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일제의 100년 죄악사를 고발한다」중에서
 


 

                                             (교수, 박사 리영환)                 

우리 인민은 미, 일제국주의의 공모결탁에 의한 100여년간의 조선침략사를 다시금 더듬어보면서 조선인민에게 식민지노예의 운명을 강요한 침략적인 《을사5조약》이 전적으로 범죄적인 미일공모의 산물이라는데 대하여 더욱 절감하게 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을 강도적인 방법으로 강점한 다음 우리 나라를 저들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전변시켰습니니다.》(《김일성저작집》 37권, 286페지)

이 글에서는 《을사5조약》이 그의 날조를 위한 준비와 날조과정 그리고 날조후 미, 일제국주의의 침략책동을 통하여 철두철미 범죄적인 미일공모의 산물이라는것을 밝히려고 한다.

《을사5조약》이 범죄적인 미일공모의 산물이라는것은 무엇보다도 이 《조약》의 날조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단계에서의 침략책동이 철저히 미, 일제국주의의 공모밑에 감행되였다는것이다.

《을사5조약》과 같은 침략조약을 강요하여 조선을 식민지예속화하기 위한 일제의 책동은 로일전쟁을 계기로 하여 더욱 본격적으로 감행되였다.

조선을 둘러싼 제국주의렬강들의 각축전이 벌어지고있던 19세기말에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조선에서 청나라세력을 몰아낸 일제는 조선의 식민지화에서 또 하나의 암초로 되고있던 짜리로씨야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1904년 2월 로일전쟁을 도발하였다.

청일전쟁과 마찬가지로 로일전쟁도발에로 일제를 적극 부추긴것은 바로 미제였다.

1898년 5월 료동반도강점과 1901년 의화단폭동진압후 만주강점, 1903년 룡암포강점 등 극동지역에 대한 짜리로씨야의 급속한 세력확장은 당시 이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려고 한 미국에 있어서 큰 위협으로 되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에는 짜리로씨야와 전쟁을 할수 있는 능력도 준비도 없었다.

이로부터 미제는 당시 만주지역과 조선에서 짜리로씨야와 대립하고있던 일본을 반짜리로씨야전쟁에로 내몰아 짜리로씨야를 약화시킨 다음 극동지역에서의 저들의 침략적지위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흉계밑에 일제를 짜리로씨야와의 전쟁에로 부추긴 미제는 이미 1902년 1월 30일에 체결된 《영일동맹》에 의해 형성된 영국과 일본의 반짜리로씨야련합에 가담하는것과 함께 짜리로씨야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한 책동을 벌림으로써 일제의 침략전쟁도발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었다.

로일전쟁이 일어나기 한달전인 1904년 1월 미국대통령 루즈벨트는 앞으로 로일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유럽렬강들인 도이췰란드와 프랑스가 짜리로씨야를 지지하면 미국은 일본을 지원하겠다고 경고함으로써 애당초 이 나라들이 짜리로씨야편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못박아놓았다.

루즈벨트의 이러한 행동은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문제를 둘러싸고 있을수 있는 렬강들의 압력을 두려워함이 없이 로일전쟁의 도발을 다그치는데서 힘있는 뒤받침으로 되였다. 이에 대하여 일본인들자신이 루즈벨트의 경고가 《...일본으로 하여금 로씨야이외에 그 어떤 다른 나라를 적으로 삼게 될 근심걱정을 없게 하였다.》(《외교사》 3, 기요자와 기요시, 현대일본문명사, 325페지)고 지적하였다.

