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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 12월초부터 이듬해 3월말까지 몽강현 남패자에서 장백현 북대정자에 이르는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행군을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다. 그 행군이 있은 때로부터 어언 반세기이상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우리 인민은 지금도 이 행군에 대하여 잊지 않고 있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이 행군을 통하여 이룩하신 위대한 업적과 항일유격대원들이 발휘한 불굴의 혁명정신은 우리 인민이 천추만대를 두고 따라 배워야 할 귀중한 유산으로 되고 있다.

이 절에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역사가들과 작가들에게 들려주신 고난의 행군에 대한 회고담을 편집하였다.

 

동무들이 그동안 우리 당이 이룩한 혁명전통을 체계화하고 그것을 소개선전하는 데서 많은 일을 해놓았습니다. 작가들도 혁명전통을 주제로 하는 교양적 가치가 큰 문학작품들을 많이 창작하였습니다.

고난의 행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달라는 동무들의 요청을 받은지도 이제는 퍼그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좀 품을 놓고 말해주자고 합니다.

우리가 고난의 행군을 한 1938년말-1939년초는 항일무장투쟁역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련의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의 정세를 보면 우리가 대부대를 데리고 조국으로 나갈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엄광호와 같은 사람이 혁명의 저조기가 왔다고 공공연하게 떠들 정도로 정국은 우리한테 매우 불리했습니다. 그런 때에 대부대가 국내진출을 단행한다는 것은 사실상 하나의 큰 모험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담하게 국내진출을 위해 압록강연안에로의 행군을 단행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가? 우리 혁명 앞에 닥쳐온 역경을 순경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앉아서 걱정만 해가지고서는 문제를 풀 수 없었습니다. 물론 밀영 같은데 들어가서 배겨있으면 한해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도 있고 역량은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현상유지나 해가지고서야 어떻게 혁명 앞에 조성된 난국을 타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힘이 들더라도 고난의 행군을 해서 조국에 나가기로 했습니다.

혁명을 계속 앙양시키자면 그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1938년은 서간도지구와 국내인민들의 사기가 떨어졌던 때입니다. 「혜산사건」으로 해서 수많은 지하조직원들이 잡혀가게 되자 국내혁명운동은 시련을 겪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다가 적들은 인민혁명군이 다 망했다고 드립다 선전해대고 있었습니다. 망하지 않은 것을 망했다고 했지만 그런 선전이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갔습니다. 적들의 선전이 가짜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들조차도 혹시나 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인민들한테 굴러 들어가는 것은 모두가 흉흉한 소식들뿐이었습니다. 한다 하는 혁명가들조차도 신심을 잃고 백두산쪽만 바라보았습니다.

선전활동을 하는 데서는 적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막강한 선전수단을 가지고 합법적으로 선전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디에서 혁명군이 「전멸」되었다는 충격적인 기사를 신문에 그럴 듯하게 실어 수만부 내보내면 그 기사를 수천 수만 명이 보았습니다. 방송도 그 선전에 합세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선전수단이란 대내에서 발간하는 몇 종의 신문, 잡지들과 선동비라, 격문 같은 것들이 고작이었습니다. 거기에 각 지방의 지하조직들에서 찍어내는 얼마간의 인쇄물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힘들게 배포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한 장의 비라를 뿌린 것 때문에 목숨을 내놓은 애국자들도 있었습니다. 한 배낭쯤 되는 비라를 지고 국내에 들어가자고 해도 지하공작원들은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혁명군이 녹아 났다고 적들이 선전할 때 그것을 허위라고 까밝히며 혁명군이 살아있다고 선전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국내에 들어가서 총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총소리만 내면 지하조직도 많이 내올 수 있었습니다.

서간도에서 온 연락원의 말에 의하면 장백지구의 지하조직들은 대부분 파괴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국내에서도 숱한 사람들이 검거되었는데 살아남은 조직원들은 어디에 가 숨었는지 연계를 지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보고들을 받고 나서 아무리 다 마사졌다고 해도 그루터기야 좀 남아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루터기만 남아있으면 조직들을 다시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장백에 나가서 조직을 수습해 놓고 그런 다음 조국에도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마당거우에서처럼 한해 겨울동안 밀영에 들어 앉아 군정학습을 하다가 날씨가 따뜻해진 다음에 새로운 작전을 펼쳐도 되지 않는가, 엄동설한에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있겠는가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말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국내의 반일투쟁이 준엄한 시련을 겪고 있는 때에 어떻게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고생이란거야 혁명초기부터 밥먹듯 해온 것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뭐 역사에 없는 고생을 한두 번만 해왔습니까. 국내의 반일투쟁이 시련을 겪고 있고 국내인민들이 백두산쪽만 쳐다보는데 조국해방의 사명을 스스로 걸머지고 나선 혁명군이 팔짱을 끼고 그것을 강건너 불보듯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나무껍질을 우려먹으면서라도 조국으로 가자, 희생도 있을 수 있고 우여곡절도 있을 수 있다, 총검의 숲을 헤치고 가야 할 노정인데 어찌 간난신고가 없겠는가, 그렇더라도 발자국을 크게 찍어보자, 와지끈 퉁탕 하고 부딪쳐 보자 하는 것이 그 당시의 내 심정이었습니다.

이상에서 말한 것이 우리가 고난의 행군을 하게 된 동기라고 할까, 통속적으로 표현하면 고난의 행군의 목적은 국내를 한번 들었다 놓자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무들도 알겠지만 항일무장투쟁을 하는 기간에 어려운 행군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1932년 가을에 우리가 부대를 이끌고 안도에서 왕청으로 갈 때의 행군도 어려운 행군이었고 1차 북만원정을 갔다가 간도로 돌아올 때의 행군도 어려운 행군이었으며 1937년 초봄의 무송원정도 어려운 원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몽강현 남패자로부터 장백현 북대정자에 이르는 행군은 행군기간으로 보나 그 간고성으로 보나 종래의 행군들과는 대비도 할 수 없는 간고한 행군이었습니다. 행군기간이 100여일이나 되기 때문에 이 행군은 「100일행군」이라고도 불리우고 있습니다. 기간을 보면 사실 110여일이나 되는 행군이었습니다. 고생이 너무도 막심했기 때문에 그 행군을 가리켜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나는 지난 날 행군에 대해서 쓴 글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철의 흐름」같은 작품은 영화로도 보고 소설로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고난의 행군과 같이 간고하고 곡절 많은 행군에 대해서 서술한 글은 아직 한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중학시절에 「철의 흐름」이란 장편소설을 읽고 세상에 이처럼 고생스런 행군도 다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한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코주흐가 중첩되는 고난을 뚫고 나가는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고난의 행군을 겪고 나서는 그것이 우리가 체험한 고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의 행군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엄혹한 자연과의 투쟁, 극심한 식량난과 피로와의 투쟁, 무서운 병마와의 투쟁, 간악한 적들과의 투쟁이 하나로 엉켜진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심각한 투쟁이 동반되었습니다. 그것은 고난을 이겨내기 위한 자기자신과의 투쟁이었습니다. 초보적으로는 살아남기 위한 투쟁, 나아가서는 적들과 싸워 이기기 위한 투쟁이 바로 고난의 행군의 기본내용이었습니다. 참으로 고난의 행군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진 시련과 난관으로 일관되어 있었습니다.

