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침략과 범죄의 역사』 중에서

2. 조선전쟁과 미군의 만행   

  1) 조선전쟁의 도발자  

□ 1950년 6월 25일

미제는 195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전쟁도발을 위한 본격적인 책동에 달라붙었다.

미제는 무엇보다먼저 조선전쟁개입의 담보를 마련하려고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이를 위해 1950년 1월 트루맨의 지시에 따라 미합동참모본부 의장 브랫들리, 해군작전부장 셔먼, 공군참모장 반덴버그 등 군부의 고위급인물들이 도꾜의 맥아더사령부에 연방 날아들어 조선전쟁도발과 관련한 문제를 놓고 꿍꿍이를 하였는가 하면 그와 때를 같이하여 미국방장관 죤슨과 미극동군사령부 외교국장 시볼트가 서울에 기여들어와 리승만역도와 전쟁도발문제를 토의하고 남조선군이 조선전쟁을 도발한 즉시로 미해공군을 동원시킬것을 약속하였다.

미제는 또한 1950년 1월 26일 리승만《정부》와 《호상방위원조협정》이라는것을 체결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조선전쟁이 일어나면 미군을 직접 들이밀수 있는 《법적담보》를 마련하기 위한 술책이였다.

이에 따라 맥아더는 도꾜에서 2월 15일 남조선당국자들과 《북벌》에 대한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이를 위해 군사실무적조치를 취한 다음 그것을 실천행동에 옮기도록 지시하였다.

이 《협정》이라는것은 말이 《협정》이지 실지에 있어서는 맥아더가 훈령을 내리고 남조선의 리승만역도와 일본의 요시다가 무조건 복종하고 집행하겠다는것을 언약한것이였다. 때문에 이 《북벌협정》에는 합의문이라는것이 없고 단지 맥아더의 11개조 훈령이 있을따름이였다.

한편 미제는 남조선군의 전쟁준비상태를 현지에서 확정하고 전쟁도발음모를 더욱 구체적으로 세웠다.

트루맨은 1950년 4월초에 공화당의 매파우두머리 덜레스에게 조선전쟁도발과 관련한 최종처리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렇게 되여 전쟁상인 덜레스가 《특사》로 남조선에 기여들게 되였다.

남조선에 날아든 덜레스의 기본임무는 현지에서 남조선군의 전쟁준비상태를 최종적으로 검토하고 조선전쟁도발지령을 주는것이였다.

워싱톤을 떠나 도꾜에서 맥아더를 만난 덜레스가 서울에 날아든것은 6월 17일이였다.

덜레스는 다음날 남조선주재 미국대사 무쵸, 미군사고문단장 로버트, 《국방장관》 신성모를 비롯한 군의 고위급장성들을 거느리고 38°선일대를 싸다니며 남조선군의 배치와 부대의 전투준비상태, 경찰의 싸움준비상태까지 검열하였다.

그리고 작전지도를 펼쳐놓고 공화국북반부의 38경비대의 방어진지와 현 상황을 료해하고 현지에서 《북벌》전쟁작전계획을 최종적으로 검토하였다.

※  덜레스는 38°선을 돌아본 후 리승만역도에게 《당신들이 자기의 솜씨를 보일 때는 그리 멀지 않았다.》고 지껄였다. 그리고 같은 날 남조선군사병들앞에서 《당신들이 자기의 힘을 과시할 때는 그리 멀지 않다.》, 《아무리 강하여도 당신들을 항거할 적은 없을것이다.》, 《전쟁이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공산주의자들은 결국 북조선에 대한 지배를 잃어버릴것이다.》고 얼빠진 역설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6월 19일에는 남조선《국회》에 나타나 《당신들은 고립되여있지 않다. 당신들은 인간의 자유를 위한 위대한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것이다.》, 《미국은 남조선이 공산주의와 싸우는데 필요한 모든 정신적, 물질적지원을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지껄였다.

남조선을 떠나기에 앞서 리승만역도와 한 쑥덕공론에서도 덜레스는 《북조선에서 먼저 침입하였다는 역선전과 동시에 북조선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라. … 만약 2주일만 견디여낸다면 이동안에 미국은 북조선이 남조선을 공격하였다고 제소하면서 유엔으로 하여금 그 이름으로 륙해공군을 동원하지 않을수 없게끔 하면서 모든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할것이다.》고 가소로운 망발을 늘어놓았다. 그런가 하면 도꾜로 출발하기 전날인 20일에 리승만역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바야흐로 막이 열리게 될 연극에서 귀국에서 수행할 결정적역할에 비상한 중요성을 부여하고있다.》고 썼다.

