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침략전쟁책동과 탄핵반대 촛불시위, 그리고 민중운동의 선택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이등병 카네바라의 죽음과 신속기동군의 북진기동훈련
2. 국민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위장술
3. 광화문 앞 광장에서 총리를 참살한 군중
4. 총선정국에서 민중운동의 선택과 학생운동의 선택은 어떻게 다른가
5. 왜 중산층 시민의 사회개량노선으로 퇴보하였는가

 

1. 이등병 카네바라의 죽음과 신속기동군의 북진기동훈련

『아사히신붕』 2004년 3월 28일자는 일본 도쿄도 코다이라시에 있는 국립정신병원 폐쇄병동에서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였던 정신질환자의 비극적 죽음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00년 2월 15일에 그 병동에서 비극적 죽음을 맞았던 사람은 일본 육군 이등병 출신의 카네바라 햐쿠쇼쿠(金原百植)이라는 이름을 가진 일흔 다섯 살의 노인이었다. 그 노인이 숨을 거두며 남긴 것은 현금 4만엔과 외국인 등록증이 들어있는 손때 묻은 지갑 한 개가 전부였다. 그의 외국인 등록증에는 국적이 조선으로 적혀있었다. 카네바라 햐쿠쇼쿠라는 일본 이름은 김백식(金百植)이라는 본명을 창씨개명한 것이었다. 

1944년 일제강점 말기, 열 아홉 살 난 조선청년 김백식은 이른바 태평양전쟁에 징병으로 끌려나갔다가 전쟁의 공포와 충격을 이기지 못하여 정신질환에 걸렸고 1945년 5월말부터 2000년 2월 숨을 거두기 전까지 55년 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폐쇄병동에서 죽음 같은 삶을 이어갔다. 담당 간호사의 말에 따르면, 김백식은 거의 말문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해가 질 무렵이면 창가에 걸터앉아 병동매점에서 산 과일즙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것이 그 노인의 하루 일과였으며, 이따금씩 조용히 조선말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자신의 일생을 잔인하게 짓밟은 원수의 나라에서 55년 동안 폐쇄병동에 갇혀 죽음 같은 삶을 이어가다가 세상을 떠난 김백식의 비극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김백식이 55년 동안 폐쇄병동에 갇힌 정신질환자로서 겪었던 비참한 생활은 제국주의자들이 자행하는 침략전쟁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잔인하게 파괴하는지를 말해준다. 침략전쟁은 인간이 누려야 할 행복을 빼앗고, 인간의 삶을 짓밟으며, 인간의 목숨을 끊어버린다. 

일제침략전쟁에 징병으로 끌려나갔던 조선청년은 41만7천82명이었다. 김백식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김백식의 고통과 비극이 그 한 사람의 고통과 비극이 아니라, 일제침략자들이 한(조선)민족 전체에게 강요했던 고통과 비극이었음을 말해준다. 나는 일제침략자들에게 자주권을 강탈·유린당했던 한(조선)민족의 참상이 김백식의 비참한 일생에서 극적으로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침략전쟁에 징병으로 끌려갔다가 정신질환에 걸렸던 김백식이 폐쇄병동에서 55년 동안 비참한 삶을 이어갔던 것은, 자주권을 상실한 민족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인 것이다. 

자주권 상실과 침략전쟁이 빚어낸 참상은 1945년 8월 15일 이전 일제강점기에 일어났던 태평양전쟁의 과거사가 아니다. 김백식이 겪었던 고통과 비극은 태평양전쟁이 남긴 후유증이 아니다. 한(조선)민족에게 고통과 죽음을 강요하는 제국주의자들의 만행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제국주의자들의 만행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남(한국)의 일반대중이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그들의 만행이 과거사나 후유증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 3월 8일부터 남(한국) 각지에서는 미국 해군과 해병대의 대규모 기동훈련이 연속적으로 실시되었다. 3월 8일이라는 시점은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미군 해병대 제3원정군이 지난 2월 23일부터 필리핀 전역에서 실시하였던 신속기동훈련이 끝난 바로 다음날이다. 남(한국) 각지에서 실시되는 기동훈련은 오는 4월까지 계속된다. 신속기동훈련에 참가하고 있는 미군 해병대 병력은 약 5천 명이다. 그들이 출동한 기지는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해병대기지와 히로시마 부근에 있는 이와쿠니(岩國) 해병대기지이다. 미국 태평양군 해병대사령관 월리스 그렉슨(Wallace C. Gregson, Jr)은 비무장지대 부근의 훈련장을 방문하여 "우리는 올해 1994년 이후 가장 많은 해병대원을 훈련에 참가시키고 있다. 이 수치는 걸프지역과 아프가니스탄에 배치된 병력규모와 맞먹는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4년 3월 25일자)

