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생활에 미치는 출판물의 위력에 대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가 다 인정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지어 과거의 온갖 세계는 몇 개의 미개한 민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몇 권의 책에 의하여 지배되어 왔다고 말하고 있다. 역사는 이미 사회를 개조하고 발전시키는 데서 출판물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가에 대하여 충분히 증명하였다. 세계를 움직이는 것이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움직이는 것 중의 하나가 정의와 진리를 대변하는 양심적인 지성인들과 시대의 선각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출판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출판물을 가리켜 대중의 교양자, 선전자, 조직자라고도 표현한다.

혁명적 출판물은 또한 수령과 당, 대중을 하나의 유대로 이어주는 훌륭한 수단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레닌은 신문  「이스크라」를 발간하면서 그 첫 호에 『한점의 불꽃에서 불길이 타오르라.』는 글발을 제사로 실었는데 이것은 전세계가 공명하는 금언으로 되었다. 이 제사 속에 나오는 불꽃은 그 후 10월의 불길이 되어 러시아의 대지에 타번지었다.

나를 혁명의 길로 인도하는 데서도 실상은 출판물이 큰 작용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의 명언 가운데는 검이 못하는 일을 붓이 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새날」과  「볼셰비키」와  「농우」를 발간하면서 출판물이 가지고 있는 참맛을 보았으며 그 출판물들에 총이나 검에 못지 않은 기대를 걸었다.

출판물은 혁명투쟁의 위력한 무기의 하나이다. 이 무기의 사정거리는 무한하다.

우리가 백두산에 앉아서「3.1 월간」이나  「서광」 같은 출판물들을 통하여 조국을 잊지 말고 조국동포들을 잊지 말자고 호소하면 그 목소리를 남북만의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이 다 듣게 된다. 수백만 대중을 향해 동일한 사상과 투쟁구호를 일시에 신속히 선전하며 대중을 결속시키고 그들을 조직사상적으로 단련시키는 데서 출판물만큼 큰 위력을 발휘하는 선전선동수단은 아마 세상에 없을 것이다.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우리 사람들은 흔히 구두선전은  「입대포」, 연예활동을 통한 선전은  「북대포」, 출판물을 통한 선전은  「붓대포」또는  「글대포」라는 통속적인 말로 표현하곤 하였다.

구두선전이나 연예활동에 의한 선전은 출판물선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효과가 빠르고 선동성이 강하지만 그대신 출판물을 통한 선전은 지속성이 있고 지역적인 제한성을 받지 않는 것이 장점이다.

적들이 언론에 자갈을 물리고 국체유지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되는 모든 언동들을 총칼과 몽둥이로 가차없이 무찔러버리는 형편에서 혁명조직들에 대한 통일적인 지도를 보장하기 위한 조직선전활동은 부득불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비밀리에 진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사정은 우리로 하여금 유격전쟁에 가장 적합한 선전선동수단을 탐구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고 우리가 최상의 수단이라고 생각한  「붓대포」를 발사하는데 응당한 관심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백두산에 밀영이 창설된 후 거기에 출판소를 꾸리고 조국광복회 기관지인「3.1 월간」을 창간하였다.

동강에서 조국광복회를 창립할 때 우리는 그 기관지의 발행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반일민족통일전선이라는 큰 그릇에 각계각층의 민중을 다 담아가지고 항일대전을 거족적인 경지에로 끌어올리자면「입대포」나 「북대포」도 잘 써먹어야 하지만 특히  「붓대포」가 은을 내게 해야 하였다.

1930년대 전반기 민족통일전선을 위한 우리의 정치공작은 다분히 지역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우리의 통일전선공작판도는 주로 만주지방과 조선의 북부지대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국광복회는 그 판도를 조선전역과 중국본토, 일본, 소련, 미국을 비롯하여 우리 교포들이 살고있는 해외의 모든 곳에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깃발을 날리려고 하였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각지에 공작원들을 자주 파견하였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공작원들의 수효는 제한되어 있었다. 유격투쟁의 초기부터 동만에서 통일전선운동을 많이 해본 군정간부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을 북만에 떼두고 오다나니 일꾼들이 부족하였다.

