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변혁운동에 대한 제언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어느덧 8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오늘날 평양은 금기의 도시도 아니며 이남의 자본은 민족경제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에서 이윤을 창출하고 있다. 금강산 육로관광시대가 열리고, 민간에서의 교류 협력은 일상이 되어있다. 이북을 방문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정보기관의 감시를 피해 지구의 반바퀴를 돌아 찾아가는 영웅적 투쟁의 일환이 아니다. 아직 한반도에는 냉전적 대결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고, 조미간 정치군사적 대결은 여전히 첨예하게 긴장되어 있지만 분단모순은 분명히 완화되어 가고 있다.
  지난 10년간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노동자 민중의 삶은 극단적 양극화로 고통이 심화되고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화정도는 이제 전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심화되었으며, 노동시장으로의 진입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일정한 수치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율 하에서 벌어지고 있다. 농업의 완만한 붕괴와 도시에 밀집되어 있는 상당한 규모의 영세자영업자들의 숫자는 한국경제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사회의 계급구성이 전통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진입 이후 또다시 중대한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계급은 점차로 고착화되고 있다. 한국경제의 고도 성장기에 한국의 계급구조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었다. 계급의 존재 및 분화라는 범주와는 별개로 계급간 이동이 어느 사회보다 활발했으며 몰락과 상승의 교차는 현란할 정도로 다채로웠다. 자수성가한 사람은 사회적 존경의 대상이었으며, 자본가와 지주의 몰락한 2세들 이야기는 흔한 것이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한국사회가 유례없이 이룩한 교육의 평등화였으며, 높은 교육열이었다. 교육은 출세(계급간 상승이동)의 가장 강력한 도구였으며, 형식상 그리고 어느 정도는 실질적으로 전국민에게 열려있는 기회였다. 이런 현실은 역으로 계급갈등을 완화하는 완충제의 역할을 하였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교육은 계급 고착화의 강력한 수단이 되고 있다. 대학등록금이 연간 천만원에 달하는 현실에서 저소득층 자녀가 대학에 진학해서 수학하는 것은 가계의 엄청난 출혈을 의미한다. 더욱이 유소년 교육에서부터 시작되는 사교육의 활성화는 교육에 투여되는 비용의 팽창을 가져왔으며, 이른바 엘리트코스를 따라가기 위해선 어느 정도 규모의 부를 소유할 때에나 가능해 졌다. 대학등록금 천만원 시대는 한국사회가 계급적으로 고착화되고 있다는 현실의 상징적 표징이다.
  사회변혁운동은 현실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 주체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현실의 모순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모순의 해소를 위한 방도를 책임있게 찾는 것에서 변혁운동의 올바른 노선과 정책이 나오고 이를 바탕으로 위력한 대중투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분명해 진 것 중에 하나는 분단모순의 완화(일시적 반동에도 불구하고)에도 불구하고 계급모순은 더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분단모순이 민중들의 정신문화세계에 남긴 상흔은 아직 강력하게 남아있지만 그것이 과거보다 강화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현재 대중의식화에서 일정하게 정체를 겪고 있고, 보수주의세력과의 사상전에서 답보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분단에 기인한다기 보다는 주체적인 측면에서 찾아져야 한다. 즉, 변혁운동진영이 대중을 설득할 수 있고, 포섭할 수 있는 사상적 담론, 현실해석,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변혁운동진영이 현실의 중대한 변화에 둔감하게 반응하고 있거나 관성적으로 구래의 해석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변혁운동의 도약과 전진을 위해선 현실에 민감하게, 추상적 이론에 멈추는 것이 아닌, 구체적 대안으로서 우리의 노선을 대중들에게 제출할 수 있어야 한다. 대중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변혁노선은 더 이상 변혁노선이 아니다.


1. 한국에서 자본주의질서는 전면화되었다


  단언컨대, 한국사회성격에서 봉건적 유제는 이제 더 이상 독자적 영역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였다. 농업에서 지소작관계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으며 남아있더라도 한국경제를 설명하는데 부수적으로나마 언급할 가치도 없을 정도이다. 있다면 차지농이 있으며, 차지농의 존재는 자본주의적 요소지 봉건성의 요소는 아니다.
  정치사회적으로도 봉건적 유제는 현재 과학적 고찰의 의미있는 범주가 아니다. 어느 나라나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관습, 문화 등의 요소는 강하게 남아있다. 유럽엔 여전히 국왕과 귀족집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영국이나 스웨덴이 봉건적 유제가 강하게 남아있는 사회라고 분석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실질적으로 정치권력을 누가 행사하고 있냐는 문제다. 한국사회에서 실질적 권력-식민지 대리 통치권력은 대자본가집단으로 결정적으로 넘어가고 있다. 과거 미제의 대리통치세력의 대표자는 군부였다. 군부를 중심으로 관료집단, 자본가집단, 잔류지주집단이 한국사회의 지배블럭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대자본가집단을 중심으로 친미적 관료집단, 보수적 군경집단, 인텔리 집단이 지배블럭을 형성하고 있다. 지배블럭의 정치적 대표가 한나라당인데 한나라당의 구성이 점차로 과거 군부출신 중심에서 민간출신으로 확연히 변화하고 정치적 이해에서 대자본가집단의 이익을 노골화하고 있는데서 충분히 읽힐 수 있는 내용이다.
  정치적 지배블럭의 핵심, 즉 미제의 주된 대리인이 군부에서 대자본가집단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만큼 한국의 자본주의 질서가 안정화되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지배질서가 강고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은 그냥 나오는 말이 아니며, 실제 삼성으로 대표되는 대자본가집단의 지배구조는 사회의 주요 상부구조에 촘촘히 뻗쳐있는게 사실이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토대에서나 상부구조에서나 완연히 자신의 모습을 전면화하고 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2. 세계의 자본주의 경제질서로의 통합이 전면화되었다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질서로 편입되거나 연관되지 않은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원래 한 나라 경제가 다른 나라와의 교류나 협력없이 존재할 수는 없는 법이다. 원시공동체 사회에서나 가능할 완전한 자급자족은 이미 고대노예제 사회에서부터 불가능해진 환상일 뿐이다.
  가까운 중국의 변화는 극적이기까지 하다. 불과 20년만에 중국에선 사실상 자본주의 경제질서가 지배적 경제질서로 자리잡았다. 여전히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지만 중국이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경제체제라고 말 할 어떤 근거도 찾기 힘들다. 이북과 쿠바의 경우도 그러하지만 자본주의경제권과의 교류와 협력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불가피하고 필수적이다. 과거 사회주의 경제블럭이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냉엄한 현실이다.
  과거 변혁운동이 상정했던 것은 자본주의 경제권으로부터의 이탈, 사회주의 경제권과의 협력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이제 현실에서 그런 프로그램은 공상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변혁노선도 이러한 현실 변화에 맞춰야 한다. 즉, 외국자본의 몰수, 전면적 국유화라는 자본주의 세계질서를 전면 부정하는 혁명은 가능하지 않으며, 설사 가능하더라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경제권과의 분리는 자국경제의 파국을 의미할 뿐이며 민중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민중들에게 비싼 혁명비용을 요구할 수 있고, 또 민중들이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란 전망은 주관적 욕망에 불과하다. 더욱이 한국처럼 수출형 경제구조를 가진 나라에서 그런 방식의 혁명이 불러올 결과는 명약관화하다. 우리 모두가 크메르 루즈가 되지 않는 한 민중에게 인내와 고통을 요구하기란 불가능하다. 권력을 획득했다가 실패한 혁명들에서 우리는 냉엄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


