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구활동을 마치고 유격근거지로 돌아온 우리는 또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왕청땅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북만에서 활동하고 있던 주보중이 우리에게 사신을 보내여 방조를 요청해 왔던 것이다.

 나는 그 요청을 매우 심중하게 받아들이었다. 주보중은 반일병사위원회시절부터 나와 깊은 연계를 가지고 공동의 목적을 위해 싸워온 친근한 전우였다. 나자구전투를 계기로 나와 주보중의 우정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나이도 나보다는 10살이나 우였다. 나는 주보중의 요청에 응하는 것을 신성한 국제주의적 의무로 여기고 북만원정준비를 다그치었다.

 1934년 10월하순,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는 날 왕청, 훈춘, 연길에서 선발된 3개 중대의 역량으로 꾸려진 170여명의 북만원정대는 뒤틀라즈를 출발하여 노야령을 넘기 시작했다.

 자연이란 참으로 신비한 힘을 가진 존재이다. 산줄기들을 기준으로 하여 국경이 그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성과 현이 갈라지기도 한다. 그 산줄기라는 장벽이 때로는 정치, 경제, 문화의 수준상 층하를 규정하는 하나의 요인으로도 된다. 노야령은 동만을 북만, 남만과 갈라놓는 영이며 북간도와 동간도, 동간도와 서간도를 갈라놓는 천험의 울타리이다. 이 울타리의 남쪽과 북쪽은 지세도 대조적이다. 산악이 병풍처럼 첩첩한 남쪽에 비해 북쪽에는 조선의 호남지방에서나 볼수 있는 일망무제의 대평원들이 많다. 노야령이남 동만지방 사람들의 대부분이 함경북도 출신들이라면 이북지역 사람들중에는 경상남북도 출신들이 많았다.

 의식수준의 견지에서 볼 때 북만사람들은 동만사람들보다 좀 뒤떨어져있은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혁명열도도 동만에 비해서는 높지 못했다. 언제인가 주보중은 북만인민들에 대한 정치적 계몽이 동만인민들을 계발시키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고 고백하였다. 이것은 북만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서 큰 고충으로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고충을 조금이라도 풀어준다면 그것은 동북혁명의 조화로운 발전을 위해서도 유익한 일로 될 것이었다.

 우리는 동만과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남만과 북만까지도 장차 대부대활동무대로 삼으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인접과의 협조, 협력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우리가 초기부터 시종일관하게 주장해온 입장이었다. 우리가 이홍광, 이동광과의 상봉을 남만진출목적의 주요항목으로 삼고 그것을 성사시키기 위해 애쓴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북만을 돕는다는 것은 곧 이 일대에서 유격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김책, 최용건, 허형식, 이학만, 이계동을 비롯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돕는 것으로도 되는 것이다.

 원정대는 첫 출발부터 흥분의 도가니속에 빠져버리었다. 새고장이란 언제나 무지개 같이 화려한 동경심을 자아내는 법이다. 게다가 원정대원들은 대체로 새 것에 대한 호기심이 제일 강한 18~20살 안팎의 청년들이었다. 나도 역시 그들과 다름없는 희열을 안고 대오를 이끌었다.

 그러나 원정대가 뒤틀라즈를 떠난 그 순간부터 나는 내 발을 비끄러매려고 집요하게 매달리는 어떤 불안을 무시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오가 유격구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불안은 점점 더 커지기만 하였다.

 나는 동만의 유격근거지들이 위공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때에 북만으로 가고 있었다. 장기특별치안공작은 조선인민혁명군의 하기공세앞에서 쓴맛을 본 일제가 지구전의 방법으로 기어이 위공기도를 실현해보려고 만들어낸 「토벌」대강이었다. 이 대강의 요점은 1934년 9월부터 1936년 3월까지의 1년반사이를 3개의 시기로 나누고 처음에는 비교적 치안이 안정된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인민혁명군의 마지막지탱점을 소탕한다는 것이었다. 점령지역을 걸음걸음 확대해 나가는 「보보점령」의 전술에 「토벌」에 소요되는 절대시간을 늘이는 지구전의 전술까지 겹쳐 위공은 그야말로 혁명을 질식시키는 목조르기로 될 수 있었다.

 물론 이 시기 우리가 단행한 북만원정이 일제침략군의 위공기도에 큰 파열구를 뚫어놓는 작용을 한 것은 틀림없었다.

 적의 위공작전에 못지 않게 유격구의 운명을 위협하는것은 간도전역에서 극좌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반「민생단」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동만당이 설정했던 본래의 과제와는 달리 지도부를 차지하고 있던 일부 야심가들과 탐위분자들, 민족배타주의자들, 종파사대주의자들의 불순한 정치적 목적에 이용됨으로써 혁명대열을 내부로부터 분열와해시키고 유격근거지의 존립을 위협하는 엄중한 결과를 빚어내었다.