일꾼의 부족에서 오는 공간을 메꿀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방도가 바로 출판물에 있었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기관지를 잘 만들어서 여기저기에 뿌리면 그 한부한부의 잡지나 신문이 곧 한명한명의 공작원을 대신할 수도 있다고 나는 확신하였다.

그런데 피치못할 사정으로 하여 기관지를 제때에 내오지 못하였다. 그 당시는 싸움도 많았고 유동도 심했다. 우리는 언제나 적의 사면포위 속에 있었다. 등짐을 지고 하루에도 수십수백리를 걸어야 했다. 적들은 우리에게 출판물을 발간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백두산에 밀영이 창설되고 그 밀영에 출판소가 꾸려지게 된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조국광복회 기관지  「3.1 월간」 을 가질 수 있었다.  「3.1 월간」 은 2천만의 총동원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려는 조국광복회의 이념달성에 이바지하는 것을 기본사명으로 담은 대중정치이론잡지였다.

우리는 조국광복회의 사명에 알맞는 제호를 고르려고 애를 쓰다가  「3.1 월간」 이라는 네글자를 찾아냈다.

 「3.1」은 3.1 반일인민봉기를 의미하였다. 3.1 인민봉기는 일제침략자들에게 거족적으로 대항해 나선 조선사람들의 장엄한 독립운동이었다.

그러므로  「3.1 월간」  이라는 제호는 민족의 의지를 담은 것으로서 거기에는 우리가 조선혁명의 주체노선을 고수하고 백두산을 타고앉아 전조선적인 판도에로 무장투쟁을 확대발전시킨다는 전략적 의도와 함께 온 민족의 총동원으로 전민항쟁을 마련해간다는 의미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3.1 월간」 은 조국광복회의 기관지로 발간되었으나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 기관지로서의 사명도 띠고 있었으며 온 나라, 온 민족을 상대로 하는 대중정치잡지로서의 사명도 동시에 담당수행하였다. 그러므로 이 잡지는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이나 공산주의 혁명가들만이 아니라 민족부르조아지나 종교인들, 독립군 병사들까지 다 읽고 사랑하는 범민족적인 잡지로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는 비서처 성원들을 기본으로 하여  「3.1 월간」  편집부를 꾸리고 주필로 기자경력을 가진 이동백을 임명하였다.

이동백의 주관하에 편집성원들은 창간호 발간준비를 본격적으로 밀고 나갔다. 그들은 잡지의 편집방향과 출판실무와 관련된 문제를 두고 논의를 많이 하였다. 이상적인 편집형식을 탐구하기 위하여 국내출판물들에 대한 연구도 진지하게 하였다.

그 당시 국내출판계에서는 신문과 잡지들의 폐간, 정간 바람이 사납게 불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애국적인 요소가 담겨져 있는 잡지들은 무조건 탄압을 당하고 폐간되어 사실 참고로 삼을만한 잡지라고는 몇 종 되지 않았다.

 「3.1 월간」  편집성원들은 참고적으로 국내잡지들을 들춰보았지만 그것들을 기준으로 삼거나 본따려고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모든 것을 창발적으로 새롭게 탐구하였다.

우리는  「3.1 월간」 을 대중정치이론잡지형식을 갖추게 하고 애국애족과 민족대단합에 관한 사상으로 그 내용을 일관시키기로 하였다. 매 호에 사론설을 주는 외에  『우리 민족 조국광복운동의 새 소식』,  『반일민족혁명전선 각지 승리소식』 ,  『문답란』, 『조국요문』,  『국제요문』,『문예란』 등 고정란들을 설정하기로 하였다.

원고는 비서처가 속해있는 조선인민혁명군 부대 안의 필진들을 통해 확보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면서 각지에서 활동하는 인민혁명군 부대들과 조국광복회 조직을 통하여 수집하도록 하였다. 원고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동만, 남만, 북만의 주요지점들에  「3.1 월간」 잡지의 특파원들을 두었으며 광범한 독자들의 투고를 장려하였다.

