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3월의 홍기하전투는 대부대선회작전의 마지막시기를 빛나게 장식한 전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이라는 것으로 혁명군을 괴멸시킨다고 떠들던 적들은 이 전투로 해서 이만저만 큰 타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옹근 하나의 「토벌」중대가 전멸되는 비참한 종말을 당한 것으로 하여 적들은 어쩔바를 몰라 갈팡질팡하였습니다.

그 당시가 어떤 시기인가. 중일전쟁이 장기적인 대치전으로 들어가고 하싼호사건과 할힌골사건으로 해서 소일관계가 극도로 팽팽해진 때였습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의 불길이 점점 더 크게 번져가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때에 관동군수뇌들은 동북항일운동을 최종적으로 박멸한다 어쩐다 하면서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이라는 것을 벌렸습니다.

우리가 적을 부단히 치면서도 싸움을 한번씩 하고 난 다음이면 쥐도새도 모르게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군 했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의 행방을 찾느라고 겨우내 돈화와 무송의 오지를 헤매고 돌아다녔습니다. 그런 때에 다 얼어 죽었다던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력이 안도-화룡현경에 불쑥 나타나 홍기하에서 「마에다토벌대」를 전멸시켰으니 적들로서야 얼마나 혼비백산했겠습니까.

홍기하전투는 보천보전투, 간삼봉전투, 동녕현성전투, 무송현성전투와 같은 큼직큼직한 전투들과 더불어 우리가 벌인 군사작전들가운데서 잊을 수 없는 작전의 하나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마에다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화룡현「경찰토벌대」의 한개 중대장에 불과하였던 마에다로 말하면 사실 조선인민혁명군이 상대할만한 그런 존재는 못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송의 왕가대장이나 안도의 이도선 같이 가장 악질적인 「토벌대장」이었습니다. 직급은 보잘것 없었지만 조선혁명의 사령부를 해쳐보겠다고 날뛰다가 녹아난 것으로 하여 악명을 떨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대부대선회작전에 따라 계획적으로 휴식도 하고 학습도 하면서 적들에게 거듭되는 군사적 타격을 주고 있었습니다.

홍기하전투를 한달가량 앞둔 때에 있은 일이었습니다. 백석탄밀영에서 군정학습을 하던 우리는 밀영으로 기습해 들어온 적들을 불이 번쩍 나게 답새겨 주고 안도쪽으로 쭉 빠져나갔습니다. 대부대선회작전의 제2단계라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입니다.

그런데 이 2단계에서는 첫시작부터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동패자밀영에 들어가있던 임수산이   사령부가 준 과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태공했기때문에 원래의 비밀통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계획에도 없던 다른 통로를 이용해야 했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정한 통로가 다름아닌 사람이 살지 않는 백두산동북부의 백색지대였습니다.

일본군대에 한다하는 측량쟁이들이 많았다고 하지만 이 일대에는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고 합니다. 측량을 하지 못한 지대이니 지도에 백색을 그대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두산동북부의 일부 지역을 백색지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백석탄을 떠날 때 백색지대를 지나서 무산, 삼장에 나가 총소리를 다시한번 크게 내고는 화룡현을 거쳐 안도현 중심부로 되돌아오자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백석탄을 떠나면서 새로 세운 대부대선회작전의 2단계 계획이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노수하에서 한차례의 전투를 한 다음 두도백하, 이도백하, 삼도백하를 가로지르면서 안도현남단으로 행군해갔습니다.

백색지구를 참으로 힘들게 돌파했습니다. 그때는 눈무지도 적이고 설한풍도 적이었습니다. 추워서 견딜 수 없었고 배고파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일 곤난한 것은 길을 자주 헛갈리는 것이었습니다. 만물이 죄다 백색으로 치장을 하다나니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었고 표적을 정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마록구근방에 와서는 식량도 다 떨어지고 의복도 신발도 다 해졌습니다. 우리는 대마록구를 쳐서 후방물자를 해결하였습니다. 대마록구라는 말은 큰 말사슴골이라는 뜻이고 소마록구라는 말은 작은 말사슴골이라는 뜻입니다. 그전에는 대마록구의 사슴들이 두만강을 건너 우리 나라 땅에 와서 풀을 뜯어먹고 겨울에는 대마록구에 돌아가 새초를 먹느라고 두 나라 지경을 왔다갔다 했습니다.