그 해에는 추석 전에 첫서리가 내리고 추석이 지나서는 벌써 첫눈이 크게 내렸습니다. 초겨울부터 강추위에 박달나무가 얼어 터졌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여기에 식량난과 쫄라병까지 겹치고 쉬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적들과 싸움을 벌여야 했으니 그 고생이란 참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남패자에서 북대정자까지는 도보로 대엿새면 가 닿을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적들과 싸우느라고 무려 100여일이나 되는 엄청난 품을 들여서야 거기에 가 닿을 수 있었습니다.

동무들도 고난의 행군로정도를 보았겠는데 어떻습니까? 그 행군로들이 여간 복잡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난의 행군은 육체적인 부담이나 고통으로 보아도 종전의 원정들과는 대비도 할 수 없는 거창한 행군이었습니다.

그러면 고난의 행군이 어떻게 되어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역사에서 유례없이 어려운 행군으로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적들의 끊임없는 추격과 포위 속에서 행군이 진행된데 있습니다. 그 추격과 포위가 얼마나 집요했는가 하는 것은 아마 동무들도 상상조차 못할 것입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리 주력부대에 「토벌」역량을 총집중하였습니다. 1군은 다 녹고 얼마 없다, 남은 것은 김일성부대뿐이다, 전역량을 다 동원하여 김일성부대「토벌」에 집중하라고 떠들어대면서 야단법석을 하였습니다. 적들은 통신수단으로 비둘기까지 날리면서 싸움에 열을 올리었습니다.

적들의 전술이 어떤 전술이었는가. 혁명군을 쉬지도 못하게 하고 먹지도 못하게 하고 자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전술을 가지고 수백 명씩 막 들이밀었는데 하루 20번 이상 전투를 한 날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때 다른 원정행군을 떠날 때처럼 슬그머니 남패자를 출발했더라면 그처럼 심한 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들 몰래 조용히 행군을 시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행군벽두부터 총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행군에 필요한 식량을 마련하자고 해도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밀영을 뜨자마자 인차 집단부락을 하나 쳤습니다. 적들은 그 총소리를 들은 다음부터 우리의 꼬리를 물고 늘어졌습니다. 2방면군이 어느 쪽으로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적들이 우리를 가만 내 버려 둘리가 없었습니다.

남패자밀영을 포위하고 있던 적들은 인차 추격을 시작했습니다. 기동이 대단히 빨랐습니다. 우리가 50리 가량 강행군을 한 다음 밥을 해먹자고하는데 어느새 적들이 덮쳐 들었습니다. 그러니 밥해 먹을 재간이 있습니까. 아쉬운대로 젖은 쌀을 배낭 속에 꿍져넣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런 경우를 한두 번만 당하지 않았습니다. 싸움이 없는 단순한 행군이라면 뭘 그다지나 속이 탔겠습니까. 추격과 포위가 계속되고 그런 정황 속에서 싸움을 노상 하게 되니까 곱절 힘들었던 것입니다. 행군의 가장 큰 간고성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 시기 우리가 겪은 또 하나의 커다란 시련은 식량난이었습니다. 우리가 고난의 행군 때 식량난을 겪은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원래 1938년 가을에 한해 겨울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충분히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남패자에서 회의를 하는 동안 많은 양의 식량을 소비하였습니다. 나머지식량은 먼저 떠나는 부대들이 담당지역으로 갈 때 그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습니다. 추운 겨울이어서 산나물이나 풀잎따위의 신세도 질 수 없었습니다. 적들이 좀 덜 갈개면 산짐승을 잡아서 생고기로라도 끼니를 잇겠는데 총소리를 내는 것이 재미가 적어서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단 한번만은 내가 곰사냥을 허락한적이 있습니다. 오백룡이 구새먹은 큰 나무 안에서 잠자는 곰을 발견했는데 제발 한방 갈기게 해 달라고 하기 때문에 적정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고 단방에 잡을 자신이 있으면 쏘라고 했습니다. 그는 단발명중으로 황소만치나 큰 곰을 잡았습니다. 행군초기에 우리 대원들은 하루 두끼씩 죽을 쑤어 먹었습니다. 그러나 식량예비가 얼마 남지 않게 되자 인차 식사끼수를 하루 한끼로 줄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그 한끼마저 먹지 못하고 생눈을 먹었습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게 되니 눈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행군을 하자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눈앞이 가물거리고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해방 후 간부들을 만날 때마다 사람이 배고픈 고생을 좀 해보아야 쌀이 귀한 것도 알고 농민이 귀중한 것도 안다, 굶어보지 않은 사람은 혁명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루는 오백룡이 내 허락을 받고 7도구치기에 내려가서 목재소를 치고 여러 필의 말을 끌어온 적이 있습니다. 식량이 거덜난 때라 우리는 말고기로 끼니를 에우기로 하였습니다. 적들의 포위 속에 있는 때어서 말고기를 굽지도 못하고 소금도 없이 날것으로 먹었는데 두 번째 끼부터는 메스꺼워서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날것으로 고기를 먹다보니 설사가 나서 굶을 때보다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대원들은 설사로 고생을 하면서도 말고기를 그냥 먹었습니다. 먹을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4~5일이 지나서는 그 언 말고기마저 다 떨어졌습니다.

항일혁명투사들 가운데 키가 작은 사람이 많은 것은 한창 먹어야 할 나이에 필요한 영양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고 고생을 많이 한데도 있습니다. 고생이란 고생을 다 하다나니 제대로 자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산에서 싸울 때 음식같은 음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산나물이나 풀뿌리, 나무껍질, 누룩, 쌀겨, 술지게미 같은 것으로 끼니를 에울 때가 많았습니다. 거친 음식을 많이 먹는데다가 불규칙적인 식생활을 하다나니 소화기관이 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카스트로가 우리 나라에 왔을 때 나보고 항일무장투쟁시기 식량은 어떻게 해결했고 피복은 어떻게 해결했으며 잠자리는 어떻게 해결했는가, 그리고 영하 40도나 되는 혹한은 어떻게 이겨냈는가고 물은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고난의 행군 때 식량고생을 하던 일과 혹한 때문에 고통받던 일에 대해서도 말해주었습니다.

카스트로가 그 말을 듣고 몹시 탄복하였습니다. 그가 유격전을 할 때 아마 우리와 같은 고생은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쿠바는 중국 동북지방이나 우리 나라와는 달리 기후가 매우 더운 나라입니다. 그리고 먹을 것도 많습니다.

나는 산에서 싸울 때 전우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하고 시집장가를 갈 나이에 시집장가도 보내지 못하고 고생시키는 것이 제일 가슴 아팠습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고난의 행군의 간고성에 대하여 아무리 이야기해 준다 해도 체험자가 아닌 동무들로서는 그 고난의 실상을 다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행군의 간고성에 대해서는 노정을 따라가면서 더 이야기해 봅시다.

적들은 처음부터 「맹공장추전술」을 썼습니다. 사납게 공격하고 검질기게 추격한다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맹렬한 공격에다가 지꿎은 추격을 배합한 전술이었습니다. 적들의 공격과 추격이 얼마나 집요했던지 우리는 그때 밥을 해먹을 사이도 없어 생쌀을 씹어먹으면서 행군하였습니다.

