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은 김일성 주석의 위대한 업적이다

2007년 8월 14일  현주경

 

오늘 세계의 진보적 인류는 북한의 총대에 기초한 반제자주노선에 눈과 귀를 모으고 있다. 북한의 선군총공세는 우리 민족의 자주통일을 앞당기고 있을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의 패권적 만행에 맞서 싸우는 매개 나라의 자주운동을 강하게 추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적 차원으로 파급되고 있는 반제자주운동의 본류는 우리 민족의 견결한 반제반미투쟁에 있으며 그 역사적 전통은 김일성 주석이 이끈 항일빨치산 투쟁, 우리민족의 자랑스런 혁명전통에 있다. 
우리민족의 반제자주운동이 세계 자주화운동을 힘있게 추동하게 된 것은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이 8.15광복이라는 위대한 승리로 결실맺어지고, 이후 미국과의 대결전과 민중중심의 진보적 사회 건설에서도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민족자주노선의 사상이론적 정당성과 생활력이 전세계에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에게 8.15광복의 참의미는 미-소 양국에 의한 해방도 아니요, 일제의 패망으로 얻어진 수동적 결과도 아니었다. 그것은 김일성 주석이 안아온 항일투쟁의 위대한 승리로, 주체적 의미의 해방이었다. 8.15광복으로 빛나는 우리민족의 자랑스런 혁명전통이 오늘날에는 민족자주의 혁명노선으로 전세계로 파급되고 있다. 8.15를 맞아 김일성 주석이 역사적인 우리 민족의 광복을 어떻게 안아와 위대한 업적으로 아로새겼는지 되새겨 보고자 한다. 

1. 민족자주의 사상으로 전민을 무장시켜 8.15 광복의 대업을 이룩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일본제국주의의 총칼에 신음하는 우리 민족에게 민족자주의 사상을 불어넣어 사그러져들뻔한 민족혼을 다시금 불러일으켜 8.15 광복에 떨쳐나서게 하였다.   

총칼로 무장한 일본제국주의는 자위적 무장력을 튼튼히 갖추지 못한 조선을 식민지화하였으며 조선민중을 이른바 무단통치의 총칼로 짓밟았다. 
우리민족은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 맞서 3.1항쟁의 횃불을 밝히기도 했지만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낼 수 없었다. 이후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 진영에 이르기까지 조국광복을 위해 분투했지만 조국광복의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하여 방황하였으며 돌아오는 것은 약소민족의 설움 뿐이었다. 볼세비키 혁명으로 주목받던 사회주의 운동진영에서도 사회주의 이론의 교조적 해석에 매몰된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광범한 농민대중에 눈을 돌리지 못한다던지 식민지 민중의 해방에 앞서 종주국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그릇된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한때 독립운동에 몸담았던 일부 세력은 자주독립은 이제 어려우니 일본으로부터 자치권이라도 얻어내자는 기만적인 주장을 펼치기까지 하였다. 독립운동은 그렇게 분열되고 방황하고 있었다.
이런 독립운동으로는 우리민족의 정신을 없애버려 독립의 가능성을 뿌리뽑으려 광분하였던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을 이길 수 없었다. 당시 독립운동은 전체 민중을 항일과 자주독립운동으로 이끌어내지 못했던 사상적 한계로 광범위한 군중의 자주적 투쟁에 의거하지 못했으며 일제의 폭압 앞에 무기력하였다.