적「토벌대」의 본거지인 대마록구에는 산림경찰중대본부도 있었습니다. 대마록구는 국경방면의 「토벌」거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고장이었습니다. 일제는 이고장에 있는 산림채벌회사와 작업장들을 통하여 군수용목재들을 대대적으로 약탈하였습니다.

우리는 전투에 앞서 대마록구에 정찰조를 파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와서 정찰정형을 보고하고는 눈알이 뿌옇고 키가 꺽두룩한 이상한 인종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코가 한자나 되고 손등에 털까지 부르르한 이상한 족속들인데 무슨 사람들인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대원 한명을 보내서 알아보게 했더니 모두 목재소에서 운전사로 일하는 백계러시아인들이더라고 했습니다. 할빈지방에 백계러시아인들이 많았습니다.

나도 1930년 여름 할빈에 가서 백계러시아인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는 적의 주력이 출전한 틈을 타서 급행급습하는 전술로 순식간에 대마록구를 타고 앉았습니다. 백계러시아인운전사들은 우리 대원들을 만나자 금반지를 주었습니다. 아마 우리 부대를 비적부대로 본 모양입니다. 우리 대원들이 금반지를 받지 않고 되돌려 주자 그들은 천하에 별난 사람들도 다 본다는 듯이 고개를 기웃거리었습니다. 그들의 사상이 그만큼 낙후했습니다.

대마록구를 치고 노획한 밀가루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 밀가루를 대마록구인민들에게 한포대씩 나누어주었습니다. 노획한 물자가 얼마나 많았던지 대원들이 모두 한짐씩 지고도 남아서 수십명의 목재소노동자들이 자진하여 짐을 져다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백계러시아인들을 설복해서 자동차로 일정한 거리까지 쭉 빠지자고 했는데 그들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어를 아는 사람을 백계러시아인들에게 보냈습니다. 그 사람이 가서 백계러시아인운전사들을 설복하여 그들을 움직이게 했습니다.

그때 나는 백계러시아인들과 직접 담화해보았습니다. 당신들은 왜 조국에서 살지 않고 중국에 와서 사는 가고 물었더니 그들이 하는 말이 자기네와 같은 지주, 자본가 출신들은 공산당이 환영하지 않는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사회주의혁명을 반대했기 때문에 죄가 있지만 자기네한테는 사실 아무 죄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에 보내주면 가서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사회주의건설을 해볼 용의가 있는 가고 묻자 있다고 했습니다.

노획물자들을 지고 우리를 따라 나선 사람들중에는 일본인노동자도 한명 있었습니다. 그가 돌아가서 좋은 선전을 했다고 합니다. 혁명군을 만나보니 사람들이 다 좋더라, 그들은 모두 우리와 같은 노동자들 편이더라, 내가 일본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차별없이 대해주면서 일본인노동자들도 조선인노동자들과 힘을 합쳐 일본제국주의를 쳐야 한다고 했다면서 보고 들은 대로 다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목재소감독에게 잡혀 딴곳으로 쫓겨갔다고 합니다.

우리가 대마록구를 기습하자 안도와 화룡 일대의 적들은 초비상경계태세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우리 주력부대를 소멸해보겠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 앞장에 선것이 화룡현 「경찰토벌대」대장인 현경무과장 우나미와 마에다였습니다.

