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측이 오바마 정부에게 요구하는 양자택일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북측 외무성이 거부한 셀릭 해리슨의 의견

미국의 유력일간지 <워싱턴포스트> 2009년 2월 12일자에 셀릭 해리슨(Selig S. Harrison)이 쓴 글이 실렸다. 제목은 ‘핵보유 북코리아와 지내는 것(Living with A Nuclear North Korea)’이다. 그의 글을 분석하려는 것은 두 가지 까닭이 있어서이다.

첫째, 그가 한반도의 정치군사문제에 관련하여 쓴 글은 워싱턴과 서울에서 적지 않은 파급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가 <워싱턴포스트> 동북아시아 지국장으로 도쿄에 머물고 있었던 1972년 6월 23일 서방세계 언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방북하여, 서방세계 언론인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김일성 주석의 접견을 받았다. 그러한 특별한 인연 때문에 그는 중요한 시기마다 방북하여 북측의 고위급 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미국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북한문제 전문가’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는 현재 국제정책연구소(Center for International Policy) 선임연구원이다.

둘째, 해리슨 연구원이 조미(북미)관계에 대해 쓴 글들을 읽어보면, 그의 견해와 관점이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구상과 크게 어긋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가 2009년 1월 13일부터 17일까지 방북한 것이 시기적으로 오바마 정부 출범에 맞추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가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구상에 대한 북측의 견해를 듣고자 하는 생각에서 방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북측이 그에게 무슨 말을 해주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곧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구상에 대한 북측의 견해를 파악하는 것과 진배없을 것이다.

해리슨 연구원이 <워싱턴포스트>에 발표한 글에 따르면, 그는 “핵포기에 관한 북측의 의도를 타진해보기 위해서 리근 국장에게 자신의 의견서를 미리 보냈다”고 한다. 미국 대통령 선거일이었던 2008년 11월 4일에 전국외교정책협의회(NCAFP) 초청으로 뉴욕에 도착하여 6일과 7일 뉴욕에서 한반도 문제 토론회에 참석한 뒤에 11월 10일 평양으로 돌아간 북측 외무성의 리근 미국국장에게 자신의 의견서를 전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의견서를 검토한 리근 국장은 방북한 해리슨 연구원을 만나 그의 의견에 대한 외무성의 견해를 밝혔다. 그리고 해리슨 연구원이 평양을 떠나던 2009년 1월 17일 북측 외무성 대변인은 〈조선중앙통신〉 기자가 제기한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북측의 견해를 더 명확하게 밝힌 바 있다. 1월 17일에 나온 외무성 대변인의 답변과 해리슨 연구원의 의견에 대한 리근 국장의 답변은 일맥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해리슨 연구원이 평양체류기간 중 10시간 동안이나 토론하였던 북측 인사들 가운데는 리근 국장 이외에도 리찬복 중장이 있다. 국방위원회 보도관 리찬복 중장이 해리슨 연구원에게 말한 내용은 그의 개인의견이 아니라 국방위원회의 견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해리슨 연구원은 자기 의견에 대한 외무성과 국방위원회의 견해를 듣고 워싱턴으로 돌아간 셈이다.

그렇다면 해리슨 연구원은 리근 국장에게 무슨 의견을 건넨 것일까? 해리슨 연구원이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그의 의견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북측은 북측이 재처리(reprocess)하였다고 신고한 플루토늄 30.8kg을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넘겨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다.

둘째, 북측이 플루토늄을 국제원자력기구에 넘겨주는 대가로, 미국은 북측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외교관계 및 경제관계를 정상화하고, 북측에게 식량과 에너지를 장기적으로 지원하고, 대규모 다국적 대북투자로 북측의 산업기반시설을 복구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다.

해리슨 연구원이 리근 국장에게 건넨 의견서 전문이 공개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위와 같이 요약한 내용을 읽어보면 매우 심한 오류가 눈에 띈다. 35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미국의 대북관계를 연구해온 그가 의견서에 사리에 맞지 않는 내용을 담은 것은 믿기 힘든 일이다.