어떻게 하면  「3.1 월간」  편집사업을 독자대중의 사업으로 전환시키겠는가, 어떻게 하면 각계각층의 독자들이 잡지를 위해 정상적으로 원고를 제공하게 하겠는가, 어떻게 하면 모든 독자들이 편집내용을 풍부히 하고 편집형식을 부단히 개선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언들을 보내게 하겠는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논의하고 모색하던 끝에 이동백은 투고규정이라는 것을 고안해 냈다.

그가 만든 투고규정을 읽어보니 구미가 동하였다. 그 규정을 읽으면 글재간이 둔한 사람도 붓을 들고 그 무엇인가를 일사천리로 쓰고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어있었다. 그 규정의 앞머리에는 각계 애국지사의 명론탁설을 수집하기 위하여 투고를 환영한다는 청탁문이 실려있었고 그 뒤로는 원고내용에 따르는 글자의 수와 투고방법, 열성투고자에 대한 우대적용 등의 조항들이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었다.

우리는 조직선을 통해 그 규정을 내려보내고 창간호에도  『투고환영!』이라는 제목을 달고 소개하였다.

투고규정을 내려보낸지 얼마 되지 않아 곳곳에서 원고들이 많이 날아들어왔다. 그 원고들을 받고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던  「대통령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도 투고된 형형색색의 글들을 기쁜 마음으로 거의다 읽어보았다.

양세봉 독립군의 참모장이 보내온 축하편지에도 조국광복회 창립을 진정으로 환영하는 그들의 심정이 절절하게 반영되어 있었지만 남만에서 조국광복회 대표로 활동하고 있던 이동광과 상해에 거주하고 있던 박아무개 교포대표와의 상봉소식을 적어보낸 글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상해교포대표는 북경, 천진을 비롯한 중국의 여러곳에서 다년간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으로서 조국광복회 창립소식을 듣고 남만에까지 찾아와서 국내외에서 조국광복회를 축으로 통일적인 전선을 전개할 데 대한 건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조국광복회 조직을 중국본토의 광활한 지역에 뻗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우리는 그 원고를 받자 곧 유능한 정치일꾼 한사람을 이동광에게 파견하였다.

이처럼  「3.1 월간」 의 발간준비과정에 편집부는 조국광복회 조직망을 확대강화하는데 직접적으로 이바지하는 통신처와 같은 역할도 수행하였다.

조국광복회의 한 구위원회가 인민혁명군을 고무하기 위하여 축기를 준비하면서 보내온 편지도 역시 감동적인 사연으로 엮어져 있었다.

 『…애국동포들의 열렬한 동정에 의하여 자기의 빈약한 호주머니에서 1전, 2전 혹 은 1원씩을 거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미 모은 총액은 8원 71전인데 이것을 가지고 다른 군수품을 사서 보내려고 하여도 너무나 약소하기 때문에 우리들과 전체 애국동포들의 의견에 의하여 환영기를 만들어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하였습니다.…』       

우리는 성의껏 보내온 그 편지들을 모두 창간호 지면에 싣게 하였다.

창간준비를 하면서 제일 걱정하던 원고들이 예상외로 넉넉히 마련되자  「대통령감」은 신바람이 나서 돌아갔다. 하루는 그가 사령부에 나타나 싱글벙글하면서 내앞에 여라문장의 백지를 불쑥 내놓았다.

『다른 원고밑천은 든든합니다. 이제는 제일 중요한 창간사와 논설만 있으면 편성에 들어가겠는데 그것들은 아무래도 조국광복회 회장동지가 써줘야 하겠습니다. 여기 종이를 가져왔습니다.』

『그럼 주필은 무얼 하겠습니까. 문장가로 소문난 주필선생이 퍼렇게 살아계시는데 제가 밀어제끼고 그 자리를 가로타란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창간사야 응당 주필선생이 맡으셔야지요.』

나는 일이 바쁘기도 했지만 수난의 길을 걸어온 그 성실한 문필가에게 창간사를 맡기어 가슴에 쌓였던 망국의 설움을 마음껏 터치고 2천만 겨레를 향하여 내뿜고 싶었던 불같은 말들을 실컷 외치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기어이 창간사를 떠맡기었다.