화룡현 경찰당국이 「경찰토벌대」를 조직한것은 1939년 5월 우리가 무산지구전투를 끝마친 다음 두만강연안에서 큰 전투를 연속 벌이던무렵이었습니다. 화룡현 「경찰토벌대」는 순전히 우리를 견제하고 소멸하기 위해서 급작스레 만들어낸 무력이었습니다. 이 「토벌대」는 마에다의 중대를 포함한 4개의 중대와 철도경비대 2개 중대로 구성되어있었는데 간도지구 「토벌」대장의 지휘밑에 유격대「토벌」에 미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멀리 북쪽에 있는줄 알았던 우리가 불쑥 화룡, 안도 현경에 출몰하면서 대마록구를 들이치게 되자 화룡「경찰토벌대」는 악이 날대로 나서 우리를 추격하는데 총력을 집중하였습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마에다는 곧잘 김일성부대주력은 자기네가 맡아 제끼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우리에 대한 「토벌」에 그 누구보다도 악질적으로 달라붙었다고 합니다.

「노조에토벌사령부」는 우리의 목에 자그만치 1만원이라는 많은 현상금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걸었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만주국치안당국이 「경찰상」을 제정하면서 보통상 10원으로부터 치안부대신의 명의로 된 최고상의 액수를 200원으로 제정하였다는 것을 고려해볼 때 1만원이라는 현상금은 엄청난 액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에서 하급경찰관노릇을 하다가 만주로 들어온 다음 수도경찰청산하 경비사령부와 주로 조선국경대안의 여러 지역에서 경찰서장을 지낸바 있는 마에다는 간도일대에서 벌인 「치안숙정공작」에서 세운 「공로」로 치안부대신상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대마록구를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독이 오른 마에다는 유격대를 전멸시키겠다고 하면서 혈서를 쓴 다음 「토벌출정식」까지 했다고 합니다. 일만군경합동「토벌대」는 총출동하여 백두산기슭의 대수림을 포위하고 「개미도 빠져 나올 수 없는 수사망」을 펼쳤습니다.

나는 그때 「토벌대」들이 반드시 우리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적을 교묘하게 빼돌리기 위한 계획을 짰습니다. 우선 한개 소부대 성원들과 노획물자들을 지고 우리를 따라오던 40여명의 사람들을 대마록구로 되돌려보내면서 그들이 여기저기에 발자취를 남기도록 했습니다.

적들은 그들의 발자취에 속아 모처럼 잡았던 유격대를 놓쳐버렸다고 통탄하다가 그렇지만 이번에는 어림도 없다, 김일성이 아무리 신출귀몰한들 땅속에 잦아들겠는가, 백두산만 다 뒤지면 공산군사령부는 문제없이 찾아낸다고 장담하면서 매일같이 산속을 헤매었습니다.

우리는 적들을 따돌리고 얼마동안 화라즈밀영에서 배심좋게 주력부대의 군정학습을 조직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휴식도 하면서 피곤을 풀었습니다. 그러다가 무산쪽으로 행군을 계속하였습니다. 화라즈일대에 흩어져서 혁명군의 행방을 찾느라고 돌아치던 적들이 마침내 우리의 행방을 탐지해내고 뒤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로상에서 「토벌대」에 인부로 징발된 농민들을 만나 1,000명가량 되는 적들이 우리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3월이라고 하지만 허리를 치는 적설때문에 적아쌍방이 다같이 행군에 지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적들의 행군속도가 우리보다는 빨랐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생눈길을 내면 적들이 그 뒤를 졸졸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엎친데덮친격으로 부대에는 쫄라병환자들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한두명뿐 이었는데 나중에는 15명가량의 환자가 생기었습니다.

나는 임춘추에게 쫄라병환자들을 어떻게 치료할 작정인가고 물었습니다. 임춘추는 유격대정치일꾼이었지만 임상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편을 먹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좋다, 아편을 쓰든지 무엇을 쓰든지 재간껏 치료해보라고 하였습니다.

환자들은 아편을 먹고 급한 고비를 넘기었습니다. 그렇지만 행군을 할만한 정도로는 회복되지 못하였습니다. 적들을 멀리 떨구어놓아야 하겠는데 환자들때문에 행군속도가 떠지게 되다나니 적아의 거리가 10~15리 정도로 좁아졌습니다.

