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이후 3년 동안 전개된 통일전선운동의 역사적 경험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글을 시작하며
2. 사회정치세력의 분화와 대립, 인민대중의 정치적 진출  
3. 미완의 지역통일전선체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4. 진보적 사회정치세력과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의 통일전선
5. 지역통일전선운동이 좌절한 몇 가지 원인들
6. 글을 맺으며

1. 글을 시작하며

1945년 9월 9일자 『매일신보』에는 8.15 조국광복 이후 한(조선)반도의 정치정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9일 총독부 앞뜰 한 구석에 서 있는 기자의 회중시계는 오후 4시 35분을 가리키었다. 아까부터 웅장하게 울려오던 진주군 군악대의 취주가 그치자 진주군의 정렬도 끝났다. 뜰 한 가운데 서 있는 국기게양대를 입구(口)자로 둘러싸고 엄숙한 공기가 떠돌았다. 총독부 울 밖을 겹겹이 둘러싼 군중들의 박수소리가 일제히 일어났다. 지금까지 펄럭이던 일장기가 소리 없이 내려왔다. 35년 동안 우리들의 고혈을 착취하고 우리들의 자유와 의사를 압박하여 오던 제국주의의 간판은 여지없이 땅 위에 떨어진 것이다. 참으로 역사적인 일순이었다. 이어서 다시 군악대가 취주하는 중에 미국국기가 장중하게 일어났다. 전 장병은 거수의 경례를 하여 게양대를 우러러보았다.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푸른 하늘 아래 찬연히 휘날리며 올라갔다. 또 군중의 박수소리가 일어났다. 장병들의 두 눈이 감격에 빛났다. 군악은 더욱 그치지 않고 북악산을 울리고 하늘 멀리 퍼져 나갔다. 우리들은 하루 빨리 저 깃대에 성조기 대신 우리들의 국기가 자유롭게 휘날릴 날이 실현되도록 힘을 합쳐야 될 것으로 느끼었다."

조선총독부 앞뜰에 있는 국기게양대에 일본국기 대신 미국국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손뼉을 치던 군중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그 깃대에 미국국기 대신 우리 국기가 휘날리도록 힘을 합해야 되리라는 감상을 적었던 『매일신보』 기자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과 후대가 바로 그 미국국기 아래서 60년 이상 기나긴 세월 동안 전쟁과 분단과 예속의 고통을 겪게 될 역사의 비극이었다.

올해 한(조선)민족은 조국광복 60돌을 맞이하였다. 조국광복 60돌이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강점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의 식민지체제가 무너지자마자 한(조선)반도를 다시 분할·점령하였던 제국주의 미국의 지배로부터 한(조선)민족이 해방되었음을 뜻하지 않는다. 한(조선)민족 성원가운데 3분의 2에 이르는 인구와 영토 절반은 60년이 지난 오늘까지 제국주의 미국의 지배 아래에 있다. 올해 8월 15일에도 민족해방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조국광복이라는 개념을 써야 하는 것은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1945년 9월 9일 서울을 점령한 미군군대가 '화이트 홀(White Hall)'이라고 불렀던 군정청 청사는 없어지고 그 대신 주한미군사령부와 주한미국대사관이 들어선 뒤로 60년 동안 여전히 점령군 깃발은 서울 한 복판에 내걸려있으며, 점령군 군악대는 여전히 미국국가를 울리고 있다. 그 깃발과 국가가 남아있는 한, 한(조선)민족은 자기에게 전쟁과 분단과 예속을 강요하는 제국주의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반미자주화운동을 벌일 것이다.  

제국주의 미국의 지배 아래서 조국광복 60돌을 맞은 한(조선)민족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60년 전에 한(조선)반도를 분할·점령하면서 세워진 제국주의지배체제에서 벗어나 민족의 자주성을 이루어내려면 반드시 민족주체역량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의 자주성을 이루어내는 운동은 민족 안에 있는 어떤 소수집단의 싸움이 아니라 민족주체역량의 싸움이 떠밀어 가는 사회변혁운동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는 민족이 힘을 가지는 것, 다시 말해서 민족주체역량을 세우는 것은, 민족주의에서 말하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사회변혁의 과학적 개념이며 통일전선의 전략목표다. 민족주체역량은 통일전선이라는 운동형태로 성립되고 강화되며 투쟁의 길을 열어나간다. 그런 뜻에서, 민족주체역량이란 곧 통일전선역량이며, 반미자주화운동은 곧 통일전선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국주의 일본이 무너진 1945년 8월 15일부터 38도선 이남지역에 단독정부가 세워진 1948년 8월 15일까지 3년 동안 한(조선)민족은 제국주의 미국의 분할·점령에 맞서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한(조선)민족 대 제국주의 미국의 대결구도로 벌어진 그 싸움은 한(조선)반도를 분할·점령한 제국주의 미국에 맞서 싸운 통일전선의 격전이었다. 그러므로 그 3년의 역사를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바라보려면, 통일전선의 관점을 세우고 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마땅하다.

당시 제국주의 미국이 분할·점령한 한(조선)반도에서 일어난 통일전선운동은 두 갈래 방향으로 펼쳐졌는데, 하나는 38도선 이남지역과 이북지역에서 각각 벌어진 지역통일전선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조선)민족 전체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민족통일전선운동이었다.  

분단체제가 오늘처럼 굳어지지 않았던 당시에 38도선 이남지역과 이북지역에서 각각 벌어진 지역통일전선운동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펼쳐졌으며, 당연히 한(조선)민족 전체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민족통일전선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여기서 나서는 역사적 인식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38도선 이남지역에서 벌어진 통일전선운동을 인식하는 문제

2) 38도선 이북지역에서 벌어진 통일전선운동을 인식하는 문제

3) 38도선 이남지역과 이북지역에서 각각 벌어진 통일전선운동의 상호연관성을 인식하는 문제

4) 전국적 범위에서 벌어진 민족통일전선운동을 인식하는 문제

5) 지역통일전선운동과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상호연관성을 인식하는 문제

자기 역사를 알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가 열리지 않는다는 말은, 제국주의지배체제 아래서 60년을 살아온 이 민족에게 진실이다. 8.15 이후 3년 동안 한(조선)민족과 제국주의 미국 사이에서 벌어진 대결의 역사는 60년 묵은 과거사의 갈피 속에 묻혀있는 빛바랜 기억이 아니다. 그 대결의 역사는 한(조선)민족 대 제국주의 미국의 대결이 벌어지는 오늘의 정세를 규정하는 근원이며, 제국주의지배체제에서 벗어나는 투쟁의 방향을 한(조선)민족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나는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그 역사적 근원을 파헤치고 통일전선운동 3년의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려는 생각을 밀어가며 이 글을 썼다. 글을 시작하면서 몇 가지 밝혀둘 것이 있다.

1) 자료가 제한되어 있어서, 이 글의 범위를 38도선 이남지역에서 벌어진 통일전선운동을 인식하는 데로 좁힐 수밖에 없었다.   

2) 이 글을 쓰면서 다루었던 자료들은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 세워지기 이전 시기에 쓰여진 것들이므로, 이 글에서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은 자연스럽다. 오늘 북(조선)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줄여서 조선이라고 부르는데, 이 글에 나오는 나라이름 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줄인 이름이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지기 이전에 한(조선)민족이 5백 년 동안 자기 나라를 부르던 옛 이름이다.