3. 한국사회는 식민지이다


  한국사회는 식민지 사회이다.
  과거 식민지는 정치군사적 지배를 결정적 표징으로 하였으며 원료공급지/잉여상품판매처의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회는 과거의 식민지와는 그 양태가 다른 식민지이다.
  한국사회는 정치군사적으로 미제에 의해 장악되어져 있는 사회다.
  과거 식민지지배가 총독부를 통해 이루어 졌다면, 한국사회는 주한미대사관과 주한미군사령부가 총독부의 역할을 해왔다. 식민지 대리정권의 교체와 유지에 이들의 역할을 결정적이었다. 더욱이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군대에 대한 지휘권을 틀어쥐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사회의 식민지적 성격에 대한 결정적 징표였으며, 현재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치영역에서 미제의 지배, 자체는 크게 변화하지는 않았지만 앞서 말했듯 핵심적 대리통치세력은 교체되었다. 미제는 대자본가집단을 식민지 통치력의 계급적 기반으로 확고히 교체했다. 따라서 자유주의 정치세력이든 누구든지 이러한 기반을 해체하려는 정치집단만 아니라면 적절히 조절 통제하겠다는 것이 미제의 새로운 통치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적 지배가 보다 포괄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뜻한다. 과거 미제는 한국의 야당이 야당 이상으로 성장하는 것을 배제하였다. 지금 미제는 자유주의 정치세력보다는 보수주의 정치세력의 집권을 원하지만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집권 또한 적정한 통제선 안에서는 포용할 의사를 가지고 있다. 다른 의미로 이것은 미국식 양당구조의 이식이다. 여기엔 보단 근본적 측면에서의 전환. 즉 대자본가집단으로의 통치기반의 전환이라는 역사적 과정이 반영되어 있다.
  다른 한편, 미제의 식민지 통치방식이 정치적으로 포괄적 지배로 전변된 이유로는 한국민중의 반미자주, 민주주의 의식의 성장에 기인한다. 한국민중의 자주적 진출은 미제가 식민지 통치방식을 불가피하게 바꿀 수밖에 없게 만든 결정적 원인이다. 이는 역으로 미제 식민지 통치질서의 위기를 의미한다. 자유주의정권의 탄생은 이러한 위기의 산물이다. 미제와 한국민중간의 일시적 타협물이기도 하다.(따라서 이명박정권의 탄생은 미제의 가속화된 몰락이 '타협'의 여유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역설적 증표라 할 수 있다)
  위기와 타협은 대립하는 양자에게 모두 기회와 역공의 발판이 되기도 한다. 2000년 이후 한반도 정세는 미제와 한국민중-전체 민족의 치열한 대결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그리고 이북의 정치군사적 대결전에서의 승리는 전체 우리 민족과 미제의 대결전에서 결정적 전환을 가져왔다. 즉, 한반도에 대한 정치군사적 지배의 주요 목적이었던 대사회주의 공격기지 구축이 파탄난 것이다. 이에 한반도에 대한 정치군사적 지배의 목적도 수세적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다. 과정에서 한국의 자유주의정권은 쉼없는 줄타기를 해 왔다.
  실제로 한국의 자유주의 정권은 근본적으로는 미국의 이해를 대리관철하면서도 한반도 문제, 민족문제에 있어서는 일정하게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노무현탄핵사태가 보여주듯 미국의 입맛대로, 의도대로 정치권력를 다룰 수는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미국은 최근 몇 년간 한국의 정권을 다루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특이 이북과의 관계 문제에 있어서 분명히 다른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물론 이것이 전적으로 한국의 정치권력이 독자성을 강화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미국에겐 이런 상황의 지속은 위기의 심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위기의 반영이 한미FTA이다.
  한미FTA는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이다. 한미FTA는 제국주의독점자본의 한국민중에 대한 수탈체제를 정치적으로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제는 한반도 이남지역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민족주의로 경도되거나, 비자본주의적 길로 나아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FTA라는 카드를 던진 것이며, 국내의 보수주의, 자유주의자들은 하나같이 이를 반겨 맞았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한국 자본주의가 전면화 고도화되어 있었고, 대자본가집단의 이익과 FTA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태생부터 세계경제를 지향하였다.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정은 비유럽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적 수탈과정이었다. 따라서 한국경제가 세계경제, 특히 미국경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문제는 그 관계의 성격이 무엇이냐라는 점이다.
  한국의 주요 대자본들은 자본의 구성비율에서 외국자본이 과반이상을 확실히 차지하고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한국자본주의가 세계경제와 맺는 관계의 성격이 분명해 진다. 초과이윤의 유출은 한국자본주의가 기형성을 띠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자본의 순환과정이 자기 완결적이지 못한 점, 국민경제의 구성에서 재투자가 자기 동력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식민지 경제체제의 분명한 징표이다.
  미제는 국내 대자본가집단에 대한 통제를 확고히 하고 있다.
  한국경제는 과거와 같이 제조분야에서의 하청생산기지라고만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 졌다. 미제의 한국경제에 대한 지배는 하청질서의 수직계열화에서 금융적 지배로 확실히 그 성격이 변하였다. 삼성반도체와 현대자동차가 제조분야에서 첨단을 달리는 반면 그 자본의 실질적 지배권은 제국주의 독점자본이 틀어쥐는 형태로 변화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런데, 경제적 지배형태가 이렇게 전화되면서 한국경제의 미제로의 종속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금융적 지배의 강화로 한국경제는 미국경제, 나아가 세계경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황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한국경제의 기형성은 더욱 심화되었다. 국제적 금융수탈체계의 확립에 따라 한국경제는 자체로는 발전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여지를 완벽하게 상실하였다. 거대 기업집단의 이윤창출구조가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금융수탈체계에 완전히 포섭되어 있는 상황에서 경제생활의 각분야에서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은 일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양극화는 실질적으로 한국경제를 파괴하고 있다. 지난 10여년간 한국경제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던 중소기업은 체계적으로 해체되었으며, 임노동과 자본의 관계로부터 배제된 거대한 실업자 군은 도시영세자영업자층으로 퇴적되었다. 비정상적으로 팽창한 서비스업 종사자 층은 한국경제의 생산력이 파괴된 잔재를 상징할 따름이다.
  한국은 미제의 식민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것과는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한국은 봉건적 유제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한국의 지배집단은 대자본가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이들의 이해와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이해는 일치한다. (이런 의미에서 고전적 용어로 이들을 매국노, 매판자본이라 지칭할 수는 있다.) 한국은 미제의 원료공급지나 잉여 상품 판매지(무기시장을 제외하고)로서의 식민지가 아니다. 한국은 자본 시장에서의 금융적 지배-종속관계를 통해 생산된 잉여를 제국주의 독점자본에게 제공하고 있다. 식민지에 대한 정치군사적 지배는 포괄적 지배방식으로 전화되었다. 정치군사적 지배의 중심 요구가 대사회주의 전초기지 구축에서 동북아지역 자본 시장(제국주의 독점자본의 이익을 실현시켜주는)의 수호로 이동한 것이다.
  이 모든 변화는 우리에게 이전과는 다른 전략과 노선을 요구하고 있다.


