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일제의 100년 죄악사를 고발한다』중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야수적탄압만행은 민족자주의 넋을 말살하기 위한 폭거

 학사 전경송

오늘 전체 조선인민은 《우리 민족끼리》의 숭고한 리념밑에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끝장내고 조국의 통일과 조선반도의 평화를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려나가고있다.

우리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은 본질에 있어서 전국적범위에서 민족의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투쟁이며 민족의 화합과 단합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이다.

이 성스러운 투쟁에서의 승리는 우리 민족이 자주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완전히 극복하는데 전적으로 달려있다.

조선의 통일과 평화를 방해하는 외세의 책동이 더욱 우심해지고있는 오늘 민족자주를 생명으로 간직하고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철저히 극복하는데서 나서는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지난 세기 일제가 감행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에 대하여 옳바로 인식하는것이다.

우리 민족에게 저주로운 식민지노예살이를 강요한 《을사5조약》이 날조된 때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오늘 전체 조선인민은 빼앗긴 민족의 자주권을 되찾으려는 우리 인민의 독립운동을 일제가 얼마나 가혹하게 탄압하였는가 하는것을 치솟는 민족적분노와 증오에 넘쳐 다시금 돌이켜보고있다.

민족자주를 위한 우리 인민의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만행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볼수 있다. 그 첫 단계는 초기 조선인민의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만행이고 둘째 단계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령도밑에 조직전개된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우리 인민의 반일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일제의 탄압만행이다.

일제는 《을사5조약》날조를 통하여 우리 나라를 불법강점하고 근 반세기에 걸치는 기간에 류례없이 가혹한 식민지파쑈통치를 실시하였다.

《을사5조약》날조를 통한 일제의 강도적인 주권강탈행위는 애국적조선인민의 민족적분노를 폭발시켰다. 조선인민은 반일무장활동, 반일정치운동, 애국문화운동 등 여러가지 형태의 반일독립운동을 벌렸으며 1930년대부터는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밑에 이 운동의 최고형태인 영광스러운 항일무장투쟁을 벌려 마침내 강도 일제를 때려부시고 나라의 광복을 이룩하였다.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일제의 식민지지배를 뒤집어엎고 민족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정의로운 투쟁이였다.

일제는 조선강점 전기간 민족자주의 넋을 말살하고 조선을 영원히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우리 인민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일제는 민족자주를 위한 우리 인민의 독립운동을 말살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초기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을 야수적으로 탄압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를 강도적으로 침략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저들의 식민지적지배를 유기하기 위하여 발톱까지 무장한 침략무력을 대대적으로 투입하여 전대미문의 야수적인 방법으로 우리 인민의 민족해방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고있습니다.》(《김일성전집》 1권, 212페지)

일제는 조선인민의 반일기세를 억누르고 민족적독립에 대한 희망을 영영 없애버리며 식민지지배를 유지하기 위하여 군대, 헌병, 경찰망으로 전조선을 뒤엎고 조선인민의 반일독립운동에 대하여서는 사소한 요소도 허용하지 않고 야수적으로 탄압하였다.

일제는 우선 조선인민이 벌린 반일의병투쟁, 독립군운동 등 반일무장활동을 야수적으로 탄압하였다.

일제는 우선 조선인민이 벌린 반일의병투쟁, 독립군운동 등 반일무장활동을 야수적으로 탄압하였다.

일제는 먼저 강점초기에 벌어진 조선인민의 반일의병투쟁을 야수적으로 탄압함으로써 민족자주의 넋을 완전히 말살하려고 책동하였다.

불법적인 《을사5조약》이 날조되자 인민들은 일제의 침략책동을 반대하여 결연히 일떠섰고 헤그밀사사건과 조선군대강제해산을 계기로 더욱 확대발전되였다. 1906년초부터 그해 6월까지 불과 반년사이에 반일의병투쟁이 중남부조선일대에서만 하여도 60여개 군을 포괄하는 넓은 지역에서 벌어졌으며 그후 서부조선일대에로 급격히 확대된 사실은 그를 잘 보여주고있다(《조선부르죠아민족운동사》 2, 과학백과사전출판사, 주체93(2004)년, 139페지).

일제는 조선인민이 벌린 이 투쟁에 대하여 처음부터 야수적인 탄압책동을 벌렸다.