하지만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은 김일성 주석의 현명한 지도에 의해 참된 활로를 찾고 새로운 투쟁의 길, 승리의 길로 나갈 수 있게 된다. 
1920년대 중반부터 만주의 길림일대를 중심으로 일어난 조선인 학생들의 사회운동을 진두 지휘한 김일성 주석은 조국의 자주독립과 사회변혁에 대하여 현실에 입각한 독창적인 시각과 방법을 모색해 사대및 교조와 결별한 주체적인 혁명의 지도사상을 창시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길림에서의 투쟁성과를 만주의 각지로 확대하면서 1930년 동만주의 카륜에서 조선혁명의 진로를 발표하여 민족자주사상, 주체사상의 창시를 선포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민족자주의 입장에 철저히 의거하여 우리 민족을 민족자주사상의 기치 아래 튼튼히 묶어세워서 전 민족의 단결된 역량으로 일제를 때려부실데 대한 주체적 노선을 밝혔다. 우리민족 자주독립의 방도가 사상이론적 차원에서 새롭게 확립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매개 민족은 자신의 자주적 정부를 갖는 것이 사회역사발전의 원칙에 합당하다는 입장에 기초하여 조선의 자주적 독립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우리 민족의 중핵적, 선차적 과제로 내세웠다. 식민지 민중의 처지는 상가집 개만도 못하며 자신의 독립된 나라를 가지고서야 인간다운 삶도 있다는 투철한 자각에 기초하여 매개 나라와 민족이 자신의 자주적 정권을 건설하기 위해 한결같이 떨쳐 나설 것을 열렬히 호소한 것이다. 또한 김일성 주석은 주체적인 혁명사상, 노선에서 자주독립은 일시적 바램이 아니라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뚜렷히 밝혔다. 그러한 의미에서 김일성 주석은 자주독립운동이 매개 민족의 선차적 과제, 사활적 과제가 된다는 것을 원리적으로 해명한 유일한 항일독립운동가로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실질적으로 이끈 유일한 영도자, 걸출한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의 새로운 혁명사상은 당시 횡행하던 조선식민지 결과론의 궤변에 경종을 울렸을뿐 아니라 일본에서 변혁이 이루어져야 조선이 해방된다는 주장, 일제 아래서 독립이 힘드니 자치권이나 얻어보자는 주장 등 각종 기만적인 견해를 여지없이 분쇄하고 전체 우리민족이 자주독립의 당위와 필연을 깨닫고 항일독립투쟁에 한결같이 떨쳐나서도록 이끌었다. 그리하여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우리 민족 자체의 힘으로 조국을 되찾게 되었으며 김일성 주석의 민족자주사상, 혁명사상은 민족의 지도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김일성 주석은 15년여에 걸친 영활한 항일무장독립투쟁 동안 민족자주의 사상을 민족성원들에게 널리 파급하는 것을 핵심적인 사업으로 보고 이를 중시하였다. 김일성 유격대라 불리던 조선인민혁명군은 가는 곳마다 현지의 민중들을 조직하여 일제에 반대하여 조국의 자주독립을 이룰 것을 교양하였으며 조선인민혁명군이 실제로 일본군대를 타격, 소멸해 주체의 각오만 있다면 민족자주사상에 기초한 항일투쟁은 정당하면서도 충분히 실현가능한 목표라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항일유격대는 단지 빨치산의 대원 숫자를 늘리는데만 그치지 않고 광범위한 지역에 혁명군의 지도를 받는 반유격구를 조직하여 더욱더 광범위한 민중에게 민족자주의 진보적 이념을 전파하였다. 그 결과 동만주와 북만, 남만 일대의 조선민중은 민족자주 사상의 두리에 확고히 묶어세워져 김일성 주석의 지도하에 항일독립투쟁에 떨쳐나서게 된 것이다. 

김일성 주석이 내세운 민족자주사상은 국경너머 국내로까지 타번졌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 주석은 일본군대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국내로 진출하여 보천보를 들이쳤다. 일제의 통치기관이었던 주재소 등을 습격하여 불사르며 각계민중을 자주독립에로 힘있게 추동한 것이다. 연이어 김일성 주석의 항일유격대는 추격하는 일본군 대부대를 간삼봉 일대에서 포위공격하여 소멸시켜버렸다. 
이는 식민지 암흑에서 신음하던 삼천만 민족의 심장에 격동하는 감격과 감동을 아로새긴 위대한 투쟁이었다. 일제의 폭압과, 김일성 유격대는 전멸하였다는 악선전에 희망을 잃고 몸부림치던 우리민족은, 보천보의 총성으로 인하여 김일성 장군의 항일유격대가 있는 한 우리민족은 결코 소멸되지 않을 것이며 기어이 우리 민족의 힘으로 조국을 해방할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 민족은 백두산 항일 유격대가 있어 민족적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으며 항일 빨치산 김일성 대장만 있으면 일제와 싸워 반드시 이긴다는 신념을 고취할 수 있었다. 
일제는 조선말 사용을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면서 조선과 일본은 본디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우리 민족의 자주의식을 말살하려 들었다. 그러나 조선민중은 그처럼 암담하던 식민지 통치 시기에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항일 유격대를 생각하며 민족자주의 입장을 잃지 않았으며 조선은 자주독립으로 나아간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보천보 전투의 총성으로 인해 국내에서는 김일성 유격대를 지지하는 반일통일전선조직들이 도처에서 생겨나고 김일성 유격대의 민중적 토대는 더욱 굳건히 다져졌다. 김일성 유격대의 활약상은 전국으로 파급되었으며 만주와 백두산 일대는 물론이고 전국에 걸쳐 자주독립의 등불인 김일성 부대와 연계를 갈망하는 청년들이 들끓었다.  
이와 같이 카륜회의와 15성상에 이른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독립투쟁은 우리민족에게 민족자주의 입장에 철저히 서서 온 민족의 역량을 한데 묶어 세우면 강대한 일제도 충분히 타승할 수 있다는 것을 현실로 증명한 위력한 투쟁이었다.  