그대신 나는  「3.1 운동의 회고」라는 제목의 논설을 쓰기로 하였다. 그러나 바쁜 일거리가 너무 많아서 원고를 제때에 써주지 못하였다. 어쩌다 짬을 내어 집필을 시작하던 때에 공교롭게도 밀정을 잡았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적  「토벌대」가 우리 밀영쪽으로 밀려들고 있다는 통보가 들어와서 전장으로 출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당시 내게 제일 그리웠던 것은 김혁과 최일천이었다. 카륜과 오가자 시절의 막역지우들이었던 「볼셰비키」의 주필 김혁과 「농우」의 주필 최일천은 쌍벽을 이루는 재능있는 문장가들이었다.

시인인 김혁의 글이 범람하는 장강처럼 호방하고 격동적이었다면 최일천의 글은 민족적인 색채가 짙으면서도 지성도가 높고 분석이 예리하였다. 김혁은 「볼셰비키」에 자기가 순수 작사, 작곡한 혁명적인 노래들도 이따금 편집해 넣곤 하였다.  「볼셰비키」에 내보낸 그의 작품들 가운데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자본주의사회 저주가」와  「반파벌가」이다.

 「자본주의사회 저주가」는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저주와 증오의 감정을 가지고 착취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노래였고  「반파벌가」는 감자도장이나 새겨가지고 다니면서 남의 등에 업혀 당을 창건하려고 하는 종파사대주의자들의 정체를 예리하게 발가놓은 풍자가요였다.

김혁이나 최일천이 우리곁에 있었다면  「대통령감」의 부담을 적지 않게 덜어주었을 것이다.

나는 3.1 운동에 대한 회고논설도 조국광복회 창립문건도  「피바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 대본들처럼 적들과의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는 가운데서 짬시간을 내어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3.1 월간」  창간호 발간준비에서 마지막까지 가장 어려운 문제로 제기된 것은 출판기자재의 구입이었다. 그때 우리에게는 낡은 등사기 한 대밖에 없었다. 등사잉크도 노라도 등사원지도 종이도 다 부족하였다. 출판소의 일꾼들은 부족한 그 모든 것을 자체로 해결하였다. 등사잉크가 떨어지면 양철로 고깔을 해씌우고 봇나무껍질을 태우면서 고깔에 붙은 그을음을 긁어모았다. 그 그을음을 기름에 재웠다가 공장에서 만들어낸 등사잉크와 섞어 사용하였다. 로라가 못쓰게 될 때에는 아교에 송진을 섞어서 끓여가지고 형틀에 부어 만들어냈고 강필이 못쓰게 되면 돗바늘을 가지고 만들어 썼다.

「3.1 월간」 을 위해 바친 그들의 피어린 노력은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표본으로 내세울만한 것이었다.

그 노력은 마침내 훌륭한 결실을 맺었다. 1936년 12월 1일  「3.1 월간」  창간호가 마침내 세상에 탄생한 것이다.

그날 「대통령감」은 맨처음으로 제책된 창간호 한부를 들고 와서 말하였다.

『덧없이 흘러간 나의 한생에서 그래도 값있는 일을 한 것이 있다면  「3.1 월간」  창간 호를 만든 것입니다. 장군님, 바쁘시더라도  「3.1 월간」 의 고고지성을 한 번 들어봐주십시오.』

그는 격정에 넘쳐 창간사의 첫 대목을 읽었다.

