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1939년 가을부터 1941년 봄까지 동남부 3개 성에 대한 「치안숙정특별공작」의 명목 밑에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미증유의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이 작전의 주담당자였던 노조에와 그 산하 「토벌」대장들의 패전고백을 담은 글을 보시다가 해당 일꾼들에게 호언장담을 즐기는 일본군이 이렇게 김빠진 소리를 한걸 보면 그들도 그때 몹시 혼이 난 것 같소. 우리 동무들의 고생이야 더 말해 뭘 하겠소. 생사가 왔다갔다 하는 결전이었소.라고 하시면서 적아의 대결에 대하여 상세히 회상하시었다.

 

우리가 무장투쟁을 하면서 제일 고생을 많이 한 때가 어느 때인가 하면 1930년대말부터 1940년대초까지입니다. 고난의 행군도 어려웠고 일제가 「치안숙정특별공작」의 명목 밑에 동남부 3개 성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을 감행하던 때에도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동남부 3개 성이란 길림성, 통화성, 간도성을 말합니다. 매 단계의 투쟁이 다 간고하고 복잡했지만 이 시기에 겪은 고생은 정말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연한 기회에 적들이 1939년 가을부터 장기적인 「대토벌」을 시작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정보를 제공해준 사람은 그 해 6월에 있은 올기강전투에서 우리에게 포로되었던 「봉천부대」의 한 중대장입니다.

우리는 그 전투에서 많은 장교들과 사병들을 사로잡았습니다. 포로들은 혁명군이 자기네를 한명도 죽이지 않고 노자까지 주어 돌려보내는데 대해 몹시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참군을 희망하는 포로들 중에서 똑똑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적군 속에서 우리를 도울 데 대한 임무를 주어 돌려보냈습니다. 그때 우리의 교양을 받고 위만군으로 돌아간 장교들 가운데 중대장이 한명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해주었다는 사람이 바로 그 중대장이었습니다. 그는 「간도지구토벌대」라는 것이 새로 조직되었는 데 자기 중대도 거기에 망라되었다는 것, 「대토벌」은 10월초부터 개시되는데 이번 작전은 전례없는 큰 규모로 진행되게 된다는 것, 혁명군이 즉시적인 대응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많은 손실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통보해왔습니다.

그 정보의 도움으로 우리는 적들이 우리를 반대하는 방대한 규모의 새로운 작전을 준비한다는 것을 알고 그에 대처할 준비를 비교적 여유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의 전모를 발가놓고 보니 그 잡도리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이 「토벌」작전은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일만군경일체의 「대토벌」로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이 작전은 관동군사령관 우메즈와 만주국 치안부대신의 직접적인 지휘감독하에 무려 20여만에 달하는 일만군경과 각종 반군사인원을 동원시킨 하나의 큰 전쟁이었습니다.

우리가 항일전쟁을 선포한 후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매해 우리를 반대하는 「토벌」작전을 감행해 왔는데 그 규모가 해마다 커졌습니다.

1934년 이후의 위공작전과 1936년 가을부터 북부동변도에서 감행된 「토벌」도 규모가 대단히 컸습니다.

그러나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의 미명하에 준비된 새로운 「토벌」작전은 그것이 수행되는 지역의 규모에서도 종래의 모든 「토벌」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1936년의 「북부동변도치안공작」때 사사키를 위수로 한 「통화토벌사령부」의 작전무대가 1개 성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면 1939년 「노조에토벌사령부」의 작전무대는 길림, 통화, 간도의 3개 성과 목단강성의 녕안현까지었는데 결국 4개 성인셈이었습니다.

 

「만주국군」에 실린 글에는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을 위한 준비과정의 일단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관동군이 예정한 예산금액은 300만원으로서 그이상은 절대로 안된다고 한다. 토벌개시의 첫날인 10월 1일 관동군사령부에서 이이무라참모장, 만주국 총무장관 호시노 나오키, 치안부차장 스스기다 미조와 노조에소장의 대리로서 기다베참모가 회담하여 기다베참모는 치안숙정계획을 설명하며 도로의 신설보수, 통신, 집단부락 등등에 대하여 지도를 가지고 설명하여 토벌비가 3,000만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요청하였다.

호시노장관은 비용을 어떻게 해보겠다고 약속하고 이이자와 주계처장도 비용은 짜낼테니 꼭 3성 토벌을 성공시킬 것을 요망하였다. 그 결과 최종적인 철저한 치안공작을 추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만주국군」난성회 400페이지)

「노조에토벌사령부」의 새 작전은 그전의 「통화토벌사령부」의 작전보다 지역상으로는 3~4배, 역량상으로는 12.5배, 비용상으로는 13배가 훨씬 넘는 것으로서 이 수자들을 통해서만도 일본군부가 이 「토벌」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일만군경수뇌들은 이 「토벌」작전을 단순한 군사적「토벌」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귀순공작」과 「사상공작」, 「치본공작」 등을 결합시켜 나감으로써 그 폭과 심도라든가 방법과 수단의 치밀성으로 볼 때 종전의 「토벌」들을 훨씬 능가하는 전례없는 작전으로 되게 하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또한 「토벌」작전을 시작하면서 그것을 「성전」 또는 「성벌」이라고 묘사하였습니다. 「성벌」이란 성스러운 「토벌」이란 뜻인데 그들이 그런 식으로 자기네 「토벌」을 미화한 것은 가소로운 일입니다.

