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도서 『일제의 100년 죄악사를 고발한다』  중에서

일제의 조선인학살만행은 천추를 두고

씻을수 없는 반인륜적범죄

 부교수, 학사 정창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지난날 일본놈들이 조선사람을 어떻게 멸시하였고 야만적으로 학살하였는가를 잘 기억하고있습니다.》(《김일성전집》 30권, 251페지)

일제는 지난날 우리 나라를 무력으로 강점하고 40여년간에 걸쳐 전대미문의 악독한 식민지통치를 실시하면서 우리 인민에게 해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들씌웠다. 지난날 일제가 감행한 죄행가운데서 가장 큰 죄악은 우리 인민을 야수적으로 학살한 반인륜적범죄를 감행한것이다.

일제가 감행한 살인범죄는 그 규모와 잔인성에 있어서 동서고금의 침략사와 전쟁사에서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가장 악독하고 야만적인 인권유린행위이다.

일제의 조선식민지통치력사는 인간살륙으로 이어진 죄악의 력사였다.
 

1. 《통감》통치 및 《무단》통치시기 조선인민을

야수적으로 학살한 반인륜적범죄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다음 식민지통치기구로서 《통감부》를 설치하고 포악한 헌병, 경찰제도를 강화하면서 악독한 《무단통치》를 실시하였다.

식민지통치자로 군림한 초대《통감》 이또는 조선의 내정권, 군통수권을 다 틀어쥐고 1906년 8월 조선주둔군사령관 하세가와와 공모하여 종전의 군사경찰제도를 고등군사경찰제도로 고치고 조선사람들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였다.

이또는 1907년 5월 22일 《한국의 독립은 있을수 없고 한국과 일본은 운명을 같이한다》고 떠벌이면서 우리 인민의 반일투쟁을 탄압하기 위해 미쳐날뛰였다.

일제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1906년 여름부터 1911년까지의 6년동안에 의병투쟁을 탄압하기 위하여 감행한 《토벌》회수는 2 852회에 달하였으며 학살된 의병들의 수는 1만 7 779명, 부상자는 3 706명, 체포된 사람들은 2만 1 398명에 달하였다.

일제는 의병《토벌》감행때 《토벌》지역을 초토화하고 일반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야수적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에 출판된 일본의 문헌들과 자료들에 《토벌에 의하여 폭도들이 막대한 희생을 당하였을뿐아니라 재앙이 그들의 처자들에까지 미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폭도들에게 가담, 동정하는자들이 발각되는 경우 그 책임을 해당 부락전체가 지는것으로 선포하고 부락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하거나 마을을 몽땅 불살라버리는 단호한 조치를 실행하였다》는 내용들이 수많이 기록되여있는 사실이 웅변적으로 말해주고있다.

일제는 1910년 8월 《한일합병조약》날조후 전국을 군사폭압망으로 뒤덮고 우리 인민에 대한 야수적학살만행을 더욱 미친듯이 감행하였다.

일제는 전시편제의 륙군 2개 사단과 많은 해군무력을 중요한 전략적거점들에 증강배치하는 한편 《지문법》, 《범죄즉결령》, 《조선형사령》, 《조선태형령》, 《조선감옥령》, 《경찰범처벌규칙》 등 살인악법들을 조작하였으며 헌병 및 경찰기관수를 1 624개소로 늘이고 7 693명의 헌병 및 보조원, 5 598명의 경찰, 3 000명의 정탐군들을 증강배치하는 조치를 취하여 조선인민의 초보적인 인권과 자유의 마지막 흔적까지 짓밟고 죄없는 우리 인민들을 체포, 투옥, 고문, 학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1910년 식민지통치체계를 보다 강화하기 위하여 《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개편하고 악독한 《무단통치》를 보다 악랄하게 감행하는 길에 들어섰다.

초대《총독》 데라우찌는 《조선사람은 일본법률에 복종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고 공공연히 폭언하면서 조선사람들에 대한 학살을 더욱 강화하였다.

일제는 1910년 11월 황해도, 함경남도, 경상도일대의 반일의병들에 대한 《토벌》만행을 벌려 수많은 애국적인민들을 학살하였으며 같은해 12월에는 이른바 《데라우찌암살미수사건》이라는것을 조작하고 600여명에 달하는 애국적지식인들과 인민들을 검거하고 105명을 투옥하였다.

일제가 《즉결령》, 《강제집행권》을 내휘두르면서 애국적인민을 검거한 수는 해마다 늘어나 1912년에는 5만 2 000여건, 1918년에는 14만 2 000건에 달하였다(《조선인강제련행의 기록》 미라이사, 1965년, 268페지).

조선인민에 대한 일제의 야수적탄압과 학살만행은 3. 1인민봉기때에 더욱 악랄하게 감행되였다.

1919년 3월 1일 우리 나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반대하는 전민족적인 반일인민봉기가 일어났다.

3. 1인민봉기를 계기로 조선인민의 반일독립운동이 급속히 확대되자 이에 극도로 당황한 내각 수상 하라는 조선《총독》에게 봉기자들을 가차없이 탄압하라는 비밀지시를 주었다(《현대사자료》 25, 조선1, 미스즈서방, 1966년, 105페지).

