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민주주의혁명의 역사적 교훈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글을 시작하며

2. ‘인민의 단결’의 결성과 선거를 통한 집권

3. 칠레 민주주의혁명의 성과와 한계

3-1) 칠레 노동계급의 정파적 분열과 중앙정보국의 비밀공작

3-2) 중요산업의 국유화와 비독점부문에 대한 민주주의적 통제

3-3) 아옌데정부의 토지개혁과 농민들의 농장점거투쟁

4. 제국주의반혁명세력의 아옌데정부 전복공작

5. 칠레 수구반동세력의 난동

6. 민주주의혁명을 사수하기 위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투쟁

7. 1973년 9월 11일, 피의 화요일

8. 칠레 민주주의혁명의 역사적 교훈

9. 글을 맺으며


 


 

1. 글을 시작하며


 

1973년 9월 4일,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Gossens, 1908-1973)가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3주년이 되던 그날, 80만 명에 이르는 군중이 거리를 뒤덮었다. 칠레의 수도 산띠아고는 시위군중의 함성으로 들끓었다. 시위군중은 대통령관저인 모네다궁(Palacio de la Moneda)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아옌데, 아옌데, 인민은 당신을 지키리라(Allende, Allende, el pueblo to defiende), 의회를 폐쇄하라(cierre el congreso), 인민의 힘, 인민의 힘(poder popular, poder popular), 무장한 인민은 짓밟히지 않는다(El pueblo armado jamas sera aplastado)”

노동계급과 각계각층 근로대중은 반동적 군사반란의 위험 속에 빠져드는 칠레 민주주의혁명을 사수하기 위해 민중봉기를 요구했고, 무장을 요구했고, 그리고 승리를 향한 전진을 요구하였다. 이것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대중항쟁으로 칠레 민주주의혁명을 사수할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아무도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80만 명의 군중시위가 있었던 날로부터 이레 뒤에, 칠레 민주주의혁명은 워싱턴의 제국주의반혁명세력으로부터 배후조종을 받은 칠레군부의 반동적 군사반란을 막아내지 못한 채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그리고 33년의 긴 세월이 흐른 올해 2006년, 칠레에서는 두 사건이 있었다.

2006년 1월 15일에 실시된 대선에서 중도정치와 온건개혁을 표방하는 사회민주주의자 미첼레 바첼렛(Veronica Michelle Bachelet Jeria)이 승리하여 칠레 역사상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되었다. 이 사회민주주의자 대통령은 아옌데정부 시기에 칠레사회당 소속의 경제부장관 오를랜도 미야스(Orlando Millas) 밑에서 통상공급 담당 총국장을 지냈던 공군준장 알베르또 바첼렛(Alberto Arturo Miguel Bachelet Martinez, 1922-1974)의 딸이다. 아옌데정부의 고위관리로서 반동적 군사반란을 반대한 알베르또 바첼렛은 군사반란 직후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감옥으로 끌려갔고 고문을 받다가 옥사하였다. 당시 스물 한 살이었던 미첼레 바첼렛도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뒤, 해외로 추방되어 여섯 해 동안 호주와 동독을 떠돌며 살았다.  

바첼렛이 집권한 뒤에 사건이 또 하나 있었다. 워싱턴의 제국주의반혁명세력으로부터 조종을 받고 군사반란을 일으켜 아옌데정부를 무너뜨리고 칠레 민주주의혁명을 학살만행으로 파탄시킨 아우구스또 삐노체뜨(Augusto Pinochet Ugarte, 1915-2006)가 2006년 12월 10일 아흔 한 살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1973년부터 17년 동안 야만적 폭압에 저항하는 칠레인민을 총칼로 짓밟으며 암흑천지를 만들었던 늙은 파시스트는 말년에 얼마동안 가택연금을 당하고 면책특권을 박탈당했던 것 이외에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죽었다.

위의 두 사건은 33년 묵은 패배와 좌절의 상처를 안고 있는 칠레 민주주의혁명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한다. 36년 전 대선에서 승리하여 집권하였던 진보정당연합은 왜 3년만에 붕괴하였을까?


 

2. ‘인민의 단결’의 결성과 선거를 통한 집권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회주의10월혁명 직후, 칠레의 선진적 노동계급은 사회주의노동자당(Partido Obrero Socialista/POS)을 창당하였고, 1922년에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에 가입하면서 당명을 칠레공산당(Partido Comunista Chilena/PCCh)으로 바꾸었다.

칠레공산당의 스탈린주의 정치노선에 동의하지 않는 사회주의정치세력이 1933년 4월에 새로운 사회주의정당을 창당하였으니, 그것이 칠레사회당(Partido Socialista Chilena/PSCh)이다.

그때로부터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칠레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선진역량은 칠레공산당과 칠레사회당을 통해서 자신을 정치세력화하면서 사회변혁을 준비해왔다. 칠레공산당의 경우를 보면, 1970년 현재 당원 가운데 노동계급은 66.6%, 농민계급은 7.7%이었고, 당원수는 1971년에 5만7천 명, 1972년 1월에 15만3천470 명, 같은 해 6월에는 16만5천 명이었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칠레에도 사회주의정치세력과 때로 경쟁하고, 때로 충돌하는 또 다른 정치세력이 있었으니, 자유주의개혁세력이 그것이다. 자유주의개혁세력은 1957년 7월에 기독교민주당(Partido Democrata Cristiano/PDC)을 창당하였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민주주의혁명의 거대한 물결이 일어났던 1960년대에 혁명의 확산을 막고 신식민주의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워싱턴의 제국주의반혁명세력이 내밀었던 반혁명전략은, 이른바 온건개혁(moderate reform)이라는 선풍을 일으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민주주의혁명의 길에 나서지 않도록 방해, 저지하는 것이었다. 제3세계의 민주주의혁명을 방해,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케네디정부(1961-1963)가 만들어낸 제국주의반혁명전략이 이른바 ‘전진을 위한 동맹(Alliance for Progress)’이다.

제국주의반혁명전략이 불러일으킨 온건개혁선풍은 중도주의(centrism)의 깃발을 흔들어대는 자유주의개혁세력에게 역사상 처음으로 집권기회를 안겨주었다. 1964년 대선에서 기독교민주당은 ‘자유 안에서의 혁명(Revolucion en Libertad)’이라는 구호를 내걸었고, 토지개혁 실시와 ‘경제의 칠레화(Chileanization)’라는 선거공약을 들고 나왔다. 1964년 대선에서 중도정치와 온건개혁을 외쳤던 기독교민주당 후보 에두아르도 프레이(Eduardo Nicanor Frei Montalva, 1911-1982)는 55.5%에 이르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이듬해 실시된 총선거에서도 기독교민주당 후보들이 대승을 거둬 의석수를 23석에서 82석으로 끌어올렸다.

중도정치와 온건개혁을 외치는 자유주의선동가들은 언제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귀에 듣기 좋은, 그래서 그들을 속이는 형형색색의 구호와 공약을 들고 나타나곤 하는데, 그러한 정치현상을 흔히 인기영합주의(populism)라 한다. 중도정치와 온건개혁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속이는 인기영합주의 기만선전으로 위장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런 점에서, 중도정치, 온건개혁, 인기영합주의는 일맥상통한다.

오늘 남(한국)사회에서 중도정치와 온건개혁을 외치는 열린우리당이 기대고 있는 것이 인기영합주의이다. 그런데 중도정치와 온건개혁을 좌경적이라고 비난하는 수구반동정당인 한나라당에서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 같은 대권주자들이 나타나 그 무슨 ‘경부운하건설’이니 ‘한중 열차도선사업(ferry project)’이니 하는 우스꽝스럽지도 않은 ‘정책구상’을 떠들어대거나 ‘민심잡기 현장탐방’ 같은 알량한 정치촌극을 연출하면서 인기영합주의를 경쟁적으로 흉내내는 것은, 되살아날 가망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열린우리당의 꽁무니를 따라가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프레이정부(1964-1970)와 기독교민주당은 집권기간 동안 온건개혁에 손을 대었다. 미국의 제국주의독점자본이 소유한 구리산업의 총지분 가운데 51%를 정부가 사들여 중요사업의 공공성을 강화하였으나, 은행자본의 공공성을 강화하겠다는 공약은 아예 손도 대지 못하였다.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총경작지 면적의 13%를 몰수하여 빈농에게 분배하였으나, 토지를 분여받은 농민은 10%도 되지 않았다.

프레이정부가 온건개혁을 추진하지 못한 채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숨겨져 있었다. 미국자본의 투자증가와 칠레의 온건개혁이 서로 맞물리면 경제성장과 사회개혁이 실현될 것처럼 떠들었던 프레이정부 뒤에서 미국의 제국주의독점자본이 칠레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피땀을 이전보다 더 악착같이 쥐어짜고 있었던 것이다.

1968년 현재 미국의 제국주의독점자본이 칠레에 투자한 총액은 96억4천만 달러였는데, 특히 구리산업에 대한 투자가 압도적이었다. 제국주의독점자본이 칠레에서 투자를 늘이면 늘일수록, 인기영합주의 구호를 남발하는 중도정치와 온건개혁의 위장막 뒤에서 칠레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신식민주의체제는 그만큼 더 확장되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중도정치와 온건개혁으로 위장하면서 정체를 감춘다 해도 신식민주의체제의 착취와 수탈 자체를 감출 수는 없었다. 프레이정부가 중도정치와 온건개혁을 떠들어대던1965년부터 1970년까지 칠레경제의 실질성장률은 평균 5%에 머물고, 통화팽창(inflation)은 해마다 20-30%씩 늘어남으로써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실질임금을 마구 갉아먹었다.

이러한 사태는 워싱턴의 제국주의반혁명세력이 칠레에서 추진해온 ‘진보를 위한 동맹’이 파탄되었음을 뜻하였고, 프레이정부가 떠들어대던 중도정치와 온건개혁이 마비되었음을 뜻하였고, 집권당인 기독교민주당이 분열과 약화의 수렁에 빠지게 되었음을 뜻하였다.

기독교민주당이 떠들던 중도정치와 온건개혁이 마비되자, 당 지도부에게 불만을 품게 된 당내 일부세력은, 1969년에 칠레 남부의 뿌에르또 몬떼(Puerto Monte)에서 경찰이 시위자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에 반발하여 탈당한 직후 새로운 정당을 세웠으니, 그것이 인민일치행동운동(Movimiento de Accion Popular Unitaria/MAPU)이다. 기독교민주당의 인기영합주의에 환멸을 느낀 세력이 탈당하는 사태는 아옌데정부가 출범한 1970년 10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71년 발빠리소(Valpariso)에서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기독교민주당이 집권당과 선거공조전술을 취해 승리하였으나, 기독교민주당 청년당원 가운데 20%, 그리고 일반당원 가운데 13%가 탈당하여 기독교좌익운동(Movimiento de Izquierda Cristiana/MIC)을 결성하였다. 이처럼 당내 진보세력이 모두 탈당하는 바람에, 기독교민주당에는 결국 수구세력만 잔류하게 되었다. 기독교민주당이 반동적 군사반란을 지지하게 된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기독교민주당이 분열과 약화의 수렁에 빠져들던 시기에, 그러한 움직임과는 정반대로 칠레사회당과 칠레공산당은 정당연합을 결성하는 길로 나아갔다. 아옌데는 자신이 속한 칠레사회당을 칠레공산당과 조직적으로 통합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칠레사회당과 칠레공산당이 정당연합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 인민일치행동운동(MAPU), 인민독립행동(Accion Popular Independiente/API), 급진당(Partido Radical/PR), 사회민주당(Partido Social Democrata/PSD)이 호응하였다. 그리하여 40개조의 강령을 가진 진보정당연합이 결성되었으니, 그것이 ‘인민의 단결(Unidad Popular/UP)’이다. 칠레사회당과 칠레공산당을 주축으로 하고 사회민주주의성향을 가진 군소정당들이 결집한 진보정치연합이 ‘인민의 단결’이다.