미국은 또한 로일전쟁시 조선에서 일본의 군사행동에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기 위한 막후책동도 교활하게 벌리였다. 그것은 일본에 의한 로일전쟁도발의 위험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정세에 대처하여 조선봉건정부가 표시한 중립선언에 대한 미국의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일제는 조선의 모든 자원과 령토를 저들의 침략전쟁수행에 마음대로 리용할 목적으로 1903년 12월 30일 조선과 《공수동맹》과 같은 비밀협약을 맺을데 대한 《방침》을 세우고 경성(서울)주재 일본공사 하야시를 통해 조선봉건정부에 강요하였다. 이에 대처하여 조선봉건정부는 1904년 1월 23일 세계 여러 나라들에 중립을 선포함으로써 일본의 강도적인 협약체결요구를 묵살하려고 하였다. 조선봉건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조선에 비밀협약을 강요하여 조선의 물적자원과 령토를 제마음대로 로일전쟁에 리용하려던 일제의 흉계를 세상에 폭로하는것으로 되였다.

조선봉건정부의 중립선언에 대하여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들은 경성(서울)주재 자국공사를 통하여 리해를 표시해왔으나 미국만은 그에 해답하는것조차 기피함으로써 조선봉건정부의 중립선언에 원칙적으로 반대한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미제의 이러한 태도는 조선봉건정부로 하여금 일본의 강도적요구를 받아들이라는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였다.

일본의 로일전쟁도발에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려는 미제의 범죄적책동은 당시 일본정부안에 《고문》으로 들어앉아있던 미국인들에 의해서도 감행되였다. 그 대표적실례로 1880년이래로 일본 외무성 《고문》으로 있으면서 일제의 조선침략을 계통적으로 도와준 미국인 데니손이 1904년 2월 5일 짜리로씨야에 대한 일본의 국교단절선언시에 로일전쟁도발의 책임을 짜리로씨야에 넘겨씌우는 방향에서 최후통첩문을 써줌으로써 일본의 침략전쟁도발범죄를 감싸주었던 사실을 들수 있다. 데니손의 이러한 책동에 대하여 일본제국주의자들조차 《감개무량》하여 그앞에 머리를 숙이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중앙공론》 소화15년(1940년) 5월호].

이처럼 일제의 침략전쟁도발에 유리한 조건을 지어준 미제의 책동은 마침내 일본으로 하여금 1904년 2월에 조선강점을 목적한 로일전쟁을 도발하게 하였다.

일본의 로일전쟁도발로 하여 조선은 다시금 청일전쟁때와 마찬가지로 일제침략군의 발굽밑에 놓일 엄중한 위기에 처하게 되였다.

미제는 일본을 로일전쟁에로 내몬 이후에 더욱 로골화된 일제의 조선침략정책을 각방으로 도와주었다.

그것은 우선 일제가 로일전쟁을 일으킨 후 조선봉건정부에 강요한 침략적인 《한일의정서》를 적극 지지해준 사실을 통해서 잘 알수 있다.

일제는 로일전쟁을 도발한 후 짜리로씨야를 반대하는 군사행동을 적극 벌리는 한편 조선을 완전히 강점하기 위한 준비로서 1904년 2월 23일 이미전부터 추진시켜온 《한일의정서》체결을 조선봉건정부에 강요하였다. 일제는 《한일의정서》에 《한국황실의 안전강령》이요, 《대한제국의 독립 및 령토보전》이요 하는 등의 기만적인 문구를 써놓고는 《군사상의 필요한 지점을 정황에 따라 차지하고 리용할수 있다》는것과 《두 나라 정부는 호상 상대방의 승인없이 이 협정의 취지에 위반되는 협약을 제3국과 체결할수 없다》는것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조항들에서 조선봉건정부의 자주권을 침해하는 규정들을 박아넣었다.

때문에 일제침략자들자신까지도 저들의 란폭한 침략행위가 조선인민과 세계여론의 강력한 항거에 부딪칠가봐 두려워 조약체결까지의 모든 행동을 비밀리에 하였고 그 발표를 두려워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 미제는 앞장에 서서 일제의 침략책동을 《예상외로 온화한것》이라고 하면서 비호하는것과 함께 일제를 보다 로골적인 침략행위에로 부추기였다(《일본외교문서》 37권, 1책, 일본국제련합회, 1958년, 349페지).