주목할 것은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내용이다.

첫째, 미국 태평양군 해병대사령부는 미국의 신속기동전략에 따라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해병대 제3원정군을 남(한국)과 필리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신속하게, 그리고 신축적으로 이동·철수하는 작전을 훈련하고 있다.

둘째, 미국 태평양군 해병대사령부는 미국의 신속기동전략에 따라 오키나와 미군 해병대를 고속수송선으로 실어 나름으로써 24시간 안에 한(조선)반도에 상륙시키는 신속배치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셋째, 미국 태평양군 해병대사령부는 미국의 신속기동전략에 따라 오키나와 해병대기지보다 한(조선)반도에 출동하는 거리가 훨씬 가까운 일본 야마구치현(山口縣) 이와쿠니 해병대기지를 보강하고 있다. 이와쿠니 해병대기지에서는 바다를 메워 새로운 활주로를 건설하는 공항확장공사와 항공모함을 비롯한 대형 군함들이 정박할 수 있는 군항확장공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넷째, 미국 태평양군 해병대사령부는 한(조선)반도에 출동시킨 해병대 병력을 경기도 포천에 있는 미8군 로드리게스(영평) 종합훈련장에서 훈련을 마친 뒤에 임진강 맞은 편 산능선을 따라 배치된 미군기지 캠프 그리브스로 이동시켜 최전방 전투훈련을 전개하도록 명령하였다. 캠프 그리브스는 판문점을 지척에 두고 있는 민통선 안의 최전방 기지이다. (『통일뉴스』 2004년 3월 29일자 보도) 미군 해병대의 대규모 기동훈련은 지난 시기 한(조선)반도 남부지역에서 실시되었으나, 올해는 중부지역에 있는 평택에 상륙하여 판문점 부근 최전방까지 올라가는 북진기동훈련으로 실시되었다. 이전의 기동훈련은 부산항에 있는 미군전용 제8부두를 이용하여 상륙한 미군 해병대가 경상북도 포항 부근 해안에서 실시하는 기습상륙훈련이었다. .

다섯째, 지난 3월 8일부터 실시된 이른바 '자유기치(Freedom Banner) 04'라는 작전명의 신속기동훈련은 3월 22일부터 27일까지 실시된 한미연합전시증원훈련(RSOI)과 야전기동훈련인 독수리훈련(Foal Eagle), 그리고 코리아통합훈련(Korean Integrated Training Program)과 연계되었다. 미군 해병대 병력은 '자유기치 04' 훈련에 1천명, 한미연합전시증원훈련 및 독수리훈련에 3천명, 그리고 코리아통합훈련에 1천명이 각각 배치되었다. 주목할 것은, 미군 해병대의 북진기동훈련(Freedom Banner 04)과 한미연합해군 및 해병대의 기습상륙훈련(Foal Eagle)이 연속적으로 전개되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한미연합군의 전시증원훈련(RSOI)과 작전통합훈련(Korean Integrated Training Program)이 하나의 지휘체계로 통합되어 실시되었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다 아는 대로, 미군의 이러한 군사훈련은 지난해 3월에 시작된 이라크 침략전쟁에서 군사작전으로 전개된 바 있다.