일제식민시기 우리 민족에게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항일유격대는 조선독립의 구성이었다. 우리 민족은 민족말살의 위기상황에서도 김일성 주석이 민족자주 입장을 튼튼히 견지한 결과로 갖은 간난신고를 겪으면서도 종국에는 일제를 물리치고 자주독립을 이룩했다. 김일성 주석의 민족자주사상으로 우리 민족은 똘똘 뭉쳐 일제의 기만적인 책동에 영합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여, 결국 조선인민 자체의 힘으로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역사적 위업을 이룩한 것이다.     

2. 무장투쟁의 횃불을 높이 들어 8.15 광복의 대업을 이룩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방대한 군사력으로 무장하고 있는 일본제국주의를 타승하기 위해 무장을 들었으며 무장으로 일제를 격멸하여 8.15 광복을 안아왔다. 

김일성 주석은 무기를 생산할 공장은커녕 변변한 철공소조차 없던 식민지 조선의 암담한 상황에서도 일제의 무기를 빼앗아 무장할 대담한 노선을 제시하고 혁명무력의 육성에 총매진, 1932년 4월 25일 우리 민족에게 처음으로 되는 민중의 군대, 반일인민유격대를 탄생시켰다. 일제는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반일인민유격대(1934년 3월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을 소탕하기 위해 수십만의 군대와 각종 중화기, 포병부대,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무력을 들이밀었지만 만주의 산하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서 김일성 주석의 조선인민혁명군은 일제의 수십만 무력을 물리쳐 나갔다. 
우리민중의 전폭적인 지지, 지원 아래 정치사상적 우수성과 기동성, 지형과 기후를 이용한 전략전술의 우위를 앞세운 김일성 주석의 유격전술은 조선인민혁명군을 백전백승, 무적의 군대로 이름날리게 하였다. 일제의 소탕전이 진행될수록 조선인민혁명군은 연길폭탄등 자체로 개발한 무기들과 기관총, 중기관총은 물론이요 박격포까지 갖춘 위력한 군대로 성장하여 갔다.

빛나는 전투의 위훈을 세운 조선인민혁명군은 1940년대 결정적 시기를 대비하여 자체의 힘으로 조선을 독립시킬 전략을 세우고 그 역량을 축적해 갔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에 전민중적 봉기와 배후연합작전을 배합하는 방식으로 조국해방의 총진군을 준비했다. 그 동안 적극적인 유격전을 통한 배후교란과 민족역량의 확대장성을 통해 쌓아온 자주독립의 혁명역량은 이제 온 민족의 단결된 역량으로 강화되어 일제와의 전면전을 준비하는 새로운 단계로 돌입한 것이다. 

한편 1940년대 일본은 북수남공을 주장하며 만주일대에 소련군의 전면공격에 대비한 방대한 요새지역을 구축한 채로 태평양전쟁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와중에도 자신의 주력부대인 백만 관동군을 만주지역에 그대로 주둔시킨 채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과 소련군의 전쟁참여를 억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황에서 만주의 관동군이 은거하고 있는 일본군 요새지역에 대한 정보는 향후 항일대전의 성패를 좌우할 주요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진행할 때 일본군 정예병이라 일컬어지는 100만 관동군은 여전히 만주지역에 위세를 떨치고 있고 조선인민혁명군이 전면적인 대일전쟁에 나설 경우 만주일대의 관동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예상되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1945년 미군이 오끼나와 상륙작전 이후 진격을 서두르지 않고 오끼나와에 머물러 있은 것도 일본의 관동군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저지할 것이라고 타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은 연해주 원동지구에서 전면전을 대비한 맹렬한 군사훈련에 돌입하면서 소부대정찰활동을 통해 소련과 만주 국경일대의 일본군 요새지역에 대한 정보를 샅샅이 수집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당시 중요하게 제기되던 정찰임무를 목숨걸고 완벽하게 수행하였다. 일부 정찰조는 국경일대에 구축된 요새구역 뿐 아니라 나진, 청진, 원산일대와 멀리 조국 남단의 진해, 여수요새까지 정찰하며 일본군의 군세를 정확히 요해하였다. 당시 조선인민혁명군은 일본군 요새의 지형과 건물, 무기현황부터 군용기차의 이동시간과 이동량, 각 비행장의 비행기 종류와 규모, 심지어는 요새의 콘크리트 조각까지 떼어가 그 성분을 분석했다. 이같은 철저한 전쟁준비에 의해 전쟁개시와 더불어 시작된 조선인민혁명군의 전면돌격전에 일본의 백만 정예군이라는 관동군은 소리없이 쓰러지고 만 것이다. 이들 조선인민혁명군의 활약은 1945년 8월 9일 조선인민혁명군의 총진군이 시작된 이후 불과 1주일도 안되어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입증된다.