홍기하상류의 대마록구하는 여러 갈래의 골물로 되어있었습니다. 그 한골에 이르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목재소노동자들이 사용하다가 버리고 간 헌집이 있길래 보초를 세우고 그 집들에 대원들을 숙영시키었습니다. 대원들을 푹 쉬우지 않고서는 싸움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원들은 적들이 꽁무니를 바싹 따라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행군을 멈추고 그런데서 숙영하라고 하자 좀 불안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부터 자리에 드러눕자 안심했습니다.

나는 「마에다토벌대」를 홍기하골짜기에서 족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홍기하골짜기를 매복지점으로 택한 것은 화라즈까지 들어온 적들이 기지로 돌아가자면 반드시 이 골짜기를 지나게 되리라는 것을 타산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곳 지형은 적을 매복소멸하기에는 참으로 좋은 고장이었습니다. 후에 화룡현 경무과장이 말한것처럼 그 골짜기에서 매복에 걸리기만 하면 「정말 전술을 쓸래야 쓸 수가 없다고 할 수밖에 없는 불리한 지형」이었습니다.

내가 홍기하골짜기를 전투장소로 선택한 것을 알고 오백룡은 『장군님, 적들이 우리의 전법을 잘 알고 있는데 그런 함정에 스스로 찾아들어오게 될가요?』라고 하였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적들이 제일 두려워한 것이 바로 우리의 유인매복전술이었습니다. 적들은 이 전술에 「라와전법」이라는 이름까지 붙이고 내적으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책도 많이 연구하였습니다. 『김일성의 라와에 걸리지 말라.』는 말이 하나의 경구처럼 되어있었다고 하니 그들이 우리의 유인매복전술에 얼마나 혼쌀났는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적들은 빨치산이 매복해 있을 만한 곳으로는 될수록 다니지 않았습니다. 오백룡이 한 말은 이런 실정을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일본군이 「라와」를 경계하기때문에 공산군이 그런 전법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타산할 수 있다는 점을 참작하여 홍기하골짜기에 매복진을 치고 거기서 추격해오는 「토벌대」와의 싸움을 벌이기로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적들이 더는 쓰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전법을 다시금 적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음날 행군길에 나선 우리는 소마록구쪽으로 능선을 타고나가다가 골짜기로 떨어졌습니다. 그 골짜기 양옆의 산들이 묘하게 생겼습니다. 상류를 향해서 오른쪽에는 3형제같이 생긴 3개의 봉우리가 있었습니다. 매복진지로는 명당자리였습니다. 골짜기 왼쪽에도 봉우리가 있었습니다. 그 봉우리기슭에 자그마한 수림이 있었는데 그것도 우리에게 유리한 지형지물이었습니다.

나는 지휘관모임을 열고 간단한 전투조직을 했습니다. 골짜기 오른켠에 있는 3개 봉우리에는 기관총소대와 경위중대를 배치하고 왼켠 봉우리의 변두리에는 7연대와 8연대를 배치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되 각 부대들은 일부러 아래쪽으로 내려갔다가 고지로 올라오는 발자국만을 메우면서 제가끔 지정된 장소에 매복하고 유인대는 발자국을 크게 내면서 계속 골짜기로 빠져나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손태춘을 책임자로 하는 한개 소조는 골짜기의 첫 고지 북쪽을 차지하고 적들의 퇴로를 차단하게 했습니다. 유인대는 골짜기끝에까지 가서 방차대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그날 우리는 홍기하골짜기에서 계획대로 전투를 하였습니다. 날씨가 갑자기 따스해졌기 때문에 양지쪽에서는 눈이 녹아버리었습니다. 길도 질적질적했습니다.