4. 자본주의 발전의 신자유주의로의 진화, 제국주의의 새로운 지배질서


  막대한 잉여자본의 투자처를 찾는 것은 자본의 자연스러운 속성이다.
  일찍이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지도자인 칼 맑스는 ‘자본은 이윤을 찾아 지옥 끝까지라도 쫒아간다’고 설파하였다. 잉여이윤의 재투자를 통해 자본은 확대재생산을 해 왔으며, 경쟁이 생존 조건인 자본에게 확대재생산은 생존의 유일한 방식이다. 이러한 자본의 생존 운동 결과 거대자본이 출현했다. 거대자본의 출현은 곧 거대한 잉여의 발생을 의미하며, 거대한 잉여는 그에 걸맞는 투자처를, 즉 새로운 잉여의 생산처를 찾기 마련이다. 지난 세기의 역사는 자본이 잉여의 생산처, 즉 새로운 이윤, 다른 이름으로는 착취의 기회를 확대하고 심화시키기 위해 전세계를 들쑤시고 다닌 역사다. 여기엔 두차례의 거대한 세계전쟁까지 포함된다.
  잉여의 확대는 금융부문의 거대화를 불러왔으며, 금융자본이 경제전반을 지배하게 되었다. 잉여의 확대는 재투자가 반드시 생산부문에 한정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자본의 성장과 잉여의 거대한 확대는 이윤을 생산부문 뿐 아니라 다른 부문에도 투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의 결합으로 금융자본이 출현하였다. 자본이 전세계를 지배하면서 제국주의의 중심부에는 전세계의 부가, 즉 전세계 민중의 고혈이 집중되었다. 이 모든 부가 생산부문으로 재투자되지 않았음은 자명하다. 이제 자본은 구입-생산-판매의 복잡한 과정보다는 투자-이자획득의 보다 직접적인 이윤창출 수단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금융자본의 출현은 금융자본과 여타 부문의 자본을 위계적으로 결합시켰으며, 그만큼 자본의 착취는 은폐되었고 제국주의 경제체제는 한층 복잡해 졌다. 그럼에도 전세계의 부가 금융자본에게로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숨길 수 없다. 착취의 진상이 예전보다 모호해지고, 복잡해졌다고 하더라도 착취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금융자본의 행위가 비록 생산부문에서 직접 잉여를 추출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자신의 하위체계로 포섭된 자본들에 대한 잉여유출을 강화함으로써 사실상 생산부문에서 잉여를 뽑아올리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례로 론스타 펀드는 외환은행을 사고팔면서 차익을 남긴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한국노동자계급이 생산한 잉여를 강탈해 간 것이다. 다만 그 과정이 ‘투자’, ‘기업매매’로 포장되어 있어 보이지 않을 뿐이다. 
  금융자본의 거대화는 독점화를 가속화시켰으며, 자본은 자기 파괴를 통해 독점을 가속화하였다. 금융자본이 거대지면서 독점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른바 투자이익의 극대화를 위해선 인수합병을 통한 자본의 통합을 통해 보다 합리적 경영조건을 창출하는 것-실제론 합리적 착취효율의 증대-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동시에 파괴적인 과정이기도 했다. 적대적 인수합병이 횡행하면서 개별 자본의 덩치가 거대해짐과 동시에 그 숫자는 줄어들었다. 금융자본의 지배와 함께 자본들 사이의 파괴적인 상호경쟁은 더욱 격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 파괴적인 상호경쟁은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다. 이전의 독점화 과정은 우월한 생산력(경영혁신, 기술혁신 등으로 확보된)을 가진 자본이 그렇지 않은 자본을 흡수하는 과정이었다. 이것은 파괴적인 과정이지만 동시에 우월한 생산력이 일반화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독점화 과정은 오로지 투자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진행된다. 또한 적대적 인수합병의 일상화는 개별 자본들이 잉여를 생산에 재투자하기 보다는 일부를 경영권방어를 위한 금융투자에 사용케 강제하고 있다. 이 투자는 방어적 투자로서 생산력의 향상에 도움을 줄리는 만무하다.
  한편에선 거대자본간의 합병으로 새로운 거대 독점이 생겨나고, 한편에선 적대적 인수합병에 맞선 상호간의 투쟁이 격화되고 있다. 거대독점체들 사이의 경쟁은 더욱 격화되고 있다.
  독점의 가속화는 노동자 민중의 처지와 조건을 악화시키며, 계급충돌의 에너지를 팽창시킨다. 독점이 가속화되고 금융자본의 지배가 심화되면서 노동자 민중의 사회적 처지와 조건은 더더욱 악화되고 있다. 자본간의 파괴적 상호경쟁은 임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있어서도 폭력적인 형태로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 경영합리화는 대량 해고를 의미한다. 오늘날 자본이 사용하는 모든 ‘합리화’의 의미는 ‘대량해고’, ‘노동강도 강화’를 의미한다. 파괴적인 상호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본은 임금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사실 그 외에 다른 방도도 없다. 결과적으로 독점의 가속화는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짝을 이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규모 실업자군, 불안정한 취업실태, 노동강도의 강화는 그 자체로 노동자계급을 불순한 공기에 젖어들게 만드는 조건이다. 계급충돌의 에너지는 뜨거워지고 있다.
  이윤추구의 압박은 국가규제와 충돌을 불러왔으며, 새로운 경제질서를 위한 정치이데올로기로서 신자유주의는 등장하였다. 이윤을 획득하지 못하는 순간, 자본은 자기 운동을 멈춘다. 확대재생산은 경쟁을 생존조건으로 하는 자본의 숙명이다. 따라서 독점화가 더욱 거대하게 가속화되고, 금융자본의 지배가 심화되면서 이윤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은 더더욱 격화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이른바 국가에 의한 각종 경제규제와 충돌하게 되었다. 1930년대 전세계를 덮친 대공황의 결과물로서 자리잡은 국가의 경제관리 시스템-각종 규제와 간섭들로 이루어진-이 공격받기 시작한 것이다. 보다 자유로운 투자를 위해, 보다 자유로운 이윤획득 기회의 창출을 위해 이제 국가규제는 자본이 넘어서야할 중요한 장애물이 된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전체의 붕괴를 막기 위해 고안된 국가관리 시스템은 자본의 탐욕스러운 자기 팽창 앞에 이제 용도폐기될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한번 정착된 시스템을 ‘개혁’하기 위해선 새로운 영역에서의 투쟁이 요구되었다. 바로 정치영역에서의 투쟁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요한 자원은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런 배경에서 강력한 정치투쟁을 위한 자본의 이데올로기적 무기로서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이데올로기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오늘날의 제국주의와 동의어로 사용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공적영역을 시장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공공시스템의 시장화를 추동하였다. 신자유주의가 먼저 공격한 것은 국가관리 경제부문이었다. 즉, 공적기업을 사유화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공적기업을 사유화할 경우, 이를 인수할 능력은 금융자본에게 있다. 총자본의 표상으로서 금융자본의 지배는 공적 영역을 차츰 차츰 시장지배체제하로 잠식해 갔다. 전기, 수도, 의료, 교육, 우편 등등 과거엔 국가가 책임져야 할 것들로 여겨졌던 부문들이 시장에서 ‘합리적(?)’으로 경영되어져야 할 것들이 됐다. 그리고 마침내 사회복지보장제도도 경제적 ‘비효율성’이라는 명분으로 공격받게 되었다. 사회복지보장제도는 축소되었으며, 이른바 ‘생산적 복지’라는 명분으로 합리화되었다. 사회전체의 붕괴, 갈등의 폭력화를 막기 위해 고안된 자본주의적 사회보장시스템은 신자유주의의 공격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사회적 조건을 창출키 위해 국가가 책임졌던 제반 공적 경제영역들은 성장하고 거대해진 자본의 요구에 의해 마침내 시장으로 되돌아갔다. 이제 자본은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으로부터 이윤을 뽑아낼, 그것도 적나라하고 노골적으로 뽑아낼 태세를 갖춘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계급과 계급간의 사회적 합의를 과거로 돌렸으며,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정치적 합의를 해체시키고 오로지 시장계약만을 유일한 구속력으로 인정하였다. 자본은 이른바 공적영역에 대한 공격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자본은 누구를 공격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자본은 마침내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을 쉴 틈 없이 들이댔다. 공공영역을 시장질서로 포섭하는 과정, 사회복지보장체제를 축소하는 과정은 격렬한 계급투쟁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제한적이고 불충분하나마 지난 역사에서 획득해낸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성과물들을 뺏앗는 과정이었다. 자본의 요구는 오로지 하나 ‘경제적 합리성’이었다. 그러나 그 ‘합리성’이 무엇인지 현실은 투명하게 보여준다. 이 정치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은 후퇴를 강제받았다. 정세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자신의 마수를 드러낸 때는 노동자계급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냉전의 해체, 좌파운동의 국제적 분열, 노동운동의 관료화, 반제전선의 이완 등은 신자유주의가 노동자계급에게 승리할 수 있는 충분조건이었다. 미국과 영국에서 노동자계급은 심각한 패배를 경험했으며, 이 패배로 신자유주의의 확산은 기폭제가 되었다. 다시금 국가는 경제영역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했으며, 시장계약이 공적인 법체계를 대신하는 시장지배질서가 확고히 자리잡아 갔다.
  신자유주의는 세계경제질서에서도 자본의 자유로운 운동을 제약하는 일체의 법적 규제와 제한을 철폐하기 위해 투쟁하였다.
  각종의 다자간 경제협약 체결을 위한 노력은 자유로운 자본의 운동을 보장하기 위한 제국주의독점자본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매개 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독점자본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관계로 다자간 협약체결은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FTA는 일대일 경제협약으로 국가와 국가가 하나의 자유시장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세계경제질서를 제국주의독점자본이 지배하는 단일한 자유시장질서로 재편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는 정치이데올로기이다.
  신자유주의는 정부가 시장계약을 보장하는 강제력으로서 역할만을 요구한다.
  신자유주의는 세계정치경제질서에서도 제국주의 국가의 ‘경찰’ 역할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은 단순 경제투쟁이 아닌 심각한 정치투쟁이며, 지역적으로는 격렬한 무장투쟁을 수반한다.
  기존의 공적영역과 전세계의 모든 지역에 시장지배질서를 확립한 제국주의 독점자본은 이윤을 찾기 위해 시장지배질서를 더욱더 확장시키고자 한다. 쇠붙이란 쇠붙이는 다 먹어치우는 불가사리처럼 자본의 이윤추구는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을 시장지배질서가 먹어치우게 만들고 있다. 이는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을 의미한다. 계급충돌의 거대한 에너지는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다.
  나아가 더 이상 먹어치울 것이 없어져 가면서 자본끼리의 파괴적인 내부투쟁은 불가피해진다.
  제국주의 독점자본과 전세계 노동자 민중간의 대립과 갈등은 더욱 심각해 질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질서에 포획된 나라와 민족들의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 또한 격화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의 기치 아래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그 아래에 자기의 묘혈을 파고 있다.


