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3)
 
제국주의세계체제론과 식민지반자본주의론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우파의 반론은 정당한가?


 
우리식 두 단계 변혁론에서 말하는 사회성격을 개변시키는 변혁이라는 개념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식민지적 예속성을 제거하는 사회변혁이라는 뜻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을 실현하는 사회변혁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론이 거세다.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이라는 개념 자체가 허구라는 반론이다. 이 반론은 제국주의가 지배하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고 식민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우파이론에서 제기된 것이다. 이 반론에 따르면,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은 부정된다.

 
우리식 두 단계 변혁론이 사회변혁운동에 정합(整合)한 이론적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을 부정하는 우파이론에 정면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이라는 개념 자체가 허구라는 반론을 제기한 우파이론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제국주의가 종언을 고하면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이 해방되었기 때문에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이라는 개념이 더 이상 사회변혁과업으로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에 관한 변혁담론은 폐기해야 할 낡은 담론이라는 것이다.

 

 
친미정권의 자발적 편입, 친미예속정권의 재예속화

 
그러나 우파의 반론은 세계 정치사에 대한 인식에서 오류를 범한 것이다. 아래와 같은 논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대로, 제2차 세계대전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식민지 쟁탈전에 돌입한 제국주의강대국들 사이의 모순이 격화되다가 폭발한 세계적 범위의 전면전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제국주의강대국들의 전면전만 벌어졌다고 보는 인식은 일면적이라는 점이다. 제국주의강대국들의 전면전과 더불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들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민족해방혁명을 전개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30년대에서 1945년에 이르는 세계사의 격동기에 인류는 제국주의강대국들의 전쟁과 3개 대륙의 민족해방혁명을 동시에 경험하였다. 

 
3개 대륙 식민지들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전개한 민족해방혁명은 그 때까지 별로 주목 받지 못했던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과업을 전세계 사회변혁운동의 전면에 제기하였다. 사회변혁운동은 반자본주의 계급해방 과업만 중시해오던 유럽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들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수행하는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과업까지 포괄하는 세계적 관점을 세우게 된 것이다.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혁명은 사회변혁운동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킨 세계사적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세계사의 주변부에서 민족주의운동의 지위밖에 갖지 못했던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혁명은 1930년대에 이르러 진보적 인류가 수행하는 사회변혁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제국주의강대국들이 지배해온 세계질서는 전면 재편되었다. 제국주의강대국들 가운데서 전승 주도권을 장악한 미국이 세계질서 재편을 주도하였음은 물론이다. 미국이 주도한 세계질서의 재편으로 출현한 것이 제국주의세계체제다. 미국이 주도한 제국주의세계체제의 성립을 현대 제국주의의 출현이라는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전후 서유럽과 일본이 이 미증유의 체제에 자발적으로 편입하였을 뿐아니라, 제국주의강대국들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이 그 체제에 재예속화됨으로써 세계적 범위의 거대한 체제가 성립되었다. 미국이 장악한 제국주의세계체제의 특징은 무력침공과 강제분할에 의한 예속이 아니라, 서유럽과 일본에 등장한 친미정권의 자발적 편입, 그리고 3개 대륙에 등장한 친미예속정권의 재예속화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국주의 강대국들 사이의 전면전이 끝나고 식민지들이 해방되었으나, 미국이 장악한 제국주의세계체제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피흘려 쟁취한 민족해방혁명의 승리를 탈취하였고, 친미예속정권을 내세워 추진하는 재예속화의 길로 3개 대륙을 끌고 갔다.

 
제국주의세계체제의 성립과 친미예속정권의 재예속화는 당연히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격렬한 저항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세계사적 시각에서 4.3항쟁과 6.25전쟁을 재조명하면, 한반도는 제국주의세계체제의 성립과 친미예속정권의 재예속화 추진을 가장 먼저,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여 싸운 전후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지로 떠오른다. 

