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무장투쟁이 고조에 이르고 있던 1930년대 후반기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군사적 공세를 강화하는 한편 총포로 얻지 못한 것을 회유공작으로 얻어보려고 지꿎게 책동하였다. 적들은 혁명에서 배신한자들을 유격대오에 들이밀어 「귀순공작」만 잘 하면 혁명군을 내부로부터 사상적으로 와해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귀순공작」의 앞장에 혁명을 중도에서 포기해 버린 탈락분자들과 배신자들을 내세웠는데 그중에는 위대한 수령님의 옛 동창생들과 혁명활동연고자들도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패자회의에 대하여 언급하실 때마다 화성의숙시절의 동창생들이며 「ㅌ.ㄷ」시절의 동지들이었던 이종락과 박차석이 「귀순공작」임무를 받아가지고 밀영에 들어왔던 일을 회고하시었다.

 

남패자에서 회의를 할 때 이종락과 박차석을 만나던 일에 대하여 여담 삼아 말하겠습니다.

박차석과 이종락은 나와 화성의숙에도 같이 다니었고 「ㅌ.ㄷ」와 건설동지사도 같이 조직하고 조선혁명군을 꾸릴 때에도 같이 활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혁명을 몇 해만 같이하면 형제나 다름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 두 사람은 나와 혁명을 4∼5년동안이나 같이하였습니다. 박차석과 이종락은 김혁이나 차광수와 같은 길림패들보다 한발 앞서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화전에서 「ㅌ.ㄷ」를 무었을 때 거기에 아직 김혁과 차광수는 망라되지 않았댔습니다. 그러나 박차석과 이종락은 둘 다 그 조직의 핵심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연고를 보더라도 박차석과 이종락은 내가 혁명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사귄 동지인 동시에 첫 동행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학생청년운동과 지하투쟁을 하던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곡절 끝에 서로 헤어져 한쪽은 산에서 무장투쟁을 하고 다른 한쪽은 적들에게 잡혀가 감옥살이를 하고 이렇게 서로 생사조차 모르고 지내다가 여러 해만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매우 의의있는 해후로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상봉은 즐거운 상봉으로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종락과 박차석은 일본의 관계기관으로부터 「귀순공작」임무를 받아가지고 밀영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난 날의 혁명동지로서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일본사람들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가 되어 「귀순」흥정을 벌이려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감옥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그런 흥정에 나섰다는 것은 그들이 나도 배반하고 혁명도 배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즉 그들은 귀빈이 될 수 없었습니다.

나는 혁명을 배신한 지난 날의 동창생들과 자리를 같이하는 기막힌 체험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적들이 인민혁명군에 대한 「귀순공작」을 대대적으로, 보다 악랄하게 벌이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930년대 후반기부터라고 생각됩니다.

초기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은 항일무장부대들과의 싸움에서 「귀순공작」을 기본 정략으로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적들은 청소한 항일유격부대들과 반일부대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는데 모든 힘을 집중하였습니다. 그들은 군사적 방법 외에 그 어떤 방법도 인정하지 않았고 또 쓰지도 않았으며 허용하지도 않았습니다. 문자그대로 「토벌제일주의」만을 주장하고 내밀었습니다. 일본군수뇌부는 「토벌」만을 유일한 수단으로 삼으면서 「귀순」놀음 같은 것은 벌이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아마 그런 놀음은 사무라이정신에 배치되는 유치한 짓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지어 「유도적 귀순엄금주의」라는 계율까지 내놓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일본군부가 동북의 항일무장역량을 군사적 방법만으로도 능히 제거해 버릴 수 있는 대상으로 보고 우리의 활동에 군사적으로만 대응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9.18사변 당시 장학량의 휘하에 있던 30만대군이 하루아침사이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 상당한 자신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군사적 타격만으로써는 항일유격대가 장성하고 항일무장투쟁이 발전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일제는 「문화토벌」이라는 새로운 창안품을 끌어내왔습니다. 「문화토벌」이란 「치본공작」이나 「사상공작」, 「귀순공작」같은 것을 말합니다.

 

일제침략자들이 「군사토벌」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의 「발본색원」을 노린 「문화토벌」전술에 어떻게 되어 매달리게 되었는가를 그들 자신의 말을 통해 알아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다.

일본의 사법성 형사국에서 내는 「사상월보」 제77호(1940년 11월 139∼141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있다.