여섯째, 미국 해군 태평양함대 제7함대에 소속된 이지스급 구축함인 오브라이언함(USS O'Brien)과 존 맥케인함(USS John S. McCain)이 한(조선)반도 해역에 출동하였다. 이 두 척의 이지스급 구축함은 인천항에 입항하였으며, 서해와 남해와 동해를 오가면서 기동훈련에 참가하였다. 『연합뉴스』 2004년 3월 27일자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는 북(조선)의 미사일 전력에 대응하기 위해 2005년까지 동해에 첨단요격미사일인 '스탠더드 미사일 3(Standard Missile 3)' 10기를 장착한 이지스급 구축함 두 척을 배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번 군사훈련에서 그것은 계획이 아니라 이미 현실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일곱째, 한미연합군의 기습상륙훈련은 미국 해군 태평양함대 사령관의 작전통제를 받으며 실시되었다. 지난 3월 26일 포항 독석리 해안에서 '독수리훈련'의 일환으로 실시된 한미연합군의 기습상륙훈련은 북(조선)을 대상으로 하는 훈련이었다. 그 훈련은 한미연합군의 함대지 선제공격과 공대지 선제공격으로 북(조선)의 해안방어력을 파괴하고 특수부대가 종심지역에 침투하여 목표물을 타격하고 상륙해안을 확보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어서 미군 해병대 원정군이 상륙돌격전을, 그리고 남(한국)군 해병대가 헬기타격전과 공정돌격전을 각각 전개하고, 미군 공기부양상륙전과 남(한국)군 대형상륙함이 장갑차, 자주포, 지휘차량을 상륙시켰다. 해안에 상륙한 전투부대는 북(조선) 내륙 깊숙이 돌진하여 지상 작전부대의 돌격로를 열어놓는 훈련을 벌였다. 기습상륙작전은 미국 해군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작전통제권을 행사하면서 지휘하게 된다. 남(한국)군이 보유하고 있는 상륙함으로는 연대병력도 실어 나르지 못하므로 대규모 상륙작전은 미국 태평양군 해군사령관의 작전통제를 받게 되어 있다. 

그런데 주한미군사령부는 한미연합군의 전시증원훈련, 기습상륙훈련, 작전통합훈련과 관련해서 북(조선)에 그러한 군사훈련이 실시될 것임을 사전에 통보하였으나, 미군 해병대의 신속기동훈련에 대해서는 통보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미군 해병대의 기동훈련이 남(한국)에서 지금까지 실시해왔던 종래의 군사훈련과 달리,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인 신속기동전략에 따라서 실시되는 미군 단독의 북진기동훈련이기 때문이다. 

한(조선)반도에서 미군이 실시하는 군사훈련은 군사를 좋아하는 미국인 청년들이 해외에서 즐기는 병정놀이가 아니다. 그것은 침략전쟁을 준비하는 실전훈련이다. 미군의 군사훈련을 남(한국) 향토예비군이 벌이는 형식적인 동원훈련 정도로 여기는 것은 착각이다. 

그렇다면 남(한국)에서 실시되는 미군의 전쟁훈련이 노리는 작전목표는 무엇일까? 그 작전목표가 북(조선)에 대한 무력침략이라는 점은 너무도 명백하다. 미국이 남(한국)에서 실시하는 기동훈련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방어훈련'이라는 기만선전으로 사람들을 속이면서 실시되는 대북(조선) 침략전쟁훈련인 것이다. 