5. 반신자유주의투쟁은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 투쟁이다


  반신자유주의투쟁은 그 자체로는 사회주의 투쟁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자본주의를 반대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으나,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것들-공적 영역의 시장화, 노동 강도의 총체적 강화 등-을 반대한다는 의미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반대자들의 대오엔 사회주의자들도 있겠으나, 중도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케인즈주의자들을 비롯한 우파 경제노선의 다양한 추종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계급적 성격을 단순화시켜 규정지을 수는 없다. 또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당면한 과제가 반자본주의, 즉 임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철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반신자유주의 투쟁은 사회주의-계급해방 투쟁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
  반신자유주의투쟁은 민주주의투쟁이다. 민주주의투쟁이라 함은 그것이 민중(혹은 공민-국민)의 권리를 확장하기 위한 권력투쟁임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전반에 대한 시장의 지배력을 확대, 강화하기 때문에 시장에서의 강자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근대 이래로 확립되고 널리 받아들여져 온 '인민주권'의 원리와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사회전반에 대한 시장지배력의 확대 강화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영역-공적 영역의 축소를 가져온다. 예를 들어 정부의 기본 임무 중 하나인 경찰 제도를 보자. 경찰 제도는 그것이 지배계급의 합법적 억압력이라는 측면과 함께(사회적 갈등이 있는 시점에선 이점이 전면화된다) 시민 생활의 기본적인 안전을 책임지는 공적 역할도 가지도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이념에 의하면, 안전의 문제도 시장에서 보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구현되는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사설 경비업체가 성장하고, 부자들은 질 높은 안전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된다. 반면 경찰 그 자체는 질서 유지의 업무만을 유지하면서 본연의 계급적 성격을 노골화하게 될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최소한의 야경 서비스조차 받지 못하고, 그들의 저항은 경찰에 의해 분쇄되는 상황이 결코 상상만의 일은 아니다.
  조세제도도 그런 식으로 바뀔 것이다. 지금의 누진세제도조차 시장 논리에 어긋남으로 폐지된다면, 유통과 시장비용 감소를 위해 대폭적인 조세감면이 이뤄진다면, 정부는 모든 사업의 집행에 대자본가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며, 대자본가들의 권력은 공식적인 정치제도와는 무관하게 거대해 질 것이다. 정치가들이 자본에 종속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이러한 경향은 당연히도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인민주권의 원리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원리가 교과서에만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는 그동안 민중의 권리를 확대하고, 정치권력을 구성하는데 민중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해 온 역사적 투쟁과정에서 중요한 동력이 되어 왔다. 이에 따른 대중의 혁명적 진출을 완화시키기 위해선 지배계급도 어느정도 그러한 요구를 제도-형식적으로 어느정도는 충족시켜 주어야 했다.
  확대되는 시장지배력에 대해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은 정치권력을 통한 법과 제도적 통제밖에 없다. 따라서 반신자유주의투쟁은 민중의 권리를 확대하고, 정치권력에 대한 민중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민주주의투쟁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반신자유주의투쟁은 처음부터 정치투쟁이자 이념투쟁일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투쟁은 '정치권력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과정은 반독재민주주의투쟁의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이었으며, 그 결과는 87년 직선제 쟁취로 나타났다.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혹은 형식적 민주주의)는 완만하고 늦은 속도이기는 했지만 점차로 정착되어 갔다.
  한국사회에서 지금 민주주의투쟁은 '정치권력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집중되고 있다. 이 과정은 정치-사회영역에서 민중의 권리를 확대하기 위한 과정, 반신자유주의투쟁의 과정이며, 아직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최근 광우병쇠고기 파동으로 촉발된 촛불시위도 결국 정치권력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과제를 제기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혹자는 민주주의가 '다수결'의 원리에서 '소통'의 원리로 발전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물론 일면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대중이 요구한 것은 '소통'을 넘어선 '정치 권력의 역할에 대한 답변'이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부가 국민의 이익을 외면하는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인 것이다. 나아가 비록 국민에 의해 선출되었어도 국민의 이익을 저버리면 국민에 의해 내려올 수도 있다는 것을 선언한 투쟁인 것이다. 그리고 국민의 안전을 시장논리에 내맞긴(안 팔고, 안사면 된다는) 신자유주의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맞선 반신자유주의, 민주주의투쟁인 것이다.
  반신자유주의투쟁은 임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철폐하기 위한 사회주의 투쟁이 아니다. 그럼에도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가장 커다란 적은 자본이다.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독점자본이며, 국내적으로는 그에 철저히 결탁되어 있는 대자본가 집단이다. 정치적으로는 그에 기반한 보수/자유주의 정치세력이다. 따라서 반신자유주의 투쟁은 민주주의투쟁이면서 동시에 계급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투쟁이 격화되면 격화될수록 그 계급적 대립이 표면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 계급적 대립의 한 가운데에는 노동자계급과 제국주의 독점자본/국내 대자본가집단이 있다. 투쟁이 격화되면 격화될수록 사회의 모든 계급과 계층, 집단들은 양자를 중심으로 갈라 설 것이며, 결국 보다 많은 동맹군을 획득한 계급이 승리할 것이다. 이 지점에 치열한 계급투쟁이면서 동시에 민주주의 투쟁으로서의 반신자유주의투쟁의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이 치열한 계급투쟁이자 민주주의투쟁에서 누가 지도력을 발휘할 것인가? 무엇으로 강고한 조직력과 전투력을 유지할 것인가? 어떤 정책과 강령으로 동맹군을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 이 모든 것에 대한 실천적 대답이야 말로 투쟁의 오늘과 내일을 결정 지을 것이다.
  반신자유주의투쟁은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 투쟁이다.
  그리고, 민주주의투쟁의 과제는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민주정부는 반신자유주의정부이다. 이 정부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제정치세력, 지식인, 종교, 사회집단의 총합으로 구성되는 정부이다. 따라서 이 정부는 반신자유주의 민주연립정부가 된다. 이 정부의 정책은 공적영역의 확대, 공민적 권리의 확대, 노동강도의 완화, 시장에 대한 통제의 강화를 핵심으로 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어떻게 되는가? 임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철폐하기 위해선 언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공적영역이 끊임없이 확대되는 어느 시점? 노동강도가 완화되고, 시장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어느 시점? 언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공상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노동자계급과 그에 기반한 정치세력이 오늘의 민주주의 투쟁에서부터 헤게모니를 획득하는 것이다.
  이제 다 되었을까? 이 정도면 한국사회변혁의 새로운 요구에 답이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한국적 상황에서 출발하였으나 이제 겨우 현시대 사회변혁의 일반적 성격에 대해 이야기했을 뿐이다. 다시 한국적 상황으로 돌아오기 위해 우리는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를 진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인 한국사회변혁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선 우리는 고전적 논제인 '제국주의/제국주의 미국'의 문제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6. 반신자유주의 투쟁은 우리 시대의 민족해방투쟁이다