일제는 조선에 주둔시킨 저들의 침략무력만으로는 《폭도토벌》을 해낼수 없다고 인정하고 본국으로부터 보병 12려단(14련대와 47련대로 구성)과 보병 23련대, 27련대를 새로 끌어들이였다(《력사학연구》 460호, 록음서방, 1978년, 20페지).

이러한 침략무력의 증강을 배경으로 한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책동은 더욱 강화되고 악랄성을 띠였으며 1907년 8월이후부터 1909년말경까지 절정에 이르렀다.

전라남북도지방의 의병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일제가 감행한 악랄한 《포위섬멸작전》이 그 대표적인 실례의 하나로 된다.

전라남북도에서 의병투쟁이 활발히 벌어지자 일제는 1908년 8월부터 《남부조선대토벌실시계획》이라는 《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이 작전수행을 위해 《토벌》구역과 기간, 병력, 방법, 수단(무기, 탄약, 식량, 통신, 수송) 등에 이르기까지 47개 조항으로 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남부조선에 주둔하고있던 일제침략군 림시파견대를 주력으로 하고 여기에 6사단 공병소대와 헌병, 경찰관들을 더 증가시키였다(《한국독립운동사》 1, 1965년, 799~803페지).

일제는 침략무력을 《경비부대》와 《행동부대》로 나누어 《경비부대》는 포위선을 형성하고 중요거점들을 지키게 하였으며 《행동부대》는 포위선안에 있는 의병들과 인민들에 대하여 수사 및 검거와 야수적인 학살만행을 감행하게 하였다. 또한 전라남북도의 연해에는 해군무력을 배치하고 의병들이 해안지역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일제는 9월 1일부터 《토벌》에 착수하여 9월 20일경까지 제1기 《토벌》구역에 대한 《토벌》을 끝냈다. 그러나 의병들은 적의 포위망을 뚫고 일제의 《토벌》이 끝난 지역에서 이전과 같이 활동을 계속하였다.

악에 받친 일제침략자들은 예정계획을 변경하여 제3기 《토벌》구역인 연해의 섬들을 소수의 력량으로 지키게 하고 제1기, 제2기 《토벌》구역에 대하여 엄밀한 수색검거작전을 다시 감행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토벌》작전을 전라남북도지역에서뿐아니라 도처에서 벌리였다. 일제는 한 지역을 《토벌》구역으로 정하고 한달, 두달 지어는 황해도 평산지방에서와 같이 5개월동안을 집중《토벌》기간으로 하여 의병탄압에 미쳐날뛰였다.

일제는 파렴치하게도 의병들에게 《폭도》, 《무뢰한》 그리고 의병장들에게는 《폭도의 괴수》, 《폭도의 수괴》라는 딱지를 붙여 그들을 체포학살하였다.

일제가 대폭 줄여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일제살인마들은 1907년 8월부터 12월사이에 3 627명, 1908년에 1만 1 562명 1909년에 2 374명, 1910년에 125명의 의병참가자들과 인민들을 학살하였다(《조선폭도토벌지》 조선주차군사령부, 1913년, 부표2).

일제는 조선인민의 반일의병투쟁을 탄압함에 있어서 교묘한 술책도 썼다. 일제가 강요한 헌병보조원제도가 바로 그것이였다.

일제는 저들의 탄압책동에도 불구하고 의병투쟁이 계속 앙양되자 본토로부터 계속 병력을 보충하는 한편 새로 《조선인헌병보조원제도》를 조작하였다.

일제는 저들의 군대는 조선의 지리, 풍속에 밝지 못할뿐아니라 중요하게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 《토벌》작전에서 애로를 겪게 되자 의병탄압의 효과성을 높이기 위하여 조선사람들을 리용할것을 타산하고 1908년 5월 2일 《통감》 이또 히로부미, 조선강점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찌, 헌병대 사령관 아까시 모도지로 등이 참가한 《통감부》회의에서 조선사람들로 헌병보조원제도를 내오기로 결정하였다(《조선사연구회론문집》 <일문> 39호, 2001년, 170페지).

일제는 1908년 9월부터 조선인들속에서 8 000명의 《헌병보조원》을 모집하여 저들의 헌병의 보조력량으로, 주구로 리용하였다.

일제의 악랄하고 집요한 탄압책동에 의하여 조선인민의 반일의병투쟁은 1910년대초이후 계속될수 없었다.