일제는 평화적시위군중탄압에 라남 19사단과 룡산 20사단, 헌병, 경찰 등을 총동원하고도 모자라 본토에서 6개 대대의 병력과 400명의 헌병을 더 끌어들였을뿐아니라 조선에 기여들어와있던 전체 일본인들에게 각종 흉기를 쥐여주어 조선사람학살에 내몰았다.

일제는 대동군의 수만명의 반일시위군중이 보통문밖에 이르자 기마대와 소방대를 출동시켜 총으로 쏘고 칼로 찔러죽이였으며 종로거리에서 시위를 하던 평양성안의 인민들에게 총탄을 마구 퍼부어 삽시에 종로거리를 피로 물들게 하였다.

일제침략군은 경상남도 밀양에서 1만 3 500여명의 시위군중에게 총포사격을 퍼부어 150여명을 살해하였으며 수많은 시위자들을 계곡에 몰아넣고 집단학살하였다(《조선독립운동지혈사》 1, 헤이본사, 1976년, 218~219페지).

일제살인귀들은 시위군중탄압에만 미쳐날뛴것이 아니라 《일본사람의 집 한채가 불타면 조선사람의 집 전체를 불태워버리며 일본인 한명이 죽으면 될수록 많은 조선사람을 죽여야 한다》(《현대사자료》 25, 조선1, 미스즈서방, 1966년, 34페지)고 공공연히 떠벌이면서 도처에서 살인, 방화, 략탈만행을 감행하였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제암리학살사건》은 그 실례의 하나이다. 1919년 4월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 기여든 일제야수들은 300여명의 주민들을 강제로 교회당에 모이게 한 다음 건물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으며 밖으로부터 맹사격을 가하였다. 이때 한 녀인이 어린애 하나만이라도 살려보려고 창밖으로 내보내자 놈들은 그 아이마저 총창으로 찔러 불붙는 교회당안에 집어던졌으며 불길속에서 숨져가는 부모처자와 친척들을 구원하러 달려온 사람들까지 모조리 학살하는 귀축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

포악한 일제야수들은 수원군 15개 부락에서만도 317호의 집을 불태우고 1 000여명을 참혹하게 학살하였으며 평안북도 정주에서는 모여든 2만 5 000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발포하여 500여명을 사살하였다.

3. 1인민봉기때에 일제의 총칼에 맞아 쓰러진 조선사람들의 수는 무려 10여만명이나 되였다.

일본의 한 학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헌병주재소는 그 시기 조선전역에 98개소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례외없이 발포하여 조선인을 살해하였다. 그밖에 헌병파출소라는것이 877개소, 헌병통감소(후에 파출소로 개칭)가 43개소 있었는데 여기에서도 시위운동에 대하여 거의 례외없이 발포하고있었다. 포화에 의하여 쓰러진 조선인들은 적어도 10만명은 될것이다.》(《일본통치하의 조선》 이와나미서점, 96페지)

또한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자기 상전에게 제출한 《소요사건에 관한 민정첩보 제9호(3월 1일-3월 10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여있다.

《체포 남자 5만명이상, 녀자 1 000명

사망자 남자 1만명이상, 녀자 300명

부상자 남자 5만명이상, 녀자 1 000명

어린이사망 300명이상》(《현대사자료》 25, 조선1, 미스즈서방, 1966년, 404페지)

일제는 조선사람들을 학살하는데서 중세기적인 잔인성과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3월 1일 경성(서울)에서 나어린 한 녀학생이 기발을 들고 시위대렬에 끼워 행진하는것을 본 피에 주린 일제살인귀들은 기발을 든 그의 오른팔을 칼로 내리쳐잘랐으며 그대로 왼손에 다시 기발을 추켜들고 앞으로 계속 나가자 왼팔을 또 칼로 내리쳤다. 두팔이 잘리워 피가 콸콸 땅바닥에 쏟아져 흘렀지만 나어린 녀학생이 《조선독립 만세!》를 목청껏 부르면서 계속 전진하자 그의 몸을 칼로 마구 찔러죽이는 야수적만행을 감행하였다(《조선독립운동지혈사》 2, 헤이본사, 1976년, 11페지).

뿐만아니라 일제교형리들은 체포투옥한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중세기적인 고문방법을 다 동원하여 조선사람들을 학살하였다.

1919년 3월 28일 21살나는 한 처녀는 자기가 당한 비인간적행위와 고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3월 3일에 평양거리에서 체포되여 경찰서에 끌려갔다. 거기에는 많은 남자와 녀자들이 체포되여 와있었다. ...경찰들은 많은 남자들이 있는 앞에서 녀성 3명의 옷을 벗겨 라체로 만들었다. 그들은 내 몸에서 땀이 나올 때까지 구타한 다음 <너의 몸은 왜 더운가?>고 하면서 이번에는 나의 몸에 찬물을 퍼부었다. 나는 두 손목을 꽁꽁 묶이웠다. 또다시 나의 몸이 땀으로 적셔질 때까지 구타하였다. 또 찬물을 퍼부었다. 내가 차다고 말하자 그들은 새빨간 담배불로 몸을 지지였다.》(《조선독립운동지혈사》 2, 헤이본사, 1976년, 186~187페지)

일제는 독약을 먹여 조선사람들을 멸살시키기 위해 우물에 독약을 뿌리며 담배나 소금, 사탕가루 등에 독약을 섞어 판매하는 악독한 범죄도 감행하였다(《현대사자료》 25, 조선1, 미스즈서방, 1966년, 27페지).