적들은 정오도 지나고 해가 퍼그나 기울어진 때에야 홍기하골짜기에 나타났습니다. 망원경으로 골짜기어귀를 내려다보니 척후였습니다. 척후치고는 큰 척후였습니다. 적들이 척후를 파견할 때에는 한두명씩 내보내는 것이 상례인데 10명가까이 되는 것으로 보아 화라즈골짜기들에 있던 「토벌대」란 「토벌대」는 다 밀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척후병들의 뒤로는 첨병들이 나타났습니다.

첨병들이 마지막고지의 앞을 지나갈 때 군도를 찬 장교가 골짜기에 들어섰는데 후에 알고 보니 그가 바로 마에다였습니다.

부대의 앞머리가 매복권안에 깊숙이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마에다는 걸음을 멈추고 눈우에 찍힌 발자국과 골짜기의 묘한 지형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나는 그가 골짜기위에 척후대를 파하거나 부대를 뒤로 뽑을 궁리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10여일이나 산악지대를 돌아 치며 허탕만 치는통에 지칠대로 지친 마에다는 냉철하게 사고하고 판단해야 할 그 운명적인 시각에 탕개를 늦추고 방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에다가 독립수밑에 서있는 것을 보고 지나가던 부하장교들이 그옆에 모여들었습니다. 마에다는 군도를 짚고 서서 그들에게 무슨 지시를 주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적의 기본대오는 전부 매복권안에 들어섰습니다.

나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사격신호를 내렸습니다.

적들은 첫 타격에 벌써 반수이상이 쓰러졌습니다. 골짜기 좌우쪽에서부터 불의에 협격을 받은 마에다는 즉시 전대오를 행군하던 그자리에 산개시키고 주력으로 북쪽고지를 점령하려고 했으나 서쪽 잡관목림속에 매복해있던 우리 대원들이 맹렬한 측면사격을 하게 되자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마에다는 정황이 불리해지게 되자 최후결전을 결심했던지 돌격명령을 내리었습니다. 그리고는 군도를 뽑아 들고 돌격서열의 앞장에서 달려나왔습니다. 그는 중상을 당한 후에도 쓰러지는 마지막순간까지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나머지 적들도 결사적으로 저항했습니다. 마에다의 부하들은 무리죽음을 당하면서도 총을 놓지 않았습니다. 무기를 바치고 투항한 30명쯤 되는 적을 내놓고는 모두가 소멸되었습니다. 살상자수가 140여명 잘되었을 것입니다.

홍기하전투때 우리 동무들이 참으로 잘 싸웠습니다. 그때 육과송에서 전사한 오중흡을 대신하여 연대장이 된 오백룡도 잘 싸웠고 김일도 돌격대장의 역할을 잘 수행하였습니다.

싸움이 끝난 다음 전장을 수색해보니 전리품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전리품가운데는 무전기도 있었습니다. 탄알도 수만발 노획하였습니다. 무기가 남아돌아가던 때여서 처치곤난이었습니다. 그래서 노획한 무기들 가운데서 일부를 떼내어 낡은 무기를 가지고 있던 대원들에게 주고 나머지는 대사변의 시기를 예견하여 유지로 싸서 땅에 묻거나 구새먹은 나무에 보관하게 했습니다.

전리품정리를 끝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위만군 「봉천부대」가 불을 피우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달려들지 못하고 눈먼총질만 하였습니다. 나는 오백룡에게 노획한 기관총을 전부 걸어놓고 성능검사도 할 겸 요란하게 위협사격을 퍼붓게 하였습니다.

그날밤 오백룡이 「봉천부대」가 슬금슬금 오기 시작한다고 하면서 저놈들을 답새기라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은 내버려두라, 구경꾼들까지 때릴것이야 있는가, 그들을 때려 눕히는 것보다 살려 보내는 것이 낫다, 그래야 우리를 대신하여 마에다부대가 벼락맞은 소식을 세상에 전해줄게 아니냐고 말해주었습니다.