만일 남(한국)군이 단독으로 실시하는 군사훈련이거나, 남(한국)군을 미국 영토에 불러들여 실시하는 한미연합군사훈련이라면 방어훈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군이 다른 나라 영토에서 다른 나라의 주권을 훼손하면서 도발적인 기습상륙훈련과 북진기동훈련, 전시증원훈련과 작전통합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침략전쟁훈련이다. 만일 이것을 침략전쟁훈련이 아니라고 강변한다면 침략전쟁훈련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미군이 이라크에서 벌인 군사행동을 침략전쟁이라고 규정한다면, 미군이 한(조선)반도에서 벌이고 있는 군사행동도 침략전쟁훈련이라고 규정되어야 마땅하다. 미국의 시각에서 보면 이라크 전쟁은 '테러국가의 공격위험'으로부터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행동'으로 보이겠지만, 이라크 인민의 시각에서 보면 그 전쟁은 이라크의 주권을 짓밟은 침략전쟁인 것이다. 미국의 시각에서 보면 남(한국)에서 실시하는 미군의 군사훈련은 '북(조선)의 공격위험'으로부터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행동'으로 보이겠지만, 북(조선)의 시각에서 보면 그 군사훈련은 한(조선)민족의 자주권을 짓밟는 침략전쟁훈련인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침략전쟁에 카네바라 같은 수많은 조선청년들이 징병으로 동원되었던 것처럼, 오늘날 미국의 대북(조선) 침략전쟁훈련에도,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도 수많은 김백식이 동원되고 있다. '대동아 공동번영' 이라는 거짓선전 아래서 자행된 침략전쟁에서 이등병 카네바라가 겪었던 고통과 죽음은, 오늘날 '동북아의 자유와 평화'라는 거짓선전 아래 자행되는 침략전쟁훈련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날 일본 군국주의체제 아래서 카네바라 같은 징병자들이 침략전쟁에 동원되었듯이, 오늘날 한·미 군사동맹체제 아래서 김백식의 후예들이 침략전쟁책동에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전을 방불케 하는 북진기동훈련과 기습상륙훈련이 실시되는 살벌한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서울시민들은 광화문 일대에서 탄핵반대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다.

2. 국민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위장술

미군 해병대가 이른바 '자유기치 04'라는 이름의 대북(조선) 침략전쟁훈련을 시작하기 나흘 전인 지난 3월 4일 국민참여정부로 자처하는 노무현 정부는 『평화번영과 국가안보』라는 제목의 안보정책 해설서를 펴냈다. 노무현 정부의 최고실권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해설서를 발행한 주체로 되어 있다. 

해설서 내용 가운데서 이 글의 주제와 상응하는 부분은 군사부문에 관한 서술이다. 노무현 정부는 안보정책의 근간인 군사부문에 관한 서술에서 이른바 '협력적 자주국방 추진'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협력적 자주국방 추진'이란 무엇일까? 해설서에 따르면, "한·미 동맹을 발전시키고 대외안보협력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면서 북한의 전쟁도발을 억제하고, 도발시 이를 격퇴하는 데에 우리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체제를 구비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전에 이미 여러 차례 지적한 바 있는데, 한·미 군사동맹체제는 북(조선)에 대한 무력침략을 목표로 하여 남(한국)군을 미군사령관의 휘하에 배속시킨 예속적 군사체제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해설서에 나오는 한·미 동맹을 발전시킨다는 말은, 노무현 정부가 북(조선)에 대한 무력침략을 노리는 미국의 침략전쟁책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는 뜻이다. 

해설서에 나오는 대외안보협력을 능동적으로 활용한다는 말은, 미·일 동맹군과 적극 협력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협력이라는 것은 대등한 관계에서 상호협력한다는 뜻이 아니라 종속적으로 협력관계를 맺는다는 뜻임은 물론이다. 한(조선)반도 주변에서 남(한국)군과 협력할 수 있는 외부의 군사력은 미·일 동맹군밖에 없다. 중국인민해방군이나 러시아 극동군은 남(한국)군과 협력관계에 있지 않다. 『연합뉴스』 2004년 3월 28일자 보도에 따르면, 미·일 동맹군은 미·일 두 나라의 첨단기술과 정보를 공유하여 미사일 방어(MD)체계를 일본 영토 안에 구축하는 전략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 정부가 말하는 대외안보협력이란 결국 미·일 동맹군의 미사일 방어체계 구축사업에 종속적으로 협력하겠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해설서에 나오는 북(조선)의 전쟁도발을 억제한다는 말은 노무현 정부의 군사전략적 목표가 북(조선)의 전쟁도발 억제라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한·미 군사동맹체제를 발전시키는 목적도, 미·일 동맹군과 협력을 추진하는 목적도, 오직 한 가지 북(조선)의 전쟁도발을 억제한다는 구실에 집중되고 있다. 그런데 위에서 지적한 대로, 북(조선)의 전쟁도발을 억제한다는 것은 미국이 대북(조선) 침략전쟁훈련을 계속하기 위한 거짓명분이므로, 노무현 정부의 군사전략은 미국의 대북(조선) 침략전쟁책동에 부합되는 군사전략인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이른바 '협력적 자주국방'이라는 듣기 좋은 말로 위장하고 있는 군사전략의 내면에는 이처럼 미국의 침략전쟁책동을 추종하는 친미예속성이 들어있다. 