 인정사정없는 숙반의 무시무시한 쇠몽둥이는 자기 위업에 끝없이 충실한 진실한 혁명가들과 애국적 군중들을 네편내편 가리지 않고 날마다 무데기로 처형하였다. 유격근거지에 거주하고 있던 군민의 절대다수가 「민생단」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반「민생단」투쟁의 예봉이 조선사람, 그것도 당과 군대, 대중단체의 책임적 지위에서 사업하던 핵심간부들과 정수분자들에게로 돌려지고 있는 점이었다. 숙반의 총구는 항상 군중이 신임하고 따르는 선봉적인 일꾼들과 투사들, 열성분자들을 겨냥하였다. 왕청현당 서기 이용국이 「민생단」감투를 쓰고 처형된 것도 그 실례의 하나였다. 「민생단」감옥에 갇혔다가 우리의 보증으로 겨우 풀려 나온 왕청대대의 대대장 양성룡도 여전히 감시속에 있었다. 간도지방의 일부 야심가들과 책략가들은 이처럼 숙반의 이름을 걸어 진실한 혁명가들을 모해하였다. 「민생단」혐의를 받고 처형직전에 놓여있던 현당군사책 김명균과 1구당서기 이웅걸은 유격구를 탈출하였다.

 10월말만 되면 만주대륙에서는 폭설이 쏟아져 내리고 강풍이 몰아친다. 북관사람들은 그 강풍을 오래전부터 씨비리바람이라고 불러왔다.

 우리가 뒤틀라즈를 떠난 그날도 노야령에서는 사나운 설한풍이 행군길을 막아 나섰다. 노야령은 활에 화살을 메운 형국이었는데 그 이름을 그대로 직역하면 늙은 할아버지 영이라는 뜻으로 된다. 아주 높고 험한 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때 이 영을 하루종일 톺아올랐다. 이성림은 무슨 영이 이렇게도 험한가고 자주 두덜거리었다.

 이 영을 넘을 때 고보배가 자기의 특기를 가지고 전우들을 잘 고무해주었다. 동장영이 용정감옥에 갇혀있을 때 고보배가 우리의 과업을 받고 우정 따기를 하는 방법으로 구류장에 끌려들어가 그에게 우리의 의사를 전달하였다는 것은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하였다. 그는 큰 장마당의 돈도 잠간동안이면 다 털어낼 수 있는 번개같은 손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손재간만 가지고서도 백만장자 못지 않게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깊은 산중에 들어와 혁명의 도가니속에 뛰어든 것은 자못 신기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참으로 찬양을 받을만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손재주는 고보배가 소유하고 있는 특기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보다도 더 큰 묘기는 입재주와 어리광대재주였다. 입에 손만 대면 못내는 소리가 없었고 얼굴을 몇번 씰룩거리면 눈과 입이 한쪽으로 비뚤어지면서 치켜들렸는데 2군 군장 왕덕태와 같이 무뚝뚝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사람도 고보배가 이런 재주를 부릴 때에는 입이 째지게 폭소를 터치군 하였다. 그가 한쪽다리를 까부라붙이고 외발로 뛰어다닐 때는 웃지 않을래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고보배가 마대를 메고 장타령을 부르면서 다닐 때에는 병신중의 병신처럼 보였으므로 적들의 눈을 감쪽같이 속여넘길 수 있었다.

 그는 이런 장기와 변장술을 가지고 도시와 마을들에 자주 내려가 적정을 탐지해오군 하였다. 이런 일이 거듭되는 사이에 그에게는 고보배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보배처럼 귀중한 인물이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고보배의 전우들가운데는 그를 본명으로 부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도 그를 별명으로 불렀다. 그러다보니 고보배의 본명이 잘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

 그의 고향에 대해서는 함경북도라는 설도 있고 함경남도나 강원도라는 설도 있다. 고보배자신은 자기의 출신도가 어디인지 잘 몰랐다.

 고향이 어디인가고 물으면 그저 조선의 어느 해변가라고만 대답하였다. 젖먹을 때 만주땅에 와서 자랐고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다보니 알도리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노동속에서 잔뼈가 굵어온 그는 못하는 일이 없었다. 야장을 하라면 야장을 하고 집을 지으라면 집을 짓고 이발을 하라면 이발도 하였다.

