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35)

필리핀 신애국동맹의 정체와 일본 사민당의 몰락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필리핀과 일본의 진보정당 경험을 주목하는 까닭

세계 각국에서 축적되어온 변혁과 진보의 다양한 경험들을 살펴볼 때, 우선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동아시아를 주시하게 된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 가운데 특히 필리핀과 일본을 주시하는 까닭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속국으로 전락한 그 두 나라가 예속자본주의의 길을 걸어온 역사적 경험을 지녔기 때문이다.

미국이 필리핀과 일본을 속국으로 만든 과정은 이른바 '안보조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완결되었다. 6.25 전쟁의 불길이 한반도를 휩쓸고 있었던 전시에 미국은 1951년 8월 30일 필리핀과 '상호안보조약'을 맺었고, 같은 해 9월 8일 일본과 '안보조약'을 맺었다. 미국은 필리핀, 일본과 더불어 남측과도 '안보조약'을 맺어야 했으나, 6.25 전쟁이 지속되는 바람에 뒤로 미루다가 정전협정에 조인한 직후인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안보조약'을 맺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논의의 배경에 두면서, 이 글의 관심사는 필리핀과 일본에서 진보정당들이 각기 겪어온 역사적 경험을 인식하는 문제에 집중한다.

이 땅에 민주노동당이 대표적 진보정당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필리핀에는 신애국동맹이 있고, 일본에는 사민당이 있다. 물론 민주노동당, 신애국동맹, 일본 사민당이 넓은 의미의 진보정당이라 해도 정치노선은 서로 크게 다르다. 이 땅의 민주노동당은 중도좌파정당이고, 필리핀의 신애국동맹은 좌파연합정당이고, 일본 사민당은 중도우파정당이다.

정치이념지형을 보면, 민주노동당은 필리핀 신애국동맹과 일본 사민당의 중간쯤에 자리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이념지형의 차별성이 말해주는 것은, 필리핀에서 사회계급적 모순이 격화되고 중산층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므로 필리핀 진보정당이 좌파노선을 추구하고, 일본에서 사회계급적 모순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중산층이 발달하였으므로 일본 진보정당이 중도우파노선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땅의 사회계급적 모순은 필리핀과 일본의 중간수준에 있으므로, 이 땅의 진보정당은 중도좌파노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만일 이 땅의 사회계급적 모순이 필리핀에서 그러한 것처럼 격화된다면,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민주노동당 이외에 새로운 좌파정당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땅의 사회계급적 모순이 일본에서 그러한 것처럼 매우 느슨해진다면, 민주노동당은 중산층을 위한 정책을 더욱 강화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현실, 사회경제적 지표, 사회계급구성 등을 비교해보면, 이 땅의 사회계급적 모순은 일본에서 그러한 것처럼 느슨해질 가능성은 보이지 않고, 되레 필리핀 쪽으로 기울어질 격화의 가능성이 보인다. 따라서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민주노동당을 건설하고 중도좌파노선을 추구하는 것은 현 시기 사회계급구성에 대한 사회변혁운동의 정합성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객관적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이 땅에서 좌파정당, 노동자계급정당, 사회주의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급진좌파노선이나, 사회변혁전망을 내려놓고 사민주의정당, 중산층정당, 복지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중도우파노선은 현 시기 사회계급구성에 대한 사회변혁운동의 정합성을 반영하지 못하는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민주노동당은 2000년에 창당되어 중도좌파노선을 추구해왔는데, 필리핀 신애국동맹은 1985년에 결성되어 26년 동안 좌파노선을 추구해왔고, 일본 사민당은 1945년에 일본 사회당으로 창당되었고 1996년에 일본 사민당으로 당명을 바꾸었으니 당명 개정 이후 11년 동안 중도우파노선을 추구해왔다. 신애국동맹의 26년 좌파노선과 일본 사민당의 15년 중도우파노선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민주노동당이 걸어온 11년 중도좌파노선을 성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신애국동맹은 왜 정체상태에 빠졌을까?

신애국동맹(New Patriotic Alliance)은 바얀(BAYAN)이라고도 불리는 데, 바얀이란 바공 알량상 마까바얀(Bagong Alyansang Makabayan)이라는 타갈로그어 조직명칭의 약칭이다. 신애국동맹이 결성된 배경사는 196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오른다. 당시 필리핀의 사회변혁운동가들은 필리핀 사회변혁운동의 성격을 "반제자주노선에 기초한 새로운 형태의 민족민주운동(national democratic movement)"을 규정하였다. 