이처럼 당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야수와 같이 조선인민에게 악행을 가하였다. 이에 대하여 당시의 한 기록은 《...일본인이 수천수만의 무고한 조선 량민에 대하여 감행한 그와 같은 란타악행은 너무나 흉악하고 참혹하여 사람의 귀로써는 그것을 들어서 믿지 못할 정도이며 사람으로서는 그것을 리해할수 없는 행위이다.》(《3. 1운동자료집》 123~124페지)라고 고발하였다.

참으로 조선인민의 거족적인 3. 1인민봉기를 계기로 불과 몇달사이에 일제가 이렇듯 천인공노할 인간살륙을 인류의 면전에서 꺼리낌없이 감행하였다는 사실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야말로 반인륜적범죄자들가운데서 으뜸가는 범인들이라는것을 그대로 실증해주고있다.

2. 《문화통치》시기 조선인민을 야수적으로 학살한 범죄

일제의 조선인학살만행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악랄하고 교활하게 감행되였다.

조선인민의 거족적인 3. 1인민봉기에 겁을 먹은 일제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통치방식을 《무단통치》로부터 《문화통치》로 바꾸었다.

일제가 표방한 《문화통치》란 《무단통치》의 련속이였고 달라진것이 있다면 일제의 무단적인 포악성에 교활성이 결합된것뿐이였다.

일제의 《문화통치》의 이러한 정체는 조선의 《독립》과 《자치》는 허용하지 않을것이라고 한 조선《총독》사이또의 폭언(《조선통치비사》 제국지방행정학회, 1919년, 156~161페지)과 당시 《조선총독부》정무총감 미즈노가 《반항하는자들에 대하여서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폭언한데서 그대로 드러나고있다.

일제는 3. 1운동이후 헌병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간판을 바꾸고 경찰인원수를 대폭 늘이였다. 1919년 3월 이전에 헌병 및 경찰인원수가 1만 4 517명이였다면 1919년말에는 경찰만 하여도 2만 648명이나 되였으며 헌병이 가지고있던 특권은 경찰에 그대로 넘겨졌다(《조선경찰사개요》 조선총독부 경무국).

일제는 또한 많은 애국자들과 평화적주민들을 체포구금하고 처형하기 위하여 감옥을 대대적으로 신설확장하였다. 일제는 1919년에 감옥확장계획을 세우고 영등포, 청진, 신의주, 전주, 목포에 있던 5개의 분감옥을 본감옥으로 개편하고 개성, 강릉, 서흥, 금천, 안동, 제주도에 6개의 분감옥을 새로 설치하였다. 1923년에는 개성에 《특별소년형무소》라는것까지 만들어놓고 그것도 모자라 1924년에는 금천지소를 분소로 승격시켜 《소년형무소》로 전환시켰다.

이것은 일제가 헌병경찰제도에 기초한 《무단통치》시기에도 없었던것으로서 《문화통치》시기에 조선의 천진란만한 청소년들까지도 《범죄자》로 몰아 처형하려는 계책에서 나온것이였다.

일제는 경찰, 감옥을 대대적으로 늘이는것과 함께 중세기적인 살인악법들인 《치안유지법》(1925. 5), 《신치안유지법》(1928. 6)을 조작하였다.

《치안유지법》 제1조에는 일본의 《국체를 변형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한자, 또는 결사의 역원, 지도자가 된자를 사형, 무기징역, 5년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형에 처한다.》고 규정되여있다.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휘둘러 조선인민의 반일투쟁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소동을 벌리였다.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1924년부터 1929년까지의 기간에 검거건수는 87만 5 522건, 검거된 조선사람의 수는 수백만명에 달하였다(《조선경찰사개요》 조선총독부 경무국, 1928년, 1930년).

일제의 야만성은 애국적인민들의 진출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동시에 조선인민들의 초보적인 생존권마저 유린하고 폭압통치를 실시한데서 뚜렷이 표현되였다. 지어 일제는 살길을 찾아 깊은 산속에 들어가 화전을 일구는 사람들까지도 박해하고 살인, 방화를 일삼았다.

일제가 1929년 6월 함경남도(량강도) 보천군 평퍼물에서 감행한 죄행은 그러한 실례의 하나이다.

일제경찰들은 평퍼물의 16개 부락을 모조리 불사르고 1 000여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거나 중상을 입혔다. 당시 《동아일보》는 《80여호 민가에 방화, 천여명의 화전민구축》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여 일제의 죄행을 폭로하였다. 일제는 이때 예순살 생일상을 받는 로인의 수염을 잡아채여 쓰러뜨렸으며 불속에 있는 아이를 구원하려는 어머니를 총탁으로 쳐죽이는것과 같은 만행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일제침략자들은 조선 국내에서뿐아니라 중국 동북지방과 일본 등지에서도 조선인민에 대한 탄압과 학살에 미쳐날뛰였다.

