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15)]

꼰쎄르따씨온 20년 잃어버린 세월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2010년 1월 17일의 쓰라린 패배

남태평양을 왼쪽에, 안데스산맥을 오른쪽에 끼고 남북으로 가늘고 길게 이어진 영토를 가진 나라 칠레에서 2009년 12월 13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연합(Concertaci n de Partidos por la Democracia)'은 에두아르도 프레이(Eduardo Frei)를 대선 후보로 내세웠고, 당시 야당이었던 '변화를 위한 연합(Coalicion por el Cambio)'은 세바스띠안 삐녜라(Sebasti n Pi era)를 대선 후보로 내세웠다. 선거결과는 삐녜라 후보가 44.03%의 득표율을 얻었고, 프레이 후보의 득표율은 30%를 밑돌았다. 칠레 선거제도는 과반수 득표율이 나오지 않은 경우, 1위 득표자와 2위 득표자가 결선투표를 하게 되어 있다.
 
2010년 1월 17일에 실시된 결선투표에서도 삐녜라 후보가 프레이 후보를 여유 있게 누르고 승리하였다. 꼰쎄르따씨온(Concertaci n)이라고 부르는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연합'은 패배했고, 알리안사(Alianza)라고 부르는 '변화를 위한 연합'은 승리하였다. 지난 20년 동안 네 차례 연속 집권하였던 중도우파정당연합체 꼰쎄르따씨온이 패하고, 우파정당연합체 알리안사가 집권한 것이다. 알리안사의 집권은 칠레 정치권의 '시계바늘'이 20년 뒤로 되돌려졌음을 뜻한다.
 
왜 이런 정치적 퇴행현상이 일어났을까? 그 원인을 말해 주는 지표가 있다. 칠레에서 3년마다 실시되는 국가사회경제특징(CASEN)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2009년 현재 칠레의 부유층 10%의 월평균 소득은 295만 1,815 뻬소(약 674만 원)이고, 빈곤층 10%의 월평균 소득은 6만3,891 뻬소(약 14만6,000 원)이다. 상위소득계층이 하위소득계층보다 46배나 많은 소득을 거머쥐는 것이다. 이러한 소득격차는 2006년의 31배보다 크게 늘어난 것이고, 꼰쎄르따씨온이 처음 집권한 1990년 이후 최고 기록이다. 또한 2009년 현재 월소득이 6만4,000 뻬소 미만인 빈곤층은 칠레 전체 인구의 15.1%를 차지하는 256만4,000명이다. 충격적인 것은, 꼰쎄르따씨온이 집권한 지난 20년 동안 빈부격차가 줄어들기는커녕 되레 더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꼰쎄르따씨온 집권 20년 동안 빈부격차가 더 벌어지고, 빈곤층이 더 늘어났으니, 민심이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민심이 떠난 집권당이 선거에서 패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꼰쎄르따씨온은 왜 실패했을까?

널리 알려진 대로, 꼰쎄르따씨온은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정당연합체이므로, 집권 기간 20년 동안 복지국가를 실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빈부격차 확대에 관한 지표가 말해 주는 것처럼, 복지국가를 실현하려던 꼰쎄르따씨온의 정책과 실행은 실패로 끝났다. 칠레 국민은 복지국가를 실현할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완전히 실패한 꼰쎄르따씨온에게 등을 돌리고 선거패배라는 냉혹한 심판을 내린 것이다. 꼰쎄르따씨온 집권 20년은 결국 잃어버린 20년이다.

꼰쎄르따씨온은 10년도 아니고 20년 장기간 동안 집권하였으면서도 왜 복지국가건설에 실패하였을까? 한 마디로 말하면, 복지국가를 스웨덴 사민당식으로 건설하려다가 실패하였다고 평할 수 있다. 이전에 발표한 나의 글에서 스웨덴 사민당 정권의 패퇴와 스웨덴식 복지국가 건설의 실패를 논한 적이 있지만, 그와 유사한 현상이 칠레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꼰쎄르따씨온 사회민주주의는 중요산업을 국유화하는 결정적이고, 중대한 정치과업을 외면하였기 때문에 20년 동안 집권하였으면서도 복지국가를 건설하기는커녕 빈부격차를 되레 더 확대시키고 결국 민심이반으로 정권을 우파정당에게 내주는 참담한 실패를 겪은 것이다.
 
스웨덴과 칠레에서 각각 사민당 정부들이 공통적으로 겪은 실패와 좌절의 쓰라린 경험은, 중요산업 국유화 강령을 외면한 사회민주주의가 결코 우리의 정치이념적 대안으로 될 수 없음을 말해 준다. 명백하게도, 중요산업을 국유화하는 것만이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신자유주의를 배격하고, 복지사회를 건설하고, 예속경제를 자립경제로 전환시키고, 자주화를 실현하는 진보적 민주주의의 길이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꼰쎄르따씨온은 진보적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패인은 결국 정치이념의 한계에 있었던 것이다.