2006년 남(한국)에서 그러한 것처럼 1970년 칠레에서도 도시중산층이 도시빈민계층으로 전락하면서 사회계급구성이 부유한 소수 대 가난한 다수로 양극화되고 있었다. 사회계급구성의 양극화(polarization)가 필연적으로 사회계급의식의 급진화(radicalization)로 이어지는 정세변화, 그것이 진보정당연합이 결성될 수 있었던 객관적 조건이었다.

1970년 대선에서 ‘인민의 단결’과 맞선 두 종류의 정치세력은 국민당(Partido Nacional/PN)과 기독교민주당이었다. 수구반동세력은 국민당에 결집하였고, 자유주의개혁세력은 기독교민주당에 모여있었다. 정파가 탈당하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위기감을 느낀 기독교민주당은 구리산업의 전면적 국유화와 토지개혁의 적극적 추진 따위의 선거공약을 내걸고 이전보다 더 급진적인 변신을 꾀함으로써 중도정치와 온건개혁에 식상해버린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표를 얻어보려고 애썼으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외면하는 바람에 그들의 선거전술은 ‘효력’을 내지 못했다.

‘인민의 단결’ 후보 아옌데의 득표율은 36.3%였고, 국민당 후보 호르게 알레싼드리(Jorge Alessandri Rodriguez, 1896-1986)의 득표율은 34.9%였고, 기독교민주당 후보 라도미로 또믹(Radomiro Tomic Romero, 1914-1992)의 득표율은 27.8%였다.

선거결과는 충격이었다. 누구도 아옌데가 승리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70년 초에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작성한 정보평가서는 국민당 후보가 42%의 득표율을 얻어 승리할 것이라고 결론을 맺었다. 국민당 후보가 승리할 것이라는 중앙정보국의 보고만 믿고 안심하였던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 1913-1994)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는 예상치 못한 선거결과가 나오자 “배신감과 절망감에 휩싸여 발작적(apoplectic)”이었다.

명백하게도, 선거결과는 수구반동세력의 결집, 자유주의개혁세력의 참패로 나타났다. 수구반동세력의 결집이란, 국민당 후보가 여전히 34.9%라는 득표율을 거머쥐면서 아옌데의 뒤를 바짝 추격하였음을 뜻한다. 자유주의개혁세력의 참패란, 1964년 대선에서 55.5%의 높은 득표율을 얻었던 기독교민주당 후보가 1970년 대선에서는 27.8%로 주저앉았음을 뜻한다.

1964년 대선에서 아옌데가 얻은 득표율은 39.5%였으나 1970년 대선에서는 득표율이 36.3%로 되레 낮아졌다. 이것은 칠레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유주의개혁정당을 외면하면서도 진보정당을 대안적 집권세력으로 선택하지 않았음을 뜻하였다. ‘인민의 단결’이 1970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은, 진보정당연합의 결성과 자유주의개혁정당의 분열이었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유주의개혁정당을 외면하고 그에 따라 그 정당이 분열과 몰락의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것은 1970년에 칠레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오늘 남(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남(한국)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중도정치와 온건개혁을 외치는 노무현정부를 완전히 외면하자, 그 파장에 휘말린 열린우리당은 지금 분열, 와해되는 중이다. 이처럼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열린우리당을 외면하였으면서도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을 대안적 집권세력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1970년 10월 칠레의회에서 실시된 결선투표를 앞두고, 의회에서 다수당의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 ‘인민의 단결’은 기독교민주당과 선거공조전술을 취함으로써 아옌데의 당선을 확정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아옌데는 기독교민주당과 타협하여 이른바 ‘헌법보장협약’을 맺었다.

‘인민의 단결’은 기존의 국가기구를 해체하지 못한 채 선거를 통하여 근소한 표차로 집권에 성공하였으므로 불안정하고 허약하였다. 수구반동세력이 의회와 군부, 그리고 언론을 여전히 틀어쥐고 반혁명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3. 칠레 민주주의혁명의 성과와 한계


 

3-1) 칠레 노동계급의 정파적 분열과 중앙정보국의 비밀공작

‘인민의 단결’의 집권은 의회와 군부를 장악하지 못한 불안정한 집권이었다. 집권당인 ‘인민의 단결’이 민주주의혁명을 밀고 나가는 힘은 오로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칠레사회를 변혁하는 민주주의혁명에서 노동계급의 지위와 역할은 결정적이었으나, 칠레 노동계급은 정파적 분열과 미국 중앙정보국의 비밀공작에 휘말려 있었다.

1970년대 초 칠레의 노동계급은 1917년에 경제활동인구의 15%밖에 되지 못한 러시아의 노동계급에 비해 힘있는 사회계급으로 성장하여 있었다. 칠레의 노동계급은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노동계급들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존재였다. 1970년 현재 공업부문과 서비스업부문에서 일하는 칠레 노동계급은 경제활동인구의 75%를 차지하였다. 당시 칠레 노동계급은 약 300만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서 80만 명이 중앙노동연합(Central Unica de Trabajadores/CUT)에 망라되었다. 중앙노동연합은 제조업 노동자 60%, 사무직 노동자 40%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중앙노동연합 지도부는 칠레사회당, 칠레공산당, 기독교민주당을 각각 지지하는 세 정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오늘 남(한국)의 민주노총 지도부가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로 나누어져 있는 것과 흡사하다.

중앙노동연합 위원장 루이스 피구에로아(Luis Figueroa)는 칠레공산당 중앙위원이었으며, 아옌데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중앙노동연합 사무총장 롤란도 깔데론(Rolando Calderon)은 칠레사회당 당원이었다. 1972년 11월 피구에로아는 노동상으로, 깔데론은 농업상으로 각각 입각하였다.

중앙노동연합보다 더 급진적인 노동운동단체는 혁명적 좌익운동(Movimiento de Izquierda Revolucionaria/MIR)이 결성한 노동자혁명전선(Frente Revolucionario de los Tarabajadores/FRT)이었다. 대중조직이 아니라 활동가조직인 노동자혁명전선은 수적으로 너무 적어 혁명정세를 이끌어가지 못했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라틴아메리카 노동운동에 침투한 미국 중앙정보국의 비밀공작이다. 그들의 비밀공작이 칠레 노동운동에 악영향을 미쳤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워싱턴의 제국주의반혁명세력은 1945년 10월 3일 파리에서 창설된 세계노조연합(World Federation of Trade Unions/WFTU)에 맞서서, 1949년 12월 7일 런던에서 국제자유노조연맹(International Confederation of Free Trade Unions/ICFTU)을 창설하였다. 국제노동운동을 분열시키고, 반동적 노동운동을 조작해낸 비밀공작은 미국의 중앙정보국이 반공주의자 조지 미니(George Meany, 1894-1980)와 제이 러브스톤(Jay Lovestone, 1897-1990)을 대표로 내세운 미국노조연맹(AFL-CIO)을 통해서 저지른 것이다. 중앙정보국은 미국노조연맹을 통해서 라틴아메리카 노동운동을 조종하였는데, 미주노동연맹(Confederacion Interamericana de Trabajadores/CIT)으로 창설되었다가 미주노동기구(Organizacion Regional Interamericana Trabajadores/ORIT)로 개칭한 반동적 노동단체가 그 앞잡이였다.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 주재하는 미국 대사관들에 배치된 노동담당관에는 때로 중앙정보국에서 직접 파견한 자들이 임명되기도 하였는데, 노동담당관들은 미국 국무부와 미국노조연맹 국제부에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1961년 4월 꾸바침공작전이 실패한 직후, 그 작전을 주도한 중앙정보국은 미주노동기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게 되고, 꾸바혁명이 라틴아메리카 노동운동에 혁명적 영향을 줄 것을 크게 우려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새로 조작해낸 것이 미주자유노동발전협회(American Institute for Free Labor Development)이다. 그 협회의 책임자 윌리엄 도허티(William Doherty)는 1964년 3월 31일 브라질의 굴라트정부(1961-1964)를 군사반란으로 무너뜨린 전복공작에 동원된 브라질 수구반동세력을 훈련시켰을 뿐 아니라, 같은 해에 기아나(Guiana)의 제이건정부(1957-1964)를 무너뜨린 79일 간의 반동적 총파업을 적극 지원하였던 중앙정보국의 앞잡이였다.

미주자유노동발전협회 이사장은 칠레의 대기업을 소유한 미국인 자본가 피터 그레이스(J. Peter Grace, 1913-1995)였고, 칠레의 산업을 틀어쥔 미국인 자본가들은 미국 정부기관인 국제개발처(USAID)의 막대한 자금을 미주자유노동발전협회에 넘겨주는 앞잡이 역할을 맡았다.

미주자유노동발전협회는 1964년에 창설된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노조활동가들을 끌어들여 반공주의와 친미사상을 주입하는 임무를 수행해오다가, 1970년 9월 칠레에서 ‘인민의 단결’이 집권하자 활동을 중단하였다. 그 대신 워싱턴 근교 버지니아의 프론트 로열(Front Royal)에 있는 미주자유노동발전협회 본부에 칠레 노조활동가들을 데려가서 반공주의와 친미사상을 주입하기 시작하였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노동운동을 교란하는 비밀공작을 총지휘한 자들은 미국 중앙정보국 국제조직부 책임자 토머스 브래든(Thomas W. Braden)과 그 후임자 코드 메이어 2세(Cord Meyer, Jr., 1920-2001)였다.

그러나 칠레에서 중앙노동연합(CUT)에 대항하는 반동노조를 조작하려는 중앙정보국의 책동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칠레에서 미주노동기구와 미주자유노동발전협회는 힘이 약하여 중앙정보국의 공작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3-2) 중요산업의 국유화와 비독점부문에 대한 민주주의적 통제

1967년 현재 칠레에는 약 3만500 개의 공장과 기업이 있었다. 1970년 현재 자동차, 석유, 화학부문의 미국기업 100여 개가 칠레에 밀어 넣은 투자총액은 거의 10억 달러에 이르렀다. 특히 2억 달러를 투자하여 칠레에서 최대투자회사로 군림한 국제전신전화(ITT)는 1억5천300만 달러의 자산을 가진 칠레전화회사(Chiletelco), 국제전신회사, 전화번호부 제작사, 그리고 호텔 두 개를 틀어쥐고 있었다.

미국의 제국주의독점자본에게 넘어간 중요산업부문을 국유화하는 것은 칠레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절박한 요구였으며, 민주주의혁명의 사활적인 문제였다.

