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5월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이끌고 또다시 압록강을 건너오시어 백두고원에서 멸적의 총성을 울리시었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이 그때 조국땅에 들어와 첫 밤을 지낸 곳이 오늘 날의 삼지연군 이명수노동자구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청봉의 수림 속이다. 그 숙영지자리는 거의 20년 되어서야 비로소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연이어 무산, 연사 사적지가 발견되었다.

아래에 수록하는 글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여러 기회에 무산지구전투와 관련하여 하신 말씀을 종합한 것이다.

 

남패자에서부터 논의된 조국진출문제는 북대정자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대원들은 한시 바삐 조국으로 진출하고 싶어했습니다. 조국에 나가서 보천보전투나 간삼봉전투를 능가하는 큰 규모의 전투를 벌여 세상을 한번 요란하게 들었다 놓고 싶어했습니다. 힘이 강성할 때이고 또 100여일에 달하는 고난의 행군을 통해 무쇠처럼 단련된 때였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 힘을 가지고 우리는 그 해 봄에 압록강연안에서 수많은 성시들과 부락들을 연이어 답새겼습니다. 그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조국으로 나왔습니다.

조국으로 왜 진출했는가 하는 데 대해서는 내가 여러 번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조선인민혁명군의 정치군사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지향점은 조국진군이었습니다. 우리는 북만에서 활동하건 동만에서 활동하건 크고 작은 군사작전을 무수히 벌이면서도 그 총적인 지향점은 항상 조국진출과 조국해방이라는 목표에 두고 거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였습니다.

조국진출에서는 시기를 잘 선택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1937년 6월이 조국진군의 적기였다면 1939년 5월도 역시 적기였습니다. 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시의 정세로 보든지, 우리자신의 지향이나 국내인민들의 염원으로 보든지 조선인민혁명군이 조국으로 진군하는 것은 한시도 미룰 수 없는 절박한 문제로 나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당시 내외의 정세를 깊이 분석해본 데 기초하여 무장투쟁을 다시금 국내깊이에로 확대해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39년 5월이면 지구의 동쪽에서는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이고 서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준비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일제는 장기전에 빠진 중일전쟁을 시급히 결속하고 대소공격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한편 남방으로 진출할 전략을 짜면서 공고한 후방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인민에 대한 경제적 수탈과 파쇼적 폭압을 강화하는 동시에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습니다. 그 대표적 실례가 바로 「혜산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해서 서간도지방의 혁명조직들과 함께 북부조선일대의 일부 혁명조직들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살아남은 조직들도 적지 않지만 핵심적인 조직들은 대부분 파괴되었습니다. 피해를 면한 혁명조직들도 위축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적들은 「혜산사건」후 조선인민혁명군이 망했다는 선전을 계속하였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우리의 「괴멸」과 저들의 「무훈」을 축하하는 경축대회놀음까지 벌이었습니다. 우리의 「종말」에 대한 거짓선전에 속아 넘어간 일부 지방의 혁명조직성원들은 김일성장군이 잘못되었다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조선혁명은 다 망가진 것이나 다름 없다, 가망도 없는 혁명을 해서는 뭣하겠는가고 하면서 유격대공작원들이 있는 밀영에 찾아와 내가 잘못된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해보고 돌아가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항일혁명을 앙양시킬 수 있는 최상의 방도는 조선인민혁명군의 대부대가 국내에 들어가서 적들을 쳐 갈기고 내외에 자기 존재를 시위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몇몇 공작원들이 국내에 침투해서 혁명군은 죽지 않았다, 김일성장군도 건재하고 혁명도 전진하고 있다고 아무리 말해주어도 그 당시의 환경에서는 그런 선전이 잘 통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조국진군을 하게 된 다른 하나의 주되는 목적은 파괴된 혁명조직들을 복구하고 그것을 확대하자는 데도 있었고 당조직건설과 통일전선운동을 더 잘 하여 인민들을 전민항쟁에로 불러일으키자는 데도 있었습니다.