 고보배는 한동안 동만과 북만사이의 연계를 보장하는 통신원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한다는데 대해서는 서뿔리 입밖에 내지 않았다. 간혹 어떤 동무들이 『보배동무는 요새 무슨 일을 하오? 유격대원이요?』하고 물으면 고보배는 그렇다고 대답하였고 『순시원이요?』하고 물어도 역시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이런 대답을 하는 경위에도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게 묘한 웃음을 항상 덧붙이군 하였다. 이것은 자기 직무를 안개속에 묻어두기 위한 고보배식의 독특한 수법이었다.

 고보배가 나를 절대적으로 따르고 존경한 것처럼 나도 고보배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사랑하였다.

 우리가 노야령산정에 올라섰을 때 일본군의 쌍엽전투기 2대가 저공으로 날아와 영마루를 누비다가 달아나버리었다. 아마 우리를 따라오던 「토벌대」놈들이 본부에 원정대의 행방을 알려준 모양이었다.

 그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기 드문 폭설이 내리었다.

 노야령북쪽 등성이들과 골짜기들은 모두 눈속에 묻혀 어느 것이 어느 골짜기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오후부터는 세찬 바람까지 일기 시작하여 북만주지방으로 많이 다녀보지 못한 우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곳 지형을 자기 집 울안처럼 휑하니 꿰들고 있던 고보배조차도 향방을 가늠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지경이 되었다. 우리는 팔도하자로부터 80리 떨어진 지점에서 길을 잃고 행군을 멈추었다. 대원들은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과 혹한속에서 내 얼굴만 지켜보고 있었다.

 그처럼 명랑하던 고보배마저도 사색이 되어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내앞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서있었다.

 『해마다 이 영에서는 길을 잃은 나그네들이 눈구뎅이속에 파묻혀 죽군합니다. 지난해에도 7명인가 8명인가 되는 반일부대 병사들이 이 산중에서 객사하였습니다. 마을이 있는데 까지 되돌아갔다가 거기서 하룻밤 자고 눈바람이 잦은 다음 행군을 계속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는 백설로 뒤덮인 노야령의 북쪽골짜기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조심스레 제의하였다.

 나는 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경우의 후퇴란 백해무익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니요. 그럴 수가 없소. 보배동무가 며칠전까지 발이 닳게 지나다니던 곳인데 무얼 겁낼게 있소. 노야령이 할바령이나 목단령으로 되지 않는이상 길이 있어도 여기에 있지 어디로 가겠소. 나에게 나침판도 있는데 곧장 북으로만 가면 될 것이니 너무 겁을 내지 마오. 자, 용기를 내시오. 북만동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소.』

 나의 이 말에 고보배는 힘을 얻었다. 그는 입으로 자동차엔진소리를 내며 앞장에서 눈을 헤쳐 나갔다. 그 엔진소리를 듣고 원정대원들은 일제히 노야령이 떠나가게 웃어댔다.

 우리는 다음날까지 행군해서야 겨우 자그마한 중국인부락을 발견하였다. 원정대가 이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이웃부락에 와있던 일본군「토벌대」가 불의에 달려들었다. 이렇게 되어 우리는 북만에서 첫 싸움을 하게 되었다.

 북만지방의 일본군「토벌대」나 위만군은 인민혁명군과 접전해본 일이 한번도 없었다. 그 당시까지 그들의 상대란 대체로 일본군의 그림자만 보아도 천리밖으로 꽁무니를 빼는 토비나 산림대 같이 조잡하고 무맥한 무장집단들뿐이었다.

 약한 상대를 일반적인 추격전으로 쉽게 소멸하는데 습관되어온 일본군 「토벌대」는 그날도 우리를 토비나 산림대로 알았던지 기세등등해서 마구 접어들었다.

 우리는 재빨리 산에 올라가 「토벌대」와 응전하면서 한개 소대를 우회시켜 적의 뒤통수를 후려치게 하였다. 하도 드세게 답새기니 적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벙벙해했다. 그 싸움에서 일본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이 전투에 대한 소문이 적들의 입을 통하여 북만지방에 널리 퍼졌다. 동만에서 「노꼬리」부대들이 들어왔는데 싸움을 아주 본때있게 한다, 도대체 누가 지휘하는 부대인가, 혹시 동녕현성을 들이쳤다는 김일성부대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와짝 끓었다. 그때부터 벌써 신문들에는 우리 부대에 대한 기사가 실리었다. 그때 적들은 유격대를 「공비」라고도 부르고 공산당이나 반만군이라는 어정쩡한 명칭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원정대는 싸움에서 승리하였으나 마을사람들이 모두 피난을 가는바람에 밥도 먹을 수 없는 고립무원한 처지에 떨어졌다.

 주보중부대를 찾을 때까지 부락에 오래 체류하자면 적정을 알아야 되겠는데 정보망도 없고 아는 사람들도 없으니 다음단계의 활동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녕안유격대의 행방에 대해서는 고보배조차도 잘 알지 못하였다.