  한국사회는 식민지 사회이다. 따라서 한국사회변혁운동의 전망을 논하는데서 제국주의 지배질서를 배제하고 논하는 것은 눈을 가리고 관광하는 것과 다름없는 어리석은 일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오늘날 제국주의 미국의 주된 관심사는 동북아 지역에서 자신의 정치, 군사, 경제적 이익을 보장받는 것이며, 이를 위해 한반도 남단에서 자신의 지배자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한국사회변혁을 하고자 하는 세력의 가장 큰 적이 바로 제국주의 미국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한국사회가 맞닥뜨린 구체적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한국사회변혁의 현실 경로가 민족해방혁명의 경로를 필연적으로 통과할 수밖에 없음을 가르친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신자유주의의 핵심주체가 제국주의 독점자본이라는 점이다. 미국이라는 국가체제는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이익에 철저히 복무하는 체제이다. 미국은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이익을 위해 전쟁도 불사한다. 따라서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주적은 미제국주의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민족해방혁명의 구체적 과제는 무엇이며, 민주주의혁명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오늘날 한국사회변혁에서 나서는 민족해방혁명의 구체적 과제는 제국주의 지배질서를 끝장내기 위한 요구로부터 도출된다.
  제국주의 미국의 군사적 지배는 그 주된 성격이 변화되었다. 이북과의 군사적 대결이 패배로 끝나면서 미국의 군사적 헤게모니는 현저하게 약화되었다.(이는 국내 정치지형에도 영향을 미친다) 또한 한국민중의 자주의식의 성장은 미군의 한국내 정치상황에 대한 직접적 개입을 불허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군사적 지배는 대사회주의 전초기지, 식민지 주둔군의 성격에서 점차로 전 세계에 산재해 있는 미군의 군사기지 네트워크의 하나로 변화되어 갈 것이다. 그 목적은 동북아에서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지역에서 미국의 정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쇠퇴 몰락을 의미하며, 반미자주화투쟁의 전세계적 전진을 반영한다. 나아가 주한미군의 성격과 목적이 변화하고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단지 노골적으로 국내정치상황에 대한 개입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그 어떤 중립화를 의미하진 않는다. 군사력의 투사는 미국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언제라도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전히 주한미군 철수 투쟁은 유효한 구호이고, 투쟁이다.
  제국주의 미국의 정치적 지배는 앞서 논한바, 포괄적 성격을 띠고 있다. 민족해방혁명의 승리가 민족자주정권 수립을 통해 결정된다고 할 때, 제국주의 미국의 정치지배방식의 변화는 오늘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민족자주정권 수립에 함께 할 수 있는 정치세력으로서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적극적 포섭전략이 무의미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포괄적 지배방식은 미국과 한국민중간의 일정한 타협이었다. 그리고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결정적으로 미국으로 포섭되었다. 특히 미국이 이북과의 군사적 대결에서 패배하고 이북과의 평화공존의 길을 모색하면서,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미국간의 사소한 마찰도 해소되어지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포섭의 완결판이 바로 한미FTA이다.
  이러한 정치지형의 변화는 제국주의 미국의 정치적 지배를 끝장내기 위해 한국민중이 자신의 이해를 철저하게 대변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시키고 이를 중심으로 민족자주정권을 수립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새로운 정치세력은 미국의 포괄적 지배방식에 포섭되지 않은 제정치세력과 사회집단들을 규합하여 강력한 반제반미전선을 구축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미국의 포괄적 지배방식에 포섭되지 않은 정치세력들과 사회집단은 어디에 있는가?
  그 답은 미제의 한국사회에 대한 경제적 지배방식에서 찾아 질 수 있다. 미국은 한국민중에 대해, 금융적 지배력을 통해 자본주의적 수탈을 심화시키고 있다. 그 담당자들은 제국주의 독점자본과 그에 결탁한 국내 대자본가집단이다. 이들은 제국주의의 한국사회에 대한 정치적 지배의 계급적 기반이기도 하다. 제국주의 독점자본과 국내 대자본가집단의 이익을 철저하게 보장하기 위해 공적영역의 축소, 노동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 시장지배력의 확대 등을 한국사회에서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한미FTA는 그 결정판이다. 이는 전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신자유주의 수탈정책이 국내에도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 수탈정책에 있어서 국내 보수/자유주의 정치세력은 사실상 동일한 세력이며, 이들은 한미FTA를 매개로 제국주의 미국에 결정적으로 포섭되었다.
  이제 답은 분명해 졌다. 미국의 포괄적 지배방식에 포섭되지 않은 정치세력과 사회집단은 신자유주의 수탈정책에 반대하는 모든 정치세력과 사회집단을 의미한다. 이 범주에 들어가는 세력과 집단은 정치적으로 좌에서 우로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이 새로운 범주는 당연히 과거 반독재민주주의 투쟁시기의 반제전선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과거 민족해방혁명의 과제는 제국주의의 직접 지배를 끝장내고 그의 빌붙은 사대매국노를 척결하여 민족자주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 주된 대상은 제국주의와 현지지배기구, 봉건지주, 매판자본 등이었다. 그리고 민족자주정권의 수립과 함께 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는 것이 전통적인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론의 이론이다. 여기서 민주주의혁명의 과제는 주로 봉건잔재의 청산이었다.
  오늘날 민족해방의 과제는 제국주의의 지배를 끝장내는 것을 의미한다는 데서 과거와 동일하다. 그러나 그 대상과 내용을 상당부분 달라졌다. 제국주의의 지배를 끝장내기 위해선 정치군사적 지배기구(주한미군을 포함하여)를 청산하는 것과 함께 제국주의의 주요 통치기반이 되는 대자본가집단을 무력화해야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제국주의독점자본의 금융지배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을 동반한다.  즉, 주한미군 철수 투쟁과 함께 한국사회의 여러 변화 및 제국주의 지배방식의 변화를 반영하는 반신자유주의를 중심 고리로 한 정치/경제 투쟁이다. 결국 이는 반신자유주의민주주의투쟁의 과제와 잇닿아 있다.
  현실에서 민족해방투쟁과 민주주의 투쟁의 과제는 서로 중첩되며 내용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분리불가하다. 왜냐하면 양자는 반신자유주의투쟁이라는 과제로 강력하게 결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쟁전선도 반신자유주의투쟁을 통해 반제전선과 민주주의전선이 하나의 반제민주주의전선으로 결합되는 것이 현실적합적이다. 이는 실천적으로 반제반신자유주의민주전선의 현실적 기반이 이미 존재함을 의미한다.
  자주, 민주, 통일은 한국사회변혁운동의 총강령이다.
  이 총강령은 한국사회변혁의 성격이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임을 의미한다. 즉, 변혁의 대상으로서 제국주의와 그에 결탁한 대리통치세력을 타도하고 피압박, 피착취 민중이 해방되는 민주주의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혁명의 목표라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가장 핵심적 과제는 신자유주의질서를 분쇄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제국주의의 새로운 지배질서이다.
  그것은 비대하게 팽창한 금융자본이 제국주의 ‘국가’와 자신의 잉여자본을 무기로 하여 전세계 피압박 민족,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체제이다.
  신자유주의는 과거 구식민지체제처럼 식민지의 자본주의 발전을 지체시키지도 않으며 신식민지체제처럼 국제적 분업체계의 틀안에 식민지의 자본주의를 속박하지도 않는다. 신자유주의는 영미식 시장질서를 전세계에 강요하는 것이며, 금융수탈체계를 뿌리박는 것이며, 시장절대주의, 시장만능주의를 민중들의 생활세계로까지 들이밀어 그 땀한방울마저 빨아먹으려는 역사상 가장 흉악한 자본주의수탈체제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를 분쇄하지 않고서 반제민족해방, 민주주의변혁를 논하는 것은 공상과 망상에 불과하다.
  반신자유주의투쟁은 민중들의 생존권적 투쟁을 제국주의 독점자본에 의한 가혹한 자본주의적 수탈체제에 대한 변혁투쟁으로 이끄는 이정표이자 안내자이다. 생존권적 투쟁, 민중들의 경제투쟁은 반신자유주의투쟁으로 재해석됨으로써 변혁성을 획득하게 된다. 민중들의 투쟁이 반신자유주의로 재조직됨으로써 투쟁은 변혁투쟁으로 성장하게 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문제를 회피하고서 자주민주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대중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미 자기 파괴적인 파열음을 내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파열음을 폭발시킬 날카로운 투쟁이다.


7. 조국통일은 반신자유주의투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국통일은 6.15공동선언에서 언급되어 있듯 낮은 단계의 연방제-연합제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현실화될 것이다. 그것의 의미에 대해 이남의 운동진영에서 분분한 토론이 있었지만 어찌돼었든 이북과 이남간의 이질성의 정도가 상당정도로 진척된 현실의 반영이란 점은 분명하다. 이는 이북의 통일정책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남북총선거에서 고려연방제로, 다시 고려민주연방제안으로, 다시 6.15공동선언으로 변화되어온 과정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조국통일의 과제를 해결하는 것은 미제의 한반도 지배체제를 파탄내는 것이며 이는 이남에서 변혁운동을 더욱 진전시키는 것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는 남북간의 이질화를 더는 심화시키지 않고 조국통일을 현실화하기 위한 절대적인 과제이다. 나아가 이남에서 변혁운동의 진전은 곧 미제의 한반도 지배체제를 파탄내는 것의 다른 한 측면이다. 실질적으로 이남지역에서 식민지성이 강화되고 경제적 종속이 심화될 경우 조국통일문제의 해결은 더욱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조국통일의 현실화를 위한 준비는 이남 사회의 변혁운동의 전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8. 선거투쟁과 전민항쟁의 결합은 변혁운동의 현실 경로이다