해리슨 연구원의 의견에 들어있는 결정적인 오류는, 북측이 재처리하였다고 신고한 무기급 플루토늄 30.8kg을 국제원자력기구에 넘겨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것이다. 북측이 생산하고 재처리한 플루토늄에 대해 해명한 신고서를 2008년 6월 26일에 건네준 대상은 국제원자력기구가 아니라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이다. 중국은 북측의 핵신고서를 받자마자 미국에게 전하였다. 북측의 핵신고서를 받아보려고 애쓴 것은 중국이 아니라 미국이지만, 6자회담 틀 속에서 실무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미국은 의장국인 중국을 거쳐서 핵신고서를 전달받은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국제원자력기구는 6자회담에 참가하는 당사자가 아니며, 한반도 비핵화를 추진하는 당사자도 아니다. 그런데 당사자도 아닌 국제원자력기구에 북측의 플루토늄을 넘겨주면 좋겠다고 제안하다니, 말이 되지 않는 소리로 들린다.

미국은 1996년부터 2008년까지 일본에서 생산한 고농축우라늄 580kg을 모두 가져갔고, 아르헨티나 국립원자력연구소에서 나온 사용후 핵연료봉도 2005년 상반기에 모두 가져갔는데, 북측에서 생산한 무기급 플루토늄을 국제원자력기구에게 넘겨주는 것은 미국으로서도 상상할 수 없다.

해리슨 연구원의 오류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다국적 자본의 대북투자로 북측의 산업기반시설(infrastructure)을 복구(rehabilitation)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 원문표기를 그대로 옮기면, ‘다무적 신용(multilateral credits)’을 북측에 제공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다국적 자본의 대북투자를 그렇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다국적 자본의 대북투자로 북측의 산업기반시설을 복구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이다. 다국적 자본의 대북투자라는 말은 ‘북한개방’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북측이 다국적 자본에게 개방하지 않으면, 다국적 자본의 대북투자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해리슨 연구원이 상상한 것처럼, 북측이 중국식 개방정책으로 전향하여 다국적 자본의 대북투자를 허용할까? 어림없는 소리이다.

‘북한개방’은 개방론자들의 두뇌 속을 맴도는 주관적 희망일 뿐, 북측의 현실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북측에서는 개방조짐은커녕 ‘조짐의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보수언론은 북측이 개방에서 멀어지는 ‘보수화’의 길을 가고 있다고 비방한다. 만약 북측이 개방으로 나아간다면 우선 주체사상과 선군정치부터 포기하고, 중국이 지난 시기에 그러했던 것처럼 덩샤오핑 사상(鄧小平思想)과 유사한 어떤 ‘개방사상’을 내세워야 하는데, 북측이 주체사상과 선군정치를 포기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북측이 주체사상과 선군정치를 포기할 것이라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도 없고 논리적으로도 모순되는 궤변 중의 궤변이다.

북측이 주체사상과 선군정치를 포기할 것이라는 주장이 궤변이므로, ‘북한개방론’도 역시 궤변이다. 그런데도 개방론자들은 북측이 개방할 것이라는 자기들의 궤변을 분석 또는 전망이라고 그럴듯하게 조작해놓고 대중의 인식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해리슨 연구원의 글에 개방론자들의 궤변이 섞여들어간 것은, 그의 명성을 깎아내리는 유감스러운 일이다.

해리슨 연구원의 의견에는 오류만이 아니라 결함도 들어있다. 북측이 플루토늄을 포기하는 것에 상응해서 미국이 취해야 할 행동에 관하여 그가 언급한 내용에서 결함이 엿보인다. 그가 전망한 미국의 상응행동은 정치적 조치와 경제적 조치로 나누어지는데, 경제적 조치는 부차적이므로 일단 접어두고, 정치적 조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전망한 정치적 조치는 평화협정 체결과 외교관계 정상화이다.

그런데 평화협정 체결과 외교관계 정상화는 지금까지 수없이 되풀이되어온, 그리하여 언론보도를 챙겨 읽는 일반인들도 잘 알고 있는 상식화된 개념이다. 문제는 상식화된 개념을 되풀이하여 논하는 것이 무의미해졌다는 데 있다. 그 개념의 실질적 내용을 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평화협정 체결과 외교관계 정상화라는 개념의 실질적 내용을 논하지 않고, 상식화된 개념을 되풀이하여 언급한 것은 그의 의견에서 진부함이 느껴지는 결함이 아닐 수 없다.