일본사람들은 해외침략전쟁을 여러 번 했지만 선전포고를 한적이 별반 없고 또 처음부터 그것을 전쟁이라고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전쟁을 사변이나 사건으로 묘사하면서 저들의 전쟁행위를 합리화하고 합법화하는 것이 그들의 상투적인 습성입니다.

그런데 적들이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이라는 새 작전을 「성벌」이나 「성전」이라고 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군부가 인민혁명군과의 대결을 일방적인 「토벌」이나 「숙정」으로 보던 종래의 관점에서 벗어나 교전관계, 전쟁관계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왜 이 시기에 와서 어마어마한 총력전의 체제로 작전을 벌이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그들이 작전을 세우면서 달성하려고 한 목표는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도 말씀하시었다.

 

중일전쟁과 할힌골싸움에서의 연속적인 실패로 하여 일본군내부는 몹시 소란했습니다.

석달이면 결속될 수 있고 길어서 반년이면 막을 내리게 되리라고 장담하던 중일전쟁은 2년이 지나도록 승산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본군의 주력은 전쟁의 진흙탕 속에 깊숙이 빠져들어갔습니다.

일본군부의 일부 계층 속에는 중국대륙과 할힌골에서의 패전원인을 군부 안에서의 파쟁이나 군사기술기재의 낙후성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군부관료들과 군사전문가들 가운데는 인민혁명군부대들의 배후교란작전과 그로 인한 후방의 불안정, 보급로의 차단, 전쟁심리의 혼란 등에서 주되는 원인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인민혁명군부대들의 배후교란작전때문에 적들이 큰 손실을 당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여기로부터 일본사람들이 정신을 단단히 차린 것 같습니다. 그들은 후방에 인민혁명군부대들을 그냥 두고서는 중일전쟁도 대소작전도 다 성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적들이 항일유격대에 대한 관점을 달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는 바와 같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동남부치안숙정특별공작」이라는 새로운 작전을 꾸미고 총력전체제로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은 인민혁명군과의 교전과정에 대한 총화로부터 온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이 「숙정공작」에서 적들이 달성하려고 한 목적은 인민혁명군부대들을 최종적으로 소멸하고 그 존재자체를 없애 버리려는 것이었습니다.

노조에의 훈시를 보면 내용전반이 우리 부대를 완전 소멸해치우겠다는 호통으로 일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그 훈시라는 데서 이때까지 여러 해 동안 길림, 간도, 통화의 3개 성에서 거듭되는 「토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격대들이 쇠퇴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 자기가 중임을 받고 정마를 백두산에 내몰아 한칼에 짓부숴 비적의 화를 근절시키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부하들에게 인민혁명군부대성원들을 한 사람도 놓침이 없이 전멸시키라고 호통질하였습니다.

정마를 백두산으로 몰아 한칼에 짓부숴 버리겠다는 것은 바로 우리를 어째 보겠다는 말이었는 데 이 훈시를 통해 명백히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적의 주공목표가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총력전체제하의 대규모작전에서 적들이 어떤 전략전술로 나오겠는가 하는데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돌리었는데 일본군부가 우리의 유격전술을 오랫동안 연구총화한데 기초하여 내놓은 새로운 전술, 말하자면 유격전을 유격전으로 소멸하는 전술로 나오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적들이 유격전을 유격전으로 소멸하려는 음흉한 기도를 품고 있다는 것을 「토비」공작참고자료라는 것을 입수한 후 더욱 똑똑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기 적들은 우리에 대한 「토벌」경험을 묶은 이 자료집을 각 「토벌대」들에 배포하여 사전연구를 충분히 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일종의 반유격전교범이었습니다.

일본군부는 반유격전을 목적한 특수부대의 복장도 우리와 같은 것으로 하고 훈련도 행동도 역시 빨치산식으로 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일본군부가 조선인민혁명군을 소멸하기 위하여 얼마나 깊이있는 조사와 새로운 전술을 모색해 왔는가를 잘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노조에와의 대결이 아주 준엄한 싸움으로 되리라는 것과 이 싸움에서 승리하자면 반드시 종전에는 쓰지 않던 전혀 새로운 전술을 탐구하고 적용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수십만 대군의 공세를 파탄시키고 혁명의 지속적인 고조를 이룩하자면 그 어느 때보다도 치밀하고 적극적인 작전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묘술을 찾아내야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묘술로 대부대선회작전을 선택하였습니다. 대부대선회작전이란 한마디로 말하여 대부대로 비밀통로를 따라 광활한 지역을 빙빙 돌아가는 장기적인 유동작전이라는 뜻입니다. 그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전법으로 적을 답새기며 돌아가는 작전입니다. 이러한 유동작전을 하지 않고서는 20만의 대군과 싸워 이길 수 없었습니다.

