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광복회기관지 「3.1월간」 창간호에는 『천도교 상급영수 모씨! 우리 광복회대표를 친히 방문』이라는 제목의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는 내외에서 유력한 군중적 지반을 가지고 있는 천도교위원 모씨가 끓어 넘치는 애국열정을 가지고 친히 조국광복회대표인 나를 방문하였다는 것과 그가 우리의 조국광복회강령과 일체 주장에 찬동하였으며 아울러 천도교청년당원 100만명을 조선독립전선에 출동시킬 의향을 표시하고 장차 조국광복회와 보다 긴밀한 연계를 취할 데 대하여 굳게 약속하였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 기사의 주인공 모씨가 박인진도정이다. 비밀보장을 위하여 모씨라고 서술할 수밖에 없었던 몇줄짜리 보도기사의 뒤에는 옹근 한 책을 써도 다 담기 어려운 깊은 사연이 숨겨져 있다. 박인진도정이 우리를 만나기 위하여 백두산밀영으로 찾아오게 되기까지의 내막을 이해하자면 같은 호에 실린 피끓는 청년애국용사들이 우리 부대에 속속 입대한 데 대한 기사와 연관시켜 보아야 한다. 그 기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조국서북부 각지의 피끓는 청년애국용사들은 떼를 지어 매일 7∼8명씩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사장부대에 가입하고 있다. …이들은 조선국내의 지세와 도로 및 각지의 정형을 잘 알기 때문에 무장대의 전위로서 국내출입의 선두에 설 것을 지원하였다.』

우리가 국경지대에 나와서 두번째였던지, 세번째였던지 신창동마을에 갔을 때었다. 그 마을 청년 몇이 우리를 찾아와서 참군을 청원하였다. 국경지대의 입대지망자들인 것만큼 신체조건에 이상이 없으면 다 받아주도록 하라고 일렀더니 이동학은 다른 청년들은 다 합격시킬 수 있음직한데 풍산출신의 「천도쟁이」만은 고려해야 할 것 같다 하면서 통일전선도 분수가 있지 천도교를 믿는 종교쟁이야 어떻게 함부로 혁명군에 입대시킬 수 있겠는가고 머리를 흔드는 것이었다.

나는 이동학을 시켜 마을사람들이 「천도쟁이」라고 부른다는 그 청년을 사령부로 데려오게 하였다. 비록 허줄한 옷을 걸치었으나 촌티를 벗은 꽤 멀쑥한 청년이 이동학을 따라 당돌한 걸음걸이로 내앞에 나타났다. 인상적인 것은 쌍까풀진 눈과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금이발이었다.

그는 풍산군 천남면 슬리라는 고장에서 영북지방의 천도교도정 박인진과 한마을에서 살면서 그의 교육과 영향을 받아 천도교 청년당원이 된 이창선이었다. 박인진의 총애를 받는 수제자라는 사실로 하여 그는 경찰들의 부단한 감시와 미행속에 들게 되었다. 스승 박도정은 풍산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여러해 동안 옥살이를 한 요시찰인이었다. 왜경들은 도정네 집 처마밑에 순찰함을 달아놓고 주에 한번씩 순찰을 등대고 정기적으로 찾아와 그의 동향을 탐지하였으며 한달에 한번씩은 수석경찰이 직접 다녀갔다. 그 달갑지 않은 정기적인 순찰과 무시로 되는 감시는 이창선에게까지 미치었다. 도정의 집에 내려오는 경찰들은 그의 집을 그저 스쳐 지나는 때가 없었다. 이창선은 스승의 동의밑에 왜경의 감시와 성화를 덜 받을 수 있는 장백땅에 옮겨 앉고 말았다는 것이다.

내가 그래서 이창선의 입대를 거침없이 승인하자 이동학은 불공정한 판결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볼이 부어 말하였다.

『사령관동지, 종교쟁이가 빨치산을 하면 얼마나 잘하겠습니까. 근로청년들도 디글디글한데 하필이면 저런 천도쟁이를 받아들여가지고 우리 대오의 구성성분을 어지럽힐 필요가 있습니까?』

나는 농담절반, 진담절반의 말로 이동학을 나무랐다.

『동무의 눈은 알다가도 모르겠소. 이제순이가 인재라는 것은 제꺽 알아보았는데 저 사람이 보배라는건 알아보지 못하니말이요. 사팔뜨기가 아닌데 어떤 때는 왕청같이 비뚤어지게 보거든.』

『마르크스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종교는 아편이라구요. 저따위 천도쟁이가 보배는 무슨 보배란 말입니까? 우환단지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습니다.』

종교인에 대한 그의 편견은 확실히 지나쳤다.

나는 진지하게 그를 설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종교를 아편이라고 한 마르크스의 명제를 극단적으로, 일면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 명제는 종교적 환상에 유혹당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지 종교인 일반을 배척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애국적 종교인이라면 그가 어떤 사람이건 다 포섭하고 손을 잡아야 한다, 우리 유격대는 항일구국을 자기의 첫째가는 사명으로 삼고 있는 애국적 무장력이며 노동자, 농민만이 아니라 전체 조선민족을 위하여 싸우는 인민의 군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유격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우리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들이 핵심적 역할을 하는 무장력이라고 하여 다른 계층이나 세력을 배제하자는 것은 아니다, 설사 종교인이라 하더라도 그가 원한다면 주저 없이 우리의 무장대오에 받아들여야 한다, 동무는 지금 우리가 어떤 호박을 잡았는지 아직 모르고 있다, 저 청년의 줄을 타면 갑산, 풍산, 삼수 지방의 천도교도들 속에 조국광복회의 씨앗을 뿌릴 수 있고 나아가서는 영북의 광활한 대지를 우리 세상으로 만들 수 있다, 이제 두고 보면 저 청년의 가치를 알게 될 테니 그를 잘 대해주고 귀중히 보호해주라고 말해주었다.

이동학이 내 말을 어떤 심정으로 받아들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신창동사람들이 달아준 「천도쟁이」라는 별명은 이창선이 입대한후에도 그냥 그를 따라다니었다. 그 별명에서 풍기는 것은 동지적 애정이 아니라 비우호적인 조롱기와 경멸이었다. 이창선은 그 별명을 들을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며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었다.

한번은 밀영에서 신입대원들을 축하하는 오락회가 열린적이 있었다. 구대원들과 신대원들이 엇바꾸어가며 출연하는 오락회였는데 아주 흥미가 있었다. 그날 구대원들은 신대원들을 위하여 있는 밑천을 다 털어놓았다. 신대원들도 흥이 나서 연방 앞에 나섰다. 그런데 모처럼 마련된 오락회가 소개자의 실언으로 해서 그만 파투가 되고 말았다. 이창선이 나설 차례가 되자 소개자는 『다음은 신창동에서 새로 입대한 〈천도쟁이〉동무의 노래를 들어봅시다.』 하는 엄중한 실수를 하였다. 비위가 상한 이창선은 그 맹랑한 소개자의 말을 듣자 노래를 부르지 않고 퇴장해버리었던 것이다.