두 유형의 정치연합체

2010년 9월 4일 칠레 수도 산띠아고에 있는 대통령궁 앞 헌법광장에서 조촐한 기념식이 열렸다. 1970년부터 1973년까지 집권하였던 쌀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대통령(1908-1973) 정부 수립 40주년 기념식이었다. 아옌데 대통령의 딸 이자벨 아옌데(Isabel Allende) 상원의원은 기념식에서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아버지의 이상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말했다. 아옌데 정부는 미국의 경제봉쇄와 미국의 배후조종을 받은 칠레 우파의 폭란으로 시련을 겪던 중 집권 3년 만인 1973년 9월 11일 군사정변으로 아옌데 대통령의 피살과 함께 무너졌다.

그러나 아옌데 대통령은 사후 4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꼰쎄르따씨온의 정신적 지주로 살아있다. 꼰쎄르따씨온은 아옌데 대통령이 1933년 4월 19일에 창건한 칠레 사회당을 주축으로 구성된 정치연합체다.
 
꼰쎄르따씨온은 40년 전 아옌데 대통령을 중심으로 집권에 성공하였던 '인민단결(Unidad Popular)'이라는 정당연합체의 계승자로 자처하고 있으나, 내부사정은 전혀 다르다. 40년 전 '인민단결'은 사회당, 공산당, 급진당, 사회민주당, 인민단일행동운동(MAPU)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비해, 오늘 꼰쎄르따씨온은 사회당 계열의 여러 군소정당들, 급진당, 사회민주당, 인민단일행동운동, 기독교민주당, 자유당, 민주주의당, 녹색당 등으로 결성되었다가 지금은 다 떨어져 나가고 사회당, 사회민주급진당, 기독교민주당, 민주주의당만 남았다.
 
중요한 것은, 칠레 공산당이 꼰쎄르따씨온에 참가하지 않은 것이다. 칠레 공산당은 40년 전 '인민단결'이라는 정당연합체에 칠레 사회당과 함께 양대 주도세력으로 참가하였다. 칠레 공산당과 칠레 사회당이 양대 주도세력으로 참가한 정당연합체 '인민단결'은 중도좌파노선을 걸었다. '인민단결'은 단계적 변혁을 주장하는 세력과 급진적 변혁을 주장하는 세력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공산당, 사회당 우파, 급진당, 인민단일행동 우파가 단계적 변혁을 주장하였고, 사회당 좌파, 인민단일행동 좌파, 기독교좌파당 좌파, 그리고 '인민단결'에 참가하지 않은 혁명적 좌파운동(MIR)은 급진적 변혁을 주장하였다. 아옌데 대통령 자신은 단계적 변혁을 추구하였다.

단계적 변혁을 추구한 아옌데 정부는 중요산업 국유화, 토지개혁,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급식을 시행하였다. 그 결과, 칠레의 산업성장률은 12% 포인트,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8.6% 포인트 올랐고, 실업률은 3.8% 포인트, 인플레이션은 12.8% 포인트 떨어졌다.

그런데 1970년 11월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 당시 미국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이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칠레에 대한 강력한 경제봉쇄를 가하기로 결정하였고, 그에 따라 칠레 경제는 파산지경에 빠졌다. 만일 미국의 경제봉쇄가 없었더라면, 아옌데 정부는 중요산업 국유화 정책을 계속 밀고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의 배후조종을 받고 군사정변을 일으킨 극우세력이 '인민단결'을 폭력적으로 해체시킨 뒤, 20년 만에 집권한 꼰쎄르따씨온에는 칠레 공산당이 참가하지 않았고 사회당을 비롯한 중도우파정당들만 참가하였으므로 꼰쎄르따씨온이 사회민주주의로 기울어지는 것은 불가피하였다. 사회민주주의로 기울어진 꼰쎄르따씨온이 중요산업 국유화를 추진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인민단결'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추구한 중도좌파정치연합체였고, 꼰쎄르따씨온은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한 중도우파정치연합체였다.


그들은 왜 정치연합을 외면하였을까?

삐노체뜨 군사독재정권이 쇠락한 1987년에 좌파정당이 합법화되었고, 그에 따라 정치활동 공간이 크게 확장되자 칠레 좌파정당들은 합법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합법활동에 나선 칠레 좌파세력들의 앞에는 두 가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첫째, 삐노체뜨 군사독재정권의 극악무도한 탄압으로 좌파 지도핵심세력이 거의 희생되었다. 1991년에 발표된 보고서에 따르면, 삐노체뜨 군사독재정권 기간 지도급 좌파인사 3,197명이 희생되었다.
 
