.》고 하며 《꽁고》호는 한번에 300~800명의 미제침략군을 밤낮 휴식도 없이 극비로 수송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일본에서 첫번째로 크다는 사세보항은 미군의 출격, 병참기지로 되였으며 조선전쟁 3년간에 매일 백수십척에 달하는 함선들이 집중되여 배전이 서로 부딪치는 혼란을 빚어냈다고 한다.

일본정부는 특히 1950년 7월초부터 수송부문에 《전시체제》를 세우고 국영철도에서 운영되던 화물차량 2만 5 000량중에서 그 절반에 달하는 1만 2 000량을 미군의 군수물자수송에 동원하였다.(일본잡지 《조선연구》 1966년 4호 18페지)

일본정부는 또한 1950년 7월 4일 미군수물자수송에 일본선박들을 동원할데 대한 내각결정을 채택하고 요꼬하마, 사세보, 마이즈루를 비롯한 수많은 군항들을 보수확장하는것과 함께 고베를 비롯한 여러 무역항들을 군항으로 전변시켜 미제의 조선침략전쟁에 전적으로 복무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선박들이 부산으로 운반한 화물은 매일 평균 1만 660t에 달하였으며 1950년 7월 한달동안에 부산항으로 수송한 물동량만도 30만 9 000t에 달하였다.(일본도서 《륙전사집》1권 1975년 159~160페지)

1950년 10월 14일 일본수산성 선박국이 종합하여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1950년 7월부터 10월까지 일본은 조선전쟁에 248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99만 5 800t의 미군수물자를 수송하였다.

일본은 또한 전령토를 《유엔군》의 모자를 쓴 미제침략군과 그 추종국가군대의 출동기지, 공격기지로 내맡김으로써 미제의 조선침략전쟁에 대한 참전국으로서의 역할을 놀았다.

미군을 비롯한 다국적무력은 모두 먼저 일본의 미군기지들에서 재편성되고 훈련받은 다음 조선전선에 출동하였으며 우리 나라에 대한 폭격에 동원된 미제침략군 비행기들과 수송기들, 전투함선들도 일본의 비행장들과 항구들에서 재정비한 다음 그곳을 기지로 하여 조선전선에 출동하였다. 여기에 리용된 일본의 미군기지시설들은 1953년 1월현재 220개의 병영과 44개의 비행장, 30개의 항만, 79개의 련습장, 116개의 통신시설 등 모두 733개나 되였다.

일본의 전령토는 또한 미군의 후방보급기지, 병참기지, 수리기지로 전변되여 미군에 수많은 무기, 탄약들을 생산공급하였으며 전장에서 파괴된 미군의 땅크, 대포, 자동차 등을 수리해주었다.

일본정부는 전문적으로 미군의 병력, 탄약, 무기, 장비들을 맡아 공급하는 특별조달청을 조직하였는데 각지에 설치된 그 산하 감독기관들은 약 70개나 되였다. 조달청은 정부의 권리로 히다찌제작소와 미쯔비시중공업, 고마쯔제작소를 비롯한 일본의 독점체들이 미군이 요구하는 보총과 박격포를 비롯한 각종 구경의 포와 포탄들, 락하산과 조명탄, 여러가지 망원경을 비롯한 조준무기들의 생산 그리고 자동차, 차량, 땅크, 함선의 수리 및 제조까지 맡아수행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생산된 무기들은 조선전쟁터에 실려갔다.

일본 《니홍게이자이신붕》 1953년 7월 16일부가 발표한데 의하면 1952년 5월부터 1953년 6월까지의 기간에만도 일본이 미군에 공급한 각종 구경의 대포는 2 000문, 바주카형 반땅크포는 7 656문, 로케트탄은 120만발, 각종 포탄은 230만발, 수류탄은 220만개나 되였다.

일본이 1951년에 미군에 제공한 자동차는 무려 1만 385대였으며 1952년에 제공한 자동차부속품은 금액상으로 1951년의 2. 2배인 11만US$에 달하였다.