6월 21일 당시 도꾜로 날아간 덜레스는 곧 국방장관 죤슨, 합동참모본부 의장 브랫들리, 극동군총사령관 맥아더와 《도꾜4자회담》을 가지였다.

덜레스는 여기에서 조선전쟁도발날자와 시간, 전쟁도발에서 남조선군이 놀게 될 역할과 전쟁개시후 미극동군 륙해공군부대들의 행동절차 등을 최종적으로 확정하고 맥아더와 로버트가 실천에 옮기도록 하였으며 이와 관련한 지시를 리승만역도에게 통지하였다.

말그대로 이제 남은것은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다는것뿐이였다.

미제는 조선전쟁을 도발함에 있어서 전쟁방화자로서의 저들의 정체를 은페하기 위해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당시 미제는 이른바 《침묵》전술을 썼다. 1950년 5월 10일이후부터 남조선에서 출판보도관제를 실시하도록 한 미제는 일본에서까지 6월 16일부터 집회와 시위를 무기한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마치도 남조선을 《조용한 나라》로 묘사하려고 하였다.

※  미국도서 《조선전쟁의 력사》(상)에는 《<아침의 나라>라고 하는 이 나라의 지상과 지하에서 일어나고있는 여러 사건들가운데 정세의 독특한 변화를 반영하는 하나의 사건이 있다. 북으로부터 공격이 예상된다고 한 국방장관의 5월 10일 경고가 있은 후 신문들을 비롯한 출판물들과 정치가들에 의한 그러한 담화가 완전히 정지된것이다.》라고 씌여져있다.

또한 일본도서 《조선전쟁》에는 《가장 위험한 때라고 판단한 시기에 <한국정부>가 40일간에 걸쳐 침묵을 지키고있은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는가. 이것은 사실 이상한 일이다.》고 씌여져있다.

미제는 전쟁도발을 앞두고 그 무슨 《주말휴식》이요, 《려행》이요 하는따위의 광대극까지 벌려놓았다. 조선전쟁도발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듯 한 서푼짜리 연극이였다.

6월 24일(토요일) 아침 트루맨은 고향 미주리주에서 가족과 같이 주말을 보내기 위해 전용기를 타고 워싱톤을 떠나는 놀음을 벌렸는가 하면 덜레스는 24일에 맥아더와 회담하고 《관광》을 하려고 교또에 가는것과 같은 놀음을 벌렸다.

그리고 미국무장관 애치슨 역시 《주말휴식》차로 메릴랜드근처의 자기 농장에 려행하는 연극을 놀았고 미륙군장관 프랑크페스와 미극동담당 국무차관보 딘 러스크는 죠지타운의 어느 한 가정의 만찬회에, 남조선 미군사고문단장 로버트는 소환차로 본국으로, 참모장 라인트는 려행차로 일본 도꾜로 가는 연극을 부렸다.

1950년 6월 24일 일본에서 조선전쟁의 직접적관계자인 맥아더와 미륙군 제24사단장 띤도 연회로 밤을 보내고있었다.

미제는 이밖에 1950년 6월초부터 실시하여온 《비상계엄령》도 6월 24일 0시를 기점으로 해제하고 외출, 외박, 휴가도 허용한다는것을 선전수단을 통하여 거짓선전하였다.

※  미제의 이러한 책동에 대하여 미국도서 《조선전쟁: 대답없는 질문》에서는 이렇게 서술하였다.

《딘 러스크는 서울로부터의 보고에 접하자 저녁식사를 하다말고 사무실로 달려갔다. 그는 중간급관리들을 여러명 호출하였다.

그러나 국무장관 애치슨이나 대통령 트루맨에게는 조선에서의 위기가 즉시에 전달되지 않았다. 메릴랜드근처의 자기 농장에 있던 애치슨은 몇시간후에야 이 소식을 전달받았다. 미주리주의 고향을 방문중에 있던 트루맨대통령은 이 소식을 더 늦게 전달받았으며 그가 서둘러서 워싱톤에 돌아올 필요가 없다는 권고까지 받았다. 그것은 이상야릇한 일이였다. 전쟁전야에 미국의 립장을 대변해야 할 대통령과 국무장관 둘 다가 외출하였던것이다. 후에 미국은 이것을 뜻밖의 놀라운 일로 접수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초기행동들로 판단해볼 때 여기에는 확실히 음모적인데가 있다.》

보는바와 같이 미제는 사전에 면밀히 타산하고 정한 전쟁도발날자와 전쟁방화자로서의 범죄를 감추고 오히려 그 책임을 공화국에 넘겨씌우기 위한 각본대로 행동하였다.

