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24)
 
 

자마히리야 붕괴의 비극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재스민 혁명'이 아니라 무장반란이다
 
리비아에서 일어난 반정부세력의 폭동이 내전으로 격화되었다. 내전상태에 있는 리비아의 현 정세에 대해서 수구언론매체들은 온갖 왜곡보도를 쏟아내고 있지만, 리비아에서 발생한 내전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면, 아래와 같은 실상이 드러난다.

첫째, 수구언론매체들은 자기들의 왜곡선전을 이른바 '재스민 혁명'이라는 기만적 언어로 포장하였다. 그들이 떠드는 '민주혁명' 또는 '시민혁명'이라는 따위의 언어요술도 '재스민 혁명'이라는 기만적 언어와 똑같은 것들이다.

혁명의 과학적 정의는, 어떤 낡은 사회체제를 새로운 사회체제로 바꾸거나 또는 어떤 낡은 사회성격을 새로운 사회성격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체제의 교체나 사회성격의 교체가 일어날 때, 그러한 근본적 변화를 혁명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각각 친미독재정권이 무너지면서 그 두 나라의 사회체제가 바뀌었을까? 바뀌기는커녕 바뀔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각각 친미독재정권이 무너지면서, 그 두 나라의 사회성격이 바뀌었을까? 바뀌기는커녕 바뀔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다.

두 말할 나위 없이,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바뀌고 있는 것은, 오로지 정권의 '간판' 뿐이다. 사회체제와 사회성격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으며, 낡은 친미독재정권이 무너진 뒤에 매우 불안정한 과도정권의 혼란기를 거쳐 새로운 친미독재정권의 출현을 기다리는 중이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일어난 급격한 정치적 변화는, 혁명이나 사회변혁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친미독재정권의 급진적 세대교체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 두 나라에 새로 등장할 정권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내면화한 2세대 친미독재정권이다. 이러한 비극적 사태를 어떻게 민주혁명 또는 시민혁명이라고 칭송할 수 있을까!

둘째, 수구언론매체들이 날조, 유포한 '재스민 혁명'이라는 말에 담겨진 또 다른 의미는 연쇄반응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순으로 '재스민 혁명'이 일어났으니, 머지 않아 그 강력한 여파가 중동으로 번져 바레인, 예맨, 오만 등에서도 '재스민 혁명'이 일어날 것이며,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재스민 혁명'이 이란을 휩쓸고 마침내 중국에까지 밀려갈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특히 남측의 극우세력들은 '재스민 혁명'이 하루빨리 북측에까지 번졌으면 좋겠다는 소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재스민 혁명'의 연쇄반응에 대한 기대는 무지와 억측이 빚어낸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정부투쟁과 지금 리비아에서 진행 중인 내전은 전혀 다른 원인에서 일어난 것이고, 전개양상도 판이하게 다르다. 리비아가 튀니지와 이집트 사이에 끼어있는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내전에 휘말리고 말았지만, 그러한 지정학적 요인이 '재스민 혁명'의 연쇄반응을 일으킬 어떤 필연성은 결코 아니며, 지정학적 요인에 따른 일시적인 동조현상이 리비아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각계각층 대중의 자연발생적 반정부투쟁이 폭동화, 전국화되고, 미국이 그 나라 군대의 유혈진압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키자 친미독재정권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런데 리비아의 현실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리비아에서는 각계각층 대중의 자연발생적 반정부투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기존 반정부세력이 조직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급속히 무장화하였으며, 그들의 무장반란을 진압하려는 리비아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는 가운데 미국이 리비아에 대한 무력침공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리비아 반란군의 정체
 
리비아 무장반란의 뿌리는 깊다. 그 뿌리는 1969년 카다피가 일으킨 군사정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군사정변 직후 급진적 집권과정에서, 그리고 주요산업을 국유화하는 과정에서 카다피가 이끄는 '혁명지휘협의회(Revolutionary Command Council)'는 반혁명세력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고, 반혁명세력에 대한 물리적 제압은 불가피하였다.

'혁명지휘협의회'로부터 탄압을 받은 반혁명세력들이 해외로 도피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1981년 10월 7일 수단에서 결성한 반카다피 테러조직이 '리비아 구국전선(National Front for the Salvation of Libya)'이다. 이 조직은 카다피 정권을 뒤집어엎으려는 테러활동에 매달렸다. 1984년 5월 8일 카다피 집무실을 기습하여 카다피를 암살하려고 시도하였고, 1987년에는 자기 산하에 '리비아 국민군(Libyan National Army)'이라는 이름을 가진, 본격적인 테러조직을 창설하였다.