2. 사회정치세력의 분화와 대립, 인민대중의 정치적 진출

1945년 8월 15일 제국주의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연합군의 승리,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식민지 조선의 해방은 엄청난 격동의 물결을 일으킨 그야말로 대사변이었다. 그 대사변기에 조선의 사회정치세력은 가지각색으로 분화되었으며, 매우 복잡한 구도 속에서 서로 맞서게 되었다.

8.15 이후 3년 동안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움직였던 사회정치세력들의 관계는 특히 복잡하여, 다양한 사회정치세력의 성격을 가려보는 문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연구자들은 대체로 그 기본성격을 좌익세력, 우익세력, 중도세력으로 나누어 보았는데, 나는 이 글에서 당시의 사회정치세력을 진보적 사회정치세력, 반동적 사회정치세력,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으로 나누었다.

눈여겨보는 것은, 당시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이 전위적 계급정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급진적 사회주의세력과 진보적 대중정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진보적 민주주의세력으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전위적 계급정당은 근로대중의 앞에서 근로대중을 이끌어 가는 전위적 정치조직이었고, 진보적 대중정당은 근로대중 속에서 근로대중과 함께 가는 대중적 정치조직이었다.

다른 한편, 당시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은 친미·반동적 사회정치세력, 친일·반동적 사회정치세력, 국수주의적·반동적 사회정치세력으로 구분된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은 급진적 사회주의세력과 진보적 민주주의세력으로 갈라지면서 두 가지 정치노선을 놓고 서로 맞서게 되었는데, 두 가지 정치노선이란 전위적 계급정당 건설노선과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노선이다. 급진적 사회주의세력은 전위적 계급정당 건설노선을 따랐고, 진보적 민주주의세력은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노선을 따랐다.

급진적 사회주의세력의 전위적 계급정당 건설노선은 8.15 직후 남조선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였던 핵심세력, 곧 '간부파'로 알려진 세력이 추구했던 노선이다. 전위적 계급정당 건설노선을 고집한 '간부파'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자세하게 논하겠지만, 그들은 남조선의 진보적 대중단체들을 조선공산당의 외곽단체로 만들어놓고 그들을 좌경적 전술로 끌어갔을 뿐 아니라 중도적 사회정치세력과 힘을 합하는 통일전선전략을 외면함으로써 사실상 지역통일전선운동을 가로막은 세력이었다. "간부파의 계급독재주의와 소련의존주의의 극좌적 경향은 그 주관적 의도 여하를 막론하고 객관적으로는 국제민주주의노선에 위반할 뿐 아니라 민족을 분열시켜 조국재건을 방해하는데 불과"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동아일보』 1946년 8월 13일자)

반면에,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노선을 따랐던 진보적 민주주의세력은 전위적 계급정당과 중도적 대중정당의 통일전선을 세우는 데 힘을 기울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8.15 직후의 정세에서 전위적 계급정당 건설노선은 그릇된 정치노선이었고,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노선은 올바른 정치노선이었다. 전위적 계급정당 건설노선이 그릇된 정치노선이었다는 사실은, 1946년 8월초부터 11월말까지 진행된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의 삼당합당에서 드러났다.

삼당합당은 조선인민당이 제의한 것인데, 조선공산당의 "관료주의적 종파주의적 극좌적 경향에 의하여 결국 암초에 부딪치게 되었"다. (『동아일보』 1946년 8월 13일자) 그리하여 삼당합당은 전위적 계급정당과 중도적 대중정당이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노선에 따라 합당한 것이 아니라, 조선공산당을 남조선로동당으로 간판만 바꾼 것과 다르지 않았다. 조선공산당이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노선을 따랐던 조선인민당의 삼당합당 제안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공산당 '간부파'가 고집하였던 전위적 계급정당 건설노선이 오류였음을 드러낸 것이다.

전위적 계급정당과 중도적 대중정당이 힘을 합하는 통일전선은, 서로 다른 정치노선을 추구하는 두 정당이 합당하여 새로운 통일전선적 정당 곧 진보적 대중정당을 세움으로써 완성되는 것이었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와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을 비롯한 진보적 대중단체들은 전위적 계급정당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 중도적 대중단체들은 중도적 대중정당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전위적 계급정당과 중도적 대중정당이 합당하여 새로운 진보적 대중정당을 세우는 경우 진보적 대중단체들과 중도적 대중단체들도 힘을 합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당시 남조선의 지역통일전선이 진보적 대중정당 중심의 통일전선으로 완성될 수 있었음을 말해준다.  

명백하게도, 8.15 직후 지역통일전선을 성립·강화하고 발전·완성하는 것은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노선에 의해서 가능한 일이었으며, 8.15 직후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은 진보적 대중정당 중심의 통일전선전략을 밀고 나가면서 중도적 사회정치세력과 힘을 합해야 하였다.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이 중도적 사회정치세력과 힘을 합하여 통일전선을 세우려면, 무엇보다도 공동의 전략목표를 내놓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공동투쟁을 벌여야 하였다. 그 공동의 전략목표는 8.15 직후 새로운 나라, 곧 진보적 민주주의국가를 세우는 건국운동에 나선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이 공통적으로 추구하였던 3대 정치과제로 나타났다. 3대 정치과제란, 친일파 민족반역세력을 쓸어버리는 것, 제국주의와 파시즘, 봉건주의를 깨부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 그리고 38도선에 그어진 작전경계선을 없애고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친일파 민족반역세력 청산,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건국운동의 3대 정치과제를 가장 먼저, 힘있게 내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싸움에 나선 사회계급은 해방된 조선의 노동계급이었다. 8.15 직후 조선의 노동계급이 그처럼 선진적인 사회정치운동에 누구보다 앞서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그 계급이 일제의 식민지 강점기에 가장 혹심한 억압과 착취를 받으면서도 그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사회계급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 강점기에 조선노동계급이 벌인 사회정치투쟁과 8.15 이후 3년 동안 조선노동계급이 벌인 사회정치투쟁을 이어주는 역사적 연속성에 대해서는 따로 연구해야 할 것이다.

1945년 11월 5일 서울 영락정(일본식 행정구역이름-옮긴이)에 있는 중앙극장에서는 조선의 노동계급 1백50만 명 가운데 조직화된 노동계급 50만 명을 대표하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가 결성되었다. 그 결성대회를 보도한 언론의 기사에 따르면, "이날 회의를 일관한 공기는 조선노동자의 진정한 자유와 생활향상을 해결하는 열쇠는 완전한 자주독립정부의 성립에 있으므로 진보적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을 위한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하루바삐 촉성"하자는 데로 모아졌다고 한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6일, 11월 7일자)  

노동계급의 뒤를 이어 농민들도 1945년 12월 8일 서울에 있는 천도교 대강당에서 조선농민조합전국총동맹(약칭 전농)을 결성하였다. 농민위원회, 농민조합, 농민동맹 등 가지각색의 자생적 농민조직들이 결집하여 조합원 3백30만 명을 아우르는 농민대중조직을 세운 것이다. 해방된 조선의 농민도 노동계급과 마찬가지로 친일파 민족반역세력 청산,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건국운동의 3대 정치과제를 내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싸움에 나섰다. 조선농민조합전국총동맹 결성대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에 따르면, "농민은 민족통일전선에 있어 강경히 진보적 민주주의국가 설립을 요구"한다(『중앙신문』 1945년 12월 11일자)는 정치적 의사를 명백히 밝혔던 것이다.