미제는 조선봉건정부의 자주권을 란폭하게 침해한 일제의 침략행위를 적극 추어주는 반면에 엄중한 위험에 처한 나라의 독립보존을 도와줄데 대한 조선봉건정부의 요구에 대해서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조선의 행복을 바란다》는 터무니없는 말로 우롱해나섰다. 일제의 식민지예속화에서 《행복을 바란다》는 미국지배층들의 망발이야말로 언어도단이며 조선인민에 대한 참을수 없는 모독이였다.

일제의 조선침략을 적극 지지해주기 위한 미제의 범죄적책동은 《한일의정서》날조후 더욱 로골적으로 감행되였다.

미제의 지지밑에 《한일의정서》를 강압적으로 날조한 일제는 조선에 침략의 마수를 더욱 깊숙이 뻗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1904년 5월 30일 《원로회의》와 내각회의를 벌려놓고 조선에 대한 《정치 및 군사상에서의 보호의 실권》을 틀어쥐며 경제상에서의 《리권의 발전을 도모할데》 대한 강도적인 《제국의 대한방침》을 결정한데 이어 조선에 일제침략군을 영원히 주둔시키고 군사상 필요한 모든 지역들을 통제하며 외교와 재정을 감독하고 조선군대를 해산시키며 철도, 통신기관들을 장악하고 농업, 림업, 광업, 수산업 등 경제의 중요명맥들을 틀어쥘것을 제멋대로 규정한 《대한시설강령》이란것을 작성하였다.

일제는 이처럼 강도적인 조선침략안을 세워놓았지만 로일전쟁을 한창 진행하고있던 조건에서 그것을 당장 실현할수 없었다.

이로부터 일제는 우선 조선에서 《고문》정치를 실시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서 1904년 8월 21일에 20년간 일본 외무성에 있으면서 저들의 해외침략정책의 수행을 도와준 미국인 스티븐슨을 조선봉건정부의 외교《고문》으로 들여앉히도록 내정한데 이어 8월 22일에는 조선봉건정부에 《외국인용빙협정》(《한일협정서》)체결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이 《협정》에서 조선봉건정부가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을 초빙할것과 외국과의 조약체결 및 외국인에 대한 특권의 허영 등에 대하여서는 미리 일본정부와 협의할것 등 조선봉건정부에 일방적인 굴욕적의무만을 규정하였다.

스티븐슨이 외교《고문》으로 된것과 관련하여 미국의 어용신문들은 《미국인 스티븐슨이 한국 외교고문으로 임명된것은 경축할 일》이라고 하면서 《항상 일본정부의 뜻을 잘 알》고 《일본정부의 방침에 어긋》나지 않게 일할데 대하여 언급하였다.

일제가 스티븐슨을 조선봉건정부의 외교《고문》으로 들여앉히기로 한것은 그를 통하여 조선의 외교정책을 저들의 조선침략정책수행에 복종시키기 위한것이였다.

일제는 스티븐슨을 조선봉건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앉힘과 함께 일본 대장성에서 국장으로 있던 메가다를 재정《고문》으로 앉히고 미제와 공모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고문》정치를 실시하면서 메가다에게는 조선봉건정부의 재정을 감독할뿐아니라 재정에 관한 정부회의에 참가하여 의견을 줄수 있는 권리까지 가지게 하였으며 조선봉건정부에서 토의결정되는 모든 재정문제는 반드시 베가다의 동의를 받아야만 되게 하였다. 또한 스티븐슨에게는 조선봉건정부가 다른 나라와 맺을 모든 조약에 대하여 심의하고 초안을 만들 권리와 조선봉건정부에서 만드는 모든 외교문서는 그의 사전동의를 받아야 하며 외교문제에서 국왕에게 직접 상주할수 있는 권한들을 부여하였고 메가다와 스티븐슨의 이 모든 권한들을 조선봉건정부가 마음대로 변경시키지 못하도록 만들어놓았다.

그리하여 사실상 조선의 재정, 외교권은 미, 일침략자들의 손에 들어가 일제의 조선침략정책에 유리하게 좌우지되게 되였다.