일제강점기에 태평양전쟁이라는 이름의 침략전쟁에 자발적으로 복무한 것이 친일예속세력이었다면, 오늘날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과 대북(조선) 침략전쟁책동에 자발적으로 복무하는 것은 친미예속세력이다. 미국의 침략전쟁책동을 추종하는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 추가파병을 강행하려고 하였을 때,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과 더불어 이라크 추가파병안을 인준하였다. 이것은 남(한국)의 정부와 국회가 한결같이 미국의 침략전쟁책동을 추종하는 친미예속세력임을 스스로 입증한 사건이었다. 이처럼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미국의 침략전쟁책동을 추종하고 있는 현실은 그들에 대한 조그마한 기대도 가질 수 없게 한다. 

지난날 김대중 정부는 자기의 군사정책을 논하면서 '자주국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북(조선)을 '주적'으로 규정한 역대정부의 방침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는 북(조선)을 '주적'으로 규정하는 발언을 자제하고 있으며, '자주국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해설서에서는 북(조선)을 '주적'으로 규정한 대목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가 미국의 침략전쟁책동을 추종하면서도 전혀 어울리지 않게 '자주국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북(조선)을 '주적'으로 규정하는 발언을 자제하는 행동을 일부러 드러내 보이는 것은, 자기의 친미예속성을 위장하는 행동이며, 따라서 더욱 경계해야 할 행동인 것이다. 

일본 정부가 김백식을 죽을 때까지 정신병동에서 간병해주었다는 사실이 침략전쟁의 죄악에 면죄부를 줄 수 없는 것처럼,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말끝마다 입버릇처럼 말하는 '개혁'은 미국의 침략전쟁책동을 추종하는 친미예속성 앞에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정신질환에 걸린 김백식을 죽을 때까지 정신병동에서 간병해준 것을 보면서 일제의 침략만행을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개혁담론을 들으면서 그들의 본질인식에서 착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대중의 귀에 듣기 좋은 개혁담론을 쏟아내는 것은 자기들의 친미예속성을 감추기 위한 위장술이다. 개혁담론의 위장막 뒤에는 미국의 침략전쟁책동을 추종하는 친미예속성이 감추어져 있다.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성격을 논하면서 직시해야 할 것은 개혁성이 아니라 친미예속성이다. 

3. 광화문 앞 광장에서 총리를 참살한 군중

2월의 찬바람이 스산하게 불던 날, 서울 광화문 앞 광장에 모여든 군중은 누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뒤 한 중년남자가 광화문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군중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누군가 그의 머리를 각목으로 후려쳤다. 성난 군중은 길바닥에 쓰러진 그에게 돌을 던졌다. 개혁정권의 수장이었던 조선국 총리 김홍집은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어 성난 군중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그의 나이 55살이었다.

군중은 그래도 노여움이 풀리지 않아 이미 숨이 끊어진 김홍집의 두 다리를 밧줄로 묶어 종로 4가까지 끌고 갔다. 종로를 오가는 시민들은 그의 시체에 침을 뱉으며 저주를 퍼부었다. 1896년 2월 12일에 일어났던 사건이다. 

김홍집이 성난 군중의 손에 참살 당하기 16년 전인 1880년 7월 5일 부산항을 떠나 일본으로 향하던 증기선 '치토세마루(千歲丸)'에는 조선의 제2차 수신사 일행이 타고 있었다. 고종의 특사로 제2차 수신사를 대표하는 39살의 김홍집도 그 증기선에 타고 있었다.  

