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일제의 100년 죄악사를 고발한다」중에서
 

<을사5조약>100여년과 우리 민족의 과제
 

                       원사, 교수, 박사 허종호                     

《을사5조약》조작과 관련하여 그 불법, 범죄성을 론하고 일본이 우리 인민에게 끼친 100여년 죄악의 력사를 총화해보며 여기서 우리 민족이 불구대천의 원쑤 일본군국주의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는것은 각별한 의의를 가진다.

구조약의 불법무효성에 대해서는 국내외 사회계에서 이미 여러차례에 걸쳐 론죄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일본당국자들은 의연 구조약의 《합법성》을 운운하면서 그것을 과거청산을 거부하는 《근거》로 들고나오고있으며 일본의 많은 어용학자들이 이에 합세하고있다. 이런 실정에서 《을사5조약》의 불법무효성을 강조하면서 그 범죄적후과를 청산하기 위한 우리 민족의 과제에 대하여 밝히려고 한다.
 

1. 《을사5조약》의 불법무효성에 대하여
 

국제법에서는 조약의 불법무효성을 규정짓는 기본징표를 강제성으로 보고있다. 《조약법에 관한 윈조약》과 《관습국제법》에 대한 해석이 분석가의 립장에 따라 각이하지만 국가 및 국가대표자에 대한 협박과 강제의 결과 이루어진 모든 조약은 《어떠한 법적효력도 가지지 못한다》고 규정한 《윈조약》제51조에 대한 리해에 있어서는 대체로 다른것이 없는것으로 인식되고있다.

《을사5조약》을 불법무효의 허위문서로 규정하게 되는 기본근거는 무엇보다도 이 《조약》의 강제성에 있다.

알려진바와 같이 《을사5조약》은 근대세계력사에서 조폭한 방법으로 조작된 대표적인 《조약》이였다. 강압으로 시작되고 협박으로 진행되였으며 강도행위로 《조인》된 철두철미 강제로 일관된 《조약》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

편견없이 자료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을사5조약》의 이 전무후무한 강제성에 대하여 부인하지 못할것이다.

우선 이 《조약》은 계획부터 강제성을 전제로 하였고 협박으로 시작되였다.

1905년 10월 27일 일본정부의 《한국보호권확립실행에 관한 각의결정》에서는 기본조항들이 모두 군사적강권의 발동을 조약체결의 필수적수단으로 규정하였다. 이 각의결정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것을 기본목적으로 내세우고 《보호조약》체결을 위한 실무적절차와 함께 조선주차군사령관의 참여와 군대의 한성진입 및 주둔 등 군사적강권발동을 계획하였으며 지어 대한제국정부가 《보호조약》을 거절하는 경우 《최후수단》으로서 《한국에 대하여 보호권을 확립하였다》는것을 일방적으로 공포할 무단적인 방법까지 내정하고있었다(《일본외교문서》 38권, 1책, 일본국제련합회, 1958년, 526~527페지).

이것은 일제가 조선의 《보호국》화를 이미 기정사실화하고있었으며 조약체결은 다만 국제관례상 갖추어놓을 순수 형식상의 요건으로 간주하였고 그것마저도 군사적강권발동을 필수적수단으로 규정하고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 《을사5조약》의 조작과정은 바로 이 가기결정이 그대로 강행되는 과정에 불과하였다.

알려진바와 같이 조약의 강제성은 국가에 대한 강제와 국가대표에 대한 강제에 의하여 규정된다. 《을사5조약》은 강제의 이 두 형태가 함께 발동되여 조작된것이였다.

먼저 국가에 대한 강제는 《조약》협의직전과 당일에 가해졌다.

그날 일제는 보병, 포병, 기병 등 조선주차군의 무력을 수도 한성(서울)에 집결시키고 왕궁을 포위한 상태에서 위협적인 군사연습까지 벌리였다(《도꾜니찌니찌신붕》 1905. 11. 25). 이것은 명백히 국가에 대한 강제이며 그 강제는 조선의 《불의의 행위》에 대한 강제가 아니라 《엄정중립》을 지키고있는 국가의 자주권에 대한 침해였다.

조선은 일본의 국익을 침범한 일이 없었고 전범자도 전패국도 아니였다. 오히려 일본이 불청객으로 조선에 뛰여들어서는 청일, 로일전쟁을 도발하고 전국을 비법적으로 강점한 침략자였다. 그러므로 조선에 대한 무력공갈은 정당한 명분이 없는 부정의의 침략행위이며 따라서 그에 의해 조작된 조약은 불법으로 된다.

그리고 국가대표에 대한 강제는 왜왕의 특사 이또의 고종황제에 대한 협박과 대신들에 대한 전대미문의 횡포에서 발로되고있다.

11월 15일 고종을 방문한 이또는 저들이 체결하려는 조약의 내용을 설명하고 그에 보류적인 태도를 취하는 고종에게 《본안은 ...변동의 여지가 없는 확정안》이며 따라서 페하가 거부하면 《귀국의 지위가 조약을 체결하는것보다 ...일층 불리하게 되는 결과를 각오》해야 한다고 위협해나섰으며 고종이 이런 중대사는 국내법에 따라 의정부와 중추원의 협의를 거쳐야 한다고 대응해나서자 이또는 전제군주제인 귀국에서는 페하의 재가여하에 달려있는것이므로 그것은 《일본의 제안에 반항할것을 기도한것》이며 《일이 늦어지는것은 사정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오늘 밤중으로 외부대신(박제순)에게 칙령을 내려 속히 하야시공사의 제안을 협의하고 《조인되도록 추진》할것을 강요하였다(《일본외교문서》 38권, 1책, 일본국제련합회, 1958년, 501~502페지).

일본의 강박행위는 조약의 찬성여부를 묻는 우리측 대신들과의 《협의》에서 더욱 적라라하게 드러났다.

16일에는 하야시 곤스께공사가 외부대신 박제순을, 이또는 그밖의 정부대신들을 각기 공사관과 숙소에 불러내여 조약체결을 강요했으며 17일에는 수옥현에서 어전회의를 열고 다시금 《아니》라고 반대할것을 결정하고 돌아가는 정부대신들을 휴계실에 가두어놓고 어전회의정형을 물으면서 다시 협의할것을 강요하였다.