카다피 정권을 '눈의 가시'처럼 여기던, 미국이 반카다피 테러조직의 출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을 리 만무하였다. 반카다피 테러조직에게 은밀히 재정을 지원해주고, 테러요원들에게 특수전 훈련을 제공한 것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이었다. 이처럼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반카다피 테러조직이 카다피 정권을 전복하려는 시도를 계속하자, 카다피 정권은 '적군파', '붉은 여단', '아일랜드 공화군' 같은 국제테러조직들을 지원하여 맞불을 놓았다. 1980년대에 미국이 카다피 정권을 '테러지원단체'로 낙인찍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카다피 정권을 전복하려는 시도는 해외에 망명 중인 반카다피 테러조직에 의해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리비아 국내에서도 일어났다. 1993년에는 트리폴리타니아 지방의 최대 부족인 와팔라족(Warfalla)이 카다피 암살사건을 주도하였다. 카다피 정권은 보복 차원에서 와팔라족을 탄압하였다.

이처럼 국내외 반카다피 세력들은, 이번에 튀지니와 이집트에서 반정부투쟁이 일어난 기회를 틈타서 무장반란을 일으켰다. 각계각층 대중이 자생적으로 일으킨 튀니지, 이집트의 반정부투쟁과 반카다피 테러조직이 조직적으로 일으킨 무장반란은 이처럼 전혀 다른 것인데도, '재스민 혁명'이라는 기만적 언어로 포장하여 동일시하는 것은 궤변이다.

그런데 만일 지금 리비아가 미국군의 무력침공을 받을 위험에 노출되지 않았다면, 리비아군은 당장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다. <조선일보> 2011년 3월 2일 보도에 따르면, 반란군 조직의 대변인은 "카다피의 공격으로 우리에겐 2-3대의 비행기밖에 남아있지 않다. 반군세력의 전력이 불리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리비아군이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는 데도, 진압작전을 주저하는 까닭은, 진압작전으로 내전이 격화되는 경우 미국은 리비아군의 '민간인 대량학살'이라는 유언비어를 국제사회에 날조, 유포하면서 리비아를 반드시 무력침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외 언론이 보도한 대로, 미국 군부는 리비아 침공작전준비를 이미 갖추어 놓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침공지시를 기다리는 중이다. 리비아 반란군은 "(미국군의) 공습 몇 번이면 카다피 정권을 몰락시킬 수 있지만, 공습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더 많은 유혈사태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의 리비아 무력침공을 촉구하고 있다. (조선일보 2011년 3월 2일)

이런 정황을 생각하면, 리비아의 무장반란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미국의 리비아 무력침공 계략이 말려드는 치명적 실책으로 된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 활동가들은 수구언론매체들이 퍼뜨리는 '재스민 혁명'이라는 유언비어에 대중들이 현혹되지 않도록 북아프리카 정치변화의 실상을 정확히 알려주고, 특히 미국의 리비아 무력침공 책동을 전면적으로 반대하여야 할 것이다.

지난 시기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 활동가들이 사담 후세인 정권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미국의 이라크 무력침공을 반대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 카다피 정권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침략전쟁을 중동에서 북아프리카로 확대하려는 미국의 리비아 무력침공 책동을 반대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식 변혁담론의 시각에서, 리비아 내전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기 위한 몇 가지 논점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리비아 반봉건민주주의변혁의 성과와 한계
 
리비아의 현존 사회체제는 리비아 현대사의 역사적 산물이므로, 그 사회체제가 어떤 사회체제인지 파악하려면 리비아 현대사의 줄거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1년부터 1912년까지 계속된 이탈리아-터키 전쟁에서 승리한 이탈리아 왕국(당시 국명)은 오토만 제국(Ottoman Empire) 영토를 빼앗고, 지금의 리비아 영토에 자국의 식민지 이탈리아령 북아프리카(Italian North Africa)를 건설하였다.