「노조에토벌사령부」가 늘여놓은 「지구토벌대」, 「소지구토벌대」의 그물은 길림, 간도, 통화 3성은 물론, 북만에 있는 목단강성의 녕안, 동녕, 목릉 등지를 다 덮고 있었습니다. 자칫 하다가는 이 그물에 걸려 헤어나오지 못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물을 자세히 살펴보면 촘촘한데도 있고 성글게 쳐놓은 데도 있었습니다. 그물을 이미 친 데가 있는가 하면 치는 과정에 있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물코의 크기도 각각 이었습니다. 우리의 중심활동구역인 간도성은 모든 현에 다 「토벌대」가 배치되었습니다.

우리는 첫 선회의 지향점을 돈화와 액목의 서쪽방향으로 정하였습니다. 그 두 지방에는 우리가 꾸려놓은 지하조직들이 많았습니다. 군중들도 혁명화되어 있어 발을 붙이기가 좋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대부대로 그 고장들을 짓부숴 놓으면 적들의 주의가 거기로 쏠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다음 지향점을 몽강, 무송, 장백 방향으로 정하고 그리로 급선회를 해서 또 한바탕 소리를 낸단 말입니다. 적들이 우리의 흔적을 따라서 몽강과 무송과 장백으로 나올 때 우리는 다시 간도성 남단으로 해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이 나의 구상이었습니다. 나는 이런 선회기간을 대략 1년으로 보았습니다.

선회작전은 대부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었습니다. 적들을 피하자는 것이 대부대선회작전의 목적이 아니라 우리에게 유리한 곳마다에서 적들을 소탕해 버리자는 것이 이 작전의 목적이었습니다. 적을 칠 때에는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게 섬멸전을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반드시 선회작전을 대부대로 해야 했습니다.

대부대선회작전수행에서 내가 특별히 중요하다고 본 것은 선회통로의 비밀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통로의 비밀이 새기만 하면 적의 「진드기전술」에 걸려 들 수도 있고 포위망 속에 들어가 엄청난 곤난을 겪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전은 한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슨 문제인가 하면 식량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유격대가 고정된 지역에서 활동하는 경우에는 식량을 미리 장만해서 밀영에 저축해두고 먹으면 됩니다. 그러나 온 겨울 대부대로 유동하면서 활동하는 경우에는 문제가 다릅니다.

식량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대부대선회작전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작전안을 생각해낸 다음에도 그것을 인차 공포하지 못하고 얼마동안 보류해둔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부대의 이동노정을 미리 정해놓은 조건에서 7연대와 8연대, 경위중대를 동원하여 우리가 지나가게 될 중요지점들에 미리 식량을 저장해 놓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안도현 북부와 화전현, 돈화현 일대에 먼저 식량을 마련해 놓기로 하였습니다.

그 당시는 아직 가을걷이를 하지 않은 때여서 식량을 해결하기가 대단히 곤난했습니다. 가을걷이를 하고 탈곡을 해야 쌀을 사겠는데 그렇지 못하다나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도회지의 미곡상들을 찾아다니며 쌀을 살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나는 식량공작을 떠나가는 지휘관들에게 곡식을 밭에 세워놓은 채로 사들이는 방법으로 쌀을 해결해 보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식량을 해결하자면 매매가 끝난 다음 우리 스스로가 밭에 가서 곡식을 베여 들여야 하고 낟알털기도 자체로 해야 했습니다. 전부대가 다 동원되어도 손이 모자랄 정도로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었지만 우리는 그 방법을 따르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식량문제가 기본적으로 해결되었던 그 해 10월초 나는 안도현 양강구에서 군정간부회의를 열고 백두산동북부의 넓은 지역에서 대부대선회작전을 전개할 데 대하여 정식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양강구와 그 부근에서 활동할 때의 사실들 중에서 또 한가지 잊혀지지 않는 것은 어떤 농민이 우리한테 찾아와서 열네댓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을 혁명군에 입대시켜 달라고 간청하던 일입니다.

대부대선회작전과 같은 큰 시련을 앞두고 어린 소년을 부대에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실 우리로서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나는 소년에게 우리는 낮에도 걷고 밤에도 걷는 군대다, 하루에 100리를 행군할 때도 있고 200리를 행군할 때도 있다, 그래도 따라다닐만 한가고 물었습니다. 소년은 이오송을 가리키며 저 군대형님이 걸으면 자기도 따라다닐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농민에게 아들을 유격대에 보내놓고 걱정스럽지 않겠는가고 물었습니다. 농민은 그만한 각오도 없이야 어떻게 아들을 혁명군에 바치겠는가, 다북쑥도 삼밭에 나면 곧아진다고 했는데 장군님만 믿고 마음을 놓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소년도 똑똑하고 아버지도 훌륭하였습니다.