일제는 반일의병투쟁에 대한 탄압과 함께 이 시기 새로운 투쟁형태로 벌어진 독립군운동에 대한 야수적인 탄압책동을 벌렸다.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책동으로 반일의병투쟁은 계속될수 없었지만 조선인민의 반일무장활동은 계속되였으며 그것은 독립군운동으로 전개되였다.

1910년대초 우리 나라 독립운동가들은 자기들의 활동무대를 국내로부터 우리 나라 북부국경지대와 잇닿아있는 국외로 옮기여 그곳에서 무장활동을 계속 벌리기 위한 준비사업을 진행하였다. 그것은 일제의 야만적폭압으로 국내에서 무장활동이 곤난하게 된 반면에 이 지역에 일제의 마수가 아직 깊숙이 뻗치지 못하였고 독립군운동을 준비하는데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있었기때문이였다.

그리하여 1910년대이후 중국 동북지방의 간도일대와 로씨야의 연해주지방에 망명하여 제각기 독립군운동준비사업을 벌려오던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3. 1인민봉기를 계기로 하여 독립군부대들을 무어 반일의병투쟁의 계속으로서의 독립군운동을 벌리기 시작하였다.

독립군부대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벌어지자 이에 당황한 일제침략자들은 그를 초기에 말살하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독립군운동을 탄압말살하기 위한 일제의 책동은 국내에서부터 감행되기 시작하여 독립군에 대한 《토벌》을 미친듯이 감행하는 한편 독립군부대들이 활동하는 지역들에서 애국적인민들에 대한 야수적학살만행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중국 동북지방에 있던 독립군의 거점들을 《소탕》하며 그곳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자들을 없애버리기 위하여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일제는 1920년 5월 상순부터 7월 중순까지의 기간에 여러차례 봉천(심양)에서 비밀모임을 열고 저들의 군대와 경찰들로 직접 《수사반》을 무어 봉천성의 우리 나라 독립운동자들에 대한 검거를 진행하며 간도지방에 침략무력을 침입시켜 조선독립군부대를 《토벌》할수 있는 《담보》를 받아냈다(《현대사자료》 28, 조선4, 미스즈서방, 1972년, 64~69페지, 《조선통치사료》<일문> 2, 6~10페지). 이에 기초하여 두개 편대의 《수사반》을 조직하여 1920년 5~8월사이에 홍경, 류하, 통하, 해룡, 안동, 관전, 환인, 집안, 림강, 장백 등 남만일대의 여러 현에 《토벌》무력을 파견하였으며 이 작전에서 무려 365명의 반일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였다(《조선전사》 15권, 과학, 백과사전출판사, 1980년, 200페지).

일제는 남만일대에서 일대 검거선풍을 일으키는 한편 동만일대의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하여 대규모적인 《토벌》작전을 벌리였다.

일제는 이를 위한 구실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른바 《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훈춘사건》은 1920년 10월 2일 일제침략자들이 중국인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에 있는 저들의 령사관분관을 습격하도록 꾸며낸 모략사건이였다.

마적단의 습격에 의하여 령사관분관이 불타자 간교한 일제는 이 사건이 마치도 조선인독립군부대들의 소행인것처럼 떠들어댔다.

《훈춘사건》을 조작한 일제침략자들은 그것을 구실로 중국 동북지방에 살고있던 저들의 거류민들을 부추겨 《거류민보호》를 위해 군대를 출병시켜달라는 《요청서》를 일본정부에 제출하게 하는 자작극을 꾸미였고 사건이 일어난 당일 오전 11시에 벌써 만주거류민회 회장의 이름으로 륙군대신 다나까 기이찌에게 일제침략군출병을 요구하는 첫 전보가 날아갔다(《현대사자료》 28, 조선4, 미스즈서방, 1972년, 185~186페지).

《요청서》를 접수한 일본반동정부는 1920년 10월 7일 간도일대의 일본령사관과 일본인들의 《생명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밑에 이 지역의 조선독립군활동을 탄압할 목적으로 수많은 침략무력을 투입할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는 라남19사단소속 보병 75련대(회령주둔)와 기병 27련대 3중대(라남주둔), 고사포 25련대 2대대(회령주둔), 공병 19련대 2중대(회령주둔), 룡산20사단소속 78련대 3대대 등 조선강점군무력을 기본으로 하여 만철수비대무력, 로씨야원동지방에 침입시켰던 침략무력까지 합쳐 3 000명이상의 병력과 수많은 중무기들을 동원하였다.