「맹공장추전술」에서 기본은 진드기처럼 검질기게 달라붙어 상대를 못살게 구는 「다니전술」이었습니다. 일본말로 진드기를 「다니」라고 합니다. 「다니전술」은 「토벌대」를 요소마다에 미리 배치해 놓고 있다가 유격대가 나타나면 치고 또 일단 발견한 유격대는 꼬리를 물고 끝까지 따라가며 소멸한다는 전술입니다. 그 전술은 유격대가 쉬지도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줄창 쫓겨 다니며 얻어맞다가 기진맥진해서 녹아 나게 하기 위하여 고안해낸 것이었습니다. 적들은 서로 교대하면서 얼마든지 쉴 수 있었지만 유격대는 쉴 짬도 먹을 짬도 없이 계속 싸워야 하기 때문에 그 간고성이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옛 병서에 우세한 적의 교대식장거리추격전에 걸려 들면 반드시 패하는 법이니 그런 궁지에 빠져들지 않게 하는 장수가 싸움을 잘 하는 장수라고 쓴 대목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런 함정에 빠져들면 용빼는 수가 없다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함정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적들이 사처에서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데 정말 야단이었습니다. 우리는 깊숙이 빠져들어간 함정에서 빠져 나올 묘술을 찾아내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궁리해 낸 것이 갈지자전법이었습니다.

나는 연대장들을 불러다 놓고 이제부터 행군로를 갈지자모양으로 잡아 나가자, 그리고 굽인돌이마다에 되돌아 앉아 지키고 있다가 적이 나타나면 기관총으로 적들을 쳐 갈기자, 그래야 일본 「다니」를 떼 버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갈지자전법은 눈이 몇 길씩 쌓인 만주산지에서 뒤따라오는 적들을 타격하는데 가장 적합한 전법입니다. 그 해 겨울은 특별히 눈이 많이 내려서 앞 사람이 눈을 다지며 길을 내야만 행군할 수 있었습니다. 눈이 얼마나 많이 쌓였던지 아무리 건강한 대원들도 50~60미터만 가면 맥이 진해서 주저앉군 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눈이 너무 깊어서 몸을 굴려 다져가며 길을 냈고 어떤데는 굴을 파고 지나갔습니다. 눈이 너무 깊은 데서는 대원들이 다리에 감고 있던 각반을 풀어서 한 줄로 이은 다음 모두가 그것을 잡고 행군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야 낙오자가 생기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적들은 어차피 우리가 낸 갈지자길을 졸졸 따라오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중흡은 행군종대의 맨 뒤에서 갈지자모양으로 길이 꺾이는 대목마다 기관총을 휴대한 2~3명의 전투소조를 매복시켰다가 적을 때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적들이 죽은 놈의 시체를 처리하는 사이에 매복타격조들을 이동시켰다가 적들이 다가오면 다시금 같은 방법으로 소멸하군 하였습니다. 적들은 우리가 낸 외통길을 따라왔기 때문에 매번 얻어맞는 신세를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줄곧 피동에 빠져 무리죽음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주도권을 쥐고 적들에게 연속 강타를 먹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 부대는 장설행군을 계속하여 1939년 정초에는 마침내 장백현 7도구치기에 이르렀습니다. 거기까지 오는 동안 임강현 요구집단부락습격전투와 마의하부근전투, 왕가점습격전투들을 비롯하여 무수한 전투들을 했는데 그것은 동무들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적들은 날이 갈수록 더 많은 무력을 「토벌」에 내몰았습니다. 추격을 거듭할 수록 사상자수가 늘어났으나 그들은 부대를 갈아대면서 집요하게 달려들었습니다. 병력의 예비가 무진장한 적들이니 몇백 명쯤 죽는 것은 꿈만 했을 것입니다.

우리 대원들은 행군을 하면서도 잠을 자고 꿈을 꾸었습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걸으면서 잠도 자고 꿈도 꾸었겠습니까. 비행기가 우리의 행방을 찾느라고 자주 돌아 치기 때문에 우리는 우등불조차 마음대로 피울 수 없었습니다. 5호농장에서 농약을 뿌릴 때 쓰는 그러루한 비행기인데 어쨌든 비행기는 비행기였습니다. 그놈의 비행기들이 매일같이 날아와서는 우리 행방을 탐지해 가지고 지상부대들에 연락해주었습니다.

어느 날 아군의 행방을 찾는데 성공한 적들은 인민혁명군의 행군종대에 벌떼처럼 달려들었습니다. 앞에도 적이요, 뒤에도 적이요, 옆에도 적이요, 하늘에도 적이었습니다. 정황이 어찌나 긴박했던지 나는 앞에서 달려드는 적은 기관총소대가 소멸하게 하고 뒤에서 달려드는 적은 7연대가 견제하게 한 다음 나머지성원들은 측면돌파로 포위 속에서 빠져나가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위험한 고비는 요행 모면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노상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행군에 참가한 방면군의 큰 병력으로 집단행군을 하자니 여러모로 불편했습니다. 우선 흔적을 감추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다음은 식량을 해결하기가 곤난했습니다. 수십명되는 사람들이 허리가 부러지게 지고 온 식량도 2~3일만 지나면 바닥이 나는 판이었습니다.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줄창 싸움에 시달려 온 대원들은 행군을 하면서도 픽픽 쓰러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모두가 살아서 장백까지 무사히 가겠는가. 나는 궁리를 하던 끝에 집단행동으로부터 분산행동에로 넘어갈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흩어진다고 해서 만사가 다 잘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흩어지면 흩어지는 데서 오는 부담과 고충이 따로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2방면군을 몇 개의 방향으로 갈라서 활동하게 하고 나 자신은 7연대와 함께 움직일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간부회의에 참가한 지휘관들이 한결같이 내가 7연대와 같이 다니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들은 7도구치기의 밀영들 중에서 제일 안전한 청봉밀영에 사령부가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나의 신변안전을 보장하자는 데 있었습니다. 우리 부대에서 싸움을 제일 많이 하는 연대가 7연대인데 그들과 같이 다니면 나의 신변이 위태롭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휘관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청봉밀영에는 부상자들과 병약자들만 들여보내자, 우리 인민에게는 싸움을 하는 김일성이 소용되지 팔짱을 끼고 숨어있는 김일성은 소용되지 않는다고 내가 말했더니 지휘관들은 더 반대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우리는 방면군을 세 개의 방향으로 분산시키기로 하였습니다. 사령부는 경위중대와 기관총소대를 데리고 청봉밀영을 거쳐 가재수방향으로 나가고 오중흡이네 7연대는 장백현 상강구일대에 진출하여 활동하며 8연대와 독립대대는 무송현 동강일대에서 활동하도록 하였습니다.

방면군이 분산행동으로 넘어가게 된 때로부터 고난의 행군은 제2단계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옛말로 되었지만 그때 우리는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령부와 헤어지는 동무들은 모두 섭섭해하며 눈물을 흘리었습니다. 그 동무들은 경위중대 대원들을 붙들고 사령관을 잘 지켜 달라고 저마다 신신당부 하였는데 그 뜨거운 결사옹위의 정신에 나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원들 가운데는 옷이 형편없이 찢어져서 살이 드러나고 신발이 헐대로 헐어서 맨발을 각반으로 동이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소가죽을 발싸개처럼 싸매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형편에서도 제 몸들은 생각지 않고 사령관의 신변을 걱정해주니 왜 눈물이 나지 않겠습니까.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오중흡은 헤어지면서 오백룡에게 자기네 7연대가 적들을 달고 갈테니 동무네 경위중대는 절대로 전투를 하지 말고 피하라고 하면서 무슨 수를 써서든지 나를 청봉밀영에 눌러있게 하라고 당부했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행군 때에 사령부의 안전을 위해서 바친 오중흡의 희생성과 충실성에 대하여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사령부에 위험이 미치지 않게 하려고 7도구치기를 떠나는 첫 순간부터 달려드는 적들을 자기들 쪽으로 유인하면서 어려운 싸움을 벌였습니다. 자기네를 사령부로 가장하다나니 모든 중하를 도맡아 걸머지게 되었습니다. 적들이 나를 잡자고 혈안이 돼 있는데 그 사람네가 김일성을 옹위하고 있는 사령부집단인체 하였으니 적들이 더 기를 쓰고 덤벼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중흡이네 연대는 그때 한주일나마 낟알구경도 못하고 적을 끌고 다니며 쉴새 없이 싸움을 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홍두산전투 때에도 멀리서부터 총소리를 듣고 달려와 사령부를 잘 보위하였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적들의 성화를 덜 받았습니다. 사령부에 집중되었던 적의 역량이 분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식량난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굶으면서 청봉방향으로 행군했습니다. 청봉에는 우리가 후방성원들을 보내서 감자를 심어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만일 감자가 그대로 밭에 있으면 그것을 캐 먹으면서 며칠동안만이라도 대원들을 휴식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을 번 하였습니다.