김홍집의 눈에 비친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서구화로 줄달음치고 있었던 문명국가였다. '메이지유신'의 현장을 돌아본 것은 그가 일본의 서구화를 모방한 개혁을 조선에서 추진하게 된 결정적인 체험이 되었다. 그러나 김홍집의 개혁의지는 한때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다. 1882년 7월 23일에 일어난 임오군란과 1884년 12월 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그의 개혁의지를 시험하였던 시련이었다. 두 차례 변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김홍집은 살아남았다. 

1894년 7월 23일 일제침략군은 왕궁인 경복궁을 점령하고 수구세력인 민비 일파를 쫓아내었다. 서울 주재 일본공사관의 제6대 공사였던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는 민비의 정적인 대원군을 권좌에 복귀시켰다. 일제침략자들에 의해서 다시 권력을 장악한 늙은 대원군은 8월 15일에 친일정권을 출범시켰다. 그것이 김홍집을 수장으로 하는 개혁정권이며, 그 정권이 추진한 것이 갑오개혁이다. 김홍집 개혁정권은 봉건적 신분제도를 폐지하였고, 과거제를 없애고 내각제를 도입하였으며, 재무관청을 일원화하고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다. '메이지유신'을 모방한 조선의 근대화가 김홍집 개혁정권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갑오개혁은 근대화가 아니라 예속화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일제의 침략야욕이 불붙고 있는 상황에서 개혁은 처음부터 실현이 불가능한 한낱 환상이었다. 개혁의 환상은 일제침략세력이 김홍집을 대표로 하는 친일개혁세력을 내버림으로써 산산이 깨져나갔다. 친일정권이 추진한 개혁은 1896년 2월 12일 광화문 앞 광장에서 성난 군중의 손에 김홍집이 참살 당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친일파 개혁정권의 수장 김홍집이 군중의 손에 참살되었으나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제침략자들은 제2, 제3의 김홍집을 등장시켜 식민지예속화를 더욱 발광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군중은 일제침략자들의 흉계를 미처 간파하지 못했다. 1896년 2월 광화문 앞 광장에서 김홍집을 참살한 군중의 정치의식의 한계는, 공격대상을 일제침략자들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친일파 개혁정권으로 설정하였다는 데 있다. 군중은 친일파 개혁정권의 배후에서 일제침략자들이 그 정권을 움직이면서 식민지예속화를 추진하는 것을 정확히 보지 못했다. 친일파 개혁정권을 구성했던 김홍집과 그 일파는 일제침략자들이 실컷 이용하다가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어 내버린 세력이다. 군중이 김홍집을 광화문 앞 광장에서 참살하였던 것은 일제침략자들이 그를 더 이상 보호하지 않고 내버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군중은 그 내막을 알지 못했다. 자기들의 손으로 친일파 개혁정권의 수장을 제거함으로써 정세를 바꿀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1896년 2월 광화문 앞 광장에서 친일파 개혁정권의 수장을 참살한 군중이 이처럼 일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을 정확하게 간파하지 못한 것은, 식민지예속화를 저지·파탄시키는 반일자주화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형성하지 못하는 한계상황으로 이어졌다. 역사는 그로부터 23년이나 지난 1919년 3월 1일에 광화문 앞 광장에 모여든 군중에 의해서 그 한계가 차츰 극복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성난 군중이 광화문 앞 광장에서 친일파 개혁정권의 수장을 참살한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894년에 일어났던 갑오농민전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갑오농민전쟁은 '척양척왜(斥洋斥倭), 보국안민(保國安民)'의 기치를 들고 친일파 개혁정권은 물론 일제침략세력까지도 공격대상으로 규정하고 그들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여기서 광화문 앞 광장에서 김홍집을 참살한 군중과 갑오농민전쟁에서 혈전을 벌인 군중이 정치의식에서 매우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 차이는 민중이냐 시민이냐를 가르는 사회계급적 차이에서 발생한 것이다. 광화문 앞 광장의 군중은 서울의 중간층 시민이었고, 갑오농민전쟁에 참가한 군중은 농촌의 기층민중이었다.