이 일로 하여 부대에서는 여론이 분분해졌다. 비난의 화살은 오락회책임자에게 집중되었다. 구대원도 아닌 신대원에게 「천도쟁이」라니 무슨 당치않은 소리인가, 사람을 깔보고 조롱해도 분수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창선을 쬐쬐한 인간이라고 욕하였다. 별명을 들으면 들었지 지명을 당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지 않고 퇴장해버리면 오락회는 어떻게 되는가, 혁명군대가 되겠다고 집을 떠난 대장부가 그만한 노염도 삭이지 못하고서야 무슨 사내인가, 싸움꾼이 되기는 글렀다, 옹졸하다고 비난하였다.

오락회책임자와 이창선을 두고 벌어진 상반되는 논의는 결국 일반적으로는 종교인들, 구체적으로는 천도교도들을 어떻게 보고 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번져갔다. 나는 부대의 전체 지휘성원들과 병사들 앞에서 천도교와 관련된 우리의 견해와 입장을 명백히 해설해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천도교는 우리 나라에만 있는 고유한 민족종교이다.

최제우가 천도교를 동학이라고 명명하여 「서학」(천주교)과의 차이를 명백히 한 것만 보아도 이 종교가 가지고 있는 민족적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천도교는 그 기본 사상과 이념에서 애국적이고 진보적인 종교이다. 천도교가 내세운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구호만 보아도 그것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천도교도들은 수 십년동안 그 구호를 들고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고 만백성이 복락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려고 투쟁해왔다. 그런 민족종교를 종교라는 한가지 이유로 무작정 배척하며 그 교의 신도들을 「천도쟁이」라는 말로 모욕해야 하겠는가.

천도교이념의 애국애민성과 천도교인들의 애국투쟁에 대하여 해설을 해주고 천도교인들을 대하는 데서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적 입장과 통일전선정책에 대하여 다시금 명백히 주지시킨 다음부터 이창선에게서는 「천도쟁이」라는 별명이 없어지고 그대신 「김빠이」라는 새로운 호칭이 생겨났다. 「김빠이」란 금이발쟁이라는 뜻이다. 「김빠이」란 별명이 유격대오안에서 이름처럼 고착되어버리자 본인도 그에 맞추어 자기의 성을 「김」가로 바꾸고 이름은 「갑부」로 고쳐서 자기를 「김갑부」라고 하였다. 훗날 그는 정치공작을 하느라고 돌아다닐 때에도 그 가명으로 활동하였다.

이창선은 농촌태생이었지만 매우 유식하고 총명하였으며 문화적소양도 높은 편이었다. 특히 가무와 만담 같은데 장끼가 있어서 오락회가 벌어질 때면 독판을 치다싶이 하였다. 푸접이 또한 좋아 처음 대하는 사람들과도 쉽게 사귀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소영웅주의적 기질이 있었다.

그가 입대한지 한두달밖에 안되던 때의 일이다. 한번은 부대정치부에서 조직과장사업을 맡아보는 김평이 나를 찾아와서 「김빠이」가 자기를 중대정치지도원이상의 자리에 승진시켜줄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하더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 당시 「김빠이」네 중대정치지도원의 정치이론실무수준이 그닥 높지 못하였다. 일찌기 천도교청년당 간부사업까지 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유식한 「김빠이」로서는 자기보다 못해 보이는 상급의 지도를 받기가 어지간히 뻐근했던 모양이다.

나는 이창선을 불러다 놓고 그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중대정치지도원의 장점들과 공적들에 대하여 알려주고 필요한 조언도 주었다.

동무는 앞으로 중대정치지도원정도가 아니라 더 주요한 위치에서 사업할 수 있다, 그러나 100리길도 첫걸음으로 시작되고 대학생도 소학생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처럼 유능한 군사정치일꾼도 기초견습과 훈련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동무는 지금까지 조선인민혁명군 대원으로서의 견습단계를 거쳤다, 이제부터는 유능한 정치공작원으로 되기 위한 단계를 거쳐야 하겠다, 나는 입대시킬 때부터 동무에게 앞으로 천도교인들과의 정치공작을 맡겨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동무는 1개 중대인원정도가 아니라 수 백명, 수 천명 혹은 수 만명의 천도교인들을 조국광복회 대열에 이끌어 들이고 지도하는 정치공작원이 되어야 하며 앞으로 더 큰 정치일꾼이 되어야 하겠다, 사령부 조직과장 김평과 선전과장 권영벽동무들을 개별담당 강사로 붙여주겠으니 정치이론도 배우고 군중공작방법과 지하사업경험도 터득하라, 가장 중요한 것은 인민적 품성을 배우는 것이다, 겸손성은 가장 훌륭한 미덕으로 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혁명선배들만이 아니라 동년배들과 후배들도 모두 스승으로 간주하고 일생동안 배우는 학생의 입장에 서게 되면 모든 사람이 동무를 존경하고 따르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얼마후 우리는 그를 전투중대에서 소환하여 사령부 정치부에 옮겨놓았다. 이때로부터 「김빠이」는 대내에 있을 적에는 7연대 선전간사로 사업하였고 대외에 나가서는 천도교방면담당 정치공작원으로 활동하였다. 후에는 선전간사사업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전문적인 정치공작원이 되었다.

이창선은 박인진을 비롯한 북선지구의 수많은 천도교인들을 조국광복회조직망에 흡수하는 데서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우리는 그를 통하여 박인진과 천도교내부형편에 대한 사전요해를 하였고 또 천도교도들과의 접촉도 하였다.

박인진은 천도교단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인물이었다.

도호를 문암으로 쓰고 있는 박인진은 1909년에 입도한후 천도교의 여러 급의 교직을 맡아보다가 1932년에 지원포의 도정으로 되었다.

그 당시 천도교는 전국적으로 29개의 포를 설치하였는데 주로 풍산, 삼수, 갑산, 장백 등지를 포괄하였던 지원포는 전국의 천도교포들중에서 가장 큰 포조직의 하나였다고 한다. 박인진은 일명 영북도정이라고도 불리웠다.

박인진의 아버지는 전봉준휘하의 남접군에서 갑오농민전쟁의 승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싸운 동학당의 한 성원이었다. 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난 다음 수십만을 헤아리는 그 전쟁의 관련자들에 대한 대학살이 시작되자 그는 고향을 하직하고 머나먼 전라도에서 영북땅으로 피신하였다.