훈춘, 왕청, 화룡 등 동만의 여러 현에 기여든 일제침략군은 장작림군벌당국의 비호묵인밑에 이르는 곳마다에서 독립군에 대한 《토벌》과 우리 동포들에 대한 치떨리는 대학살만행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세상에 《경신년대토벌》로 널리 알려진 일제의 1920년대학살사건이였다.

일제의 이와 같은 발악적탄압공세로 하여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이후 독립군부대들은 쏘만국경일대에로 이동하게 되였다.

일제는 이후에도 독립군활동에 대해서는 그것이 크건작건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였다.

일제는 또한 강점초기 나라의 독립을 실현하기 위한 조선인민의 각종 대중적반일투쟁을 야수적으로 탄압하였다.

조선인민의 거족적인 3. 1인민봉기에 대한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책동이 그 대표적실례이다.

3. 1인민봉기는 조선강점후 일제의 야만적인 중세기적공포정치아래에서 모진 수모와 학대를 받으며 살아온 조선민족의 쌓이고쌓인 울분과 원한의 폭발이였다.

우리 나라에서 거족적인 3. 1인민봉기가 폭발하여 전국적범위에로 급속히 확대되자 일제침략자들은 그에 대한 야수적인 탄압책동에 매달렸다.

이제는 먼저 3. 1인민봉기를 진압하기 위한 폭압조치들을 련이어 취하였다. 일본정부의 수상, 륙군대신 등 침략우두머리들은 모든 권력기구와 폭압수단들을 남김없이 동원하여 조선인민의 반일항쟁을 진압할데 대한 지령을 조선강점군 사령관과 헌병대 사령관에게 각각 하달하였다(《3. 1인민봉기사》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83년, 104페지). 한편 3. 1인민봉기를 보다 효과적으로 탄압하려는 목적밑에 강점직후에 집중배치제로 넘어갔던 조선강점군의 배치를 분산배치제로 넘어가도록 하였다. 뿐만아니라 보병 6개 대대이상의 침략무력을 조선에 파견하였고 1919년 4월 중순 《제령7호》(《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라는 식민지악법을 조작공포하여 조선인민의 반일봉기를 마구 탄압할수 있는 《법적》근거를 만들어놓았다.

일제는 이러한 폭압조치에 따라 3. 1인민봉기가 일어나자마자 치떨리는 대중적탄압학살만행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봉기가 일어난 첫날부터 평양과 경성(서울), 수원, 맹산을 비롯한 온 나라 각지에 수많은 헌병, 경찰들과 소방대를 긴급출동시켰으며 투쟁이 심화되자 조선강점군을 인민봉기탄압에 내몰아 반일집회와 시위가 진행되는 곳들마다에서 무차별적인 총포사격을 하게 하였으며 칼과 도끼, 삽과 참대창 등 살인흉기들을 휘두르면서 조선인살륙에 피눈이 되여 날뛰게 하였다.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 수백명의 경찰, 헌병들은 보통학교 학생들까지 합류된 반일시위대렬을 탄압하여 50여명의 봉기참가자들을 검거투옥하는 파쑈적폭거를 감행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이 일제경찰서를 포위하고 검거된 애국자들을 당장 석방할것을 요구해나서자 일제는 수백발의 총탄을 마구 퍼부어 수많은 평화적시위군중을 학살하였다.

악독한 일제는 1919년 3월 1일부터 5월말가지의 기간에 조선사람 7 500여명을 학살하였으며 근 1만 6 000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근 4만 7 000명을 체포구금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이밖에도 반일정치운동, 애국문화운동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의 사소한 요소에 대하여서도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였다.

일제는 민족자주를 위한 우리 인민의 독립운동을 말살하기 위하여 다음으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령도밑에 조직전개된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의 반일민족해방투쟁을 탄압말살하기 위하여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우리 나라 빈일민족해방투쟁이 새로운 단계에서 줄기차게 벌어지는데 질겁한 일제는 우리 인민의 항일무장투쟁을 말살하기 위하여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일제침략자들은 우선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주류를 담당하고있던 반일인민유격대(후에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에 대한 《토벌》공세를 악랄하고 집요하게 벌렸다.