  한국사회변혁운동은 많은 발전을 거듭해 왔으며, 한국민중의 정치적 성숙도도 매우 높아져 왔다.
  한국사회에서 다시 군사파시즘이 도래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며, 국민들의 기본권을 국가권력이 제약코자 한다면 거센 저항을 각오해야 한다. 나아가 높은 수준의 권리의식은 국가기구의 권위를 무력화시키기까지 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의 반영으로서 오늘날 한국의 정치제도는 존재한다. 한국의 정치제도로서 정당 및 선거제도는 87년 이래로 역사적 정당성을 획득해 왔으며, 그러한 제도를 무시한 정치권력으로의 접근은 국민정서상 용인되지 않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선거, 특히 보통선거권에 기초해서 치러지는 선거는 인민주권원리의 형식적 완결형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선거는 오늘날의 대관식이며, 정권 존립의 유일한 근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매우 특별한 상황의 도래를 제외하고서 변혁운동진영이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방법은 정당 및 선거제도를 통하는 것 외엔 없다. 매우 특별한 상황이라면 다수 대중에 의한 폭발적 가두정치의 도래와 그것이 현실 지배질서를 물리적으로 무력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전민항쟁이다.  이런 매우 특별한 상황이 도래할 가능성을 배제할 이유는 없지만 말 그대로 매우 특별한 상황에서만 그러하다. 그 특별한 상황이란 지배계급이 물리력을 동원하여 민중들의 민주적 의사 표출을 억압하고, 그 물리적 충돌이 격렬하게 발전하여 정치권력을 무력화하는 경우이다. 우리 역사상 그런 경우는 4.19와 부마항쟁, 6월항쟁이 있다. 물론 역사적 반동이 바로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세를 예견하는 것은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점술의 영역이다. 또한 그런 정세가 도래한다고 하여도 선거는 민중이 물리력으로 수립한 정권에 합법성을 부여하는 유일한 장치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변혁의 전망은 87년 민중항쟁을 통해 확립된 정치제도를 기본으로 하여 설계되어야 한다. 이것은 대중적 상식이다.
  이것이 변혁운동진영이 선거투쟁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선거투쟁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곧 선거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선거는 대중의 의사를 조직하는 하나의 방법이며, 다만 오늘날 선거는 역사적으로 정당성을 획득한 가장 유력한 방법일 따름이다.
  계급과 계급의 투쟁에 있어서 물리력은 최종 심판관이다.
  변혁운동 진영이 선거를 통해 집권하더라도 반변혁세력의 공격은 멈추는 것이 아니다. 반변혁세력은 신사가 아니며 계급투쟁은 체스게임이 아니다.
  따라서 선거투쟁은 전민항쟁으로 발전하지 않고선 궁극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다.
  변혁운동진영은 선거투쟁에 주목하고 역량을 집중하면서도 목적의식적으로 그것을 전민항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특히 선거투쟁의 승리와 전민항쟁으로의 목적의식적 전진은 변혁운동 승리의 관건적 요구이다.
  선거투쟁에서 승리적인 결과를 낳았다는 것은 선거에서 당선이 되거나 그에 근접하는 결과를 낳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변혁운동진영은 정세의 주동을 쥐고서 적극적으로 가두정치를 활성화해야 한다. 오로지 그럴때만 선거투쟁에서 획득한 정치적 성과물을 지킬 수 있으며, 그것을 더욱 확대시킬 수 있다.
  선거투쟁은 민중혁명의 뇌관이며, 전민항쟁은 민중혁명의 화약고이다.
  물론 우리에겐 다른 길도 존재한다. 변혁의 길은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한 길에 대한 유연한 태도는 변혁을 실질적으로 진전시키는데 매우 유용한 태도이다. 동시에 우리는 현실가능한 길에 대해 집중할 줄 아는 집중성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9. 합법적 대중정당과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은 변혁운동의 조직적 무기이다


  선거투쟁과 전민항쟁의 결합이 한국사회변혁의 현실경로라면 합법적 대중정당과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은 한국사회변혁이 요구하는 조직적 무기이다.
  한국사회의 현실 정치제도에 천착한 변혁경로를 그릴 경우, 합법적 대중정당은 필수불가결한 조직이다. 선거투쟁에 임하는 조직은 제도적으로 정당조직이 가장 적합한 조직이다. 물론 다양한 조직적 형태로 선거투쟁에 임할 수 있지만 이는 제도적으로 충돌을 피할 수 없다. 정당의 명칭이야 어떻게 됐든(김대중의 국민회의도 명칭만 ‘회의’였을 뿐 정당조직이었다) 제도적으로 규정된 정당형태의 조직이 아니고선 상당한 불이익을 감수하고 선거투쟁에 임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실무적 유용성 외에 정당형태의 조직이 가지는 유용성은 다양하다.
  정당조직은 강령과 규약에 근거한 가장 강력한 형태의 정치조직이다. 정당조직은 출발부터 정치조직의 성격을 전면에 내세운 조직이기에 그 결집력에 있어서 대중조직과는 비교할 수 없다.
  정당조직은 그 성격이 대중적이라 할지라도(레닌적의 의미의 전위가 아니라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민중들의 가장 선진적인 부위의 조직적 결사체이기에 활동력에서 대중조직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정당조직은 그 목표가 정권획득임을 직접적으로 표방하기에 처음부터 높은 수준의 정치활동이 가능하며 그 수준이 대중조직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러나 정당조직은 다양한 계급계층에 뿌리박아야 자신의 생명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다. 따라서 다양한 계급계층의 강력한 변혁적 대중조직들을 자신의 기반으로 하지 않는 합법적 대중정당은 그 생명력을 오래 유지할 수 없다.
  정당조직과 변혁적 대중조직들간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되 원칙적으로는 독립적이어야 한다. 정당조직이 대중조직을 대신할 수 없으며, 대중조직이 정당조직을 대신할 수도 없다. 양자를 혼동하여 대중조직에게 과도한 정치적 역할을 들이민다거나 정당조직을 어중이 떠중이들의 친목회로 만들려는 시도는 양자 모두에게 해롭다. 그런 현상은 정치조직과 대중조직의 중요한 차이점을 망각하고 활동가들의 주관적 의도를 절대시하는 형이상학적 태도이다.
  정치조직은 정치적 요구를 출발점으로 하여 대중에게 확산되는 조직이라면 대중조직은 대중들의 다양한 생활적 요구를 출발점으로 하여 정치적 지향을 수렴해 가는 조직이다. 출발점과 확산/수렴의 방향이 다른 것이 양 조직의 결정적 차이점이다. 이 양자의 중간적 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조직의 정치적 통일성이 아무리 높아도 그것은 대중조직이며, 정치조직의 대중성이 아무리 확대되어도 그것은 대중조직이 아닌 정치조직이다.
  이 양 조직이 만나는 곳이 바로 통일전선이다.
  통일전선이란 원래 특정한 시기, 특정한 정치적 요구를 중심으로 여러 정치세력이 하나의 조직적 질서로 결집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통일전선에서 그 1차적 결집대상은 다양한 정치조직들이다. 이러한 정치조직들이 결집한 통일전선은 합법적이고 제도적 정치영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전반에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다. 고전적 용어로는 상층 통일전선의 구축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이는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의 진보정당들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론 창조한국당, 그리고 민주당 좌파블럭을, 왼쪽으론 보다 급진적인 정치조직들을 포괄하는 것을 의미한다.
  통일전선의 2차적 결집대상, 그러나 결정적 결집대상은 변혁적 대중조직들이다. 대중조직들을 통일전선에 결집시킴으로서 통일전선은 사회적 영향력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질서를 배태시킬 힘을 획득하게 된다. 변혁적 대중조직들이 통일전선에 결집됨으로써 통일전선은 광범위한 대중들을 단일한 정치적 요구로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하며, 대중들의 정치적 요구를 폭발시킬 수 있는 기회를 획득하게 된다. 이를 통해 민중이 주인되는 새로운 정치질서를 수립할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고전적 용어로 하층 통일전선의 구축을 의미한다 하겠다. 현실에서 이는 민주노총, 전농, 전빈협, 학생대중단체, 청년단체들을 포괄하는 것을 의미한다.


