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은 ‘자주’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이다

박경순 (한국진보운동연구소 소장)

 

‘또 다시’ 촛불의 바다가 전국을 뒤흔들고 있다. ‘촛불’은 이제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 코드가 되고 있다. 역사의 고비마다 민중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뛰어나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를 구원했다. 그러한 민중들이 ‘또 다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이번 ‘촛불’의 정치적 배경과 의미, 향후 과제를 밝혀본다.

1. ‘촛불’은 4.9총선 때부터 이미 예고되었다

4.9총선에서 보수적 후보가 개헌선을 넘는 의석(203석)을 차지함으로서 외형적으로는 보수적 정치지형이 확고히 고착된 듯 보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민주주의 시대는 끝나고, 당분간 보수적 정치지형이 계속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을 비웃 듯 총선이 끝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거대한 촛불의 함성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 거리로 뛰어나온 수만 명의 대중들은 이명박 탄핵을 외치면서 정부의 굴욕적 소고기 협상을 격렬히 성토하고 있다. 대중들의 분노는 지금 하늘을 찌를 듯 그 기세가 높고 바다와 같이 깊다. 이것은 결코 우연도 아니며, 일과성도 아니다. 이러한 분노의 표출은 이미 4.9총선 때부터 예고되었다.

이번 4.9 총선 투표율이 46.1%에 그치자, 많은 사람들은 너무도 낮은 투표율에 놀랐지만, 그 의미를 깊이 있게 천착하지 않았다. 대부분 경향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정치적 무관심 탓으로 돌리거나,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의 표현쯤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일부 예리한 안목을 가진 분석가들은 이것이 단순히 정치적 무관심 탓이거나 찍을 후보가 없다는 기성정치권에 대한 불신의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새로운 결심의 표현이라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46.1% 투표율은 그 자체가 강력한 정치적 분노와 항의의 표현이자, 대의정치세력이 아닌 대중정치투쟁전선을 통해 민중의 요구를 관철하겠다는 정치적 의지의 표출인 것이다.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와 같은 민중들의 침묵, 이것이 46.1%의 투표율에 담긴 정치적 함의이다. 이것을 알 수 없었던 이명박 대통령은 과반수 의석달성에 안도하며, ‘미친 소 수입’을 조공선물로 바치고 캠프데이비드 별장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2. ‘촛불’은 새로운 국면의 예고탄이다

촛불은 현재 계속 활활 타오르고 있다. 이번 촛불이 어떻게 타오르고 어디로 번질지 아직 판단하기에 이르다. 향후 촛불의 향방이 어떠하던 간에 이미 한국사회에 던진 메시지는 매우 강력하고, 그 정치적 파급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첫째, 촛불은 보수적 정치지형에 파열구를 내고 민주주의의 후퇴를 저지할 강력한 저항전선을 형성했다.

2006년 5.31 지자제 선거, 2007년 12.19 대선, 2008년 4.9총선에서 연이어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정치세력들이 압승함으로서, 보수적 정치지형이 형성되고, 친미보수세력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천신만고 끝에 권력을 되찾은 친미보수세력들은 ‘잃어버린 10년’을 읊조리며, 다시는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굳게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시켜 갔다. ‘민주 개혁적 조처들의 무효화’ ‘공안기관의 강화’ ‘언론장악’ ‘진보개혁세력들의 합법적 거점 제거’ 등의 파쇼적 조처들이 착착 준비되고 있었다.

이러한 파쇼적 조처들이 그냥 방치될 경우 민주주의는 또 다시 위기에 빠지게 되고, 진보개혁세력들은 각계 격파될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파쇼독재체제의 등장이다. 이러한 민주주의 위기상황이 도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선패배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진보개혁 정치세력들은 이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까운 시일 내에 그러한 능력을 갖출 수 있다는 담보도 없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촛불’이 타올랐던 것이다. 놀랍게도 여중고생이 주축이 된 ‘촛불’의 바다는 그 규모에도 놀랍거니와 그 ‘절묘한 시기’에 더욱 놀라게 된다. 친미보수세력이 반동적 공세를 퍼부을 준비를 채 마치기 직전에 일격을 가한 것이다. 이 한방은 너무도 강렬하고 통쾌하다. 민중들은 이 한방으로 보수적 정치지형을 근본에서부터 뒤흔들어 놓았으며,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려는 지배 권력의 파쇼적 공세를 차단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는 강력한 대중정치 전선을 만들어 논 것이다. ‘people's power’의 위력을 과시함으로서 지배 권력에게 ‘함부로 날뛰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를 날린 것이다.