아옌데정부는 칠레경제를 좌우하는 중요산업부문의 대기업 270여 개를 국유화 또는 공유화하였다. 그 가운데서 결정적인 의의를 가진 조치는 1971년 7월에 단행한 구리산업의 국유화이다. 칠레는 세계 구리매장량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구리자원의 부국인데, 당시 구리생산은 칠레 수출의 80%를 차지하는 최대전략업종이었다. 칠레의 구리산업은 미국의 제국주의독점자본들인 애너콘다(Anaconda)와 케니캇(Kennecott)이라는 양대기업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아옌데정부는 그들이 소유한 구리광산을 국유화하였다. 그밖에도 석탄, 철, 질산염을 생산하는 광산들, 직물산업, 전신, 전화를 비롯한 중요산업에 대한 사적 소유가  공적 소유(public ownership)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아옌데정부는 1969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1천400만 에스꾸도(당시 칠레의 통화단위) 이하의 자본을 가진 중소기업들은 국유화하지 않았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아옌데정부의 국유화정책이 점진개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아옌데정부가 밀고 나간 중요산업의 국유화는 사회주의국유화(socialist nationalization)가 아니었다. 이를테면, 국제전신전화(ITT)를 몰수하지 않고 정부관리를 그 회사에 파견하여 경영권을 행사하거나, 당시시가로 6억6천370만 달러나 하는 광산기업 그란 미네리아(Gran Mineria)를 보상금 2천830만 달러를 주고 사들이는 방식으로 국유화를 추진하였다. 국유화한 기업에서는 정부기관인 산업상업지도총국(Direccion de Industria y Comercio/DRINCO)이 경영권을 행사하였다.

이것은 국유화가 중요산업부문의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단계에로 전진하지 못하였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아옌데정부의 국유화정책은, 국가경제의 중앙계획화, 생산현장 당조직의 정치사업, 노동계급의 자발성을 결합시킨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창조하지 못한 채, 중요산업을 국영기업화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다. 국영기업은 생산수단의 소유권 또는 경영권을 자본계급의 손에서 국가기구의 손으로 옮겨놓은 것이라는 점에서, 경제의 중앙계획화, 생산현장의 정치사업, 노동계급의 자발성이 실현되는 사회주의국유화와는 거리가 있다.

칠레의 국영기업은 기업의 경영권을 국가에 귀속시킨 법에 따라서 국유화되었으므로, 국영기업의 자산에 대한 소유권은 여전히 자본가들에게 남아있었고, 아옌데정부는 산업상업지도총국을 통해서 국영기업의 경영에 개입하는 제한적 권한만 행사할 수 있었다. 

중요산업의 국유화가 중요산업부문의 생산관계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지 못하고 ‘경영권의 국유화’에 머물게 될 때, 국유화정책은 경영권을 되찾으려는 자본계급의 반동공세에 의해서 결국 파탄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거기에서 칠레 민주주의혁명을 좌절시킨 비극의 싹이 자라났던 것이다. 

아옌데정부가 이루어낸 성과들 가운데는 전국의 생산현장과 중앙컴퓨터통제소를 텔렉스(telex)를 통해 연결하여 정보를 소통하고 생산, 분배, 유통을 통일적으로 조절하는 산업정보통신망을 구축한 성과가 돋보인다. 영국의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전문가 스태포드 비어(Stafford Beer, 1926-2002)의 기술지도를 받아 세계 최초로 구축한 산업정보통신망은 사회주의계획경제의 정보기술적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1972년 10월 수구반동세력의 파업으로 물류수송이 중단되었을 때, 아옌데정부는 산업정보통신망을 통하여 도시주민을 위한 식량공급을 성과적으로 조절, 통제할 수 있었다.

비록 중요산업부문의 생산관계가 사회주의적으로 개조되지는 못했어도, 중요산업 국유화정책에 따라 국영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임금과 연금이 인상되었고 노동조건이 개선되었다. 그러나 아옌데정부는 비독점부문의 중소기업을 민주주의적으로 통제하는 정책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독점부문의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그에 따라,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중소기업도 국유화하라고 아옌데정부에게 요구하였으며, 국유화조치의 확산에 불안감을 느낀 중소자본가들은 중소기업의 이윤을 생산부문에 재투자하지 않고 투기자본으로 전환하였다. 이것이 칠레경제를 무너뜨린 여러 요인들 가운데 하나로 되었다.


 

3-3) 아옌데정부의 토지개혁과 농민들의 농장점거투쟁

1970년 현재 칠레의 국내총생산 가운데 농업생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11%이며, 농업인구는 경제활동인구의 25%를 차지하였다. 1965년 현재 칠레에는 25만3천492개의 농장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61%가 0.1 평방킬로미터 이하의 영세농이고, 50% 정도는 0.05 평방킬로미터의 영세농이었다. 토지 없는 농민과 영세농은 26만9천 명이었고, 농장노동자는 17만3천 명이었다. 농촌인구 70만 명 가운데 대농장(latifundio)의 인구는 10%도 되지 않았다.

1970년 대선에서 기독교민주당이 참패한 가장 큰 원인은, 그들이 공약으로 내걸었던 토지개혁을 집권기간에 건성으로 실시하였던 것에 있었다. 토지개혁이 형식적으로 실시되면서 지진부진하자 칠레농민의 불만은 덧쌓였고, 그런 상황에서 아옌데정부가 출범하자 농민들은 강하게 토지를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농민의 토지요구는 농장점거(toma)로 이어졌다.

농민의 토지요구에 부응하여, 아옌데정부는 1972년 말까지 0.8 평방킬로미터 이상의 농장을 몰수하겠다고 공약하였고, 대농장 3천600 개 가운데 2천877개를 몰수하였고, 소농장(minifudio) 25만 개를 몰수하였다. 그러나 아옌데정부의 토지개혁으로 혜택을 받은 농민은 칠레 농민계급의 약 7%에 이르는 5만5천 명밖에 되지 않았고, 총경작지 면적의 17.7%만 토지개혁으로 개조되었을 뿐 68.3%의 경작지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토지개혁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토지 없는 농민이나 영세농이 아니라 농장노동자들이었다. 아옌데정부의 토지개혁은 칠레농민의 계급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였던 것이다.

혁명적 좌익운동(MIR) 산하 농민조직인 혁명적 농민운동(Movimiento Campesino Revolucionario/MCR)이 농장점거투쟁을 호소하자, 토지 없는 농민, 영세농, 떠돌이 농촌노동자(afuerinos), 농장노동자(inquilinos), 농촌실업자, 여성농민이 쇠스랑과 몽둥이를 들고 궐기하여 농장점거투쟁을 벌였다. 대농장을 소유한 농촌부르주아지들은 무장대를 조직하여 농장점거투쟁에 나선 농민들을 살해하며 자기 농장을 지키려고 하였다.

1970년 11월 농장점거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난 떼무꼬(Temuco)에 내려간 아옌데는 7천 명 군중 앞에서 한 시간 동안 연설하면서, 정부가 토지개혁을 촉진하겠으니, 수구반동세력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수 있는 농장점거투쟁을 중지해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수 백 년 동안 억압과 착취 속에서 살아온 농민이 자기의 계급적 요구를 농장점거투쟁으로 폭발시키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불행하게도, 아옌데정부에게는 농장점거투쟁을 통해서 자생적으로 폭발하는 농민의 혁명역량을 조직할 수 있는 준비가 없었다. 집권당인 ‘인민의 단결’은 의회를 장악하지 못한 소수파였으므로 농장점거를 합법화하는 입법을 추진하지 못하였고, 더욱이 ‘인민의 단결’ 내부에서 농촌경리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민주주의혁명의 과업에 대해서 찬반이 갈려있었다. 아옌데정부는 1970년 10월 출범 이후부터 1971년 9월말까지 일년 동안 농민들이 점거한 농장 694개 가운데 555개를 지주들에게 돌려주었다.

토지개혁법에 따라 몰수한 농장에는 사회주의협동농장으로 개조하기 위한 과도적 농촌경리체계(asentamiento)가 도입되었다. 과도적 농촌경리체계란 농민들이 농촌경리를 책임적으로 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훈련하고, 정부는 영농기술을 제공하고 금융지원의 혜택을 주는 이행기의 농촌경리체계를 말한다. 3-5년 동안의 이행기가 끝날 때, 정부는 농민들을 협동적 소유와 협동적 경리로 이끌어주게 되는데, 개인경리와 협동경리를 선택하는 최종결정권은 농민들이 행사하게 되어 있었다.

아옌데정부는 위와 같이 중요산업의 국유화와 비독점부문에 대한 민주주의적 통제, 그리고 토지개혁에서 여러 가지 난관과 한계를 넘지 못하였으나, 재정지출을 확대하여 노동계급의 임금을 인상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고, 지대와 물가를 동결시켰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사회적 소득을 분배받았고, 실업률은 거의 0%가까이 내려가고, 도시빈민계층의 생활수준은 20% 향상되었고, 학생들은 학교에서 점심과 우유를 무상으로 공급받았다.

그에 따라 칠레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인민의 단결’을 지지하였으니, ‘인민의 단결’이 집권한지 다섯 달 뒤에 실시된 지자체 선거에서 얻은 득표율은 51%로 가파르게 높아졌다. 


 

4. 제국주의반혁명세력의 아옌데정부 전복공작


 

미국 본토와 빠나마에서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의 육군, 공군장교들에게 민주주의혁명을 파괴하는 반혁명군사작전을 교육해왔던 미국군의 비공개활동은 1969년부터 약 300%나 급증하였다. 1970년 현재 미국 국방부가 파견한 미국군 요원들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칠레 국방부에서 활개를 치고 있었다. 칠레 국방부 청사 9층의 40%는 미국 육군이, 나머지 50%는 미국 해군이 사용하였고, 7층의 50%는 미국 군사고문단이 사용하였으며, 2층의 60%는 미국 공군이 사용하였다. 이것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민주주의혁명을 파괴하는 미국군의 반혁명군사작전이 칠레에 집중되고 있음을 뜻하였다.

『100년 동안의 고독(Cien anos de soledad)』이라는 소설로 1982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꼴롬비아의 작가 그라시아 마르꾸에즈(Gabriel Gracia Marquez)의 말에 따르면, 1970년 칠레에서 대선이 실시되기 직전, 미국 국방부의 군장성 세 사람과 에르네스또 바에자(Ernesto Baeza)를 포함한 칠레군 장성 네 사람이 워싱턴 근교에서 만나 만찬을 나누면서, 아옌데가 집권할 경우 군사반란을 일으키는 문제를 논의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워싱턴과 산띠아고를 오가면서 진행된 미국군 장성들과 칠레군 장성들의 비밀회의에서는 아옌데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군사작전계획이 논의되었다. 미국 국방부의 국방정보국(DIA)은 그 군사작전을 계획하였고, 칠레의 반동군부는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들은 아옌데정부를 무너뜨리는 군사작전을 ‘급변사태계획(Contingency Plan)’이라 불렀다.

33년 전 아옌데정부를 무너뜨리려고 광분하였던 워싱턴의 제국주의반혁명세력은 오늘 한(조선)반도에서 ‘개념계획 5029(CONPLAN-5029)’라는 ‘급변사태계획’을 준비하는 중이다. 그 계획은 태평양군사령부 예하 특수작전사령부(Special Operations Command, Pacific/SOCPAC) 병력을 북(조선)에 침투시켜 내란으로 위장한 특수전을 도발하고 남북(북남)의 무력충돌을 유도하여 이른바 ‘급변사태’를 일으킴으로써 북(조선)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저강도전쟁계획이다.