박정희 친미독재정권이 1972년에 '유신체제'를 세우고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이 땅의 민족민주운동을 짓밟은 것처럼, 마르코스 친미독재정권도 1972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필리핀 민족민주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이 땅의 친미독재정권은 1979년 부마민중항쟁과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군부의 학살작전으로 진압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필리핀의 친미독재정권은 1983년 8월 21일 저명한 야당지도자 베니그노 아퀴노를 암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퀴노 암살은 필리핀 민족민주운동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는 기폭제로 되었다. 1985년 5월 1일 세계노동절을 맞으며 지역과 부문으로 분산된 민중운동세력이 총결집하여 연합전선체를 창설하였으니, 그것이 신애국동맹이다.

신애국동맹에는 18개 진보적 대중조직들이 결집되었는데, 5.1운동노동센터(KMU), 필리핀농민운동(KMP), 청년동맹(Anakbayan), 필리핀학생동맹(LFS), 필리핀기독교학생운동(SCMP), 여성단체전국동맹(Gabriela), 여성노동자운동(KMK), 여성농민연합(PWA), 도시빈민여성연합(Samakana), 민주의료동맹(HEAD), 정의평화일치운동(EMJP), 진보교원동맹(ACT), 어민연합(Pamalakaya), 단결, 인정, 진보를 위한 공무원협의회(COURAGE), 교회의 책임을 위한 진흥회(PCPR), 전국소수자연합(KAMP), 국제이민자(MI), 1/4분기 폭풍운동(FQSM)이다.

신애국동맹은 "민족해방과 사회해방을 성취하기 위해 미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를 반대하는 필리핀 민중의 투쟁을 힘있게 전개한다"고 선언하여 자기의 좌파노선을 천명하고 8대 강령을 제시하였다. 1994년 4월에 채택된 신애국동맹 8대 강령은 반제자주강령, 민중민주주의강령, 경제자립강령, 민중복지강령, 민족민주문화강령, 소수민족자결강령, 양성평등강령, 국제연대강령이다. 

민주노동당과 신애국동맹은 연합전선체 형태의 정당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은데, 민주노동당은 개별당원들의 결합체인 것에 비해 신애국동맹은 대중조직들의 결합체다. 이 땅에서는 대중정당 형태의 연합전선체(민주노동당)과 대중조직 형태의 연합전선체('민중의 힘')로 역할이 분담되지만, 필리핀에서는 대중조직 형태의 연합전선체가 정당 역할까지 수행한다.

필리핀에는 신애국동맹이라는 진보적 대중정당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합법 전위정당인 필리핀공산당(CPP)도 있고,  그 당이 이끄는 비합법 연합전선체 민족민주전선(National Democratic Front)도 있고, 그 당의 무장조직인 신인민군(New People's Army)도 있다. 필리핀공산당은 1968년 12월 26일에 창당되었고, 민족민주전선과 신인민군은 1969년 3월 29일에 각각 창설되었다. 이것은 진보적 대중정당만 존재하는 이 땅의 정치현실과 필리핀의 정치현실이 매우 다르다는 점을 말해준다.

어느 나라에서나 진보적 대중정당은 원내진출과 대선참여를 중심으로 합법정치활동을 전개한다. 따라서 대중정당의 정치활동을 평가하는 객관적 기준은 그 정당이 대중적 지지기반을 얼마나 광범위하게 구축하였는가 하는 것으로 설정되며, 대중정당의 대중적 지지기반은 원내진출 수준에 직접적으로 반영된다. 그러면 신애국동맹의 원내진출 수준은 어떠한가?

양원제로 운영되는 필리핀 의회는 상원 24석, 하원 287석으로 구성되었는데, 필리핀 정치권을 장악한 5대 정당의 의석수는 이렇다. 자유당(Liberal Party)은 상원 4석, 하원 118석을 차지했고, 민주당(Lakas Kampi CMD)은 상원 4석, 하원 45석을 차지했고, 민족주의당 (Nacionalista Part) 상원 4석, 하원 22석을 차지했고, 국민연합(Nationalist People's Coalition)은 상원 2석, 하원 32석을 차지했고, 필리핀 대중의 힘(Force of the Filipino Masses)은 상원 2석, 하원 5석을 차지했다.