일제의 《토벌》공세는 먼저 1930년대 전반기 두만강연안유격구를 압살하기 위한 발악적인 책동에서 찾아볼수 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현명한 령도밑에 창설된 두만강연안유격구는 항일무장투쟁과 전반적혁명운동의 승리적발전을 촉진하며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전복하고 조국의 해방을 이룩하기 위한 강력한 혁명의 책원지였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일제는 두만강연안유격구를 《동양평화의 암》이라고 아우성을 치면서 그를 요람기에 없애버리려고 1933년 1월 18일 간도총령사관에서 관동군 헌병대, 조선강점군 《간도파견대》, 령사관 경찰부, 함경북도경찰부와 만주경찰기관 등 고위두목들의 련석회의를 열고 두만강연안유격구에 대한 대규모적인 《토벌》공세를 강화하기 위한 모의를 하여 군사행동에서 지휘체계를 확립하고 군대의 행동에 모든것을 복종시키며 군대와 경찰, 자위단들간의 협동작전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가지 대책을 토의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따라 일제는 두만강연안유격구를 압살하기 위하여 조선강점군 라남19사단을 기본주력으로 들이밀었으며 항일무장투쟁의 영향력이 조선 국내에 미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국경경비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지니신 특출한 지위에 대하여 위구를 느끼고 유격구《토벌》에서 공격의 화살을 조선혁명의 사령부가 자리잡고있는 소왕청유격구에 집중하였다.

일제는 조선강점군 라남19사단의 병력과 동만일대에 배치되였던 병력으로 1 500여명의 련합무력을 편성하고 1933년 4월 소왕청유격구역을 3개 방면으로부터 공격해왔으나 이러한 발악적공세는 위대한 수령님의 탁월한 전략전술과 령활한 전투지휘,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의 영웅적투쟁에 의하여 참패로 끝났다.

일제는 연길, 화룡, 훈춘현을 비롯한 다른 유격구역들에 대한 《토벌》공세를 들이댔지만 역시 모두 참패하였다.

일제는 1933년 두만강연안유격구에 대한 《춘기토벌》에서 당한 참패를 만회해보려고 1933년말부터 1934년초까지 또다시 《동기대토벌》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동기토벌》을 진행하기 위하여 《춘기토벌》보다 한급 더 높여 먼저 내각회의에서 모의를 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 8월 8일 내각회의를 열고 간도를 중심으로 한 만주의 《치안》문제를 다시 모의하였으며 뒤이어 《만주치안》의 《암》이라고 간주한 이른바 《간도문제》를 풀기 위하여 고위급관리들을 만주에 파견하여 장춘과 봉천(심양) 등지에서 관동군의 현지하수인들과 쑥덕공론을 하게 한 다음 연길에서 최종모의를 하고 두만강연안유격구에 대한 《토벌》계획을 확정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연길에서는 일제의 반동내각에서 파견한 고위급관리와 관동군, 관동군 헌병대, 특무기관과 대사관의 우두머리들 그리고 현지의 헌병, 군대, 경찰요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1933년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항일무장투쟁을 《진압》하기 위한 구체적인 흉책을 꾸며냈다.

일제가 거듭되는 모의끝에 꾸며낸 《동기토벌》작전계획의 내용을 보면 군대와 헌병, 경찰대의 긴밀한 협동작전으로 공격의 예봉을 조선혁명의 사령부가 자리잡고있는 소왕청유격구역에 돌리면서 두만강연안의 모든 유격구역들을 동시에 《타격소멸》한다는것이였다.

오래동안 《토벌》준비를 다그쳐온 일제는 1933년 11월 17일부터 두만강연안유격구에 대한 대규모적인 《동기토벌》공세를 일제히 개시하였다. 그중에서도 조선혁명의 사령부가 자리잡고있는 소왕청유격구역에 대한 공격은 류례없이 악랄한것이였다.

일제는 저들의 정규무력을 주력으로 하고 거기에 헌병대와 경찰, 위만군과 자위단까지 긁어모아 5 000여명의 대병력으로 공격집단을 편성하여 왕청, 쟈피거우, 청구자령의 3개 방향으로부터 포위진을 형성하고 공격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연길, 화룡, 훈춘현의 유격구역들에도 대병력을 들이밀고 공격해왔다.

일제의 《토벌》공세는 엄혹한 동기조건에서 파장식으로 지독스럽게 감행되였으며 전술도 더욱 악착스러워졌다.