대신들이 모두 반대하기로 결정했다는 하야시의 보고를 받고 결정적조치를 취할 최후시각이 왔다고 직감한 이또는 정부대신들이 불복하는 경우 탄압명령을 내릴 목적에서 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대장과 사또헌병대장 및 그 부관을 거느리고 대신들이 억류되여있는 방에 뛰여들었다. 이또는 거만하게 행동하며 고종에게 접견(협상참가)을 요청하였으나 고종은 《짐은 이미 각 대신들에게 <협상하여 타당하게 하라>고 하였으니 ...좋게 협상하라》는 지시만 주고 자신은 몸이 불편하다는 리유로 그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고종의 뜻에 따른다면 응당 그 자리가 두 나라 대표들의 대등한 위치에서의 자유로운 협상회의로 되여야 할것이였다. 그러나 이또는 전횡을 부리면서 《여러 대신들이 각기 자기 뜻을 진술》할것을 요구한 참정대신 한규설을 밀어제끼고 각 대신들을 개별적으로 심문하는 방법으로 의견을 묻고는 자의대로 찬성여부를 판결한 후 《아니라고 한 사람은 참정대신과 탁지부대신뿐》이라고 선언하고 고종에게 《속히 조인하도록 성지를 내려줄것을 바란다》고 제기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협상인데 번거롭게 굴지 말라》고 대답함으로써 명백히 조인을 거부하였다.

이처럼 대신들을 감금해놓고 심문한것을 《정부대신회의》라 하고 심문과정에서 찬성의 뜻으로 리해할수 있게 말한것은 학부대신 리완용뿐이였고 나머지는 반대했거나 압력에 못이겨 애매한 태도를 취한것인데 제멋대로 찬성이라고 《판결》했으며 또 참가자들의 의향도 묻지 않고 자기가 나서 《대신회의》를 《사회》했다는것부터 어불성설이거니와 정부의 수석과 외부의 주임이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종실록》 권46 광무9년 12월 16일) 국가운명에 관한 조약조인을 감히 날조한 《다수》로 가결한다는것도 전무후문한 폭행이였다. 또한 이또가 칼을 찬 주차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거느리고온것도 실은 각의결정대로 《만일의 경우 륙군관헌들에게 (군사동원)명령을 내리기 위한 목적》(《일본외교문서》 38권, 1책, 일본국제련합회, 1958년, 497페지)에서였으므로 그것은 명백히 국가대표들에 대한 협박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국제법학자인 사까모또 시게끼 등이 《당시의 국제법에서 금지하고있는 형태의 조약강제》란 《국가대표자에 대하여 과거의 불행적을 폭로한다거나 ...권총을 들이대는것과 같은 협박》이라고 하면서 마치도 이또가 고종과 대신들에게 말과 태도로써 위협한것은 금지된 조약강제형태가 아닌듯이 변호하는것은 《을사5조약》의 적법성을 만들어내기 위한 궤변에 불과하다. 권총을 빼든것만 협박이고 수천수만의 보총과 권총, 대포를 가진 군대와 헌병을 대기시켜놓은 군사령관이나 헌병대장이 대신들의 일거일동을 노려보며 이또의 조인강요를 엄호해준것은 금지된 조약강제형태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누구에게나 편견을 가진 변호론으로밖에 들리지 않을것이다.

하기에 일부 식민주의변호론자들을 제외한 량심적인 국제사회계 인사들은 모두 《을사5조약》의 강제성을 시인하며 규탄하고있다. 고종의 특사였던 미국인 호머 헐버트는 자기의 저서 《조선의 멸망》<상>에서 《독자들은 전세계 사람들과 함께 이 조약이 조선측에서 보면 자발적의사와는 훨씬 동떨어진것이였다는것을 자기로써 판단할것이다.》라고 썼고 하와이대학의 죤 다이크는 미국의 하와이병합과 비교하면서 《특히 조선의 합병과정에서 자행된 (일본의)만행은 례를 찾아보기 어려운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우리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근대국제법시기부터 현대국제법시기에 이르기까지 《을사5조약》의 불법무효성주장은 통설로 되고있다고 한다(《<을사5조약>연구》 조선대학교, 2002년, 30페지, 80페지, 118~119페지). 1935년의 《하바드보고서》에서 《을사5조약》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그 근거로서 조약체결을 위해 《일본전권공사가 일본군대를 동원하여 ...대한제국 황제와 대신들에게 가한 강압》을 든것 그리고 1963년의 제15차 유엔국제법위원회에 제출된 《월더크의 보고》도 역시 《을사5조약》조인을 《강박이나 위협을 가한 행위》로 규정하고 《절대적무효》라고 지적한것 등은 그 대표적실례로 된다.

이렇듯 《을사5조약》은 《협상》과 《조인》에서 평등의 원리가 적용되지 못하고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공포에 의한 동의가 조장》되여 강제로 날조된것이므로 그것은 불법무효로 된다.

《을사5조약》을 불법무효의 허위문서로 규정하게 되는 기본근거는 다음으로 그것이 합법적조약으로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갖추지 못하였다는데 있다.

알려진바와 같이 이 《조약》은 협상안의 제출과 심의절차에서 국제, 국내법의 요구를 심히 어기였으며 조약으로 성립되는데 필수적인 《형식적적법성》을 갖추지 못하였다. 《을사5조약》의 이 허점은 물론 형식상의 요건불비에서 초래된것이지만 그것은 강제성의 필연적산물로서 역시 불법무효를 규정하는 다른 주요한 요인으로 된다.

우선 이 《조약》은 조인에 이르기까지의 절차를 심히 위반하였다.