우리는 청봉부근에서 난데없는 조밭을 발견하였습니다. 주변의 지형지물을 살펴보니 봄에 우리가 신태자밀영으로 가면서 씨붙임을 한 조밭이었습니다. 아마 산골에 와서 아편농사를 하던 사람이 그 밭을 경작했던 것 같습니다. 봄씨붙임을 하느라고 밭에서 일하던 그 사람은 우리 대원들을 보자 허둥지둥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었습니다. 비적이나 일본군대인줄로 알고 그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밭임자가 달아나는 것을 보고 우리 대원들은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겁을 먹고 달아났으니 언제 여기 와서 다시 씨붙임을 하겠는가, 그 사람이 우리 때문에 달아났는데 밭을 한해동안 그저 묵여둘 수는 없다, 우리가 씨를 뿌려 임자가 가을에 와서 곡식을 거두어가게 하자고 하면서 조를 심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밭의 조가 가을을 하지 않은 채로 그냥 남아있더란 말입니다. 그때 눈에 깔려있는 조이삭을 보고 대원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어떤 대원은 전우들에게 농담으로 세상에 정말 「하느님」이라는게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하느님」이 아니고야 누가 다 죽게 된 우리를 이렇게 도와주겠는가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대원이 『장군님, 지금은 「하느님」도 혁명군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의 덕을 본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의 덕을 본 셈입니다. 우리가 봄에 밭임자가 달아나는 것을 보면서도 씨붙임을 해주지 않고 그냥 지나갔더라면 그런 횡재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원래 우리에게는 새 숙영지에 도착할 때마다 대원들을 동원시켜 밭을 일구고 거기에 조나 감자나 호박 같은 것을 심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숙영지에서 좀 떨어진 평평한 곳에 가서 땅을 뚜지고 종자를 뿌린 다음 훗날 와서 찾을 수 있게 표식을 해두군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전령병들은 장군님, 앞으로 여기에 또 오시겠습니까 하고 묻군 했습니다. 오지도 않을 곳에 씨붙임은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속대사였습니다.

나는 올 수도 있고 못올 수도 있다, 십중팔구는 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시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통신원도 올 수 있고 소부대도 올 수 있지 않는가, 그들이 이런 무인지경을 지나다가 배가 고플 때 감자도 캐 먹고 호박도 따먹게 되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고 말해주군 했습니다. 우리는 부대가 한번씩 지나간 곳에 1호도로, 2호도로, 3호도로, 15호도로라는 식으로 번호를 붙여놓았습니다. 통신원들이나 소부대동무들이 어디에 가서 공작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 어느 길로 갔다왔는가고 물어보면 3호도로로 갔다 왔다든지 15호도로로 갔다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에게 식량이 떨어져 고생하지 않았는가고 하면 그 전날 장군님께서 부대를 인솔하고 행군하다가 숙영할 때 일구게 한 밭에 들려 호박을 따서 삶아 먹었다든가 감자를 캐서 구워 먹고 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항일혁명시절에 식량고생을 얼마나 했던지 우리는 자작나무진까지도 먹었습니다. 자작나무진은 약재로 뿐 아니라 식량보탬으로도 썼습니다.

우리는 눈무지 속에서 한 이삭 두 이삭 힘들게 따낸 조이삭을 찧어 죽을 쒀 먹었습니다. 발방아도 물론 우리가 속성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한주일가량 죽을 쒀 먹으면서 지냈더니 좀 원기가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좁쌀마저 인차 거덜이 났습니다. 식량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청봉밀영에 가서 감자를 한 배낭씩 얻어가지고 가는 것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청봉밀영으로 찾아가는 도중에 강을 하나 만났습니다. 강을 당장 건너야 겠는데 물이 얼지 않아서 건너갈수가 없었습니다. 깊은 산골물은 원래 겨울에 복판이 잘 얼지 않습니다. 다리를 건너가자니 적의 보초가 있을 것 같아 선뜻 용단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방법은 다리를 돌파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한 사람 한 사람씩 기어서 다리를 건너갔습니다.

우리 일행이 다리를 건너서자 적들이 인차 우리를 추격해왔습니다. 그래서 싸움이 붙었습니다. 우리는 적을 뒤에 달고 재빨리 산에 올랐습니다. 그 산꼭대기에 감자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속심은 추격해오는 적을 견제하는 사이에 일부 대원들을 떼내어 감자를 한 짐씩 지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산꼭대기에는 집도 없고 감자도 없었습니다. 아마 밀영에 가있던 후방조성원들이 다 캐 먹었던 모양입니다. 「토벌대」는 어느새 뒤에 따라와서 기관총을 막 쏘아댔습니다. 그러니 야단이었습니다. 나는 대원들에게 이제는 골짜기로 빠져서 저기 버덩 쪽으로 내려가야겠다, 내려가느라면 날도 저물 것이다, 그리고 길도 나질 것이다, 눈은 깊은데 먹을 것은 없지 그런데다가 「토벌대」가 자꾸 뒤쫓아오니 신작로로 나가 강행군을 해서 멀리로 빠져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강행군을 하다가 산림부대들의 병영을 만났습니다. 장졸들은 총소리에 놀라서 어디론가 다 달아나버리고 병실들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병영에 갈비를 비롯하여 먹을 것은 많았습니다. 이거 일본놈들이 독약을 쳐놓고 간 음식이 아닌가 하고 몇 동무가 말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구들에 투전장들이 널려있는 것으로 보아 산림부대가 있던 병실이 틀림없었고 그들이 음식을 먹다가 도망친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구들도 따끈따끈했습니다.

놈들이 추격해 오지만 않는다면 한잠 푹 자면서 피곤을 풀다가 가고 싶은 아늑한 병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한테는 식탁위에 푸짐히 차려져 있는 음식을 먹을 경황조차 없었습니다. 눈으로 얼핏 가늠해보니 사령부성원들이 이틀정도 먹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음식을 다 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산림부대병실을 나서자 적들이 또 우리를 추격해왔습니다. 정말 지독한 추격이었습니다. 우리한테는 땅에 올방자를 틀고 앉아서 만두나 건빵 한 개를 먹을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습니다.

우리 사령부가 적의 추격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가재수에서 지하공작을 하던 사람 하나가 적들에게 잡혔기 때문입니다. 김 아무개라는 그 사람은 우리가 서간도에 나온 후 장백에서 입대한 사람입니다. 입대 전에는 지하혁명조직에서 일을 했고 입대 후에도 싸움을 괜찮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몇 해 동안 우리를 따라다니며 함께 싸우다가 지하공작에 파견되었던 사람인데 적들에게 잡힌 다음 지조를 지켜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가 아마 적들에게 우리의 행방을 대준 모양입니다.