국내에 있는 우리의 혁명조직들이 대오를 제일 크게 늘인 것은 보천보전투직후와 간삼봉전투직후입니다. 총소리가 한번씩 울리면 사람들이 각성되게 되고 각성된 인민들이 혁명조직의 품으로 흘러 들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남호두회의후 서간도에 나와서 싸움을 하지 않고 올방자를 틀고 앉아 인민들이 섬기는 밥만 축내면서 껄렁껄렁 지냈더라면 장백지방에서 혁명조직들이 그처럼 빨리 그리고 그처럼 많이 번성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서간도지방에서 혁명조직들이 우후죽순처럼 태어나게 된 주요한 요인은 우리가 사상사업을 잘 한데도 있지만 싸움을 많이 해서 혁명군의 본때를 보여주고 항일혁명이 능히 승리할 수 있다는 신심을 준데 있었습니다.

우리가 국내진출의 후보지로 무산지구를 선정했을 때 일부 지휘관들은 좀 어리둥절해하였습니다. 보천보전투가 있은 후 적들이 이 지대에 가장 악질적인 수비무력을 몇 배로 증강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대가 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사실상 대단히 어렵고 위험한 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어렵고 위험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지구로 진출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이런 지구에 진출하여 적들을 요정내게 되면 북부조선의 여느 지구로 진출하는 것보다 효과를 몇 배로 크게 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무산지구에는 철광노동자들과 수전공사노동자들, 벌목노동자들을 비롯하여 노동자계급의 대부대가 집결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일대에서 총소리를 내게 되면 노동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었으며 그 소식이 그들을 통하여 전국각지에 급속히 퍼질 수 있었습니다.

몇 방의 총소리로 무산의 노동자계급을 각성시키고 함경북도의 노동자, 농민들을 각성시키며 온 나라 인민들을 항일혁명에로 더 힘있게 불러일으키자는 것이 우리의 의도였습니다.

1939년 봄에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무산지구로 진출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때 5호물동으로 강을 건넜습니다. 이오송은 내가 업어서 건네주었습니다. 강을 건느면서 이게 무슨 강인지 아느냐고 물으니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우리 대원들한테는 국경개념이 별로 없었습니다. 내가 압록강이라고 말해주자 그는 강물 속에 내려놔 달라고 졸랐습니다. 조국의 강물에 몸을 적시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물동가에는 진달래가 많았습니다. 우리 대원들은 조국의 진달래를 보자 모두 환성을 질렀습니다.

그 날 펼쳐진 풍경 가운데서 제일 잊혀지지 않는 것은 여대원들이 진달래무더기 앞에 웅크리고 앉아 꽃구경을 하면서 울고 웃으며 감격해 하던 광경이었습니다. 어떤 여대원들은 두 팔을 크게 벌여 진달래를 무더기 채로 안고 눈물을 흘리었습니다. 얼굴은 웃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져 내리더란 말입니다.

그때 우리가 본 진달래는 단순한 자연의 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외적에게 강탈당한 조국의 한 부분, 하나의 살점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진달래는 웃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그것이 그저 웃음으로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빨치산대원들이 진달래를 보고 눈물을 흘린 것처럼 진달래도 우리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애국심이란 참으로 강렬한 감정입니다. 진달래한테야 무슨 슬픔이 있고 눈물이 있겠습니까. 과거의 진달래라고 하여 오늘의 진달래와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망국의 설음을 안고 있던 우리 눈에는 진달래마저 그 망국을 통탄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고 눈물로써 외적에게 강탈당한 땅에서 피고지는 서러운 신세를 하소연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날 유격대원들은 이 꽃을 그저 진달래라고 하지 않고 조국의 진달래라고 불렀습니다. 조국의 진달래, 이 말 속에는 조국과 인민을 끝없이 사랑하며 광복의 봄을 앞당기고 해방된 조국강산에 인민의 행복한 낙원을 일떠 세우려는 유격대원들의 열렬한 염원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나는 진달래꽃을 볼 때마다 항일무장투쟁시기의 나날들이 회상되어 시라도 읊고 싶은 충동을 받군 합니다. 조국의 진달래, 백두산의 진달래, 연분홍색 진달래, 조국의 봄을 알리는 진달래! 얼마나 많은 뜻이 어려있는 아름다운 꽃입니까.

우리가 청봉에 도착하자 안개가 걷히고 해가 났는 데 날씨가 아주 좋았습니다. 우등불을 피우고 이슬에 젖은 행건을 말리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적정과 지형을 알아보려고 청봉마루에 올라갔더니 멀리서 연기가 나는 것이 보이고 도끼로 나무를 찍는 소리가 들리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휘관들에게 적들이 가까이에 있을 수도 있는 데 행동에서 은밀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각 부대들의 숙영장소도 정해주고 보초도 세우고 정찰도 파견하였습니다.