둘째, 촛불은 강력한 반미 반이명박 대중정치역량을 결집시킴으로서 대중정치투쟁전선 형성의 기폭제가 됐다.

광범한 민중들 내부에 잠재해 있던 패배주의와 절망을 일소하고, 새로운 기대와 투쟁의지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이번 촛불의 역사적 정치적 의의가 있다. 연이은 선거패배로 의기소침하고 있으며, 향후 진로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실망하고 절망해 있던 진보개혁세력들에게 이번 ‘촛불’은 충격 그 자체였다. 활활 타오르는 ‘촛불’을 통해 잊고 있었거나 회의하고 있었던 ‘민중의 힘’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고, 미래에 대한 새로운 기대와 꿈을 되찾고, 거리로 뛰쳐나가 ‘촛불의 바다’에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번 촛불은 ‘대중들의 보수화’란 한낱 허구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실천적 실증적으로 보여주었고, 대중들은 여전히 강력한 정치적 분노를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회와 조건만 주어진다면 강력한 정치적 저항행동으로 그것을 표출시킴으로서 역사를 전진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웅변해 주었다. 광범한 민중들은 여전히 앞으로 나가고 있으며, 앞으로 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대중들의 이러한 정치적 분노를 조직화된 반미 반정부 정치투쟁으로 결집시킬 수 있는 능력과 준비를 갖추느냐이다.

이번 ‘촛불’은 ‘대중들의 보수화’란 한낱 허구적 이데올로기이며, 여전히 앞으로 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반면에 현 지배 권력은 이러한 대중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며, 민중의 요구에 반하는 정치적 행동을 계속할 것이 분명하다. 특히 진보개혁세력들을 고립시키기 위한 각종 정치적 탄압과 억압을 강화할 것이다. 이로 인해 지배 권력과 민중들 간의 모순과 대립은 더욱 격화될 것이고, 대중들의 정치적 불만은 더욱더 증폭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촛불’은 결코 일회성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반미 반이명박 정치적 저항 투쟁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즉 향후 정세가 어떻게 펼쳐질 지를 예고해 주고 있다.

3. 대중의 분노, 그것은 ‘자주’에 대한 열망이다

‘촛불’을 통해 민중들이 요구하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겉으로 드러난 요구는 ‘식탁의 안전’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대중들의 절절한 염원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청맹과니이다. 정부당국자들은 이번 ‘촛불’에 대해 교통사고보다 수십 배나 낮은 확률, 로또 복권보다 더 낮은 확률을 들먹이며, 사태를 침소봉대한다고 투덜거린다. 하지만 광범한 대중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뛰어 나오는 것은 죽음(광우병)에 대한 단순한 공포 때문만은 아니다.

분노의 뿌리는 죽음(광우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아니라, 국민들의 ‘생명’을 타자(미국)에 내맡겨 버리는 ‘무책임한 태도’인 것이다. 현 정부당국자들은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의 만찬(한미동맹 강화)을 위해 우리 국민들의 생명 문제를 내팽개쳐버렸고, 이것이 국민 대중들을 분노케 한 것이다. ‘검역주권’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광우병 문제와 함께 독도문제가 여론의 쟁점으로 떠 오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번 ‘촛불’은 ‘자주’에 대한 대중들의 강렬한 열망의 분출이며, 표현이다. 자신들만을 위한 ‘한미동맹 강화’를 위해 국민 대중들의 생명을 희생양으로 내던져 버린 정부당국자들에 대한 강렬한 분노의 표출이다. 그리고 이번 사태는 민족과 민중들의 생명과 재산, 즉 민생을 위해서라도 ‘민족자주’가 얼마나 절박하고 절실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광우병 소고기 파문은 미국의 정치 외교적 압력에 대한 굴복의 결과이며, 맹목적 ‘한미동맹 강화론’의 필연적 귀결이다. 지난 시기에는 ‘자주가 밥 먹여 주나’라는 데마고그가 그런대로 통했다면, 오늘날에는 ‘자주 없이는 민생안정(밥)도 없다’는 것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한미동맹 강화를 위해 민생을 희생할 것인가? 민생을 위해 자주를 선택할 것인가?”의 양자택일이 강요되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또한 이번 ‘촛불’은 민주주의를 거꾸로 되돌리려는 보수회귀에 대한 강력한 경고이며,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적 열망의 표출이다. 노무현 정권을 거부했던 대중들이 원했던 것은 파쇼독재시절의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민생’과 ‘민주주의’가 함께 보장되는 새로운 민주주의인 것이다. 이것은 민생문제에는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했던 절차적 민주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민주주의이며, ‘자주’를 본질로 하는 ‘자주적 민주주의’이다.