 10. 합법적 대중정당은 통일전선을 건설하는 조직적 주체이며  변혁적 대중조직은 통일전선의 주력군이다


  통일전선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으며, 대중조직들을 대충 그러모았다고 저절로 강력한 통일전선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과정은 고도의 정치예술을 전개하는 과정이다. 고도의 정치예술과정의 조직적 주체는 당연히 민중의 가장 선진적이고 의식적 부위인 합법적 대중정당이다. 정당은 대중조직에 소속된 인자들을 발동하여 대중조직의 정치적 결집도를 높여내고 이를 해당시기 절실한 민중의 요구를 중심으로 결집한 통일전선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 또한 통일전선이 힘을 가지기 위해선 단지 대중조직의 지도부만이 이름을 거는 식의 조직이 아니라 대중들이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활동가의 목적의식적 활동과정이며 당이 대중 속에서 대중조직을 정치적으로 강화하고 결집시키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역으로 당의 대중적 지반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고전적 이론에서 통일전선은 전위당이 건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명제에 따라서합법적 대중정당이 통일전선건설의 조직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이견을 표하거나, 나아가 합법적 대중정당운동을 부차시하고 통일전선운동에만 주력하는 양태도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 양태는 일면 정당한 측면이 존재하지만 심각한 개념상, 현실인식상의 오류에 빠져있다.
  먼저 '전위'라는 개념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이다. 전위의 상대개념은 후위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지역적으로 전위는 다양한 형태로 지칭되고 논의된다. 전위는 정확히는 군사용어에서 나온 개념이다. 군사적으로 전위, Vanguard는 전황을 이끄는 선봉부대를 의미한다.
  정치적으로 전위는 프랑스 혁명 이래로 가장 전투적이고 조직적이며 각성된 인자들의 정치조직을 의미했다. 이들 정치조직이 상대적으로 주저하며, 조직되있지 않고, 현실의 모순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대중들, 즉 후위에 위치한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고, 투쟁에 나서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 개념인 것이다. 따라서 전위는 말그대로 앞장서는 사람인 것이다.
  전위의 개념을 보다 정교하게 발전시킨 것은 볼쉐비즘이다. 레닌은 유명한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 2차 당대회에서 전위당 개념을 제출하였다. '당의 강령을 지지하며, 당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당원자격을 제한할 것을 제출한 것이 그것이다. 레닌은 러시아의 짜리즘은 사회주의 '대중정당'이 아닌 '훈련된 정수분자들의 결사체'를 요구한다고 파악하고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을 그러한 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레닌의 당조직노선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폭압적 국가기구의 악랄한 탄압에 맞설 조직노선은 그것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레닌에겐 짜리즘이라는 폭압체제가 있었고, 유럽엔 파시즘이, 아시아엔 식민주의가 횡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닌의 전위정당노선은 인식 상에서 '전위'라는 개념을 화석화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누구나 '전위'라고 하면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만의 무슨 비밀스럽고, 상명하복의 군사조직과 같은 조직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전위'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며, 레닌의 전위정당노선은 단시 시대와 사회적 환경에서 나온 요구였을 뿐이다.
  따라서 전위는 합법적 대중정당도 될 수 있으며, 대중조직의 혁명적 지도부도 전위라 불릴 수 있으며, 가두투쟁의 선동가들도 전위라 불릴 수 있다. 즉, 전위라는 개념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변혁운동의 대중적으로 공인된 전위는 합법적 대중정당이다. 왜냐하면 합법적 대중정당이 한국사회의 가장 선진적이고 각성된 민중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이 합법적 대중정당을 이끌어가는 지도부가 있다면 이들 또한 합법적 대중정당의 전위대오라 지칭할 수 있다. 이들이 공식적 체계의 지도부이든, 내외부의 정치집단이든 상관없다. 전위는 어디까지나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 형태가 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상관없다. 그것은 전위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대중적으로 공인된 전위는 합법적 대중정당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합법적 대중정당이 통일전선을 건설하는 조직적 주체로 나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다. 통일전선건설이 고도의 정치예술을 요구한다고 할 때, 그것을 수행할 조직은 현재, 한국사회에선 합법적 대중정당밖에 없다.
  해당 시기 근로민중의 가장 절박한 요구를 정책과 노선으로 내 건 합법적 대중정당, 그리고 그에 의해 대중 속에서부터 추진되고 만들어진 강력하고 광범위한 통일전선의 존재는 변혁운동 승리의 보증수표이다.
  그리고, 오늘날 필요한 통일전선의 성격은 반제반신자유주의 민주연합전선이다.
  통일전선의 성격은 당면한 변혁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어야 하며, 가장 광범위한 대중의 변혁적 이해와 요구를 반영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사회변혁의 핵심 과제로 등장한 반신자유주의 민주주의 투쟁의 과제를 반영하는 통일전선, 반신자유주의 민족해방투쟁의 과제를 반영하는 통일전선을 건설하는 것이 변혁운동의 요구로 된다. 여기서 핵심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입장 문제이다. 현실에서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통해 민족해방, 민주주의의 과제가 결합되는 만큼 신자유주의에 대한 입장 문제가 적과 아를 가르는 핵심 기준선이 된다.


11.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진전과 대중투쟁의 활성화는 새로운 단계를 요구한다