『공비의 토벌이 왜 이처럼 어려운가 하는데 대하여 말한다면 공산군은 공산주의에 기초한 끈질긴 투쟁의식에 불타고 있으며 또한 교묘한 선전전술을 가지고 있으며 게다가 지리적으로는 산악의 첩첩한 밀림지대를 유격지구로 하여「적이 공격하면 우리는 퇴각하고 적이 물러가면 우리는 전진한다」는 게릴라전법을 적용하고 있으며 그리고 민중정치공작에서는 특이한 잠행선전공작에 의하여 민중을 획득하기 때문에 절대로 무력에만 의존하는 토벌로써는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무력에만 의거하는 것은 일시 효과가 있지만 결코 발본색원의 방책으로는 되지 않는 것으로서 밥위의 파리를 쫓는다든가 잡초의 싹을 베는 정도의 효과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종래의 여러 차례에 걸치는 토벌을 감행하면서 오늘도 아직 그들을 제멋대로 날뛰게 한 중대한 원인의 하나는 무력에만 힘을 넣고 그 치본공작, 사상공작을 홀시하였다는 것과 국가의 모든 기관이 이에 협력하지 않고 단지 군에만 맡겼기 때문이 아닌가고 생각합니다.』

 

적들은 「문화토벌」의 미명하에 「귀순공작」을 대대적으로 벌이는 한편 「이비정비」정책에 따라 항일무장대오를 버리고 투항한자들과 귀순자들로 「토벌대」를 무어 가지고 다니면서 지난 날의 전우들과 상관들, 부하들을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이비정비」란 말을 그대로 직역하면 「비적」으로 「비적」을 친다는 뜻으로 됩니다.

적들이 1930년대 후반기에 와서 「문화토벌」과 같은 비군사적 방법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것은 그들이 그때까지 만능으로 삼아오던 군사일변도의 정책이 여지없이 파탄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군사적 공세만으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니까 「귀순공작」과 같은 너절한 놀음도 벌이게 된 것입니다.

1937년-1938년이면 우리의 항일무장투쟁이 전성기에 오른 때입니다. 역량도 대단했고 전과도 대단했습니다. 큰 성시를 한두 개쯤 치는 것은 식은죽 먹듯 할 때였습니다. 무장투쟁의 영향 밑에서 대중투쟁도 앙양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처럼 고조되어 가던 항일혁명이 열하원정으로 해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양정우의 1군을 비롯하여 동북항일연군에 소속된 적지 않은 부대들이 원정과정에 많은 유생역량을 잃었습니다. 항일무장부대들에서는 도주자와 귀순자들도 생기었습니다. 여러 지휘관들이 무장투쟁을 포기하고 적들의 품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

이런 실정으로부터 적들은 동북의 항일무장역량이 붕괴직전에 이르렀다고 보았습니다. 다 거덜난 오합지졸의 무리이니 그 내부도 완전히 사분오열되어 갈팡질팡할 것이다, 이렇게 쳐도 넘어지고 저렇게 쳐도 넘어질 것이라고 타산했습니다.

적들이 「문화토벌」을 중시하게 된 다른 하나의 요인은 그 당시 「귀순공작」을 통해 달성한 몇 개 성과에서 재미를 본데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주요지휘관들의 투항은 그들로 하여금 공산주의자들의 신념이나 의지에도 한계가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 하였고 그런 인식을 토대로 하여 인민혁명군에 대한 와해공작을 추진시키게 하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문화토벌」의 기본과녁을 조선인민혁명군에 두고 한편으로는 군사적 공세를 강화하고 다른 편으로는 우리에 대한 「귀순공작」에 집요하게 매달렸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조선인민혁명군을 「토벌」의 기본과녁으로 삼았겠습니까.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그것은 조선인민혁명군이 1930년대초부터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엄중하게 위협하는 주적으로 되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 동북지방의 항일무장대오들 가운데서 제일 전투력이 강하고 소멸하기 어려운 존재로 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나니 신문, 잡지들에 우리 부대의 활동이 많이 소개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투쟁소식은 미국에도 알려졌습니다.

 

아래에 그 당시 미국에서 발행된 교포신문 「신한민보」에 실린 자료들 중 일부를 소개한다.

『이제 최근 천진통신을 의지하건대 그 보도가 자못 소상함이 아래와 같으다. 한중의용군중에 가장 용맹스럽게 쌈 잘 하는 군사는 한김일성장군(내지 신문과 기타 한국측의 소식을 의지하건대 간도를 근거하고 활동하는 김일성씨의 무장부대가 있어 지난 6월에 국경을 넘어 갑산 보천보를 습격하여 왜군경의 간담을 떨어뜨렸고 그 후에도 동군의 행동이 동아일보와 기타 신문에 자조 보도되었다.…) 통솔하에 전혀 한인으로 편성한 사단이라고 한다.