《대한국국제》제9조에 의하면 사신파견과 선전포고, 강화 및 그밖의 제반 조약체결의 권한은 황제에게 있으며(《고종실록》 권39 광무3년 8월 17일) 1905년 당시 조약체결절차는 황제와 조약의 재가, 비준에 앞서 반드시 외부, 의정부와 중추원의 자문에 의거하기로 되여있었다. 또한 조약체결의 구체적절차는 조약을 체결하려는 나라의 공사가 먼저 조약안을 외부에 제출하며 외부에서는 그것을 정부에 제출하고 정부에서는 참정, 찬정 및 각부 대신 등이 토론한 후 표결로 자부를 결정하고 그 결과를 서면으로 정리한 후 의정과 주임대신이 서명하여 임금에게 상주한다. 황제는 표결에 관계없이 뜻에 맞지 않으면 다시 토론하도록 칙교를 내리며(《고종실록》 권44 광무8년 3월 4일) 동의, 재가하면 어압하여 어새를 누르며 관보에 반포한다. 그러나 1905년 10월 24일부터 군국의 중요사항에 관해서는 의정부에서 중추원의 협의를 거친 후 상주하기로 되여있었다(《고종실록》 권39 광무3년 8월 25일, 권46 광무9년 10월 24일).

이 제도는 일제가 《조약》을 강요하기 이전에 이미 조선은 조약체결에 관한 정연한 국내법을 확립해놓고있었으며 모든 조약은 의정부의 승인과 중추원의 동의, 최종적으로는 황제의 재가, 비준을 거쳐야 체결될수 있다는것이 법제화되여있었음을 말해준다. 때문에 고종은 11월 15일 조약조인을 강요하는 이또에게 국가의 이 제도를 명백히 설명해주었고 정부대신들도 16일 하야시공사에게 조약체결은 반드시 이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것을 루차 설명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자들은 《귀국은 군주전제국가이기때문에 황제의 승인이면 된다》고 강박해나섰으며 17일에는 전권대표의 위임장제시도 조약문에 대한 대신들의 의견청취도 없이 독단적으로 찬성으로 가결되였다고 선포하고 조인을 강요하였다.

그때에는 아직 조약문이 정부에 회부되지도 않아 대신들은 《들은바 소문에 따라 자기 소견을 말했을뿐》이였으며 《회의》라는것도 정부회의나 협상회의가 아니라 심문, 판결장이였다. 때문에 《을사5적》으로 탄핵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마저도 그 모임은 《정식회의도 아니였고 그때의 구두변론이란 지식교환에 불과했으며 후에 증거로 삼을 표결도 날인도 없고 수석과 주임이 모두 완강히 거부한 비정식회의에서 체약하고 교환한다는것은 원래 론할수도 없는 일》(《고종실록》 권46 광무9년 11월 25일)이라고 규탄하였다.

그러면 이또나 하야시는 우리 나라의 이 법제를 몰라서 조약체결절차를 뛰여넘으려고 했던것이겠는가? 아니다. 그들도 분명 자기 나라의 국내법과 비슷한 우리 나라의 《국제》, 조약체결에 관한 법제를 알고있었다. 하지만 그대로 하면 대신들과 중추원 성원들, 온 민족의 일치한 반대에 부딪칠것이고 따라서 조약조인은 불가능하게 된다는것을 알고있었기때문에 전제군주제에 빙자하여 황제의 재가만을 강요하였던것이라고 볼수 있다.

이또가 국내법에 따라야 한다는 고종에게 그것은 《인민을 선동하고 일본의 제안에 반항할것을 기도》한것이라고 하면서 그런 절차로 하여 일이 늦어지는것은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협박한 사실이 그들의 음흉한 속심, 절차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교활한 목적을 그대로 드러내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학자들은 오늘 당시의 이또의 간교한 구실을 그대로 되뇌이면서 전제군주제였던 대한제국에서는 의정부와 중추원이 자문기관에 불과했고 따라서 그런 번다한 절차는 불필요하였으며 또 이른바 《략식조약》에서는 그런 형식적절차가 없이도 성립된다는 주장을 하고있다. 그러면서 국내법과 국제조약체결과는 관계없다는 터무니없는 말도 하고있다.
 

※운노, 사까모또를 비롯한 일본의 《합법론》자들의 견해는 《<한국병합>관련자료집》(《세까이》 <일한대화>)과 《<을사5조약>의 연구》에 수록된 론문의 자료에 의거하였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실제상 우리 나라 중세 전제군주제의 특성에 대한 몰인식을 보여줄뿐이다. 물론 군주는 행정, 사법, 립법의 모든 권한을 독점한 최고통치자이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 봉건사회의 군주제는 절대주의적이라 하기보다 일정한 상대성을 띤 전제제도였다. 대신들과 간관들이 어느때든지 국왕의 과실과 비행, 정치적실책에 대하여 론의하거나 반박할수 있었고 국왕들은 거의 례외없이 중대한 문제는 대신들에게 묻고 결론을 주었으며 《비시》(批示)라고 하여 대신들이 소여문제에 대한 시비를 론의하게 하고 그 의견에 따라 다시 결심하기도 하였으며 조(詔), 제(制) 등 형식의 명령을 내려도 대신들이 완고히 반대하며 상소를 계속하면 하는수없이 자기 명령을 철회하고 그들의 주장에 따를 때도 흔히 있었다. 지어 같은 문제(관리임면 포함)를 두고 10여차나 집요하게 상소하여 결국 왕이 굴복하는 경우도 드문히 있었다.

의정부도 한때 《6조직계제도》에 의해 특히는 16세기초 비변사가 설치되면서 순수 국왕의 자문기관의 역할을 한 때가 있었지만 대원군집권시기에 비변사가 페설되면서 다시금 최고중앙행정기관으로 되여 광무년대의 근대개혁과 함께 칙령의 제정 및 페지, 개정, 국가의 예산과 결산, 칙임관의 임면, 국제조약 등에 대하여 합의하고 표결결과를 상주하여 성지를 받았다.

중추원은 근대서방의 의회제도와 비슷한 《민의를 대표》하는 기관이였지만 최종결정권이 황제에게 있었으며 자기 결의를 황제에게 상주할 권한만 갖고있었다.