친일파 민족반역세력 청산,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건국운동의 3대 정치과제를 이루려는 의지는 노동계급과 농민만이 아니라 여성, 청년, 지식인, 문화인, 종교인을 비롯한 각계각층 인민대중 속에 널리 퍼져나갔다. 1945년 12월 3일 서울에서 전국청년단체총동맹(약칭 청총)이 결성되었고, 1945년 12월 22일 서울에서 전국부녀총동맹(약칭 부총)이 결성되었으며, 1946년 2월 20일 서울에서 조선문화단체총연맹(약칭 문총)이 결성되었다. 이러한 각계각층 대중단체들은 남조선의 노동계급, 농민과 함께 건국운동의 3대 정치과제를 이루기 위한 대중투쟁을 벌였다.

8.15 직후 통일전선은 친일파 민족반역세력을 쓸어버린 조건에서 세울 수 있는 것이었다. 그 까닭은 통일전선운동이 자주독립과 진보적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전민족적인 건국운동이었으므로, 자주독립과 진보적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친일파 민족반역세력은 통일전선 자체를 반대·배격하는 가장 반동적인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8.15 직후 노동계급, 농민, 여성, 청년을 비롯한 각계각층 인민대중은 전국 각지에서 인민위원회라는 통일전선체를 세웠다. 각계각층 인민대중이 세운 지방인민위원회에 의거하여 세워진 것이 중앙인민위원회였고, 그 중앙인민위원회에서 각당각파가 연립하여 세우려고 한 것이 민주주의연립정부였고, 그 정부에 의해서 한(조선)민족 역사에서 처음으로 진보적 민주주의국가를 세우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방인민위원회→중앙인민위원회→민주주의연립정부→진보적 민주주의국가로 이어지는 건국운동의 단계적 발전과정은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이 모여든 통일전선이 헤쳐나가는 투쟁과정과 일치되었다.

만일 제국주의 미국과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의 방해와 탄압을 이겨냈더라면, 8.15 이후 조선의 인민대중은 지방인민위원회 결성→중앙인민위원회 결성→민주주의연립정부 수립→진보적 민주주의국가 건설로 이어지는 길로 나아갔을 것이다.

"분열해 있는 것은 소위 지도자 뿐이요 민중은 통일되어 있다"는 여운형의 말(『자유신문』 1945년 12월 8일자)은, 8.15 직후 조선에서 각계각층 인민대중이 건국운동의 3대 정치과제를 이루어내기 위한 통일전선을 세우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건국운동의 3대 정치과제를 공동의 전략목표로 삼은 통일전선운동은 처음에 중앙인민위원회를 세우는 정치사업으로 펼쳐졌다. 1945년 9월 14일 중앙인민위원회가 발표한 정강과 시정방침은 건국운동의 3대 정치과제와 일치하였다. 그 정강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완전한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와 봉건적 잔재세력을 일소하고 전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에 충실하기를 기함.

우리는 노동자, 농민, 기타 일절 대중생활의 급진적 향상을 기함

우리는 세계민주주의 제국의 일원으로서 상호제휴하여 세계평화의 확보를 기함." (『매일신보』 1945년 9월 19일자)

위 정강은 민족통일전선의 정치강령 바로 그것이었다. 그 정강과 함께 중앙인민위원회가 발표한 시정방침 27개 조항은 60년이 지난 오늘도 남(한국)의 민족민주전선에게 낯설지 않은 전략적 방침이다. 시간적 간격을 넘어 오늘에 이어지는 60년 전의 시정방침을 요약하면, 일제의 파쇼악법 철폐, 민주주의적 토지개혁 실시, 주요산업 국유화 실시, 국가 지도에 의한 민족적 상공업 허용, 특권 폐지와 사회적 평등 실현, 부인(여성이라는 뜻-옮긴이)의 완전한 해방과 남녀동등권 실현, 8시간 노동제 실시, 노동계급의 최저임금제 확립, 근로대중의 최저생활 보장, 실업 방지와 구제대책 확립, 국가부담에 의한 의무교육제 실시, 민족문화 발전정책 실시, 국가공안대와 국방군 편성, 외래세력의 내정간섭 반대 등이다. (『매일신보』 1945년 9월 19일자)

3. 미완의 지역통일전선체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일제의 식민지 강점에서 풀려난 한(조선)민족이 요구한 것이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과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이었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조선)민족이 자기의 요구대로 진보적 민주주의를 이루고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우려면, 무엇보다도 제국주의 미국이 분할·점령한 남조선에서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제국주의적 책동을 막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시 한(조선)민족이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제국주의 미국의 책동을 막아내고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우는 데서 나선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임무는 민족주체역량을 조직·강화하는 임무였다. 민족주체역량을 조직·강화하는 것은 곧 민족통일전선을 세우는 것이었다. 민족주체역량은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이 건국운동의 3대 정치과제로 제기된 민족공동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하여 모여든 민족통일전선에 의해서, 그리고 그 전선을 통해서만이 조직되고 강화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민족통일전선 형성은 제국주의 미국과 맞서 싸우는 한(조선)민족의 운명을 좌우한 사활적인 임무였다.

그런데 문제는 민족통일전선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통일전선운동의 전략과 전술에 있었다. 8.15 이후 3년 동안 민족통일전선을 세우는 임무는 제국주의 미국이 분할점령정책을 내밀고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이 미친 듯이 방해하는 조건에서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전략전술적 문제들을 제기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국주의점령군과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의 공세가 집중되었던 남조선에서 그 공세를 물리치고 지역통일전선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통일전선을 세우는 임무를 수행하는 지름길이었다는 점이다. 8.15 직후 남조선에서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이 민족주체적 관점을 세우고 힘을 합하여 지역통일전선을 세우면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통일전선도 세워질 수 있었고, 만일 남조선에서 각당각파 각계각층이 서로 갈라져 싸우면서 지역통일전선 형성에 실패하면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통일전선도 세워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건국운동의 3대 정치과제를 이루어내는가 그렇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는 남조선에서 지역통일전선을 세우는가 그렇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에 직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남조선에서 지역통일전선을 세우는 싸움에 난관이 조성된 때는 1946년 2월이었다.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이 파견한 노회한 정치공작원 밀리어드 굿펠로우(Milliard Preston Goodfellow)의 배후조종에 따라 그해 2월 14일 이승만(1875-1965)을 의장으로, 김구(1876-1949)와 김규식(1877-1950)을 부의장으로 한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약칭 민주의원)이 결성되었다.

이승만을 의장으로 내세워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을 결성한 것이 밀리어드 굿펠로우의 비밀공작이었음은 다음 세 가지 사실에 의해서 드러난다.