박인진은 부친이 옛말처럼 들려주곤 하던 천도교조들과 부친의 저항적인 생애에서 자기의 인생행로를 찾았다.

3.1인민봉기는 그의 의지와 신념을 검열한 최대의 시련이었다. 그는 풍산에서 만세시위를 조직하고 시위대열의 맨 앞장에서 1, 0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관청에 돌입하다가 몸에 적탄을 받고 중상을 당하였다.

박인진은 3년동안 함흥과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중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그 가혹한 옥고도 그의 심장 속깊이 뿌리박혀있는 신앙심과 저항의지를 말살해버리지는 못하였다. 출옥후 박인진은 독립군들과 손을 잡고 3∼4년동안 여러 지방을 떠돌아다니며 그들을 후원하는 사업에 몸을 깊숙이 잠그었다. 그러나 독립군이 별로 맥을 추지 못하고 타국땅으로 쫓겨가게 되자 한숨과 눈물 속에 그들을 바래주고 왜놈들의 꼴을 덜 보면서 살수 있는 고장을 찾던 끝에 풍산군 천남면의 깊은 산골로 솔가이주 하여 전교실도 꾸려놓고 야학방도 차려놓았다. 그리고 이창선을 비롯한 마을사람들에게 천도교 교리도 선전하고 애국정신도 주입하였다. 하지만 그 산골도 완전한 피신처로는 되지 못하였다. 주말과 월말마다 어김없이 진행되는 불청객들의 정기적인 가택방문은 그로 하여금 풍산땅을 뜨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박인진은 장백현 신거리로 이주하였다.

이창선은 인간 박인진을 파악하는데 참고로 될 수 있는 흥미 있는 일화도 한가지 들려주었다.

박인진이 29살의 노총각으로 이웃동네에 선보러 갔을 때의 일이었다. 양측에서 맞선을 보고 난 다음 중매꾼 노파는 총각의 의향을 물었다. 박인진은 반대가 없다고 대꾸하였다. 그런데 장인될 영감은 곰방대만 뻐금뻐금 빨면서 아무런 의사표시도 하지 않았다.

『임자 나이가 24살이 옳기는 옳은가?』

영감이 한참만에 싸움이라도 걸듯 퉁명스럽게 내던진 말이었다.

평생 거짓말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 고지식한 박인진은 중매꾼이 자기의 나이를 5살이나 줄여서 24살이라고 선통한 줄도 모르고 사실대로 29살이라고 대답하였다. 중매꾼노파의 입에서는 비명소리가 튀어나왔다.

총각의 나이 20살만 넘어도 병신이나 시라소니라는 의심을 받던 조혼의 시대이니 29살이라는 대답을 듣고 장인 될 영감이 오만상을 찌프릴 만도 하였다. 박인진은 집이 너무 가난했던 탓에 장가를 제때에 가지 못하고 노총각이 되었다.

처녀의 아버지는 박인진에게 폭탄 같은 선언을 하였다. 30살이 다된 노총각한테는 딸을 줄 의향이 없다는 것이었다.

박인진은 눈앞이 아찔해졌으나 용기를 가다듬고 열띤 목소리로 내게 코가 없는가 눈이 없는가, 도대체 주인장이 나를 타발하는 까닭이 뭔지 어디 좀 들어보자고 따지고 들었다.

상대방은 몹시 난처해하며 뭐 별다른 이유는 없고 다 좋은데 임자나이가 너무 많은 것이 흠이다, 우리 딸애보다 11살이나 이상인데 그걸 무시하고 내가 혼약을 허락하면 귀한 딸자식을 길러 늙은 홀아비한테 주었다는 망측한 소문이 날것 같아서 그런다고 하였다.

박인진은 그런 대답을 듣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유가 그것뿐이라면 나는 기어코 이 집 딸에게 장가를 들어야겠다, 나이는 많을망정 녀자손목 한번 쥐여본적없는 숫총각인데 어떻게 홀아비대접을 받는단 말인가, 혼약을 받아내기 전에는 절대로 물러가지 않겠다, 정 허락치 않으면 딸을 자루 속에 홀쳐넣어 메고라도 갈테니 그리 알고 어서 시원한 대답을 달라고 강짜를 썼다.

그때 처녀의 오빠가 빙그레 웃으며 우리 여동생에게 정 장가들 생각이 있으면 돈을 1,000원만 내라고 넌지시 귀띔하였다. 돈 1,000원이면 20마리이상의 소값과 맞먹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송아지 한 마리도 없는 박인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금이었다. 하지만 박인진은 시치미를 떼고 딸만 주면 돈을 내겠다고 장담하였다. 노총각의 얼굴을 관상쟁이처럼 유심히 살펴보던 주인장은 마침내 약혼을 허락하였다.

박인진은 노총각의 신세를 면하고 그 집 사위가 되었다. 물론 1,000원 돈은 문제로도 되지 않았다. 돈소리는 신랑감의 속대가 어떤지를 중떠보기 위한 하나의 시험거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확실히 박인진도정은 주대가 있고 자존심이 세고 결패스럽고 투지가 강한 사람이라고 짐작되었다. 「김빠이」와의 담화를 통하여 우리가 파악하게 된 박인진의 인간상에는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내는 그 무엇이 있었다.

이창선을 천도교방면담당 정치공작원으로 파견하기 위한 준비가 갖춰진 다음 나는 그에게 우리와 천도교인들은 다같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조선사람들이며 「척왜」와 「보국안민」을 최우선적인 목표로 삼고 투쟁해온 빈천민중의 벗들인 것만큼 서로 손을 잡고 합세하여 단합된 힘으로 일제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과 가까운 장래에 양측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진지하게 협상했으면 하는 희망을 표시한 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여 박인진에게로 떠나 보냈다. 「김빠이」는 사흘후 밀영에 돌아왔다.

박인진은 합세하여 반일전을 전개하자는 우리의 제의에 동감을 표시하면서 협상을 위하여 자기들에게 대표를 파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나는 박도정과의 협상마당에 나갈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몇가지 피치못 할 사정이 나로 하여금 밀영을 떠날 수 없게 하였다. 그때로 말하면 미나미와 우에다사이의 「도문회담」이 있은 직후였다. 적들의 「동기대토벌」작전의 개시로 하여 인민혁명군 앞에는 험악한 난국이 조성되었다. 「토벌」공세와 때를 같이하여 수많은 밀정들이 우리를 해치기 위해 혈안이 되어 돌아 쳤다.