미제의 지지밑에 일제에 의해 강요된 《고문》정치로 하여 우리 나라는 독립국가로서의 실권을 거의다 잃게 되였다.

《을사5조약》이 범죄적인 미일공모의 산물이라는것은 다음으로 그의 날조가 필리핀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지배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강점을 서로 인정하고 담보한 미일간의 《가쯔라-타프트협정》에 의해서 실현되였다는것이다.

미제는 저들의 적극적인 지원밑에 로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가 확실해짐에 따라 극동지역에서 짜리로씨야세력이 약화되게 된데 대하여서는 《만족》해하면서도 일본에 의해서 자기의 리익이 침해당하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도 하게 되였다. 그것은 로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듭하게 된 일본이 자기가 업고있던 미국의 리익을 어느정도 무시하고라도 극동지역 특히 만주에서 자기의 침략적지위를 최대로 확대해보려는 야욕을 은근히 나타내기 시작한것과 관련되여있었다.

미국대통령 루즈벨트가 1905년 1월 14일 미국주재 일본공사 다까히라에게 로일강화조건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내놓으면서 로일전쟁후 만주는 중국에 반환하여 렬강들이 보장하는 중립지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것을 제기한것과 관련하여 일본 외상 고무라는 1월 22일 다까히라에게 보낸 4개 조항의 훈령에서 만주의 행정은 《개혁》과 《선정》의 보장을 조건부로 하여 청나라정부가 실시하는것이 국제적중립화보다 좋다고 함으로써 루즈벨트의 주장을 수정해버리였다(《일미외교사》 가지마 모리 노스께, 75~77페지). 고무라의 훈령에는 《개혁》과 《선정》의 보장을 구실로 만주에서 세력권을 독점하려는 일본의 속심이 깔려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 미국지배층은 만주를 포함한 극동지역에서의 저들의 리권에 대하여 점차 위구를 느끼게 되였으며 특히 필리핀까지도 일본의 침해를 당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더구나 일본이 벌써 미국의 필리핀강점전에 필리핀에 대한 침략야망을 품고 많은 간첩들을 들여보내여 필리핀의 정치, 경제적상태를 조사한 사실들을 놓고볼 때 더욱 그러하였다. 물론 이때 일제는 조선침략을 당면한 문제로 내세웠기때문에 필리핀에 침략의 검은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일본이 영원히 필리핀에 대한 침략야망을 버린것으로 단정할수는 없었다. 미국인 자신이 《루즈벨트는 극동에서의 로씨야의 횡포를 구축하려고 념원하고있었지만 일본이 승리하고보니 곧 필리핀이 위협을 받고있다는것을 느끼게 될것이다.》(《미국극동정책사》 <일문> 에이. 더블유. 그리스월드, 113페지)고 쓴것은 당시 미국지배층의 위구심을 그대로 표현한것이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루즈벨트는 1905년 여름에 들어서면서부터 조선에 대한 침략야망을 깊이 숨겨두고 당면하게 만주에서 짜리로씨야세력을 몰아내고 그곳을 미국의 상품시장으로 만드는것과 함께 필리핀의 안전을 담보하는 두가지 과업을 동시에 해결할 목적밑에 일제와의 새로운 범죄적공모결탁을 하는데로 나아가게 되였다.

극동지역에서 자기의 세력범위의 《안전》을 기하는것은 이 시기 일본에서도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든 후 있을수 있는 렬강들의 간섭과 관련되여있었다.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든다는것은 곧 식민지로 전락시킨다는것을 의미하는것으로서 그렇게 되면 조선봉건정부가 외국과 맺은 조약들이 자동적으로 유명무실한것으로 될뿐아니라 조선에 있던 각국 공사관들도 철수해야 하므로 이러한 경우 일본과 다른 렬강들과의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담보할수 없는것이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일제는 짜리로씨야와의 강화담판을 서두르면서 미국을 비롯한 유미렬강들로부터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드는것을 정식 승인한다는 《담보》를 받으려고 미쳐날뛰였다.