따라서 대한제국에서 황제의 절대적권리는 일정한 제한을 받았으며 황제는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생활과 정사처리에서 잘못을 피하고 이른바 《적자》를 다스리는 《천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여 전제권의 안전과 강화를 담보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일본학자들이 조약체결에서 필수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황제의 재가를 받으면 유효하다는 주장은 《을사5조약》의 강제성을 무마시키고 비법을 적법으로 둔갑시키기 위한 잔꾀에 불과하며 따라서 《략식조약》에 대하여 운운하는것도 실은 강제성에 기인한 《조약》의 형식적요건불비를 합리화하기 위한 억지주장일 따름이다.

《략식조약》의 주장자들은 조선과 일본의 국내법에서는 전권위임장과 비준서를 의무화하였지만 조약의 유효와 무효성을 결정하는것은 국내법이 아니라 국제법이라고 하면서 《관습국제법》에서는 대사(공사)와 외상에게는 전권위임장과 비준을 의무화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당사자사이의 합의로써 결정》하였으므로 《을사5조약》은 이런 의미에서 《략식조약》으로서 《형식적적법성》을 가진다고 말하고있다.
 

※《세까이》 1999년 3월호와 2000년 6월호에서 리태진교수는 이 주장의 부당성을 비판하면서 조선정부가 외국과 체결한 56건의 조약, 협정가운데 전권위임장과 비준서교부조항이 없는것이 20건인데 그중 18건이 일본이 체약당사국이였다는것, 일본과의 조약도 《강화도조약》으로부터 1880년대의 《한성조약》까지의 6건은 모두 형식적요건을 갖추었으나 청일전쟁이후의 협정, 조약들은 모두 《략식조약》인 협약형식을 취하고있는 사실을 밝혔다.
 

일반적으로 국가주권에 관한 조약에서는 형식적요건을 갖출것을 필수적요구로 하고있다는것은 상식이며 이때문에 조선정부를 고종으로부터 대신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국제법의 요구에 맞는 국내법의 절차대로 하고 합법적형식을 갖출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무력을 배경으로 한 강권발동으로 이 정당한 요구를 일축해버리고 자유의사에 의한 합의도 없이 직접 조인할것을 강박하였으니 여기에 《략식조약》에서 필수적이라고 하는 《당사자간의 합의》라는것은 있을수도 없었다. 또한 조선측에서도 전권대사가 임명되지 않았으며 때문에 박제순도 전권대사로서가 아니라 외부대신의 자격으로 《서명》하였다.

청일전쟁과 로일전쟁에서 이겼고 《가쯔라-타프트협정》과 제2차 영일동맹에 의해 미, 영제국주의자들로부터 조선에 대한 《지도, 감리, 보호의 권리》를 인정받은 일본제국주의자들로서는 무력으로 강박하면 되지 번다한 형식적절차라는것은 시간랑비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던것이다. 청일전쟁이후의 조약, 협정들이 《략식》으로 된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략식》이 비법으로 된다고 보게 되는 근거도 바로 그것이 강제의 산물이라는데 있다.

공정한 립장에서 보아 국권의 여탈문제를 다룬 조약에 전권위임장도 없이 정식 회의도 아닌데서 강짜에 의해 일방적으로 성립이 선포된것을 어찌 《당사자간의 합의》라고 할수 있으며 이렇게 조작된것을 어찌 《합법적인 조약》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하기에 일본의 량심적인 학자 아라이 싱이찌는 《당시의 국제법학자의 조약형식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에 비추어 <을사조약>의 <형식적적법성>의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조약내용의 중대성과 형식의 간략성과의 차이는 당시의 국제법에 비추어보아도 중대한 결함이라고 지적하였다(《계간 전쟁책임연구》 12, 1996년 여름호, 《<을사5조약>연구》 18페지).

그의 이 주장은 《을사5조약》의 형식적불법성을 합리화하려는 《략식조약》론자들의 급소를 찌른 비판이라고 할수 있다.

《을사5조약》의 형식상의 요건불비에서 치명적인것은 《조인》이 강도적이였고 황제의 재가, 화압, 국새날인이 없는것이다.

일본의 《합법론》자들은 이또의 폭행을 비호하면서 조인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형식이 어떻게 되였건 관계없이 고종이 재가한것이기때문에 《을사5조약》은 합법적이라고 우기고있다.

그러나 력사적사실은 운노와 사까모또 등이 말하는것처럼 조약이 자원적으로 이루어졌거나 고종이 조약을 승인비준한것이 아니였음을 확증해주고있다.

우선 《조인》할 때 쓰인 외부인장이 고종이나 외부대신의 명령에 의해 합법적으로 가져온것이 아니라 훔쳐온것이였으며 외부의 날인도 자원적의사에 의한것이 아니였다. 이에 대하여 권중현은 《다음날(18일) 새벽 벽두에 외부도장이 어디에선지 알수 없이 와서 끝내는 기명, 날인하기에 이르렀다》고 하였지만 정교는 《대한계년사》에서 미국인 외부고문 스티븐슨이 밖에서 헌병의 호위밑에 기다리고있는 일본공사관 서기관 고꾸보쇼따로에게 넘겨주었다고 하였으며 《챠이나가제따》(1905. 11. 23)는 헌병대를 파견하여 외교관보 누마노가 빼앗아온 관인을 18일 1시 30분에 전권대사 하야시가 찍었다고 밝혔다. 이밖에 통역 마에마가 헌병을 데리고가서 가져왔다는 등 여러설이 있지만 그것이 어떻든 외부인장을 일본인들이 강제로 훔쳐온것만은 확실하며 권중현이 찍어서 말하지 못한 외부도장이 어데서 어떻게 왔고 날인자가 누구인가 하는 리면사의 진실 일단을 밝힌것이라고 할수 있다.

최근에 우리의 한 연구사는 《외부대신 박제순》이라고 쓴 서명필적이 조약원본 원문의 필적과 꼭같고 조약문에 서명한 필적과 박제순의 원필체가 다르다는것을 확인하여 조약문의 서명도 위조라고 증명하고있다(《<을사5조약>연구》 조선대학교, 2002년, 59~62페지). 이 사실은 일본인들이 떠드는 《조인》도 그들이 일반적으로 만들어낸 위조라는것을 말해준다.