부대가 숙영준비를 다 끝낸 다음 우리 동무들이 나무껍질을 벗기고 구호들을 썼습니다. 항일혁명투쟁시기 우리 대원들은 가는 곳 마다에서 구호들을 썼는 데 그때 구호를 쓴 동무들 중에 구원애라는 동무도 있었습니다. 구원애는 한때 흥륭촌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학습도 잘 하였고 글씨도 잘 썼습니다. 입대 전에 중학교 교사노릇을 하던 연안길도 글씨를 잘 썼습니다. 김정숙동무가 쓴 것도 여럿이 됩니다.

아까운 동무들이 다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나무와 함께 글이 살아있으니 그들도 살아있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 인민들이 아주 귀중한 재보를 찾아냈습니다.

청봉에 있는 구호나무들에는 우리와 함께 싸운 투사들의 숨결이 배어있습니다. 구호나무들을 보니 산 투사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항일혁명투사들이 나무에 쓴 구호들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귀중한 혁명적인 문헌입니다. 그 구호들에는 투사들의 피가 그대로 뛰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당과 인민이 영원히 보존하고 관리해야 할 만년재보입니다.

우리는 청봉에서 하룻밤 숙영하고 다음 날 건창으로 자리를 옮기었습니다.

우리가 건창에서 숙영할 때 적들은 낚시꾼으로 가장한 밀정 두 명을 숙영지로 들여보냈습니다. 건창일대에는 낚시질을 할 만한 곳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낚시꾼으로 가장한 밀정들은 대낮에 우리 숙영지근방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 들었습니다. 거동이 하도 수상하기에 보초병은 그들을 붙잡아 문초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한 놈은 놓치고 한 놈만 붙잡았습니다. 잡힌 놈의 몸에서는 권총까지 나왔습니다.

밀정이 실토한 데 의하면 적들은 벌써 우리가 국내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숱한 수비대와 경찰대들을 투입하여 밀림 속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측한대로 적들의 역량이 이 일대에 쏠린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런 정황에서는 적들의 포위 속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감쪽같이 빠져나가는 것이 상책이었습니다.

나는 있을 수 있는 적의 준동에 대처하여 우리의 행동방향을 위장하기 위한 전술적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두개의 소부대를 편성하여 한 소부대는 포태리방향에 나가 적을 타격함으로써 조선인민혁명군이 여러 곳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 놈들을 혼란시키며 다른 소부대는 우리가 다시 압록강을 건너 장백쪽으로 빠진 것처럼 발자국을 내고 자취를 감추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음 날 새벽에 건창을 떠나 베개봉쪽으로 행군해 갔습니다. 그 날은 안개가 얼마나 자욱하게 끼었던지 지척을 가려볼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척후부대는 향방을 잡지 못해 애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척후부대에 나가 군용지도와 지남침을 가지고 행군방향을 정해주었습니다. 그 날 행군이 여간 아슬아슬하지 않았습니다. 적수색대가 불의에 나타나서 우리와 조우전을 벌이게 되면 야단이었습니다. 수색대가 나타나도 해제끼는 것은 문제없겠지만 일단 총소리를 내게 되면 차후 행동에 큰 지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베개봉에 도착한 다음 숙영지시를 내리고 적정을 알아보기 위해 정찰조들을 파견하였더니 그들이 베개봉 동쪽의 원시림 속에서 기막히게 멋있는 신설도로를 발견했다는 자료를 보고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그 신설도로는 우리가 이미 정보를 쥐고 있은 갑무경비도로였습니다. 갑무경비도로는 갑산과 무산의 무인지경을 연결하는 비상경비도로였습니다. 이 도로의 사명은 인민혁명군이 국내에 진출할 경우 기동수단을 동원하여 필요한 지점까지 「토벌」역량을 급송급파하는 데 있었습니다. 공사가 갓 끝났기 때문에 청소를 말끔히 해놓고 준공검사를 기다리는 중인데 잡인들의 통행을 일체 금지시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정찰조성원들은 도처에 「통행금지」팻말이 박혀있다고 하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리 나라 도처에 그런 「통행금지」구역이나 「출입금지」구역을 만들어 놓고 조선사람들의 내왕을 엄하게 단속하였습니다. 왜정시대의 평양시 중심부에는 일본사람들만 사는 거리들이 따로 있었는 데 일본의 경관들이나 장사아치들은 그 거리들에 조선사람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눈부터 흘기군 하였습니다. 일본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조선아이들이 문전에도 얼씬 할 수 없었습니다. 간혹 그런 경우를 당해보지 못한 조선아이들이 일본학교마당에라도 발을 들여놓으면 대뜸 귀뺨을 얻어맞던가 거지취급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아이들은 조선아이들이 공부하는 학교나 조선사람들이 사는 주민지구에 마음대로 나타나 하고 싶은 짓을 다했습니다. 한번은 평양성안에서 살던 일본인 불량소년들이 창덕학교 근처에 있는 참외밭에 집단적으로 달려들어 칠골의 가난한 농사꾼이 여름내 가꾸어 온 참외를 결단 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창덕학교에 다니는 학우들과 함께 참외밭을 짓뭉개며 돌아가는 일본인 불량소년들을 되게 혼내주고 성안으로 쫓아버리었습니다.