이탈리아 왕국은 당시 북아프리카 지역의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든 영국, 프랑스와 각축전을 벌였는데, 1925년 12월 24일 이탈리아 왕국의 제1대 정부수반으로 등장한 베니또 무쏠리니(Benito Mussolini)는 1934년에 이탈리아령 리비아(Italian Libya)를 건설하고 리비아 식민통치를 더욱 강화하였다.

1943년 2월 독일-이탈리아 파시스트 동맹군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패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리비아를 분할점령하였다. 1949년 11월 21일 유엔총회 결의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는 리비아 분할점령을 포기하였고, 1951년 12월 24일 리비아는 리비아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Libya)으로 독립하였다.

리비아 연합왕국의 국왕은 아이드리스(Idris)였다. 아이드리스 국왕은 리비아의 현재 영토 가운데 원래 동쪽에 있는 싸이레나이카(Cyrenaica) 지방을 통치하였던 지방호족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리비아의 현재 영토 가운데 서쪽에 있는 트리폴리태니아(Tripolitania) 지방과 서남쪽에 있는 페짠(Fezzan) 지방과 합의하여 리비아 연합왕국의 국왕으로 등극하였다.

2007년을 기준으로, 수도 트리폴리가 위치한 트리폴리태니아의 인구는 360만 명(63.3%), 싸이레나이카의 인구는 160만 명(29%), 사막지역인 페짠의 인구는 44만 명(7.8%)이다. 아이드리스가 헌법을 개정하여 완전한 통일국가를 건설하고 나라 이름을 리비아 왕국(Kingdom of libya)으로 바꾼 때는 1963년이다.

위에 서술한 리비아 현대사에서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이탈리아 식민통치를 반대하는 리비아 민중의 반제민족해방운동은 매우 미약하였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미국과 영국이 독일-이탈리아 파시스트 동맹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리비아 민중은 적극적으로 반이탈리아 투쟁을 벌이지 못하였다.

둘째, 리비아의 진보정치세력이 미약하였기 때문에 이탈리아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뒤에도 민주공화국을 세우지 못하고 봉건군주국 건설로 퇴행하였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민주주의변혁의 길로 나서지 못하여 사회역사적 발전이 심히 정체되고 있을 때, 진보적 사회변혁의지를 지닌 군부세력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위로부터' 사회체제를 개조한 역사적 사례가 있다. 이것을 군사정변에 의한 민주주의변혁이라 한다. 1969년에 리비아에서 일어난 군사정변은 그러한 하향식 민주주의변혁의 전형이었다.

1961년에 리비아 군사학교에 입학하였고, 영국 왕립군사학교와 그리스 헬레닉 군사학교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는 패기 만만한 27세의 청년장교 무아마르 무하마드 알 카다피(Muammar Muhammad al-Gaddafi)는 1969년 9월 1일 무혈 군사정변을 일으켜 리비아 왕국을 무너뜨리고 리비아 아랍공화국(Libyan Arab Republic)을 세웠다. 명백하게도, 카다피의 군사정변은 반봉건민주주의변혁의 성격을 지닌 군사정변이었다.

우리식 변혁담론에서 논한 것처럼, 민주주의 정치제도 수립과 주요산업 국유화 및 민주적 토지개혁을 실현하는 반봉건민주주의변혁은 그 자체로 완결적인 사회변혁이 아니다. 반봉건민주주의변혁이 심화되면, 제2단계 사회변혁으로 상향발전되어야 한다.

그런데 카다피가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이후, 리비아에서는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세워지고, 주요산업을 국유화하고 민주적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일련의 반봉건민주주의변혁과업이 수행되었으나, 카다피 정권이 수행한 사회변혁은 반봉건민주주의변혁 수준 이상으로 심화되지 못하고 정체되었다. 왜 그렇게 정체되고 말았을까?

반봉건민주주의변혁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그 변혁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제2단계 사회변혁도 결코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제2단계 사회변혁을 밀고 나가려면, 그 변혁을 수행하는 주체역량이 존재해야 하고, 그 변혁수행을 좌우편향 없이 올바른 길로 이끌어 가는 변혁주체의 과학적인 변혁사상이 있어야 한다.