해리슨 연구원의 표현을 빌리면, 자기 의견에 대한 “북측의 거부는 단언적이고 명백하였다”고 한다. 사리에 맞지 않는 소리를 하고, 개방론자들의 궤변을 무비판적으로 옮겨놓고, 상식화된 개념을 진부하게 언급하였으니 북측에서 거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해리슨 연구원은 평양 체류기간에 만난 리근 국장에게서 북측이 플루토늄 30.8kg을 이미 모두 무기화(weaponize)하였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고 했다. 무기화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냐고 몇 차례 되물었는데도 리근 국장은 그 의미를 정의하지 않았지만, 국방위원회 보도관 리찬복 중장은 해리슨 연구원에게 북측이 “미사일 탄두(missile warheads)를 개발하였음을 암시(imply)하였다”고 한다. 해리슨 연구원의 글에 나오는 미사일 탄두라는 용어는 부정확한 것이고, 문맥상 핵탄두(nuclear warheads)라고 표현해야 정확하다.

리근 국장이 핵무기에 관련된 군사기밀사항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피하고 ‘무기화’라는 다소 모호한 표현을 쓴 것은, 군부인사가 아니라 외교관인 그로서 그런 모호한 표현밖에 쓸 수 없었음을 생각할 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무기화라는 말이 나왔을 때, 북측이 핵탄두를 제조하였음을 국방위원회 보도관 리찬복 중장이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고 암시적으로 언급한 것은, 보도관이 만난 대화상대가 오바마 정부가 파견한 공식대표가 아니라 민간연구원이기 때문에 민감한 핵문제에 대해 암시적으로 언급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양자택일 요구, 관계정상화냐 철군이냐

해리슨 연구원이 평양을 떠나던 날인 2009년 1월 17일 외무성 대변인은 “미국이 핵문제와 관계정상화문제를 대치시키는 그릇된 주장을 들고 나오는 것과 관련하여” 〈조선중앙통신〉 기자가 제기한 물음에 답하는 형식으로 북측의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외무성 대변인은 답변에서 “우리가 핵무기를 만들게 된 것은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나 경제지원 같은 것을 바라서가 아니라 미국의 핵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지적하였다.

북측이 대미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핵무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니, 그 말은 무슨 뜻일까? 지금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은 북측이 핵무기를 포기하면 그에 상응해서 미국이 대북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으로 한반도의 비핵화가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해왔으나, 외무성 대변인 답변은 그러한 기성관념을 거부하였다.

외무성 대변인 답변의 마지막 문장은 “설사 조미관계가 외교적으로 정상화된다고 하여도 미국의 핵위협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한 우리의 핵보유지위는 추호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미국의 핵위협을 제거하는 과제가 대미관계를 정상화하는 과제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임을 밝힌 것이다. 외무성 대변인 답변에서 분명하게 나타난 것은, 북측이 대미관계를 정상화하는 조건으로 핵무기를 포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핵위협을 제거하는 조건으로 핵무기를 포기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북측과 미국이 관계를 정상화해도 미국의 핵위협이 여전히 남아있을 수 있음을 지적한 말로 들린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은 북측과 미국이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면 그에 따라 미국의 핵위협이 자동적으로 제거될 것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외무성 대변인 답변은 그러한 기성관념을 거부하였다.

“미국의 핵위협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대북관계를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핵위협을 제거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제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이 그 말에서 엿보인다.