일제는 유격구역으로 쳐들어왔다가도 공격이 좌절되면 그날로 되돌아가는 종전의 《토벌》방식으로부터 공격이 실패해도 물러가지 않고 도달한 계선에 그대로 주저앉아 차지한 지대를 공고히 해나간다는 《보보점령》의 전술로 이행하였다. 이것은 점령한 지역안의 모든 생명체들을 닥치는대로 죽이고 모든것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불사르는 전술이였다.

일제는 이와 같은 악착스러운 《토벌》전술에 의거하여 《이 지역의 공비토벌은 초조해하지 말고 덤비지 말며 만단의 준비를 한 다음에는 타는 불과 같이 준렬하게 토벌을 하며 그들에게 진출의 틈을 주지 않는 전법에 의거할것》(《외무성경찰사》 간도편, 외무성, 8693페지)이라고 떠벌이면서 유격구역안에 침입하면 모든것을 닥치는대로 마스고 모조리 불사른 다음 도달한 계선에서 숙영하면서 한걸음한걸음 전진하여 공격의 련속성을 보장하려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제는 유격대와 유격구역 인민들을 산속에 몰아넣고 그들에게 유격구역에 다시 돌아와 생활을 복구할 여유를 주지 않으며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굶겨죽이고 얼쿼죽이려고 타산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일제의 대병력이 유격구역의 전초진지에 계속 투입되는 조건에서 신축성있는 기동과 적극적인 방어를 결합하는 전술로 넘어가며 유격구역방위와 적배후타격을 배합하는 탁월한 전략전술을 내놓으시고 이 관철에로 군대와 인민을 현명하게 이끌어주시였다.

그리하여 일제가 벌린 1933~1934년 《동기대토벌》은 수치스러운 참패로 끝났다.

일제의 《토벌》공세를 그리고 1930년대 후반기 조선인민혁명군을 압살하기 위한 집요한 책동에서 찾아볼수 있다.

일제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소멸》한다고 하면서 관동군사령관의 지휘밑에 수만명의 병력으로 《참빗전술》까지 써가며 감행한 1936~1937년의 《동기대토벌》, 관동구사령부직속 《노조에토벌사령부》(길림)를 조작하고 20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지구별로 《봉쇄작전》과 《포위작전》을 발악적으로 벌린 1939년 하반년의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을 비롯하여 수많은 작전들을 감행하였다.

특히 일제는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을 벌리면서 주되는 공격의 화살을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와 주력부대에 돌리였으며 인민혁명군의 밀영들을 봉쇄하고 포위하는 전술과 인민혁명군부대들의 뒤를 계속 따라다니는 《장거리추격전》을 기본으로 하는 전술을 적용하였다.

일제는 방대한 규모의 이 《토벌》작전을 위해 무려 20여만명의 무력을 동원하였다.

이렇듯 일제가 들고나온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은 노리는 목적에서나 끌어들인 병력수와 지대적규모에서나 그리고 그 수법에서나 전례없이 악랄하고 대규모적인 《토벌》작전이였다.

사실상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의 명목밑에 감행된 공세는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일제의 《토벌》작전에서 절정을 이루는것이였다.

일제는 오만하게도 《토벌》목적을 1939년말까지 완전히 달성할수 있으리라고 타산하고 그 기간을 1939년 10월 상순부터 11월 중순까지의 약 45일간을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의 제1기로, 1939년 11월 중순부터 12월 하순까지의 약 40여일간은 제2기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20여만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동원하여 1939년말까지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을 완전히 좌절시키고 《후방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호언장담하면서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을 벌려놓았던 일제는 《토벌》작전에서 수치스러운 참패를 당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제는 초기의 계획을 변경하여 기간을 연장하고 1940년에 들어와서도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토벌》을 계속 감행하였지만 그해 여름에 이르러 총파산되지 않을수 없었다.

일제침략자들은 또한 조선인민혁명군과 인민들사이의 혈연적련계를 끊기 위하여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과 인민들사이의 혈연적련계를 끊기 위한 일제의 책동에서 기본으로 된것은 《집단부락》정책과 《보갑제도》이다.

일제는 1933년부터 조선사람이 많이 살고있던 연길, 화룡, 훈춘의 3개 현에 시험적으로 8개의 집단부락을 설치하고 1934년부터는 그것을 본격적으로 설치하는 단계로 넘어가 1935년에는 1 171개 1936년에는 3 361개, 1937년에는 4 922개, 1938년에는 1 923개의 집단부락을 설치하였다(《만주국경찰사》 상, 1942년, 383~384페지).