『우리 조선이 강도왜놈들에게 강점되어 2천 3백만 백의민족이 일제의 망국노예로 된 후 우리들의 생명과 인권은 개나 돼지만큼도 못하였다.』

「3.1 월간」 은 발행되자마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었다. 창간호에 대한 군대와 인민의 반영이 대단하였다. 각 지방의 조국광복회 조직들에서는  「3.1 월간」 의 발행을 축하하는 환영인사와 함께 배포부수를 늘여줄 것을 요구하는 청탁편지들을 보내왔다. 조직의 명의로 다음호의 잡지를 신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가  「3.1 월간」  발행에 필요한 출판기자재 명세를 작성해가지고 그 해결방도를 한창 모색하고 있을 때 박달이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성능좋은 새 등사기 2대를 해결하였다. 단천역에 도착한 등사기를 각각 한 대씩 감자포대 안에 넣어가지고 달구지로 갑산까지 운반하였는데 경찰의 감시가 심해서 산속에 종일 숨어있다가 밤이 깊어서야 민족해방동맹 출판부가 자리잡고 있던 오풍동에 가져갔다고 한다.

박달은 처음에 그 등사기를 다 우리 밀영에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한 대만 우리가 쓰고 한 대는 갑산에 떨구어 조선민족해방동맹 기관지를 발간하게 하였다. 조선민족해방동맹에서는 「화전민」이라는 제호로 기관지를 발간하고 있었다.

박달이네가 구해보낸 등사기의 성능이 아주 좋았다. 낡은 등사기를 사용할 때보다 능률이 몇배나 높아 다음호부터는 잡지를 수백부씩 밀어냈다.

 「3.1 월간」 의 인기는 우리의 예상을 초월하였다. 독자들이 이 잡지를 애독한 것은 편집형식이 참신한 데도 있었겠지만 주로는 그 내용이 민족통일전선의 사상으로 일관되어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 잡지가 민족 앞에 나선 시대적 과제를 가장 민감하고 정확하게 반영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본군국주의의 파쇼적 공세에 대처하여 조선의 혁명가들이 선차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각계각층 인민들을 반일민족통일전선에 튼튼히 묶어세워 전민항쟁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3.1 월간」 이 발간되면서부터 조국광복회 조직망을 확대강화하는 사업은 빠른 속도로 추진되었다.

인민혁명군 참군자들의 대열과 우리의 지지자, 동정자 대열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한두방의  「붓대포」가 이렇게도 큰 힘을 내는가 하고 그  「붓대포」의 임자들조차도 놀랄 지경이었다.

박인진은 언제인가 권영벽을 만난 자리에서 영북의 거의 모든 천도교인들을 단시일내에 조국광복회 조직망에 망라시키는데서는  「3.1 월간」 의 도움이 매우 컸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3.1 월간」 을 만들어내는데서 첫손가락에 꼽아야 할 공로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이동백이다. 조국광복회를 창립할 때에도 그의 수고가 적지 않았지만  「3.1 월간」 의 창간과 발행에 바친 그의 수고에는 비길 바가 못된다. 그는 인생말년을 완전히  「3.1 월간」 과 함께 살았다.

나는 80평생을 살아오면서  「대통령감」만큼 종이를 아껴쓰는 사람은 한번도 보지 못하였다. 그는 나뭇잎사귀만한 종이도 다 건사해두었다가 필요한 때에 글씨를 깨알같이 박아가며 아주 요긴하게 쓰곤 하였다.  「대통령감」은 글을 쓸 수 있는 백지에 담배를 말아피우는 사람들을 보면 종이를 아낄 줄 모른다고 호되게 비판하였다. 그 자신은 늘 대통으로 담배를 피우곤 하였다. 그가 대통에 담배를 담아 피우게 된 동기도 종이를 아끼려는데 있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사연은 어찌 되었든지간에 그 대통이 이동백으로 하여금 퍽으나 많은 종이를 절약하게 한 것만은 사실이다. 만일 그 대통이 없었더라면 그는 일생동안 수천매에 달하는 종이를 소비하였을 것이다.