선후 관계를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과학적인 변혁사상이 있어야 사회변혁을 담당할 정치적 주체가 성립되는 법이다. 1970년대에 리비아에서 일어난 반봉건민주주의변혁이 제2단계 사회변혁으로 상향발전하느냐 아니면 중도에 주저앉고 마느냐 하는 사회변혁의 사활적 운명문제는 결국 과학적인 변혁사상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 리비아에서 반봉건민주주의변혁을 이끌었던 카다피는 제2단계 사회변혁을 수행할 과학적인 변혁사상을 알지 못했고, 자신이 창안한 미숙한 정치이념에 의존하고 있었다. 카다피가 창안한 미숙한 정치이념을 담은 것이 1973년 6월 7일에 세상에 나온 녹서(Green Book)다. 카다피가 저술한 녹서는 다섯 가지 강령을 담았는데, 이슬람 율법(Sharia) 이행, 정치적 병폐 숙청, 반봉건민주주의변혁을 수호하기 위한 민병대(people's militia) 창설, 행정혁명(administarative revolution), 문화혁명(cultural revolution)이다.

카타피는 녹서에 천명한 자신의 정치이념을 '이슬람 사회주의(Islamic socialism)'라고 불렀다. 카다피의 이슬람 사회주의는 두 개의 사상조류를 뒤섞어놓은 혼합물이다. 첫 번째 사상조류는 카다피 자신이 '대중적 민주주의(popular democracy)'라고 부른 일종의 직접 민주주의이고, 두 번째 사상조류는 그가 이집트의 민족주의자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에게서 배운 아랍 민족주의(Arab nationalism)다.

카다피가 만들어낸 '혼합물'을 이론적으로 해명한 것이 '제3보편론(Third Universal Theory)'이다. 그가 자기의 정치이념에 '제3'이라는 수식어를 달아놓은 까닭은, 미국식 자본주의도 반대하고 소련식 사회주의도 반대하는 양비론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카다피의 '제3보편론'은 의회, 정당, 사회계급, 국민투표를 모두 거부하고 대중의 직접 민주주의를 주장하였다. 또한 임금노동체계를 폐지하고 노동자가 직접 생산활동을 지배하는 노동자 자영체계(self-employed system)를 주장하였다.

1977년 카다피는 리비아에서 자기가 주장한 '대중적 민주주의'가 실현되어 아랍공화국이 자마히리야(Jamahiriya)로 전환되었다고 선포하였다. 자마히리야라는 말은 대중국가(mass-state)로 번역되는, 카다피가 만들어낸 신조어다.
 
자마히리야가 무너진 원인
 
그러나 카다피가 실험하였던 자마히리야는 결국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오늘 내전의 불길에 휩싸인 리비아의 현실은 자마히리야의 실패가 가져온 비극적 결말이다. 자마히리야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카다피 정권이 '제3보편론'에 근거하여 실현하려고 하였던 이슬람 사회주의에 치명적 오류가 있었다. 이슬람 사회주의의 치명적 오류는 세 가지다.

첫째, 카다피는 집권 초기에 이슬람 사회주의에 의한 사회개조를 추진하였지만, 사상개조가 없는 사회개조는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리를 알지 못하였다. 카다피는 당시 중국에서 진행 중이던 사회주의 문화혁명을 본따서, 녹서를 서술할 때 사상개조를 문화혁명으로 대체해 놓았지만, 카다피 정권은 한낱 구호로만 문화혁명을 외쳤을 뿐 리비아에서 문화혁명은 수행되지 못하였다.

그렇게 된 까닭은, 그가 말한 문화혁명이 사상개조강령을 빼놓은, 그야말로 껍데기 뿐인 문화혁명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제2단계 사회변혁에서 중심과업으로 제기되는 사상개조는 문화혁명으로 대체되거나 문화혁명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혁명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독자적인 영역을 가진다.

카다피의 이슬람 사회주의는 과학적 세계관이 아니라 비과학적인 종교적 세계관 위에 세워진 것이었으니, 사상개조는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사상개조가 없는 사회주의는 몇 가지 사회주의 정책들이나 모방한 것이지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므로, 사상개조를 알지 못한 이슬람 사회주의는 실패할 운명을 타고 난 불우한 정치이념이었다.

둘째, 카다피의 이슬람 사회주의는 혁명적 전위당의 존재의의를 부정하고, 혁명적 전위당을 한낱 행정조직인 인민위원회로 대체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녹서에서 카다피는 대중의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할 인민위원회를 설립하는 '행정적 혁명'을 주장하였으나, 그것은 정치를 행정으로 대체해버린 결정적 오류다.