나는 그 소년을 입대시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더러 고생을 사서 한다고 말했지만 대부분의 지휘관들과 병사들은 사령관동지가 저런 소년을 입대시키는 것으로 보아 이번 작전은 성공한 작전이 틀림없다고 하면서 기뻐하였습니다. 만일 이번 작전이 승산없는 작전이라면 사령관이 저런 짐을 스스로 걸머지겠는가 하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습니다.

그 소년을 전령병들 속에 두고 내가 직접 데리고 다니었는데 눈썰미가 있고 행동이 민첩하여 성장이 빨랐습니다. 그 후 나는 양강구로 회의하러 갈 때에도 그 어린 대원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인차 귀로에 올랐는데 그 길이 평탄치 않았습니다. 노조에의 1기 「토벌」이 시작된 때인 것만큼 정황이 몹시 삼엄했습니다. 그래서 앞에다가 척후를 세우고 은밀하게 움직였습니다.

우리는 계관라자부근에 이르러 적들의 불의습격을 받았습니다. 계관라자란 산봉우리가 마치 닭의 볏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닭의 볏처럼 생긴 그 봉우리가 바로 우리의 전방 왼쪽에 솟아있었습니다. 계관라자부근의 지형은 적들이 매복전을 하기에는 아주 편리하고 행군 중에 있는 우리가 적의 기습을 막기에는 대단히 불리한 지형이었습니다. 적「토벌대」들이 만약 계관라자일대에 와있다면 이런 지형을 놓칠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격전의 방식으로 항일유격대를 소탕하겠다고 덤벼든놈들이니 매복진을 치고 대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행군노정을 바꾸어 품이 많이 드는 우회로를 택할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대오 앞에 기관총을 세우고 속보로 위험구역을 통과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계관라자의 바위 밑에 이르렀을 때 별안간 산봉우리 쪽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났습니다. 적들은 외가닥길을 따라 걸어가는 우리의 행군대오를 향해 집중사격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적의 이 불의습격에서 「조꼬맹이」란 별명을 가진 구대원과 김정덕이 치명상을 당했습니다.

나는 그때 양강구에서 입대한 소년이 걱정되어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것이 글쎄 고지의 적을 향해 총을 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처럼 위급한 순간에 그가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는지 생각만해도 놀라웠습니다.

소년대원은 『사령관동지, 움직이지 마십시오!』하면서 제법 나를 돌보기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아니다. 움직여야 한다. 자리를 옮겨가며 사격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가까이에 있는 흙무지뒤의 웅덩이진 곳으로 그를 끌어당기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적탄은 계속 우리한테로 날아왔습니다. 실로 진퇴양난이었습니다. 나는 벌판 쪽으로 100미터쯤 되는 곳에 홈타기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날 따르라는 구령을 치며 그리로 달려갔습니다. 대원들도 부상자들을 부축해가지고 나를 따라 그 홈타기를 향해 뛰어갔습니다. 그렇지만 거기도 안전한 곳은 못되었습니다.

우리는 강기슭에 내려가서 얼마간 달리다가 적들이 차지하고 있는 절벽 쪽을 향해 전진하였습니다. 그 날 나는 대원들에게 왜 그 쪽으로 가야 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해줄 경황이 없었습니다. 그저 앞장에 서서 적진 쪽으로만 무작정 뛰어갔습니다. 대원들이 그때 좀 이상하게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10명안팎의 적은 역량으로 적의 대부대를 향해 돌격할리는 없겠는데 어쩌자는 것일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대원들은 주저하지 않고 내 뒤를 따랐습니다. 나에게 대원들에 대한 두터운 믿음이 있는 것처럼 대원들에게는 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절벽으로 접근한 때부터 탄막은 머리위로만 지나갔습니다. 대원들이 나의 전술적 의도를 파악한 것은 그때였다고 생각됩니다.

적들은 우리가 벌판 쪽으로 빠진 줄 알고 그 쪽으로만 눈먼 총질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고지에서 쓸어 내려와 벌판을 포위하면서 함성을 지르며 밀려갔습니다. 그사이에 우리는 옆고지에 올랐습니다. 벌판을 3면 포위한 적들은 한참동안 저들끼리 미친듯이 맞불질을 했습니다.

계관라자전투는 「노조에토벌대」와의 첫 조우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적들이 새 작전을 앞두고 우리의 유격전술을 많이 연구했다는 것을 나는 이 전투를 통해 더욱 똑똑히 알게 되었으며 대부대선회작전안이 전술적으로 옳은 선택이라는 것을 깊이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계관라자전투는 그 해 겨울에 우리가 부닥치게 된 군사적 정황의 축도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양강구에 가서 회의를 하고 오는 사이에 우리 동무들은 이미부터 진행해오던 식량공작을 전부 끝냈습니다. 재봉대원들도 나의 지령대로 군복을 거의다 지어놓았습니다.