적들은 장백일대에서 제일 크게 총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오중흡이네 연대가 가짜사령부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고 「토벌」역량을 몽땅 우리한테로 집중하였습니다. 적의 비행기도 매일같이 우리 쪽으로만 계속 날아왔습니다. 사처에서 적들이 우리 사령부 쪽으로만 몰려들다나니 우리는 빠져나갈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대원들은 사색이 되었습니다. 왕청시절부터 나를 따라다니며 고생이란 고생은 다해본 오백룡까지도 얼굴색이 꺼멓게 질려있었습니다. 이제는 꼼짝달싹 못하고 다 죽는 판이라고 생각한 지휘관들은 모두 내 얼굴만 쳐다보았습니다.

선동연설이라는 것은 이런 때에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쉴 참에 사령부성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풀 속에 들어있는 바늘은 만쌍의 눈이 밝혀도 쉽게 찾아내지 못한다. 우리가 잘만 꾀를 쓰면 대밀림과 대적의 무리 속에서 능히 바늘처럼 자신을 숨길 수 있다. 이순신장군은 명량해전때 적은 배를 가지고 수많은 왜군의 함대와 싸워 이겼다. 그래서 임진왜란의 대세를 역전시키었다. 이것은 세계해전사에 대서특필할 기적이다. 이순신이 무슨 수로 적을 이겼겠는가. 물론 지혜와 책략, 용기로 이겼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요인은 애국심이었다. 왜적을 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 나라가 망하면 그놈들의 노예가 된다는 분발심으로 적을 이긴 것이다. 애국심이 강했기에 지혜와 용기도 최대한으로 발동된 것이다.

애국심만 버리지 않으면 우리도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 물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정세는 험악하다. 그러나 혁명승리에 대한 신심을 확고히 가지고 난관 앞에 주저앉지 않으면 우리도 능히 대세를 뒤집어 놓을 수 있다. 그러니 신심을 가지고 행군을 계속하자.…

이런 연설을 하자 대원들은 장군님, 명령만 내리십시오, 우리는 장군님을 끝까지 따라가겠습니다 하면서 밝은 얼굴로 행군길에 나섰습니다. 그런 말에 나도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참으로 다양한 전법과 전술을 적용하였습니다. 고난의 행군은 유격전쟁이 창조한 모든 전법과 전술의 종합적인 시험장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때 어떤 묘술을 썼는가 하는데 대하여 두어가지만 말하겠습니다.

행군도중에 행처를 감추기 위해 쓰는 방법으로는 발자국자리를 메우거나 지워버리면서 슬쩍 사라지는 방법도 있고 자빠진 강대나 진대나무를 타고 옆으로 빠지는 방법도 있습니다. 적들을 골탕먹이는 데서 그중 통쾌한 방법은 앞뒤에서 나타난 적들이 제편끼리 맞붙어 싸우도록 싸움을 붙여놓고 슬쩍 빠지는 방법입니다. 이것을 망원전술이라고 하는데 적들끼리 싸우게 하고는 멀리서 바라본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우리가 장백현 홍토산자와 부후물등판에서 적들을 골탕먹일 때 쓴 수가 바로 그런 수였습니다.

홍토산자는 이름 그대로 덩지가 큰 번대머리산입니다. 그때 우리는 추격해오는 적을 뒤꼬리에 단채 그 산을 두 바퀴째 돌다가 앞에서도 적이 나타나자 진대나무를 타고 슬쩍 옆으로 빠졌습니다. 우리를 앞뒤에서 공격하다가 외통길에서 마주치게 된 적의 두 부대는 서로 상대를 인민혁명군으로 알고 맹렬한 총격전을 벌이었습니다. 상대가 제편이라는 것을 모르고 벌이는 맞불질이니 그야말로 사생결단이었습니다.

우리는 부후물등판에서도 이와 비슷한 싸움을 벌이었습니다. 적의 큰 무리가 따라왔는데 떼어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홍토산자에서처럼 부후물등판두리를 빙빙 돌게 하였습니다. 한 두어 바퀴 돌았을 때 새로운 「토벌대」의 무리가 나타나서 우리와 우리를 뒤따르던 본래의 적들 짬에 끼어 들었습니다. 부후물등판두리를 한바퀴 돌자면 하루걸음이 잘 되기 때문에 서로 연계가 없는 두 무리의 적이 겹쳐서 추격하는 괴이한 일도 생기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동무들에게 등판을 계속 돌게 하면서 각자가 발구채만한 나무대들을 한대씩 찍어 메게 하였다가 나무그루와 나무그루사이에 건너놓고 슬쩍 옆으로 빠지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백포로 몸을 가리우고 숲속에 숨어서 생보리를 씹으며 휴식하는 동안 서로 꼬리를 문 두 패의 적들은 제편끼리 기를 쓰고 맞불질을 하였습니다. 제놈들끼리 벌이는 개싸움을 멀리서 구경만 했는데 우리는 총 한방 쏘지 않고서도 숱한 적들을 소멸할 수 있었습니다. 부후물등판에서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손실을 당했던지 적들은 우리가 너무나 감쪽같이 신출귀몰하고 승천입지하는 묘수를 쓰기 때문에 도저히 잡아낼 수 없다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우리는 그런 묘한  싸움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하여 적의 많은 유생역량을 소멸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사람들의 병력후비는 많았습니다. 땅보다 사람이 많아서 해외팽창을 해야겠다고 떠든 일본이었으니 아무리 「토벌군」을 없애 버려도 인차 보충하군 하였습니다. 그와 반대로 산중에서 싸우는 우리는 한 사람만 죽어도 병력을 인차 보충할 수 없었습니다.

부후물등판싸움을 치른 다음 나는 부대를 데리고 밤새껏 강행군을 해서 가재수 쪽으로 쭉 빠져나갔습니다.

내가 야산지대쪽으로 행군방향을 자꾸 유도하게 되자 대원들은 나에게 장군님, 그 쪽으로 빠지면 버덩입니다, 자칫 하다가는 집단부락에 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하고 걱정했습니다.

나는 대원들에게 지금형편에서는 수림지대에 있는 것보다 야산지대로 쭉 빠지는 것이 상책이다, 이대로 추격만 받다가는 우리가 피동에 빠져 아무 것도 못한다, 적은 병력이 많아서 매일같이 「토벌대」를 갈아대는데 우리야 갈아댈 역량이 있는가, 그러니 인원의 손실밖에 날 것이 없다, 오늘 한명 죽고 내일 한명 죽고 모레 한명 죽고 이런 식으로 역량이 졸금졸금 없어진다면 나중에 몇 사람 남겠는가, 7연대와 8연대 동무들은 지금 우리가 이런 곤궁에 빠져있는 줄은 모를 것이다, 사령부를 지원하라고 연락을 보낼 수도 없고 그러니 방법이 있는가, 적들을 수림지대에 떼내깔리고 야산지대에 나가야 한다, 적들이 야산에는 주의를 덜 돌리니 그런데로 나가야 우리가 당분간 숨을 돌리면서 역량을 보존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도 있지만 오히려 주민지구가 가까운 곳이야말로 우리에게는 가장 안전한 곳으로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가재수부락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자그마한 야산에 거처를 정하였습니다. 키가 한길반쯤 되는 소나무와 가둑나무들이 꽉 들어선 소담한 야산이었습니다. 산아래는 벼랑이었고 벼랑 밑에는 개울이 있었습니다. 가재수부락에서 개가 짖으면 그 야산에서도 다 들리었습니다. 가재수를 물방아간동네라고도 불렀습니다.