적들은 국경연선에까지 「통행금지」구역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조선사람들이 다니지 못하게 하였지만 우리는 그것을 용인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사람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통치를 부정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나는 어떻게 하나 조선인민혁명군의 위세를 시위하여 갑무경비도로를 건설한 적들에게 타격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적들이 국경일대에 갑무경비도로까지 건설해 놓고 삼엄한 경계망을 늘이고 있는 것을 보면 보천보와 간삼봉에서 당한 참패를 만회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군정간부들을 모아놓고 우리가 처한 위급한 정황을 사실 그대로 알려주면서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적들의 포위 속에서 행군을 하고 있다. 앞에도 뒤에도 옆에도 적들이 쫙 깔려있다. 우리가 국내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적들은 함남북 각지에서 국경수비대, 경찰대를 비롯하여 수많은 「토벌」무력을 끌어다가 대대적인 포위수색작전을 준비하고 있다. 도망친 밀정이 우리를 보았으니 지금쯤 적들은 청봉을 수색하고 건창을 거쳐 우리를 따라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산쪽으로 빨리 빠져나가서 우리가 북대정자에서 세운 작전계획을 실천에 옮겨야 겠는데 전진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자칫 하다가는 우리가 완전포위의 그물에 걸려 들 수 있다. 어떻게 해야 단숨에 무산으로 진출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지휘관들은 승벽내기로 대책 안을 내놓았습니다. 어떤 동무들은 장백쪽에 유인조를 파견하는 방법으로 적들의 주의를 그 쪽으로 쏠리게 하고 슬쩍 무산방향으로 빠지자고 하였고 어떤 동무들은 무산지구로 가는 길이 꽉 막혀있다면 차라리 베개봉 근방에서 간삼봉전투와 같은 큰 전투를 벌이는 것이 어떤가고도 하였습니다.

어느 것이나 다 귓맛이 당기는 방안들이었으나 무산지구로 한달음에 빠져나갈 수 있는 묘안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지휘관들의 의견을 다 듣고 나서 그에 대한 토론까지 조직한 다음 내가 생각한 방안을 내놓았습니다. 그 방안이란 적들이 방금 닦아놓고 준공검사를 기다린다는 갑무경비도로를 따라 대낮에 대로행군을 단행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지휘관들은 그 제안을 듣자 모두 어리둥절해하였습니다. 시퍼런 대낮에 그것도 보통달구지길이 아니라 적들이 우리를 「토벌」하는 데 쓰자고 특별히 닦아놓은 도로로 대부대행군을 하자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지휘관들의 얼굴표정을 보고 그들이 내 방안을 미타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인차 간파하였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나에게 대도로를 통한 백일행군방안이 전술적으로 타당하다는 자신심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나는 지휘관들에게 내가 생각한 방안의 전술적 의도와 실현가능성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우리가 갑무경비도로를 따라 능히 대낮에 행군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자리에 모인 동무들의 태도가 증명해주고 있다. 동무들은 내가 대낮에 대로행군을 하자고 하자 다들 아연해하였다.

적들도 조선인민혁명군의 대부대가 자기들이 특설한 경비도로로 백주에 대오를 지어 행군해 가리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이 점에 백일대로행군의 확실한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적들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대담하게 강행하는 여기에 이 행군의 가능성을 약속하는 전술적 담보가 있다.

