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22)

재개정 요구하는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왜 통일학 연구를 심화시켜야 하는가? 

평화통일강령을 채택한 정당은 민주노동당만이 아니다. 진보신당, 민주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도 평화통일강령을 채택하였다. 분단국가체제에서 정치활동을 벌이는 그 어떤 정당도 평화통일강령을 외면할 수 없으므로, 그런 현상은 당연하다. 심지어 반통일세력의 '소굴'인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마저도 평화통일문제를 외면할 수 없으므로, 실제로는 평화통일을 실현할 생각이 전혀 없는데도 자기 강령에 "자유민주적 평화통일" 또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실현되는 방식의 통일"이라는 수사를 집어넣어 체면을 차렸다.
 
그렇지만 위의 여섯 정당 가운데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평화통일강령을 추구하는 유일한 정당은 민주노동당이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적 민주주의강령과 함께 평화통일강령을 자기가 추구하는 2대 강령으로 채택한 유일한 정당이다. 1950년대 진보당의 평화통일강령, 1960년대 혁신정당의 평화통일강령 이후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으로 오랜 세월 동안 끊어졌던 평화통일강령의 맥을 되살렸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 채택은 커다란 정치사적 의의를 지닌다.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은 2005년 2월 27일 당대회에서 개정되었다. 6년 전에 평화통일강령을 개정한 것은 그 이전에 있었던 평화통일강령의 부실한 내용을 보완한 것인데, 개정된 평화통일강령의 내용도 역시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차마 국민대중 앞에 내놓기가 창피할 지경이다.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이 그처럼 부실하게 된 까닭은, 당의 통일학 연구수준이 보잘 것 없기 때문이다. 평화통일강령을 추구하는 유일한 정당이 통일학을 깊이 연구하지 않고 다른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평화통일에 관한 일반상식을 열거해놓고 그것을 당의 강령으로 채택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 식민지 시기 우리 민족이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는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였다면, 오늘 우리 민족은 자주통일국가를 세우는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주적 평화통일은 다른 강령들과 차원을 달리하는 최대, 최고의 강령이다. 이처럼 평화통일강령은 낡은 분단국가체제를 새로운 통일국가체제로 교체하기 위한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원칙을 제시하는 정치강령인데,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에서 그런 원칙을 찾아보기 힘들다. 개정된 평화통일강령에는 한반도 통일정세에 대한 분석과 네 가지 평화통일정책이 산만하게 열거되어 있을 뿐이다.

민주노동당은 통일학 연구를 더욱 심화시켜 과학적인 통일관, 주체적인 통일정세 인식, 합리적인 통일실현 원칙을 명백하고 논리정연하게 담아 평화통일강령을 다시 개정해야 할 것이다.


개정된 평화통일강령에서 퇴치되지 못한 네 가지 결함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에 나타난 네 가지 결함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에서 한반도 통일정세에 대한 주체적 관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주체적 관점이 없는 대신에, 엉뚱하게도 한반도의 분단국가체제를 '냉전의 산물'로 규정하는 천박한 정세인식이 논리에도 맞지 않게 서술되어 있다.

"냉전의 양극체제 아래서는 아무리 남과 북이 자주적인 통일의 길로 나아가려 해도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의 거센 힘에 부딪혀 통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서술한 대목과 "머지 않아 도래할 것으로 예견되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동북아 신냉전이 구축되기 이전에 최소한 국가연합이나 연방제 방식의 통일이라도 이루어 국제적으로 우리의 민족통일을 기정사실화하는 일이다"고 서술한 대목은 고등학생들의 통일백일장에나 나올 법한 저급한 서술이다.

이전에는 미국과 소련의 구냉전체제가 가로막아서 평화통일이 불가능하였고, 앞으로는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체제가 가로막아 평화통일이 불가능할 것이므로 하루빨리 평화통일을 실현해야 한다는 식의 저급한 견해는 주체적 관점을 배제한 오류다.
 
한반도에서 낡은 분단국가체제가 새로운 통일국가체제로 교체되지 못한 까닭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가 가로막았기 때문이 아니라 식민지예속체제가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명백하게도 한반도의 분단국가체제는 일제 식민지체제의 반역사적 유물이고,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체제의 직접적 산물이다.
 
평화통일강령 서술에서 미국과 소련의 구냉전이나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을 언급하는 것은, 평화통일세력과 분단유지세력의 대립구도, 다시 말해서 우리 민족의 반제자주역량과 미국의 제국주의지배력이 대립하는 구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국가체제는 그 어떤 냉전체제 위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반제자주역량 대 제국주의지배력의 대립 속에 존재한다.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는 우리 민족의 반제자주역량이 분단국가체제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제국주의지배력을 압도할 때 그 때 비로소 평화통일이 실현되는 것이다. 분단론과 냉전론을 연계시킨 오류를 청산하고, 주체적 관점에서 평화통일강령을 다시 서술해야 한다.