여기서 ‘자주’는 대외적으로는 ‘민족자주’로 표현되며, 대내적으로는 ‘민생우선’으로 나타난다. ‘민생우선’은 ‘민중주체’와 통한다. 민중들이 주체가 되어야 민생문제 해결을 최우선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추진할 수 있으며, 민중들이 주체가 된다면 당연히 민생문제 해결에 최우선 관심을 돌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민생’과 ‘민주주의’가 함께 보장되는 새로운 민주주의는 민중주체의 민주주의이며, 이는 자주적 민주주의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번 ‘촛불’은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들의 새로운 진군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4.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나갈 것인가?

‘촛불’은 결코 우연적인 사건이거나 일과성 해프닝이 아니다. 그것은 향후 정세를 예고하고 있으며, 민중들의 요구와 염원의 향방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촛불’이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고 어떻게 결말을 맺을 지 여부와 관계없이 ‘촛불’로 결집된 ‘자주’를 향한 대중들의 정치적 진군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현재 제기되는 가장 절박한 정치적 과제는 당면 투쟁(광우병 소고기 반대투쟁)에서 승리하는 것과 함께 ‘촛불’로 결집된 ‘자주’를 향한 대중들의 정치적 진군을 가속화시킬 수 있는 정치 조직적 방도를 마련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당면 투쟁에 관해서는 생략하고, 대중들의 정치적 진출을 가속화시킬 수 있는 정치 조직적 방도에 대해 몇 가지 밝혀 본다.

첫째는 ‘민생제일주의’를 앞세워 민중적 진지를 튼튼히 꾸리고 진보운동진영에 대한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신뢰를 형성해야 한다. 새로운 민주주의(자주적 민주주의; 민생민주주의)를 향한 민중들의 진군은 결코 한두 번의 투쟁으로 끝날 수 없으며, 중장기적 준비를 통한 강력한 민중투쟁역량의 구축을 요한다.

따라서 민중투쟁역량(민중적 정치역량)을 튼튼히 꾸리는 사업을 무엇보다 앞세워야 하며, 여기에서 핵심은 진보운동진영이 ‘민생제일주의’를 앞세워 민생수호를 위한 활동과 투쟁을 일관되게 펼쳐 민중들의 지지와 신뢰를 튼튼히 하는 것이다. 민중적 진지를 튼튼히 하고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신뢰를 얻지 못하게 되면 새로운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역량을 튼튼히 꾸려낼 수 없다.

둘째는 ‘변혁적’ 정치투쟁전선을 견고하게 세우고 일관되게 투쟁을 펼쳐 나가야 한다. ‘민생제일주의’와 ‘민생매몰주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민생제일주의’를 핑계로 ‘변혁적’ 정치투쟁을 홀시하고 경제투쟁에만 매몰되어 버린다면, 이번 ‘촛불’에서 명백히 드러난 대중들의 강력한 정치적 불만과 분노를 놓치게 되고, 정세의 주도권을 상실하는 한편, 대중들에게 정치적 무능력 집단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진보운동진영의 제일의 과제는 광범한 대중들의 정치적 불만과 분노를 대변하고, 이를 정치투쟁으로 승화 발전시키는 한편, 대중들의 정치적 분노를 조직하고, 정치의식을 높이기 위한 정치활동을 일관되게 펼쳐나가는 것이다. 특히 현 시기에 있어 계급적 모순과 대립, 대중들의 정치적 불만과 분노의 집중지점은 ‘반미 반이명박’이다. 이러한 변혁적 정치투쟁전선을 강화하기 위한 활동과 투쟁은 민생투쟁으로 대체될 수 없으며, 민생투쟁을 이유로 뒤로 밀릴 수 없다.

지금 우리들은 중대한 역사의 분기점에 서 있다. 새로운 민주주의(민생민주주의; 자주적 민주주의)를 향해 앞으로 전진할 것인가? 아니면 친미보수세력에 의한 보수회귀를 허용해 파쇼체제 등장을 초래하게 할 것인가? 이번 ‘촛불’은 이런 중대한 분기점에서 진보운동진영이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에서 정세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게 해주는 천금의 기회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달려 나온 민중들에 대한 예의이며, 역사적 의무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민생제일주의’와 ‘변혁적 정치투쟁’기치를 높이 들고 앞으로 달려 나가야 한다. (5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