그렇다면 1896년 2월 광화문 앞 광장에 모여든 군중이 안고 있었던 한계는 오늘 극복되었을까? 성난 군중이 친일파 개혁정권의 수장을 참살했던 광화문 일대에서 108년이 지난 2004년 3월에 성난 군중 20만 명이 모여 거대한 '촛불바다'를 만들었다. 1896년 2월의 군중과 2004년 3월의 군중은 정치의식에서 어떠한 차이를 보이고 있을까? 1896년 2월 광화문 앞 광장에 모여든 군중은 김홍집을 수장으로 하는 친일파 개혁정권을 철저히 반대하였던 것에 비하여, 2004년 3월에 광화문 일대에 모여든 군중은 노무현을 수장으로 하는 친미파 개혁정권을 옹호·지지하였다. 이것은 108년 전에 중간층 시민이 안고 있던 한계가 극복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퇴보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1세기초의 중간층 시민들이 지닌 정치의식은 19세기말의 중간층 시민들이 지녔던 정치의식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4. 총선정국에서 민중운동의 선택과 학생운동의 선택은 어떻게 다른가

나는 지난 3월 19일, 3월 25일에 작성한 글에서 4.15 총선의 정치사적 의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논하였다. 그 두 글에 나타나 있는 나의 논지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에 의해서 가시화되는 진보정당의 집권전략은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진보정당이 집권하는 것은 한(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에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진보정당 집권은 남(한국)의 정치지형이 변화되는 것에 국한시켜 이해할 수 없는 문제다. 그것은 미국과의 대결에서 한(조선)민족이 승리함으로써 전민족단위의 정치지형이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조·미 관계 정상화가 주한미군 철수로 이어진다면, 진보정당 집권은 한·미 상호방위조약 철폐로 이어진다. 진보정당 집권이 한·미 상호방위조약 철폐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볼 때, 진보정당이 집권하는 것은 미국과의 대결에서 한(조선)민족이 최종적으로, 완전히 승리하여 마침내 조국통일위업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17대 총선의 정치사적 의의는 진보정당 집권의 전략적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진보정당 집권의 전략적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자주적 민주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실질적 준비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자주적 민주정권 수립은 민족민주운동의 전략목표다. 진보정당이 강화·발전되어 집권하지 않으면 자주적 민주정권은 수립될 수 없다.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승리하게 하여 진보정치를 실현하고 그로써 진보정당 집권의 전략적 교두보를 마련할 생각은 하지 못하면서 자주적 민주정권 수립을 논하는 것은 공허한 논의에 지나지 않으며, 사실상 자주적 민주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투쟁속도를 늦추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

자주적 민주정권 수립을 자기의 전략목표로 설정한 민족민주운동이 17대 총선정국에서 투쟁방향을 진보정당 집권의 전략적 교두보를 마련하는 원칙에 따라 설정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반면에, 그 원칙에 따라 총선투쟁의 방향을 설정하지 않는 것은 민족민주운동의 전략에 어긋나는 일이다.

자주적 민주정권 수립이라는 전략을 수행하느냐 수행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총선정국에서 민족민주운동의 투쟁방향이 시민사회운동의 투쟁방향과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민족민주운동의 사회변혁노선과 시민사회운동의 사회개량노선이 갈라지는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사회운동이 자주적 민주정권 수립을 자기의 전략목표로 설정하고 있지 않으며, 사회정치적 개량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진보정당 집권의 전략적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 민족민주운동은 17대 총선투쟁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민주노동당의 총선승리로 진보정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총선승리는 민주노동당이 의석수 몇 개를 더 얻느냐 마느냐 하는 선거당락의 문제가 아니라 진보정당 집권의 전략적 교두보를 마련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정치사적 문제다.