그들의 단결존재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데 있는 것이며 일종 가족식 계통적 지배에다 의협충용 등 전통적 정신훈련을 겸해서 그 단결이 더 굳은 것이다. 이로 인하여 수령이 한번 영을 내리면 그 부하가 수화를 헤아리지 않고 내닫는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다만 민족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 것뿐이요 전략은 많이는 유격방식을 취하여 신출귀몰함으로 왜적으로 하여금 갈팡질팡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소련군사가의 관측은 「만일 일조에 중일양국이 정식 선전하면 일본이 만주 한 모퉁이의 의용군을 당해내려도 군사 20만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그 말을 믿을 수 있다고 하면 그들의 실력이 몹시 위대한 것이 아니냐.』(「신한민보」 1937년 9월 30일)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군사적인 방법도 써보고 사실과 맞지 않는 거짓선전도 해보고 별의별 오그랑수를 다 쓰면서 조선인민혁명군을 완전소탕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문자그대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적들이 공세를 강화하면 할 수록 우리의 대오는 철벽으로 다져졌고 우리의 투쟁소식은 날개를 달고 더 넓은 판도로 전파되어 갔습니다.

군사「토벌」에서도 재미를 보지 못하고 우리가 잘못되었다고 거짓을 꾸며내는 데서도 재미를 보지 못한 일제가 궁여지책으로 매달린 것이 바로 「귀순공작」입니다. 적들이 이 공작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우리 할머니를 끌어낸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적들은 「문화토벌」의 기본과녁을 큼직큼직한 인물들한테 두었습니다. 일본사람들의 잡도리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 당시 양정우에 대한 「귀순공작」은 「성귀순공작반」이 담당하였고 나에 대한 「귀순공작」은 만주치안부 경무사소속의 「중앙특별귀순공작반」이 담당하였습니다.

적의 군경들이 나의 무송소학교시절의 교사까지 「귀순공작」에 이용하려 했다는 일제의 관헌자료도 있다고 하는데 그가 실지로 나를 찾아왔거나 간접적인 방법으로 어떤 연락을 보낸 적은 없습니다.

박차석과 이종락이 남패자밀영에 나타난 것은 적들이 우리에 대한 「귀순공작」에 열을 올리던 때였습니다. 근친들을 통한 공작이 은을 내지 못하게 되니까 이번에는 지난 날의 나의 동창생들을 들이민 것입니다.

내 짐작에는 일본의 모략가들이 박차석은 「귀순공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한 시험인물로 보고 이종락은 결정적인 기회에 써 먹을 수 있는 기본인물로 삼은 것 같습니다.

박차석이 우리 밀영으로 들어온 것은 부대가 남패자에 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보초대에서 보초장이 전령병을 시켜 박차석이란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고 알려왔습니다.  나는 그 연락을 받고 놀라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차석은 1930년 여름에 공작임무를 받고 국내에 들어갔다가 경찰에 체포된 사람입니다. 감옥에 갇혔던 사람이 남패자에는 갑자기 무슨 일로 나타났겠는가, 설사 그가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었다 하더라도 「요시찰인」으로 엄한 감시를 받을텐데 그 감시는 어떻게 떼버렸고 적들이 이중삼중의 포위진을 치고 있는 이 밀영에는 무슨 수로 찾아왔을까 하는 수상쩍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혁명을 다시 해보려고 불원천리 찾아왔다면 업고라도 다닐 일이지만 적들이 그에게 그런 자유를 줄리는 만무한 일이고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감은 어떻든 나를 찾아온 사람이니 만나보기로 하였습니다. 박차석을 만나게 되면 형권삼촌이랑 최효일이랑 감옥에서 어떻게 지내는가 하는 것도 알 수 있겠고 그밖에도 여러가지 측면에서 나는 알고 싶은 것이 많았습니다.