전우들은 새로 창설된 밀영의 운명을 위해서나 나의 신변안전을 위해서나 사령관이 직접 협상마당에 나가는 것은 삼가해야 한다고 하면서 나의 출발을 한사코 막아나섰다. 밀정이 우리 사령부근처에까지 기여든 사건이 발생한 직후였으므로 모두가 신경이 예민해있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김평과 이창선을 박인진과의 협상에 파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김평은 어릴적부터 못해본 일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으며 무슨 일이건 손쉽게 해제낄줄 아는 능란한 실무일꾼이었다. 그는 한문에 밝은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 5∼6년간이나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한 덕 이었을 것이다. 커서는 학교에서 정규교육을 받았고 인민혁명군에 입대한 후에는 유격대의 지휘관들을 양성하는 수영학교에서 군정교육도 받았다. 김평은 교원경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창선과 함께 김평이 천도교인들과의 협상대표로 물망에 오르게 된 것은 그의 천도교방면에 대한 지식과 정치사업경험이 많이 고려된 덕이라고 볼 수 있다.

박인진과 우리 대표들 사이의 면담은 장백현 17도구 왕가동에 있는 천도교 장백종리원 원장 이전화의 집 안방에서 진행되었다.

김평은 먼저 상대측에 우리의 서명날인이 있는 대표신임장을 보여주고 박인진에게 「조국광복회10대강령」과 「조국광복회창립선언」을 전한 다음 천도교세력과의 제휴문제를 놓고 진지한 협의를 시작하였다.

박인진은 일제를 몰아낸 후에 우리가 어떠한 정권을 세우려고 하는가에 대하여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구한국정권과 같은 왕권복귀도 반대하였고 러씨야땅에 수립된 소베트식정권도 반대하였으며 「망명정부」라는 평판을 받고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합법화하는 형식의 정권을 만드는 것도 반대하였다.

김평이 「조국광복회10대강령」 제1조를 놓고 전체 조선인민의 총의에 의하여 민주주의적 방법으로 선거된 인민의 대표들의 대의제에 기초한 인민의 정권을 수립하려 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자 박인진은 10대강령에 명기한대로 민중정권을 세운다면 절대적으로 찬성할 수 있는데 정작 나라가 광복되고 정권을 세워야 할 때가 되면 약속을 어기고 소련식의 공산정권을 세우지 않겠느냐는 우려와 의심을 기탄없이 털어놓았다.

그 당시 소련에서는 반당분자들과 적대분자들에 대한 숙청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것이 이웃나라들의 민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김평은 광복 후 항일무장투쟁을 하던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는다 하더라도 소련식의 공산정권을 세우지 않으리라는 것과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 명시된 바와 같이 독립된 조국땅에 우리가 세우게 될 정권은 민주주의를 최대한으로 구현한 정권으로 될 것이며 민중자신이 주인이 되어 정치를 하는 정권, 노동자, 농민뿐 아니라 각계각층의 광범한 애국역량의 이익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그러한 인민의 정권으로 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그 주장의 진실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우리가 간도의 유격구들에서 소베트를 인민혁명정부로 개편하던 때의 이야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박인진은 조국광복회 10대강령과 창립선언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없다, 그 강령과 선언이 선전이 아니라 당신들의 진심이고 확고부동한 실천의지라면 우리 천도교인들도 반일민족통일전선에 참가할 용의가 있다, 하지만 참가여부를 결정짓는 중대한 일은 자기혼자서 단독으로 결심하고 처리할 가벼운 일이 아니니 동덕들과도 협의하고 천도교중앙의 교령인 최린과도 협의한 후에 대답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최린을 만나기 전에 자기가 직접 밀영을 방문하여 나와의 회견을 실현할 수 있게 해줄 수 없겠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김평은 그 청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박인진은 우리와 손을 잡겠다든가 말겠다든가 하는 말을 서뿔리 내뱉지 않았다. 조건부를 내걸고 어정쩡한 대답만 하였다. 손을 잡는가 마는가 하는 것은 나를 만나본 다음에 결정지으려는 것이 분명하였다. 어쨌든 회담은 매우 건설적이었다.

다음날 박인진은 장백종리원산하의 남녀교도들을 50여명이나 불러다가 조선인민혁명군 대표들을 환영하는 큰 잔치판을 펼쳐놓았다. 돼지도 잡고 떡도 쳐서 우리 대표들을 환대하였다. 천도교 청년당원들로 보초를 세워놓고 오락회까지 벌였는데 그 가무들이 한결같이 애국심과 투쟁열을 고취하는 것들이여서 김평은 천도교도들의 애국정신에 새삼스럽게 감복되었다고 하였다. 집주인인 이전화는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사살하기 위하여 할빈으로 떠날 때에 그와 동행한 우덕순이 불렀다는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들을 만났도다…」하는 노래를 어찌나 비장하게 불렀던지 모두가 다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뿌렸다는 것이다.

박인진이 우리 밀영을 방문한 것은 1936년 초겨울이었다. 그가 데리고 온 사람들 가운데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인물은 이전화이다.

그들은 모두가 검정두루마기차림새였다. 그 두루마기들에는 한결같이 고름대신에 단추고리가 달렸는데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두개를 채우게 된 고리었다. 천도교도들은 그처럼 유표한 단추고리를 단 두루마기를 입는 것으로 자기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는 복식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박인진은 나를 만나자마자 자기를 밀영으로 초청해준데 대하여 진심으로 되는 사의를 표시하였다.

『장군을 만나뵙고 싶던 소망이 이토록 수월하게 이룩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항일독립전에 총 한 자루, 단돈 한 잎 보탠적 없는 우리들이 부끄럽기 그지없소이다.』

그 말만 들어보아도 박인진이 무척 겸손하고 예절바르고 양심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우리의 진정을 이야기해주었다.

『우리는 돈이나 물건보다 마음을 더 귀중히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돈 몇 잎이나 무기 몇 자루를 보태주었는가 하는 것 보다 나라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더 중하게 여깁니다. 나는 도정님이 지금껏 애국심을 변함없이 간직하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고결한 마음이 우리에게는 몇 백배나 힘있는 보탬으로 됩니다. 이 어수선한 세월에 애국의 지조를 고수하고 있는 도정님과 같은 분이 계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큰 힘이 되고 기쁨으로 됩니다.』

박인진은 『그건 과찬이올시다. 나는 그런 인사를 받을만한 체면이 못됩니다.』하고 말하였다. 일본사람들의 악선전에 속아서 비록 한때나마 광복성업을 위해 매진하는 인민혁명군을 「비적단」이라고 오해한데 대하여 그는 진심으로 사과하였다.