둘째,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은 역사인식 결핍증을 드러내었다. 민주노동당은 분단국가체제의 긴 역사에서 처음으로 평화통일을 실현하겠다고 나선 정당이 아니다.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는 투쟁과 노력은 한반도에 분단국가체제가 세워졌던 1948년부터 민주노동당이 자기의 평화통일강령을 개정하였던 2005년까지 57년 동안 지속되었고, 지금도 의연히 지속되고 있다.

1948년 이후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된 평화통일운동의 경험과 성과를 오늘의 변화된 통일정세에 맞게 계승, 발전시켜야 할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에 평화통일운동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결여된 것은 충격적인 일이다.
 
셋째,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은 낡은 분단국가체제를 새로운 통일국가체제로 교체하는 문제와 낡은 사회체제를 새로운 사회체제로 개조하는 문제를 뒤섞어 놓았다. 이러한 혼동은 "궁극적인 통일체제는 남한 자본주의의 천민성과 북한 사회주의의 경직성이 극복되면서 민중의 권익과 민주적 참여가 보장되는 체제여야 한다"고 서술한 것에서 선명하게 노출되었다.

명백하게도,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은 사회체제를 개조하는 강령이 아니라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강령이다. 민주노동당이 추구하는 사회체제 개조 문제는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이 아니라 자주적 민주주의강령에 들어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은 "민중의 권익과 민주적 참여가 보장되는 체제"를 새로운 통일국가체제라고 강변하였지만, 그런 체제는 민주노동당이 주요산업 국유화를 실현하여 건설할 남측의 진보적 민주주의체제를 말하는 것이지 한반도의 자주적 통일국가체제가 아니다. 남측에 세워질 진보적 민주주의체제와 한반도에 세워질 자주적 통일국가체제를 혼동한 것은 치명적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남한 자본주의의 천민성과 북한 사회주의의 경직성"이라고 서술한 대목에 나오는 천민성이라는 말과 경직성이라는 말도 주간지 기사에나 나올 법한 비과학적인 용어들이다. 원래 천민이라는 말 자체가 민중을 천한 존재로 깔보는 봉건귀족계급의 악습적 용어인데, 민주노동당에서 써서는 아니 될 금지어를 평화통일강령에 버젓이 들여놓은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천민성에 대비되는 말은 귀족성인데, 자본주의체제의 성격을 천민성과 귀족성으로 구분하려는 발상 자체가 무지의 극치를 드러낸 것이다. 천박성이라는 말을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천민성이라는 잘못된 말을 쓴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남측 자본주의체제의 성격은 천박성이 아니라 예속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해야 옳다.

게다가 북측 사회주의체제의 경직성이라는 말은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경직성이란 부드럽지 못하고 딱딱한 성질을 뜻하는 말인데, 사회주의체제의 성격을 유연성과 경직성으로 구분하려는 발상 자체가 비과학적이고 터무니 없다. 평화통일강령 서술에 남북의 현존 사회체제에 대한 양비론을 도입해야 한다는 한심한 강박관념은, 평화통일 문제와 사회체제 문제를 혼동하여 생겨난 착각이므로 마땅히 버려야 한다.

넷째,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은 당면목표와 최종목표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모든 정당은 자기 강령을 일거에 실현할 수 없고 단계적으로 실현해야 한다. 그래서 강령의 단계적 실현이 당면목표와 최종목표를 제시하는 서술방식으로 강령에 들어가는 법이다.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의 당면목표는 남측의 중도연립정부와 북측의 사회주의정부가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전면적으로 이행하여 한반도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상설통일기구를 설립하는 것이다. 또한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의 최종목표는 남측의 진보적 민주주의정부와 북측의 사회주의정부가 6.15 공동선언에 의거하여 전국적 범위의 연립정부를 세우는 것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전국적 범위의 연립정부는 한반도에 세워질 통일국가체제의 정치적 주체이며 대표체다. 자주적 평화통일을 향한 전 민족의 숙망과 염원은 전국적 범위의 연립정부를 세우는 날 실현될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에 담아야 할 네 가지 원칙

민주노동당이 앞으로 강령을 재개정할 때 평화통일강령에 담아야 할 원칙들은 아래와 같다.
 
첫째, 자주적 추진의 원칙을 담아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이 다른 중도우파정당들의 평화통일강령을 뛰어넘는 전략적 차별성은,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이라는 점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자주적'이라는 말은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라,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근본원칙을 표현한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국가체제에 전쟁위험과 영구분단까지 추가로 강요하는 미국의 제국주의지배체제를 배격하고 평화통일을 자주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뜻에서, '자주적'이라는 말은 평화통일강령을 규정하는 중요한 원칙을 표현한 것이다.

이 짧은 글에서 자료를 일일이 열거하여 논증하지는 못하지만, 지난 시기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각각 북측과 정상회담을 추진하였을 때, 그 추진과정을 음으로 양으로 간섭하고 개입하고 통제한 것은 미국이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미국이라는 제국주의국가체제를 움직이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남북 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 남측 정부당국을 음으로 양으로 간섭하고 개입하고 통제하였던 것이다. 만일 그들의 간섭, 개입, 통제가 없었다면, 남북 정상회담은 더욱 진전된 정치적 합의에 이르렀을 것이다.
 