1) 미국 육군 대령으로 군정청 정치고문으로 일했던 굿펠로우는 1942년 초부터 미국에서 이승만과 국무성 관리들을 만나게 해주면서 이승만을 포섭하였다.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제1권, 240쪽 참조) 굿펠로우에게 포섭된 이승만은 그를 자기의 '개인고문'으로 여길 만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굿펠로우는 1944년부터 미국 중앙정보국(CIA, Central Intelligence Service)의 전신인 전략정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차장으로서 전략정보국과 전쟁성 사이의 연락업무를 맡았다. 전략정보국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만들어져 활동한 전시국가정보기관이었는데, 국장은 육군소장 윌리엄 도노반(William Joseph Donovan, 1883-1959)이었다. 전략정보국은 이승만에게 문관 대령의 계급을 주고, 암호명 '블랙(Black)'이라는 연락장교로 임명하여 굿펠로우 밑에서 연락업무를 맡아보게 하였다. 이승만은 전략정보국 요원이었다.

2) 1945년 11월 7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굿펠로우를 '자기의 사적 대표'로 남조선에 보내겠다고 국무장관 제임스 번즈(James Francis Byrnes, 1879-1972)에게 밝혔다.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제1권, 272-3쪽 참조)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 분석관 존 메릴(John Merrill)은 굿펠로우가 트루먼의 '비공식 자문위원'이었다고 보았다. (『월간 다리』, 1989년 9월호) 굿펠로우의 파견문제를 대통령과 국무장관 사이에서 논하였다는 사실은, 그를 남조선에 파견하는 문제가 미국의 분할점령정책을 내미는 데서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3) 군정청 정치고문 베닝호프(H. Merrell Benninghoff)는 국무장관 제임스 번즈에게 보낸 1946년 1월 28일자 1급 비밀문서에서 "굿펠로우는 지난 한 달 동안 조선의 정치단체들과 일해왔는데 주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미 김구와 이승만은 그들의 소위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하지 장군 및 공동위원회와 함께 일할 통일된 단체를 구성하려는 노력에 협력할 것을 동의하였"다고 적었다. (김국태 옮김, 『미국무성 비밀외교문서』 제1권, 213쪽)

그 성격과 활동에서 뚜렷이 드러난 것처럼, 제국주의 미국의 분할점령정책에 따라 모습을 드러낸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은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의 통일전선운동에 맞서는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의 집합체였다.

민주의원이 결성된 이튿날 2월 15일 서울에서는 여운형(1885-1947), 허헌(1885-1951), 백남운(1897-1979), 김원봉(1898-1958), 박헌영(1900-1956)을 의장단으로 추대한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이 결성되었다.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은 결성대회에서 발표한 「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8.15 이후 조선에는 노동자, 농민, 중소상공업자 및 진보적 지식인계층으로 이루어진 인민대중, 대지주 및 대재벌을 대표하는 반동세력, 외래세력이 있다고 보고, 민주주의임시정부는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에 통일되어 있는 인민대중을 중심으로 하여 세워지고 "중산계급과 그들을 대표하는 모든 관계의 지지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에는 남조선의 정당은 물론, 노동계급과 농민을 비롯한 각계각층 대중조직이 망라되었다. 거기에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신한민족당, 국민당, 독립동맹이 참가하였으며,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각 도 대표, 서울시 대표가 참가하였다. 또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선농민조합전국총동맹, 청년단체들(청년총동맹, 공산청년동맹, 청년독립동맹), 여성단체(조선부녀총동맹), 종교단체들(천도교청우당, 유도회), 문화학술단체들(문학동맹, 음악동맹, 미술동맹, 연극동맹, 영화동맹, 조선문화협회, 학술원, 과학기술연맹, 과학자동맹, 조선어학회), 사회단체들(조선신문기자회, 조선의사회, 조선약제사회, 보건협회, 산업의학회, 전국협동조합연합회, 반일운동자구원회, 실업자동맹, 응징사동맹, 조선체육회 등), 해외동포단체(재일본조선인동맹) 등 해내외 각계각층 대중조직들과 언론계 인사, 법조계 인사, 체육계 인사 등 각계각층 개별인사들이 참가하였다.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의 역사적 의의는, 제국주의 미국이 점령한 남조선에서 진보적 사회정치세력과 각계각층 근로대중이 힘을 합하여 지역통일전선체를 세웠다는 데 있다. 당시 근로대중과 힘을 합하여 통일전선운동을 이끌어 갈 정치세력은 진보적 사회정치세력밖에 없었다.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에게는 각계각층 근로대중의 통일전선운동을 이끌어갈 역량도 전략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처럼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결성된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은 진보적 사회정치세력, 근로대중,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이 모두 힙을 합하는 완성된 지역통일전선체로 일어서지는 못했다. 민전은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이 주도하고 일부 중도적 사회정치세력만이 결합한 한계와 불안정성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다.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이 진보적 사회정치세력, 근로대중,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이 드넓게 모여들어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을 모두 아우르는 지역통일전선체로 완성되지 못한 주된 원인은, 남조선의 전위적 계급정당을 이끈 이른바 '간부파'가 중도적 사회정치세력과 손잡고 통일전선을 세우는 전략적 과제를 홀시하였기 때문이다. '간부파'는 "기본적으로 좌우합작에 회의적이었고, 민전 결성 이후에는 그것을 배격하는 입장을 뚜렷이 드러냈"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제1권, 421쪽)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이 중도적 사회정치세력까지 폭넓게 아우르지 못한 한계를 안고 결성된 조건에서 민전 대 민주의원의 대결구도가 세워지자 민전에 들어가지 않은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은 혼란에 빠졌다. 민전 대 민주의원의 날카로운 대결은, 진보적 사회정치세력과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이 건국운동의 3대 정치과제로 제시된 민족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더욱이 군정청과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은 진보적 사회정치세력과 근로대중이 힘을 합하여 결성한 지역통일전선을 깨부수려고 집중공세를 퍼부었다. 군정청이 탄압을 집중한 대상은 그들이 이른바 '좌익 5단체'라고 불렀던 남조선로동당,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선농민조합전국총동맹, 남조선민주청년동맹이었다.

군정청은 1947년 3월 6일 민전 지도성원들을 붙잡아가서 점령군 군사재판에 넘기는 것을 시작으로, 3월 22일 남조선 곳곳에서 총파업이 일어나자 파업참가자 2천76명을 검거하고, '좌익 5단체' 간부 전원을 검거하려는 극단적인 폭압조치로 나왔다. 5월 7일에는 남조선민주청년동맹을 강제해산하였고, 5월 14일에는 점령군방첩대(CIC, US Counter-Intelligence Corps)가 전평회관에 쳐들어가 샅샅이 뒤지고 현장에서 지도성원 20여 명을 붙잡아갔다. 8월 11일부터 14일까지 민전의 수많은 지도성원들이 붙잡혀갔고, 8월 15일에는 남조선로동당의 수많은 지도성원들이 붙잡혀갔다. 8월 20일 수도경찰청장 장택상(1893-1969)은 '좌익검거'를 전국적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1946년 10월 "웃통을 벗고 8명씩 어깨동무하고 적기가를 부르면서 나주경찰서를 압박해갔지만 결국 기관총과 '호주기'라고 불리는 '쌕쌕이'가 퍼붓는 총알세례에 동지들은 삼대가 쓰러지듯 널부러졌다"는 증언(『통일뉴스』 2004년 7월 6일자)은 당시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심하였는지를 말해준다.