지휘관들은 모두 신심을 가지고 베개봉을 떠났습니다.

진달래가 어찌나 많이 피어있었던지 행군 중에 있는 우리 대원들의 얼굴이 온통 새빨개 보였습니다.

진달래는 삼지연못가에도 많았습니다. 못가의 진달래와 물 속의 진달래가 한데 어울려져 얼마나 수려한 절경을 이루었던지 그 곳에 그냥 주저앉아 초막을 짓고 살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백두고원과 같은 고산지대에 이처럼 희한한 명승지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고산지대의 풍치는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두산을 닮아서 웅건장엄하면서도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것이 바로 삼지연의 경치입니다. 고산지대의 미와 벌방지대의 미가 한데 조화되었다고 할까, 삼지연과 같은 산천경개는 사실 금을 주고서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그때 삼지연을 보고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산천을 강탈당했는가를 다시 한번 뼈에 사무치게 느끼었습니다.

나는 삼지연의 절경에 너무도 심취되어 일제를 내쫓고 조국을 해방하면 온 세상이 보란 듯이 경치 좋은 이 고장을 인민의 휴양지로 꾸려야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 이상이 이제는 훌륭하게 실현되었습니다.

삼지연은 오늘 온 세상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오는 혁명전적지로 되었을 뿐 아니라 고산지대의 특이한 풍치를 자랑하는 이름 난 휴양지로 전변되었습니다.

1956년에 김정일동무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혁명전적지답사단을 이끌고 양강도안의 혁명전적지들을 돌아볼 때만 해도 삼지연못가에는 진대나무들과 가랑잎무지들뿐이었고 사람의 손길이 닿은 곳이란 거의 없었습니다. 못에는 헐어 빠진 매생이 한 척과 전쟁 전 이 고장 사람들이 호수의 풍치를 돋구느라고 지었다는 구식정각이 하나 있었을 뿐입니다.

내가 소련과 동유럽인민민주주의국가들에 대한 공식방문을 마치고 돌아오자 김정일동무는 혁명전적지답사단의 활동결과를 보고하면서 답사과정에 배우고 느낀 점에 대하여 격정에 넘쳐 말했습니다. 그때 그는 혁명선열들의 숨결이 그대로 어려있는 유서깊은 혁명전적지들이 응당한 수준에서 잘 건설되지 못하고 소홀히 꾸려졌거나 자연상태 그대로 있는 사실과 지어는 혁명전적지들에 답사자들에게 안내해설을 해주는 강사조차 없는 실태를 두고 가슴 아파하였습니다.

1956년이면 사상사업에서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세우기 위한 바람이 방금 불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우리 당 사상사업에서는 그때까지만 해도 주체가 확고히 서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나니 우리 당의 혁명역사와 관련된 자료들과 유물들도 많이 발굴되지 못했고 혁명전적지도 잘 꾸려지지 못했으며 혁명전통에 대한 연구도 본격적으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김정일동무가 평양 제1중학교 학생들로 혁명전적지답사단을 뭇고 백두산지구에 대한 답사를 떠날 용단을 내린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었습니다.

삼지연을 떠난 우리는 갑무경비도로로 해서 무산지구를 향해 최대급행을 하였습니다. 그때는 이런 전술을 두고 일행천리라고 했습니다. 일행천리란 한달음에 천리를 간다는 뜻입니다.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우리가 일행천리전술을 여러 번 썼습니다. 몇 번 써보았는데 효과가 컸습니다. 그러나 시퍼런 대낮에 경비도로라는 이름이 달린 신작로로 수백 명을 헤아리는 대부대가 일행천리한적은 없었습니다. 그런 즉 갑무경비도로개통식은 우리가 해준 셈입니다. 우리는 곧추 뻗은 적들의 경비도로를 따라 대낮에 보무당당히 행군하여 그 날로 두만강기슭의 무포에 도착하여 숙영하였습니다.

적들은 훗날 우리가 자기들이 닦아놓은 경비도로를 따라 대낮에 행군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미증유의 괴사」라고 비명을 질렀다고 합니다.

갑무경비도로에서 강행한 일행천리행군은 몇 개 연대나 사단의 적을 소멸한 것보다 더 큰 소득을 얻게 하였습니다.