그래서 나는 서로 잘 모르고 지내면 곡해도 생길 수 있고 적의도 생길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허물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앞날의 일이다, 과거는 백지로 만들고 우리 다같이  뜻을 합쳐 앞날에 대해서만 생각해보자, 우리 대표들에게서 들었겠지만 우리는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며 왜적을 미워하는 각계각층 동포들을 다 집결하여 거족적인 항일대전을 벌이기 위하여 지난봄에 조국광복회를 내왔다, 그 강령에 반대가 없다면 양심적인 천도교인들도 항일대전에 합류해달라, 단결하여 싸워야 승리하고 단결하지 못하고 사분오열 되면 조국의 광복도 이룰 수 없고 백전백패한다는 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쓰라린 교훈이다, 만일 갑오농민전쟁의 최전성기에 호서지방의 북접군을 총지휘하고 있던 최시형이 호남의 남접군을 지휘한 전봉준의 연합제기를 제때에 받아들이고 서울진격을 방해해 나서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얼마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동학당란이 실패로 끝난 주요한 원인의 하나는 각지, 각계의 모든 애국역량이 일치단결하여 싸우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제멋대로 싸웠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반일성전을 승리로 결속 짓고 광복을 이룩하려면 전 민족이 일치단결하여 단합된 힘으로 싸워야 한다, 민족단결은 반일에 민족의 총력을 기울일 수 있게 하는 가장 현명한 방책이며 민족대승의 길이다, 천도교도들 혼자만의 힘으로는 「척왜」에 성공하고 「보국안민」을 도모할 수 없다, 우리 조선인민혁명군도 혼자의 힘만으로는 조선독립을 이룩할 수 없다, 다른 반일애국역량도 다 묶어 세워야만 승산을 내다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서로가 민족대단결을 꼬는 단심줄이 되어 조국광복회두리에 뭉치자고 하였다.

박인진은 조국광복회 창립선언과 강령도 나무랄데 없이 훌륭하고 장군의 의견도 천만번 지당하니만큼 반드시 천도교중앙의 최린을 설득시켜 전국의 300만 교도들이 단꺼번에 모두 조국광복회에 가입하도록 해볼 생각이라고 말하였다. 민주주의중앙집권제원칙이 엄하게 준수되고 있는 천도교단에서는 중앙에 절대적인 재결권이 부여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였다. 천도교중앙의 상층이 부패타락, 변질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나는 자기의 견해를 박인진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렇게 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최린에게는 큰 기대를 걸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의 최근동향이나 써내는 글들을 보면 천도교 역대 교조들과는 판판 다른 길을 걷고있는것 같다, 그는 동학이념도 배반하고 민족도 배반하고 원수들의 권력시녀로 전락되어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박인진은 어떻게 최린에 대해서까지 그처럼 잘 알고 있는가 고하면서 실상은 우리 천도교도들 중에도 최린이 이상스럽게 번져가고 있는데 대하여 좋지 않게 보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며 자기도 역시 그를 의심한다고 고백하였다.

최린은 3.1독립선언서 작성에 관계한 사람이었다. 그는 3.1운동의 발발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그때문에 감옥맛도 보았다. 그러나 감옥에서 풀려나온후 3세교조 손병희의 천거를 받아 천도교교령의 지위에 올라앉은 다음부터 그의 인생행로에서는 「방향전환」의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천도교의 최고강령으로 되는 「후천개벽」으로 「지상천국」을 이룩하려면 세계만방을 순방하여 동서방의 정국도 살펴보고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개혁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해동안이나 세계일주를 하고 돌아와서는 현상황에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예속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다, 일본의 세력은 세계적 판도에서 나날이 확대되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천도교도들은 일본과 백해무익한 충돌을 할 것이 아니라 「자치운동」이나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설교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천도교를 보호하려면 참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 최린의 입에서 흘러나온 주장이었다.

『최린이 이처럼 총독의 둘러리노릇까지 하면서도 그 모든 것이 천도교를 위하고 천도교동덕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해왔기 때문에 절대다수의 교인들은 그 말이 위선이라는 것을 감촉하지 못했지요. 저도 그렇게 믿고 최린을 여전히 우상화했는데 작년여름에 이전화종리원장이 서울 가서 그 사람을 만나보고 돌아와 하는 말이 최린이 집이랑 꾸려놓고 사는 꼴을 봐도 그래, 언행을 봐도 그래 전과는 퍽 달라졌더라는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제 눈으로 확인해보지 않은 이상 아직까지는 그를 변절자로 낙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제 이제 서울에 가게 되는 기회에 그와 한번 맞쪼임을 해볼 작정입니다. 오래지 않아 서울에서 천도교중앙대회가 열리게 되는데 그때에는 나도 서울에 가게 됩니다. 그가 썩은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도 그를 버려얍지요. 우리는 우리 배짱대로 할텝니다.』

박인진은 칼로 무우를 베듯이 명백하게 자기 입장을 밝히었다.

우리들의 면담에서는 내외의 정세와 민족주의운동의 현 실태, 항일무장투쟁의 발전과정, 조국광복을 이룩한 후의 조국건설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상정되고 의견이 교환되었다.

이야기는 낮에도 하고 밤에도 하였다. 쉴참이면 손님들에게 우리의 부대생활모습도 보여주었다.

박인진은 우리 인민혁명군의 무장장비가 예측보다 매우 현대적 이라는 것, 대원들의 면모가 아주 늠름하고 생기발랄하다는 것, 병실들이 규모 있게 꾸려지고 주변환경이 깨끗하다는 것, 일과생활이 째어져 있다는 것, 군인들이 한 사람같이 규율 있고 절도가 있어 정규군과 같은 멋이 난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경의와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그는 또한 우리 밀영지의 기묘한 산세에 대해서도 탄복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유격대밀영의 산수는 마치 천도를 창명한 최제우가 두차례나 들어가 있으면서 도를 닦았다는 경상도 양산의 천성산골짜기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이었다. 천성산 내원암에는 유명한 「화왕계」의 저자 설총의 아버지 원효대사가 당나라 중 1,000여명에게 불타의 만가지 선행을 찬양한 「화엄경」을 가르쳐 모두 성인이 되게 하였다는 고사가 깃들어있는데 동학시조는 유서 깊은 그곳에서 도를 닦고 동학을 창시하였다는 것이다.

박인진은 우리가 백두산 청림속에서 조국해방을 위한 도를 닦으며 「화엄경」이나 「동경대전」보다 더 사활적인 민족재생의 대경륜인 「조국광복회10대강령」까지 마련해놓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군사로 키우는 모습만 보아도 기운이 부쩍부쩍 난다고 하였다.

그가 우리 밀영에 들어와서 가장 큰 자극을 받은 것은 내가 그에게 청수봉전의 기회를 마련해준 순간이었다.