좌파 지도핵심세력이 희생되었으니, 좌파정당들이 합법화되었을 때 당이 분열되고 우경화 바람을 맞는 시련을 겪었다. 예컨대 꼰쎄르따씨온을 주도한 칠레 사회당은 여러 군소정당으로 분열되었을 뿐 아니라, 아옌데 집권시기와 달리 우경화되어 사회민주주의로 기울어지고 말았다.

둘째, 1988년에 꼰쎄르따씨온이 결성될 때, 칠레 공산당은 참가하지 않았다. 아옌데 집권시기에 '인민단결'의 주도세력으로 참가하였던 칠레 공산당이 왜 꼰쎄르따씨온에는 참가하지 않았을까?
 
당시 칠레 공산당 지도자는 루이스 꼬르발란(Luis Corval n, 1916-2010) 총비서였다. 그는 1973년 9월 11일 삐노체뜨 군사정변 때 체포되어 감옥으로 끌려갔는데, 1976년 12월 18일 소련이 정치범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그를 구출하여 소련에 망명시켰다. 그는 1988년에 소련 망명생활을 접고 칠레에 돌아갔다. 꼬르발란에 이어 1994년에 칠레 공산당 총비서에 선출된 여성 지도자는 글라디스 마린(Gladys Mar n, 1941-2005)이다. 그는 삐노체뜨 군사정변 때 네덜란드 대사관으로 피신하였다가 해외로 탈출하였고, 1978년에 밀입국하여 지하투쟁을 벌였다.
 
칠레 공산당은 삐노체뜨 군사독재정권의 극악한 탄압에 맞서 장기간 비합법투쟁을 벌이면서 좌경화되었다.
1987년에 좌파정당이 합법화되었으나, 우경화된 칠레 사회당과 좌경화된 칠레 공산당이 정치연합을 실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좌경화된 칠레 공산당은 정치연합을 포기하고 독자발전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였다. 그들은 지난 22년 동안 독자적으로 발전하기는커녕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 칠레 사회는 삐노체뜨 군사독재정권 17년 동안 급격히 우경화되었는데, 좌경화된 칠레 공산당이 그런 객관적 현실변화를 외면한 나머지 중도우파정당들과의 정치연합을 포기하고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중대한 전환기의 오판이 쇠락을 불렀다

현재 칠레에서 전국적 규모의 정당들의 당세를 보면, 칠레 공산당의 오판이 얼마나 충격적인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알 수 있다.  상원 38석, 하원 120석, 지방의회 345석 가운데 각 전국 정당의 의석수 분포상황은 이렇다.
 
독립민주연합 - 상원 8석, 하원 40석, 지방의회 58석
국가갱신당 - 상원 8석, 하원 18석, 지방의회 55석
기독교민주당 - 상원 9석, 하원 19석, 지방의회 59석
민주주의당 - 상원 4석, 하원 18석, 지방의회 35석
칠레 사회당 - 상원 5석, 하원 11석, 지방의회 30석
사회민주급진당 - 상원 1석, 하원 5석, 지방의회 11석
칠레 공산당 - 상원 0석, 하원 3석, 지방의회 4석
 
꼰쎄르따씨온이 결성되던 1988년의 중대한 전환기에, 만일 칠레 공산당이 좌파노선에서 중도좌파노선으로 전환하여 꼰쎄르따씨온에 적극 참가하고, 칠레 사회당과 함께 공동집권하여 중도연립정부를 세웠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공동정부에 참가한 칠레 공산당은 칠레 사회당의 우경화 정책을 견제하면서, 중도연립정부를 변혁강령과 개혁강령의 중간선으로 견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했더라면, 칠레 공산당은 지금처럼 쇠락하지 않았을 것이며, 장차 단독으로 집권할 국민적 지지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좌경화된 칠레 공산당은 1988년의 중대한 전환기에 정세를 오판하였고, 그 결과 쇠락의 길을 걸었다. 22년 전 정세오판이 88년의 역사를 가진 칠레 공산당을 존재감 없는 그림자 정당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칠레에서는 22년 전에 좌파정당이 합법화되었으나, 이 땅에서는 좌파정당 합법화는커녕 만고의 악법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탄압도구로 쓰이고 있다. 우리 사회가 칠레보다 훨씬 더 우경화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처럼 심하게 우경화된 사회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세력은 칠레 공산당의 좌경적 오판이 남긴 쓰라린 경험에서 반면교사의 교훈을 찾아야 할 것이다. 2012년 중대한 전환기에 다가서고 있는 지금, 그 교훈은 통절한 호소로 들린다. (2010년 12월 19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