그처럼 엄혹한 정세 속에서 민전은 더 많은 중도적 사회정치세력과 손잡고 자신을 확대·강화하여 지역통일전선체를 완성하면서 건국운동의 3대 정치과제를 이루어 가는 매우 힘들고 어려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4. 진보적 사회정치세력과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의 통일전선

그 무렵,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이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을 폭넓게 아우르지 못한 한계를 보면서,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을 모아들여 건국운동의 3대 정치과제를 이루기 위한 지역통일전선을 세우는 정치사업에 앞장선 남조선 정치활동가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여운형이다.

민전이 결성되기 이전부터 여운형은 진보적 사회정치세력과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이 힘을 합하여 지역통일전선을 세우는 정치사업에 힘썼다. 지역통일전선은 전위적 계급정당이 아니라 진보적 대중정당을 중심으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은 1945년 10월 12일 진보적 대중정당인 조선인민당이 창당된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조선인민당은 창당선언에서 "조선의 완전독립과 민주주의국가의 실현"은 "각층각계의 인민대중을 포섭·조직하여 완전한 통일전선을 전개하고 관념적 혹은 반동적인 경향을 극복·타파함으로서만 완수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종범, 김동운, 『해방전후의 조선진상』 제2집, 57쪽) 여운형은 조선인민당을 통하여 진보적 사회정치세력과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이 힘을 합하는 지역통일전선운동을 밀고 나가려고 하였다.

지역통일전선의 전략적 과제를 풀기 위하여 힘쓰던 여운형이 손을 잡으려 하였던 대상은 김규식이었다. 원래 김규식은 김구, 이승만, 김성수(1891-1955)와 함께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에 속해있던 정치인이었다.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많았는데도 여운형이 하필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에 속한 김규식과 손을 잡으려고 애쓴 까닭은, 그와 손을 잡으면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을 분열·약화시키는 길이 열리리라고 타산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규식은 여운형이 자꾸 만나자고 요청하여 하는 수 없이 피동적으로 여러 차례 만났다고 밝힌 적이 있는데(『동아일보』 1946년 9월 10일자), 그런 사정으로 보아서 여운형이 김규식과 여러 차례 만나 지역통일전선을 세우자고 설득하였으나, 김구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에게 휘말려 있었던 김규식은 처음에 여운형의 노력을 건성으로 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운형은 평양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된 1946년 2월 8일 다음날 첫 방북길에 올랐다. 그날의 첫 방북을 시작으로, 그는 4월, 7월, 9월, 그리고 12월초부터 1947년 1월초까지 모두 다섯 차례나 평양을 방문하였다. 그가 평양을 줄이어 방문하고 있었던 시기는 남조선에서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이 미친 듯이 벌인 이른바 반탁반소운동으로 모스크바 국제협정의 이행에 커다란 난관이 생겨난 때였으며, 전위적 계급정당의 '간부파'가 불러온 좌우편향적 혼란으로 지역통일전선운동에 심각한 장애가 생겨난 때였으며, 밀리어드 굿펠로우가 넘겨준 거액 10만 원을 창당자금으로 하여 사회민주당이 출현함으로써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인민당을 깨려는 미국의 정치공작이 벌어지던 때였다.

그러한 난관과 혼란 속에서도 여운형은 진보적 대중정당 중심의 지역통일전선을 세우는 정치노선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모스크바 국제협정의 채택을 "임시정부 수립에 천재일우의 기회"(『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권, 96쪽)로 보는 올바른 정세인식을 잃지 않았으며, 군정청의 정치공작과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의 방해를 무릅쓰고 통일전선전략을 관철하기 위해 지역통일전선운동에 몸을 던져 목숨까지 바친 정치활동가로 살며 끝까지 싸웠다. 지역통일전선을 세우는 싸움에 여운형만큼 헌신·분투하였던 정치활동가는 없었다. 흉탄을 맞고 쓰러진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오로지 힘쓴 것은 지역통일전선운동을 밀고 나가려고 한 정치사업이었다.

진보적 대중정당 중심의 지역통일전선운동에 힘쓴 그는 생전에 자신이 지켰던 통일전선노선에 대해서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한민당은 자본가를 대표하는 계급정당이며,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한다. 그러나 인민당이 노동자, 농민, 소시민, 자본가 및 지주를 포함한 모든 인민을 대표한다. 오직 반동적 및 친일적 요소만 제외한다."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제1권, 257쪽) 진보적 대중정당에 대한 그의 생각은 1946년 8월 12일 『조선인민보』에 발표된 그의 글 「민주정당 활동의 노선」에 뚜렷이 밝혀져 있다. 여운형은 그 글에서 "인민적 민주주의노선의 성격을 천명하고 그것이 새로운 당의 기본노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가 파악하는 진보적 대중정당의 좌표를 설정하였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제1권, 427쪽)

여운형은 1946년 7월 25일에 결성된 좌우합작위원회를 이용하면서 지역통일전선운동을 밀고 나갔다. 그는 근로인민당, 한국독립당 일부세력, 민주주의독립전선 일부세력, 중도성향의 각계각층 사회단체들을 모아들여 1947년 6월 18일에 좌우합작위원회를 확대·강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171쪽)

여운형은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의 협박, 납치, 테러에 시달리며 1945년 8월, 1946년 10월, 1947년 3월에 죽을 고비를 아슬아슬하게 넘기면서도 지역통일전선을 세우는 정치사업에 온힘을 쏟았다. "나는 결국 죽을 거야. 그렇지만 죽더라도 분단은 막으려 노력해야 하지 않겠나"고 말하며(『한겨레신문』 1991년 12월 29일자), 통일전선의 길을 헤쳐가던 그는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교차로를 지나던 자신의 승용차 안에서 테러범이 쏜 두 발의 흉탄에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숨졌다. 그의 나이 예순 두 살이었다.

점령군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로서 점령군방첩대 요원으로 암약한 육군소령 조지 씰리(George E. Cilley)가 1949년 6월 29일자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여운형을 죽인 암살범은 1947년부터 1948년에 이르는 기간에 점령군방첩대의 비밀공작에 동원되었던 극우테러조직 '백의사'의 요원이라고 한다. 여운형의 목숨을 앗아간 45구경 권총은 극우테러조직이 점령군방첩대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연합뉴스』 2001년 9월 4일자) 이것은 여운형을 암살하고 지역통일전선운동을 파괴한 주범이 점령군방첩대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암살흉기가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는데도, 여운형은 평소에 기르던 콧수염을 깎고 밀짚모자를 쓰고 운동화를 신은 시골농부로 변장하고 평양을 찾아갔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다섯 차례나 평양을 찾아간 까닭은, 그가 암살된 직후인 1947년 8월 26일 점령군사령관 존 하지의 정치고문 조셉 제이콥스(Joseph Jacobs)가 국무장관에게 보낸 급송문서 제60호에 밝혀져 있다. 군정청 당국자들이 흉탄에 쓰러진 여운형의 소지품 속에서 찾아낸 그 비망록에는 미국에게 협력해오던 조선공산당이 갑자기 반미노선으로 돌아선 행동에 대해 해명해주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그가 이끄는 "인민당이 적극적 투쟁수단을 사용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고 싶다"는 구절이 적혀있었으며, "우리는 인민당 전술계획에 대한 솔직한 충고를 원한다. 우리는 좌익통일의 실현과 통일의 시점에 대한 정직한 충고를 원한다"는 구절이 적혀있었다.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권, 136-7쪽) 삼당합작과 좌우합작이 깨져나갈 위험에 빠졌던 1946년 9월 23일에도 여운형은 평양을 찾았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제1권, 466쪽)

여운형이 정력적으로 밀고 나간 지역통일전선운동을 평가하면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두 가지다.