나는 무포숙영지에서 지휘관회의를 열고 행군과정을 총화한 다음 대홍단지구로 진격할 데 대한 과업을 제시하고 우선 신사동과 신개척 일대에서 군사정치활동을 벌이도록 하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무포숙영지를 출발한 우리는 대홍단벌에 도착하자마자 국사당근처에서 점심식사를 한 다음 계획대로 부대를 두개 방향으로 진출시켰습니다. 7연대는 두지바위를 거쳐 신개척방향으로 가게 하고 나는 경위중대와 8연대를 데리고 소로은산기슭에 있는 신사동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그때 신사동에서 정치사업을 하였습니다. 나는 개울건너 둔덕진 곳에 사령부를 정한 다음 몇 명의 경위대원들과 전령병들을 데리고 마을에서 제일 큰 목재소노동자합숙으로 먼저 찾아갔습니다.

무산지구에 불쑥 나타난 우리를 보게 된 인민들은 지난 겨울에 조선인민혁명군이 다 얼어 죽었다더니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 많은 군대가 어디에 있다가 무슨 수를 써서 무산땅에 나타났는가고 하면서 감격과 기쁨을 금치 못해하였습니다.

합숙방이라는 것이 소외양간이나 마구간보다 별로 나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 방의 정경가운데서 특별한 것은 한복판에 빨랫줄처럼 길게 늘여놓은 밧줄이었습니다. 무슨 줄인가고 물으니 노동자들이 잠잘 때 발을 얹어 놓는 줄이라고 하였습니다. 합숙방이 너무도 비좁아서 노동자들이 그 밧줄을 사이에 두고 두 줄로 마주 누워 자는데 다리를 마음대로 펼 수가 없어 밧줄 위에 발을 서로 엇걸고 잔다는 것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사람대접은커녕 소나 말보다 더 열등한 취급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소나 말과 같은 집짐승들이야 그래도 사람들의 보호를 받지 않습니까.

그 날 밤 그 합숙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합숙방에도 사람들이 꽉 들어 차고 마당에도 꽉 들어 찼습니다. 나는 그 날 신사동인민들 앞에서 연설도 하고 그 고장 노동자들에 대한 조직정치사업도 하였습니다.

그 날 밤 신사동인민들에게서 지성 어린 대접을 받던 일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신사동에는 종곡이 모자라 씨붙임을 못한 화전민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사동여인들은 김일성장군이 거느리는 조선군대가 왔다고 하면서 기장밥을 짓고 농마국수까지 눌러주었습니다.

우리 대원들은 그 지성에 감동되어 신사동을 떠날 때 배낭 속에 남겨두었던 군량미까지 다 털어서 그들에게 남겨주었습니다. 김정숙동무는 밀가루를 털어내어 주인집사람들에게 수제비국을 끓여주고 그 집 딸아이의 튼 손에 크림도 발라주고 떠났습니다. 우리가 떠날 때 신사동사람들은 모두 울었습니다.

나는 이미 신개척에서 얻어 맞은 적들이 반드시 추격해 오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지형상 유리한 대홍단벌에서 적을 소멸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사동을 떠나 대홍단벌에 가서 둔덕진 곳에 매복진을 치고 신개척으로 간 오중흡이네 7연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7연대동무들은 내 지시대로 신개척에 가서 총소리를 내고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신개척의 적들을 몽땅 요정 내고 일본십장들까지 여러 명 잡아오다나니 좀 들떠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네 대열 뒤로 적들이 은밀히 따라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개척이 녹아 났다는 급보를 받고 출동한 국경수비대와 창평경찰대였습니다.

처음에 우리 대원들은 7연대의 뒤를 따라오는 적군을 제편으로 보았습니다.

우리 대원들이 적아를 미처 식별하지 못한 것은 안개가 낀데도 원인이 있었지만 적들이 안개를 이용하여 7연대의 꼬리를 너무 바싹 물고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7연대의 뒤를 따르는 철갑모부대가 적이라는 것을 인차 간파하였습니다. 정황은 우리가 예견한대로 조성되고 있었으나 적들의 총구 앞에 놓여 있는 7연대의 처지가 매우 위험하였습니다. 적들이 7연대의 뒤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매복진을 차지하고 있는 8연대와 경위중대의 대원들은 사격구령이 떨어지는 경우에도 총을 특별히 조심해서 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자칫 하다가는 우리가 쏜 총알에 우리 동무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적아의 간격이 버그러질 때까지 무한정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끄는 사이에 적들이 선손을 써서 7연대에 먼저 달려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후방조성원들과 짐을 지워가지고 오는 목재소노동자들도 큰 피해를 당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전열에 있는 7연대 대원들을 그냥 매복진 앞으로 지나가게 한 다음 대열후위에 있는 후방조성원들과 목재소노동자들에게 엎디라는 신호를 하고 나서 사격명령을 내리었습니다.