 우리는 마을에서 자지 못하고 이름모를 산골안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고보배와 오대성이 정찰임무를 받고 나가 주보중이 거처 하고 있는 산막을 찾아냈다. 나는 그 산막에서 20~30명의 대원들을 데리고 병치료를 하고 있는 주보중을 만났다. 나자구전투에서 박격포탄에 맞은 그 상처자리가 화농이 심하여 여러달이 지나간 그때까지도 채 아물지 않았었다.

 주보중은 지팡이를 짚고 대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산막에서 퍼그나 떨어진 곳에까지 나와 우리를 맞이하였다.

 『보시다 싶이 나는 아직 이런 신세요.』

 그는 지팡이를 들었다 내리고 나서 쓸쓸하게 웃었다. 그런다음 내 손을 으스러지게 틀어 잡았다.

 『이렇게 다시 만나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소. 많이 도와주시오.』

 짤막한 인사였으나 그 음성과 눈빛에는 절절한 기대가 비껴있었다.

 나와 주보중과의 상봉은 우리의 항일무장투쟁사에서 새로운 장을 상징하는 하나의 사변이었다. 이 상봉을 시발점으로 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은 중국인공산주의자들이 영솔하는 유격부대들과의 전면적인 공동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우리가 중국공산주의자들이 지도하는 무장대들과의 합작을 중시한 것처럼 만주지방의 중국공산주의자들도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무장부대들과의 연합전선을 실현하기 위하여 각방으로 노력하였다. 9.18사변후 장개석의 무저항주의에 반기를 들고 반일부대, 구국군, 홍창회, 대도회 등의 명칭을 가진 각양각색의 항일의용군 부대들이 도처에서 태여나 일본의 침략에 도전해 나섰을 때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은 다같이 그들과의 통일전선에 중대한 의의를 부여하고 그것을 실현하고저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노력이 얼마나 큰 결실을 가져왔는가 하는 것은 여기서 구태여 되풀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934년이후부터 항일의용군의 활동은 점차 쇠퇴기에 들어섰다. 일본군의 공세가 심해지자 적지 않은 항일의용군 지휘관들은 부대들을 데리고 중국관내로 들어갔고 부분적으로는 투항하거나 비적화되었다. 일부 세력은 사충항처럼 민족주의적인 사상으로부터 공산주의사상으로 지도이념을 바꾸는 방향전환의 대로에 들어섰다. 적들은 이러한 반일부대들을 가리켜 「정치비」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만주지방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직지도하는 반일인민유격대들과 중국공산주의자들의 영향하에 있는 이러저러한 반일부대들을 연합하여 하나의 정연한 체계를 갖춘 군을 내오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주보중은 녕안반일유격대의 탄생과정이 순탄치 않았다고 하면서 그 경위를 중언부언 설명해주었다. 녕안반일유격대의 밑천으로 된 것은 그가 나자구를 떠날 때 데리고 온 20명가량의 반일병사들이었다.

 길동국이 해산되고 수녕중심현위가 조직되자 군사부를 책임진 주보중은 그 20명을 모체로 하여 곧 무장대오를 늘이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대오는 얼마 안있어 50여명으로 장성하였다. 조선사람들로 구성된 유격대가 주보중의 부대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부대는 뒤이어 여러차례의 교섭끝에 이도하자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던 평남양부대와의 통합을 실현하였다.

 주보중은 평남양을 통합부대 대장으로 선출하고 자기는 군사책임을 맡았다.

 평남양의 본명은 이형박이다. 이형박이 본명대신 평남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된데는 깊은 사연이 있다고 한다.

 평남양이란 남쪽을 평정한다는 뜻이다. 당시 일본침략군무력은 녕안현 남쪽지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있었다.

 이형박은 이 일대에 둥지를 틀고 있는 일본침략군과의 결전을 자기의 사명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이형박의 무장대오에는 평남양부대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고 그 대오의 지휘관인 이형박이도 점차 평남양으로 불리워지게 된 것이다.

 이 일화만 보더라도 평남양이 용기가 있고 애국충정에 끓는 호걸남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반일감정이 강하고 용감한 사람이었지만 부하들의 무규율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이것은 이 부대의 통솔자이고 실권자인 주보중에게도 골치거리로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만나자 주보중은 자기를 대신하여 평남양과의 사업을 해주었으면 하였다.

 『평남양이 비록 영웅심이 강한 사람이지만 김사령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을 품고 있소. 자기를 구원해준 생명의 은인이 조선공산주의자였으니까.』

 내가 그 믿음은 고맙지만 어깨가 무거워진다고 하자 주보중은 웃으면서 『나는 우사령과 오사령을 설복한 김사령의 특출한 감화력을 믿을 뿐이요.』라고 하였다.