워싱턴의 제국주의반혁명세력이 제국주의침략무력을 동원하여 도미니까공화국의 대중항쟁을 진압하였던 반혁명군사작전을 되풀이하지 않고, 반동군부를 조종하여 칠레 민주주의혁명을 파괴한 까닭은, 당시 미국이 베트남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도미니까공화국에 대한 반혁명군사작전이란, 1939년 도미니까혁명당(PRD)을 창건한 후안 보쉬(Juan Emilio Bosch y Gavino, 1909-2001)가 1962년 대선에서 승리하여 집권하자, 1963년에 반동군부가 군사반란을 일으켜 보쉬정부를 무너뜨리고 집권하였고, 반동군부의 집권에 반대하여 1965년에 민중봉기 형태의 대중항쟁이 일어났을 때, 존슨정부(1963-1969)는 4만2천 명의 제국주의침략군대를 동원한 이른바 ‘전원함작전(Operation Powerpact)’으로 대중항쟁을 유혈진압하고 1966년에 호아낀 발라꾸에르(Joaquin Amparo Balaquer Richardo, 1906-2002)를 우두머리로 하는 반동정부를 세웠던 사건을 말한다.

1970년 9월 15일 백악관에서는 대통령 리처드 닉슨,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 중앙정보국장 리처드 헬름즈(Richard M. Helms, 1913-2002), 법무장관 존 밋첼(John N. Mitchell, 1913-1988)이 모여 앉아 아옌데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방도를 논의하였다.

극비로 분류된 아옌데정부 전복공작에 관한 정보는, 미국의 해외공작을 감독하는 40위원회(Forty Committee)나 칠레 주재 미국대사도 알지 못했으며, 중앙정보국 안에서도 극소수 담당자들만 알았고, 중앙정보국장 헬름즈가 키신저를 통해 닉슨에게 직보하는 비밀보고체계를 통하여 전해졌다.

1977년 1월 9일에 방영된 미국 텔레비전 씨비에스(CBS)의 방송순서 ‘60분(60 Minutes)’에 출연하였던 에드워드 코리(Edward M. Korry, 1922-2003)는 자신이 칠레 주재 미국대사로 재직하던 1970년 10월 아옌데가 의회결선투표에서 승리하였다고 닉슨에게 보고하였을 때, 닉슨은 “내가 깜짝 놀란 것처럼 보이지. 개새끼, 개새끼...코리 대사 당신이 아니라 아옌데 그놈에게 하는 소리야”라고 떠들고 나서, 아옌데정부를 박살내라(smash)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세이모어 허쉬(Seymour Hersh)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백악관은 아옌데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키신저의 하버드대학교 동창생이었던 몰튼 핼퍼린(Morton H. Halperin)은 키신저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되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선임보좌관으로 잠시 일한 적이 있는데, 1978년에 뉴욕에서 출판된 책 『무법국가(The Lawless State)』에 실린 글에서 그가 키신저의 말을 인용하여 지적한 바에 따르면, 키신저는 아옌데가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서 집권하였으므로 까스뜨로보다 더 효과적으로 라틴아메리카의 반미운동을 주도할 것으로 우려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키신저는 미국 중앙정보국 칠레지부장에게 보낸 전문에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아옌데정부를 군사반란으로 뒤집어엎는 것은 확정적이고 지속적인 정책이다. 우리는 모든 적절한 자원을 활용하여 그 목적을 향해 최대한 압박할 것이다. 물론 우리의 행동은 미국정부와 미국의 연관성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도록 언제나 은밀하고 안전하게 취해져야 한다.”

키신저의 회고록 『갱신연대(Years of Renewal)』에 따르면, 1971년 12월 22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국가안보결정서 제93호’를 채택하였는데, 그 결정서는 아옌데정부가 미국의 국익과 역내이익에 배치되는 정책들을 실행하지 못하게 제한하고, 그 정부가 공고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압박하면서도 미국정부는 정당하고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기를 요구하였다는 것이다.

아옌데정부 전복공작을 수행한 정책단위는 키신저가 주재한 40위원회이었다. 중앙정보국장, 국방장관, 합참의장 등 고위관리들로 구성된 40위원회는 1963년부터 1974년까지 칠레에서 자행된 33건의 비밀공작을 승인하였다. 그 위원회는 1970년 9월부터 1973년 9월까지 미국 중앙정보국의 아옌데정부 전복공작에 800만 달러를 지출하도록 승인하였다. 40위원회가 제시한 아옌데정부 전복공작은 다섯 갈래로 구체화되었는데, 칠레경제를 파탄시키고, 사회적 불안을 조성하기 위한 준군사적 행동(paramilitary action)을 촉진시키고, 반동언론을 매수하여 반혁명선동을 계속하고, 수구반동세력에 대한 재정지원을 확대하고, 혁명세력을 분열, 약화시키는 것이다.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 칠레 지부장은 헨리 헥셔(Henry D. Hecksher)였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베를린대학을 나온 그는 1934년에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1950년대에 서베를린에서 중앙정보국 정책조정실장으로 일했다. 정책조정실은 워싱턴의 제국주의반혁명세력이 동유럽 사회주의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설치한 비밀공작기관이었다. 그 비밀공작기관은 극우테러분자들을 동유럽 사회주의나라들에 침투시켜 수 백 명을 암살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아옌데정부가 출범한 직후, 중앙정보국 칠레 지부장은 헨리 헥셔에서 레이먼드 워런(Raymond A. Warren)으로 바뀌었다. 그는 칠레 각계각층에 침투하여 암약하는 30-40명에 이르는 미국인 간첩들과 수많은 칠레인 앞잡이들을 지휘하였으며, 심지어는 워싱턴에 있는 칠레대사관과 뉴욕에 있는 칠레총영사관에 침입하는 공작까지 자행하였다.

그것만이 아니라, 미국 중앙정보국은 칠레의 모든 정당에 간첩을 침투시켜, ‘인민의 단결’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도록 이간질하거나 당의 결정사항이 집행되지 못하도록 책동하였다. 이를테면, 아옌데가 대선에서 승리하기 직전에 중앙정보국은 칠레사회당과 칠레공산당 사이에, 그리고 중앙노동연합(CUT)과 칠레공산당 사이에 불신을 조성하였으며, ‘인민의 단결’에 속한 정당들이 아옌데정부를 외면하도록 사주하였다. 또한 아옌데정부가 출범한 뒤에는, 그 정부를 약화, 와해시키고, ‘인민의 단결’을 분열시키는 공작에 매달렸다. 중앙정보국의 분열공작에 휘말린 급진당은 1972년에 둘로 갈라졌는데, ‘인민의 단결’에 남은 정파는 민주주의혁명을 위해 계속 투쟁하였던 반면, ‘인민의 단결’에서 떨어져나간 다른 정파는 기독교민주당에 들어가 아옌데정부 반대투쟁에 적극 가담하였다. 1973년에는 인민일치행동운동(MAPU)도 둘로 갈라졌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급진파 무장단체인 인민의 조직적 전위(Vanguardia Organizada Popular/VOP)에도 침투하여 좌경모험주의적인 무장폭동을 선동하였다. 국제전신전화(ITT)의 비밀자료에 따르면, 중앙정보국은 급진세력을 부추겨 무분별한 폭력투쟁에 나서게 함으로써 반동적 군사반란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공작을 추진하였다고 한다.

다른 한편, 워싱턴의 제국주의반혁명세력은 광란적인 경제봉쇄를 가하면서 칠레경제의 목을 졸랐다. 아옌데정부가 출범하자 미국자본이 이탈하기 시작하였고 미국자본의 투자가 중단되었다. 국제전신전화(ITT) 같은 미국의 제국주의독점자본들은 자체적인 경제보복으로 칠레경제를 타격하였다. 키신저는 “아옌데가 동전 한 푼도 얻을 수 없는” 경제봉쇄정책을 내왔고, 그에 따라 칠레 주재 미국대사 에드워드 코리는 “아옌데정부의 칠레가 나사못 한 개도 사들이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경제봉쇄정책에 따라서, 미국 재무부는 국제통화기금(IMF), 미주개발은행(BID), 세계은행(WB), 수출입은행(EIB)이 아옌데정부에게 신용대출을 하지 말도록 조치하고, 칠레가 미국에게 갚아야 할 20억 달러에 이르는 국가채무를 속히 갚도록 압력을 가하고, 미국기업이 칠레에 투자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 결과, 1970년 11월 4억5천만 달러의 외환보유액이 일년 뒤에는 5천만 달러 이하로 줄어들었다. 또한 1970년에 미국은행이 칠레에 제공한 신용대출은 2억2천만 달러에 이르렀는데, 1971년에는 8천800만 달러로, 1972년에는 3천600만 달러로 떨어졌다. 아옌데정부 시기에 미국은행이 칠레에 제공한 신용대출은, 카톨릭대학교과 아우스뜨랄대학교에 각각 700만 달러와 460만 달러의 교육기금을 빌려준 것이 전부였다.

거기에 더하여, 미국 상무부는 칠레에 수출하는 모든 미국산 생산설비와 부품의 공급을 중단시킴으로써 칠레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1972년 2월 18일 미국 연방법원은 칠레항공(LAN Chile)을 포함하여 칠레의 9개 대기업에 대한 거래를 중단시키는 판결을 내렸으며, 뉴욕주 최고법원은 칠레구리회사(CODELCO), 개발회사(CORFO), 칠레항공이 미국에 설치한 은행구좌를 모조리 동결시키는 판결을 내렸다. 칠레 구리광산에서 사용하는 채광기계와 그 부품들은 거의 모두 미국의 제너럴 모터스(GM)와 포드(Ford)에서 사들였는데, 1972년에 그 두 회사는 칠레에 대한 수출을 중단하였다. 이러한 금수조치는 생산설비와 부품을 거의 모두 미국에서 사들이는 칠레기업에게 치명타로 되었다.

아옌데정부가 구리산업을 국유화하자, 미국 상무부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구리 25만8천t을 국제시장에 내다 팔아 구리값을 폭락시켰으니, 그에 따라 국제시장의 구리시세는 33%나 곤두박질쳤다. 1972년에 칠레가 구리값 폭락으로 입은 피해액은 2억 달러였다.

아옌데정부가 칠레의 중요산업을 국유화하자, 미국언론들은 칠레의 국유화를 ‘강도질(robbery)’이라고 극렬히 비방하였고, 아옌데를 지목하며 ‘도둑놈을 체포하라(Arrest the thief)’고 미친 듯이 선동하였다.


 

5. 칠레 수구반동세력의 난동


 

대농장을 소유한 농촌부르주아지들은 아옌데정부의 토지개혁을 저지하기 위한 경제교란책동에 나섰다. 그들은 가축들, 특히 암컷을 마구 도살하여 축산업을 마비시키고, 농산물을 아르헨띠나로 밀반출하여 칠레를 식량난으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 1971년의 식량수입은 64%나 늘어났다.