조국이 해방되면 우리의 항일혁명투쟁사를 써야겠다고 하면서 단 하루도 번지지 않고 일기를 썼고 손에 넣을 수 있는 자료들을 부지런히 모아서 배낭 속에 정히 간수하던  「3.1 월간」  주필 이동백은 양목정자 밀영에서 적 「토벌대」의 불의습격을 받고 희생되었다. 적들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노약자들과 함께  「대통령감」을 사살하고 밀영에 불을 질렀다. 「대통령감」이 귀중히 여기며 고이 보관해왔던 많은 문건들과 사진자료들, 일기책들이 그때 그의 육신과 함께 불타서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가 독립된 조국에 드릴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선물이라고 여겨오던 그 역사자료들이 하루아침 사이에 재가되어 날아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통분함을 금할 수 없다. 그 큼직한 보따리들 속에서 그가 쓴 일기책들만이라도 남아있었더라면 지금 우리의 후대들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훗날 양목정자 밀영에 갔을 때 나는 불탄 초막자리에서 그의 유골을 찾아 손수 안장해 주었다. 생전에 이동백이 그처럼 애용하던 대통만은 찾아내지 못하였다. 모든 것이 불타고 재가 되어서 이 세상에 그의 유물로 남겨둘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불속에서도 타지 않고 남은 것은 그 걸출한 늙은 인텔리혁명가에 대한 항일혁명투사들의 감회깊은 추억뿐이었다. 그런데 몇해전에 백두산 밀영이 발굴되면서 그의 필적으로 된 구호나무들이 발견되었다. 나는 마치 살아있는  「3.1 월간」 의 주필을 만나보는 것 같아 그 구호나무앞에서 오래도록 자리를 뜨지 못하였다.

이동백은 항일혁명시기에 내가 만나본 모든 지식인들 가운데서 가장 양심적이고 혁명적이며 박식한 인텔리의 한사람이었다.

각이한 나라들에서 각이한 시대에 산 인텔리의 선진적 대표자들은 사회 혁명과 개조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놀았다.

근대이후 우리 나라에서도 혁명운동발전에서 인텔리들이 논 역할이 매우 크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저러한 제한성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경로와 방법으로 우리 나라의 민족해방운동과 공산주의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동백도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1920년대에 우리 나라 인텔리들이 걸을 수 있었던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길을 걸어 항일무장투쟁대오에까지 들어선 혁명적 인텔리의 대표자였다.

이동백은 우유부단하고 동요하던 인텔리로부터 가장 적극적인 무력항쟁에 복무하는 진짜배기 혁명적 인텔리로 된 사람이었다.

백두산 시절의 대내출판일꾼들 중에서 이동백 다음으로 손꼽을 수 있는 문필가는 국내의 적색농조에서 활동하다가 박달과 이제순의 줄을 타고 우리 부대에 입대한 김영국이다.

그는 군인으로서는  「갑」의 계열에 속하지 못하는 인물이었으나 문필능력으로 보면 특별한 경쟁자가 없는 재간둥이었다. 그가 강필글을 쓴 것을 보고서는 기계로 찍어낸 것 같다고 하면서 모두가 혀를 내두르곤 하였다. 하루저녁사이에 원지 여라문장씩 써내면서도 글체가 활자처럼 일매져 「대통령감」한테서 늘 칭찬을 받았다.

흠이라면 자유주의가 있고 건망증이 심한 것이었다. 얼마나 건망증이 심하였던지 언제인가는 휴식장소에 총을 놓아둔 채 거의 20리나 걸어가서야 『아뿔싸, 내 총!』하고 허둥거리며 되돌아간 적도 있었다. 그 때문에 단단히 비판도 받고 처벌도 받았다.