 주보중은 반일부대와의 관계 때문에도 골치를 앓고 있었다.

 녕안현일대에는 크고작은 반일부대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 반일부대들중 적지 않은 부대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적대시하였다. 이것은 녕안반일유격대의 활동에서 시급히 제거하지 않으면 안될 커다란 암초였다.

 동경성 서쪽 북호두를 중심으로 출몰하는 대평, 사계호, 점중화, 인의협 등은 다 한때 평남양과 손을 잡았다가 갈라진 반일부대들이었다. 이 부대들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는데다가 정안군이 귀순까지 권고하며 쐐기를 박고 있어 그 장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동경성 서북쪽에서 비적행위를 일삼는 쌍산, 중양 등의 반일부대들도 역시 정안군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녕안동쪽의 당도구일대의 군소반일부대들중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강애민부대도 일본군 13여단의 「토벌」에 혼쌀난 다음부터는 동요하고 있었다.

 강애민의 관할하에 있는 부대들이 그 13여단의 등쌀에 견디지 못해 동만으로 쫓겨 나온 적이 있다. 그때 그 부대들은 식량을 약탈하며 돌아가다가 귀순신청까지 하였는데 우리 동무들이 그것을 겨우 저지시키었다.

 주보중의 말에 의하면 마창부근에 있는 채세영부대도 이전보다는 활동이 미미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녕안에서도 왕청의 관부대사건과 같은 점중화사건이 있었는데 그 맹랑한 변고 때문에 자기 부대는 합법적 활동을 하지 못한다고 하소연하였다.

 점중화사건이란 주보중이 평남양과의 통합을 실현하기전에 생긴 불상사였다. 평남양의 부대가 내분으로 복잡한 진통을 겪고 있을 때 반란자들은 평남양을 위시한 반대파들에게 술을 먹인 다음 무장해제를 단행하고 도주하였다.

 평남양도 사창없는 신세가 되었다. 평남양은 알몸만 남은 부대를 재건하기 위하여 심복부하들과 함께 귀순을 모색하고 있던 남호두근방의 점중화부대를 무장해제시키었다. 그리고 그 총으로 자기 부하들을 무장시키었다. 이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 북만의 반일부대들은 평남양의 이름과 결부되어있는 녕안유격대를 적으로 선포하였다.

 결국 주보중의 요구는 자기네 부대를 합법화하자면 반일부대와의 관계를 풀어야 하는데 내가 그 중계자의 역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주보중이 제일 크게 걱정한 것은 녕안지방의 혁명운동실태였다. 그는 이 일대에서 혁명을 승화시키지 못하는 것이 자기자신의 무능이나 불찰에 있는 것처럼 몹시 안타까와 하였다.

 『동만사람들의 시점으로 보면 녕안은 혁명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무풍지대나 다름없소. 대중의 기세가 왜 이다지도 저조한지 모르겠소. 혁명에 궐기하라고 아무리 호소해도 인민들이 곁을 주지 않는단 말이요. 이고장 농민들의 동향이 어떤지 아시오? 지주가 못살게 굴어도 자기들은 얼마든지 살도리가 있다는거요. 산중에 가면 흔한 것이 땅이요, 그 땅을 일구면 생계도 유지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피를 흘리며 고생스레 혁명을 하겠는가 하는거요. 국민의 관점으로 보면 땅이 넓은 것이 흐뭇한 일이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것이 계급의식을 무디게 하는 장애로 되고 있으니 우리로서는 북만주에 토지가 많은 것을 자랑해야 할지 한탄해야 할지 알수 없는 형편이요.』

 주보중이 이런 말을 하는 바람에 나는 웃음을 터뜨리었다.

 『허허, 땅이 많은 것이야 4억이나 되는 중화민족을 위해서 다행한 일이지.』

 주보중도 이마의 주름살을 펴고 유쾌하게 웃었다.

 『그렇지, 광대한 영토와 비옥한 토지야 만민복지의 원천이니까. 그러고보면 내가 공연한 걱정을 한 것 같소.

 김동무, 이상 열거한 것들이 내 고충이니 잘 도와주시오. 녕안땅에서 혁명을 앙양시킬 방도만 찾아도 발편잠을 자겠는데 나로서는 아직 속수무책이요.』

 주보중이 우리를 북만땅에서 만났을 때 한 이야기는 대체로 이런 것이었다.

 나는 주보중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능력도 있고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북만혁명이 안고 있는 난관에 비추어볼 때 그의 육체적 조건은 너무도 나빴다. 주보중은 화농이 심한 창상자리때문에 자기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의 수하에는 준비된 핵심역량이 많지 못하였다.