박차석을 만나보니 겉모양은 여전한데 속은 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생이별한 혈육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면서도 어쩐 일인지 기가 죽어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옛날의 혈기는 어데 가고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 되었는가, 감옥살이도 견디어 냈으니 이제는 앞을 보고 용기를 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박차석은 감옥살이를 하다가 전향을 했다고 하면서 적의 주구로 전락되어 남패자까지 찾아오게 된 경위를 눈물을 흘리며 실토하였습니다. 그는 형을 받고 형무소에서 몇 해 동안 옥고를 치르는 과정에 점차 혁명승리에 대한 신심을 잃고 동요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형권삼촌을 십자형틀에 묶어 놓고 태형을 가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다음부터는 저항할 기력마저 잃었다는 것입니다. 적들은 박차석이 동요한다는 것을 인차 간파하고 그를 다른 감옥에 옮겨놓았습니다. 만기가 되기 전에 감옥에서 놓아주고는 끝내 전향시켜 「귀순공작반」에 끌어넣었습니다.

적들이 나에 대한 「귀순공작」을 조작할 때 거기에 박차석을 끌어들인 것은 장소봉이었습니다. 장소봉은 우리가 중부만주지방을 개척할 때 김혁, 김원우 등과 함께 카륜을 혁명화하는 데서 공로를 세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도 1931년초에 이종락과 같이 무기공작을 나가다가 장춘역에서 체포된 후 전향하였습니다. 적들은 그에게 기생을 붙여 장춘에 가정까지 꾸려주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를 직업적인 특무로 써 먹었습니다. 일제의 정탐기관에서 나와 연고관계가 깊은 사람들을 물색할 때 장소봉은 이종락을 대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내세워 박차석이까지 끌어들이게 했습니다.

박차석은 적들의 심문을 받을 때 자기가 「ㅌ.ㄷ」시절의 나와의 친분관계도 다 말하고 그 후 반제청년동맹을 조직하던 일과 공청을 조직한 다음 길림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무장소조에 속하여 국내에 파견된 경위까지 다 털어놓았다고 솔직하게 자백하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네가 하는 노릇이 너 혼자 하는 것인가 아니면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인가고 따져 물었습니다.

박차석은 자기는 아무 벼슬도 하는 것이 없고 일본놈들이 강요해서 여기로 왔지만 성주한테는 그런 놀음이 애당초 통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기회로 삼아 성주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가려고 찾아왔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었습니다. 나를 보고 싶어 찾아왔다는 말은 진심인 것 같았습니다.

박차석은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도 이것저것 대주었습니다. 그는 우리 할머니를 「귀순공작」에 끌어들이려고 만경대에 갔던 일까지 다 말했습니다. 평양태생인 그는 소년시절부터 형권삼촌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가 형권삼촌을 만나려고 만경대에 자주 다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와도 의사소통을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박차석의 말에 의하면 이런 내막을 적들에게 알려주고 나에 대한 「귀순공작」에 그를 크게 써 먹을 수 있다고 내세운 사람이 이종락이었다고 합니다. 박차석은 할머니를 끌고 다니면서 고생시킨 것은 천만번 죽어도 씻을 수 없는 죄이지만 할머니의 신변만은 잘 보살펴드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나 이종락이는 짐승보다 못한 인간추물이며 자기 같은 인간은 백번 죽인대도 할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

박차석이도 우리와 함께 있을 때에는 정의감이 강하고 반일정신이 높은 청년혁명가로서 큰 포부를 가지고 조직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습니다. 조선혁명군이 결성된 후에는 맡은 일을 책임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적에게 체포되어 육체가 철쇄에 묶이게 되자 사상도 변하고 인간성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그래도 예전 날의 것을 조금이나마 지니고 있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나에 대한 한가닥의 정뿐이었습니다.

박차석은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고용되기는 하였지만 의식적으로 그들을 협력하거나 또한 그런 대가로 영달을 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일본이 강대하기 때문에 혁명이 승리할 가망이 없다고 보았고 그런데로부터 목숨이나 부지하면 다행이라고 여겼습니다. 목숨을 부지하자니 전향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전향을 하게 되니 일본사람들이 시키는대로 고분고분 따라다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귀순공작」에 참가했지만 그것을 마지 못해 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을 미워하면서도 그들의 뜻과 지령에 추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박차석과 같이 혁명적 신념을 저버린 인간들에게 차례진 당연한 비극이었습니다.

나는 박차석을 만나고 나서 사람의 참모습이란 무엇이겠는가 하는데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박차석은 나이를 더 먹었을 뿐이고 얼굴모습은 지난 날과 꼭 같았지만 이전과 달랐습니다. 허울은 남아있는데 무엇인가 알속이 없어 보였습니다. 넋이 없는 인간이 돼버렸더란 말입니다. 그러고보면 사람의 참모습은 결국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상을 빼놓으면 사람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빈 허울뿐입니다. 사상이 무너지면 인격도 허물어지는 법입니다. 박차석은 사상을 집어 던졌기 때문에 무기력한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상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이란 눈이 없는 얼굴과 같습니다.