제2단계 사회변혁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의 민주주의적 발전은 가장 선진적인 사회계급 또는 사회집단의 정치적 영도(political leadership)에 의해서 가능하다. 제2단계 사회변혁에서 각계각층 대중을 이끌어 가는 정치적 영도 임무를 담당한 핵심역량을 혁명적 전위당이라 한다. 따라서 인민위원회를 세워놓았다 해도 혁명적 전위당이 없으면 정치의 민주주의적 발전은 이루어질 수 없고, 제2단계 사회변혁은 시작도 하지 못한다.

셋째, 카다피의 이슬람 사회주의는 계획경제를 부정하고, 계획경제체제를 노동자 자영체제로 대체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원래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국가계획위원회가 생산현장에 생산계획을 일방적으로 내려먹이는 '지령하달'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민주적 생산계획을 국가계획위원회가 종합, 산정하여 생산현장에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민주적 생산계획과 국가계획위원회의 국가경제계획은 상호모순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어느 한 쪽이 없으면 다른 한 쪽도 성립될 수 없는 불가결한 상호결합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카다피는 소련식 사회주의를 거부한다고 하면서, 계획경제까지 배제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계획경제를 배제한 리비아의 노동자 자영체제는 어떻게 되었을까? 사회적 생산에 요구되는 국가 자원의 합리적 배분도 불가능하였고, 노동자가 창출한 이윤과 소득의 전 사회적 배분도 불가능하였다. 계획경제를 배제한 리비아의 경제체제는, 주요산업을 국유화하고 사회복지를 실현하는 성과를 이룩하였음에도 더욱 높은 단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었다.

지난 시기 카다피 정권이 부분적으로나마 실현하였던 사회복지도, 국유화한 석유자원을 개발하여 얻은 자금이 없었더라면 실현될 수 없었다. 만일 리비아에 석유자원마저 없었더라면, 노동자 자영체제가 몰아온 모순은 오래 전에 폭발하였을 것이다.

리비아-미국의 해양분쟁과 카다피 정권의 반미성향
 
지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카다피 정권은 미국과 정면대결을 벌였다. 그 까닭은, 위에서 논한 것처럼 미국이 반카다피 테러조직을 배후에서 은밀히 지원하는 것에 대해 카다피 정권이 반발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결정적인 요인은 리비아와 미국이 해양분쟁으로 충돌하였기 때문이다. 충돌내막은 이러하였다.

1973년에 카다피 정권은 싸이드라만(Gulf of Sidra)을 리비아 영해로 선포하였다. 싸이드라만은 동쪽에 있는 리비아 제2항구도시 벵가지와 서쪽에 있는 항구도시 미르스라타를 사이에 두고 리비아 내륙 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내해(內海)다.

그런데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군사적 패권을 장악한 미국은 제6함대를 지중해에 고정배치해놓고 해상작전권을 확대하려 하는 판에, 리비아가 싸이드라만을 영해로 만들어 버리면 지중해 해상작전권을 더 이상 확대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미국은 싸이드라만이 리비아의 내해가 아니므로, 리비아 해안으로부터 19km에 이르는 수역까지만 리비아 영해로 인정한다고 반박하였다.

그 때부터 미국은 싸이드라만에서 이른바 '항해자유권(Freedom of Navigation)'을 행사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제6함대의 해상작전을 강행하면서 리비아를 자극하였고, 제6함대의 영해침범에 맞선 리비아는 그들의 해상작전연습 현장으로 전투기를 출동시켰다. 이처럼 리비아와 미국의 해양분쟁으로 싸이드라만에서 무력충돌 위험이 높아지더니, 결국 1973년 3월 21일 리비아 전투기 편대가 싸이드라만 영공을 침범하여 정찰활동을 하던 미국 공군 정찰기(C-130)를 향해 발포하였다. 미국 공군 정찰기는 간신히 격추되지 않고 현장을 피하였다. 1980년 9월 16일에도 싸이드라만 영공을 침범하여 정찰활동을 벌이던 미국군 정찰기(EC-135)가 리비아군 전투기의 요격을 받았는데, 그 때도 용케 격추되지 않았다.