조선《총독》사이또는 《조선통치방침》의 한 조항에서 해외조선인들에 대한 통치문제에 언급하여 《한편으로는 그들에 대한 단속을 하고 그 소굴을 소탕할 필요가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보호하고 교육 또는 산업시설을 통하여 황국신민화할 필요가 있다.》(《조선통치비사》 제국지방행정학회, 1919년, 160페지)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실상에 있어서 조선인전멸론이였다.

일제는 1920년 10월초에 《훈춘사건》을 조작한 다음 《일본인들의 생명재산보호》를 구실로 조선강점군, 함경남북도경찰, 씨리비출정군, 만철수비대 등 침략무력을 동원하여 간도조선인들에 대한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일제살인귀들의 살인만행은 이루 형언할수 없이 잔인하고 악착하였다. 일제살인귀들은 조선사람들이 사는 부락이라면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토벌》하여 불태워버렸으며 조선사람이라면 남녀로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쏘아죽이고 때려죽이고 찔러죽이고 불태워죽였다. 지어는 산 사람의 눈알을 뽑거나 가죽을 벗기며 사지를 찢어죽이기도 하였고 수십명씩 산채로 생매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사람들의 팔다리를 꽁꽁 묶어 토막을 내여 죽이기도 하였으며 어린이들을 부모의 품에서 빼앗아내여 불붙는 집안에 던져넣기도 하였고 코를 꿰거나 배를 갈라 죽이는 등 짐승도 낯을 붉힐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하였다.

연길현에 달려든 일제살인귀들은 70호의 조선인가옥에 불을 지르고 이 부락의 주민 300명중 255명을 학살하였으며 현에 거주하고있는 조선사람 전기성을 체포하여 그의 얼굴가죽을 벗기고 뒤이어 서인환과 그의 가족 2명 그리고 마동화의 가족 5명의 가죽을 벗겨내고 타오르는 불길속에 집어던지는 만행을 감행하였다(《현대사자료》 28, 조선4, 미스즈서방, 1972년, 638~639페지).

일제는 화룡현 이도구의 조선인가옥 600여호와 청산리의 주민가옥 1 000여호를 불태워버리면서 이곳의 조선사람들을 모조리 살해하였으며 철부지애들까지 총으로 쏴죽이고 산채로 매장하였다(《현대사자료》 28, 조선4, 미스즈서방, 1972년, 642페지).

당시 일제의 학살만행참상을 현장에서 목격한 한 미국인은 《...남녀로소를 가리지 않고 집에서 끌어내여 모조리 쏴죽이고 채 죽지 않은 사람들을 불속에 집어넣어 타죽게 하였다. ...불탄 재무지에는 시체가 많이 섞여있었다. 재무지에서 시체 하나를 꺼내보니 잘리운 손과 발이 널려있었으므로 나는 그것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사진을 찍었다. 어찌나 흥분했던지 손이 떨려서 사진을 네번이나 고쳐찍었다.》라고 썼다(《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중>, 1966년, 261~262페지).

일제가 《간도대토벌》때 학살한 조선사람의 수는 무려 3만여명에 달하며 불태워버린 주민가옥은 6 000여호나 되였다.

일제살인귀들은 중국 동북지방에서 이처럼 악착한 살인만행을 감행하고서도 그것이 무슨 《토벌작전》의 《승리》라고 떠벌이면서 《축배》를 들며 라남 19사단에 《표창》까지 하는 추태를 부리였다.

조선사람들에 대한 일제의 대중적학살만행은 일본땅에서도 야수적으로 감행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것이 간또대지진당시에 있은 대학살만행이였다.

1923년 9월 1일 도꾜를 중심으로 한 간또지방에서는 일본력사상 최대의 지진이 일어나 대부분 지역을 불바다로 만들었으며 수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인민들속에서는 리재민구호대책을 세우지 않고있는 정부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정부는 인민들의 반정부적감정을 무마하고 이를 다른데로 돌리기 위한 흉책을 꾸미였다. 그것이 바로 조선사람들에 대한 학살계획이였다.

반동정부는 저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조선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불을 지르고있다》느니, 《우물에 독약을 치고있다》느니, 《폭동을 일으키려고 한다》느니 하는 따위의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류포시켰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당시 내무대신이였던 미즈노 렌따로는 지바현 후나바시의 해군무전국을 통하여 조선사람들을 학살할것을 전국에 지시하였다(《일본근대사》<하>, 이노우에 기요시, 스즈끼 마사시, 1956년).