그밖에 밝혀지지 않은 무기, 장비들과 그 부속품들, 군량, 연유, 철조망, 석탄, 목재 등 후방물자들을 미군에 생산공급하였는데 전쟁 3년간에 그 값은 당시의 가격으로 총 11억US$이상에 달하였다. 이만한 금액이면 남조선괴뢰군 8개 사단을 완전무장시켜 1년간 싸울수 있게 보장해준것으로 된다고 한다.

일본신문 《아까하다》 1970년 6월 25일부는 일본이 《조선전쟁기간 미군에 공급한 모든 무기와 의료, 식료품의 총 판매액은 23~24억US$에 달한다.》고 폭로하였다.

특히 주목되는것은 일본이 조선전쟁에서 파괴된 미군의 각종 땅크, 자동차, 비행기 등 무장장비들을 모두 맡아 수리재생하였거나 새로 생산공급하였다는 사실이다.

전쟁후 1년간에 파괴된 자동차의 84%, 땅크의 38%, 각종 포의 68%, 저격무기의 70%가 일본의 공장들에서 수리재생되였다.(미국신문 《뉴욕 헤랄드 트리뷴》1952년 6월 7일)

이 수량의 무기들을 일본에서 8 000㎞떨어진 미국본토에 실어다가 수리재생하여 리용한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수리해준 무기들은 일본이 새로 생산공급해준것과 같다고 할수 있다.

하기에 일본주재 미국대사 머피는 일본이 병참기지, 수리기지, 보급기지의 역할을 한데 대하여 《일본사람들은 놀라운 속도로 그들의 4개의 섬을 하나의 거대한 보급창고로 전변시켰다. 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미국은)조선전쟁을 할수 없었을것이다.》라고 말하였으며 미군사령관 릿지웨이는 《일본 조달청의 조달에 의한 차량수리 및 재생하는 역무의 실적이 없었더라면 조선사변은 3개월도 유지할수 없었을것이다.》라고 실토했다. (《더글라스 맥아더》1952년 176페지)

1952년 5월 6일 미국의 UPI통신도 《만일 일본에서의 수리가 없었더라면 (군사장비의)보수, 정비에 큰 곤난을 느끼고있던 미제8군은 일찌감치 조선에서 쫓겨났을것이다.》라고 론평하였다.

우의 수자자료들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평가가 조금도 과장없는 평가라는것을 잘 알수 있다.

모든 사실이 보여준바와 같이 수만명의 병력을 조선전선에 파견했을뿐아니라 《유엔군》의 무장장비와 후방보급을 도맡아 보장했고 온 나라의 경제, 군사적힘을 총동원하여 미군의 전투수행을 도와준 일본이야말로 미제에 의한 조선침략전쟁의 특등참전국이며 미국을 대행한 특대형전범국이다.

때문에 일본은 조선침략전쟁에 가담하여 우리의 평화적주민을 살해하고 국토를 재더미로 만든 죄과를 솔직하게 인정하며 성근하게 사죄하여야 한다.

아직도 전범국의 죄를 벗지 못하고있는 일본이 세계평화애호인민들과 사이좋게 공존, 공영할수 있는 길은 오직 죄많은 과거와 결별하는것뿐이다. 특히 조선인민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조선을 군사적으로 강점하고 식민지로 만든 죄를 씻기도전에 일본은 패망한지 5년도 못되여 미제의 하수인으로서 조선침략전쟁에 특등참전국으로 참가하는 엄중한 범죄를 다시금 저질렀다.

일본반동들은 이에 대하여 사죄하고 배상할 대신 조선병탄의 꿈을 여전히 버리지 않고있으며 미국, 남조선과의 3각군사동맹을 실현하여 종주국의 옛 지위를 되찾으려고 발악하고있다.

그러나 오늘의 조선인민은 어제날의 조선인민이 아니다. 우리 민족은 일본이 과거 조선인민에게 끼친 죄악을 한시도 잊지 않고있다.

침략은 파멸의 길이다. 일본은 응당 조선전쟁의 패배에서 심각한 교훈을 찾고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한다.

주체100(2011)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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