천도교에는 주문, 청수, 시일, 성미, 기도 등 교인들이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5관공덕이라는 것이 있다. 놋그릇에 청수를 떠서 모시는 것을 청수봉전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천도교세계에서 단 하루도 어길 수 없는 법도로 되고 있다. 청수는 천지의 근본을 상징하며 거기에는 천지의 은덕을 잊지 않으려는 교인들의 맹세가 담겨져 있다. 최제우가 수도생활을 할때 하루에 세번씩 청수를 떠놓고 깊은 명상에 잠기곤하였고 또 그가 효수를 당하던 최후순간에도 청수를 떠놓았기때문에 천도교인들은 시조의 영혈을 상징하는 청수봉전을 전통적으로 법도화, 관습화해온 것이다. 우리는 화성의숙에 다닐 때 최동오나 강제하를 비롯한 천도교도들이 저녁 9시만 되면 온 식구를 한자리에 모여놓고 청수를 모시군하는 것을 한두번만 보아오지 않았었다.

나는 박도정과 함께 저녁에 한담을 계속하다가 9시가 다가오자 문득 청수봉전시간이 다됐다는 생각이 나서 전령병을 시켜 맑은 물 한사발을 떠오게 하였다. 물그릇이 들어오자 투박한 통나무상 한복판에 정히 올려놓고 도정에게 청수봉전시간이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성지의 물인데 놋그릇대신 법랑그릇에 담아오게 해서 안되었습니다. 놋그릇이 아니라고 나무람마시고 도정님, 어서 청수를 모시십시오.』

내가 이렇게 권하자 박인진은 몹시 놀라는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천도교를 숭상치도 않는 장군님네 군영에 와있으면서 제 어찌 감히 청수봉전을 하겠습니까?』

『동학당란때 동학도들은 전장에서도 매일 청수를 떠놓고 주문을 외웠다던데 도정어른께서 수십년간이나 지켜온 법도를 우리 밀영에 왔다고 해서 어찌 어기겠습니까? 어서 마음놓고 주문을 외우도록 하십시오.』

박인진은 손님으로서의 예절을 지켜 굳이 사양했지만 나는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도 인륜적 평등과 신앙의 자유 보장을 밝히고 있는데 무신자의 앞이라 하여 신앙심이 남달리 강한 도정님이 평시의 법도를 단 한번만이라도 소홀히 하게 되면 우리가 오히려 미안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그에게 청수봉전을 거듭 권하였다.

결국 박도정은 청수를 모시고 앉아 21자의 주문을 외웠다. 거듭 세번을 외운 다음 물한모금을 마시고나서 그는 숙연한 기색으로 말하였다.

『백두산곡의 청수가 참 별맛입니다. 우리 나라 조종이 마시던 물로 청수봉전을 하였으니 오늘저녁 일은 평생 두고 잊지 못하겠습니다. 장군과 같은 무인이 우리 교의 법도를 이처럼 존중해주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그러고 보면 박인진은 반공에 오염된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들이 종교와 종교상의 모든 법도들을 무시하거나 배척하거나 증오한다고 생각해 온 것이 분명하였다.

어느해인가 미국에 사는 교포 김성락목사가 조국을 방문하였을 때 나는 그와의 오찬석상에서 식전기도를 드리도록 권고한적이 있다. 그때 김성락목사는 우리가 그런 권고를 하는데 대하여 몹시 놀랍게 생각하였다. 공산국가의 주석이 어쩌면 종교인의 식전기도에까지 관심을 돌리는가, 이것이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날 내가 김성락목사에게 식전기도를 드리도록 권고한 것은 그 무슨 생색을 내자는 것도 아니었고 우리가 종교와 종교신자들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전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다만 손님을 손님답게 대하고 싶은 주인으로서의 예절과 일생을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살아온 그가 조국에 와서도 구속을 받지 않고 교도를 지킬 수 있게 하자는 순수한 인도주의적 감정을 가지고 그런 권고를 했을 뿐이었다.

우리 나라 헌법에 명기되어있는 신앙의 자유에 대한 조항은 빈말공부나 비누거품 같은 약속이 아니다.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신앙의 자유를 유린해 본적도 없고 종교신자들을 탄압해 본적도 없다. 만일 공화국정권하에서 제재를 받았거나 정치적 시련을 겪은 종교인이 있다면 그것은 조국과 인민의 이익을 팔아먹은 범죄자들과 민족반역자들뿐 일것이다.

해방후 일부 지방에서 종파분자들이 종교인들을 차별하고 종교자체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편향이 발로되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실례들도 없지 않지만 그것은 어디에나 다 있었던 보편적인 현상도 아니었고 더욱이는 중앙의 조직적인 의사나 지령에 의해 발생되었던 폐단도 아니었다.

미제를 반대하는 조국해방전쟁직전까지만 하여도 우리 나라에는 수많은 예배당과 절간이 있었다. 나라가 해방된 다음 칠골에 가보니 거기에도 창덕학교시절에 보던 예배당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지금 인민대학습당이 자리잡고 있는 평양의 남산재에는 큰 예배당이 두개나 있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도들이라고 자처하는 미국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와서 그 건물들을 다 파괴해버리었다. 부처를 모신 큰 절간과 암자들도 폭탄세례를 받았다. 십자가와 성상, 성경책들은 불타서 재가 되거나 폐허 속에 파묻히었다. 교인자신들도 시체가 되어 저승으로 떠나갔다.

보는 바와 같이 미국사람들이 예배당도 파괴하고 교인들도 죽이었다. 「하느님」은 그러한 만행을 제어하지 못하였다. 이런 이유로 해서 전쟁기간 우리 인민들 속에서는 예배당에 찾아 다니는 사람들이 적어지게 되었다. 우리의 종교신자들은 「하느님」앞에서 천당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릴 필요를 더는 느끼지 않았다. 종교가 인간의 운명 개척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신자들은 스스로 신앙을 버리고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원리, 사람이 이 세계의 창조자이며 지배자라는 원리에 기초한 주체사상의 신봉자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 그들은 성금을 모아 두번 다시 예배당을 지으려고 서두르지 않았다. 그대신 살림집과 공장, 학교들을 먼저 건설하였다.

우리의 후대들 속에는 「하느님」이나 「한울님」이나 부처님을 믿어야 복도 받고 천당에도 간다고 생각하는 청소년들이 없다. 그들이 신자가 되거나 종교단체에 가입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종교를 나쁘게 보거나 종교인들을 학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가 그들에게 무상으로 교회당도 지어주고 생활조건도 보장해주고 있다. 몇해전에는 종합대학 역사학부에 종교과도 새로 내왔다. 그 과에서는 종교전문가들을 키워내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에서도 모든 종교단체들과 교인들의 활동은 법적으로 철저히 보호되고 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남조선에는 상당히 많은 신자들이 있다고 한다. 그 신자들 중에는 민주, 통일, 평화를 위한 3대전선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애국자들과 투사들이 적지 않다.

지금 남조선과 해외의 종교인들 속에서 연공애국인사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그들이 「공산당선언」을 신봉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와 그들을 결합시켜주고 있는 유대는 애국애족의 사상감정이다.