일제의 이와 같은 욕망은 바로 이 시기에 자기의 독점적식민지인 필리핀의 《안전》을 우려하면서 일본으로부터 그에 대한 《안전》담보를 받으려고 한 미제의 리해관계와 일치하였다.

그리하여 미, 일제국주의자들은 로일전쟁이 한창 벌어지고있던 시기에 또다시 조선인민을 반대하는 범죄적인 공모행위를 감행하는데로 나아가게 되였다. 바로 그러한 공모행위가 일본수상 가쯔라와 미륙군장관 타프트사이에 체결된 비밀협약이였다.

1905년 7월 하순 미국의 식민지인 필리핀《시찰》도중의 《일본방문》형식으로 일본에 기여든 타프트는 7월 29일 가쯔라와의 비밀회담을 진행한 뒤끝에 미국은 일본의 조선강점과 지배권을 인정하며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지배에 침해하지 않는다는것을 서로 확약하는 강도적인 《가쯔라-타프트협정》을 각서교환의 형식으로 비밀리에 체결하였다.

1905년 7월 31일 루즈벨트는 타프트에게 《당신이 가쯔라와 나눈 모든 이야기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정확하며 단신의 말은 곧 내가 이야기하고저 하는 취지이라는것을 가쯔라에게 전하라》라는 전보를 보냄으로써 강도적인 《가쯔라-타프트협정》을 미국대통령의 명의로 정식 승인한다는것을 알리였다.

일제는 《가쯔라-타프트협정》을 맺은데 뒤이어 8월 12일에는 제2차 《영일동맹조약》을 체결하였고 9월 5일에는 짜리로씨야와 《포츠머스강화조약》을 맺음으로써 유미렬강들의 간섭을 두려워함이 없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수 있는 국제적환경을 조성하였다.

《가쯔라-타프트협정》은 일제의 조선강점에 대한 미제의 지지를 법적으로 약속해준 동시에 일본으로부터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지배를 담보받은 강도적인 흥정이였다.

다른 나라의 령토와 민족을 제멋대로 나누어 지배할것을 막후에서 비밀리에 흥정한 강도적인 《가쯔라-타프트협정》은 미, 일제국주의자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파렴치한 침략자이며 날강도라는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을사5조약》이 범죄적인 미일공모의 산물이라는것은 다음으로 일제에 대한 《을사5조약》의 날조와 그를 통한 조선의 강점과 식민지화를 미제가 적극 지지해주었다는것이다.

미국과 영국, 짜리로씨야 등으로부터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수 있는 국제적담보를 마련한 일제는 로일전쟁이 끝나는 즉시 조선에 대한 《보호국》화안을 작성하고 그 실천단계에 들어갔으며 이것은 처음부터 미제의 전적인 지지와 부추김밑에 감행되였다.

《포츠머스강화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 외상 고무라는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드는것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알아보기 위하여 9월 8일 미국무장관 루트를 찾아가 저들의 침략계획에 대한 의견을 말해줄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루트는 《...이것은 로씨야의 침략적책동을 막기 위하여 당연히 나타나야 할 결과라고 인정하며 또한 한국의 안녕 및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도 최상책으로 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일본이 이것을 단행하여도 미국의 여론은 조금도 이에 반대하는 일이 없을것이다.》(《일본외교문서》 38권, 1책, 일본국제련합회, 1958년, 521페지)라고 하면서 적극 지지해주었다.

일제의 조선《보호국》화안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는 루트에 한한것이 아니였다. 루트를 만난 다음날 고무라가 루즈벨트를 찾아가 의향을 물었을 때 그 역시 《...자기로서는 평화조약(로일강화조약)의 결과 이렇게 되는것은 예견하던바이며 또한 장래의 화근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이밖에 다른 대책이 없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그런 대책을 취하는데 반대하지 않는다는데 대하여 나를 충분히 믿어도 좋다.》고 하면서 시급히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라고 추동하였다.