한편 반동정부는 9월 3일 내각비상회의를 열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였던 악질장교들로써 《계엄사령부》를 조작하고 간또지방에 수많은 무력을 집결시켰다. 간또지방은 삽시에 수만명의 군대와 수천명의 경찰, 재향군인, 반동적테로단체인 《자경단》들로 차넘치게 되였다. 뒤이어 도교부청은 전신으로 군대, 경찰, 자경단들에 《도로상에 나타나거나 주택 기타 장소에 숨어있는 조선인들을 남녀로소 구별없이 모조리 살해하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일제살인귀들은 총, 칼, 참대창, 곤봉, 쇠갈구리, 도끼 등 각종 흉기를 들고 무리지어 다니면서 조선사람이라고 인정되면 이리떼처럼 달려들어 늙은이, 어린이, 남자, 녀자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당시 도꾜부근의 지바현에 주둔하고있던 기병 제13련대의 야수들은 500~600명의 조선사람들을 저들의 병영에 끌어다가 구뎅이를 파게 한다음 그앞에 세워놓고 기관총사격을 가하여 집단학살하였으며 요꼬하다에서는 250명의 조선사람들을 배에 태운 다음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죽이였고 사이다마현 혼죠에서는 300명의 조선사람들을 몽둥이, 참대창, 칼 등으로 때리고 찔러 잔인하게 학살하였는데 당시 일제야수들에 의하여 학살된 조선사람들의 수는 2만 3 000여명에 달하였다.

일제의 야수성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것은 다음과 같은 증언자료를 통해서도 알수 있다.

당시의 살인광경을 직접 목격한 다나베 사다노스께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살해된 이웃동네에 가보았다. ...공지에는 거의나 알몸뚱이인 조선사람의 시체들이 주런히 놓여있었다. 시체의 수는 250구였다. 하나하나 들여다보니 목구멍이 끊기여서 기관지와 식도의 두 경동맥이 허옇게 드러난 시체도 있었다. 목이 떨어져나간 시체도 있었는데 목을 강짜로 비틀어 끊었는지 살과 피부와 힘줄이 풀려있었다. ...불쌍하게 죽은 애젊은 조선녀성의 시체도 있었다. 그 녀성의 배는 갈라져있었고 6~7개월쯤 되여보이는 태아가 창자속에 딩굴고있었다. 그 녀성의 음부에는 죽창이 깊이 박혀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너무도 놀라 옆으로 뛰면서 물러섰다. 우리 일본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잔인한 짓을 한단말인가. ...내가 일본사람이라는 수치감을 이때처럼 절감하기는 처음이였다.》(《현대사자료》 6, 간또대진재와 조선인, 미스즈서방, 1963년, 202페지)

또한 당시 조선사람학살에 직접 참가하였던 한 경찰은 《참살정형을 도저히 입으로 표현할수 없었다. 어린 아이들을 줄을 세워놓고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잘랐으며 그 다음 부모들을 찔러죽였다. 살아남은 조선사람들의 팔을 톱으로 켜는자도 있었다. 그것을 도중에서 내깔리고 또다른 조선사람들을 톱질하는 참혹상은 보기에도 끔찍하였다. 죽은 사람의 눈을 식칼로 도려내는것도 있었다. ...경찰서구내에는 피바다를 이루었으며 장화를 신지 않으면 걸을수 없는 형편이였다.》(《조선인강제련행의 기록》 미라이사, 1971년, 235페지)고 그 참상을 고백하였다.

3. 파쑈테로통치시기 조선사람들을 학살한 반인륜적범죄

일제침략자들을 1930년~1940년대에 이르러 이른바 《문화통치》의 간판마저 벗어던지고 파쑈적인 폭압통치를 실시하면서 조선인민에 대한 야수적학살만행을 전례없이 악랄하게 감행하였다.

일제는 조선에서 식민지파쑈폭압통치를 실시하기 위하여 1930년이후 식민지통치의 직접적담당자이며 현지집행자인 조선《총독》들로 우가끼, 미나미, 고이소, 아베 등 가장 악명높은 파쑈분자들을 골라보냈다.

일제는 이들을 통하여 조선을 포악한 파쑈적공포정치의 란무장으로, 조선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모조리 앗아가는 인간생지옥으로 전변시켰다.

일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령도하신 조선인민혁명군에 의해 심대한 타격을 받자 인민혁명군을 압살할 흉계밑에 1933년 여름 수많은 관동군의 정예부대들을 동만각지에 들이밀어 간도지방의 조선인학살에 미쳐날뛰였다.

일제는 공산당원 1명을 없애기 위해서는 100명을 죽여도 좋다는 구호를 제창하면서 1932년 4월부터 1933년 3월까지의 사이에만도 281차의 《토벌전》을 벌려 4만여명의 조선사람들을 학살하고 수만호의 주민가옥을 불태웠다(《조선독립운동암살사》 3. 1서방, 1976년, 237페지).

삼도만에 기여든 600여명의 일제《토벌대》무리들은 농가에 불을 지르고 수많은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포사격으로 살해하였다. 전각루에 기여든 《토벌대》들은 어린이들과 늙은이들을 집에 몰아넣고 불을 지르고 밖으로 뛰여나오는 어린이들을 총칼로 찔러 다시 불속에 집어넣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였다.

화룡현에 기여든 일제《토벌대》는 조선사람마을들을 몽땅 불태워버렸을뿐아니라 시위행렬에 참가하여 기발을 들고 《조선 독립 만세!》를 웨치면서 전진하는 한 농민의 오른쪽 어깨를 군도로 내리쳤으며 그가 왼손에 기발을 들고나가자 왼팔도 군도로 잘라버렸다. 그래도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앞으로 계속 나가는 그 농민을 붙잡아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하였다(《일제의 침략》 홀프출판사, 1983년, 53페지).