한반도에 분단국가체제를 세운 주범도 미국이고, 자기들이 세워놓은 분단국가체제에 전쟁위험과 영구분단을 강요해온 주범도 미국이고,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남북 정부당국의 노력을 음으로 양으로 방해해온 주범도 미국이다.
 
평화통일은 미국의 지배와 간섭, 개입과 통제를 배제, 배격하고 '우리 민족끼리' 추진한다는 뜻에서 자주적 평화통일이며, 전 민족의 주체역량으로 추진한다는 뜻에서 자주적 평화통일이다.

둘째, 평화적 방도의 원칙을 담아야 한다. 낡은 분단국가체제를 새로운 통일국가체제로 교체하는 방도는 평화적 방도와 비평화적 방도로 구분되는데, 남북의 정부당국은 평화적 방도를 선택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적 방도란 남북의 정부당국이 대화와 협상으로 통일국가체제를 세운다는 뜻이다. 평화적 방도의 원칙은 남과 북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며, 실현 가능한 원칙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북 정부당국의 통일회담이다. 남북 정부당국의 통일회담이 재개되고 진전되어야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길이 열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남북 정부당국의 통일회담 자체를 거부하고 북측의 사회주의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위험천만한 대결주의 반북정책에 열중하는 반통일세력이 활개치고 있는 것이 문제다. 그런 반통일세력이 활개치는 한, 남북 정부당국의 통일회담은 영영 불가능하며 평화통일은 멀어지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자기의 평화통일강령에 담을 평화적 방도의 원칙은, 평화적 방도 자체를 거부하는 반통일세력까지 용인한다는 뜻은 아니다. 민주노동당의 평화통일강령은 평화적 방도 자체를 거부하는 내외 반통일세력을 배격한다는 점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
 
셋째, 사회체제 불거론 원칙을 담아야 한다. 사회체제 불거론 원칙이란 남북 정부당국이 통일회담을 진행하면서 남북에 각각 현존하는 사회체제에 대해 거론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동시에 장차 건설될 통일국가의 사회체제에 대해서도 규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일 남북 정부당국이 통일회담을 진행하면서 서로 상대방에게 사회체제를 바꾸라고 요구하거나, 장차 건설될 통일국가의 사회체제가 자기의 현존 사회체제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대화와 협상이 이루어질 수 없고 갈등과 충돌만 불거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체제 불거론 원칙은 평화적 방도의 원칙을 안받침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넷째, 자주적 평화통일강령과 진보적 민주주의강령을 상호연계하는 원칙을 담아야 한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남측 자본주의체제와 북측 사회주의체제의 관계는 적대적이다. 이처럼 남북관계에 사회체제의 적대성이 존재하는 엄연한 현실을 그대로 두고 통일국가체제를 세운다는 말은 비과학적인 낭설이다. 통일국가체제 안에 서로 다른 사회체제가 공존하리라는 점은 명백하지만, 서로 다른 사회체제라고 해서 서로 적대적인 사회체제라는 말은 아니다. 적대적 공존은 형용모순이다. 그러므로 체제공존형 통일은 사회체제의 비적대화를 불가피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사회체제의 비적대화는 누가 누구에게 요구하는 것일까? 그것은 민주노동당이 남측의 사회체제에 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남측 자본주의체제가 북측 사회주의체제에 적대적이지 않는 새로운 사회체제로 바뀌어야, 낡은 분단국가체제를 새로운 통일국가체제로 교체할 수 있고, 새로운 통일국가체제 안에서 남북의 서로 다른 사회체제가 공존할 수 있다.

물론 북측은 남측에게 사회체제의 비적대화를 거론할 수 없고, 거론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대남관계에서 사회체제 불거론 원칙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북측이 대남관계에서 사회체제 불거론 원칙을 지켜야 마땅하지만, 민주노동당도 북측을 따라서 사회체제의 비적대화를 거론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대북관계에서 사회체제 불거론 원칙을 지켜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측의 사회체제에 대해 불거론 원칙을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자기 사회체제의 비적대화를 거론할 필요가 있고 책임도 있다.

민주노동당의 진보적 민주주의강령은 남측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진보적 민주주의체제로 바꾸려는 사회체제 개조강령인데, 그 강령은 자주적 평화통일강령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고, 서로 무관한 것도 아니다. 민주노동당의 강령서술체계에서 사회변혁과 평화통일은 모순되는 것도 아니고 서로 무관한 것도 아니다. 민주노동당이 추구하는 그 두 강령이 상호연계되어 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 두 강령을 상호연계시켜주는 연결고리가 사회체제의 비적대화라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민주노동당이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진보적 민주주의체제로 바꾸어 남북의 사회체제가 비적대화되어야 평화통일강령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낡은 분단국가체제를 교체한 새로운 통일국가체제 안에서는 남측의 진보적 민주주의체제와 북측의 '우리식 사회주의체제'가 서로 다른 사회체제로 공존하게 될 것이다. (2010년 2월 17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