우리는 날이 어두워지면 천막을 치고 날샐녘이 되면 천막을 거두어 짐을 꾸려놓고 전투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휴식도 하고 학습도 하였습니다. 남패자를 떠난 이후 천막을 치고 지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얼마간 피로를 풀었습니다. 나는 사령부성원들과 마주 앉아 앞으로의 활동방향과 전술적 문제들에 대해서 무시로 토론하였습니다. 음력설이나 지나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사방에 널려있는 부대들을 불러 도처에서 적들을 답새기고 파괴된 조직들도 복구하면서 국경연안과 조국으로 나가자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식량이 거덜나서 야단이었습니다. 당장 굶어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우리에게는 한되박의 쌀도 없었습니다.

나는 경위중대 정치지도원 이봉록을 가재수마을에 내려 보냈습니다. 가재수부락에는 김일동무가 꾸려놓은 지하조직이 살아있었습니다. 안 무엇이라는 지하조직원도 그 부락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우리와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던 농민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산림대에 납치되어 갔을 때 그 산림대의 두령에게 내가 직접 편지를 써서 빼내오게 한 일이 있습니다. 두령은 전날 우리한테 톡톡히 신세를 진적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의 편지를 받자마자 그 농민의 아버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그 농민은 김일의 영향 밑에서 혁명사업을 돕던 사람이었는데 그런 일이 있은 후 인차 지하조직원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봉록에게 가재수에 가면 물방아간주인을 만나고 안 무엇이라는 농민과도 연계를 취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봉록은 산에서 내려가자 우선 물방아간부터 찾아가보았습니다. 그는 물방아간주인을 만나자 산에서 싸우다가 적들의 「토벌」도 심하고 식량곤난도 심해서 이렇게 인가를 찾아왔다고 아리숭하게 자기 소개를 한 다음 밤손님이지만 허물하지 말고 말이나 나누자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이봉록에게 귀순하러 내려왔는가고 냉랭하게 물었습니다. 이봉록은 상대의 마음을 중 떠보느라고 일부러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물방아간주인은 그 대답을 듣고 몹시 섭섭해했습니다. 산에서 고생이야 막심하겠지만 그렇다고 귀순해서야 되겠는가, 나라를 찾자고 일단 총을 잡았으면 끝장을 볼 때까지 뒤를 잘 꼬아야지 이왕 하던 일을 중도반단해서야 되겠는가, 고생스럽더라도 귀순하지 말라고 이봉록을 설복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김일성장군님께서 건재하신가고 물었습니다.

이봉록은 장군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여전히 혁명군을 인솔해 가지고 다니시면서 적들을 답새기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물방아간주인은 그것 보라, 김장군이 건강한 몸으로 혁명군을 그냥 영솔하고 계시는데 당신이 자기 대장을 버리고 귀순한다는게 말이 되는가고 하면서 이봉록을 면박하였습니다.

상대가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완전히 확인한 이봉록은 나는 산에서 귀순하러 내려온 것이 아니라 식량을 구하러 내려왔다, 산에는 나의 전우들이 있다, 돈을 줄테니 식량을 좀 구해주지 않겠는가고 하였습니다.

주인은 돈을 주고 사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가 방아를 찧어주고 삯으로 받는 쌀을 겨 속에 묻어둘 터이니 손님들이 드나들지 않을 때 조용히 와서 지고가군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물방아간주인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봉록은 가재수마을에 내려가서 식량공작을 하는 과정에 물방아간주인이 조국광복회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안 무엇이라는 농민과도 친한 사이었습니다.

「혜산사건」이후에도 가재수조직이 그냥 파괴되지 않고 살아있은 것은 우리 공작원들이 조직관계를 철저히 비밀에 묻어두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때 물방아간주인에 대한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됐다, 우리에 대한 인민들의 지지는 변함이 없다, 인민들의 지지를 받는 한 우리는 이긴다, 이제는 길이 열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방아간주인은 식량을 짊어지고 우리와 함께 고난의 행군에 참가한 셈입니다. 그 사람이 식량을 해결해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장기나 꼬니를 두면서 앞으로의 행동방향을 배포유하게 설계할 엄두도 못내었을 것입니다. 십중팔구는 아마 굶어죽었을 것입니다.

물방아간주인뿐 아니라 온 가재수사람들이 우리를 도와 나섰습니다.

어느 날 이봉록은 가재수사람들이 식량도 마련하고 설음식도 준비해 놓았는데 가지러 가게 허락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 후 수십여일을 생쌀과 날고기와 맹물로 끼니를 이어온 대원들을 생각하면 가재수사람들의 성의를 밀어버릴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인민들의 지성이 깃든 설음식을 그대로 받아오라고 하였습니다. 가재수사람들의 덕으로 1939년 음력설은 궁색스럽게 보내지 않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대원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했던 한이 그제야 좀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가재수사람들의 그 성의를 우리는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이봉록이랑 함께 마을로 내려갔던 이호림이 그만 도주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봉록은 빈 몸으로 돌아와서 이호림이 도주하는 바람에 식량이고 뭐고 다 내깔리고 왔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사령부경위대원들 중에서 도주자가 나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전에는 행군이 아무리 간고해도 우리를 버리고 달아나는 변절자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고난의 행군 때에는 우리 대내에서 도주자가 4명이나 나타났습니다. 전에는 달아나지 않던 사람들이 왜 달아났는가 하면 무서운 고난을 더는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호림은 유격대생활을 오래 하지 않았지만 나의 사랑을 많이 받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조선에서 온 대원이라고 해서 좀 표가 날 정도로 사랑해주었습니다. 그는 일본말을 잘 했습니다. 그래서 적정을 요해할 필요가 있으면 그에게 과업을 주군했습니다. 그러면 그가 한두 명의 대원을 데리고 전봇대에 올라가 적들의 전화를 도청하군 했습니다. 건장하고 유식해서 지휘관감으로 점을 찍어두고 있었는데 혁명이 다 망하는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꽁무니를 뺐던 모양입니다.

이호림이 변절하는 바람에 우리는 아주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한시 바삐 거처를 옮기고 안전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우리는 가재수마을 뒷산을 떠나 무연한 벌판을 백일행군으로 돌파하려고 결심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적들이 오건말건 내처 걸으라고 했습니다.

적이 대부대역량으로 공격해올 때 분산활동으로 넘어가는 것은 유격전술의 일반적 원칙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행군 때에도 그 원칙에 충실하였습니다. 그 덕으로 적들의 「토벌」역량을 어느 정도 분산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산활동을 하는 과정에 역량이 얼마 안되었던 우리 사령부는 자체의 존망을 판가름하는 어려운 고비에 여러 번 부닥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적들이 우리가 사령부라는 것을 알고 총력을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훈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북대정자에서 고난의 행군을 총화할 때 전술문제를 가지고 많은 논의를 하였습니다. 나는 분산활동이 대부대공격에 대처하는 유격전의 한 개 전술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천편일률식으로 적용해서는 안된다는데 대하여 강조하였습니다. 다른 지휘관들도 사령부가 대부대의 후원이 없이 단독으로 분산활동을 하는 것과 같은 모험은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나는 고난의 행군을 총화하면서 아무리 원칙에 맞는 전술이라고 해도 그것을 적용하는 데서는 교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진리를 뼈에 사무치게 느끼었습니다.

우리가 백일행군을 방금 시작했을 때 도주자가 또 생기었습니다. 이교관이라고 왕덕림이 보낸 북경대학 졸업생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뛰고 중국인대원이 대오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그런데다가 대열에는 부상자가 여러 명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사람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역량이 조금만 더 줄어든다면 보초교대도 못하게 될 판이었습니다.