미제의 추동에 힘을 얻은 고무라가 조선에 대한 《보호권》실시는 조약의 형식에 의하는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만일 조선이 조약체결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일본이 할수없이 일방적으로 《보호권》설정을 선언하게 되겠는데 이때에도 리해해달라고 요청해나서자 루즈벨트는 그것도 무조건 지지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미제국주의의 절대적인 지지와 추동은 일제로 하여금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한 책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하였다.

일제는 1905년 10월 27일 내각회의에서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침략안을 세우고 그 실행을 위한 엄무를 추밀원 의장 이또와 경성(서울)주재 일본공사 하야시, 조선주둔 일제침략군 사령관 하세가와 등에게 주었다.

일제는 11월 2일 하야시를 조선에 먼저 들여보내여 하세가와와 함께 《보호조약》을 조선봉건정부에 강요하기 위한 만단의 준비를 갖추게 한 다음 11월 9일 이또를 《칙사》로서 경성(서울)에 파견하였다. 이또는 경성(서울)에 기여들기 바쁘게 11월 10일 고종을 찾아와 왜왕의 서신을 전하고 위협하기 시작하였으며 15일에는 하세가와가 거느린 일제침략군으로써 왕궁일대를 비롯한 경성(서울)시내에 삼엄한 군사적폭압망을 늘여놓고 고종황제에게 《보호조약》체결을 강요해나섰다.

이또일당은 고종황제와 참정대신 한규설을 비롯한 일부 대신들의 완강한 반대로 조약체결이 어렵게 되자 11월 17일 이미 훔쳐낸 조선봉건정부의 외부도장을 저들이 찍고 조약의 체결을 날조하는 력사에 있어본적이 없는 날강도적행위를 감행하였다.

일명 《한일협상조약》이라고도 하는 《을사5조약》에서 일제는 조선의 대외관계 및 외무사무를 일본이 《감리, 지휘》한다는것을 규정함으로써 조선봉건정부의 외교권을 완전히 빼앗을뿐아니라 내정전반을 감독, 지배할수 있는 《권리》를 빼앗아내였다.

강도적인 《을사5조약》은 미제의 적극적인 지지와 고무추동밑에 일제가 조선인민에게 식민지노예의 운명을 강요한 침략적인 조약이였다.

미제는 범죄적인 《을사5조약》의 강압적인 날조를 도와줌으로써 일제의 날강도적인 침략행위와 함께 천추를 두고 용서를 받을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다.

조선인민에 대한 미제의 범죄행위는 여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미제는 《을사5조약》이 날조된 후 망국적인 이 조약을 반대하여 일떠선 조선인민을 우롱하면서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적극 비호두둔해주었다.

고종은 1882년 《조미조약》 제1조에 규정된 미제의 기만적인 《주선》에 기대를 걸고 1905년 11월 26일 당시 미국에 있던 미국인 헐버트를 통하여 《총칼의 위협과 강요로 최근 한일 두 나라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보호조약은 무효임을 선언한다》는것을 미국정부에 전하도록 하는것과 함께 프랑스주재 조선공사 민영찬으로 하여금 같은 취지의 내용을 미국정부에 알리도록 하였다.

헐버트가 고종황제의 부탁을 전하기 위해 루즈벨트와 루트를 찾아갔을 때 그들은 만나주지조차 않았으며 《원조》요청도 거절하였다. 간악한 미제는 조선황제의 특사는 만나주지조차 않으면서 도리여 같은날 이 사실은 미국주재 일본공사 다까리하에게 알려주면서 이러한 사태에서 일본정부가 조선문제를 잘 처리할데 대한 권고까지 주었다.