 

 
식민지는 사라져도 식민지적 사회성격은 여전하다

 
어떤 나라가 친미예속정권에 의해 제국주의세계체제에 재예속되었다고 말할 때, 예속이라는 개념을 좀 더 자세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제국주의세계체제가 출현한 이후, 친미예속정권이 등장한 나라들에서 정치적 독립은 껍데기 뿐이고 실제로는 간섭과 지배에 결박되었으며, 경제와 산업은 금융, 기술, 무역부문에서 삼중으로 수탈당했으며, 군사는 연합군, 동맹군, 다국적군이라는 각종 허울 아래서 지휘와 추종의 종속관계에 묶었으며, 사상문화는 미국식으로 동화되었다. 이처럼 예속은 말 그대로 총체적이다. 예속은 사회성격을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미상불, 제국주의는 식민지와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개념이다. 만일 식민지가 없으면, 제국주의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 반대도 진실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제국주의세계체제에서 식민지가 존재하는 것일까?  1945년 8월 이전에는 개별적 제국주의강대국들과 그에 상응하는 개별적 식민지들이 존재하였는데, 1945년 8월 이후에는 제국주의세계체제는 존재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식민지세계체제라는 개념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이 세계적 범위에서 상호협력하는 어떤 체제를 성립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점령군이 강점하고 총독이 직접 통치하는 식민지는 오늘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존재하는 것은 식민지적 사회성격을 지닌 예속국들이다. 3개 대륙의 식민지들에서 총독이나 점령군이 사라졌다고 해서, 식민지적 사회성격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식민지라는 개념과 식민지적 사회성격이라는 개념은 다르다. 식민지적 사회성격은 제국주의세계체제에서 여전히, 변함없이 존재한다. 그러한 사회성격을 예속성이라 한다. 예속성의 존재방식이 식민지에서 예속국으로 전환된 것 뿐이다. 

 
미국이 장악한 제국주의세계체제에서는 정치적 간섭과 지배, 경제적 수탈과 갈취, 군사적 지휘와 통제, 사상문화적 파괴와 동화가 계속 확대되고 심화되기 때문에 식민지적 예속성이 사라지거나 감소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개별적인 제국주의-식민지 관계가 난립했던 시기에는 식민지이냐 독립국이냐 하는 판별기준이 적용되었지만, 제국주의세계체제가 성립된 이후에는 예속성이냐 자주성이냐 하는 새로운 판별기준이 적용되는 것이다.

 

 
제국주의세계체제론과 식민지반자본주의론

 
식민지적 사회성격을 지닌 나라들은 미국이 장악한 제국주의세계체제에 예속되었기 때문에, 미국식 자본주의의 사상, 제도, 문화를 이식받는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적 사회성격을 지닌 나라에 이식된 자본주의가 발전한 것이다.

 
식민지적 사회성격을 지닌 나라에 이식된 자본주의가 어떻게 발전하였는지에 대해 두 가지 논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식민지적 사회성격을 지닌 나라에 이식된 자본주의의 발전수준을 결정한 요인은, 제국주의세계체제에 예속된 강도다. 예속강도가 높은 나라에서는 자본주의가 발전하였고, 예속강도가 낮은 나라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발전하였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예속국들에 이식된 자본주의에서 발전수준 격차가 생겨난 까닭이 거기에 있다. 우파이론이 종래 써오던 개발도상국이라는 개념에 더하여 이른바 중진국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쓰는 것은, 3개 대륙 예속국들에 이식된 자본주의의 발전수준 차이를 가늠하는 분류법이다.

 
1945년 8월 이전 식민지에서는 제국주의강대국들의 식민주의 정책에 의해 자본주의적 발전이 억제되고 종래의 봉건주의가 온존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1945년 8월 이후 예속국에서는 친미예속정권의 재예속화 정책에 의해 봉건주의가 폐절되고 미국에서 이식된 자본주의가 발전하였다.