『총은 동무의 생명이나 다름없는데 제 목숨까지 떼두고 떠나는 그런 얼떨떨한 정신을 가지고 글은 어떻게 짓소?』

처벌이 해제된 다음 내가 이렇게 물었더니 김영국은 뒤더수기를 긁으면서 비위좋게 『세계적인 문호들은 거의 다 건망증이 많았습니다』하고 대답해서 나도 『대통령감』도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열정적인 문학도였던 김영국은 짬만 있으면 시나 소설작품을 창작하곤 하였다. 우리가 1937년에 대내기관지로서 발간한 신문이었던 「서광」의 지면에는 그의 작품들이 여러편 실리었다. 지금도 어렴풋하게 기억되는 것은 「서광」의 창간호에『남의 집 남편은 혁명군에 갔는데 우리 집 남편은 자위단에 갔다.』 는 구절이 들어있는 네댓련짜리 가사가 게재되었던 사실이다. 김영국은 그 가사를 발표하면서  「아리랑」곡조에 맞춰 부르라는 설명까지 달아놓았다.  「서광」의 2, 3, 4호에는 그의 단편소설이 연재되었다. 그는「서광」의 주필이었다. 그 젊고 재능있는 문필가는 1938년 가을에 김주현과 함께 허약자들과 부상병들을 위해주려고 산청을 털다가 적「토벌대」의 저격을 받아 그만 아깝게도 너무나 일찍이 우리 곁을 떠났다.

주간정치신문인  「서광」에는 유격대원들을 위한 정치군사학습자료들이 많이 실리었다. 내가 집필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도  「서광」에 발표되었다.

 「서광」의 열성필자들 가운데서 두각을 나타낸 또 하나의 인물은 임춘추였다. 그는 김영국을 도와  「서광」의 편집과 발간에 적극 참여하였다.

 「종소리」는 마당거우 밀영에서 군정학습을 시작하면서 발간한 대내주간신문이었는데 군정학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치군사학습자료들과 교양자료들을 주로 싣곤 하였다.

 「종소리」의 주필사업은 최경화가 담당하였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지만 어려운 신문발간사업을 능숙하게 주관하였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은 비결은 평소에 공부를 많이 하여 다방면적인 지식을 섭취한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최경화는 고향에 있을 때 자습으로 대학입문서들을 독파하였다.

그가 하는 말은 하루종일 들어도 싫지 않았다. 독자들이 하품을 하면서 읽는 눅거리 통속소설도 일단 그의 입만 거치면 일류급의 명작으로 되곤 하였다. 말재주는 그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쟁기였고 재산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선동연설을 많이 시키었다. 인민들이 그의 연설만 들으면 홀딱 반하였다.

최경화는 고향에 있을 때 청년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다가 적들의 추적을 피하여 장백으로 망명해온 사람이었다. 장백에 와서는 서당훈장의 간판을 가지고 군중계몽에 몰두하였다. 물론 조국광복회 조직에도 인차 가입하였다. 그는 권영벽의 공작선과 연계를 가지면서부터 17도구 당지부 조직부 책임자로, 성진(김책시) 방면 정치공작원으로 되었는데 순간적인 실수로 지하사업을 더 계속할 수 없게 되자 유격대에 입대하였다.

그가 입대하자 여대원들은 미남자가 왔다고 수곤거리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생김새보다 재능과 인품에 더 마음이 끌리었다. 최경화는 글재주도 뛰어나고 그림도 썩 잘 그리는 보기 드문 재사였다. 「종소리」의 삽화는 대부분 그가 직접 그려넣은 것이었다. 정치상학시간에는 강사로 나섰고 전투장에서는 선참으로 돌격에 나서곤 하는 선봉투사였다. 1938년 초에 있은 정안툰 전투때에도 최경화는 자진해서 돌격조에 망라되어 부대의 진격로를 개척하였다. 그러다가 치명상을 입고 최후를 마치었다.

최경화와 같은 훌륭한 전우를 잃은 것이 너무도 애석하여 나는 그가 전사한 날 밤새껏 눈물을 흘리면서 추도사를 썼다. 우리는 혹한 속에서 그의 추도식을 엄숙히 거행하였다.