우리는 대부대선회작전의 첫 단계를 돈화원정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이 단계의 노정은 화라즈에서 돈화로 쭉 빠졌다가 그 다음에 몽강, 무송쪽으로 가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화라즈를 떠난 다음 백두산 쪽으로 가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돈화오지를 왔다갔다하며 큰 싸움을 몇 번 하고는 몽강현 동패자나 무송현 백석탄의 대수림 속에 들어가 노독도 풀고 군정학습도 하면서 대소한추위를 밀영에서 넘기자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1단계의 작전준비를 하면서 임수산에게 경위중대 1개 소대와 독립대대를 주어 동패자로 보내고 소부대를 백석탄으로 보내어 밀영을 준비하고 대부대가 먹고 살아갈 양식과 피복을 마련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사전준비를 끝낸 다음 돈화원정을 떠났습니다. 돈화원정을 쉽게 이해하려면 육과송전투와 쟈신즈전투를 상기하면 됩니다. 이 두 전투가 바로 돈화원정기간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부대이동노정을 위장하느라고 원정의 첫 시작에 삼장 쪽으로 가는 것처럼 이도강상류 쪽으로 진출했습니다.

화라즈에서 20~30리 가량 빠지니 날이 밝기 시작했습니다. 강에서 벗어나 발자국을 없애고 가까운 숲속에 들어가 피곤을 풀었습니다. 아침밥을 먹고 원기를 회복한 다음에는 외발자국행군법을 쓰면서 백두산 쪽으로 행군해 갔습니다. 그러다가 내도산근처에 가서는 행군방향을 180도로 바꾸어 삼도백하의 얼음을 타고 북으로 향했습니다. 적들에게 다시 한번 혼란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행군방향을 그렇게 역전시키면 그것은 전투를 몇 탕 한 것 만치나 큰 은을 냅니다. 적들은 혼란에 빠져 이곳 저곳 헤매다가 백색지대에 들어가서 얼어 죽을 수도 있었고 맥이 진해서 전투력을 잃어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거짓소문도 퍼뜨리면서 흔적을 공개한 것은 적들을 될수록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최대한 맥을 빼고 춥고 지쳐서 옴짝달싹 할 수 없게 하자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눈 때문에 우리는 목단령을 넘을 때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함박눈이 내리면서 영의 돌바위를 모조리 얼음판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여간 미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나니 행군속도가 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주력부대는 목단령을 무사히 넘어 돈화의 숲속으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대부대선회작전은 이처럼 시작부터 간난신고였습니다. 그러나 장쾌한 출발이었습니다. 우리는 돈화원정을 시작하면서 적들을 요란하게 때리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비밀통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정도로만 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측에서는 사상자가 많이 났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돈화원정과정을 회상하실 때마다 행군도상에 있었던 반일청년동맹회의에 대해서도 종종 말씀하시었다.

 

우리는 돈화원정과정에 반일청년동맹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반일청년동맹이라는 것은 남호두회의의 결정에 따라 공청을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개편한 청년조직입니다. 우리가 반일청년동맹회의를 소집하게 된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돈화에 가면 사도황구라는 곳이 있습니다. 사도황구는 내가 길림감옥에서 출옥한 후 한동안 파괴된 지하조직을 복구하며 정양생활을 하던 고장입니다. 우리가 목단령을 넘어 처음으로 도착한 곳이 바로 이 사도황구부근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정을 요해하려고 주민부락에 내려갔던 대원이 박득범사건과 관련된 그 고장 지하조직의 반영자료를 수집해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박득범사건이란 한마디로 말하여 인민혁명군지휘관의 한 사람인 박득범이 혁명군의 명예와 후방물자를 바꾼 사건입니다.

그들은 한때 식량과 피복의 부족으로 심한 곤경에 빠지었다고 합니다. 후방물자가 떨어지면 적을 치거나 혁명조직들을 발동해서 해결하는 것이 인민혁명군의 고유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박득범은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지하조직들을 발동할 궁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싸움을 두려워하는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러다나니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식량과 피복의 부족을 타개하려고 했습니다. 그가 적용한 방법은 어디에 내놓고 말하기도 거북한 것입니다.

박득범은 밀정을 통해 적들에게 1개 사단을 데리고 당신들한테 투항하겠는데 옷이 다 해지고 식량이 없어서 곤난하다, 식량을 얼마 내고 천을 얼마 내라,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지정하는 장소에 가져다 놓으라, 그러면 그것으로 옷도 갈아 입히고 대원들의 원기도 회복시켜가지고 당신들한테로 내려가겠다, 그런데 밀정인 당신의 담보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으니 식량과 천을 가져올 때 우리가 내려가면 생명을 담보할 수 있는 대표들을 보내 달라고 하였습니다.

밀정은 동의를 표시하고 곧 자기가 속해있던 특별공작반에 이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적들은 이 흥정에 큰 흥미를 느끼었습니다. 길림성과 돈화현의 우두머리들이 통보를 받은 즉시로 모여 앉아 대책을 모의하고 접선장소에 모모한자들을 대표로 파견하였습니다.