칠레 자본계급은 1972년에 ‘백색경비대'라는 ‘자경단’을 조직하였고, 농촌지대에서는 ‘특공단’이라는 극우테러조직이 출현하였다. 전국농업협회(Sociedad Nacional de Agricultra/SNA), 산업개발협회(Sociedad de Fomento Fabril/SOFOFA), 전국생산상업협의회(Conferderacion Nacional de la Produccion y el Comercio/CNPC) 같은 반동단체들이 출현하였다.

1972년 5월부터 계급투쟁이 한층 격화되면서, 혁명적 좌익운동(MIR)과 조국과 자유(Patria y Libertad) 사이에서 유혈충돌이 일어났다. 조국과 자유(PyL)는 국민당 산하의 극우테러조직으로서 1970년에 창설되었을 때는 조직원이 200 명이었으나, 1972년에는 조직원이 1천 명으로 늘어나 산띠아고에서 테러조직 20 개, 각 지방에서 테러조직 12 개가 난동을 부렸고, 1973년에는 조직원이 3천 명으로 늘어났다. 조국과 자유(PyL)는 진보정당과 대중단체의 핵심간부를 암살하는 테러공격에 나섰다. 그러한 극우테러조직들에게 미국 중앙정보국 병참국의 특수작전부(Special Operations Division)가 무기를 제공하였음은 물론이다.

민주주의혁명을 반대하는 칠레의 자본계급은 1972년 한 해 동안 칠레의 산업투자총액 가운데 54%에 이르는 1억 달러를 투기자본으로 전환하였으며, 1972년 8월에는 민주주의혁명을 좌절시키기 위한 반동적 공장폐쇄를 자행하였다.

수구반동세력의 테러, 파업, 경제교란은 대량해고, 생필품부족, 물가폭등, 통화팽창으로 증폭되면서 민생파탄의 악순환을 불러일으켰다. 200%나 치솟은 살인적인 통화팽창은 도시중산층이 은행에 넣어둔 현금자산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한때 아옌데정부에 대한 지지자, 동정자였던 도시중산층은 정부에게 등을 돌리고 수구반동세력에게 기울기 시작했다. 1972년 8월 22일 조국과 자유(PyL)가 운영하는 농업방송(Radio Agricultura)은 아옌데정부를 비방하는 방송을 내보냈고, 그것을 신호로 하여 많은 중산층 주부들이 밤마다 10시에 거리에 뛰쳐나와 15분 동안 냄비를 두드리는 소동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산띠아고 근교에 있는 사관학교에 몰려가 사관생도들에게 군사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는 ‘겁쟁이 새끼들’이라고 욕하면서 밀가루와 쌀을 뿌렸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난동자들은 하루에 미화 1달러에 해당하는 돈을 받고 동원되었다고 한다.

반동화된 일부 중산층은 1972년 9월에 쁘로떽꼬(PROTECO)와 쏠(SOL)이라는 테러조직을 결성하였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Time)』이 1974년 9월 30일에 보도한 미국 중앙정보국 관리의 말에 따르면, 당시 중앙정보국의 공작목표는 아옌데정부를 반대하는 중산층의 난동을 지원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세이모어 허쉬(Seymour Hersh)가 『뉴욕타임스』 1974년 9월 20일자에 실은 기사에 따르면, 1972년부터 1973년에 이르는 기간에 칠레 주재 미국대사관에는 아옌데정부 전복공작에 목숨을 바치려는 많은 극우테러분자들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아옌데정부에게 가장 커다란 치명상을 입힌 반동적 파업은, 칠레의 화물자동차운수기업 169개가 가입한 전국트럭운수연합(Confederacion Nacional de Duenos de Caminoes de Chile/CNDCC)이 미국 중앙정보국의 조종에 따라 1972년 10월 9일에 일으킨 반동적 파업이다. 제1차 반동적 파업은 미주자유노동발전협회 대표를 역임한 에마누엘 복스(Emmanuel Boggs)의 사주에 따라 전국트럭운수연합 회장 레온 빌라린(Leon Vilarin)의 주동으로 시작되었다. 빌라린은 뒷날 이딸리아 언론인 마우리찌오 치에리치(Maurizio Chierici)에게 자신이 미주자유노동발전협회로부터 활동자금을 받았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미국 중앙정보국 자료를 인용하여 작성한 1974년 9월 30일자 보도에 따르면, 중앙정보국의 공작금은 돈세탁을 거친 뒤에 유럽의 기독교민주당을 경유하여 칠레에 흘러 들어갔고, 전국트럭운수연합이 45일 동안 계속하여 칠레경제를 완전히 마비시킨 반동적 파업의 기금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 1974년 9월 20일자 보도에 따르면, 1972년과 1973년에 미국 중앙정보국이 칠레에서 벌인 비밀공작에 쏟아 부은 공작금 800만 달러의 대부분은 1972년 10월에 일어난 전국트럭운수연합의 제2차 파업에 지출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파업은 화물자동차운수국영기업을 창설하려는 아옌데정부의 정책을 반대한다는 구실을 내걸었으나, 실제로는 아옌데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중앙정보국의 전복공작에 따른 반동적 파업이었다. 그들의 파업은 전국적으로, 다른 부문으로 퍼지면서 두 주간 동안에 1억 달러의 경제적 손실을 입힘으로써 아옌데정부를 강타하였다. 반동적 파업에 의해서 발생한 피해액은 1972년 말 현재 1억7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반동적 파업으로 물류수송이 마비되자 물가가 폭등하고, 암시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이를테면 감자의 소매가격은 1971년에 비해 25배나 뛰어올랐다.

다른 한 편, 의회에서는 국민당과 기독교민주당이 손잡고 아옌데정부를 반대하는 정치공세를 폈다. 의회 결선투표에서 ‘인민의 단결’과 선거공조전술을 취하여 아옌데를 당선시켰던 기독교민주당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밀고 나가는 민주주의혁명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인민의 단결’과 갈라서고 국민당과 손을 잡았다. 의회에서 대통령을 탄핵하려면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는데, 아옌데를 탄핵하려는 국민당과 기독교민주당의 의석수를 모두 합해도 3분의 2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1972년 10월 6일 국민당 대표 오노프레 하르파(Sergio Onofre Jarpa Reyes)는 의회연설에서 아옌데정부를 불법적이라고 비방하면서, 국민당은 반동적 파업을 지원하는 파업지원부를 운영한다고 밝혔으며, 기독교민주당은 의회에서 조국과 자유(PyL)를 옹호, 두둔하였다. 1973년 8월 23일 국민당과 기독교민주당은 아옌데정부가 헌법을 근본적으로 위반하고 있다는 의회선언문을 채택하면서 정치공세에 박차를 가했다. 

1972년 10월 10일 자정부터 전국트럭운수연합이 제2차 무기한 파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칠레에는 5만 명의 화물자동차운수기업주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1만2천 명이 반동적 파업에 참가하였다. 아옌데정부는 파업 주동자를 체포하였고, 이틀 뒤에는 난동이 일어난 일부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1972년 10월 13일 전국상공인협회는 전국트럭운수연합의 파업을 다른 부문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모든 상가의 문을 닫으라고 선동하였다.

1972년 10월 15일 기독교민주당 전국협의회는 반동적 파업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면서 칠레인민에게 거리투쟁에 나서라고 선동하였고, 이튿날 중소상공인, 학생, 의사, 변호사, 전문직 종사자, 항공기 조종사, 은행직원, 교사, 사립학교 학생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도시중산층이 반동적 파업에 가세한 것이다. 일부 철도구간에서 운행이 중지되었고, 농장노동자 3분의 2가 파업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칠레 주재 미국대사관이 작성한 비밀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였다. “아옌데정부를 무너뜨리는 공작목표는 아직 성취하지 못하였다. 칠레 노동계급을 분열시키지도 못했고, 칠레군부를 미국의 이익에 복무시키지도 못했고, 반정부세력의 동맹을 결성하지도 못하였다. 칠레혁명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이 있게 진행되는 중이다.”

결국 아옌데정부는 무기한 파업으로 자신을 위협하는 수구반동세력과 정치적으로 타협함으로써 위기를 수습하였다. 아옌데정부는 화물자동차운수국영기업을 내오려는 정부의 계획을 중지시키고, 군장성 세 사람을 장관에 임명하라는 수구반동세력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칠레 민주주의혁명을 파탄시켰던 요인들 가운데는 반동언론의 선전활동도 있다. 반동언론은 칠레의회로부터 입법지원을 받았는데, 1971년 1월 의회가 아옌데정부를 곤경에 몰아넣은 악법을 통과시킨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 악법은 ‘정치적 다원주의(political pluralism)’와 ‘언론의 자유(freedom of the press)’를 보장하고, 정당의 언론기관 소유를 합법화하며, 의회가 승인하지 않으면 아옌데정부가 언론기관을 국유화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칠레 민주주의혁명을 반대하는 반동언론은 신문이 54개, 라디오방송이 98개나 되었다. 그에 비해서, 칠레 민주주의혁명을 지지하는 진보언론은 신문이 10개, 라디오방송이 36개밖에 되지 않았다. 가장 많이 찍어내는 일간지 『엘 메르꾸리오(El Mercurio)』는 칠레 민주주의혁명을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흑색선전의 도구였다. 『엘 메르꾸리오』의 사주이자 여러 개의 언론기관을 소유하여 반동적 언론재벌로 악명이 높았던 아우구스띤 에드워즈(Augustin Edwards Eastman)는 아옌데정부 시기에 줄곧 워싱턴에 머물면서 닉슨, 키신저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칠레의 반동언론을 총지휘하였다.

아옌데정부가 『엘 메르꾸리오』를 통해서 국정홍보를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 1971년 9월 9일 워싱턴의 40위원회는 그 신문사에 70만 달러를 지원해주었고, 1972년 4월 11일 96만5천 달러를 지원해주었으며, 국제전신전화(ITT)를 비롯한 미국의 제국주의독점자본들도 그 신문사를 적극 후원해주었다. 2003년 현재 『엘 메르꾸리오』는 칠레인구의 10%에 이르는 122만 명의 독자층을 가지고 있다.

1971년 초 미국 중앙정보국은 아옌데정부를 반대하는 국민당과 기독교민주당이 각각 라디오방송과 신문사를 사들이도록 많은 자금을 퍼주었다. 그 결과, 1972년 현재 국민당과 기독교민주당은 칠레언론의 60%를 장악, 통제하였다. 그것만이 아니라, 제국주의선전활동을 담당하는 미국 홍보국(U.S. Information Agency)은 칠레언론계에 비밀요원을 침투시켜 아옌데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반혁명선전활동을 벌였다.

워싱턴의 제국주의반혁명세력과 그들의 조종을 받은 칠레의 수구반동세력의 난동으로 정치적 혼란과 국가적 위기는 심각해졌으며, 칠레 민주주의혁명을 평화적으로 추진할 방도는 그 가능성을 이미 잃었다. 칠레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는 제국주의반혁명세력과 수구반동세력의 광란적인 공세에 맞서 싸움으로써 민주주의혁명을 사수하는 것밖에 다른 길은 없었다.


 

6. 민주주의혁명을 사수하기 위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투쟁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자본계급의 공장폐쇄와 반동적 파업에 맞서 다음과 같은 대응공세를 취하면서 민주주의혁명을 사수하는 투쟁을 힘있게 밀고 나갔다.