대내의 반일청년동맹 기관지였던  「철혈」은 1939년 말의 대부대선회작전을 앞두고 발간된 속보형식의 주간신문이었다. 이동백, 김영국, 최경화와 같은 쟁쟁한 필진들이 이미 다 우리 곁을 떠난 뒤여서 출판물의 편집과 발행은 초학도들에게 떠맡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는 요령을 배워주며 일을 시켜갈 셈치고 사령부 당지부사업과 청년동맹사업을 겸해서 맡아보던 강위룡에게  「철혈」발간을 위임하였다. 처음에 강위룡은 두 손을 내저으며 그런 일만은 못하겠으니 제발 다른 사람에게 맡겨달라고 하였다. 우리가 강권을 해서야 그는 마지못해 분공을 받아들이었는데 대중의 도움을 받아가며 결국은 별 손색이 없이 신문을 만들어내곤 하였다.

 「철혈」도  「3.1 월간」 이나  「서광」과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자료들을 편집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철혈」첫호에 실린 이을설에 대한 소개기사와 날창만으로 적의 신식 체스꼬제 기관총을 노획한 한 신입대원의 전투담은 그런 긍정자료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석탄 밀영에서 군정학습을 끝낼 무렵에 우리는 청년들의 용감성과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하여 전투에서 무훈을 세운 청년들에게 영예의 붉은띠를 수여하는 제도를 새로 제정하였다. 띠를 수여받은 대원은 명절날이나 부대가 특별한 의의를 부여하는 경사로운 날에 그것을 군복위에 띠고 지내도록 하였다.

군정학습총화를 계기로 발간한 「철혈」특간호에는 학습총화에 대한 기사들과 아울러 새로운 표창제도의 제정소식 같은 것도 실어줌으로써 구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게 하였다.

이리하여 우리의 혁명적 출판물들은 독자대중의 훌륭한 선전자, 교양자로 되었을 뿐 아니라 영웅적 위훈의 고무자로 되고 투쟁의 적극적인 방조자로 되었으며 생활의 친근한 길동무로 되었다.

 「3.1 월간」 을 비롯한 항일혁명시기의 우리 출판물들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그것이 몇몇 인재들의 주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광범한 독자대중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하여 집필, 편집, 발간되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모든 사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출판물을 만드는데서도 대중을 동원하고 대중에 의거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우리 부대가 남패자에 머물러있을 때였다고 생각된다.

어느날 밀영을 거닐던 나는 한 여대원이 숲속에 홀로 앉아 공책에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자기가 하는 일에 얼마나 골똘했던지 그는 인적기도 느끼지 못하고 그냥 혀끝으로 연필심을 적시며 그 심끝에서 낙수방울처럼 힘들게 떨어지는 글에만 음해있었다. 무슨 글을 쓰는가고 물었더니 농촌에 나가서 침투할 선전문이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그 글을 읽어보고 몹시 놀랐다. 소학교 중퇴생의 글치고는 매우 활달하고 세련된 글이었기 때문이었다.  『재만조선 청년들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된 그 글은 씨가 있고 주장이 뚜렷하였다. 그래서 그 글을 약간 수정가필하여  「3.1 월간」 에 실어주었다. 독자들이 그 잡지를 읽고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이처럼 소학교조차 변변히 다녀보지 못한 평범한 작식대원들도 우리 출판물의 필자로 되었다. 대중의 적극적인 참가와 지지에 의해서만 우리는 아무것도 보장받을 수 없는 간고한 조건에서도  「3.1 월간」,  「서광」,  「종소리」,  「철혈」과 같은 출판물들을 발간해낼 수 있었으며 혁명적 출판물 전통의 튼튼한 뿌리를 마련해놓을 수 있었다.

오늘 우리 나라에는 특별한 공로가 있는 출판보도부문 일꾼들에게 최고상으로  「3.1 월간상」을 수여하는 표창제도가 제정되어 있다. 이동백이 살아있었더라면 제1호  「3.1 월간상」은 그에게 수여되었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출판보도부문 일꾼들이 메달 하나 달아보지 못하고 돌아간 혁명적 출판계의 제1세들을 잊지 말아줄 것을 당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