일제는 동만의 방방곡곡에서 유격구를 초토화할 때 야만적인 《삼광정책》을 감행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 도서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있다.

《...방대한 군사와 경찰을 동원하여 <토벌>을 대대적으로 감행하였다. 례하면 1933년 겨울 제19사단(라남)과 기타를 합친 4 000여명의 일본침략군과 만주괴뢰군은 비행기까지 날려 왕청현의 유격근거지를 포위하였다. 일본침략군은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빼앗으라>는 <삼광정책>을 취하고 주변부락을 모두 불살라버리였다.》(《일본과 조선의 이천년》 도호출판사, 1977년, 547페지)

이리하여 간도지방은 일제의 야만적인 학살만행에 의하여 피바다, 불바다로 변하였다.

일제는 조선 국내에서도 반일애국운동에 떨쳐나선 애국자들을 무참히 탄압학살하였다. 일제는 1931년-1935년기간에 《좌익로동조합사건관계자》라는 딱지를 붙여 1 769명의 조선로동자들을 검거투옥하였으며 《좌익농조사건》이요 뭐요 하면서 4 121명의 조선농민들을 검거투옥하여 많은 사람들을 고문학살하였다(《최근에 있어서의 조선치안상황》 조선총독부 경무국, 1936년).

일제는 또한 1937~1938년에 《혜산사건》을 조작하고 3 000여명의 애국자들을 검거투옥하였으며 가혹한 고문으로 60여명을 죽이고 수많은 사람들을 교수형으로 살해하거나 불구자로 만들었다.

일제는 또한 《즉결령》을 적용하여 무고한 인민들을 닥치는대로 검거, 투옥하고 재판도 없이 처형하였다. 일제는 조선인민들에게 《사상범》이라는 터무니없는 죄명을 씌워 1931년에 3만 8 793명, 1934년에 6만 655명, 1936년에 9만 2 588명, 1938년에는 16만 5 300명을 검거투옥하여 가혹한 고문을 들이대고 학살하였다.

함경남도 부전강발전소공사장에서 고역을 당하던 김하춘은 《턴넬공사에서 갱도가 무너져 약 350명이 단번에 죽는 사고가 있었다. ...3호턴넬 수직갱공사에서 승강기가 떨어져 200명정도의 로동자들이 눌리워 죽은 사고도 있었다. 노꾸찌는 사망신고서용지를 3만매나 인쇄해가지고 <이것이면 부전호언제공사는 문제없다>고 떠벌이였다.》고 증언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부전고원 인크라인 시운전때 산신에게 제물을 바친다고 하면서 처음에는 낡고 삭은 쇠바줄을 매여놓고 50명정도의 조선사람을 태워 중도에서 떨어뜨렸다. 삭도는 떨어지고 거기에 탔던 사람들은 다 죽었으며 뼈도 찾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일본제국주의와 동아시아》 아시아경제연구소, 1979년, 202페지).

이와 같이하여 부전강발전소 언제공사에서 희생된 조선사람들의 수는 당시 신문들에 발표된것만 하여도 4 000명이 넘는다.

일제가 1932년부터 벌려놓은 평안북도(자강도) 명문고개 25개 차굴공사때 수많은 조선로동자들을 혹사하면서 야수적으로 학살한 례는 오늘도 사람들의 치를 떨게 한다. 일제는 19호굴공사중에 땅속에서 물이 솟구쳐오르자 물구멍을 막는데 김덕호라는 조선로동자를 구멍에 밀어넣고 콩크리트를 쳤는가 하면 1, 3호맞굴뚫기공사에서 시공이 잘못된 책임을 조선사람들에게 들씌워 악착한 고문끝에 때려죽였으며 발파불발을 해제하는 작업에 조선사람들을 내몰아 그들이 폭음과 함께 가루가 되게 하였다.

조선인민들에 대한 일제의 파쑈적폭압과 학살만행은 그들이 1930년대말~1940년대 전반기 《대동아공영권》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발악하던 시기 더욱 우심해졌다.

일제는 조선을 저들의 대륙침략을 위한 후방기지로 삼고 이른바 《개정치안유지법》, 《국가보안법》 등 각종 악법들을 조작하고 사소한 반일적요소에 대해서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으며 840만여명의 조선사람들을 강제징발하여 조선과 일본은 물론 중국,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의 섬들에까지 끌고가 침략전쟁의 대포밥으로 내몰았으며 탄광이나 군사시설공사장 등에서 노예로동을 강요하고 나중에는 《비밀엄수》라는 구실밑에 집단적으로 무참히 학살하였다.