 우리는 팔도하자의 산막에서 며칠동안 주보중과 함께 북만혁명의 발전방도를 모색하였다.

 우리는 북만혁명이 안고 있는 여러가지 고충을 풀어줄 수 있는 돌파구를 인민들속으로 들어가는데서 찾았다.

 인민을 각성시키고 동원시키는 것만이 북만혁명을 침체상태에서 건져낼 수 있었다. 그러자면 인민들속에 들어가서 정치사업을 해야 하며 동시에 유격대의 군사활동을 강화해야 하였다. 무장대오란 전투속에서 커가는 법이며 혁명도 싸움속에서만 성장해갈 수 있는 것이다. 싸움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군사활동을 강화하지 않고서는 반일부대들과의 관계도 적대관계로부터 동맹관계로 전환시킬 수 없고 점중화사건으로 하여 저락된 평남양의 영상도 개선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에서 서로의 생각이 같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우리가 주보중의 산막에 가있을 때 거기에는 국제공산당 만주특파원인 오평도 와있었다. 오평은 그때 우리에게 상해에서 가지고 온 항일구국 6대강령이라는 문건을 보여주었다. 6개항목으로 된 이 문건의 원명은 「대일작전에 관한 중국인민의 기본강령」이었다. 이 문건은 중화민족무장자위위원회 준비회의 명의로 발표되었는데 거기에는 송경령, 장내기, 하향응, 마상백 등 이름있는 인사들의 서명이 있었다. 문건에 서명한 사람은 자동적으로 중화민족무장자위위원회의 성원으로 되는데 그 성원수가 벌써 수천명 된다고 오평은 설명하였다.

 항일구국 6대강령은 일제가 공공연히 중국의 보호자로 자처하면서 무력에 의한 화북강점을 기도하고 장개석이 공산군에 대한 제5차 「토벌」작전의 포문을 연 조건하에서 중국공산당이 내세운 반제통일전선정책을 반영하고 있었다. 중국혁명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의 지향은 민족역량을 최대한으로 집결시키고 동원하는데 귀착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항일구국 6대강령을 시기적절한 문건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10일가량 오평과 마주 앉아 폭넓은 담론을 하였다.

 나는 오평과의 담화를 통하여 중국공산주의자들이 모택동의 전략사상에 따라 장개석의 포위를 돌파하고 북상항일의 기치밑에 2만 5천리 대장정을 개시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혁명이 1차 국내혁명의 실패로 인한 퇴각으로부터 부분적인 진공에로 이행하여 성과를 확대해가고 있는 사실은 우리를 크게 고무해주었다.

 중국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마련된 북상항일의 거세찬 흐름과 더불어 중국본토에서 활발히 벌어지고 있던 항일구국운동은 동만을 비롯한 만주지방 조중양국 공산주의자들의 혁명투쟁에 유리한 조건을 지어줄 수 있었다.

 주보중은 공동활동을 위해 우리에게 1개 소대가량의 병력을 붙여주었다. 원정대는 그 한개 소대와 함께 팔도하자의 산막을 떠났다.

 며칠후 경박호반의 석두하라는 곳에서는 조중공산주의자들의 형제적 우의와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의 위력을 시위하는 공동투쟁의 첫 총성이 울리었다. 혁명군의 출격소식을 듣고 북호두를 떠난 200여명의 일본군「토벌대」가 경박호복판에서 우리의 기관총과녁이 되어 무리죽음을 당하였다.

 우리는 연이어 방신구근방에서 일본침략군대에 맵짠 타격을 가하였다. 북만주의 광막한 대자연속에 연전연승만을 아로새기며 거들거리던 무적황군의 신화에는 마침내 금이 가고 때가 끼기 시작했다. 이것은 동만유격구들에 대한 일제의 위공작전에도 하나의 뚜렷한 돌파구를 열어놓게 하였다.

 녕안지방사람들은 또다시 「노꼬리」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며 쾌재를 올리었다.

 그 소문을 듣고 맨 처음으로 우리한테 달려온 사람이 바로 녕안반일유격대 대장 평남양이었다. 우리가 남호두지방에 가서 후날 우리 왕청부대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그곳 구당조직의 핵심당원을 만나고 서청구자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그는 주보중의 전령병과 함께 내앞에 불쑥 나타나 자기 소개도 없이 『수고하십니다.』, 『수고하십니다.』하고 연방 탄성을 질렀다.

 나는 대오에 휴식명령을 내리고 그와 격식없는 담화를 하였다.