마에다가 부하들에게 유서를 씌운 사실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홍기하에서 싸움을 한 다음 전장을 수색할 때 전사한 장교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유서를 보고 알았습니다. 비단천에 싼 유서였는데 그 내용이 아주 비장했습니다. 포로병들의 말에 의하면 마에다는 출전직전에 부하들을 모아놓고 중대는 지구「토벌대」의 일원으로 김일성부대와 싸워야 한다, 그들과 싸워서 이기자면 야마도 다마시(일본정신)를 키우고 천황을 위하여 죽을 각오를 가져야 한다고 하면서 유서까지 씌웠다는 것입니다. 지어는 자기가 죽은 다음에 쓸 유골함까지 만들어놓았다고 합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에다가 비록 직급은 하나의 「토벌중대장」에 불과한자이지만 정말 지독한 국수주의의 하수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에다를 극단적인 민족배타주의와 반공광신자로 만들어 놓은 것은 일본의 군국주의와 국수주의사상이라고 봅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전체 국민을 철저한 국수주의의 신봉자들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국수주의라는 것은 항상 애국주의의 외피를 씁니다. 그러므로 사상적으로 각성되지 못한 사람들한테는 국수주의의 독소가 쉽게 침습해들어갈수 있습니다.

내가 이전에도 말한 바가 있지만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청소년들에게 만주를 먹어야 자기네 나라가 잘살 수 있다는 침략사상을 집요하게 주입시키었습니다. 사람들이 매일같이 소비하는 빵이나 과자 같은 음식물에다가도 해외팽창을 고취하는 자극적인 글자를 새겨넣는다고 하였습니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남의 땅을 삼킬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선전을 이런 정도로 집요하게 해대면 그 독소가 사람들의 머리속에  침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르조아지들에게는 마치 아무런 사상도 없는 듯이 생각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공산주의사상이 있는 것처럼 부르조아지들에게는 부르조아사상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대로 자기네 사상을 신봉하는 충견들을 길러냅니다.

한때 혁명군안의 일부 지휘관들은 일본군대내에서 황도정신을 주입하고 있은 문제를 두고 일면적으로 그 기만성과 허황성만 선전하였습니다. 그러다나니 일본병사들을 총을 쥔 목석으로 보는 편향을 발로시켰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현상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군대의 정치사상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은 적들에게 사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상이 적들의 사상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적들이 똑똑한 사상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얕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치일꾼들에게 적의 사상적 취약성만 강조하지 말고 취약하기는 하지만 그들도 사상을 주입하고 있고 극악한 반공독소로 병사들을 길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적들은 홍기하전투를 통해 쓴맛을 단단히 보았습니다. 그것은 조선인민혁명군의 뒤꽁무니를 아무리 쫓아다녀보아야 차례질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오히려 「마에다토벌대」의 종말과 같은 비참한 결과만 맛보게 된다는 것과 조선인민혁명군을 타승할 힘은 이 세상에 없다는 쓰디쓴 교훈이었습니다.

우리는 홍기하전투를 통해 조선인민혁명군은 건재해서 승승장구하고 있으며 그 어떤 엄혹한 시련이 앞을 가로막아도 절대로 굴복하지도 사멸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주었습니다.

홍기하전투는 국내인민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홍기하에서 조선땅이 지척이었기 때문에 혁명군한테 마에다가 쫄딱 녹았다는 소문이 두만강을 건너 조국땅으로 인차 날아갔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운명이 어떻게 돼가는 가고 가슴을 조이며 주시하던 인민들이 그 소문을 듣고 큰 힘을 얻었습니다. 이 전투가 있은 다음부터 사람들은 혁명군이 망했다는 선전을 아무리 들이대도 믿지 않았습니다.

홍기하전투를 계기로 조선인민혁명군의 위력에 대한 이야기는 점점 더 넓은 범위에서 전파되어갔습니다. 인민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에 자기들의 장래를 전적으로 의탁하게 된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앞두고 조선의 모든 반일애국역량이 신심을 가지고 전민항쟁을 적극적으로 추진시킬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홍기하전투를 통하여 우리가 거둔 가장 큰 소득입니다.