6-1) 칠레 노동계급은 자본계급의 공장폐쇄와 반동적 파업에 맞서 공장점거투쟁에 나섰다. 노동계급의 공장점거는 그때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아옌데정부가 출범하였던 1970년 후반에 노동계급이 점거한 공장은 250-300 개에 이르렀는데, 1972년 8월에 자본계급이 공장폐쇄를 강행하자, 노동계급은 공장폐쇄를 저지, 파탄시키기 위해 본격적인 공장점거투쟁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아옌데정부는 노동계급의 공장검거를 불법화하였다. 1973년 1월 경제장관 오를랜도 미야스(Orlando Millas)와 군장성 출신 장관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내무장관 까를로스 쁘라츠(Calros Prats)는 노동자들이 점거하고 운영해온 공장 123 개소를 이전의 소유자인 자본가들에게 되돌려주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였다. 그것을 보고 분노한 노동자 3만 명이 규탄시위를 벌였다.

아옌데가 노동계급에게 공장을 점거하라고 호소한 것은, 제1차 반동적 군사반란이 실패하였던 1973년 6월 29일에 열린 군중집회에서 처음으로 있었던 일이다. 아옌데의 호소에 따라, 노동계급은 대공장과 대기업 526 개, 수많은 중소기업을 점거하였다. 그러나 아옌데정부의 노동장관에 임명된 호르게 고도이(Jorge Godoy)는 그 가운데서 23 개의 공장과 기업만 국유화한다고 발표하였다. 

6-2) 칠레 노동계급은 산업인전대(Los Cordones Industriales)라고 부르는 노동자대표회의를 결성하였다. 노동자 4만6천 명, 공장 250여 개가 몰려있는 산띠아고 세리요스(Santiago Cerrillos)의 산업지대에서 최초의 노동자대표회의가 결성되었고, 꼰셉시온, 발빠리소, 뿌에르또 몬떼 등으로 퍼져나갔다. 각 지역의 노동자대표회의는 중앙노동연합 산하 지역조직들과 결합되었고, 산띠아고에서는 노동자대표회의를 주축으로 하여 산띠아고 전역을 포괄하는 대중자치조직인 수도권지역 조절회의가 결성되었다.

노동자대표회의는 칠레공산당과 중앙노동연합이 참가하여 결성된, 아옌데정부를 지지하는 ‘인민의 단결 공장위원회’와는 다른 것이다. 노동자대표회의는 국유화된 공장과 기업을 지키기 위해 자주적으로 결성한 생산현장의 정치조직이었다. 노동자대표는 해당지역의 공장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선출하였다.

노동자대표회의는 ‘인민의 단결’의 강령보다 급진적인 강령을 제시하고 투쟁하였는데, 1천4백만 에스꾸도 이상의 자본을 가진 모든 공장과 기업을 무상몰수하여 국유화할 것, 모든 공장, 기업, 농장에서 노동자대표회의를 결성하고 생산활동을 노동계급의 통제 아래에 둘 것,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권력기관인 인민의회(Ensamblaje Popular)를 창설할 것을 요구하였다.

6-3) 각 도시에서는 가격 및 공급위원회(Junta de Abastecimiento y Precios/JAP)가 결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식량과 생필품을 인민들에게 공급하고, 시장가격을 통제하고, 매점매석을 금지하였다. 산띠아고의 가격 및 공급위원회는 수도 인구의 절반에 이르는 30만 가구에게 식량과 생필품을 공급하는 성과를 올렸다.

6-4) 칠레 남부의 중요공업도시인 꼰셉시온에서는 시 전체를 포괄하는 인민회의가 소집되었다. 전국적으로 약 100 차례의 인민회의가 소집되었고, 그 가운데서 약 20 차례는 산띠아고에서 소집되었다. 그 회의에서는 노동자대표회의, 가격 및 공급위원회, 그밖에 각지에서 결성된 자생적 대중조직들을 하나로 연결시켜 자치조직(Commandos Comunales)을 내오자는 요구가 제기되었다.

노동자대표회의와 가격 및 공급위원회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생적으로 조직하고 운영하는, 그리하여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생산과 투쟁의 전략거점이자 정치조직으로, 그들 자신의 자주적 생활공동체로 등장하였다. 바로 그 생산과 투쟁의 전략거점이자 정치조직에서, 바로 그 생활공동체 속에서, 칠레 민주주의혁명이 지향하는 자주적 사회주의의 미래가 잉태되고 있었다. 1945년 8.15 해방 직후 노동계급과 각계각층 근로대중이 한(조선)반도 전역에서 인민위원회를 결성하고 민주주의혁명을 힘있게 전진시킨 것과 똑같은 투쟁이 1970년대 칠레에서도 전개되었다.

산발적으로 조직된 노동자대표회의와 가격 및 공급위원회를 전국적 범위에서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속에서 분출하는 혁명역량을 조직하고, 그들의 혁명적 진출을 법적,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 바로 이것이 제국주의반혁명세력과 수구반동세력의 공세를 뚫고 나아가기 위해 칠레 민주주의혁명이 수행해야 할 당면과업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칠레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 속에서 분출하는 자생적 혁명역량을 조직하고 지도할 정치세력이 없었다.

칠레사회당은 노동계급 80만 명이 망라된 중앙노동연합에 영향을 주고 있었으나, 중앙노동연합은 노동계급 속에서 분출하는 자생적 혁명역량을 조직하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하였다. 노동계급의 대중조직이 민주주의혁명을 수호하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했던 것은 칠레 노동계급의 불행이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인민의 단결’에 속한 어떤 정당의 지도부도 노동자대표회의와 가격 및 공급위원회를 강화, 발전시켜 민주주의혁명을 수호하고 전진시키는 전략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었다. 물론 칠레사회당 당원들과 혁명적 좌익운동(MIR) 성원들은 노동자대표회의 결성사업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기독교좌익운동(MIC) 당원들과 인민일치행동운동(MAPU) 당원들도 가세하였으나, 정작 그 사업에 앞장서야 할 그들의 지도부는 무능하였다. 이를테면, 칠레사회당 중앙위원회는 인민회의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고 인민회의 소집이 확산되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노동자대표회의를 자신의 영향 아래에 있는 중앙노동연합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수구반동세력이 의회, 군부, 언론을 틀어쥐고 전면공세를 펴는 조건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분출하는 자생적 혁명역량을 조직, 동원하는 것은 민주주의혁명을 완수하는 투쟁에서 사활적인 문제인데, ‘인민의 단결’은 그들에게서 분출하는 혁명역량을 조직할 아무런 전략도 갖지 못하였다.

칠레사회당은 1967년에 열린 당대회에서 사회주의건설을 당의 총노선으로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칠레사회당은 맑스-레닌주의조직으로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칠레를 예속과 경제적, 문화적 후진성으로부터 해방하고 사회주의건설을 밀고 나갈 혁명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 세대에 성취해야 할 전략목표는 권력을 잡는 것이다. (줄임) 혁명적 폭력은 불가피하며 정당하다. 그것은 계급사회의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성격에서 필연적으로 유래하는 것이며,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유일한 방도이다. (줄임) 사회주의혁명은 오직 부르주아국가의 관료적, 군사적 기구를 파괴할 때 공고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칠레사회당에게 1967년의 당대회 선언은 말 그대로 선언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그 선언을 실행에 옮길 전략과 정책도, 힘과 의지도 없었다. 칠레사회당의 전략부재와 정치적 무능은 워싱턴의 제국주의반혁명세력과 칠레의 수구반동세력이 펴는 반혁명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칠레 민주주의혁명을 좌절시킨 패인으로 작용하였다. 이것이 아옌데정부와 ‘인민의 단결’의 한계이자 칠레 민주주의혁명의 비극이었다.

칠레의 정세가 총체적 위기에 빠져들던 와중에서도 1973년 3월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수구반동세력이 그 선거에서 66% 이상 득표하는 경우 의회에서 아옌데를 탄핵할 수 있었으나, 그 세력이 얻은 득표율은 56%였다. 1970년 대선에서 수구반동세력이 얻은 34.9%의 득표율이 3년만에 56%로 크게 늘어난 까닭은, 도시중산층이 수구반동세력의 편에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 선거에서 ‘인민의 단결’은 1971년 지자체 선거에서 얻은 득표율 51%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1970년 대선에서 아옌데가 얻은 36.3%의 득표율을 넘어선 44%의 득표율을 얻었다. 이것은 노동계급과 각계각층 근로대중이 경제봉쇄와 반혁명난동으로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아옌데정부와 ‘인민의 단결’을 여전히 지지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칠레 노동계급과 각계각층 근로대중이 아옌데정부와 ‘인민의 단결’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워싱턴의 제국주의반혁명세력과 칠레의 수구반동세력에게 마지막 선택을 요구하였다.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없이, 그들에게 마지막 선택은 반동적 군사반란이었다.

반동적 군사반란이 임박하였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있던 1973년 3월,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꾸바혁명정부는 해상수송로를 통해 많은 무기를 칠레의 혁명세력에게 보내주었다. 칠레 노동계급은 노동자대표회의를 기반으로 하여 자생적인 민병대(milicia)를 조직하기 시작하였고, 혁명적 좌익운동(MIR)은 반동적 군사반란에 대비하여 도시유격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수구반동세력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무장화를 절대로 용인하지 않았다. 수구반동세력은 1972년에 제정된 무기통제법을 발동하였고, 군대와 경찰은 전국 각지에서 공장과 집을 기습적으로 수색하였다. 그 수색작전은 두 가지 목적에 따라 진행되었는데, 첫째 목적은 노동자들이 공장과 집에 보관하는 무기를 압수하여 노동계급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목적은 무기를 보관한 ‘불순세력’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1973년 6월 29일에 일어난 제1차 반동적 군사반란은 아옌데정부를 지지하는 호헌파 군부세력의 제동에 걸려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반동적 군사반란이 다시 일어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런데도 아옌데는 그날 열린 군중집회에서 연설하면서 군부와 경찰(cababineros)에 대한 신뢰를 표명하고, 때가 되면 인민들이 무장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지금은 노동계급과 군부가 서로 협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노동계급과 호헌파 군부세력이 연대할 수 있으리라는 헛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칠레사회당과 혁명적 좌익운동(MIR)은 반동적 군사반란을 저지하기 위하여 하급병사들을 상대로 하는 정치사업을 시도하였으나 때는 너무 늦었다. 칠레 민주주의혁명은 혁명을 사수하느냐 아니면 반혁명공세로 파괴되느냐 하는 운명의 갈림길에 다가서고 있었다.


 

7. 1973년 9월 11일, 피의 화요일


 

칠레 반동군부는 자기들이 군사반란을 일으키는 경우 아옌데정부를 지지하는 노동계급과 각계각층 근로대중의 분노가 폭발하지나 않을까 하고 우려하였고, 더욱이 자기들이 일으키는 군사반란에 군부세력 일부만 가담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반란음모를 조심스럽게 진척시켰다. 특히 반동군부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군부세력의 분열이었다. 군부세력이 반란파와 호헌파로 갈라지는 것은 군사반란의 실패를 뜻하였다. 그래서 반동군부는 1973년 6월부터 아옌데정부를 지지하는 호헌파 군지휘관들을 속속 숙청하였다. 그 결과, 9월 11일 군사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 반란을 저지하는 호헌파 군부세력은 이미 제거되고 없었다. 군사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군부세력은 병영에 머무르면서 사태를 지켜보았다.