박득범이 그들을 영접하고 담판을 하였습니다. 담판도중에 수하지휘관이 들어와서 약속된 물자가 다 들어왔다는 보고를 하자 그는 적측대표들을 그 자리에서 몽땅 죽여버리었습니다. 그 후 박득범은 된비판을 받고 경위여단에 가서 일하였는데 조직의 신임을 저버리고 1940년에 적들한테 체포된 다음 귀순하고 말았습니다. 가짜귀순이 진짜귀순으로 되었습니다.

박득범은 적의 진영으로 도주한 후 「박특설대」라는 것을 조직해가지고 지난 날의 전우들을 귀순시키기 위해 돌아쳤습니다.

박득범사건이 주는 교훈은 대단히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박득범이 귀순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가짜귀순놀음을 꾸민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짜귀순놀음은 진짜로 귀순할 요소가 있는 사람들만이 고안해낼 수 있습니다. 박득범의 전향은 가짜귀순놀음을 고안해내는 사람은 어느 때든지 진짜귀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엄중하게 생각한 것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비열한 방법으로 후방물자를 해결한 박득범의 이 행위를 무슨 굉장한 거사라도 되는 것처럼 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사도황구에 갔다 온 정찰조성원은 박득범이 아주 좋은 일을 한 사람인데 응당한 평가도 받지 못하고 과도한 제재를 당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한테 주민들의 동향을 다 보고하고 나서 사도황구사람들이 박득범을 유격대의 위신을 다 말아 먹은 지휘관이라고 말하는 것을 언짢게 생각하였습니다. 그 정찰조성원은 반일청년동맹원이었습니다.

반일청년동맹원이 박득범의 행위를 긍정적인 것으로 본다면 그것은 위험 천만한 일이었습니다. 청년사업을 담당한 지휘관을 만나 담화를 해보니 방면군안에 정찰조성원처럼 박득범사건을 평가하는 동맹원들이 적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반일청년동맹원들의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동맹원들의 모임을 하자고 지휘관에게 말했더니 숙영지에 도착하자마자 다 곯아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우리 부대에는 지금까지 그러루한 일이 없었습니다. 숙영지에 도착하면 전체 대원들이 총도 닦고 옷도 깁고 면도도 하고 나무도 해오고… 이런 식으로 생활을 긴장하고 절도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은 딴판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원정과정에 피곤이 심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숙영준비도 하지 않고 모두가 곯아떨어지면 야단이 아닙니까. 이런 정신상태를 가지고서는 유동작전을 끝까지 근기있게 내밀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날 밤 오중흡연대장에게 한 개 중대 천막을 내게 하고 거기서 반일청년동맹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에는 나도 참가했습니다.

회의에서는 반일청년동맹원들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흐리멍텅한 사상적 경향이 비판되고 청년들 속에서 곤난극복정신이 부족한 현상, 위생문화에 무관심한 현상, 문화오락사업에 잘 참가하지 않는 현상들이 비판되고 그것을 시정하기 위한 대책들이 논의되었습니다.

나는 회의에서 박득범사건의 엄중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매개 대원들이 인민혁명군의 권위와 명예를 훼손시키는 현상들에 항상 경각성을 높이고 그런 현상들을 반대하여 원칙적으로 투쟁할 데 대해서와 인민들과의 관계를 잘 가질 데 대하여 특별히 강조하였습니다.

이 회의를 통하여 지휘관들도 각성되었습니다. 적지 않은 지휘관들은 대원들이 숙영준비를 하지 않고 곯아떨어진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눈감아주었으며 오히려 동정까지 하면서 시정시킬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었는데 회의를 하고 나서 정신을 차리었습니다.

반일청년동맹회의는 육과송과 쟈신즈를 치기 위한 사상동원사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사상동원이 큰 은을 냈습니다. 회의가 있은 후 육과송을 쳤는데 모두가 잘 싸웠습니다. 대원들은 쟈신즈전투도 본때있게 해제꼈습니다. 이 두 전투를 치르고 나서 대원들은 무엇 때문에 사령관이 반일청년동맹회의를 갑자기 소집했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상사업은 일이 힘들고 정세가 엄혹한 때일수록 더 잘 해야 합니다. 나는 사상론을 주장합니다. 나는 사상지상주의자이며 사상을 그 어떤 재부보다도 더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20여만의 대적과 맞서서 판가리를 할 때 우리가 무엇을 믿고 대부대선회작전과 같은 엄청난 작전을 세우고 그것을 끝까지 강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전군의 일치단결과 강인한 혁명사상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한테 비행기가 있었습니까, 탱크가 있었습니까, 인민이 있고 대원들이 있고 경무기가 있고 그 밖에야 다른 것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래 사상동원을 하고 나서 싸움을 연거퍼 했는데 그것이 은을 내더란 말입니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원정과정에 임수산의 태공으로 인해 당초에 계획했던 작전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연에 대해서도 회고하시었다.