오백룡은 행군명령이 떨어지자 나보고 장군님, 우리가 행군을 시작하면 포대에서 철알이 우박같이 날아오겠는데 어떻게 저 벌판을 돌파하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하겠는가, 앞뒤에 기관총을 한정씩 세우고 적이 앞으로 오면 앞에서 쏘고 뒤에서 오면 뒤로 쏘면서 강짜로 행군해야지 별수가 있는가고 하였습니다.

가재수의 적들은 포대에서 우리를 빤히 내려다보면서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주력은 「토벌」에 참가하느라고 산에 다 가있고 부락에는 역량이 얼마 없는데다가 우리의 기세에 압도되다나니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대낮에 벌판을 뻐젓이 지나 수림지대에까지 갈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밥도 해 먹고 잠시 휴식도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아마 천행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벌판을 무난히 통과하고나니 우리자신도 좀 어리둥절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적들이 꼭 불질을 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불질은커녕 재채기소리도 내지 않고 포대에서 우리를 빤히 내려다보기만 했으니 왜 어리둥절해지지 않겠습니까. 유격투쟁을 하느라면 이런 경우를 가끔 당하게 됩니다.

벌판을 무사히 통과한 대원들은 또다시 「하느님」이 혁명군편을 들어주었다고 하면서 기뻐했습니다.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다달았을 때 너 죽고 나 죽고 결판을 내자, 죽으면 한번 죽지 두 번 죽겠는가 하는 배짱을 가지고 무슨 일이든지 대담하게 냅다 밀면 극복 못할 난관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수림지대에서 벗어나 다시 행군을 하고 있을 때 적들이 우리의 뒤에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아마 대열에서 도주한자들이 우리 행군방향을 대주면서 『김일성이 지금 대부대는 다 떼내깔리고 몇십 명만 데리고 다닌다. 그러니까 인제는 제낄 수 있다.』고 귀띔질한 모양이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우리의 앞에 적들이 나타났다는 전방척후들의 보고가 또 날아들어왔습니다. 적이 뒤에도 있고 앞에도 있다면 그것은 야단이었습니다. 오백룡은 또다시 내 얼굴을 보면서 『장군님, 이제는 우리가 사령부라는 것도 다 들장난 것 같은데 어떻게 하랍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사생결단을 하는 것 밖에야 다른 길이 있는가, 앞에서 오는 놈들은 우리를 생판 모르는 놈들이고 우리와 조우하는 것도 모르고 마음 놓고 오는 놈들이다, 뒤에서 따라오는 놈들은 우리 역량이 얼마나 되고 우리가 얼마만큼 피곤한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까지 다 알고 있다, 때문에 그놈들과 본격적인 대항전을 하기는 곤난하다, 그러니까 다른 도리가 없다, 한 개 분대쯤 되는 인원을 떼서 뒤에 있는 놈들을 견제하게 하고 기본역량은 우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마주 오는 앞에 놈들을 제껴 버려야 한다, 그래야 포위를 돌파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뒤에서 우리를 추격하는 것은 일본군「토벌대」였지만 앞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만주국군대였습니다. 만주국군대는 우리 부대와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즉 약한 고리는 앞에 있었습니다.

나는 오백룡에게 부대를 데리고 앞을 돌파하라! 약한 고리를 답새겨서 조금만 주춤거리면 숨돌릴 틈을 주지 말고 돌격해서 적들의 병영까지 따라가 혼쌀을 내주라고 하였습니다.

오백룡은 대열 앞에다가 기관총을 걸고 적들을 한바탕 족친 다음 나팔을 불면서 돌격을 들이댔습니다. 만주국군대는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게 되자 우리가 굉장한 대부대인줄로 알고 지고 있던 배낭이며 짐짝들을 다 내던지고 퇴각하였습니다.

우리는 적들이 던지고 간 배낭들에서 먹을 것들을 걷어서 걸머지고 꿰진 신발까지 갈아 신고 대통로가 있는 데까지 적들을 쫓아갔습니다. 이렇게 되어 우리는 적들의 추격에서 벗어나 도리어 적들을 추격하는 주동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전술을 달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적들을 따돌리는 전술로부터 선손을 써서 적들을 답새기는 주동적인 공격전술로 넘어갔습니다. 묘술을 써서 적들을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전술만으로써는 대오를 구출할 수 없었습니다.

병서들에도 강한 적의 예봉은 피하고 교란하여 피로케 만들며 적이 동요하면 드센 공격을 들이대고 적이 퇴각하면 맹렬히 추격하며 강한 적을 약한 적으로, 아군의 역경을 순경으로 만드는 것이 상등의 용병법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전술을 광범하게 활용하여 고난의 행군 때에도 어려운 고비들을 수없이 이겨내고 피동에서 벗어나 주동을 장악하군 하였습니다.

나는 집단부락을 하나 들이쳐서 적들을 피동에 몰아넣는 한편 식량을 해결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음력설이 오늘내일하던 때여서 여러 달째 주림에 시달려 온 대원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습니다. 이렇게 되어 조직한 전투가 바로 13도만집단부락습격전투입니다.

우리는 전투에 앞서 적들의 전화를 도청했습니다. 12도구로 철수해간 위만군장교가 임강현에 있는 자기 상관에게 거는 전화였습니다. 그는 보고 하기를 『김일성부대와 우연히 맞다 들었는데 어떻게나 공격을 드세게 하는지 견뎌내지 못하고 퇴각하여 12도구에 와있다. 차후 행동에 대한 지시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그 장교는 이웃 집단부락에도 전화를 걸어 빨치산이 습격해올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그 정보자료에 기초하여 가까이에 있는 적을 치고 연이어 다른 부락도 하나 더 쳐서 많은 식량과 식료품을 노획하였습니다. 식료품 중에는 적들이 먹으려고 준비해 놓은 교즈도 있었습니다. 짐이 너무 많아서 더러는 눈 속에 파묻고 표식을 해두었습니다. 우리는 13도만전투에서 노획한 식량과 식료품으로 그 해 음력설을 푸짐하게 쇴습니다.

유격투쟁이라고 해서 노상 고생스럽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못먹고 못입는 것이 일상사이기는 하지만 배불리 먹고 뜨뜻이 입고 지낼 때도 있었습니다.

13도만전투가 있은 후 적들은 우리 사령부에 이전보다 더 많은 「토벌」역량을 집중하였습니다. 동서남북 어디에나 다 「토벌대」뿐이었습니다. 적들이 얼마나 검질기게 우리를 따라오는지 우리는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지에서 며칠 밤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령부 대오는 그런 곤난 속에서도 피동에 빠지지 않고 집단부락을 또 하나 들이쳤습니다. 분산활동을 하고 있는 대부대들에 우리의 위치를 알리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그 부락이름이 무엇이었던지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 전투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장백현 상강구일대에서 활동하던 오중흡의 7연대가 사령부가 위험에 처한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리고 사령부에 쏠리는 적의 역량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집단부락들을 또 들이쳤습니다. 그 전투들은 우리에게 자기네 부대의 위치를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했습니다.

7연대가 사령부를 찾아 온 다음에는 무송 쪽에서 활동하던 8연대와 독립대대도 우리를 찾아왔고 청봉밀영에 있던 후방성원들까지 다 북대정자에 모이었습니다. 대열을 점검해보니 전해에 몽강현 남패자를 떠날 때의 인원수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습니다. 남패자를 떠났던 대원들의 거의 전부가 그대로 살아있었습니다.