12월 11일 민영찬이 루트를 찾아가 《을사5조약》에 고종황제가 도장을 찍지 않았다는것을 이야기하면서 미국의 《원조》를 바란다는 고종의 부탁을 전하였을 때에도 루트는 그 자리에서 답변을 주지 않고 질질 끌어오다가 열흘이 지난 12월 21일에야 조선황제의 요청을 전적으로 들어줄수 없다는것을 민영찬에게 알리였다. 이때 루트는 자기의 회답에서 《...한국정부가 1904년 2월 23일조약과 8월 22일조약》에서 《...일본에 많은 특권들을 주었고 자신을 일본정부의 완전한 보호밑에 둔것만큼》 이제 와서 《...조미조약의 조항들을 적용한다는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미국외교문서  1905년, 629~630페지, 《일본외교문서》 38권, 1책, 일본국제련합회, 1958년, 673~675페지》)이라고 뇌까렸다.

미제의 이러한 행동은 《조미조약》 제1조에서 체약일방이 다른 나라의 억압적인 행동을 받게 되였을 때 체약상대방에 통지하면 상대방은 《원만한 타결을 가져오도록 주선을 다함으로써 우의를 표시할것》이라고 규정한데 대한 파렴치한 배신행위였다.

미제는 조선봉건정부를 우롱하는 한편 조선주재 미국공사관을 솔선 철수함으로써 일제의 《보호조약》실현을 적극 도와주었다.

침략적인 《을사5조약》이 날조된 후 11월 24일 미국무장관 루트는 경성(서울)주재 미국공사 모르간과 일본주재 미국대리공사 윌슨에게 조선의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갔으니 경성(서울)주재 미국공사관을 철수할것과 그가 수행하던 기능을 일본주재 미국공사가 넘겨받을데 대한 지시를 주었다.

미제의 이러한 행위에 《감격》한 일본 외상 고무라는 11월 27일 미국주재 일본공사에게 보낸 전문에서 미국정부가 취한 조치에 《깊은 사의》를 표할것을 지시하였으며 일본수상 가쯔라도 11월 30일 《경성주재외교단을 즉시로 철수하고 조선에 대한 외교사업을 일본을 통하여 하도록 누구보다도 먼저 조치를 취한》 미국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면서 미국의 《호의》에 감사하다는 뜻을 일본주재 미국공사관에 전하였다(《미국외교문서》 1905년, 654, 615페지).

미제의 적극적인 지지밑에 일제가 강도적인 《을사5조약》을 날조함으로써 우리 나라는 실제상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되였다.

일제의 강도적인 《을사5조약》날조와 그에 기초한 《통감》통치가 우리 인민뿐아니라 일부 량심적인 외국인들의 항의와 규탄을 불러일으켰을 때에도 미제는 《통감》통치를 극구 찬양해주면서 조선인민에게 식민지노예의 운명을 감수할것을 설교하였다. 그것은 《헤그밀사사건》을 구실로 1907년 7월 18일 일제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24일에는 《정미7조약》을 강요하여 조선의 내정권마저 완전히 빼앗았을 때 흑백을 전도하여 《헤그밀사사건》을 조선국왕의 《정치적자살행위》라고 비난하면서 일제의 《통감》통치를 《가장 큰 칭찬을 받을만한》 정치, 《가장 만족스러운》 정치로 비호해준 하나의 사실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조선의 보호 및 병합》 우방협회, 1956년, 144페지).

심지어 조선봉건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있던 스티븐슨이 1908년 3월 21일 미국 쌘프랜씨스코에서 가진 기자회견이라는데서 입에 담을수 없는 말로 조선인민을 모독하는 한편 일제의 《보호통치》로 《...한국에 유익한것이 많아졌기때문에 두 나라 사람들사이의 교의가 점점 친밀해져가고있다》느니, 《일본이 한국민을 통치하는 방법은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하는것과 같다》느니, 조선각지의 백성들은 조선정부의 《학정을 면하였기때문에 일본사람을 환영하고있다》느니 하는 등의 갖은 망발을 늘어놓았다. 스티븐슨은 자기의 망발에 분격하여 항의하려온 재미교포들에게 《...리완용과 같은 충신이 있고 이또와 같은 통감이 있는것은 한국을 위해 큰 행복이며 또한 동양의 큰 행복이다. 내 생각컨대 황제가 덕을 잃은것이 심하고 완고한 무리들이 백성의 재산을 강도질하며 백성이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다》(《대한매일신보》 1908. 4. 17)고 다시금 망발을 늘어놓았다.