김일성 주석은 정예병력의 전투준비와 더불어 전체 조선인민을 결정적 국면에서의 전민봉기로 나서도록 방대한 민족역량을 조직, 일제를 앞뒤에서 동시타격하였다. 전국 도처에서 일제를 최후 격멸하기 위한 무장대가 무어졌으며, 조선인민혁명군의 조국진출과 더불어 이들 무장대는 앞뒤에서 조응하여 일제를 반대하여 떨쳐나섬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아성은 짧은 기간에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일본은 만주 관동군을 믿고서 미국의 융단폭격과 원자탄 공격에도 항복을 않고 버티었지만 만주관동군이 조선인민혁명군에 의해 소멸된 상황에서 무조건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던 시기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하던 세력은 정작 미국이 아니라 조선인민혁명군이었다. 1945년 8월 15일 당시 미군은 오끼나와에서 잠을 자고 있었지만 조선인민혁명군은 청진과 함흥을 해방하고 원산, 평양, 해주 일대로 거침없이 진격하고 있었다. 그러한 관계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내용적으로는 미국이 아닌 조선인민혁명군에게, 다시말해 우리 민족에게 한 것이 된다. 우리 민족의 전쟁승리 업적은 다양한 연합군 세력의 한켠에 비집고 들어갈 자그마한 성과가 아니라 2차세계대전 승리자의 맨 앞장에 자신있게 나설 수 있는 자랑스런 성과이다. 우리 민족은 15성상에 걸쳐 김일성 주석이 이끌어온 항일전쟁을 통해 마침내 일제를 격멸분쇄함으로써 식민지 지배의 아픔과 상처를 씻고 자주독립의 서광을 안아온 것이다. 

김좌진 장군이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나 수십만의 일본군과 15년여간 맞서며 조선독립의 기치를 끝까지 사수하고 승리로 이끈 무장투쟁 세력은 김일성 주석의 조선인민혁명군이었다. 또한 소대병력 수준의 민족주의 광복군이 미군군복을 입고 군사훈련을 받았다고는 하나 이들의 군사훈련이, 전면적인 돌격전으로 함경도 전역과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일대를 해방한 김일성 주석의 조선인민혁명군과 비교될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조선인민혁명군의 항일혁명승리는 우리 민족의 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위대한 승리였으며 김일성 주석의 지도아래 전체 우리민족이 똘똘뭉쳐 이뤄낸 자랑스런 민족자주투쟁이었다. 김일성 주석이 손수 창군하여 지휘한 조선인민혁명군의 조국해방 위업은 우리민족의 자주적 독립위업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며 독립운동 진영의 어느 세력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조국해방에의 절대적인 기여로 자손만대에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3. 민족대단합 경륜으로 반일민족통일전선을 이룩하여 8.15 광복의 대업을 달성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전민족을 일제와의 투쟁 마당으로 결속하기 위한 반일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 민족대단합의 경륜을 마련하고 전체 민족의 단결된 역량으로 일제를 쳐부시어 8.15광복을 안아왔다. 
 
김일성 주석은 혁명의 주체는 인민대중이란 관점에 기초하여 전체 민족성원의 힘에 의거하여 일제를 타승할 원대한 구상을 펼쳤다. 다시말해 일제를 반대하는 모든 민족구성원들을 민족자주의 기치아래 똘똘 뭉치게 해 온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일제를 몰아낼 것을 노선으로 제시하고 실천한 것이다.      