트루맨의 비준하에 미극동군사령부는 구체적으로 작성된 조선전쟁계획에 따라 남조선당국자들에게 전쟁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남조선군 참모총장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는 작전명령 제29호를 남조선군부대들에 하달하였다. 그리하여 남조선군은 미군사고문들의 지휘밑에 38°선 전역에 걸쳐 공화국북반부를 반대하는 침략적인 무력침공을 개시하였다.

 ※  조선전쟁의 개시날자를 왜 6월 25일로 정했는가?

당시 교활한 미제는 예수를 믿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이 그리스도교나라들이 일요일 례배당에 가있는 사이에 전쟁을 일으켰다고 허위선전하기 위하여 일요일이 가장 좋다고 타산하였다. 그런데 6월의 남은 일요일은 오직 25일밖에 없었던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군사고문단장 로버트는 리승만역도에게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우리가 왜 25일을 택하게 되였는가? 여기에 심중한 의도가 있다. 25일은 일요일이다. 그리스도교국가인 미국이나 남조선은 일요일을 안식일로 정하고있다. 우리가 일요일에 전쟁을 개시했다는것을 믿을 사람은 아마도 없을것이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는것을 사람들에게 믿게 하기 위해서였다.》(《6.25전쟁도발자는 누구인가》 스위스 민중출판사 83페지)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미제는 조선전쟁도발의 책임이 공화국에 있는듯이 세계여론을 오도하면서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끌고가 비법적인 결정을 채택하였으며 저들의 침략무력을 대대적으로 조선전쟁에 개입시키는 범죄를 감행하였다.

그에 대해 구체적으로 본다면 당시 미제는 서울에 와있는 미국대사 무쵸와 저들의 침략도구인 《유엔조선위원단》으로 하여금 거짓보고를 꾸며가지고 보내도록 지시하였다.

작성된 계획에 따라 미국무성이 무쵸의 날조된 보고를 접수한 직후 유엔 미국대표대리인 그로스는 6월 25일 오후 5시(워싱톤시간으로 새벽 3시)에 긴급전화로 유엔사무총장 트르그베리를 불러내여 유엔안전보장리사회를 즉시 소집할것을 강요하였다.

미제는 저들의 거수기를 발동하여 유엔안전보장리사회에서 공화국에 전쟁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비법적결정을 채택하였으며 뒤이어 6월 27일에는 미제와 기타 유엔성원국가들의 조선에 대한 무력간섭을 허용하는 침략적《결정》을 채택하였다.

미제는 이와 함께 조선전선에 미제침략군을 대대적으로 들이미는 적극적인 군사행동에로 넘어갔다.

6월 25일 당시 트루맨은 미국무장관과 차관, 륙해공군의 장관, 합동참모본부 의장, 륙군참모장, 해군작전부장 등을 급히 영빈관에 모이게 하고 거기에서 조선에 대한 무력간섭을 위한 모의를 가지였다.

6월 26일부터 27일사이에 트루맨은 맥아더에게 비밀지령을 내려 조선전쟁에 미해공군이 진입하도록 명령하였으며 지상군도 순차적으로 조선전쟁에 투입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7월초부터 일본에 있던 미제24보병사단, 25보병사단, 1기병사단을 비롯한 미륙군무력이 투입되고 7월 18일부터는 미국본토로부터 무력이 투입증강되였다. 또한 미제13항공군관하 전투폭격기들과 2, 15, 20항공군관하 전략폭격기들을 증파하여 공화국북반부 전지역에 대한 폭격을 무차별적으로 감행하였다. 그리고 미제7함대로 공화국북반부의 해안을 봉쇄하고 해안지대에 대한 함포사격을 강화하였다.

미제는 1950년 6월 27일 이미 각본에 따라 채택된 《유엔결의》를 코에 걸고 추종국가들에 대한 《원조》를 강요하였다.

※  1950년 6월 29일 트루맨은 될수록 많은 추종국가군대를 조선전쟁에 끌어들일것을 요구하였다.

7월 7일 미제는 유엔안전보장리사회를 통하여 여러 나라 추종국가군대들을 조선전쟁에 대대적으로 끌어들일 결정을 채택하기 위한 막후공작을 하였다.

그리고 도꾜에 있는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를 《유엔군》사령관으로 겸임시키고 7월 25일에는 《유엔군사령부》까지 설치하였으며 조선전쟁에 투입되는 미군과 추종국가군대들에 《유엔군》의 모자를 씌워놓았다.

이처럼 전쟁도발자로서의 미제의 정체는 세계의 면전에서 여지없이 드러났다.

미제야말로 조선전쟁을 도발하고 《유엔》을 도용하여 침략전쟁을 확대한 가장 흉악하고 교활한 전쟁방화자, 침략자이다. 미제는 우리 민족에게 재난의 불씨를 가져다준 조선전쟁의 도발자로서의 그 범죄적책임에서 절대로 벗어날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