실현가능성은 전혀 없는 이야기지만, 만약 미국이 보유한 핵탄두와 핵폭탄 4천600여 개를 모두 폐기하고 비핵국가로 거듭난다면, 인류는 미국의 핵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무성 대변인의 답변은 인류가 겪고 있는 미국의 핵위협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를 겨냥한 미국의 핵위협을 특정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반도에 미국의 핵위협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북측은 핵무기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은 한반도에서 미국의 핵위협을 제거한다는 말을 해석할 때, 그 말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것을 뜻하고, 그와 더불어 남측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제공공약을 폐기하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해왔지만, 외무성 대변인 답변은 그러한 기성관념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주목하는 것은,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나 핵우산 제공공약 폐기를 약속하는 것은 모두 외교문서로 처리되는 것일 뿐이며, 외교문서에 들어있는 공약이행을 강제할 구속력 있는 수단이나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북측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한 뒤에 언제라도 생각이 바뀌면 평화협정을 무효화하거나 핵우산 제공공약 폐기선언을 번복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다른 나라와 체결한 외교공약을 제대로 이행한 사례는 없다.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가장 악명 높은 공약파기자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미국의 핵위협을 제거하는 문제는, 북측과 미국이 외교관계를 정상화하여 몇 가지 외교공약을 체결하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음이 명백해진다. 핵위협 제거는 외교공약체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체결공약이행으로 완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 미국의 핵위협 제거를 완결할 공약이행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두말할 나위 없이, 그것은 주한미국군을 완전히 철군하는 것이다. 군사고문단을 남겨놓고 철군하는 대폭감군이 아니라, 미국군이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는 완전철군이다. 미국의 핵위협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핵우산 제공공약을 폐기하더라도 주한미국군이 한 명이라도 남아있는 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북측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요구하는 것은 관계정상화도 아니고 경제지원은 더욱 아니며, 평화협정 체결이나 핵우산 제공공약도 아니다. 북측의 요구는 명백하게도 주한미국군 완전철군이다. 따라서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완전히 철군하지 않으면, 한반도의 비핵화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또한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완전히 철군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북측이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할 수 있다는 것도 자명한 이치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한반도의 비핵화는 주한미국군의 완전철군과 사실상 동의어인 것이다.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완전히 철군해야 북측도 그에 상응하여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할 것이라는 사실을 해리슨 연구원도 알고 있다. 클린턴 정부 2기에 대통령 특사로 임명된 윌리엄 페리(William J. Perry)가 1999년 5월 25일 평양을 찾아갔을 때, 북측이 그에게 “미국이 주한미국군 병력의 일부 또는 전부를 철군한다면 그에 상응해서(in return) 미사일 개발을 중단하거나 또는 완전종식하겠다는 의사를 명백히(explicitly) 표명하였다”는 사실에 대해 해리슨 연구원이 미국의 정책전문지 ‘세계정책저널(World Policy Journal)’ 2000년 가을호에 실은 글 ‘북측의 미사일, 실제로 얼마나 위협인가?(The Missiles of North Korea: How Real a Threat?)’에서 밝혔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해리슨 연구원은 한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는 핵심문제인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가 평양에 머무는 동안 리근 국장이나 리찬복 중장을 만난 자리에서 주한미국군 철군문제가 거론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워싱턴에 돌아가서 발표한 글에서는 주한미국군 철군문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완전히 철군해야 북측이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언급을 회피하는 ‘이상행동’은 비단 해리슨 연구원만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해리슨 연구원의 ‘이상행동’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중요한 것은, 주한미국군 철군문제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그러한 ‘이상행동’에 계속 집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그러한 ‘이상행동’에 집착하는 까닭은, 주한미국군 철군문제에 대해서는 북측과 협상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완강하게 고수해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한반도를 비핵화하기 위한 대북협상에서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논의하지 않으면 협상타결은커녕 협상이 진전될 수 없다는 점이다. 클린턴 정부에서 부쉬 정부로 이어진 16년 동안, 북측과 미국이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협상을 벌여왔는데도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겉돌았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북측이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까닭

북측은 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게 주한미국군 완전철군을 끈질기게 요구해오는 것일까? 한반도 비핵화의 의미를 간단히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듯이, 이 물음도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한미국군을 철군한다는 말에는 군사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가 함께 들어있다.

첫째, 주한미국군을 철군한다는 말에 들어있는 군사적 의미는, 북측의 외무성 대변인이 답변에서 지적한 것처럼 한반도에서 미국의 핵위협을 제거한다는 뜻이다.

한반도의 군사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는 사람들은, 주한미국군기지에 핵탄두가 하나도 없으면 한반도에서 미국의 핵위협이 없어진 것이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오늘의 군사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미국 군부는 주한미국군기지에 핵탄두나 핵폭탄을 보관하지 않는다. 북측의 조선인민군이 명중률 높은 신형 미사일로 조준하는 주한미국군기지에 핵탄두나 핵폭탄을 보관하는 것은 주한미국군을 몰살시키는 자멸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며, 더욱이 10만 명이 넘는 인민군 특수전 병력이 기습점령목표로 삼은 주한미국군기지에 핵탄두나 핵폭탄을 보관하는 것은 미국군에게 핵무기 탈취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다.