 『지금 온 북만땅에 김일성부대 소문이 자자합니다. 내 부하들은 그 소문을 듣고 여간 기뻐하지 않습니다. 왜놈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김사령의 손이나 좀 잡아봅시다.』

 평남양은 두손으로 내 손을 감싸 쥐고 정겨운 시선으로 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 부하들이 동경성 북쪽에 가있는데 정안군아이들한테 혼났다는 정보를 받았수다. 일본군이나 정안군만 만나면 노상 꼼짝도 못하고 골탕을 먹어야 하니 이거야 어디 분통이 터져서 살겠습니까.』

 『그럼 한번 정안군과 맞다들어볼가요?』

 『김사령네 부대하구라면야… 같이 싸우면 담도 커지고 배우기도 하겠지요.』

 나는 평남양의 소원대로 그가 데리고 온 40명가량의 대원들을 우리 원정대오에 합류시키고 그대신 주보중이 나에게 붙여주었던 1개 소대는 평남양을 안내해온 전령병과 함께 팔도하자의 산막으로 돌려보냈다. 동시에 적의 「토벌」로 하여 새롭게 조성된 동만의 긴박한 정세를 고려하여 연길중대동무들을 간도로 돌려보냈다.

 평남양이 나를 찾아올 때 주보중은 동만에서 온 통신원도 같이 보내주었다. 그 통신원이 우리에게 간도소식을 다 말해주었다.

 우리는 북호두부근을 행군할 때 전대오에 외발자국행군을 하도록 명령하였다.

 적의 집결지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을 통과해야 했으므로 흔적을 지워버릴 필요가 있었다. 외발자국행군이란 10사람, 100사람, 1.000사람이 행군해도 한사람이 지나간 것처럼 선두사람이 낸 발자국위에 발자국을 덧놓으며 나가는 행군법을 말한다.

 내가 각 중대들에 임무를 주어 외발자국행군법뿐아니라 발자국을 없애는 법, 분산행군법, 마을에서 숙영하는 법 등을 하나하나 익히게 하는 것을 보고 평남양은 조선인민혁명군은 유격전에 완전히 도통한 군대라고 하였다.

 우리는 신안진부근에서 평남양부대와 함께 다께우찌중좌가 이끄는 2개 대대의 정안군을 요정내고 뒤이어 중양이라는 반일부대와의 협동작전으로 대해랑하강변에서 다른 정안군부대를 족치었으며 팔도하자골의 노전가라는곳에서 정안군 기병중대와 보병 6중대를 타격하였다.

 위축되었던 반일부대들이 연이어 우리를 찾아와 원정대에 합류된 것은 이런 전과속에서 이루어진 귀결이었다.

 팔도하자의 산막에 돌아와 주보중을 잠간 만난 우리는 12월하순에 대평, 사계호, 점중화, 인의협 등 반일부대들의 요청에 따라 또다시 목단강을 건너 신안진부근에서 정안군을 들이치고 위만경찰서를 습격하였다. 이 전투들은 평남양에게서 떨어져나간 반일부대들을 녕안유격대에 도로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에서 조직한 것이었다. 적극적이고 주동적인 군사활동에 참가하여 적들을 연속 답새기는 과정을 통하여 녕안유격대는 반일부대들과 지방의 참군요망자들로 대오를 부단히 확대하였다.

 『김사령, 내 이제는 무서운 것이 없소. 일본군도 정안군도 다 제낄 자신이 있소. 김사령 신세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신안진부근에서 정안군과 싸운 그날 평남양은 내 손을 잡아 흔들며 자신있게 말했다.

 『신세랄 것도 없지만 생각이 있거든 적을 많이 치시오. 군대야 싸움속에서 단련되는게 아니겠소.』

 나는 평남양의 손을 잡고 열정적으로 그를 고무해주었다.

 우리는 원정과정에 채세영, 강애민과도 만나 반일연합전선문제를 의논하였다.

 일본군 13여단의 공격에 만신창이 되어 갈팡질팡하던 강애민은 나를 만나려고 동만에까지 나갔다가 우리가 북만에서 활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발로 찾아왔다. 패전을 거듭해온 부대의 지휘관치고는 믿기 어려울 만치 명랑하고 혈기왕성해 보이었다.

 『김대장부대에 응원을 요청하려고 사실은 왕청에 갔댔는데 방진성이란 사람은 자기네도 형편이 어려워 남을 지원할 여지가 없다고 하면서 딱해하지 않겠습니까. 김대장, 우리를 좀 도와 주시우다.』

 강애민은 대부대의 지휘관이라는 체면 같은 것은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자기의 고충을 솔직하게 터놓았다.

 방진성은 우리가 북만으로 온 다음 우리 부대의 연대장으로 부임된 중국인지휘관이었다.

 우리는 평남양부대와 군소반일부대들과의 협동작전과정을 통하여 많은 것을 체득하였다. 원정대가 자기의 사명으로 내세웠던 군사정치적 목적은 비교적 원활하게 성취되어 가는 셈이었다.