  강력하고 광범위한 통일전선의 전제조건은 합법적 대중정당(혹은 강력한 정치적 결사체)과 강력하고 다수 대중을 포괄하는 변혁적 대중조직의 존재이다.
  합법적 대중정당을 제대로 건설하기 위해선 당의 중심을 어떤 계급에게 놓을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합법적 대중정당은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계급, 제국주의의 촉수를 잘라내는 계급인 노동자계급에 자기 중심을 확고히 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좌우 기회주의와의 투쟁에서 민중들의 변혁적 요구를 굳건히 지켜낼 수 있다.
  동시에 합법적 대중정당은 농어민, 도시영세자영업자, 청년, 학생, 몰락하는 중소자본가에게까지 자신의 대중적 지반을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시대, 전사회적 양극화에 대응하여 당은 양극화의 한편으로 몰리는 다양한 계급계층을 자신의 편으로 하여야 하며, 이들을 단결시킬 슬로건을 제출하여야 한다. 이것은 노동계급의 이해와 결코 대립되지 않는다. 즉, 제국주의와 그의 대리통치세력인 대자본가 집단의 몰락을 촉진시키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가장 절박한 요구이며, 이를 위해선 이들 외의 모든 계급계층을 반신유주의의 기치로 단결시키는 것이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합법적 대중정당의 중심은 노동자계급에 위치해야 한다. 그래야만 합법적 대중정당이 환경과 조건의 변화에 조응하면서도 변혁운동을 일관된 방향으로 밀고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당이(정당활동가들이) 자기 중심을 노동자계급에 둔다는 것과 노동자계급이 곧바로 변혁운동의 일관된 주력군이 된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노동자계급이 변혁운동의 명실상부한 주력군이 되기 위해선 정당의 목적의식적 활동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과거 노동자계급을 변혁운동의 주력군으로 불러일으키기 위해선 부르주아정치세력의 영향력을 걷어내고 노동자계급 속으로부터 자신의 정치세력을 건설해야 했다.
  지금 요구되는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요구는 노동자계급에 중심을 둔 합법적 정치세력을 건설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간 것이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으로 표현되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조직은 이미 건설되어 있다. 그러나 노동자정치세력화의 과제가 완성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은 미조직상태에 있으며, 조직노동자들 또한 다수는 보수정당의 영향력 하에 있다. 민주노동당 건설, 당원확대라는 노동자정치세력화의 단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단계로의 도약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민주노동당 건설은 다른 한편 자주, 민주, 통일과 노동해방이라는 변혁강령과 방향에 대한 추상적 합의의 과정이었다. 노동자정치세력화가 보다 진전되기 위해선 추상적 강령과 노선에서 한발 더 나아간 구체적이고 총체적인 정책과 노선의 제시가 필요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산업정책에 대한 계급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과거 반봉건투쟁시의 ‘경자유전’과 같은 산업정책에 대한 계급적 전망, 슬로건이 제출되어야 하며, 그것이 노동자 계급대중으로부터 동의를 획득해내는 과정으로서 노동자정치세력화는 새롭게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결국 이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변혁적 대안을 제출하고 이를 노동자계급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계급에게 신자유주의에 대한 변혁적 대안은 경제산업정책에 대한 계급적 전망을 의미한다. 정규직/비정규직, 대공장/중소영세사업장, 제조업/비제조업 등등 노동자를 분절화시키는 자본의 숱한 경계를 뛰어넘는 노동자계급의 변혁적 경제산업정책, 금융수탈체제의 뿌리를 뒤흔드는 경제산업정책, 몰락하는 중소자본과 영세자영업자들을 포괄할 수 있는, 경제에 대한 생산적 전망을 제시하는 산업정책이 없고서는 일상의 수탈과 분절화에 따른 상호 경쟁에 지친 노동자계급을 새롭게 조직해 낼 수는 없다. 나아가 스스로를 역사적 전망을 가진 계급으로 노동자계급을 재조직해 낼 수 없다.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일보전진을 위해선 내부의 민주주의를 활성화해야 한다.
  지난 민주노동당의 현실에서 정파담합구조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압살하는지를 충분히 보아왔다. 패권주의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패권주의는 건강한 토론과 문제제기를 가로막으며 가족주의, 써클주의, 분파주의의 원인이 된다.
  모든 조직에 토론과 소통을 활성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조직문화에서 일체의 식민지 군사문화, 봉건문화를 척결하고 모든 조직이 구성원들을 평등하게 대하고 각각의 눈높이에서 토론과 소통을 활성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동지들간의 호칭 문제부터 혁신해야 한다. 상명하복, 봉건잔재의 냄새를 풍기는 일체의 존칭은 과감히 생략해야 한다. 동지들간에 '동지'란 말보다 높은 존칭은 존재하지 않는다. 직책 뒤에 '님'자를 붙이는 대신 '동지'라는 명칭의 사용을 적극 권장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출발일 뿐이다. 상급이 하급에 지침을 일방 하달하는 조직문화도 혁신되어야 한다. 어렵고 힘든 현장상황에 대한 해결책 없이 지침만 하달하고 '결사관철'을 외친다고 지침이 실현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관념론자의 머릿 속, 골방 전위주의자들의 문서 위에서나 존재한다. 물론 역으로 현장 상황을 이유로 해야 할 일을 안하는 것은 자기 태만이자 방관이다.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 소통과 토론, 상급과 하급이 함께 현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하는 노력이 지금 시기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건강한 토론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자기 견해를 충분히 표현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충분히 경청하고, 자파의 이익이 아니라 전체의 이익을 위해 충분히 의사를 교환하며, 상급과 하급이 현장돌파를 위해 쌍방향 토론을 강화하고, 공조직을 우선적으로 앞세우는 기풍의 확립이 조직을 활성화시키고 생동하게 만드는 법이다.
  민주주의중앙집중제를 이야기할 때, ‘다수의견에 복종하고 소수의견을 존중한다’라는 원칙에서 소수의견 존중이 삭제되는 순간 패권주의가 발동되는 것이며, ‘토론의 자유, 단결된 집행’에서 단결된 집행이 삭제된다면 분파주의가 발동되는 것이다. 근자의 민주노동당 사태는 패권주의와 분파주의가 부딪친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분당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분당사태가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민중들에게 심각한 해악행위임 또한 분명하다. 얼치기 좌파 인텔리 분자들이 분당을 노래하는 동안 고통받는 것은 노동자 민중들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배자들의 떡부스러기와 하찮은 개개인의 명망 뿐임은 그들 스스로 증명하였다. 그들 얼치기 좌파 인텔리분자들과 노동자민중의 운명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
  민주주의를 활성화하는 것은 이를 통해 노동자계급을 정치적으로 성장시킬 유력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법을 획득하고, 다른 사람과 상호의견을 교환하고, 합의를 만들어내고, 협력을 창출하는 과정을 배우는 것이야말고 가장 훌륭한 정치교육과정이다. 나아가 다수파임에도 패권을 배격하고, 소수의견일 경우 다수의 의견에 흔쾌히 따를 자세를 배우는 것을 통해 높은 수준의 정치력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민주주의를 활성화하는 것을 통해 노동자계급은 자신이 창출할 새로운 사회질서의 원형을 성숙시킬 수 있으며, 이는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중요한 바탕이다. 또한 이를 통해 합법적 대중정당을 패권주의와 분파주의로부터 구해내고 노동자민주주의의 우월성을 대중적으로 선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새로운 진전과 함께 다양한 변혁적 대중조직들을 강화하는 것은 통일전선을 실질적으로 강화하는 유일한 길이다.
  변혁적 대중조직들이 보다 광범위하고 강력한 조직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대중투쟁을 잘 벌이고 활성화시켜야 한다. 대중투쟁을 잘 벌이고 활성화시키기 위해선 대중들이 참가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투쟁방식을 구사하고, 대중들의 가장 절박한 요구를 적시에 들고 싸움을 전개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다양한 변혁적 대중조직들의 대중투쟁 현황을 보면 자기 대중들조차 온전히 발동시키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조직되지 않은 대중들까지 동참시키는 큰 규모의 대중투쟁은 꿈도 꾸질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민주노총의 예만 하더라도 80만 조합원을 총궐기시키는 투쟁을 전개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배타적 지지정당인 민주노동당에 대한 투표조직에서도 자기 조직의 50%도 발동시키지 못하고 있다. 학생운동조직들의 상황을 보면 더욱 참담하기 이를데 없다. 한때 10만을 동원하던 한총련 출범식이 다양하게 형태를 바꾸어도 5천을 조직하기 힘든 상황이며, 최근에는 어떤 이슈에도 1만 이상을 동원하는 투쟁을 전개하질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은 다양하게 찾아 질 수 있다.
  그 중 중요하게는 패배하는 투쟁이 근 10년동안이나 누적되어 왔다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경우도 97년 총파업의 일시적 승리 이후 패배는 너무나 일상이 되어 왔다. 활동가들이 아닌 노동자 대중이 느끼는 패배에 대한 피로도는 장난이 아니다. 남발되는 총파업은 남발되는 횟수만큼 위력이 감소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역편향으로 투쟁 자체를 스스로 자제하는 것은 대중투쟁을 포기하는 것이며, 결국 대중조직의 변혁성을 스스로 내버리는 것이다. 준비된 투쟁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의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가두의 투쟁만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들의 의지를 모아 표현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내야 한다. 가두의 투쟁은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투쟁의 정점으로, 반드시 승리한다는 전제로서 조직되어야 한다.
  노동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선 현장 조직운동을 일보전진시켜야 한다.
  노동조합 공조직을 활성화하고, 위력적인 투쟁을 담보해 낼 수 있는 조직으로 강화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그 뿌리가 되는 현장 조직운동을 획기적으로 강화해 내야 한다.
  현장 조직운동을 강화하기 위해선 정파주의, 써클주의를 배격하고 명실상부한 대중 정치 운동을 담보해 낼 수 있는 조직운동으로 자기 운동을 강화해 내야 한다. 특히 대공장에서 현장 조직운동이 선거를 중심으로 하는 담합 정치를 혁신하지 않는 한, 일상적 정치 운동을 활성화하지 않는 한 대중운동의 침체는 더더욱 심화될 것이다. 이는 결국 대중들의 집단 이기주의에 굴종하는 양태로 현장 조직운동이 타락하는 것으로 결과될 뿐이다.
  현장 조직운동을 강화하기 위해선 전투적 조합주의를 극복하고, 노동운동의 사회적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전투적 조합주의는 조합주의적 요구를 전투적으로 관철시키려는 일련의 태도를 의미한다. 조합주의는 그것이 아무리 전투적이어도 조합주의에 불과하다. 조합주의는 경제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당장의, 눈앞의 경제적 이익에 노동조합이 전투적으로 복무하더라도 노동자들의 의식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높아지지는 않는다. 전투적 조합주의가 강화될수록 조직노동자들의 집단이기주의적 경향이 강화될 뿐이며, 우경화될 가능성만 높아 질 뿐이다. 임금인상 투쟁을 전투적으로 한다고 노동자들의 인식이 혁명적으로 각성될 것이란 기대는 환상이다. 임금인상 투쟁을 전투적으로 하면 임금인상에 대한 요구만 높아질 뿐이다. 그리고 임금인상투쟁으로 자본주의 질서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따름이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경제투쟁은 오로지 자본과 임노동의 모순을 교육시키는 계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자본과 임노동의 모순은 경제투쟁으로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자본과 임노동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선 노동자계급이 사회적으로 보다 많이 발언하고 정치적 사안에 대해 보다 강력하게 개입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현장 조직운동이 전투적 조합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적, 정치적 운동으로 노동운동을 향도하지 않는 한 현장이 활력을 잃고 대중운동의 침체는 장기화 될 것이다. 그러나 계기는 오히려 늘고 있다. 민중 생활의 곳곳을 상품화, 시장논리화하려는 신자유주의가 기세를 부릴수록 대중의 생활영역으로 노동자계급을 사회적, 정치적으로 각성시킬 가능성은 오히려 높이질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장 조직운동이 노동자 대중의 눈 앞의 경제적 이익에 굴종하고, 손쉽게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려는 유혹을 떨쳐낼 수 있느냐에 있다.
  학생운동의 경우, 6.15공동선언 이후 오히려 대오가 줄어들고 있음에도 적절한 원인분석이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다수 대중들이 느끼는 절박한 요구에 눈돌리지 않고, 높은 수준의 정치적 요구만을 중심으로(물론 중요하다) 투쟁한다면, 당연히 운동은 소수화될 수밖에 없다. 더욱 큰 문제는 대중들의 절박한 현실에 대한 설명과 대안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단언컨대 분단문제로 신자유주의가 해명될 수 없으며, 이제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민주주의투쟁의 핵심과제가 되었으며, 조국통일투쟁에 버금가는, 아니 더 심각한 대중적 투쟁과제로 부상했다. 이점을 간과하고 외면한다면 학생운동의 미래는 없다. 나아가 과거의 조직형태나 문화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새로운 환경과 조건에 걸맞는 조직형태와 문화를 창출해야 한다. 공개적인 학생정치조직활동을 통해 대중에게 직접 책임지는 정치활동을 전개하는 것도 충분히 고려할만한 방법이며, 학생회라는 대중조직을 공조직답게 운영하기 위한 과감한 조치들도 필요하리라 본다.
  중소영세자영업자들에 대한 특별한 고찰이 요구된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시대, 한국 자본주의가 전면적으로 발전한 오늘날 가장 빠르게 몰락하고, 경제적으로 극단으로 내몰리는 집단이다. 특히 생계형 자영업자들의 경우 그 처지와 조건이 조직 노동자들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는 집단이다. 이들은 평균 12시간 이상 노동에 시달리며, 휴일도 거의 없이 일을 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그럼에도 파산하는 자영업자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이들이야 말로 신자유주의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을 조직하고 새로운 운동의 의제를 개발하는 것은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새로운 동맹군을 만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지역운동의 동력과 의제 개발에 이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이들 집단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고찰은 대중운동의 폭을 확대하고 변혁운동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간략하게 나마 대중운동의 활성화에 대해 몇가지 제안을 던져보았다. 이글의 직접적인 목적이 대중운동 활성화에 있기 보다는 한국사회변혁운동의 중심과제에 대한 제기에 있기에 상대적으로 부족한 측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앞으로의 실천을 통해 보다 생동감있게 채워질 수 있으리라 본다.
  이 글의 요지는 간략히 다음과 같다.
  한국사회변혁의 중심과제는 반신자유주의 투쟁이다. 반신자유주의 투쟁은 우리 시대의 민족해방투쟁이자, 민주주의 투쟁이다. 이 투쟁을 성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선 합법적 대중정당과 통일전선이 필요하다. 통일전선의 성격은 반제반신자유주의 민주전선이다.
  동지들의 비판적 지적과 토론을 바라면서 제언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투쟁!!!

 (김혁만  9월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