나라와 민족을 일제에게 팔아먹은 매국노 리완용이나 일제의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또와 같은자들이 있는것이 조선과 동양의 《가장 큰 행복》이며 조선인민은 《우매》하기때문에 《독립할 자격이 없다》는 스티븐슨의 망발은 우리 인민의 치솟은 분격을 자아내게 하였으며 1908년 3월 23일 마침내 애국청년 장인환, 전명운에 의한 스티븐슨처단의 의거를 단행케 하였다.

일본의 《통감》통치를 극구 찬양하면서 조선인민의 반일독립운동을 모독, 우롱하여온 미제는 1907년 9월에 또다시 타프트를 《친선의 사절》로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수상 사이온지와 밀담을 벌려놓고 조선문제를 최종적으로 《처리》할데 대한 합의를 보도록 하였다. 《사이온지-타프트회담》에서 이루어진 합의는 《가쯔라-타프트협정》의 재판으로서 조선을 필리핀과 같은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제의 조선강점정책에 대한 미제의 지지를 재확인한것이였다.

저들의 조선강점정책을 최종적으로 확인해준 미제의 범죄행위에서 적극적인 고무추동을 받은 일제는 조선을 완전히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강제합병을 서두르게 되였다.

1909년 3월 고무라는 외무성 정무국장 구다찌에게 시급히 조선강제합병초안을 만들게 하고 그에 대한 가쯔라와 이또의 승인을 받아놓았다. 그후 이해 7월 6일 일본내각회의에서 이것을 통과시킨데 이어 왜왕의 비준을 받아 정식 안건으로 확정하였다.

조선강제합병안을 완성한 일제는 친일주구단체인 《일진회》로 하여금 1909년 12월 4일 이른바 《한일합병성명서》를 내게 한데 이어 1910년 8월 22일 리완용친일괴뢰정권에 《한일합병조약》을 강제로 내리먹이였다. 일제는 조선인민의 반항이 두려워 그것을 한주일동안이나 비밀에 붙이고있다가 8월 29일에야 발표하였다.

일제의 합병조약에 대해서도 미제는 조선인민을 모독하면서 일제에 대한 조선강제합병을 적극 옹호해나섰다.

8월 24일 미국주재 일본대사 우끼다가 미국무장관 대리를 만나 그에게 《한일합병》관계서류를 넘겨주었을 때 그자는 만족한 기색으로 다른 의견이 없다고 하면서 《합병》이 마치도 정당한 조치인것처럼 행동하였다. 지어 이전 미국대통령 루즈벨트는 후날 조선은 영원히 독립국가로 되돌아갈수 없다는 모독적인 언사를 써가면서 《...나의 견해에 의한다면 일본은 무엇보다도 조선을 독립적주권국가로 더는 되돌아가게 할수 없으리라는것을 주저없이 단언한다.》고 떠벌이였다(《조선의 보호 및 병합》 우방협회, 1956년, 473페지).

미제의 적극적인 지지와 후원밑에 강요된 조선강제합병은 《명치유신》이후 40여년간 조선침략을 부르짖으면서 침략과 략탈, 전쟁에로 줄달음쳐온 일제의 강도성을 집중적으로 보여준 죄악의 사건인 동시에 피를 즐기는 일본군국주의침략세력을 계통적으로 조선침략에로 부추기고 지지해준 미, 일제국주의의 범죄적인 공모결탁의 산물이였다.

이상의 모든 력사적사실들은 일제에 의한 《을사5조약》의 날조와 그에 기초한 조선의 식민지화의 전과정은 세상에 생겨난 첫날부터 총칼과 회유기만으로 약소국가인민들의 독립을 짓밟아온 미제국주의의 부추김과 음흉한 침략수법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는 미일공모결탁의 범죄적인 과정이였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