 

반일청년동맹회의에 앞서 김정숙과 이두익이 사령부에 찾아와 동패자밀영의 실태를 보고하였습니다. 사실 나는 돈화원정을 떠나면서 동패자에 가서 제일 추운 시기를 한두 달 보내고 무송현과 장백현을 에돌아 국내를 거쳐 화룡에 들렸다가 출발지점인 안도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동패자에 파견된 임수산은 대부대를 맞이할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세가 긴장하다고 하면서 우리가 준 과업을 집행하기 위해 아글타글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김정숙과 이두익이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임수산이 받은 임무를 대신해서 수행하느라고 애썼으나 동패자에 가있는 성원들의 겨울나이식량이나 얼마간 마련해 놓았을 뿐이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나는 우리가 애초에 계획하였던 기본통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리었습니다. 식량도 없는 밀영에 가서 대부대가 얹혀 살수는 없었습니다.

사실 임수산은 그때 벌써 골병이 단단히 든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 후 적들한테로 달아나버렸지만 변절행위라는게 하루이틀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배신도 준비가 있어야 하고 사상적 발효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사상의 부패변질은 일정한 과정을 거치기 마련입니다. 임수산이 말끝마다 혁명을 부르짖었지만 그는 벌써 「혜산사건」후부터 사상적으로 변질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를 신임하던 나머지 제때에 발견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예비통로로 설정했던 무송현 백석탄은 지세는 좋으나 주민부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밀영으로부터 30리쯤 떨어진 곳에 가야 마을을 몇 개 볼 수 있었는데 거기에는 우리가 꾸린 지하조직이 얼마 없었습니다.

식량도 문제였습니다. 전에 파견한 소부대와 오백룡이 송화강을 이용하여 저장해 놓은 식량이 얼마간 있었지만 그것은 저장장소도 멀고 또 차후에 소비하기로 했던 것이었습니다. 백석탄일대에 선발대를 보냈으나 대부분이 여성들이 아니면 허약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실정에서 대부대가 곧추 예비통로인 백석탄으로 간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도가도할 수 없는 미궁에 빠진 격이 되었습니다. 강추위가 사정없이 들이닥치는데 설정된 통로는 준비되어 있지 않지, 새로운 통로를 준비하자니 시간적 여유가 없지, 적들이 우리의 꼬리를 바싹 물고 있는 조건에서 목단령 밑에서 오래 지체할 수도 없지 이래저래 참으로 딱하게 되었습니다.

쌀만 있으면 다른 곤난은 다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도 귀인이 나타나서 우리를 도와주었습니다. 인민들이 우리에게 가을걷이를 하지 않은 콩밭을 알선해주어 바쁜 고비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어 우리는 육과송과 쟈신즈 목재소를 되게 들이쳐 식량을 비롯한 여러가지 물자를 노획한 다음 인차 행군로를 180도로 바꾸어 남쪽으로 노정을 잡고 백석탄밀영으로 들어갔습니다. 여기까지를 대부대선회작전의 첫 단계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육과송과 쟈신즈 전투는 대부대선회작전의 첫 단계를 빛나게 장식한 전투들이었습니다. 산과 골짜기마다가 「토벌대」들의 촘촘한 그물로 뒤덮인 화룡-안도지대에서 빠져 나온 것만 하여도 놀라운데다가 전격적으로 돈화의 적의 주요주둔지들을 연속 들이친 우리의 영활한 작전은 적들을 아연실색케 하였습니다. 적들은 육과송, 쟈신즈가 습격당하고 저들의 부대가 녹아 났다는 급보를 받고서야 허둥지둥 돈화방향으로 병력을 집중하기 시작하였으나 그때는 벌써 우리가 은밀히 남으로 빠져 송화강류역에 이른 뒤였습니다.

첫 단계의 작전에서 가장 큰 성과라고 내가 보는 것은 육과송과 쟈신즈의 목재소노동자들 속에서 입대한 200여명의 신입대원들로 우리 무장대오를 확대한 것입니다.

전투를 치른 후 송화강변의 수림 속에서 연예공연을 했는데 그 공연이 있은 후 짐을 지고 우리를 따라왔던 노동자들 속에서 많은 청년들이 입대를 탄원하였습니다.

노동자계급출신의 청년들 속에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을 우리 대오에 받아들인 것은 항일유격대의 건군역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경사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입대한 대원들에게 미처 무기도 주지 못하고 군복도 공급해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부대에 받아들이는 족족 신입대원들에게 붉은별이 달린 완장을 팔에 끼워주었습니다. 여대원들이 그 완장들을 만드느라고 밤을 패던 일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백석탄밀영에서 진행된 군정학습은 대부대선회작전의 2단계에 속하는 동시에 제1단계의 총화로도 됩니다.

우리는 백석탄에서 준비를 잘 갖춘 다음 작전 제2단계에 진입했습니다. 작전 2단계의 활동노정은 백석탄에서부터 백두산동북부의 무인지경인 이도백하, 삼도백하, 사도백하 지대를 지나 국내에 진출했다가 화룡현을 거쳐 안도현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백석탄에서 군정학습을 한창 하고 있을 때 밀영이 그만 적들에게 노출되었습니다. 식량공작대가 마대에 넣어가지고 온 콩이 사달을 일으켰는데 일이 아주 맹랑하게 되었더랬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마대에 구멍이 난 것을 제때에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 구멍으로 콩이 한알두알 새서 밀정의 눈에까지 걸리었습니다.