그런데 신애국동맹은 상원에서 한 석도 차지하지 못했고, 하원 287석 가운데 7석을 차지하였을 뿐이다. 또한 지방자치단체장 79석 가운데 한 석도 차지하지 못했고, 지방의회 756석 가운데서도 한 석도 차지하지 못했다. 더욱이 독자 대선후보출마는 생각하기 힘들다. 신애국동맹이 26년 동안 대중적 진보정당으로 활동해왔는데도 대중적 지지를 그것밖에 얻지 못했다면 당의 발전이 정체된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러한 정체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신애국동맹은 진보적 대중정당이면서도 결성 이후 오랫동안 총선과 대선에 참가하지 않았다. 민중항쟁노선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좌편향으로 흘렀던 것이다. 신애국동맹이 총선에 처음 참가한 때는 결성 이후 16년이 지난 2001년이었다.

필리핀에는 비합법 전위정당도 있고, 비합법 연합전선체도 있으므로, 진보적 대중정당인 신애국동맹이 선거참여를 거부하고 민중항쟁노선에만 의존할 필요는 없는데도 민중항쟁노선에 전적으로 의존해왔다. 또한 좌파노선을 추구하는 신애국동맹은 중도우파세력들과 정치적으로 연합하여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대하고 정치역량을 강화하여야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독자발전의 길만 모색해왔다. 신애국동맹의 이러한 좌편향 정치노선은 그 당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그 당이 발전하는 길을 가로막은 전략적 오판이었다.

일본 사민당은 왜 몰락하였을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가 패망하였던 1945년에 일본에서 사회주의 정치노선을 추구하는 사회당이 창당되었다. 창당 이후 일본 사회당은 진보적 노동운동을 기본으로 하는 대중적 지지기반을 꾸준히 확대하여 제1야당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일본이 겪은 사회계급구성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우편향 오류를 반복하다가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비극적인 몰락의 사연은 이렇다.

원래 일본 사회당의 대중적 지지기반은 일본노동조합평의회(총평)였다. 총평은 1950년 7월에 결성되어 한때 화학노조, 공무원노조, 교직원노조, 철도노조, 체신노조, 금속노조 등 노조원 550만 명을 망라하며 가장 강력한 조직력을 지녔으며, 1960년대에는 미일안보조약 페기투쟁, 주일미국군기지 철거투쟁을 주도하였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일본의 사회계급구성에 커다른 변화가 생겼다. 노동계급이 분화되고, 도시중산층이 인구구성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커다란 변화를 겪은 것이다. 일본 사회당은 그러한 사회계급구성의 변화를 주시하고 그에 대응해 새로운 전략을 모색해야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일본 사회당은 여전히 맑스주의 고전이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총평을 자기의 유일한 지지기반으로 삼았다.

일본에서 사회계급구성이 변화하는 것에 따라 노동운동도 변화을 겪었다. 일본 사회당의 지지기반이었던 총평은 날로 쇠락하더니, 1989년 11월에 자진해산하고 새로 건설된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에 흡수통합되었다. 총평 해산은 일본 사회당을 지지해온 진보적 노동운동이 사라지고, 일본 사회당이 더 이상 좌파노선을 견지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총평 해산 이후 일본 사회당은 급속히 우경화되었다.

일본 사회당은 1990년 4월에 열린 당대회에서 좌파노선을 버리고 중도좌파노선을 뛰어넘어 중도우파노선으로 급전환하였다. 당의 정치이념을 사회주의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뛰어넘어 사회민주주의로 바꾼 것이다. 1996년에는 당명도 사회당에서 사민당으로 바꾸고 자위대, 미일상호방위조약, 한일국교정상화를 인정하는 우경화의 길로 나아갔다. 그러나 일본 사회당의 우경화는 당의 부흥이 아니라 당의 몰락을 재촉하는 지름길이었다.

일본 사회당이 좌파노선을 견지하고 있었을 때는 우파정당과의 정치연합을 생각하지도 않았으나, 일단 중도우파노선으로 급전향하자 우파정당과의 정치연합에 거리낌을 느끼지 않았다. 이를테면, 일본 사회당은 1993년에 호소카와 연립정권에 참가하였는데, 호소카와 연립정권은 호소카와가 자민당에서 탈당하여 창당한 일본신당을 중심으로, 사회당, 공명당, 민사당, 신당사키가케, 사회민주연합,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가 결성한 우파연립정권이었다.