일제는 1944년 11월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9개월동안 저들의 아성인 《마쯔시로대본영》(나가노시)방공호공사에 날마다 평균 9 000~1만명의 조선사람들을 노예로동에 내몰았다. 그리고 《비밀보장》이라는 구실로 왜왕의 침실공사에 내몰았던 수백명의 조선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세상에 《오끼나와의 비극》으로 알려진 오끼나와에서의 일제침략군의 대학살만행은 일제의 야수성을 고발하는 또하나의 실례이다. 일제는 오끼나와에서의 패배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자 오끼나와의 주민들에게 자결을 강요하여 서로 수류탄을 터뜨려 죽게 하였으며 이 섬에 강제련행된 2만명의 조선사람들을 총알받이로 내몰아 학살하였다.

일제는 조선사람들을 전쟁마당에 끌고가 혹사하다 못해 잡아먹기까지 한 식인종적인 만행도 서슴없이 저질렀다.

1944년 2월 마샬제도에서 2 000명이상의 조선사람들을 끌어다 비행기활주로공사를 시키던 일제침략군은 보급로가 끊어지자 전라도 려수출신의 조선사람 2명을 살해하여 고래고기라고 하면서 먹었으며 이것을 알아차린 조선사람들이 항의하자 그들을 모두 학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뉴코레아 타임스》 1991. 12. 14).

일제침략군이 뉴기니아전선에서 사람을 잡아먹은데 대하여 도서 《일본군<위안부>》(전편) 14페지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있다.

《뉴기니아전선에 동원되였던 일본보병 제144련대의 4 000여명중 단 두사람이 살아남았는데 그중 한사람인 니시야마는 사람의 고기를 식량보급이 떨어진지 40일경부터 먹기 시작하였다. 사람의 간장 한사람분을 다 먹은 병사가 미쳐서 알몸뚱이로 참호를 떨쳐나와 춤추며 돌아치다가 상대방의 기관총에 맞아죽었다. 누구나 다 사람고기를 먹을 때 엉뎅이살부터 뜯어먹기 시작했다고 고백하였다.》

조선사람을 잡아먹은 일제의 이와 같은 식인종적인 야수적만행은 대를 두고 다 씻지 못할 반인륜적죄악이다.

일제는 중국 동북의 할빈에 있는 731세균부대에서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수많이 붙잡아다 실험대상으로 하여 학살하는 천인공노할 만행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1956년 7월 중국의 심양특별군사재판에서 전범자들이 진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731부대의 감옥에 감금되여있던 사람은 중국인, 쏘련인, 조선인이였고 이 사람들은 세균실험에 리용되였다. 실험에는 두가지 방법을 썼다. 그 하나는 입에 세균을 주입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피하주사로 세균을 주입하는것이였다.

실험할 때에는 산 사람을 바줄로 묶어놓고 세균을 물에 타서 입에 넣었다. 우리 부대에서는 매일 10~20명에게 실험하였으며 주입법을 적용한 사람은 400명이였고 피하주사를 놓은 사람은 250명이였다. ...우리 부대가 사용한 세균은 페스트균, 장티브스균, 디프테리아균이 많았다. 이 사람들은 실험된 후 3일 또는 7일만에 죽었는데 그것은 세균의 독성과 성질에서 차이가 있었기때문이였다.》(《세균전과 독가스전》<일문> 도불깡, 《인체실험》100~101페지)

조선인민에 대한 일제침략자들의 이처럼 악랄하고 잔인하고 포악한 야수적인 학살만행은 지난 40여년간의 일제식민지통치의 죄악사에서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것이다.

력사적사실은 일제야말로 사람의 피를 보아야 쾌락을 느끼는 인두겁을 쓴 야수들이며 일제의 조선식민지통치의 력사는 인간살륙으로 이어진 죄악의 력사라는것을 똑똑히 보여준다.

4. 일제의 조선인학살만행의 반인륜적범죄성

40여년의 식민지통치기간 일제가 감행한 조선인학살만행은 그 내용으로 보나 감행의 수단과 방법, 야수성과 잔인성에 있어서 동서고금의 침략사와 전쟁사에서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반인륜적범죄행위였다.

일제의 조선인학살만행이 반인륜적범죄로 되는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야만적인 살해와 집단학살을 금지하고있는 국제법을 심히 유린한 범죄라는데 있다.

공인된 국제법과 전쟁법규에서는 생명 및 신체에 대한 폭행 특히 각종 살인행위를 금지하였으며(《전시에 있어서의 사민보호에 관한 1949년 8월 12일부 제네바협약》 제3조 1항) 민간주민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폭력행위 또는 힘에 의한 위협을 금지하였다(《국제적무장충돌시 피해자보호에 관한 1949년 8월 12일부 제네바협약에 대한 보충의정서》 1). 뿐만아니라 집단의 성원들을 살해하는 행위, 집단의 성원들에게 심한 육체적 및 정신적피해를 가하는 행위, 집단에 전체적 또는 부분적인 물리적파멸을 가져올수 있는 생활조건을 의도적으로 강요하는 행위, 집단의 산아를 막기 위한 조치를 강요하는 행위, 한 집단의 아이들을 다른 집단에로 강제로 이동시키는 행위를 집단학살죄로 규정하고 이러한 행위가 평화적시기에 감행되였건 전쟁시기에 감행되였건 관계없이 국제법상의 범죄로 된다는것을 규정하였다(《집단학살범죄의 방지 및 처벌에 관한 협약》 제1조, 제2조).