가장 엄중한것은 국가대표자인 고종이 조인을 반대하였고 조약문에 《황제의 위임을 받아》라는 문구도 황제의 서명도 어새날인도 없다는것이다. 이것은 《을사5조약》의 불법무효성을 립증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의 하나이다.

일본의 어용학자들은 한결같이 조약은 고종이 재가한것이기때문에 그의 서명, 어새가 없이도 《략식조약》으로서는 성립된다고 말하고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고종이 조약조인을 재가했다는 자료는 단 한건도 찾아볼수 없을뿐아니라 오히려 반대했다는 자료들만 발굴되고있음을 알수 있다. 그들도 이것을 모르는바 아닐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파렴치하게도 고종이 대신들에게 일본공사와 협상하도록 허가한 사실과 외부도장이 찍힌 사실을 가지고 고종이 《조약조인을 승인》했으며 따라서 《략식조약》에서는 비준도 어새날인도 필요없는것이라고 우기고있다.

그러나 앞에서 본바와 같이 고종이 윤허한것은 협상이였지 조인은 아니였다. 그것은 《을사5적》들이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을 보아도 알수 있다.

이 상소문은 고종에게 올리는것이기때문에 일본이 저들의 범죄를 약화시킬수는 있어도 고종이 안한 말을 했다고 할수 없는것이며 《조인해도 좋다》는 성지가 있었다면 그것을 빼놓을수 없는것이다.
 

※5적의 이 상소문은 사전에 하야시공사의 검열과 승인을 받은것이였다. 하야시는 12월 22일 가쯔라외상에게 보낸 전보에서 상소문이 《5대신의 립장으로부터 다소 수식한것은 면할수 없지만 대체로 요령있는것》이고 《신협약이 우리들의 압박에 의해서 나온것이 아니라는것을 일반에게 자세히 알리는데 리익이 있다고 인정》하였기때문에 승인하였다고 보고하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5, 415문서, 439~440페지).
 

그 상소문에 의하면 이또는 대신들을 심문하는 과정에 3번이나 궁내부대신 리재극을 고종에게 보내여 황제의 조인재가를 강요하였는데 첫번째의 회답은 《짐은 이미 각 대신들에게 협상하여 타당하게 하라고 허가》하였으니 《좋도록 협상하라》는것이였고 두번째도 이또가 이제는 가결되였으니 속히 조인하도록 외부대신에게 성지를 내려달라고 간청한데 대해서는 《협상인데 번거롭게 굴지 말라》고 대답하고 법부대신에게 조약안가운데서 첨삭할것이 있으면 교섭하여 바로잡으라는 지시를 주었다. 그러나 이또가 대신들의 의견을 참작하여 적당히 가필하여 다시 올린데 대해서는 《좋다》던지 《조인하라》던지 하는 고종의 어명은 없고 《다시 보고를 올려 끝내 조인하기에 이르렀다》고만 씌여있다(《대한매일신보》 1907. 1. 16). 없는 성지를 마음대로 지어 써넣을수 없었을것이니 고종은 필경 침묵으로 항거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그 침묵은 일제의 강요에 못이겨 협상이나 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다른 렬강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한 궁여지책일수 있다. 사실 전날에 고종은 협상, 조인을 며칠간 연기하자고 이또에게 제기한 일이 있었고 이후에는 실제로 각국 공사관들에게 원조를 요청하였던것이다.

비록 고종은 국력의 쇠퇴와 자신의 나약성으로 하여 《사신왕래》와 같은 독립국의 형식이나마 유지해보려고 외교에서의 렬강들에 의한 5년기한의 《다국적보호국화》로써 당면한 일본의 독점적지배위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였지만(《대한매일신보》1907. 1. 16) 우의 기록들은 고종이 《을사5조약》 조인만은 끝까지 거부하고 재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해주고있다. 하기에 고종은 《조인》했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에 반대립장을 공식표명하였으며(《을사5조약》의 페기와 5적의 처벌을 요구하는 수십건의 상소문에서 모두 《페하께서 윤허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고있다) 각지의 애국적인 관리들에게 《밀조》, 《밀칙》을 보내여 의병투쟁을 벌릴것을 명령하였고 각국 수반들에게 비밀친서를 보내여 자기의 반대의사를 표명하면서 일본의 국권강탈행위를 막아줄것을 호소하였다.

1906년 6월 22일부로 9개국 수반들에게 보낸 친서에서 그가 《짐은 정부에 조언을 허가한바 없다》고 단언하였을뿐아니라 헐버트와 민영찬을 시켜 미국에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독립원조를 청원한것은 고종이 조인을 재가하지 않았음을 국제사회에 공식 표명한것이라고 볼수 있다. 또한 1907년 7월에 친일내각의 총리대신 리완용이 고종에게 《을사5조약》의 원본에 국새를 날인할것을 상주한 사실은 황제가 《조인을 허가한바 없다》고 공언한 말의 진실을 확증해주며 동시에 일본인들이 고종의 수정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조인이 승인되였다고 강변한것이 완전한 거짓이고 그들도 2년이 지난 때에 와서 조약의 근본허점을 인정하고 그것을 미봉하기 위해 책동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을사5조약》이 처음부터 《략식조약》으로 발족했다는 주장이 전혀 무근거한 억지라는것을 증명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지에 빠진 일본의 《합법론자》들은 렬강들이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한데 대하여 《이의가 없었다》는것을 조약의 《적법성》의 다른 한 근거로 들고있다.

그러나 이것도 력사의 진실을 우롱하는 희극에 불과하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원래 《을사5조약》은 미일공모결탁의 산물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미제는 19세기말부터 우리 나라에 침략의 마수를 뻗쳐왔으며 1905년에는 가쯔라와 타프트의 비밀협약을 체결하고 일제의 조선강점을 도와주었습니다.》(《김일성전집》 2권, 15페지)

미제는 일찍부터 일제가 조선을 병탄하여야 한다고 권고했고 《가쯔라-타프트협정》에서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식민지화를 인정해주는 대가로 미국이 일본에 의한 조선의 지배를 시인했으며 따라서 《조약》내용과 《보호국》화방법에 대하여 루즈벨트대통령과 루트국무장관은 완전한 동의를 주었었다. 지어 자기를 《친일파》로 자처하는 루즈벨트는 1905년 9월 포츠머스강화회의에서 하바드대학 동창생인 일본의 가네꼬특사에게 《로씨야의 령토나 배상금을 요구하지 말고 한국을 점유하라》고 권고하면서 《조만간 일본이 한국을 그밑에 두는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하였다(《코리아평론》 264호, <타프트-가쯔라각서의 재검토>).