1) 좌우합작공작에 관한 국무성의 지침에 따라 군정청이 여운형과 김규식을 내세운 좌우합작공작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국무성의 지침에 따라 군정청이 벌인 좌우합작공작은 진보적 사회정치세력과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의 지역통일전선운동을 개량주의적으로 변질시켜 남조선의 혁명적 정세를 개량화하며,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을 친미반공의 수렁으로 깊숙이 끌어들여 반동적 연립정부를 세우려는 교활한 정치공작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제국주의 미국은 서부독일, 이탈리아, 일본에서 이미 그러한 정치공작을 벌이고 있었다. 제국주의 미국은 전범국 세 나라에 대한 정치공작을 좌우합작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하여 조선에서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숙한 정치활동가 여운형은 그러한 정치공작을 거꾸로 이용하려고 하였다. 그는 진보적 사회정치세력과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의 지역통일전선을 세울 수 있는 공간이 군정청의 좌우합작공작으로 크게 넓어졌다고 보았다. 여운형은 "좌익의 최대 강적인 이승만과 김구를 약화시키고, 진보적인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통일전선을 형성할 수 있는"(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제1권, 420쪽) 방도를 좌우합작운동에서 찾았던 것이다. 좌우합작운동은 정반대의 방향에서 추진되는 군청청의 좌우합작공작과 여운형의 지역통일전선운동이 매우 절묘하게 결합된 그야말로 위기와 기회가 변증법적으로 통일된 정치운동이었다.

1946년 5월 25일 여운형, 김규식, 원세훈(1887-1959)이 좌우합작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 모인 회담은 존 하지의 정치보좌관 레널드 버취(Leonard Bertsch)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자리에서 김규식이 반탁의사를 밝히고 북조선의 소련과 공산당을 비난하자, 여운형은 자리를 떴다. (『독립신보』 1946년 5월 29일자)

그러나 여운형은 6월 14일에 허헌, 김규식, 원세훈과 함께 만나는 4인회담을 여는 데 성공하였다. 여운형은 김규식과 여러 차례 만나서 그를 설득하였고, 마침내 의견이 거의 일치되도록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조선해방연보』 143쪽) 반탁반소운동을 미친 듯이 벌이던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은 자기들 편에 있던 김규식이 좌우합작운동으로 돌아서자 그에게 공산주의자, 민족반역자, 친외세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제2권, 39쪽)

여운형은 자신이 밀고 나가는 통일전선운동이 "막부 삼상결정(모스크바 국제협정-옮긴이)에 의하여 규정되어 있는 미소공위를 속개시켜 외부적으로 우리의 과도정부 수립을 촉진시키고 내부적으로 남북의 통일을 기하는 정치협상"이라고 명확히 규정하였다. (『조선일보』 1946년 11월 7일자)

2) 성시백(1905-1950)이 여운형의 통일전선운동을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는 사실이다. 남(한국) 중앙정보부가 1972년에 펴낸 『북한의 대남공작사』에 따르면, 성시백은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 부부장으로 남조선에서 활동하다가 1950년 5월 15일 서울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었는데 한국(조선)전쟁이 터진 다음날 서둘러 총살되었다고 한다.

북(조선)에서는 그를 남조선혁명가로 부르는데, 그에게 공화국 영웅칭호와 조국통일상을 수여했으며 애국렬사릉에 그의 묘비가 있다고 한다. (『조선대백과사전』 제14권, 198쪽) 남(한국)에서는 1946년부터 5년 동안에 걸친 성시백의 정치활동을 '북로당남반부정치위원회 사건'으로 부르기도 하고(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제2권, 315쪽), '남조선정치공작위원회 사건'으로 부르기도 한다. (김민희, 『쓰여지지 않은 역사』, 102쪽)

성시백은 자기의 정치활동을 워낙 비공개적으로 벌였으므로, 여운형과 성시백의 관계가 밝혀진 것은 거의 없다. 다만 여운형이 성시백과 함께 38도선을 넘나들면서(『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권, 171쪽), 성시백의 도움을 받아 통일전선운동을 밀고 나간 것(김민희, 『쓰여지지 않은 역사』, 79-80쪽,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권, 245쪽, 258쪽 참조)으로 보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운형이 만일 성시백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였다면, 진보적 사회정치세력과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이 힘을 합하는 통일전선운동을 밀고 나가지 못하였을 것이다.

5. 지역통일전선운동이 좌절한 몇 가지 원인들

여운형이 밀고 나간 진보적 대중정당 중심의 지역통일전선운동이 좌절한 직접적인 원인은, 1946년 6월 14일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가 3원칙을 발표하자, 민전이 7월 25일에 그에 대한 반대의사를 담은 좌우합작 5원칙을 내놓고 민주의원이 다시 그에 대한 반대의사를 담은 좌우합작 8원칙을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민전의 좌우합작 5원칙과 민주의원의 좌우합작 8원칙이 맞부딪치는 소용돌이 속에서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은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1946년 9월 18일 점령군사령관 존 하지(John Reed Hodge, 1893-1963)는 좌우합작운동에 나선 김규식에게 좌우합작위원회에서 과도입법기구 수립문제를 제기하면 입법의원 절반을 추천하는 권한을 좌우합작위원회에 주겠다는 제안을 내놓았다. 하지는 똑같은 제안을 여운형에게도 내놓았다.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111쪽) 그 제안이 군정청이 파놓은 좌우합작공작의 함정이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김규식은 하지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여운형은 거절하였다. 여운형은 군정청에게 남조선의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의 지도핵심에 대한 체포령을 그만둘 것, 반군정투쟁으로 구속된 정치수를 풀어놓을 것, 출판자유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군정청은 그 요구를 거절하였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제1권, 466쪽)

민전은 1946년 9월 21일 자기가 내놓은 좌우합작 5원칙을 재확인하고,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을 절대 반대한다는 담화를 발표하였으며, 9월 23일부터 전평이 주도하는 대규모 총파업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지역통일전선운동을 향한 여운형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좌우합작 5원칙과 좌우합작 8원칙을 절충·조절한 끝에 좌우합작 7원칙이라는 합의안이 나온 때는 1946년 10월 4일이었다. 좌우합작 7원칙은 진보적 사회정치세력과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이 힘을 합하고 각당각파 각계각층 사회정치역량이 모두 모여든 통이 큰 지역통일전선을 세우기 위하여 내온 정치강령이었다. 좌우합작 7원칙은 다음과 같다.