밀영을 발견한 적들이 우리 부대에 대한 전면적인 포위공격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자 우리는 그에 대처할 작전을 짰습니다. 우선 우리 부대의 한 지휘관에게 1개 중대를 데리고 적구에 가서 양강구를 친 다음 하왜자쪽으로 빠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경위중대 1개 소대는 백석탄 뒤고지의 여러 초소들에서 달려드는 적들에게 된 매를 안기고 노수하쪽으로 철수하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주력을 이끌고 적들의 공격개시 30분전에야 밀영을 떠나 노수하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적을 함정으로 끌어들이자면 우리가 밀영에 있는 것처럼 눈속임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철수하자마자 적들이 밀영에 달려들었습니다. 아무 저항도 없는 고요한 밀영을 보고 적들은 다 먹어놓은 떡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일제히 돌격을 들이댔습니다. 그래도 우리 경위중대의 명사수들은 총을 쏘지 않고 적들이 노는 꼴을 보기만 했습니다.

날이 밝자 적의 비행대가 밀영상공에 날아와 밑에서 좋아라고 손을 흔드는 제편을 향해 폭탄을 마구 던지었습니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를 듣고 병실에 들어갔던 적들이 모두 밖으로 뛰어나왔습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 기관총들이 불을 뿜었습니다.

적들이 계획했던 육공협공은 결국 인민혁명군과 일본군비행대가 협동하여 일만군보병들을 소탕한 셈이 되었습니다.

적들이 백석탄에서 복닥소동을 벌이는 사이 우리는 유유히 백두산 쪽으로 내려오면서 뒤따르는 적을 노수하에서 치고는 이도백하를 건너 내도산동쪽의 수림 속으로 숨어들어갔습니다. 그 다음 화라즈부근의 목재소를 치고 양강구에 간 중대와 백석탄에 남았던 경위중대 동무들을 다 모이게 했습니다. 우리가 무산 삼수평으로 정찰을 파견한 것이 그때일 것입니다.

정찰조는 국경경비가 너무 삼엄하기 때문에 두만강을 건느자마자 정찰도 똑똑히 하지 못하고 추격만 받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대부대가 국내로 들어간다는 것은 모험이었습니다.

나는 국내진공을 당분간 뒤로 미루기로 하고 식량도 해결하고 조선 쪽에 있는 적들의 반응을 보기도 할 겸 큰 목재소를 하나 치기로 하였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두만강 가까이에 있는 대마록구목재소를 쳤는데 조선 쪽 반응이 아주 예민했습니다. 나는 적들이 국경경비를 철통같이 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적들을 꼬리에 달고 며칠간 싸우면서 화라즈의 남쪽수림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후 홍기하에서 마에다부대와 한바탕 싸움을 하고는 대부대선회작전을 일단락지었습니다.

「노조에토벌대」와의 대결을 어느 한 지역 군사령관과의 대결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노조에토벌대」와의 대결은 곧 일본군부와의 대결이었고 「대일본제국」과의 대결이었습니다. 적들은 이른바 「숙정대강」에서 그토록 요란하게 선전하던 치표, 사상, 치본의 3대공작에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고 허탕만 쳤습니다. 결국 이 대결에서는 우리가 승리하였습니다.

 

패전 후 퇴역하여 규슈의 어느 농촌마을에서 여생을 보내던 노조에는 그 당시의 일을 놓고 이런 글을 남기었다.

김일성부대는 여러 개의 분대로 나누어 행동하면서 저마다 김일성부대라 칭해 이쪽에도 저쪽에도 김일성부대가 있는 것 같은 위장전술을 잘 썼다. 또 김일성이란 사람 본인은 하나겠지만 김일성이란 이름을 쓰는 자는 몇이 더 있었기 때문에 진짜 김일성이가 어떤 인물인가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간도폭동을 탄압하고 상급의 신임을 얻어 「노조에토벌대」에서 특수공작임무를 수행하던 나가시마의 술회에 의하면 그도 조선인민혁명군의 신출귀몰한 전술 때문에 고배를 톡톡히 마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노조에부대에서 특수공작을 맡게 되었을 때 김일성부대란 것이 있다기에 알아본 즉 이 부대의 작전이 아주 묘했다. 김일성부대가 여기에 나타났다 해서 그 쪽을 쫓아가면 이번에는 또 저쪽에 나타났다 한다. 마치 김일성부대가 신출귀몰하는 것 같았는데 실인즉 한 부대가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이쪽저쪽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부대를 여러 개로 쪼개어 이쪽저쪽에 나타나게 하면서 그 소부대들에 모두 일성부대라고 하게 했던 것이다.

나가시마는 계속하여 조선인민혁명군과의 힘겹던 싸움에 대해 회상하면서 항일연군의 고위간부는 다 사살되었거나 체포 또는 투항했는데 김일성만은 용케도 … 살아남아서 종전 후에 북조선에 돌아와 수상까지 하고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