미제의 이 권고는 《포츠머스강화조약》(1905. 9. 5)에 구현되여 로씨야는 《한국》에서의 일본의 《정치, 군사 및 경제상의 특별한 리익》을 인정하고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 보호 및 감리의 조치》를 취하는데 간섭하지 않을것을 약속한다고 규정하였으며 영국에 대해서는 제2차 영일동맹(1905. 8. 12)을 맺고 조약문에 영국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도, 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승인한다는것을 규정하도록 권고하였다(《조선관계조약집》 <1876~1945> 325, 322페지).

이렇게 되여 일제는 미제의 도움으로 《한국의 보호국화》에서 장애로 되는 《외국의 장애를 초래하지 않도록 수단을 강구》할데 대한 정부의 《한국보호권확립의 건》에 관한 결정(1905. 4. 8)을 실행하고 무단적으로 《을사5조약》을 조작하는 길로 나아갈수 있었다. 이런 사정으로 하여 비법적인 《을사5조약》이 날치기로 조작되고 일본이 렬강들의 반대없이 순조롭게 조선의 국권을 탈취할수 있었으며 고종이 한성(서울)주재 각국대사관과 렬강들에 원조를 청원하였을 때 모두 쓴 오이보듯 랭대하였던것이다.

이 모든 사실은 《을사5조약》이 《협상》으로부터 《조인》에 이르기까지 국가 및 국가대표에 대한 군사적위협과 강제로 일관되였고 《조인》되였다는 조약문에는 정식 명칭도 국가수반의 화압과 어새의 흔적도 없으며 비준교환도 없는 완전히 불법무효의 허위문서라는것을 말해준다.

이런 《조약》은 국제법에서 불법무효로 선언된다. 당시 울분에 찬 관료, 유생, 지사들이 저마다 상소문을 올려 《을사5조약》을 《페하의 윤허와 참정대신의 인자도 없는》 《허약》(虛約), 국가《대전》에 금석으로 규정된 조약체결절차와 중추원의 협의도 거치지 않은 《위약》(僞約), 《강제, 침탈, 협박》으로 돌연히 만들어진 《륵약》(勒約), 《한장의 빈 종이장》이라고 부르면서 (《고종실록》 권46 광무9년 11월 26일, 11월 29일 최익현, 조병식, 박제황 등의 상소) 그 불법무효성을 토로한것은 지극히 지당한 소행이였다.
 

2. 일제의 100여년 죄악과 과거청산, 우리 민족의 과제
 

《을사5조약》은 명백히 불법무효의 《위약》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군사강권의 발동으로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만든 결과를 빚어냈으며 우리 민족앞에 저지른 100여년 죄악의 뿌리로 되였다.

일제는 이 《조약》을 방패로 군사적《통감》통치를 실시하였고 국권을 강탈하여 조선인민을 노예화하였으며 나라를 군사적강점에 기초한 식민지로 만들었다.

내정권의 《합법적》박탈과 국토병탄을 노린 《정미7조약》이나 《한일합병조약》은 실제상 《을사5조약》의 부산물로서 비법적인 통감이 외교권이 없는 친일괴뢰내각과 조인한 불법무효의것이였다.

《을사5조약》의 날조로 시작된 일제의 식민지통치는 비법이였으며 범죄에 찬 《무단통치》였다.

불법강제는 범죄를 낳기 마련이다.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일반 식민지종주국과는 달리 식민지조선을 상품시장, 원료공급지로 전환시켰을뿐아니라 대륙침략의 병참기지, 군사교두보로 전변시키고 자국의 자본주의《시초축적》의 원천지로 삼아 군사봉건적제국주의본성 그대로 중세기적방법과 파쑈적폭거로 우리 인민을 억압, 착취하고 략탈하였다.

일제의 식민지통치에서 가장 악착스러운 범죄는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의 반일애국세력을 탄압하고 평화적주민들에 대한 집단적살인만행을 감행한것이다.

조선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 군사교두보로 간주한 일제에게 있어서 필요한것은 삼천리국토와 무진장한 자원, 값싼 로동력과 총알받이로 될 《노예》대중이였다. 따라서 자주적인 민족의식을 가진 조선민족은 식민지통치의 장애로, 존재가치가 없는 소멸대상으로 간주되였다. 이로부터 식민주의자들이 들고나온 첫 구호는 데라우찌《총독》이 말한바대로 《조선사람은 일본법률에 복종하던가 아니면 죽어야 한다》는것이였다.

반일의병과 독립군들에 대한 살륙은 그 한 실례로 된다.

1908년을 전후하여 1만여명의 대오를 가지고 싸운 13도창의대는 의병을 일으킨 목적이 《일본인의 손발이 되여 우리 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불충불의의 역신들을 ...살륙》하며 《신용할수 있는 인물》들로 정부를 조직하여 《일본인을 비롯한 모든 외국인을 내쫓고 우리 나라의 독립을 보전》하려는데 있다고 밝혔다(《조선폭도토벌지》 조선주차군사령부, 1913년, 37~38페지).

의병들의 이 투쟁목적은 일본의 식민지법과 적대되는것이므로 일제는 의병은 물론 그와 관련이 있거나 지원하였다고 보는 평화적주민은 모두 살해하였다. 일본의 조선주차군사령부가 편찬한 《조선폭도토벌지》부표에 의하면 1907-1910년기간 의병들의 출동 연인원수는 14만 1 603명인데 그중 《살륙》된 수는 1만 7 688명이고 부상은 3 800명, 포로는 1 933명이였다.

일반전투에서는 부상자를 최소 전사자의 3배이상으로 계산하는것이 상례인데 우의 수자는 그와 반대로 살해된 의병수가 부상자의 4. 6배에 달한다. 이것은 일본군경들이 부상자와 포로 등을 가르지 않고 마구 살해하였다는것을 말해준다.