집단부락들에는 견고한 성벽을 쌓았고 성벽의 네귀에는 포대를 구축하였으며 깊은 도랑과 철조망, 울타리 등을 이중삼중으로 설비하였다. 매개 집단부락마다에는 보총, 경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50~100명에 달하는 경찰과 무장자위단이 배치되였으며 몇개의 집단부락 중심부에는 정규부대들과 경찰서가 틀고앉아있었다.

일제는 집단부락을 출입할 때마다 주민들의 짐과 몸을 샅샅이 수색하였으며 때없이 집을 뒤져 식량을 비롯한 생활필수품들을 빼앗아갔다. 또한 씨뿌릴 때와 가을걷이때 식량이 유격구와 인민혁명군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을 다하여 통제하였으며 유격구와 집단부락사이에 경계선을 설정하고 주민들이 유격구와 거래하는것을 엄격히 단속하였으며 유격구방향으로 다니는 장사군들을 등록하고 그들의 판매활동을 일일이 조사하고 통제하였다.

일제는 조선인민혁명군과 인민들사이의 혈연적련계를 끊기 위하여 집단부락을 설치하는 한편 《보갑제도》, 《10가련좌법》 등의 중세기적통치수법도 적용하였다.

일제는 1933년부터 준비해오던 《보갑제도》를 1934년 1월 《잠행보갑시행법》의 공포로써 그의 전면적시행단계에 들어섰다.

파쑈통치체계의 확립을 목적으로 한 《보갑제도》는 10호를 한패로 하고 촌이나 그와 비슷한 구역안의 10개 패로써 다시 1개 갑을 편성하여 몇개의 갑으로 1개의 보를 만들어 그것을 직접 경찰서장이 감독통제하게 하는것이였다. 보와 갑들에는 인민혁명군의 습격을 막는다는 구실밑에 무장자위단까지 두었다.

일제는 《보갑제도》에 따라 《10가련좌법》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은 한패안의 주민들이 《법》을 위반하였을 때 공동책임을 지고 공동으로 처벌을 받게 되여있는 중세기적악법이였다.

일제가 말하는 《법》위반이란 조선인민혁명군 정치공작원들과 련계를 가지거나 혁명조직에 참가하는것은 물론 저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모든것, 강권에 복종하지 않는 모든 행동들을 《위법》으로 보는 무제한한것이였다.

일제는 중세기적인 《보갑제도》를 실시하여 조선인민혁명군 정치공작원들과 지하혁명조직들의 활동, 인민들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반일적요소들을 제때에 《적발》하여 탄압하며 인민들로 하여금 서로 감시하고 의심하게 하여 단결할수 없게 할것을 획책하였다.

이처럼 일제는 《집단부락》과 《보갑제도》를 통하여 조선인민혁명군과 인민들사이의 련계를 끊기 위하여 책동하였다.

일제침략자들은 또한 항일무장투쟁의 영향밑에 벌어진 국내혁명조직들의 활동과 무고한 인민대중에 대한 탄압과 학살만행을 전례없이 강화하였다.

1930년대 전반기 조선인민에 대한 일제의 류혈적탄압은 특히 간도를 비롯하여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인거주지역들과 조선의 북부국경일대에서 더 심하였다. 일제가 조선의 혁명가들과 애국적인민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에 얼마나 미쳐날뛰였는가 하는것은 반일투쟁에 일떠선 조선사람들을 무참히 체포학살하면서 공개적으로 《조선사람 100명을 죽이면 그중에는 적어도 1명은 공산당원이 아니면 공청원이 있으니... 조금도 사정없이 조선사람들을 잡아죽이라》고 폭언한것은 이 시기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일제의 탄압책동의 야수성과 악랄성을 잘 보여주는 실례의 하나이다.

애국적인민들과 혁명조직들에 대한 야수적인 탄압책동은 1930년대 후반기에도 더욱 악랄하게 감행되였는데 일제가 조작한 《혜산사건》이 이를 잘 말해주고있다.