김일성 주석의 민족대단합 노선은 당시 수많은 계파로 갈라져 있던 조선독립운동 세력들에 커다란 경종을 울렸다. 김일성 주석은 극소수 친일분자를 제외하고는 참된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포함하고 일제를 반대하는 모든 민족구성원이 하나로 힘을 합쳐야 한다는 민족대단합의 노선을 제시하였다. 우리 민족은 김일성 주석의 넓은 도량과 민족애에 의하여 노선싸움과 계파간 갈등을 극복할 수 있었으며 민족의 단결된 투쟁으로 8.15광복을 안아올 수 있었다. 김일성 주석은 온 민족을 항일에로 단결시키는데 있어서 본인의 사상상태와 현행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믿음의 정치를 실현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악질적인 종파분자들에게는 단호했지만 대다수의 대중들은 교양하여 전취하였고, 반공을 주창해 나선 민족주의세력들까지 연공항일로 돌려세웠으며, 중국인 항일세력까지도 포괄하는 광범위한 반일연대 전선으로 항일대전의 승리를 가져왔다. 김일성 주석은 심지어 지난날 민족앞에 지은 죄가 있더라도 이를 뉘우치고 진실된 마음으로 조선독립의 길을 걷는다면 그가 누구라도 손을 잡고 조선독립의 길을 함께걷는 동지로 이끌어주었다. 
이러한 민족대단합의 경륜에 의해 김일성 주석은 민족단합의 구심으로, 조선독립의 중심으로 우리민족의 마음 속에 강하게 아로새겨진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바로 이러한 민족단합의 노선으로 조국광복회를 조직하여 전민항쟁을 이끌어 냈다. 김일성 주석이 1936년에 조직한 조국광복회는 민족단합의 원칙 아래 전체 조선민족을 항일의 기치에 묶어세운 통일전선 조직이다. 조국광복회는 비밀조직임에도 불구하고 약 20여만명을 구성원으로 갖는 조직이었다. 이처럼 방대한 회원을 갖춘 운동조직은 조선의 어느 독립운동세력을 보더라도 찾을 수 없으며 조국광복회의 존재는 곧 김일성 주석의 민족단합 노선의 생활력을 보여주고 있다.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항일 유격대는 폭넓은 민족단합의 정신에 입각하여 전체 우리 민족을 항일독립에로 추동하고 항일대전을 승리로 이끌수 있는 원동력이었으며, 민족단합의 경륜으로 이룩된 조국광복회는 전민족을 반일항전으로 불러일으킨 통일전선이었다. 

4. 자주독립의 위대한 장군 김일성 주석은 8.15 광복의 영웅이다. 

이처럼 8.15 해방의 주역은 미, 소 대국들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었으며 그 민족자주독립투쟁의 중심에 김일성 주석이 있었다. 그러하기에 8.15 해방 이후 서울에서는 여운형, 허헌, 홍명희를 비롯한 명망높은 인사들이 <김일성장군환영위원회>를 조직했으며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는 10만명의 인파가 몰려 김일성 장군을 환영하였다. 평양시의 인구가 40만내외였던 당시의 상황에서 10만의 환영인파가 몰렸다는 것은 당시 우리민족이 얼마나 열렬하게 김일성 주석을 환영하였는지, 그 열기를 알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은 조선의 항일대전을 승리로 이끎으로써 조선을 세계에 알리고 약관 30대의 연령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정치대가로 이름을 올렸다. 이후 김일성 주석은 세계의 내노라하는 정치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혁명을 논하며 조선을 자주의 나라, 주체의 나라로 발전시켜 동방의 조용한 나라에서 반제자주운동을 이끌어가는 세계의 중심지로 변모시킨 것이다.

일제의 가혹한 폭압 아래 희망을 잃고 신음하던 삼천만 우리민족은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민족자주의 기치아래 일치 단결하여 일제를 반대한 무장투쟁에서 승리하고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였다. 북한동포들이 김일성 주석에 대해 <민족의 어버이> <민족의 태양>이라고 극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김일성 주석의 웅대한 구상과 영활한 투쟁에 의해 우리민족이 일제를 물리치고 민족의 얼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김일성 주석의 자주독립투쟁의 결실이란 점에서 8.15의 의미가 있다. 그러기에 우리 민족 성원 모두는 8.15를 맞아 삼천리 강토에 민족자주의 위대한 발자욱을 남긴 김일성 주석과 그의 유격대의 항일무장투쟁을 뜨겁게 돌아보며 민족자주와 조국통일의 길로 힘차게 나가야 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