 
둘째, 식민지적 사회성격을 지닌 나라에 이식된 자본주의는 제국주의세계체제에 예속된 상태에서 발전하기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예속심화는 좌파이론에서 말하는 '독점강화'에 결부되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 발전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예속국에 이식된 자본주의가 비정상적으로 발전하는 원인은, 명백하게도, 식민지적 사회성격에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예속국에서 식민지적 예속성은 자본주의 발전을 규제하는 것이다. 예속국에 이식된 자본주의는 변태적, 기형적으로 발전한 자본주의다.

 
예속국에 이식된 자본주의가 식민지적 사회성격에 의해 변태적, 기형적으로 발전하였음을 해명한 이론이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이다. 전(全)자본주의에 대비되는 반(半)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자본주의가 억제되어 절반밖에 발전하지 못했다는 발전수준을 표시한 개념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비정상적 발전에서 나타나는 변태성과 기형성을 표시한 개념이다.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은 식민지와 자본주의를 기계적으로 합성한 이론이 아니다. 그 이론은 식민지적 사회성격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예속국에 이식된 자본주의를 어떻게 규제하였는지를 해명한다. 식민지적 사회성격에 의해 규제되어 변태적, 기형적으로 발전한 자본주의사회를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라 한다.

 
중요한 것은, 사회체제론과 사회성격론을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회체제론은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규정한 사회계급적 예속성을 해명하고, 사회성격론은 제국주의세계체제와 예속국의 관계를 규정한 식민지적 예속성을 해명한다.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은 자생적, 정상적으로 발전한 자본주의의 체제구성을 해명한 사회체제론이 아니라, 미국에서 이식되어 비정상적으로 발전한 자본주의의 식민지적 예속성을 해명한 사회성격론이다.

 
우리 사회에 이식된 자본주의의 현재 발전수준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당히 높다. 자본주의 발전수준을 보면, 3개 대륙 상위권에 속한다. 그래서 우파이론은 '한강의 기적', '산업화 성공', '압축성장', '중진국 진출' 같은 듣기 좋은 신조어를 만들어내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적 발전수준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런 설명은 미국에서 이식되어 변태적, 기형적으로 발전해온 비정상적 발전경로를 은폐한 수박 겉핥기식 설명이다. 속이 곯은 수박이라 해도 겉은 멀쩡해 보이는 법이다. 내재된 모순이 곯아터질 때까지.

 

 
중요산업 국유화 강령을 전면에 제기한 까닭

 
위에서 거론한 두 가지 논점에 비춰보면, 우리 사회는 제국주의세계체제에 예속된 강도가 가장 높은 사회이며, 따라서 우리 사회에 이식된 자본주의가 가장 변태적, 기형적으로 발전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의 현실을 말해주는 각종 지표, 통계, 정보를 열거할 필요 없이, 이 땅에 이식되어 비정상적으로 발전한 자본주의가 극도의 변태성과 기형성을 드러내고 있음은 너무도 명백하다.

 
두 단계 변혁론에서 말하는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이란, 미국이 장악한 제국주의세계체제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실현한다는 뜻이고, 식민지적 사회성격을 제거하여 자주성을 실현한다는 뜻이고,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의 예속성을 제거하여 자주성을 실현한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에 이식되어 비정상적으로 발전한 자본주의가 가장 심한 변태성과 기형성을 드러내는 곳은 중요산업이다. 두 단계 변혁론이 중요산업 국유화 강령을 전면에 제기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예속국에서 중요산업을 국유화하는 것은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을 실현하는 것이며, 동시에 반자본주의 계급해방을 민주주의변혁의 발전단계에 맞게 실현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논한 내용을 종합하면, 제국주의세계체제론과 식민지반자본주의론, 두 단계 변혁론과 중요산업 국유화론이 하나의 일관된 이론체계로 정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2010년 9월 15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