그때의 그 감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항일전쟁기간에 이별도 많이 해보고 상봉도 많이 해보았지만 아마 그때의 그 상봉만큼 격동적인 상봉은 없었을 것입니다. 북대정자는 온통 축전마당처럼 흥성거렸습니다. 100여일 동안이나 사지에서 고생하다가 만난 대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웃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면서 회포를 나누었습니다.

고생 끝에 이루어진 상봉일수록 그 열도는 더 큰 것 같습니다. 동지가 얼마나 귀중한가를 알려면 서로 헤어져 있어도 보아야 합니다. 피를 나눈 동지들이 서로 이별도 하고 상봉도 하는 과정에 동지애는 더 공고해지고 열렬해지는 법입니다. 이런 동지애는 어떤 풍파가 닥쳐와도 쉽사리 깨지지 않습니다.

고난의 행군은 부대의 이동을 위한 단순한 행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옹근 하나의 전역과 맞먹는 규모가 큰 군사작전이었습니다. 항일무장투쟁의 축도였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행군과정에 우리는 군인으로서 겪을 수 있는 고통도 다 겪었고 인간으로서 체험하게 되는 온갖 시련도 다 맛보았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행군을 통하여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한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조국의 아들, 인민의 아들들이며 자기 민족과 민족해방위업에 가장 충실한 혁명투사들임을 다시 한번 온 세상에 보여주었습니다. 항일유격대원들은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 자신들의 인격을 높은 경지에서 연마하였습니다. 이 행군과정에 형성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아름다운 영상은 우리 인민이 후손만대를 두고 따라 배워야 할 공산주의적 인간의 훌륭한 전형으로 되었습니다.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자기 지도자의 두리에 튼튼히 뭉쳐 적들을 타승한 공산주의자의 전형을 창조한 것, 이것이 바로 고난의 행군이 거둔 중요한 성과이며 항일혁명이 이룩한 가장 큰 업적중의 하나입니다.

고난의 행군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가 영웅들입니다. 이 행군에 참가한 사람들은 산 사람이건 죽은 사람이건 다 영웅들입니다.

모든 대원들이 만난을 이겨내고 불사신으로 살아남아 승리자로 되게 된 데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다고 봅니다. 나는 그 요인들 가운데서 몇 가지만 언급하려고 합니다.

내가 첫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은 백절불굴의 혁명정신과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 혁명적 낙관주의정신입니다. 이런 정신적 요인들이 우리로 하여금 만난을 이겨내게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처럼 무서운 곤난을 겪으면서도 항상 낙망하거나 비관에 잠기지 않고 승리할 앞날을 그려보며 그 모든 곤난을 이겨냈습니다. 말하자면 혁명승리에 대한 신념이 강했습니다. 만일 그때 우리가 당면한 난관에만 집착하여 맥을 놓았거나 혁명승리에 대한 전망을 암담한 것으로만 생각했다면 그처럼 엄청난 시련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눈구덩이 속에 주저앉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의 행군을 승리적으로 마감 지을 수 있은 요인으로는 혁명적 동지애도 들 수 있습니다. 행군을 끝내갈 무렵 오중흡이네와 만나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는 나를 붙잡고 막 울었습니다. 나도 그를 보자 눈물이 났습니다. 육친을 만난 것보다 더 반가왔습니다. 너무 반가와서 가슴이 뻐근했습니다. 나는 그때 온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그 귀중한 전우들과 다시는 절대로 헤어지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 해 겨울 전우들에게 분산활동을 시키고 나서 내가 속을 많이 썩였습니다. 내가 정말 그 해 겨울처럼 전우들을 목마르게 기다린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동무들 중에도 제대군인이 적지 않기 때문에 전우애라는 것이 얼마만큼 강렬한 감정인가를 잘 알고 있겠지만 세상에 전우애보다 더 열렬하고 생명력이 강한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우들 사이에 오가는 도덕의리보다 더 숭고한 도덕의리는 없을 것입니다.

혁명적 동지애는 항일혁명 전노정을 관통해 온 승리의 중요한 요인입니다. 그런데 고난의 행군과정에는 우리 대원들의 도덕의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집중적으로 발양되었습니다. 「한 홉의 미싯가루 」와 같은 일화는 그 시기에 창조된 무수한 미담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전령병들이 사령관을 위해 배낭 속에 한 홉쯤 되는 미싯가루 를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었는데 내가 그것을 혼자서 먹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대원들과 같이 나누어 먹었는데 이것이 후대들에게 전설같은 이야기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한두 번만 있은 것도 아닙니다.

아마 그때 우리 동무들은 자기 전우를 위해 살이 필요하다면 살이라도 떼어주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깡그리 바쳐서라도 혁명동지를 위해주는 것, 그것이 혁명적 동지애입니다.

언제인가도 이야기하였지만 이을설은 한 신입대원이 불 곁에서 자다가 옷을 태우고 우들우들 떠는 것을 보자 자기 솜옷을 벗어 그 동무에게 입혀주고 무서운 혹한 속에서 홑옷을 입고 지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얼어 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동무들이 또 그에게 불보다 뜨거운 동지적인 사랑을 기울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100여일에 걸친 행군의 전행정에서 모두가 한 홉의 미싯가루 를 나누어 먹는 정신으로 살며 싸웠기 때문에 굶어죽지 않았습니다. 해진 옷을 입고 혹한 속을 헤치고 다녔지만 늘 몸이 훈훈했고 마음은 후더웠습니다. 우리 동무들이 한 사람도 굶어죽지 않고 얼어 죽지 않고 불사신처럼 살아남을 수 있은 비결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사랑의 힘이 죽음을 타승하게 한 것입니다.

동지애로 뭉친 집단, 동지애에 기초하여 하나로 굳게 단결된 대오는 필승불패한다는 것을 우리는 그때 다시한번 절실히 체험하였습니다.

우리가 고난의 행군을 성과적으로 끝마칠 수 있게 된 또 하나의 요인은 우리에 대한 인민들의 사랑과 지원이었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행군과정에 가재수의 물방아간주인과 같은 고마운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고난의 행군에 우리 군대만 참가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 행군에는 인민들도 참가하였습니다. 쌀이나 소금이나 신발이나 천과 같은 후방물자를 지고 사선을 헤치며 우리를 찾아온 이도화원과 요구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모두가 고난의 행군에 참가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나자구등판과 천교령에서도 체험한 바이지만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 빠질 때마다 구원자, 방조자, 동행자로 나선 것은 언제나 인민이었습니다. 나는 이런 인민이 있는 한 우리가 고난의 행군도 승리적으로 결속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힘을 가다듬었습니다.

고난의 행군이 승리한 행군으로 될 수 있은 것은 또한 부닥치는 정황에 맞는 영활한 유격전법들을 능동적으로 활용한데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환경에서 사회주의건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혁명은 의연히 간고한 행군길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도 고난의 행군은 계속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 날에는 수십만의 일본군이 우리를 포위하고 추격하였지만 오늘은 그와는 대비도 할 수 없이 막강하고 포악한 제국주의세력이 우리 나라를 압살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전쟁시기나 다름 없는 상태에서 살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어려운 처지에서 우리가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항일혁명선열들이 고난의 행군과정에 발휘하였던 백두의 혁명정신을 그대로 실생활에 철저히 구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일전쟁시기뿐 아니라 새 조국 건설시기와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시기, 전후복구건설시기에도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 낙관주의정신으로 만난을 극복하고 혁명의 승리를 이룩하였습니다.

고난의 행군과 같은 행군을 한 위대한 역사를 가진 인민들에게는 불가능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행군의 역사를 유산으로 가지고 있는 인민은 어떤 힘으로써도 정복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