 후날 원정을 끝내고 간도로 돌아간 우리는 북만에서 주보중이 녕안반일유격대를 기간으로 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5군을 건설하는데 성공하였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우리 원정대와 더불어 북만의 설한속을 누비며 전투적 우의를 두터이 하던 대부분의 반일부대들이 5군산하에 들어갔다.

 5군의 간부들 중에는 북만원정시절의 나의 지기들이 적지 않았다. 평남양은 제1사 1연대장을 하다가 사장으로 승급하였고 채세영은 제2사 사장을 하다가 부군장으로 되었다. 강애민은 2사에서 5연대를 지휘하였다. 그 부대들에는 우리와 함께 혈로를 헤쳐온 조선공산주의자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5군이 조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 노야령너머에서 녕안땅을 그려보며 주보중을 축복하였다.

 우리의 1차 북만원정은 나자구전투와 함께 적의 위공작전을 파탄시키는 발단으로 되고 기본동력으로 되었다. 우리의 군사적 공세앞에서 녕안주둔 일본군 13여단의 주력과 정안군부대는 괴멸상태에 빠지었다.

 우리는 북만에서 피도 많이 흘리었다. 가장 가슴아픈 손실은 연길중대 정치지도원과 꼬마전령병 이성림의 전사였다.

 이성림은 우리가 왕청에 가서 처음으로 받아들인 전령병이었다. 일제의 「토벌」에 부모를 잃고 홀로 남은 그를 우리가 데려다가 키웠다. 옷도 해입히고 글도 배워주었더니 제법 해말쑥한 총각이 되었다. 그는 내 목을 그러안고야 자군하였는데 양성룡이 그것을 보다 못해 다 큰 총각이 아직도 어리광을 부리니 사람구실을 하기는 글렀다고 하면서 아동단학교에 쫓아 보내자고 하였다.

 이성림은 울면서 가지 않겠다고 떼질을 썼다.

 양성룡이 이성림을 곱지 않게 보기 시작한 것은 그가 나에게서 받은 소형권총을 자랑하느라고 아동단학교를 뻔질나게 찾아다니기 시작한 다음부터였다. 어느날 이성림은 우리가 지휘부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 사이에 가만히 아동단학교로 찾아가 마당에서 뛰놀고 있는 코흘리개들을 버들방천으로 불러냈다. 권총자랑을 하고 싶어 서였다. 그가 권총을 분해했다 조립했다 하는 사이에 쉬는 시간이 다 지나가버렸는데 상학을 시작하려고 교실에 들어선 선생이 깜짝 놀라서 비상소집구령을 내리었다. 권총구경을 하려고 전령병을 따라 나간 아이들이 한명도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사건의 전말을 들은 양성룡은 나에게 이성림과 같은 전령병을 데리고 다니다가는 큰 사달을 일으킬 수 있으니 다른 전령병으로 교체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성림은 나와 함께 온성, 종성에도 가고 도문 뒷산에도 오래 가있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돌하고 용감무쌍한 전령병이었다.

 이성림이 전사한 것이 아마 단산자부근 전투에서였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일본군과 정안군의 맹렬한 협공을 받고 있었다.

 그는 내 명령을 전하려고 평남양부대로 뛰어가다가 불의에 적과 조우하였다. 이성림이 전사한 다음 사창을 보니 탄알이 하나도 없었다. 그대신 대여섯구나 되는 적의 시체가 그의 주위에 너저분하게 널려있었다. 그는 죽으면서도 핏값을 톡톡히 받아냈다.

 우리가 이성림을 안고 얼마나 울었던지 평남양마저 소리를 내여 슬프게 울었다.

 적을 쳐물리치고 승리한 전장에서 이성림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내 눈앞에 맨 처음으로 떠오른 것은 그가 단골방처럼 발이 닳게 찾아다니던 왕청아동단학교였다. 그 학교에는 이성림의 소꿉동무들과 죽자 살자 하면서 지내온 친구들이 많았다.

 내 이제 성림이를 북만땅에 파묻고 왕청아동단원들앞에 무슨 면목으로 나타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목이 메고 눈물이 괴어올랐다.

 전우들이 언땅을 파고 이성림의 시신을 안장하자고 할 때 그가 다시 살아나 나의 품에 안기는 것 같아서 언흙을 파얹지 못하게 하였다. 박달같이 땅땅 언 차디찬 땅속에 그 어린것을 두고 간다고 생각하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놈의 영이 이렇게 험한가고 볼부은 소리를 하며 노야령을 넘던 이성림은 오늘도 전우들과 함께 만주광야에 울리는 새 생활의 노래를 들으며 그 기슭에 고요히 누워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