군사반란을 일으킬 결정적인 기회를 노린 반동군부에게는 반란을 준비할 시간이 요구되었고, 무엇보다도 워싱턴의 제국주의반혁명세력으로부터 조종과 지원을 받아야 하였다. 그들의 반란음모를 촉진시킨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1972년 10월 6일 국민당이 의회에서 아옌데정부를 불법적이라고 비난하면서, 반동적 파업을 지원하는 파업지원부를 운영한다고 밝혔고, 기독교민주당은 의회에서 조국과 자유(PyL)를 옹호, 두둔하였고, 1973년 8월 23일에는 국민당과 기독교민주당의 주도로 아옌데정부가 헌법을 근본적으로 위반하고 있다는 의회선언문을 채택한 사건이다. 반동군부는 의회와 아옌데정부의 대결이 차츰 격화되는 것을 보면서 군사반란을 일으킬 기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였다. 반동군부는 의회가 자기들의 군사반란을 지지할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둘째, 살인적인 경제봉쇄로 칠레의 목을 조른 워싱턴의 제국주의반혁명세력이 유일하게 봉쇄하지 않은 부문은 군사부문이었다. 워싱턴의 제국주의반혁명세력은, 당시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남베트남의 반동군부에게 제공한 군사원조 다음으로 많은 군사원조를 칠레군에게 제공하였다.

1970년 현재 칠레군은 육군 3만8천 명, 해군 1만5천 명, 공군 8천 명을 합하여 6만1천 명이었는데, 1973년에는 4만7천500 명으로 줄었다. 그 가운데 육군은 2만4천 명이었다. 이처럼 병력수는 줄어들었으나, 군사비는 1970년에 1억6천700만 달러에서 1972년에는 1억8천만 달러로 늘어났다. 1972년 현재 칠레군은 인구비례로 따지면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많은 군사비를 썼다.

칠레 반동군부는 워싱턴의 제국주의반혁명세력으로부터 조종과 지원을 받으면서 아옌데정부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혁명을 파괴하는 군사반란을 준비해오던 중, 이제는 자기들의 반란음모를 공공연히 논의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칠레에서 이른바 ‘백색정변(golpe blanco)’이 일어날 위험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처럼 위급한 상황에서 칠레사회당이 취했던 대응행동은 고작 내전을 반대하는 서명운동이었다.

워싱턴의 제국주의반혁명세력과 칠레 반동군부가 군사반란을 공모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 아옌데는 1972년과 1973년에 호헌파 군부인사로 지목한 군장성들을 내각에 받아들여 장관직을 주고, 심지어는 삐노체뜨를 육군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이처럼 아옌데는 군부에 대한 유화책으로 위기를 피하려고 하였으나, 그런 유화책은 무의미하였다. 

1973년 9월 7일 워싱턴의 제국주의반혁명세력은 칠레의 군사반란을 무력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칠레국경 부근에 있는 아르헨띠나의 엘 쁠루메리요(El Plumerillo)에 정찰기를 포함하여 미국 공군기 32 대를 배치해두었고, 9월 10일에는 미국 해군 구축함 세 척(Tunner, Tatonall, Vesole)과 잠수함 한 척(Clagamore)이 칠레영해로 들어갔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군사반란현장을 육안으로 관찰하기 위하여 아옌데의 대통령관저가 잘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사무실로 위장한 거점을 만들어놓았다. 그 작업을 현지에서 지휘한 자들은 당시 중앙정보국 부국장 버논 월터즈(Vernon A. Walters, 1917-2002)와 베트남전쟁에서 미국군총사령관으로 악명을 날린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William C. Westmoreland, 1914-2005)의 사위 허넌디즈 웨스트모얼랜드(Hernandez Westmoreland)이다. 버논 월터즈는 칠레 해군정보국장 아리엘 곤잘레즈(Ariel Gonzalez Cornejo)를 앞세워 군사반란의 준비태세를 점검하였으며, 9월 11일 오전 6시 정각에 군사반란을 개시하라고 칠레 반동군부에게 지시하였던 배후조종자이다.

미국 해군 구축함과 잠수함이 칠레영해에 잠입하였던 9월 10일, 칠레 국방장관 오를란도 레뗄리에르(Orlando Letelier del Solar, 1932-1976)가 국방부 청사에서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아옌데가 내일 아침 대통령담화를 발표함으로써 위기상황을 정치적으로 해결하게 될 것임을 밝히고 있을 때, 기자회견장 바로 아래층에서는 반동군부의 지휘관들이 앞으로 열 시간 뒤에 일으킬 반란계획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군사반란을 일으킨 첫날 전국적으로 6천 명을 체포, 학살하고, 몇 일 안으로 1만4천 명을 체포, 학살할 2만 명의 살육명단이 쥐어져 있었다.

20세기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피로 물들인 가장 반동적인 군사반란이 일어난 그날은 1973년 9월 11일 화요일이었다. 전차, 장갑차, 기관포를 몰고 쳐들어온 반란군 500 명은 산띠아고 도심에 있는 대통령관저를 완전히 포위하였다. 대통령관저 안에서는 대통령경호대(GAO) 20명과 대통령관저에 상주하는 경비대 20명이 바주카포 1문과 개인화기를 들고 반란군과 대치하였다. 군사반란을 개시한 때로부터 불과 몇 시간 안에 반동군부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건설한 전략거점들을 파괴하고, 노조간부, 정치인, 정부관리, 지역활동가 등 약 6천 명을 체포, 연행하였다.

칠레 민주주의혁명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였건만, 아옌데는 자신과 ‘인민의 단결’을 지지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혁명의 총을 잡으라고 요구하지 못하였다. 그날 아침 산띠아고의 수마르공장에서 긴급히 소집되어 30분 동안 열린 ‘인민의 단결’ 정치국회의에서는 노동자들에게 반란군에 저항하지 말고 귀가하도록 촉구하는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반란군에게 투항하기로 결정한 것이나 다르지 않았다.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에 대한 맹신이 칠레 민주주의혁명을 패배의 길로 끌어가고 있었다.

그 결과, 아옌데정부를 지지하는 노동계급과 각계각층 근로대중의 투쟁대오는 반란군에게 저항하지도 못한 채 해체되었다. 칠레 전국에서 닷새 동안 치열한 격전을 벌일 것으로 예상하였던 삐노체뜨마저도 노동자대표회의와 가격 및 공급위원회가 커다란 저항 없이 해체되는 것을 보고 놀랄 정도였다.

칠레공군사령관 본 쇼웬(Von Schowen)은 아옌데에게 비행기를 내줄 테니 다른 나라로 피신하라고 제안했으나, 아옌데는 반란군의 제안을 한 마디로 거부하였다. 그는 자신이 탄 비행기가 곧 격추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윽고 반란군은 아옌데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현장에 있었던 아옌데의 조카딸이자 저명한 저술가인 이사벨(Isabel Allende Llona)은 아옌데가 남긴 말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아마도 이것이 나 아옌데에게는 마지막 전투가 될지 모르지만, 이제부터 칠레는 혁명의 길로 나아갈 것이니 이 싸움은 칠레혁명의 첫 전투가 될 것이다. 칠레인민은 이 나라 역사의 첫 장을 넘기고 있다. 칠레인민과 모든 라틴아메리카인민들은 역사의 다음 장을 쓰게 될 것이다. (줄임) 내 나이 예순 다섯이니 적들을 피해 숨어 다니며 혁명하기에는 너무 늙었고, 난 언제나 망명자 대통령이 되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나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저항을 조직하는 것은 아직 젊은 당신들에게 달려있다.”

아옌데는 곁에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피신하라고 호소하였고, 여러 사람들이 식탁보를 찢어 만든 백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결사항전을 각오한 아옌데 곁에는 몇 사람만이 남았다.

오전 11시 52분 칠레 공군기(Hawker Hunter)가 대통령관저를 정밀폭격으로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미국공군은 대통령관저를 공중정밀폭격으로 타격할 무기를 갖지 못하였던 칠레공군에게 공대지 로켓 17기를 넘겨주었는데, 그날 대통령관저를 폭격한 무기가 바로 그 로켓이었다. 대통령관저는 불길에 휩싸였다. 전화로 연결된 라디오방송(Radio Magallanes)을 통해서 아옌데의 떨리는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울려 나왔다.

“나는 항복하지 않겠습니다. 이 나라 역사에 다가온 준엄한 순간에, 우리 인민에게 충성하는 길에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줄임)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내 희생이 헛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아옌데는 곁에 남은 사람들에게 자신도 곧 뒤를 따라 나갈 터이니 먼저 밖으로 나가서 투항하고 목숨을 건지라고 말하였다. 아옌데의 요청에 따라 무기를 버리고 밖으로 걸어나간 그들에게 반란군은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얼마 뒤, 공중폭격으로 불길에 휩싸인 대통령관저 이층의 어느 방에서 아옌데는 반란군과 총격전을 벌이던 중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다. 그가 움켜쥐고 쓰러진 총은 피델 까스뜨로가 그에게 선물로 준 자동소총이었다. 

아옌데를 살해하고 민주주의혁명을 짓밟은 반란군의 만행에 맞서 산띠아고의 노동계급과 각계각층 근로대중은 1주일 동안 저항하였다. 9월 30일 아옌데의 혁명동지인 피델 가스뜨로는 꾸바 하바나의 혁명광장(Plaza de la Revolucion)에 모인 추모군중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살바도르 아옌데는 모든 군대를 합쳐놓은 것보다 더 큰 존엄과 영예, 용기와 영웅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 혁명가가 사는 길이며, 신념의 인간이 사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투사로서, 인민의 수호자로서, 사회주의의 전사로서 죽는 길입니다.”

반혁명의 광풍이 몰아친 칠레에서는 삐노체뜨를 우두머리로 하는 반동군부의 만행이 극에 이르렀다. 산띠아고에서만 2만 명이 붙잡혀 끌려갔고, 전국적으로는 7만5천 명이 붙잡혀 끌려갔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 안데스산맥의 풍치 좋은 휴양지 리오 블랑꼬(Rio Blanco)에서는 삐노체뜨의 처가 16살 난 아들과 14살 난 딸을 데리고 스키를 타며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산띠아고 국립경기장에는 반란군에게 붙잡혀 끌려온 5천 명이 수용되었다. 그들 가운데는 영화연출가 빠뜨리시오 구즈만(Patricio Guzman)과 민중가수 빅또르 하라(Victor Lidio Jara Martinez, 1932-1973)도 있었다. 죽음을 앞둔 시각 빅또르 하라는 칠레인민이 애창하는 노래를 불렀다. “승리하리라, 승리하리라(venceremos, venceremos)”는 노래가 군중들의 심장에 파고들었다. 그곳에 끌려온 군중들은 그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군중의 노랫소리는 죽음의 공포를 뚫고 울려 퍼지며 적들을 전율케 하였다. 악에 받친 반란군은 빅또르 하라의 손가락을 모두 부러뜨렸다. 지하실에 끌려가 허리가 부러지는 고문만행으로 숨을 거둔 순간까지 그는 혁명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산띠아고 국립경기장에 갇혀있던 빠뜨리시오 구즈만은 보름 뒤에 그곳에서 빠져 나와 목숨을 건졌다. 그는 군사반란이 일어난 피의 화요일까지 칠레 민주주의혁명의 현장을 생생하게 담은 필름을 꾸바영화제작소(ICAIC)의 도움을 받아 ‘칠레전투: 부르주아지의 반란(La Battala de Chile: La Insurreccion de la Burguesia)’이라는 제목의 4시간30분 짜리 대작으로 1975년에 제작하였다. 석 달 전인 2006년 9월 구즈만은 ‘살바도르 아옌데’라는 제목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칠레 곳곳에 급조된 집단수용소에서는 수많은 인민들이 반란군의 야만적인 고문과 집단학살로 목숨을 잃었다. 1975년 12월 칠레 주재 스웨덴 대사는 피학살자의 수를 1만5천 명으로 추산하였고, 1976년 국제앰네스티는 피학살자의 수를 2만 명으로 추산하였다. 1992년 칠레의 ‘화해와 보상을 위한 전국협회’는 확인된 피학살자가 2천95 명, 실종자가 1천102 명이라고 밝혔다.