나는 박차석이 변질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적의 수중에서 다시 그를 빼앗아내는 심정으로 여러모로 해설도 하고 충고도 많이 해주었습니다. 적이 나의 옛 동지를 빼앗아갔는데 나는 왜 그를 도로 빼앗아내지 못하겠는가 하는 반발심이 작용했다고 해야 할지… 「ㅌ.ㄷ」시절의 박차석으로 완전히 개조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애국심 하나만이라도 되살려주고 싶은 것이 나의 심정이었습니다. 내 가슴에도 박차석에 대한 옛정은 남아있었습니다.

사람이 민족 앞에 죄를 지으면 사람답게 살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고 내가 말했더니 박차석은 내 말을 긍정하면서 일제놈들에게 전향한 다음부터는 사는 것도 귀찮아지고 하루하루가 그대로 고역이다, 이렇게 살 바엔 목숨이나 부지해서 뭘 하겠는가, 죽자 하고 결심했는데 용기가 없으니 자살도 못하겠더라, 오늘 성주를 만나서 말이라도 나누고 보니 마음만은 가벼워진다,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죽여 달라, 죽어도 성주손에 죽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너 하나 죽인대야 내 마음이 가벼울 수 있는가, 네가 지은 죄를 씻기 위해서도 그렇고 지난 날 함께 혁명을 하던 동지들과의 의리를 봐서도 그렇고 이제부터라도 양심과 체면을 가지고 새 출발하라고 하였습니다.

박차석은 내 말을 명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그때 우리 동무들은 박차석을 처단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막았습니다. 상대가 자기 죄를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반성하였기 때문에 끝까지 인간적으로 대해주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대원들이 잡아온 멧돼지고기도 대접하고 그와 마주 앉아 술도 몇 잔 나누었습니다. 그런 다음 사령부천막에서 하룻밤 재우면서 사람답게 살라는 충고를 해주고는 돌려보냈습니다.

박차석은 내 앞에서 한 맹세를 어기지 않았습니다. 나의 부탁대로 조부모님들에게 보내는 내 편지도 전달하였습니다.

박차석이 남패자밀영에 들어왔다가 무사히 살아나간 것을 보고 적들은 얼마 후 다시 이종락을 밀영에 들여보냈습니다. 이종락을 남패자밀영에 데리고 들어온 것은 임강에 갔던 소조였습니다.

그 해 겨울 우리는 대원들의 겨울옷을 해결하려고 한 소조를 임강으로 파견하였습니다. 소조는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물자거래에 솜씨있는 장사꾼을 하나 만났습니다. 그 장사꾼은 일본사람들한테도 봉사하고 우리 유격대에도 물자를 대주면서 양다리치기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우리의 소조를 만나자 흥정을 걸었습니다. 당신들이 요구하는 천과 솜을 조달해 줄 터이니 그 대신 일본군의 군속 한 명을 혁명군사령부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습니다.

소조책임자는 그 흥정에 동의하면서도 조건부를 내걸었습니다. 우리가 많은 짐을 가지고 가려면 도중에 시끄러운 일이 없어야 겠는데 너희 상급에 말해서 혁명군에 대한 도발을 중지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어 임강, 가재수로부터 남패자에 이르는 넓은 지대에 진을 치고 있던 적「토벌대」들은 한동안 작전을 중지하고 잠잠해졌습니다.

소조는 이처럼 적의 기도와 약점을 역이용하여 많은 후방물자들을 가지고 안전하게 남패자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때 그들이 데리고 들어온 군속이 바로 이종락이었습니다.

이종락은 처음부터 처신을 희떱게 하여 우리 동무들의 눈총을 받았습니다. 혁명군의 군영에 들어왔다는 공포감이나 위축감 같은 것은 전혀 없이 뻔뻔스럽게 웃고 망탕 말하고 주저없이 행동하였습니다. 그는 보초대를 책임지고 밀영어귀에 나가 있던 오중흡을 보고 추운 산중에서 고생이 많겠다고 하면서 그에게 시계를 선사하려고 했습니다. 오중흡은 자기의 회중시계를 꺼내 보이면서 필요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종락은 사양말고 받으라, 시계가 둘 있으면 더 좋지 않겠는가고 했습니다. 오중흡은 시계는 하나를 기준해야지 오늘은 혁명시계를 차고 내일은 반동시계를 차는 식으로 해서야 되겠는가고 오금을 박아놓았습니다. 그것은 혁명의 편에서부터 반동의 편으로 넘어간 이종락의 반역행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습니다.