1981년 1월 20일 출범한 극우성향의 레이건 정권은 대통령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리비아에 대한 무력침공 준비에 착수하였다. 1981년 8월 19일 미국의 초대형 항공모함 니미츠호(Nimitz)에서 출격한 미국 해군 전투기 F-14 톰캣(Tomcat) 두 대가 싸이드라만 영공을 침범하여 리비아 공군 수호이 전투기(Su-22 Fitter) 두 대와 공중전을 벌였다. 미국 해군 전투기들은 리비아 공군 전투기 두 대를 격추하였다. 이 공중전은 리비아와 미국의 격렬한 무력충돌을 예고한 서막이었다.

1986년 3월 23일 미국 해군 제6함대 항모강습단이 리비아를 향해 총출동하였다. 항공모함 세 척, 순양함 다섯 척, 프리깃함 여섯 첫, 구축함 12척, 각종 작전기 250대, 병력 27,000명으로 편성된 방대한 침공무력이었다. 그들이 리비아 영해를 침범하자,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리비아군은 미국군 항모강습단의 방대한 침공무력에 맞서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다. 리비아 해군 콜벳함과 경비정이 각각 한 척씩 격침당했고, 리비아군 미사일 기지들이 공습으로 파손되었고, 리비아군 병력 35명이 전사하였다. 이것이 미국의 싸이드라만 무력침공이다.

그로부터 두 주가 지난 1986년 4월 5일 당시 서베를린에 있는 디스코장에서 폭탄이 터져 주독미국군 병사 두 명, 터키 여성 한 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당하는 폭탄테러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싸이드라만 무력충돌에서 패한 리비아가 폭탄테러로 보복하였다고 규정하고, 즉각 보복공격에 나섰다.

1986년 4월 15일 새벽 2시 영국군 공군기지에서 출격한 미국 공군 전폭기 F-111F 18대와 전자전기 EF-111A 4대, 그리고 지중해에 전진배치한 항공모함 3척에서 발진한 미국 해군 공격기 15대와 전자전기 1대가 전격적으로 리비아 공습을 감행하였다. 그 과정에 미국 공군 전폭기 F-111F 1대가 격추되어 조종사 2명이 사망하였고, 리비아군과 정부관리 45명, 민간인 15명이 사망하였다. 지중해 섬나라인 몰타(Malta) 공화국의 총리는 미국군 전폭기 편대가 자국 영공을 통과하여 리비아 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때마침 목격하고 황급히 국제전화로 카다피에게 알려주어, 카다피와 그 가족은 공습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대피하여 목숨을 건졌다. 이것이 미국의 트리폴리 공습이다.

1988년 12월 21일 스코틀랜드 발 뉴욕 행 미국 여객기 팬앰(Pan Am) 103편 항공기가 스코틀랜드 록커비 상공을 지날 때, 리비아 테러분자가 기내에 설치해놓은 폭탄이 터져 탑승객 250명 전원과 지상에 있던 11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것이 리비아의 록커비 항공테러사건이다.

1989년에도 싸이드라만 영공을 침범한 미국군 전투기를 요격하려고 출격한 리비아군 전투기 두 대가 격추되었는데, 리비아는 록커비 항공테러사건으로 미국의 집중적인 봉쇄와 제재를 받았다.

미국의 봉쇄와 제재를 견디지 못한 카다피 정권은 결국 미국에게 정치적으로 굴복하였다. 2008년 8월 14일 미국-리비아 포괄적 소송 해결 협정이 조인되었고, 리비아는 15억 달러를 지불하였다. 그에 따라, 조지 부쉬(George W. Bush) 당시 미국 대통령은 카다피 정권을 국제테러 소송에서 사면시켜 주었다.

위에서 논한 대로, 카다피 정권은 반제민족해방세력이 세운 정권이 아니었고, 애초에 반제자주화노선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카다피 정권이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미국과 정면충돌하였던 까닭은 싸이드라만 해양주권을 놓고 미국과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었지, 반제자주화노선을 추구하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반제자주화노선이 아니라 해양분쟁 때문에 미국과 대립한 카다피 정권의 반미성향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은 미국의 집중적인 봉쇄와 제재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미국에게 정치적으로 굴복하였다.

카다피 정권이 반미성향을 포기하고 미국에게 정치적으로 굴복한 때로부터 불과 2년 반만에, 미국의 배후조종을 받는 반카다피 테러조직이 주도하는 내전이 일어나 그나마 '간판'만 남아있던 자마히리야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2011년 3월 2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