일제는 1937년 10월 상순 갑산군 운흥면 철도공사장과 무산군 백무선철도공사장에서 조직성원들의 체포를 계기로 혜산을 중심으로 한 국내와 장백일대에서 혁명가들과 애국적인민들에 대한 제1차 검거선풍을 일으켰고 1938년 5월부터 10까지의 사이에 제2차 검거를 감행하였다. 일제교형리들은 검거투옥한 혁명가들과 애국적인민들을 야수적으로 고문학살하였으며 1941년 8월에는 《혜산사건》이라는 이름밑에 함흥지방법원에서만도 167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고 많은 애국자들에게 사형, 무기징역 등을 언도하였다.

이 대검거사건은 조선혁명가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책동이 말그대로 절정에 이르고있었다는것을 보여주었다.

일제의 이와 같은 야수적인 탄압책동에 의하여 검거투옥된 혁명가들과 애국적인민들의 수는 해마다 급속히 늘어났는데 저들이 극히 줄여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이 시기 검거투옥된 《사상범》건수는 1938년에 162건이였다면 1941년에는 232건이였고 1943년에는 322건으로 늘어났다(《일본군국주의의 조선침략사》 <1910~1945> 사회과학출판사, 1975년, 363페지). 1943년 8월~9월사이에는 이른바 《불온언동죄》, 《류언비어죄》 등으로 조선인민을 검거, 투옥, 학살한 건수만 하여도 무려 1 857건에 달하였다.

조선강점 전기간 일제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감행한 야수적인 탄압학살만행은 철두철미 민족자주의 넋을 완전히 말살하기 위한 전대미문의 폭거였다.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만행이 민족자주의 넋을 말살하기 위한 전대미문의 폭거로 되는것은 무엇보다먼저 민족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정의로운 투쟁을 말살하기 위한 탄압만행이였기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벌린 독립운동은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짓부시고 강탈당한 조국을 되찾고 민족의 자주권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이였다.

반세기에 가까운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이 당한 온갖 멸시와 천대, 빈궁과 고통의 화근도 결국 자주권을 빼앗긴데 있었다. 당시의 조선은 말그대로 사람 못살 생지옥이였으며 조선사람들을 살아도 죽은 목숨이나 같았다.

우리 민족이 이러한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나 빼앗긴 조국과 민족의 자주권을 되찾기 위한 길은 오직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통치를 뒤집어엎고 나라의 독립을 실현하는데 있었다.

우리 인민이 의병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영광스러운 항일무장투쟁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여 벌린 모든 형태의 투쟁은 다 민족적독립, 민족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피어린 투쟁이였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은 곧 민족자주의 넋을 말살하기 위한 폭거로 되는것이다.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만행이 민족자주의 넋을 말살하기 위한 전대미문의 폭거로 되는것은 다음으로 그것이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짓밟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이 다 동원된 야수적고 악랄한 탄압책동이였기때문이다.

일제가 우리 민족이 벌린 독립운동에 대하여 그 시초부터 형태와 규모, 지역에 관계없이 사소한 요소도 허용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탄압을 가한것이나 우리 민족이 벌린 모든 형태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경찰을 비롯한 일반 치안유지기구뿐아니라 정규적인 침략무력까지 총동원하여 탄압책동을 벌린것 그리고 독립운동이 강화되면 될수록 탄압의 도수를 더욱 높인것은 이를 잘 보여주고있다.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만행은 우리 민족의 자주적발전에 커다란 죄악적후과를 남기였다.

오늘 일본은 저들의 과거죄행을 인정하기 않고있을뿐아니라 그를 외곡하고 미화분식하기 위하여 교활하게 책동하고있다.

일본의 우익보수세력들은 력사교과서들에서 반일의병투쟁을 비롯한 우리 민족이 벌린 독립운동에 대한 력사적사실들을 삭제하거나 표현들을 대폭 완화시키고있다. 또한 1990년대초 조일국교정상화를 위한 정부간 회담들에서 과거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사상범》으로 투옥되여 희생된 사람들의 경우도 당시의 일본법에 의하여 투옥되였기때문에 저들은 보상할 책임이 없다고 과거죄행을 전면부정하였다(《로동신문》 1991. 9. 1). 이것은 저들의 과거죄행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일본식 특유의 교활성과 파렴치성을 잘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로서 그것은 과거 일제에 의하여 커다란 재난과 고통을 당한 조선민족에 대한 커다란 모독으로 된다.

북과 남의 전체 조선민족은 참다운 민족자주정신을 가지고 죄악에 찬 일제의 과거침략죄행을 철저히 폭로할뿐아니라 저들의 죄행을 미화분식하려는 일본반동들의 책동을 단호히 저지파탄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