이종락이 밀영에 들어와서 건방지게 놀았지만 나로서는 만나자마자 그의 죄상부터 문책할 수 없었습니다. 칼로 단번에 벨 수도 없고 불로 태워 버릴  수도 없는 것이 사람의 정인 것 같습니다. 지난 날 그하고 맺은 우정이 너무도 깊었습니다.

이종락도 역시 나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사람입니다. 「ㅌ.ㄷ」시절의 이종락은 일가견을 가진 쟁쟁한 혁명가였습니다. 그는 우리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군사에 밝았고 새 사조에도 민감하였습니다. 16살 때부터인가 벌써 통의부에 소속되어 독립군활동을 한 사람입니다. 애국심이 강했고 행동도 용감하고 굵직굵직 했습니다. 이종락은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종락을 조선혁명군의 책임적 지위에 추천한 것은 그에 대한 높은 기대와 믿음의 표시였습니다. 그만큼 그는 인기가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아끼고 사랑해주었던 그가 믿음을 저버리고 전향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가 얼마나 실망했겠습니까.

이종락은 자기가 일본군군속으로 「귀순공작반」에 속해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ㅌ.ㄷ」의 강령에 있는 것처럼 일제를 타도하고 조선의 광복을 이룩하며 나아가서 전세계에 공산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면 물론 그이상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ㅌ.ㄷ」조직에 참가하고 조선혁명군을 내오고 또 감옥에 붙잡혀 들어갈 때만 해도 나는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9.18사변과 7.7사변을 겪고 나서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이미 공산주의운동이 거덜났다, 「내선일체」는 확고한 현실로 되고 그에 따라 일본은 동아시아의 주인으로 되었다, 중원을 쥐는 자는 동양천지를 다스릴 수 있다고 했는데 중일전쟁의 실태를 보라, 북경, 상해, 남경도 일본군에 함락되고 서주작전, 무한작전, 광동공략전이 성과적으로 진행되었다, 동북 3성을 단숨에 삼키고 오늘은 광대한 동아대륙을 반나마 타고 앉은 무적의 대일본제국인데 그 힘을 무엇으로 당해내겠는가, 성주는 노상 산에서 지내다나니 대세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잘 모를 수 있다, 내가 이리로 찾아온 목적은 산에서 보람없는 고생을 하고 있는 성주를 돕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종락은 마치 나를 위해 굉장한 선행을 베풀려고 온 것 같이 굴었습니다.

나는 그의 말과 체취에서 이 사람은 이미 썩을 대로 다 썩어서 살려낼 가망이 없겠다는걸 직감했습니다.

나는 회의를 마칠 때까지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적들이 훼방을 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종락을 시켜 적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게 하였습니다. 편지내용은 내가 불러주었습니다. 김일성군의 군영에 들어와보니 현재 사령부는 백두산쪽으로 이동해가서 부재중이다, 거기까지는 몇 백리 길이기 때문에 연락을 취하자면 얼마간 시일이 걸릴 것 같다, 지금 김일성휘하의 한 부대를 만나 사령부와 연계를 맺을 교섭을 하고 있으니 그렇게 알고 차후 통보를 보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주기를 바란다고.

우리는 이종락의 필적으로 된 그 편지를 우리를 포위하고 있던 적들에게 보내고 여유작작하게 회의를 계속하였습니다.