일본 사회당은 호소카와 연립정권에 참가한 뒤로 얼마 가지 않아 그 연립정권에서 탈퇴하였고, 1994년 6월 30일에는 일본 우파정당의 대표격인 자민당, 그리고 신당사키가케와 정치적으로 연합하여 3당 연립정권을 세웠다. 이것이 사회당 출신 무라야마를 총리로 하는 3당 연립정권이다.

3당 연립정권에서 사회당 출신 무라야마가 총리직을 차지했으나, 일본 사회당이 우파정당들과 정치적으로 연합한 것은, 현재 이 땅의 정치권에 비유하면, 민주노동당이 한나라당과 정치적으로 연합하여 우파연립정권을 세운 것과 마찬가지였다. 무라야마 연립정권이 미일안보조약을 인정하고 일본의 비무장 중립노선을 폐기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총평 해산과 급속한 우경화 노선이 일본 사회당에게 안겨준 것은 대중적 지지기반의 급속한 붕괴밖에 없었다. 일본의 각계각층 근로대중은 우경화한 일본 사회당을 외면하였다. 그 결과, 일본 사회당은 1996년 7월 18일에 실시된 중의원(하원) 선거에 사민당으로 당명을 바꿔 참가하였으나 480석 가운데 2석밖에 얻지 못하고 완전히 몰락하였다.

1990년 2월 18일에 실시된 중의원 선거에서 136석을 차지한 제1야당 사민당이 불과 6년만에 재기불능상태에 빠져버린 충격적인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그 이후 사민당의 중의원 선거결과를 보면, 일본 사민당 당수로 등장한 저명한 여성정치인 도이 다까꼬의 대중적 인기가 힘을 발휘하여 2000년에 19석으로 조금 증가하였다가, 2005년과 2009년에 각각 7석으로 다시 주저앉았다.

재기불능상태에 빠진 일본 사민당은 2009년 9월 16일 하토야마 3당 연립정권에 참가하였다. 하토야마 3당 연립정권은 민주당, 사민당, 국민신당이 결성한 연립정권이다. 그런데 간판은 연립정권이었으나, 민주당이 308석, 사민당이 7석, 국민신당이 3석을 각각 차지한 상태에서 정치적으로 연합한 것이었으니 실제로는 연립정권이 아니라 민주당 정권이었다.

일본 사민당은 오키나와 후텐마 미국군기지 이전문제를 둘러싸고 친미성향의 일본 민주당과 정면충돌하는 바람에 2010년 5월 28일 연립정권에서 탈퇴하였다.

일본 사회당이 사민주의 복지담론에 매몰되어 좌파노선에서 중도우파노선으로 급선회하고 당명을 일본 사민당으로 바꾼 것은 정치적으로 몰락하는 길을 재촉하였다. 1970년대 이후 일본에서 사회계급구성이 변화되고 중산층이 발달한 것은 일본 사회당이 좌파노선을 더 이상 유지하기 못하게 만든 요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좌파노선에서 중도좌파노선을 건너뛰어 중도우파노선으로 급전환한 것은 명백한 우편향 오류였다.

만일 1970년대 이후에 일본 사회당이 중도좌파노선을 견지하면서 중산층을 포섭하는 새로운 정책을 제시하고, 사민주의정치세력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더라면 집권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위에서 논한 것처럼, 필리핀 신애국동맹의 좌편향 오류와 일본 사회당의 우편향 오류는 그 두 나라에서 사회변혁의 앞길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되었다.

노동계급이 분화되고 중산층이 발달했다는 점에서 필리핀보다 일본의 사회계급구성에 더 가까운 이 땅에서 민주노동당이 만일 필리핀 신애국동맹처럼 중산층을 외면하고 노동계급에만 의존하며, 중도우파정당들과의 정치연대를 거부하고 민중항쟁노선에만 의존하는 것은 정치적 고립을 자초하여 당의 발전을 스스로 가로막는 정체의 지름길이다.

또한 이 땅의 사회계급구성이 필리핀보다 일본에 더 가깝다고 해서, 민주노동당이 만일 일본 사회당처럼 사회변혁을 포기하고 사민주의 복지담론에 매몰되며, 무분별하게 우파정당과 정치적으로 연합하는 것은 자기의 대중적 지지기반을 스스로 허물어버리는 몰락의 지름길이다.

오늘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노력하며 2011년 총선과 대선에 대처할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는 민주노동당에게 필리핀 신애국동맹과 일본 사회당의 실패경험은 반면교사의 가르침을 준다. (2011년 6월 11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