수백정의 총들이 일시에 불을 뿜었는데 그 총성이 정말 요란했습니다. 대원들은 그때 상당한 정도로 흥분했습니다. 이 총소리를 온 나라가 다 듣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온 몸에서 힘과 격정이 용솟음쳐 올랐습니다. 대홍단전투때에는 나도 역시 대원들 못지 않게 흥분했습니다. 우리의 일제사격에 적들은 무리로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살아남은 적들은 악을 쓰며 저항하였습니다. 국경지대에 배치된 군경들은 여느 군경들보다 더 지독하고 포악하였습니다. 그들의 저항이 정말 만만치 않았습니다. 일본사람들도 국경지방에는 정수분자들을 배치했을 것입니다.

우리와 적들 사이에 끼어있는 7연대 후방조성원들과 노동자들은 우박처럼 쏟아지는 총탄에 머리조차 쳐들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어떻게 할 바를 몰라 갈팡질팡하였습니다. 짐꾼들 속에는 일본사람들도 끼어있었습니다.

그때 전장에서는 아주 묘한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노동자들은 두 쪽으로 갈라졌는데 조선사람들은 짐들을 진채 인민혁명군의 진지로 뛰어오고 일본사람들은 짐들을 버리고 일본군경들 쪽으로 벌렁벌렁 기어가더란 말입니다.

조선인노동자들 가운데서 일본군경들 쪽으로 간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나는 그 광경을 목격하고 민족의 피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새삼스럽게 절감하였습니다.

그 날 대홍단에서 우리와 맞다 든 적들은 거의 전멸되었습니다.

우리측에서는 두 명의 부상자와 한명의 희생자가 났습니다. 희생된 대원의 이름은 김세옥입니다. 김세옥은 마동희의 누이동생인 마국화의 애인입니다. 그는 7연대 사무장과 함께 짐을 지고 7연대를 따라온 사람들을 안전구역으로 피신시키다가 가슴에 관통상을 입었습니다. 상처를 보니 살 가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세옥을 업고 간 대원이 김성국이었을 것입니다. 김성국의 군복잔등이 피로 물들었던 생각이 납니다.

우리는 두만강을 건늘때 목재소노동자들을 돌려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명의 은인인 김세옥이 중태에 빠졌는데 어떻게 돌아가겠는가고 하면서 우리를 그냥 따라왔습니다.

부대가 두만강을 건는 다음에도 김세옥은 빈사상태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눈을 감을 때 우리는 모두가 울었습니다. 우리를 따라온 짐꾼들도 흐르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묻힌 곳이 장산령기슭입니다. 해방 후 우리는 김세옥의 유골을 찾아내어 대홍단에 이장하였습니다.

김세옥을 장산령기슭에 안장한 그 날 우리는 중상당한 남동수를 부근에 있는 어느 한 밀영으로 후송시키었습니다. 남동수는 밀영에 가서 100여일 동안 로빈손 크루소와 같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부대와의 연계가 끊어진 고립무원한 상태에서 육신을 잘 쓰지 못하는 중상자가 식량도 없이 100여일을 지냈다고 하면 잘 믿지 않을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남동수의 간호를 담당한 사람은 산림대에서 갓 넘어온 「정영감」이라고 부르는 중국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민혁명군이 「비적」이라는 일본인들의 선전을 듣고 돈벌이를 해보려고 우리 부대에 넘어온 사람입니다. 산림대에서 노략질을 하는 것보다 「공산비적단」에서 비적질을 하면 먹을알이 더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인민혁명군이 비적질을 하는 군대가 아니고 신사군대라는 것을 알게 되자 우리 부대는 자기 같은 건달꾼이 있을 곳이 못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남동수를 죽이고 고향으로 돌아갈 궁리를 하였습니다. 공산군을 한명 죽이고 가야 고향에 가더라도 무사할 것이라고 타산했던 것입니다.