하루는 내가 이종락에게 몸도 좋아지고 손도 매끈해진걸 보니 괜찮게 지내는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일본사람들한테서 돈을 받아 잘 산다고 하면서 자기가 잘 살게 된 것은 나의 덕택이라고 하였습니다. 김일성이 큰 인물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나 일본사람들이 자기네 쪽으로 돌려 세우려고 김일성을 잘 알거나 지난 날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을 데려다가 높은 대우를 해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같은 것들도 그렇게 높이 대우해주는데 김일성이 돌아만 선다면 일본사람들이 여북 높은 대우를 해주겠는가, 그들김일성장군이 돌아서면 어떤 벼슬이든지 다 주겠다고 한다, 조선군 사령관자리도 좋고 또 다른 벼슬자리도 좋고 달라면 다 주겠다, 조선군 사령관을 하면서 조선을 관할하든지 또 여기에서 한자리하면서 만주를 관할하든지 뜻대로 하라, 어느 쪽이든 관할하면서 일본과 합작만 해주면 좋겠다, 앞으로 태평양서부연안으로는 불피코 미국의 세력이 뻗쳐와서 일본도 조선도 만주도 다 삼키자고 할 터인데 아시아사람들끼리 손을 맞잡고 미국을 견제하고 쳐 물리쳐야 아시아의 살길이 열린다고 말했다고 하였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아주 교활하였습니다. 그들이 이종락을 들여보낼 때 「귀순」하라는 말을 해서는 통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이른바 「합작」이라는 타협안을 가지고 의논해 보라는 과업을 주어 들여보낸 것입니다.

미국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아시아사람들끼리 합작하자는 것은 일본사람들이 한때 요란스럽게 표방한 대아시아주의의 표현입니다. 일본의 주도하에 아시아사람들을 위한 번영하는 아시아를 만들자는 것이 대아시아주의라고 일본사람들이 굉장하게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곧이들을 머저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대아시아주의는 아시아에 대한 일제의 독점야욕을 가리우기 위한 하나의 방패였습니다.

제국주의자들은 남을 침략할 때마다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어 대의명분으로 내세우는 법입니다. 그들은 야마도족이 우월함을 고창하면서 세계는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집안이라는 「팔굉일우」의 사상을 고취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조선을 침략할 때에는 『독립할 능력이 없는 민족을 일본이 맡아서 이끌어주며 보호』한다고 했습니다. 만주를 칠 때에는 「자위권의 발동」을 구실로 삼았고 만주국을 날조할 때에는 「5족협화」와 「왕도락토」건설을 떠들었으며 중일전쟁을 도발할 때에는 폭도화된 중국에 벌을 준다는 「폭지응징」이니, 「갱생신지나건설」이니, 「일, 만, 지 3국의 결합」이니 하는 따위의 구호를 내 들었습니다.

이종락이 대아시아주의라는 것을 자꾸 설교하기에 나는 만일 우리가 일본에 쳐들어가 철권으로 일본사람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놓고 자, 이제부터 조선의 주도하에 대아시아주의를 펴겠다고 선언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그래도 일본이 대아시아주의를 정당한 것이라고 하면서 받아들일 것 같은가고 물었습니다.

나는 또한 당신이 일본을 무적필승의 존재로 묘사하는데 그렇다면 왜 그들은 몇 해째 조선인민혁명군을 군사적으로 제압하지 못해 그토록 골머리를 앓는가, 일본이 무적필승이라면 왜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우리를 평정할 것이지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거간꾼으로 내세워 가지고 유치한 「귀순공작」을 벌이는가고 하였습니다.

이종락은 그 물음에도 온전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거야 일본사람들이 김일성이라는 사람을 아껴서 그런거지 다른 것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강승약패는 어쩔 수 없는 세상이치인데 승산도 없는 항전은 그만두고 일본사람들의 제의를 받아들이라고 하면서 지금 남패자주변에만도 3개 사단 병력이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쳐놓고 있는데 우리가 항전을 포기하지 않는 경우에는 독가스나 무슨 신식고성능대포로 우리를 멸살시킬 것 같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종락에게 일본사람들이 조선군 사령관이 아니라 총리대신을 시킨대도 우리는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다, 독가스를 뿌리고 고성능대포도 쏠테면 쏘라고 하라, 그러나 조선인민혁명군은 굴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이종락이한테서 한영애의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일본사람들이 나에 대한 「귀순공작」을 준비할 때 한영애도 점을 찍어두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영애가 단연코 반대했기 때문에 동원시킬 수 없었습니다.

이종락은 한영애가 신의주감옥에서 자기와 함께 징역살이를 했는데 성주에 대한 의리가 보통이 아니더라고 했습니다. 자기도 일본사람들의 지령을 받고 한영애를 「귀순공작」에 끌어 넣으려고 말꼭지를 뗐다가 본전도 못찾고 면박만 당했다고 하였습니다. 한영애는 나는 그따위 너절한 일은 하지 않는다, 당신도 안하는 것이 좋겠다, 김성주가 그따위 「귀순」놀음에 넘어갈 사람인가고 하면서 되게 비판을 주더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영애를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그 대신 이종락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보라, 한영애같은 여자도 지조를 지켜 전향을 안하고 버티는데 종락이 당신은 혁명을 집어 던진 것만으로도 성차지 않아 일본놈들 밑에서 개질을 하고 있는데 창피하지 않은가, 사람이 변해도 너절하게 변했다고 꾸짖었습니다.