이러한 뉴대는 1930년대에도 존재하였다. 애국애족만 있으면 그 어떤 계층과도 손을 잡을수 있다고 하는 것은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 천명된 통일전선의 원칙이었다. 우리는 이 원칙에 따라 박인진도정과도 손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의 자유에 관한 우리의 사상을 통일전선의 그물 속에 종교인들을 끌어넣기 위한 하나의 일시적인 회유책이라고 왜곡선전하고 있다. 이러한 날조는 그 목소리가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통할 수가 없다. 오동진, 손정도, 최동오, 강제하 등의 신자들과 나를 이어주고 있던 친교는 순결한 애국애족의 감정에 기초한것이였지 그 어떤 책략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을 마르크스의 신봉자로 만들려고 시도해 본적도 없으며 공산당의 둘러리로 내세우려고 생각한적도 없었다. 다만 진정으로 그들의 신앙심을 존중했고 그들의 인격과 인권을 존중하여주었을 뿐이다.

박인진도정이 청수를 모신뒤 우리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된다고 솔직하게 고백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그날 박도정은 청수봉전을 치르고 나서 나에게 불쑥 물었다.

『제가 꼭 여쭈어 알고싶은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한울님〉을 숭상하듯이 장군도 숭상하는 대상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도정의 그 질문을 우리에 대한 믿음의 표시로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대답하였다.

…물론 나에게도 신처럼 숭상하는 대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민이다. 나는 인민을 하늘처럼 여겨왔고 인민을 하느님처럼 섬겨오고 있다. 나의 하느님은 다름아닌 인민이다. 세상에 인민대중처럼 전지전능하고 위력한 힘을 가진 존재는 없다. 그래서 나는 「이민위천」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박인진은 그 대답을 듣고 내가 백두산에 온 보람이 있다, 좀 때늦긴 하지만 진짜 「한울님」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하였다. 그리고 천도교시조 최제우의 「인내천사상이 우리의 생각과 상통한데가 있다면서 대단히 흡족해하였다.

박인진도정과 그 일행은 사흘동안 머물러있으면서 출판소와 재봉소도 돌아보았고 실탄사격도 참관하였으며 유격대원들의 연예공연도 관람하였다.

『나는 50년세월을 살아오면서 알지 못했고 보지 못했던 것을 여기 와서 처음 알고 처음 봤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밀영에 완전히 매혹됐습니다. 이제는 내가 해야 할바도 똑똑히 알았고 결심도 섰습니다. 내 이제 최린을 찾아가서 모든 천도교도들을 조국광복회에 끌어들이는 거사를 치르겠습니다. 그 거사를 성사시키지 못하면 내 산하에 있는 영북의 8개 종리원에 속한 천도교인들만이라도 전부 끌어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전국의 피끓는 천도교 청년당원 100만명도 모두 총을 메고 장군의 수하병정이 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내 말을 믿어주십시오.』

이것은 밀영을 떠날 때의 박인진의 말이었다.

밀영을 방문하고 돌아간 박인진은 천도교인들을 조국광복회 조직에 인입하기 위한 사업을 정력적으로 밀고 나갔다. 그는 장백의 천도교도들을 조국광복전선에 묶어세우는 한편 1937년 8월에는 직접 삼수종리원에 가서 그곳 종리원장 조완협, 장백종리원장 이전화 등과 협의하여 우리와의 통일전선문제를 적극적으로 추진시켰다.

「김빠이」가 그를 적극 방조하였다. 박인진은 장차 자기 사업을 보좌할 수 있는 창선이 같은 인재를 키워달라고 하면서 7∼8명의 청년들을 이미 우리에게 파견하였던 것이다. 천도교청년당 풍산군대표 이경운 등도 이무렵에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에 입대하였다.

박인진은 우리앞에서 말한대로 그해 12월 천도교중앙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갔다.

최린이 밀고하거나 테러행위를 조직하게 되면 박인진의 신변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가 하려는 담판도 도와주고 그의 신변도 보호하기 위하여 나는 이창선에게 나의 전령병 김봉석을 붙여주어 박도정을 서울까지 무사히 호위해가게 하였다.

박인진은 서울에 올라가자마자 최린이 그사이 명륜정에 있는 양옥자택을 더 호화롭게 꾸려놓았다는 것과 그가 「독립을 위한 자치」를 실현하자면 일본과 화해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많은 천도교자금을 총독부에 「국방헌금」으로 갖다 바쳤다는 것 등 기막힌 소식을 들었으나 의분을 가까스로 누르며 그를 인내성 있게 설복해보았다.

그러나 최린은 안하무인이었다.

박인진은 격분을 금할 수 없어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헌금놀음은 독립성업에 역행하는 매국배족적인 배신행위로서 오히려 일본의 국력이나 더한층 증강시키고 조선의 예속을 더욱더 지속시키는 결과밖에 가져올 것이 없다고 규탄하였다. 그는 최린의 면전에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내흔들며 조선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는 참다운 길은 헌금이 아니라 바로 이 강령에 있다, 우리가 가야 할 유일무이한 길은 이 길뿐이다, 우리 교도들은 김일성장군이 조직한 조국광복회에 들어가서 조선인민혁명군과 합세하여 항일대전을 벌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최린은 10대강령을 한참이나 들여다 보고 나서 덤비지 말라, 김일성이 가자는 목표도 대해이고 내가 가자는 목표도 대해이다, 대해로 가는 노정에는 여러가지 길이 있다, 큰길도 있고 오솔길도 있다, 지금은 소란을 피우며 큰길로 나갈 때가 아니다, 만사는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은 그릇만 닦아놓으면 된다, 물은 언제든지 담을 수 있다고 박인진을 설유하였다. 격노한 박인진은 최린과 한바탕 싸우고 그의 집에서 나와버렸다.

최린과의 결별을 단행한 박도정은 인차 풍산군안의 천도교인들을 망라하는 조국광복회 풍산지회를 결성하였고 뒤이어 갑산, 삼수, 혜산, 장백지대에서도 천도교핵심성원들로 조국광복회 지회들을 내왔다. 그 지회들은 자기 주위에 많은 천도교인들과 농민들을 결속하였다. 박인진의 영향하에 있는 조국광복회 조직들은 우리 밀영에 많은 원호물자들을 보내주었다. 박인진자신도 우리에게 보낼 원호물자를 구해들이느라고 혜산과 풍산으로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언제인가 도정은 유격대원들이 한지에서 숙영할 때 깔개로 쓰라고 여라문장의 짐승가죽까지 직접 마련해 보낸 일이 있는데 그때 나의 전우들은 모두 그 짐승가죽을 보고 박인진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지양개에 있는 박인진의 제자들중에는 김정부한테서 소작지를 수천평이나 받아가지고 인민혁명군에 보낼 원호미를 생산하기 위해 남모르는 땀을 흘린 사람들도 있었다. 그 소작지에서 생산된 쌀이 우리의 밀영으로 흘러들어 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박도정밖에 없었다.