하기에 1907년 가을에 취재차로 강원도일대의 교전장들과 의병근거지들을 돌아본 《런던데일리메일》의 특파원 멕켄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간곳마다 들은 이야기는 많은 전투에서 일본군은 부상자와 투항자의 모두를 조직적으로 살륙했음을 보여주고있다. ...일본군은 가는 곳마다 불태우는것과 함께 반란군을 도와준 의혹이 있는자를 다수 살상하고있다.》(《조선의 비극》 헤이본사, 1972년, 207페지)

우리 민족의 애국력량에 대한 일제의 대중적학살만행은 항일무장투쟁시기에 더욱 악착스럽게 감행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발악적인 《토벌작전》과 혁명적인민들에 대한 파쑈적학살만행은 주체성과 민족성을 꿋꿋이 이어가는 민족자주정신의 원천을 봉쇄하려는 책동이며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빼앗으라》는 이른바 《삼광정책》은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절정을 이룬것으로서 그 목적을 우리 인민들로부터 민족의 넋, 자주의식을 거세하고 일본법에 순종하는 노예로 만들려는데 있었다.

이로부터 대중적학살만행은 3. 1인민봉기를 비롯한 적수공권의 시위군중에 대해서도 가차없이 감행되였다. 일제의 무차별적인 대중적학살만행에 의하여 피살된 희생자수가 중일전쟁이후 일제의 패망에 이르는 기간에만도 100여만명을 헤아린다는 이 사실은 실로 일본이 감행한 천추를 두고도 씻을수 없는 대인륜범죄이며 우리 민족이 일본에 품고있는 구천에 사무친 원한이다.

일제의 식민지통치에서 가장 악착스러운 범죄는 다음으로 《징병》과 《징용》, 일본군《위안부》를 비롯하여 840만여명에 이르는 조선사람들을 강제로 련행하여 저들의 대륙침략과 아시아제패를 위한 병력보충과 군수품생산 및 조달, 진지구축 등 침략전쟁수행을 위한 도구로 리용한것이다.

특히 20만명의 우리의 애젋은 녀성들을 강제징발하여 일본군의 성노예로 만든 《위안부》제도는 일본정부와 군부가 계획적으로 감행한 조직적인 범죄로서 그 규모에 있어서나 잔인성에 있어서 인류력사에 전례없는 특대형의 인륜도덕유린범죄이며 조선민족의 말살을 기도한 대범죄였다.

일제의 식민지통치에서 가장 악착스러운 범죄는 다음으로 조선의 자연부원을 마구 략탈하여간것이다.

금, 은, 동, 아연, 철 등 갖가지 금속류들과 광석들, 쌀, 콩 등의 량곡 그리고 소, 말을 비롯한 집짐승들 지어 놋으로 만들어진 대야, 바리는 물론 수저와 녀성들의 비녀, 반지까지 앗아간 제국주의는 일본밖에 없을것이다.

이렇듯 가혹하게 략탈해간 자연부원들은 후진국인 일본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한 《시초축적》의 원천으로, 침략전쟁의 전략물자자원으로, 군수독점자본가들의 재부를 늘여준 맡천으로 되였다. 일본의 이른바 《고도장성》과 경제대국으로의 성장도 실은 조선의 인적, 물적자원에 대한 무제한한 강탈에 뿌리를 박고있다고 말할수 있다.

일제의 식민지통치에서 가장 악착스러운 범죄는 다음으로 우리 민족을 거세말살하려는 민족동화정책이다.

일제는 벌써 강점초기에 조선민족의 넋을 말살하기 위하여 단군관계서적을 포함한 수십만권의 책을 몰수하여 불살라버리였는데 이 《분서사건》은 력사에 알려진 진시황의 《분서갱유》나 히틀러의 분서란동을 초월한 희세의 만행이였다.

《문화통치》를 표방한 사이또 마꼬도 《총독》이 조선청년들에 대한 교육시책을 말하면서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력사전통에 대하여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의 혼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자기 선조들을 경시하고 멸시》하게 하며 조선청년들로 하여금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할것이니 그때에 일본의 서적과 일본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것이다》라고 훈시한바 있다.

상또의 이 말은 조선민족말살의 근본방도를 제시한것이라고 할수 있는데 조선에서의 일제의 교육은 바로 이 방향에서 진행되였다.

《황국신민화》정책은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최고형태였다고 볼수 있으며 그 목적은 조선사람들의 넋을 거세하고 야마또정신을 체현한 《일본인화》하여 저들에게 순종하는 영원한 노예로 부려먹으려는데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황국신민화운동》이 7. 7사변에 대처하는 《응급적, 일시적운동이 아니고 조선통치방침의 항구적실천에 있다》고 한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로부터 일제는 우리 민족에게 《동조동근》, 《내선일체》사상을 주입하고 《천조대신숭배》와 《황국신민서사》랑독을 강요했으며 지어는 1940넌대에 들어서면서 조선말사용을 금지하고 왜말사용과 《창씨개명》을 강박하였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식과 자부심, 우수한 민족문화와 미풍량속을 말살함으로써 조선민족자체를 영구히 없애버리고 《황국신민》으로 만들려는 최후발악이였으며 엄중한 민족말살범죄였다.

이렇듯 일제는 《을사5조약》날조후 40여년에 걸치는 식민지통치시기 우리 민족앞에 천추를 두고 씻을수 없는 큰 죄를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패전후 응당 과거의 죄악사에서 교훈을 찾고 개신의 길로 나갈 대신 또다시 미제를 등에 업고 깨여진 옛꿈을 실현하려고 온갖 책동을 다하여왔으며 또 하고있다.