국제법은 또한 전쟁전 또는 전쟁중에 사람들에 대하여 감행한 살인, 전멸, 노예화, 추방 기타의 혹사,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리유에 의한 박해행위 등 비인간적행위의 감행을 인류를 반대하는 범죄로 규정하고 이러한 범죄행위에 대하여 시효를 적용하지 말고 처벌할데 대하여 규정하였다(《국제군사재판소규정》 <뉴른베르그> 제6조, 《극동국제군사재판소규정》 제5조, 《뉴른베르그재판소규정과 재판에서 인정된 국제법의 원칙》 6, 《전쟁범죄와 인류를 반대하는 범죄들에 시효를 적용하지 말데 관한 협약》 1968년 11월 26일).

이와 같이 공인된 국제법과 전쟁법규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살인 특히 집단학살을 금지하고있다.

국제법의 조례를 비추어볼 때 일제가 조선에서 감행한 야수적인 학살만행, 집단학살만행은 그 어느것이나 다 제국주의적인 식민지략탈과 민족적차별, 멸시에 기초한것으로서 반인륜적범죄로 된다.

일제의 조선인학살만행이 반인륜적범죄로 되는것은 다음으로 고문과 기타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행위를 금지할데 대한 국제법의 요구를 유린한데 있다.

공인된 국제법과 전쟁법규에서는 정신적 또는 육체적인 모든 형태의 고문, 체형(육체적인 형벌) 등이 민간 또는 군사인원에 의하여 수행되였는가에 관계없이 임의의 시기, 임의의 장소에서 금지된다는것을 규정하였으며 (《1949년 8월 12일부 제네바협약에 대한 보충의정서》 1, 제75조 2항) 사람들을 고문학살, 불구자로 만드는것을 금지하였다(《비국제적무장충돌시 피해자보호에 관한 1949년 8월 12일부 제네바협약에 대한 보충의정서》2, 제4조 2항). 또한 잔인한 학대고문, 인간의 존엄에 대한 침해 특히 모욕적이며 멸시적인 대우 등의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였으며 이러한 행위의 감행을 엄중한 범죄로 규정하였다(《전시에 있어서의 사민보호에 관한 1949년 8월 12일부 제네바협약》 제3조 1항, 제32조).

보는바와 같이 공인된 국제법과 전쟁법규에서는 사람들에게 그 어떤 경우에도 정신적 또는 육체적고통을 가할수 없으며 불구자로 만들거나 고문학살, 잔인한 학대, 인간의 존엄을 짓밟은 모욕적이며 멸시적인 행동을 하여서는 안된다는것을 밝히고 이러한 행위의 감행을 반인륜적인 범죄로 규정하고있다.

지난 40여년간 수천수만의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각종 살인악법에 걸어 검거투옥하고 정신적박해와 민족적멸시, 육체적고통을 가하며 산사람의 눈알을 도려내고 사지를 찢어죽이는것과 같은 악착한 살인고문과 녀성들을 희롱하다못해 벌거벗기고 젖가슴을 도려내며 음부에 죽창을 박는것과 같은 비인간적이며 야만적인 살인행위를 감행한 일제의 행위는 반인륜적범죄중에서도 특대형의 반인륜적범죄인것이다.

일제의 조선인학살만행이 반인륜적범죄로 되는것은 다음으로 세균무기의 사용을 금지할데 대한 국제법을 란폭하게 유린한데 있다.

1925년 6월 17일 제네바에서 일본을 포함한 105개 나라가 서명한 《질식성, 독성, 또는 기타의 가스 및 세균학적수단을 전쟁에 사용함을 금지할데 대한 의정서》에는 《질식성, 독성 또는 기타의 가스 및 모든 류사한 액체, 재료 ...를 전쟁에 사용하는것이 문명한 세계의 여론에 의하여 마땅히 비난되고있으며 또한 우의 사용의 금지가 세계의 대다수 국가를 당사국으로 하는 조약들중에 명기되여있기때문에 그리고 우의 금지가 여러 나라들의 량심 및 행위를 동일하게 구속하는 국제법의 일부로서 널리 적용되도록 하기 위하여 체약국은 우의 사용을 금지하는 조약의 당사국으로 되는 한 금지를 승인하고 우의 금지를 세균학적전쟁수단의 사용에 확대할데 대하여 합의하여 또한 호상간에 이 선언의 규정에 따라 구속되여야 한다는데 대하여 합의한다.》고 규정되여있다.

그러나 일제는 저들이 수표한 《질식성, 독성 또는 기타의 가스 및 세균학적수단을 전쟁에 사용함을 금지할데 대한 의정서》를 란폭하게 유린하고 무고한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강제로 붙잡아다 생체실험대상으로 삼아 학살하는 천인공노할 범죄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일본당국은 과거 일제가 저지른 그 엄청난 죄행에 대하여 인정조차 하려 하지 않고있다. 오히려 일본반동들은 지난날 일제의 죄행을 미화분식하고있으며 침략자, 살인마들을 두둔하고있다.

우리는 우리 인민을 야수적으로 학살한 살인마 일제를 두고두고 저주할것이며 그들의 죄행을 반드시 계산하고야말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