「정영감」이 이런 흉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남동수는 밤중에 초막에서 기어 나와 가랑잎으로 몸을 가리우고 이틀동안이나 숨어 있었습니다. 그는 「정영감」이 고향으로 돌아간 다음 나뭇잎과 풀싹을 뜯어먹고 다람쥐와 뱀을 잡아먹으면서 그 날 그 날을 연명해 가다가 우리가 파견한 연락원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연락원마저 「토벌」에 희생되었습니다.

남동수는 또다시 고립무원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는 부대의 행방을 찾아서 헤매다가 자기 어머니가 지하공작을 하고 있는 갑산을 거쳐 동만에 들어가 중국혁명을 도와주었습니다. 그가 우리의 부름을 받고 조국으로 나온 것이 어느 해였던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때 그는 『저는 장군님께서 주신 모포도 다 잃어버리고 이제야 찾아옵니다.』하고 오열을 터뜨리었습니다.

우리 전우들이 무산지구에 많은 흔적을 남기었습니다. 「옹조꼬맹이」라는 별명을 가진 정일권동무도 박성철동무와 함께 붉은바위일대에 진출하여 활동한적이 있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강점자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이 무산지구에 나타나 대홍단벌에서 자기네 군경들을 대량소멸하고 유유히 두만강을 건너갔다는 소식을 듣자 대경실색하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국내에 나타났다는 그 사실자체만으로도 그들은 기절할 지경이었습니다.

남호두회의 후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되는 활동무대는 백두산 서남부의 서간도일대였습니다.

우리가 백두산지구에로 진출한 후 조선과 만주의 신문, 통신들이 모두 서간도일대에서의 유격활동에 대한 소식으로 떠들썩하였습니다. 혜산으로부터 신갈파를 거쳐 중강진일대에 이르는 압록강연안의 군경들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조선인민혁명군의 「월경침입」을 막기 위한 방비대책에 혈안이 되어 돌아갔습니다.

함경남도경찰부에서는 이른바 「대안비적상황」이라는 표제 밑에 우리의 활동상황을 전면적으로 수집하고 그 정보자료들을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조선주둔군 사령부, 함경남북도와 평안북도를 비롯한 국경지대의 연관 도 경찰부, 나남19사단 사령부 등에 정기적으로 보고하거나 통보해주었습니다.

일본군부와 경찰계의 두뇌진들은 우리가 내일은 어디서 무엇을 하리라는 것까지 점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백두산기슭, 그것도 국경수비무력이 어마어마하게 진을 치고 있는 무산지구에 우리가 나타나 「토벌」에 내몰린 군경의 무리들을 일격에 쓸어버리고 회오리바람처럼 사라졌으니 적들이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적들의 실책은 열하원정의 훗과에다가 고난의 행군기간의 손실까지 겹쳐 조선인민혁명군이 자기의 존재를 거의 끝마칠 정도로 괴멸되지 않았겠는가 하고 오산한 데 있었으며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역량이 장백, 임강을 비롯한 압록강연안이나 몽강, 무송과 같은 북부동변도오지에서 군의 잔명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이나 하고 있으리라고 잘못된 판단을 한데 있었습니다.

무산지구전투는 보천보전투와 함께 우리가 국내에서 진행한 군사작전들 가운데서 가장 규모가 크고 의의가 큰 전투였습니다. 보천보전투가 조선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시위한 전투였다면 대홍단전투는 적들이 전멸당했다고 선전하던 조선인민혁명군이 건재해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강대한 역량으로 자라나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계속 철추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실지로 보여준 역사적인 전투였습니다.

 무산지구에서 울린 조선인민혁명군의 총소리는 기가 죽었던 국내인민들에게 우리 혁명이 계속 상승일로를 걷고 있다는 신심을 주고 「혜산사건」의 여파로 하여 일시적으로나마 위축되었던 국내혁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준 강심제와도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무산지구에서 이룩한 우리의 군사적 승리는 또한 조선인민혁명군이 다 망했다고 떠들어대던 적들의 선전이 완전한 허위라는 것을 만천하에 폭로하였습니다. 이 전투가 있은 후부터 우리 인민들은 적들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절대로 곧이 듣지 않았습니다. 무산지구전투가 있은 뒤로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국내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은 조선인민혁명군이 건재하는 한 조국광복의 새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확고한 신심을 가지고 항일혁명의 흐름 속에 앞을 다투어 뛰어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