1965년 10월 인도네시아에서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반동군부는 미국 중앙정보국이 넘겨준 살해대상자 명단을 들고 10만 명에 이르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원을 학살하였다. 중앙정보국이 ‘자카르타 계획(Djakarta Plan)’이라고 불렀던 1965년의 대학살만행이 1973년에 칠레에서도 되풀이되었다. 

1970년 칠레공산당의 대선후보로 추대되었으나 칠레사회당의 대선후보 아옌데를 지지하여 자진사퇴하였던, 1971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며 20세기 최고의 혁명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빠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는 전립선암에 걸려 매일 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반란군에게 포위된 자신의 집에 갇혀 닷새 동안이나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칠레 민주주의혁명을 짓밟은 제국주의반혁명세력의 만행을 저주하는 시를 남기고 1973년 9월 23일에 눈을 감았다. 반란군이 겨눈 총구 앞에서 엄수된 장례식에서 군중들은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네루다와 영결하였다.

칠레의 군사반란이 라틴아메리카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야만적이었던 까닭은, 칠레의 수구반동세력이 아옌데정부가 출범한 뒤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혁명역량이 분출되는 것을 보고 위협과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칠레의 수구반동세력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혁명적 진출을 짓밟고 민주주의혁명의 전취물을 깨부수지 않으면 그들 자신이 살아남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삐노체뜨를 우두머리로 한 반동군부의 정권강탈은 칠레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재앙을 몰고 왔다. 비밀정보국(Direccion de Inteligencia Nacional/DINA)과 극우테러조직 ‘죽음의 행렬(Caravana de la Muerte)’은 삐노체뜨 집권기간 내내 투옥, 고문, 학살의 만행을 계속하였다. 2004년 말 칠레 정부기관인 ‘정치적 감금과 고문에 관한 국가조사위원회’는 보고서에서 삐노체뜨 반동정부는 17년 동안 2만7천255 명을 고문했다고 밝혔다.

삐노체뜨 반동정부는 국유화되었던 공장과 기업을 자본가들에게 돌려주고, 사회주의계획경제의 정보기술적 기초를 구축한 산업정보통신망을 파괴하였으며, 농민에게 분배되었던 토지도 지주들에게 돌려주었다. 삐노체뜨 반동정부는 북(조선)과 단교하였고, 박정희(1917-1979)를 존경하였던 삐노체뜨는 마산수출자유지역에 시찰단을 보내는 등 그의 뒤를 따랐다.

칠레 반동군부가 대학살의 피가 흐르는 권력을 틀어쥐었을 때, 그들 앞에 나타난 사람은 신자유주의 선동가이며 시카고 경제학파의 우두머리인 밀튼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이다. 프리드먼은 국가재정의 20%를 삭감하고, 국영기업의 고용을 크게 감축하며, 미국의 제국주의독점자본에게 칠레시장을 전면적으로 개방하고, 미국 달러화에 대한 칠레통화의 가치를 절하하는 경제정책을 내놓았다. 그의 제안에 따라, 삐노체뜨 반동정부는 1975년 4월 긴축정책을 실시하고, 1976년 10월 안데스협약(Pacto Andino)에서 탈퇴하면서 미국의 제국주의독점자본에게 전면적 시장개방을 진상하였다. 그것은 칠레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제국주의독점자본과 국내독점자본의 가혹한 이중착취 아래로 내모는 지름길이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피땀을 쥐어짜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의 광풍은 칠레경제의 반동화를 시발점으로 하여 불어오기 시작하였다.


 

8. 칠레 민주주의혁명의 역사적 교훈


 

8-1) 칠레의 진보정치세력은 단일강령을 가진 진보정당연합을 결성하였으나, 노동계급과 각계각층 근로대중의 힘을 단일강령 아래 결집한 통일전선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인민의 단결’은 노동계급과 각계각층 근로대중의 정치적 연대가 아니라, 여러 유형의 진보정당들의 정치적 연대였다. 

명백하게도, 진보정당연합과 통일전선은 다르다. 진보정당연합은 정당들 사이의 정치적 합의에 의해서 형성되고, 선거승리에 의한 집권을 추구하는 데 비하여, 통일전선은 노동계급의 전국적 총파업을 주축으로 하는 전선형 대중투쟁 속에서 형성되고, 대중항쟁의 전략거점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선진적 노동계급은 각계각층 근로대중과 정치적으로 연대하는 통일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자신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려는 제국주의세력과 국내반동세력에 맞서 반제투쟁과 계급투쟁을 힘있게 밀고 나갈 수 있으며,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 선진적 노동계급이 진보적 대중조직들의 결집체를 건설하여 위력적인 대중투쟁을 전개하고, 진보정당은 그 투쟁현장에서 자기의 고유한 정치적 임무를 수행할 때 민주주의혁명은 승리할 수 있다. 노동계급과 각계각층 근로대중의 정치세력화는 진보정당을 통해서 실현되고, 진보정당의 집권세력화는 대중항쟁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8-2) 칠레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민주주의혁명의 승리로 이끌어갈 지도역량이 미숙하였다. 민주주의혁명의 길에서 지도역량을 발휘해야 했던 ‘인민의 단결’은 둘로 나누어져 끝없이 논쟁을 벌였다.

칠레공산당, 칠레사회당 온건파, 인민일치행동운동 온건파, 급진당, 인민독립행동, 사회민주당은 점진세력이었고, 칠레사회당, 인민일치행동운동 급진파, 기독교좌익운동, 그리고 ‘인민의 단결’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외부에서 영향을 주었던 혁명적 좌익운동은 급진세력이었다. 아옌데 자신은 점진세력에 속해 있었으나, 점진세력과 급진세력으로 갈라진 ‘인민의 단결’ 지도부를 설득하느라고 시간과 정력을 쏟았다. 양대세력의 분열은 칠레 민주주의혁명이 전진해야 할 중대한 시기에 아옌데정부의 정책적 결정을 묶어놓았다. 

‘인민의 단결’이 둘로 갈라진 원인은, ‘사회주의로 가는 칠레의 길’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혁명전략의 차이에 있었다. 경제체제 개조의 속도문제, 기존 국가기구를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민주주의혁명에서 도시중산층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문제, 노동계급이 공장경영에 참여하는 문제, 민주주의혁명에서 군부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문제, 그리고 반동적 군사반란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견해가 갈렸다.

라틴아메리카의 전설적 혁명가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1967)는 자신의 책 『유격전(Guerrillero Guerra)』을 아옌데에게 선사하면서 그 책의 첫 장에 “다른 방도로 똑같은 결과를 얻으려고 하는 살바도르 아옌데에게”라는 글을 써넣었다. 그러나 체 게바라와 아옌데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칠레 민주주의혁명의 ‘다른 방도’는 꾸바 민주주의혁명과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 칠레 민주주의혁명의 역사적 경험은, ‘사회주의로 가는 칠레의 길(Chilean way to socialism)’이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peaceful transition to socialism)’이 아니었음을 증언한다. 아옌데정부와 ‘인민의 단결’이 보여준 계급투쟁의 불철저성은, 그들이 사회민주주의가 퍼뜨린 평화적 이행전략의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말해준다.

8-3) 명백하게도, 칠레 민주주의혁명을 파탄시킨 주범은 워싱턴의 제국주의반혁명세력이었다. 세력관계를 살펴볼 때, 칠레 반동수구세력이 단독으로 아옌데정부를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백악관의 지휘에 따라서, 40위원회는 반혁명정책수립을, 국방부는 군사반란을, 중앙정보국은 전복공작을, 재무부와 상무부는 경제봉쇄를 각각 밀어 부쳤다.

그러나 칠레 민주주의혁명은 반제혁명전략을 알지 못했다. 반제혁명전략이 없었으므로, 칠레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반제투쟁을 전개할 수 없었다. 반제혁명전략의 부재는 아옌데정부와 ‘인민의 단결’이 반제노선을 포기한 사회민주주의의 치명적 오류에 빠져 있었음을 말해준다.

만일 워싱턴의 제국주의반혁명세력이 칠레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민주주의혁명을 무력으로 파괴하지 않았다면, 라틴아메리카는 이미 사회주의의 길에 들어섰을 것이다.

8-4) 아옌데를 비롯한 칠레사회당 온건파와 루이스 꼬르발란(Luis Corvalan)을 비롯한 칠레공산당 지도부는 수구반동세력의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평화적인 이행과정을 밟으면서 민주주의혁명을 점진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리라고 착각하였다. 칠레공산당 지도부는 소련공산당의 수정주의노선인 ‘평화적 이행’을 믿었으며, 칠레사회당 온건파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의 ‘평화적 이행전략’을 모방하였다. 이것은 반제투쟁과 계급투쟁을 사실상 포기하였음을 뜻한다. 그와 달리, 칠레공산당과 칠레사회당 온건파에 대해 선을 그었던 급진세력은 여러 정파로 분열되어 혁명정세를 이끌어가지 못하였다.


 

9. 글을 맺으며


 

아옌데의 대선승리로부터 20년, 그리고 그가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때로부터 17년이 되는 1990년 9월 4일, 산띠아고에 있는 국립유공자묘역에서는 그의 장례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칠레인민 수만 명이 그의 초상화와 칠레국기를 들고 추모행렬을 이루었다.

2006년 4월에는 삐노체뜨 반동정부 시기에 악명이 높았던 비밀정보국 건물이 ‘살바도르 아옌데 미술관’으로 개조되었고, 그에 앞서 삐노체뜨 반동정부가 자행한 고문과 학살의 피가 흘렀던 비밀감옥 비야 그리말디(Villa Grimaldi)는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관으로 개조되었다.

그러나 오늘 칠레에서는 민주주의혁명이 재생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칠레사회당은 네 정파로 분열되었고, 칠레공산당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칠레 정치권은 중도정치와 온건개혁을 표방하는 사회민주주의정당들의 연합체인 민주주의정당연합(Concertracion de Partidos por la Democracia)이 계속 지배하고 있다.

신식민주의체제에 맞서 싸우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되새겨야 할 것은 칠레 민주주의혁명이 남겨놓은 피의 교훈이다. (2006년 12월 17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