나를 설복하는 것이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이종락은 대원들에게 낚시를 걸려고 하였습니다. 우리 경위대원 한 사람을 만나서 부모가 있는가, 가족들이 그립지 않은가고 하면서 일본사람들이 전에는 유격대를 사로잡으면 다 죽였지만 지금은 살려줄 뿐 아니라 신세를 고칠 수 있게 해준다, 부모 곁에 가서 고운 색시를 얻어 안락한 생활을 하고 싶거든 자기와 함께 가자고 구슬렸습니다.

나는 그런 통보까지 받고 나서 일본사람들의 심부름을 마지 못해 하는 박차석과 달리 이종락은 조국과 민족도 안중에 두지 않고 의식적으로 적들에게 복무하는 일제의 충견이며 심복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우리 대원들의 한결같은 요구에 따라 사령부는 이종락을 민족반역자로 규정하고 그를 처형하는데 동의하였습니다. 이종락의 시체위에 동창생이건 누구건 배신자는 이렇게 처단한다는 내용의 경고장을 덮어두었습니다.

내가 남패자에서 이종락과 박차석을 만나던 사연을 말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은 소설같은 이야기라고들 합니다. 그때의 사연을 그대로 엮으면 정말 훌륭한 소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찍이 혁명의 길에서 생사운명을 같이하기로 맹세한 사람이 배신자가 되어 나타나 일본의 강대성을 선전하고 우리의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역설하면서 혁명군사령관을 「귀순」시키려고 하였으니 그런 심각한 사실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겪은 수많은 체험 중에서도 아주 특이한 체험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두 사람을 만나고 나서 기분이 몹시 나빴습니다. 주소성명도 모르는 생면부지의 인물이 그런 공작임무를 받아가지고 왔다면 그렇게까지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도 「ㅌ.ㄷ」를 결성할 때에는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런 약속을 할 때 같아서는 누구도 변절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장 아끼고 신임하던 사람들 가운데서 배신자가 생기었단 말입니다.

혁명이 상승할 때에는 혁명투쟁에 참가하는 사람들도 많고 혁명대오에서 동요분자나 탈락분자 같은 것들이 잘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세가 혁명의 편에 불리해지고 곤난이 중첩되게 되면 동요분자도 생기고 도주자도 생기고 투항분자도 생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꾼들은 정세가 준엄하고 나라의 형편이 어려운 때일수록 사람들에 대한 사상사업을 잘 해야 합니다. 물론 사람의 사상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사상이 어떤 사상이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다니지 않는 이상 혁명대오내에서 혁명적 신념을 잃어버린 동요분자나 패배주의자들을 골라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사상은 사업과 생활을 통하여 어느 구석에서든지 꼭 노출되기 마련입니다. 일꾼들은 매개 사람들의 준비정도와 사상의식상태에 맞게 혁명적 신념을 공고히 하기 위한 사상사업을 잘 해야 합니다.

교훈은 무엇인가? 사상이란 신념화되어야지 순수한 지식만으로 남아 있어 가지고서는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념화되지 못한 사상은 변질되기 쉽습니다. 사상에 변질이 생기면 이종락이나 박차석과 같은 인간이 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정당하다고 보는 사상을 접하면 그것을 철저히 신념화해야 합니다. 풍부한 지식도 혁명적 신념이 안받침되어야 새 것을 끝까지 개척해가는 참다운 창조력으로 될 수 있습니다. 눈은 현실을 보지만 신념은 미래를 봅니다.

신념이 무너지면 정신이 죽고 정신이 죽으면 인간자체가 무용지물로 됩니다. 인간의 도덕의리나 양심도 다 신념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신념이 없는 사람들은 양심도 지닐 수 없고 도덕의리도 지킬 수 없으며 인간적인 체모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신념이 강할 때 자신의 삶도 훌륭하게 개척해 나갈 수 있고 동지들을 위해서도 처신을 똑바로 할 수 있으며 당과 혁명,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도 참답게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충실성은 신념화, 양심화, 도덕화, 생활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김정일동무의 주장입니다. 심오한 철학입니다. 나는 충실성을 신념화, 양심화, 도덕화, 생활화하여야 한다고 한 김정일동무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