2만8천500명 밖에 되지 않는 주한미국군이 북측에게 핵위협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군이 한국군과 함께 실시하는 합동군사훈련이나 미국군이 한반도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단독군사훈련이 북측에게 핵위협을 가하는 것이다. 말이 군사훈련이지, 실제로는 ‘작전계획(Oplan)’이라는 이름으로 작성한 실전시나리오에 따른 핵전쟁연습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미국의 핵위협을 제거하려면 한반도에서 전개하는 한미합동군사훈련과 한반도를 대상으로 하는 미국군 단독군사훈련을 영구히 중지시켜야 한다.

주한미국군을 완전히 철군시키면, 미국은 한반도에서 핵전쟁연습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다. 주한미국군 철군은 주한미국군사령부 해체를 뜻하므로, 현지에 전진배치한 야전군사령부가 없이 핵전쟁연습을 실시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필리핀에서 미국군을 완전히 철군한 뒤에 그러한 것처럼, 때로 미국의 신속기동군이 남측에 들어가서 ‘대테러전쟁연습’을 실시하고 빠져나오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주한미국군을 완전히 철군하면 지금처럼 핵전쟁연습을 실시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북측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요구하는 주한미국군 완전철군은 ‘대테러전쟁연습’을 잠깐 실시하고 빠져나오는 것도 거부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완전철군이라 한다.

한반도의 군사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는 사람들은,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철군한 뒤에도 북측에게 핵위협을 계속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반도의 군사상황은 그렇게 단순하게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철군한 뒤에 북측에게 핵위협을 가할 수 있는 방도가 있다면, 한반도 영해 밖에 있는 동해 공해상에 항공모함 전투단을 전진배치하고 전쟁위협을 가하는 것이다. 만약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철군한 뒤에도 동해에 항공모함 전투단을 배치하고 전쟁위협을 가한다면, 그것은 북측과 맺은 모든 공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행위이다. 미국이 북측과 맺은 공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경우, 북측도 당연히 미국의 공약파기에 맞서는 강력한 대응전략을 밀고 나갈 것이다. 북측이 대응전략을 취하는 경우, 대미국교 단절, 평화협정 파기, 비핵화협정 파기가 뒤따를 것이며, 완전히 포기하였던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을 재개하는 긴급조치를 취할 것이다. 북측의 그러한 대응공세는 주한미국군을 이미 철군시킨 미국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주한미국군이 남아있는 동안에 동해에 항공모함 전투단을 출동시키면 북측에게 북침전쟁연습을 벌이는 것으로 되지만, 일단 주한미국군을 철군한 뒤에 동해에 항공모한 전투단을 출동시키면 북침전쟁연습이 아니라 대북선전포고로 된다.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완전히 철군한 뒤에 다시 대북선전포고를 하는 것은 최후의 대파국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이 주한미국군 철군 이후에 대북선전포고를 한다고 해서 주한미국군을 다시 남측에 복귀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북측과 전쟁을 벌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주한미국군 철군 이후의 대북선전포고는 미국에게 혹심한 피해밖에 줄 것이 없다.

한반도의 군사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는 사람들은,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철군하는 것에 상응해서 북측이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포기하는 경우, 북측의 전력공백을 틈탄 미국이 혹시 북침전쟁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하지만, 한반도의 군사상황은 그렇게 단순하게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북측이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에만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보는 것은 북측의 군사력에 대한 일면적인 평가이다. 북측은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포기하고서도 얼마든지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 있는 군사력을 갖고 있다.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이외에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북측의 ‘비밀병기’는 하나 둘이 아니다. 북측의 군사장비가 노후화되었고, 남측과의 무기경쟁에서 뒤졌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어느 나라 군대에나 노후화된 군사장비는 있기 마련인데, 문제는 노후화된 군사장비를 어떻게 작전에 사용하는냐 하는 것이지, 군사장비 노후화와 군사력 약화가 동의어로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남측과의 무기경쟁에서 뒤졌다는 말은 남측과의 무기수입경쟁에서 뒤졌다는 뜻이다. 한국군의 핵심무기는 수입에 의존하지만 조선인민군의 무기는 전적으로 자체생산에 의존한다. 북측이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이외에 어떤 무기를 가지고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 있는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 글의 주제를 벗어나 길게 설명해야 하므로 그 문제를 논하는 것은 다음 기회로 넘긴다.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완전히 철군하는 것에 상응하여 북측이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모두 포기하겠다고 공언한 것은,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없어도 미국에 맞서는 자위적 국방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만일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포기하고나서 미국에 맞서는 자위적 국방력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북측은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포기하겠다고 공언하지 못한다.