일본은 38°선을 그어 우리 조국을 분렬시킨 공범자이며 맥아더사령부의 지시밑에 관동군과 대본영의 작전장교들로 《KATO》와 《력사연구협회》 등 비밀기관을 조직하여 극동침략전쟁계획(《A. B. C》)과 《북벌전쟁계획》을 작성했을뿐아니라(《인물왕래 1964년 9호, 64~67페지》) 전쟁시기에는 전령토를 미군의 군사기지, 공급기지, 수리기지로 맡기고 전쟁에 참가했으며 직접 륙해공군을 전선에 파견하여 무고한 조선인민을 살해하고 삼천리강토를 페허로 만든 범죄에 가담하였다. 심지어 《731부대》의 세균전범자들까지 조선전선에 보내여 미군의 세균전만행에 적극 가담하였다(《현대조선의 력사》 1953년, 217페지, 《조선연구》 1966년 6호, 50페지).

조선전쟁이후 오늘에 이르는 기간 력대 일본정부는 모두가 미국의 극동정책의 하수인이 되여 분렬주의정책과 반공화국적대시정책에 적극 가담하고있을뿐아니라 군국화를 다그치며 군사대국으로 행세하면서 해외팽창의 길을 닦고있다.

일본반동들은 우리 인민들이 전후복구건설을 다그치고있을 때 《38°선은 ...일본의 운명선이기도 하다》고 하면서 《38°선을 압록강밖에 물리치지 않으면 선배에 대하여 면목이 없다. 이것이 일본외교의 임무이다》라고 화약내 풍기는 망설을 늘어놓았는가 하면 주체61(1972)년 7월 4일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이 천명되여 온 민족의 통일열망이 그 어느때보다 앙양되고있을 때에는 《조선의 통일의 비극이 분단의 비극보다 크기때문에 일본은 분단을 원한다》[《로동신문》 주체94(2005). 7. 29, <제4차 남조선-일본회담 일본측 수석대표 사와다와 남조선주재 일본대사 가네야마의 발언>]고 하면서 미국의 대조선분렬정책에 적극 호응해나섰다.

오늘 일본반동들의 대조선적대시정책은 매우 엄중한 단계에 이르러 《북조선핵위협》, 《미싸일위협》에 대하여 떠들면서 선제공격도 불사하겠다고 우리를 위협하고있다.

그러나 세계의 량심은 전쟁의 위협이 북에서 오고있다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력사를 돌이켜보아도 끊임없는 왜구의 침입과 《임진왜란》의 참화는 일본이 빚어낸것이였고 갑오년의 농민군참살과 청일, 로일전쟁의 불집을 일으킨 전범자도 일본이였으며 《을사조약》과 《합병조약》을 강요하여 조선의 국권과 국토를 병탄한 침략자도 일본이였다.

그러나 조선민족은 반만년의 오랜 기간 단 한번도 일본을 침략하여 민족적재난을 입힌 일이 없었다. 물론 오늘의 우리 민족은 어제날의 조선민족이 아니라 침략자에게는 무자비한 보복타격을 안길 준비가 되여있는 강대한 민족이지만 남을 침략할 의사란 조금도 없는 평화우호적인 인민이다.

일본의 정객들도 실은 이 력사와 현실을 모르는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국주의자들이 도적이 도리여 매를 드는 격으로 《북조선의 위협》에 대하여 떠들면서 최신형의 공격용무기, 무장들을 갖추며 임의의 시각에 핵무기를 생산할수 있게 전쟁준비를 다그치고있는 속심은 바로 재침의 칼을 벼리여 깨여진 《대동아공영권》의 옛꿈을 실현하려는데 있다.

또한 독도가 512년에 신라에 귀속된 이래 줄곧 조선의 령토에 속하여 고려, 리조에 전승되여왔고 조선의 독도령유권을 맨먼저 공식승인한 나라가 바로 다름아닌 저들의 막부와 명치정부였다는것을 그들도 모르는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일본당국자들이 필요한 때마다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하면서 독도령유권문제를 거들고나서는 속심도 역시 군국주의적령토팽창야망을 실현하려는데 있다.

일본의 군국화는 오늘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통일과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엄중한 위협으로 되고있다.

이러한 실정에서 우리 민족앞에 나서는 당면과제는 조선에 대한 죄많은 식민지통치를 미화분식하면서 성근한 사죄와 보상을 회피하는 일본당국자들의 파렴치한 책동을 규탄하며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투쟁을 힘있게 벌려나가는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성근하게 사죄하는것은 치욕스러운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되는것만큼 그들의 성근한 사죄와 과거청산은 군국화를 막는 중요한 방도의 하나로 된다. 또한 날로 우심해지고있는 일본의 우경화, 군국주의화에 경각성있게 대응해나가는것은 오랜 력사적기간 일본의 침략을 거듭 받아온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각별히 긴요한 과제로 나선다.

우리는 일본의 우익세력들이 침략과 략탈, 피로 얼룩진 과거의 력사를 외곡하고 미화분식하는 책동에 즉시적인 반격을 가하며 그것이 단순한 력사외곡이 아니라 일본인민들속에 군국주의사상의식과 국수주의감정을 고취하기 위한 계획적인 책동이며 전범자들의 뒤를 따라 또다시 해외침략의 길에 나서겠다는 재침의지의 발현임을 예리하게 폭로단죄하여야 할것이다.

《우리 민족끼리》의 리념으로 민족공조을 강화해나가는것은 전민족의 대단결과 통일에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며 일본의 군국화와 재침책동을 분쇄하는 가장 위력한 방도이다.

6. 15통일시대의 약동하는 현실은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를 높이 들고 북과 남, 해외의 련대를 강화하면 그 어떤 외세의 간섭도 물리칠수 있고 외세의 간섭만 없다면 조선반도의 항구한 평화는 담보되는것이며 통일의 날도 그만큼 앞당길수 있다는것을 확증해주고있다.

일본군국주의는 우리 민족과 한 하늘을 두고 같이 살수 없는 백년숙적으로서 우리 민족은 일본의 100여년 죄악을 총결산할 의지에 차있다.

력사학자, 법률학자들을 비롯한 우리 지식인들은 민족앞에 지닌 책임과 의무를 자각하고 구조약의 《적법성》과 《합법적식민지》론을 들고나와 과거의 죄악과 피해보상을 회피하는 일본당국자들의 궤변을 단호히 분쇄하여야 하며 그를 위한 학술활동을 새로운 높이에서 더욱 박력있게 벌려나가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