1) 모스크바 국제협정에 의하여 남북조선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세울 것.

2) 소·미 공동위원회의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3)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며, 시가지의 기지 및 큰 건물을 적정 처리하며, 중요산업을 국유화하며, 사회노동법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 문제 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건국과업에 매진할 것.

4)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에서 과도입법기구에 제안하여 그 기구로 하여금 심리·결정케 하고 실시케 할 것.

5) 남조선에서 검거된 정치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조선 좌우의 테러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과도입법기구에 관해서는 일체 그 기능과 구성방법, 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 교통, 투표 등 자유를 절대 보장토록 노력할 것. (『동아일보』 1946년 10월 8일자)

모스크바 국제협정 이행, 소·미 공동위원회 속개, 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 제반 민주개혁 실시, 검거된 정치활동가 석방 및 테러활동 금지 등을 규정한 좌우합작 7원칙은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의 요구, 더 나아가서 인민대중의 정치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군정청 정치고문 윌리엄 랭던(William Russell Langdon, 1891-1963)은 국무장관에게 보낸 1946년 12월 5일자 문서에서 좌우합작위원회가 너무 좌경화되고 있다고 보고하였으며, 점령군사령관 존 하지는 육군참모총장 앨버트 웨드마이어(Albert Coady Wedemeyer, 1897-1989)에게 보낸 1947년 8월 27일자 문서에서 만일 좌우합작 7원칙대로 나라를 세우면 조선의 공산주의화는 불을 보듯 확실하다고 보고하였다. (신복룡, 『한국분단사연구』, 493쪽)

그런데 좌우합작 7원칙에서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군정청이 벌인 좌우합작공작의 핵심사항이었던 과도입법기구를 내오는 원칙이 들어있는 것이었다. 과도입법기구를 내오는 것은 제국주의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정세가 남조선 단독선거로 밀려갈 수 있는 위험한 함정이었다. 그런 까닭에 남조선의 진보적 사회정치세력 대부분은 과도입법기구를 내오는 원칙이 들어있다는 것 때문에 좌우합작 7원칙을 전면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러나 만일 진보적 사회정치세력, 중도적 사회정치세력, 근로대중의 삼대역량이 좌우합작 7원칙에 동의하고 통이 큰 지역통일전선을 완성하였다면, 그 전선의 강한 투쟁력으로 미국이 파놓은 과도입법기구라는 함정은 얼마든지 비켜갈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좌우합작위원회가 내놓은 세부사항을 살펴보면, 미국이 좌우합작운동을 남조선 단독선거로 끌고 가려고 파놓은 함정을 비켜갈 수 있는 예방조치들이 마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좌우합작위원회는 과도입법기구의 성원을 90명으로 정하면서 그 가운데서 45명은 민선(간접선거)으로 선출하고, 나머지 45명은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추천하여 임명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또한 "친일파, 민족반역자, 일제시대의 악질 관리 및 모리배"는 과도입법기구 성원에서 배제하고, 현재 진행되는 '국가독립운동'에 헌신·분투하는 '독립운동자'를 추천대상으로 하는 방안도 내놓았으며, 과도입법기구는 전국 총선거를 통하여 구성될 정식입법기구로 이른 시일 안에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게 밝혔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제1권, 470-1쪽 참조)   

만일 좌우합작 7원칙을 공동의 정치강령으로 하여 통이 큰 지역통일전선을 세우고, 그 원칙을 이루기 위하여 힘껏 싸웠더라면 제국주의 미국의 좌우합작공작은 깨져나가고 좌우합작운동은 지역통일전선운동으로 전환·발전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한(조선)민족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펼쳐지지 않았다. 남조선의 진보적 사회정치세력과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은 모두 좌우합작 7원칙과 좌우합작운동을 반대하였다. 진보적 사회정치세력 가운데서 조선인민당과 김성숙(1898-1969) 등이 그 원칙을 지지한 것을 제외하고 거의 다 반대하였다. 특히 박헌영은 그 원칙이 "기회주의적 정치브로커가 몽상하는 제3세력의 구성"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제1권, 475-6쪽) 결국 좌우합작위원회는 1947년 12월 7일 자진해체되었으며, 여운형이 밀고 나간 지역통일전선운동은 그의 죽음과 함께 좌절위기에 빠져들었다.

지역통일전선운동의 구심력을 지닌 여운형이 희생된 것은 지역통일전선운동에 커다란 손실을 안겨주었지만, 지역통일전선운동이 좌절한 원인을 여운형의 희생으로만 돌리는 것은 사회역사의 변화과정을 전면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지역통일전선운동이 좌절한 원인을 밝혀내는 데서 눈여겨보는 것은, 그 운동을 밀고 나가는 주체적 요인이다. 만일 당시 남조선의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이 여운형의 지역통일전선운동을 지지·성원하는 전술을 취하였더라면, 군정청의 방해책동이 아무리 심했어도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반동적 사회정치세력을 고립·약화시키고 폭넓은 지역통일전선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며, 그 전선을 전국적 범위의 민족통일전선으로 강화·발전시켰을 것이며, 그 전선의 힘에 의거하여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우는 길을 열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언제나 주체에게 있다는 진리는 여기서도 통한다. 지역통일전선운동이 좌절한 결정적 요인은 남조선의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을 이끈 지도핵심에게,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조선의 전위적 계급정당을 이끈 '간부파'에게 있었다. 지역통일전선운동이 좌절한 요인은 다음과 같다.

1) 남조선의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이 자기 발목을 잡은 정파적 분열을 끝내 넘어서지 못하였다. 그러한 정파적 분열은 1946년 8월초부터 11월말까지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이 합당하여 남조선로동당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삼당을 합당하려고 한 목적은 삼당체제로 나뉘었던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을 일당체제로 모여들게 하는 것이었는데, 합당하는 과정에서 정파적 분열이 심화되는 바람에 도리어 여섯 개 파로 갈라지고 말았다. 정파적 분열의 원인은 전위적 계급정당 '간부파' 속에 파고든 제국주의 미국의 분열와해공작, 그리고 '간부파'의 종파주의와 지도력 부족 등이었다.

정파적 분열의 제1원인은, 점령군방첩대가 '간부파' 속에 파고들어 분열와해공작을 저질렀다는 데 있다. 그러한 사실은 점령군방첩대가 1949년에 작성한 비밀보고서에서 드러났는데, '간부파'의 핵심이며 박헌영의 직계인물이었던 이강국(1906-1956), 임화(1908-1956), 그리고 이름을 적지 않은 남조선로동당 선전부장이 점령군방첩대 요원이었다. (『중앙일보』 2001년 9월 5일자) 이름을 적지 않은 사람은 미국인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가 『한국(조선)전쟁의 기원』 제2권에서 점령군방첩대 요원이었다고 밝힌 바 있는 설정식(1912-1956)인 것으로 보인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발굴한 자료에 따르면, '간부파'의 최고책임자 박헌영과 이승엽(1905-1956)은 1949년에 동유럽을 경유하여 북조선에 침투하여 간첩활동을 하다가 정체가 드러나게 되자 탈출하여 모스크바 공항에서 체포되었던 이경선(1899-?)과 현앨리스와 연계되었다. (『대한매일』 1995년 10월 2일자)