둘째, 주한미국군을 완전히 철군한다는 말에 들어있는 정치적 의미에 대해 북측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그 의미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한미관계 정상화라고 말할 수 있다.
북측은 조미(북미)관계 정상화보다 한미관계 정상화를 더 절실하게 요구한다. 비록 조미(북미)관계가 정상화되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주한미국군이 완전히 철군하여 한미관계가 정상화된다면 그것을 더 절실하게 요구한다는 뜻이다.

이 땅의 친미우익세력은 주한미국군 주둔을 맹신하지만, 주한미국군 장기주둔이야말로 한미관계를 비정상화시킨 근본원인이다. 한미관계가 비정상화됨으로써 주한미국군이 장기주둔하게 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주한미국군이 장기주둔함으로써 한미관계가 완전히 비정상화된 것이다. 이를테면, 친미우익세력의 단독장기집권, 대미의존경제의 변태적 고착화, 친미주의사상의 사회적 만연, 대중문화, 공교육, 정보소통의 미국화는 주한미국군 장기주둔이 몰고 온 결과들이다. 비정상적인 한미관계의 근본원인이 주한미국군의 장기주둔에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예상하듯, 만약 주한미국군이 철군하면 남측은 격심한 정치적 불안정에 빠져들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 불안정이란 친미우익세력이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진다는 뜻이다. 주한미국군 완전철군으로 충격과 불안에 빠지는 쪽은 친미우익세력이고, 활력과 고무를 받는 쪽은 반미진보세력이다.

주한미국군이 완전히 철군하면, 반미진보세력은 정치부문과 경제부문에서도 한미관계를 정상화하라고 요구하면서 친미우익세력을 압박할 것이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진 친미우익세력은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폭압정치로 강경하게 대응할 것이다. 이것은 양대세력의 정면충돌이 불가피하게 일어날 것임을 말해준다. 미국에게 의존해온 친미우익세력은 자기들의 대미의존성에 발목이 잡혀서 독자생존능력을 기르지 못한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 까닭에, 미국에게 의존할 수 없게 된 친미우익세력은 자연히 폭압정치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한미국군 완전철군은 반미진보세력 대 친미우익세력의 정면충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주한미국군 완전철군으로 한반도에서 미국이 자기의 힘을 잃어버린 조건에서, 반미진보세력과 친미우익세력이 정면충돌하면 당연히 북측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이다. 이것은 친미우익세력이 반미진보세력과 북측을 이중적으로 상대하는 정치투쟁을 벌여야 함을 뜻한다. 독자생존능력을 기르지 못한 친미우익세력이 미국의 지원도 받지 못하면서 반미진보세력과 북측을 상대로 벌이는 힘겨운 정치투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영에 가깝다. 따라서 친미우익세력의 패배는 시간문제로 될 것이다. 친미우익세력이 주한미국군 철군을 덮어놓고 완강하게 반대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친미우익세력의 정치적 패배는 반미진보세력의 정치적 승리를 뜻하는 것이며, 그 결과는 남측의 대미관계 자주화로 나타날 것이다. 남측의 대미관계를 자주화한다는 말은 민족의 자주성을 실현한다는 뜻이다. 남측의 대미관계가 자주화되어 민족의 자주성이 실현되는 것은, 한미관계의 비정상화로 갈라졌던 나라가 통일된다는 뜻이다. 한미관계 정상화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한반도 통일의 실현이다. 한미관계가 정상화되었는데도 한반도가 분단상태로 여전히 남아있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북측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요구하는 주한미국군 완전철군은 한반도에서 미국의 핵위협을 제거하는 군사적 의미만이 아니라, 한미관계 정상화를 통하여 한반도 통일을 실현하는 정치적 의미도 내포한다. 북측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게 관계정상화와 철군 가운데 어느 한 쪽을 택하라고 강하게 요구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