그와 반대로 김일성부대만 소멸하면 동북에서의 항일유격전쟁은 조만간에 종말을 고한다고 선전하던 일만군경측으로 볼 때에는 청천벽력과 같은 불상사였고 비참한 패전이었습니다.

화룡현경찰당국은 마에다부대의 전멸을 놓고 전전긍긍하면서 저들이 천명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다고 하는 수밖에 다른 말을 할수 없다고 비명을 질렀으며 조선인민혁명군의 령활한 전법앞에 마에다부대의 패망은 불가항력적이라고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에다토벌대」의 괴멸은 일만군경수뇌들이 그토록 큰 힘을 넣었던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의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에다의 직속상관이었던 화룡현 경무과장 우나미는 패전후 일본에 돌아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었다.

『간도성의 만주국경찰로 있은 내가 김일성장군이 이끄는 항일부대의 토벌에 참가한 것은 1938년부터 1941년에 걸쳐 서였다.

정보수집이 곤난한 가운데서도 비교적 확실한 정보로서 〈김일성장군은 길림시의 학교를 졸업하였다. 매우 우수하여 정치적 판단력, 조직지도력이 뛰어나고 신망이 두터웠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장군의 탁월한 지도력은 항일유격투쟁속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 것 같았다. 특히 교묘한 유도작전이라든가 매복전에 의하여 혼쌀난 일이 많았다.

1940년 3월 11일 홍기하계곡에 있는 대마록구가 김일성부대의 습격을 받았다. 대마록구는 산림경찰중대본부가 있는 토벌대의 거점이었다. 본부가 얻어맞고 자동차수리소가 불타고 무기, 탄약, 식량, 피복을 빼앗겼다.

누노가미지구토벌대장은 경찰토벌대대에 일본군의 오오바, 아까호리부대와 협동작전으로 김일성부대를 추적섬멸하라고 명령하였다.

나는 마에다 다케이치중대에 그 임무를 주었다. 3월 25일 마에다중대는 대마록구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김일성부대와 맞다들어 대격전을 벌렸으나 마에다중대장이하 전멸하는 결과로 끝났다. 매복작전에 걸렸던 것이다. 이 마에다중대의 전멸은 토벌대에 큰 충격을 주었다.

김일성부대는 지리에 밝고 교묘한 전술을 쓰고 있기 때문에 밀림에서의 토벌작전은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김일성빨치산부대는 〈우리는 김일성장군이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이다. 조국광복을 위한 싸움에서는 타협이 없다.〉, 〈토벌대는 우리에게 무기, 식량, 의복을 가져다 주는 가장 환영할만한 손님이다.〉고 하면서 의기양양해 있었다.

지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김일성수상의 영도밑에 훌륭한 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탁월한 지도자의 영도밑에 전진하고 있은 조선인민은 기필코 조국의 통일을 실현할 것이라고 나는 자신의 체험을 가지고 확신하고 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홍기하전투와 관련된 회고를 하시면서 군국주의의 재생에 경각성을 높일 것을 강조하시었다. 그 말씀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일본지배층은 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나서 세계제패라는 어리석은 몽상에서 깨어났다고 하는데 사실이 그렇다면 그것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고 이웃나라 인민들을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일본지배층이 하는 노릇을 보면 아직도 「대동아공영권」이나 세계제패를 꿈꾸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일본의 적지 않은 반동세력은 지금까지도 조선인민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침략하고 약탈한 죄과, 수십수백만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죄행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그에 대한 보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어는 20여만의 아녀자들을 성노리개로 끌어다가 짐승처럼 취급한 야수적 죄행까지도 똑똑히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경제를 밑천으로 하여 정치대국화, 군사대국화를 참망하고 있습니다. 구라파나라들에서 신파쇼분자들이 준동하고 있는 것도 재미가 없는 일입니다.

군국주의의 부활에 경각성을 높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