그의 아내와 딸들도 조선인민혁명군을 원호하기 위해 후방물자운반사업에 열성적으로 참가하였다.

우리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불철주야로 투신하던 박인진은 1937년 10월 불행하게도 「혜산사건」의 여파로 일제경찰에 검속되었다.

박인진도정의 투쟁실적과 우리와의 연고관계를 어렴풋하게 짐작한 적들은 집요하게 자백을 강요하였다. 네가 김일성빨치산과 오래전부터 내통해오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리고 네가 국경양안에서 불온분자들을 규합하여 비밀결사들을 무어 가지고 국체변혁을 실현하려 했다는 것도 다 알고 있다, 김일성장군한테서 무슨 지령을 받았고 너희 조직들이 어디어디에 분포되어있었는가를 솔직히 말해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박인진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적들은 박인진의 지조와 의지를 굽힐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천도교를 걸고 들었다. 너희네 천도교에서는 사람위에 사람이 없고 사람아래에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고 한다는데 그렇다면 너희들이 하늘처럼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항일독립이라는 구실로 싸움마당에 마구 내몰아 헛되이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도에 대한 이단이고 인륜에 대한 모독이 아닌 가고 하였다.

박인진은 적들의 그 망발에 추상같은 호령을 내렸다.

『인륜을 모독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너희들이다. 너희들이 바로 우리 천도교의 종지를 짓밟은 장본인들이다. 네놈들은 수천수만명에 달하는 조선의 〈한울님〉들을 소나 돼지처럼 매일같이 도살장으로 끌어가고 있지 않느냐. 군경들의 총칼이 번뜩이는 곳에서 우리 백의민족의 피가 내와 강을 이루고 산 사람의 간장마저 원한에 썩고 있다는 것을 너희들은 알고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대답 해보라. 죄는 누가 짓고 재판은 누가 받아야 하는 것이냐? 우리는 조선국의 신성한 천도를 짓밟고 백성들을 무수히 살해한 강도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강도들이 불법적으로 조작해낸 국체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 300만 교도는 2천만의 동포들과 함께 분연히 일어나 피의 항쟁을 하는 것이다. 내 한몸의 피가 너희들의 제국을 불사르는 한 점의 불꽃이 된다면 나는 죽어서 재가 된다 해도 보람을 느낄 것이다!』

그 불같은 성토에 원수들은 전율하였다. 악에 받친 적들은 늙은 도정에게 극악무도한 고문을 들이대어 그를 운신조차 할 수 없는 폐인으로 만들어버리었다. 중병까지 겹친 도정은 사경에 이르렀다.

박인진의 생명이 경각에 다달았다는 것을 직감한 적들은 병보석의 명목으로 그를 가 출옥시키었다.

박인진은 병석에서 1939년 봄을 맞이하였다. 임종을 앞둔 그는 한평생 남편의 뒷시중을 충실하게 해온 부인에게 혼신의 힘을 모아 말하였다.

『나는 죽음을 앞둔 이 시각에 행복을 느끼고있소. 그건 내가 수운대신사의 후대답게 인생말년을 값있게 결속 했기때문이요. 이 박인진은 조선의 사나이로 태어났다가 조선의 사나이로 가오. 조국이 해방되면 당신은 아이들을 데리고 김일성장군을 따라가오.』

박인진이 운명직전에 이르렀다는 연락을 받고 그의 총애를 받던 한 제자가 침상곁으로 달려왔다. 도정은 그를 보자 평소에 자기가 즐겨 부르던 「돈돌라리」를 불러달라고 하였다. 「돈돌라리」라는 제명은 『동틀날이 오리라.』는 말이 줄어지면서 붙은 것이라고 한다. 일제침략자들을 구축하고 다시금 평화롭게 살 날이 동터올 것이라는 신념이 구가된 노래였다.

후치령을 사이에 두고 북청과 잇닿아있는 풍산땅에는 1930년대초부터 「돈돌라리」노래와 춤이 민간에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박인진의 주도하에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이 유격대원호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게 된 때로부터 풍산지구 지하조직들에서는 「돈돌라리」가무를 원호사업을 위한 공동노력을 조직할 때마다 적들의 눈속임을 위한 방편으로 자주 이용하였다고 한다.

충실한 제자는 스승의 부탁대로 「돈돌라리」를 부르기 시작했으나 목이 막혀 더 부르지 못하고 오열을 터뜨리었다.

박인진은 『선생님!』, 『선생님!』하면서 끝없이 흐느끼는 제자의 손목을 잡아 쥐고 조용히 말하였다.

장군이 건재하고 혁명군이 백두산에 건재 하는 한 우리 백의동포들은 반드시 동틀 날을 맞이하게 될 거네. 자네들은 이제 백화가 만발하는 〈한울님〉의 나라에서 살게 될걸세. 내 눈에는 그날이 환히 보이네. 암 보이구말구.』

연공구국의 길에서 거대한 공적을 세운 박인진도정은 항일혁명이 낳은 애국지사의 한 사람이다.

해방후 나는 박인진이 생각날 적마다 여러번 그의 미망인과 후손들을 찾아보군 하였다. 1992년 여름에 항일혁명투사 유가족들과 만날 때에도 미망인이 90이 넘도록 건재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잘 걷지 못하면 업어서라도 모셔오라고 일렀다. 도정의 늙은 미망인은 차에서 내리는 길로 누구의 등에도 업히지 않고 제발로 걸어서 내앞으로 달려왔다.

그는 다른 유가족들처럼 나를 「장군님」이라든가 「수령님」이라는 말로 부르지 않고 「한울님」이라고 불렀다.

내가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고 해도 그는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저는 꿈에서도 〈한울님〉을 보았습니다.』

박인진의 부인만이 입에 올릴 수 있는 그 호칭과 솔직한 고백에 나는 도정과 만나던 옛 추억이 되살아나 눈 굽이 뜨거웠다.

박인진을 각방으로 적극 도와주던 천도교 청년당원이었으며 조선인민혁명군 정치공작원이었던 이창선은 엄혹한 백두산추위가 가져다준 동상때문에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그가 동사한 것이 아마 1938년 겨울이었던 것 같다. 최근에 관계부문 일꾼들은 「김빠이」의 4촌처남의 사진첩에서 자못 놀라운 사진 한장을 찾아내었다.

이창선이 천도교청년당원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결의형제들과 함께 찍은 사진인데 그중의 한사람이 신념과 의지의 화신인 이인모라는것이다. 그는 박도정의 많은 제자들중 한사람이었던것 같다. 그러고보면 박인진은 희세의 애국자들을 키운 은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