8.15 직후 남조선을 점령한 미국 육군 제24군단 예하에는 두 개의 정보기관이 있었는데, 점령군방첩대와 정보참모부로 알려진 지(G)-2가 그것이다. 제224 방첩대 파견대(the 224th CIC Detachment)가 점령군과 함께 서울에 들어온 때는 1945년 9월 9일이었다. 방첩대는 남조선에서 온갖 간첩활동만 벌인 것이 아니라, 극우테러단체를 뒤에서 조종하여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을 없애는 암살공작을 저질렀으며, 극우테러단체 요원을 북조선에 침투시켜 파괴·암살공작을 저질렀다. (『연합뉴스』 2001년 9월 4일자) 1946년에 일어난 10월 민중항쟁이나 여수·순천 항쟁을 이끈 핵심세력을 체포한 것도 점령군방첩대의 소행이었다. (『대동신문』 1949년 1월 18일자)

정파적 분열의 제2원인은 '간부파'의 종파주의였다. '간부파'가 여운형을 중심으로 추진된 지역통일전선운동을 반대한 까닭은, 그 운동이 성공하는 경우 여운형이 지역통일전선을 주도하게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운형과 손잡고 지역통일전선을 세울 수 있었는데도, '간부파'는 자기들의 주도권을 지키려는 종파적 집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런 오류는 1946년 5월 7일 조봉암이 '간부파'를 비판하면서 박헌영에게 보낸 공개편지(『조선일보』 1946년 5월 7일자)에 나타나있다.  

2) 남조선의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이 추진한 통일전선전략은 진보적 사회정치세력과 근로대중이 힘을 합하는 범위를 넘지 못하였다. 그들은 통일전선전략이 진보적 사회정치세력, 근로대중,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의 삼대역량을 모두 모아내는 통이 큰 통일전선으로 추진되어야 함을 알지 못했다.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의 지도핵심들 가운데는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을 무시하거나 반동적 사회정치세력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진보적 사회정치세력과 중도적 사회정치세력의 통일전선이 실패한 원인은, 한 마디로 말해서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이 통일전선전략을 정확히 알지 못한 데 있었다.

3) 남조선의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은 미국이 8.15 이후 조선에서 내밀었던 제국주의지배정책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특히 전위적 계급정당 건설노선을 고집하면서 점령군방첩대의 손안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간부파'가 진보적 사회정치세력과 근로대중을 이끌어 가는 과정에서 저지른 좌우경적 편향은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남조선점령군사령부와 군정청에 대해서 친선과 협조의 관계를 유지하는 우경전략을 한동안 추구하다가 이른바 '신전술'이라는 것을 내놓으면서 제국주의 미국을 적대하고 타격하는 좌경전략으로 갑자기 돌아섰다.

놀랍게도, 1946년 7월 4일 미국독립기념일을 맞아 박헌영은 점령군사령관 존 하지에게 제국주의점령군을 조선의 '원조자', '해방자'로 칭송하는 축하문을 보냈고,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은 미국독립기념일에 경하식(慶賀式)을 개최하였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제1권, 420쪽)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로부터 20여 일이 지난 7월 26일 박헌영은 미국을 제국주의반동국가로 규탄하면서 "미군정을 노골적으로 치자.", "테러는 테러로, 피는 피로써 갚자"는 이른바 '신전술'을 발표하고 근로대중을 폭력투쟁에로 마구 선동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찬행, 『힘찬 우리 역사』 제1권, 257-8쪽) 아직 준비되지 못한 폭력투쟁에 나서라고 재촉한 선동이 근로대중의 투쟁력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은 이처럼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좌우경적 편향을 저지르는 '간부파'의 오류가 점령군방첩대의 정치공작을 통하여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을 와해·몰락시키려는 제국주의지배정책의 산물임을 알지 못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당시 지역통일전선운동이 좌절한 가장 큰 원인은 '간부파'를 앞세운 점령군방첩대가 지역통일전선을 깨부수기 위하여 저지른 비밀공작이었다. 지역통일전선운동은 점령군방첩대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간부파'가 전위적 계급정당의 지도핵심으로 행세하는 한, 강화·발전되기는커녕 집중적인 탄압을 받아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6. 글을 맺으며

일제의 식민지 강점에서 풀려난 한(조선)민족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제국주의와 파시즘, 봉건주의를 몰아내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이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일전선의 기반 위에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에는 그러한 통일전선적 정권형태를 민주주의연립정부라고 불렀다. .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정부가 없으면 자주독립과 진보적 민주주의는 희망이나 지향에 머무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한(조선)민족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싸움에 앞다투어 나섰다. 그 싸움은 민족의 생사흥망을 결정하는 싸움이었다. 자기 희생을 각오하고 싸움에 나선 근로대중은 유명무명의 혁명가들, 정치활동가들과 함께 한(조선)민족의 현대사에 영웅적 투쟁의 위훈을 남겼다.

그러나 역사는 그 싸움에서 한(조선)민족이 완전한 승리를 얻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남(한국)에서는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우지 못했으며, 전국적 범위에서는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우지 못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주적 민주정부와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싸움을 오늘까지 60년 동안 이어오고 있다고 말해야 하리라. 그리하여 한(조선)민족의 현대사는 아직 미완성으로 남은 채 현재진행형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명백하게도,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현대사를 완성하는 길은 자주적 민주정부와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이며, 그러한 정부를 세우는 길은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하여 통일전선을 세우는 길이다. 60년 전이나 오늘이나 한(조선)민족이 가야할 길은 오직 하나의 길, 통일전선의 길이다. 아주 오래 전, 소·미 공동위원회 소련 수석대표 테렌티 스티코프(Terentyi Shtikov)가 지적한 대로, 만일 남조선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모스크바 국제협정을 지지하는 통일전선을 이루었다면 민주주의임시정부는 벌써 세워졌을 것이다. (『서울신문』 1947년 8월 3일자)

오늘 한(조선)민족 대 제국주의 미국의 심각한 대결이 벌어지는 정세에서 한(조선)민족이 승리하는 길은 남(한국)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지역통일전선을 세우고, 남(한국)과 북(조선)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통일전선을 세우는 길밖에 없다.

통일전선의 길을 헤쳐가는 한(조선)민족은 제국주의 미국의 분할점령기 3년 동안 벌인 지역통일전선운동의 경험과 성과, 그 운동이 좌절한 원인을 되새겨보아야 하며, 지역통일전선운동을 밀고 나가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를 오늘에 와서 되풀이하지 않아야 하리라. 이것이 8.15 조국광복 이후 3년 역사가 오늘 한(조선)민족에게 가르쳐준 값진 교훈이며, 6.15 공동선언 발표 이후 5년 역사가 한(조선)민족에게 제기하는 정치적 요구다.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한(조선)민족의 현대사는 머지 않은 장래에 남(한국)에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우고,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하여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움으로써 완성될 것이다. 오늘의 현실이 입증하는 대로, 민주노동당 중심의 지역통일전선을 세우기 위한 싸움에서, 그리고 6.15 공동선언을 실천하는 민족통일전선을 세우기 위한 싸움에서 그 완성의 가능성은 차츰 현실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2005년 5월 3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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