셋째,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하는 것은 남(한국) 민중의 반미적 생존권투쟁이 정치세력화되는 것을 뜻한다. 남(한국) 민중의 반미적 생존권투쟁이 정치세력화된다는 말은 남(한국) 민중이 진보정치를 실현하는 당당한 주체로 나선다는 뜻이다. 이것은 남(한국) 민중이 자주적 민주정권을 담당할 미래의 주역으로서 자기의 역사적 임무를 자각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반미적 생존권투쟁을 전개하는 기층민중의 전투력과 원내에 진출한 민주노동당의 정치역량이 결합되어 하나의 강력한 정치세력이 형성되는 것은, 수 천년 동안 지배와 수탈의 대상으로 짓눌려왔던 기층민중이 자주적 민주정권을 수립하는 정치세력으로 첫 걸음을 내딛는 실로 엄청난 역사적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지난 3월 30일 민주노동당 중앙당사에서는 '민주노동당 공동선거운동본부'가 발족되었다. 공동선거운동본부에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그리고 전국빈민운동연합(전빈련)이 참가하였다. 보수언론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민주노동당 공동선거운동본부'의 발족은 남(한국) 사회의 기층민중인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을 대표하는 민중운동조직들이 단결하여 17대 총선에서 민족민주운동의 전략에 부합하는 정당한 선택을 하였음을 보여준 중대한 사변이었다. 

그와 더불어 3월 27일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위원장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선언문을 발표하였고, 3월 30일에는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이 민주노동당 지지선언을 하였다. 전교조와 전공노의 민주노동당 지지선언은 노동자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선거법을 거부하면서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의사를 밝혔다는 점에서 돋보이는 투쟁이었다.

'민주노동당 공동선거운동본부'의 발족은 민주노총이 노동자 250만명을, 전농과 전여농이 농민 100만명을, 전빈련이 도시빈민 50만명을 민주노동당 지지세력으로 만드는 거창한 총선투쟁에 앞장서겠다는 정치적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로써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으로 구성되는 기층민중 400만명을 대표하는 민중운동조직들이 진보정당 집권의 전략적 교두보를 마련하는 총선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민족민주운동의 핵심역량 가운데 하나였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은 17대 총선정국에서 민중운동진영의 선택과는 다른 선택을 하여 주목을 받고 있다. 한총련은 '탄핵무효, 16대 국회해산, 4.15 총선심판을 위한 전국대학생비상대책위원회'에 참가한 것이다.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정치적 대표체들이 민주노동당 중앙당사에서 공동선거운동본부를 발족하고 있었던 바로 그 날 '전국대학생비상대책위원회'는 명동성당 나들목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학생운동 대표자들은 기자회견에서 탄핵반대 촛불시위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국민이 지펴 올린 촛불"이라고 칭송하고 수구야당을 반대하는 '촛불대행진'에 앞장서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학생운동 대표자들이 밝힌 총선투쟁방향은, 시민사회운동이 주도하는 총선투쟁조직인 '탄핵무효 부패정치청산 범국민행동'이 그 전날 같은 장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밝혔던 17대 총선투쟁방향과 거의 일치한다. 한총련은 '민주노동당 공동선건운동본부'에 참가하지 않고 '전국대학생비상대책위원회'에 참가함으로써 시민사회운동이 주도하는 수구야당 반대투쟁과 탄핵무효화운동에 나선 것이다. 

17대 총선정국에서 민중운동의 선택과 학생운동의 선택은 이처럼 판이하게 달랐다. 이것은 한총련의 총선투쟁이 민족민주운동의 사회변혁노선에서 벗어나서 시민사회운동의 사회개량노선으로 퇴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퇴보현상은 비단 한총련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민족민주운동권에 속해 있는 다른 몇몇 단체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5. 왜 중산층 시민의 사회개량노선으로 퇴보하였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왜 민족민주운동의 사회변혁노선에서 벗어나서 시민사회운동의 사회개량노선으로 퇴보하게 되었을까? 그 원인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분석될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정치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일부 민족민주운동단체가 시민사회운동의 사회개량노선으로 퇴보한 첫 번째 원인은, 총선투쟁의 방향을 6.15 공동선언실현운동에 맞추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만일 6.15 공동선언실현운동을 총선투쟁의 기준으로 삼으면, 북(조선)과의 화해와 협력을 추진하는(겉으로는 화해와 협력을 추진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미국의 침략전쟁책동을 추종하는) 열린우리당에 대한 투쟁의지가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을 견인하거나 그와 공조하여 한나라당을 고립·타격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6.15 공동선언은 남북 최고수뇌 사이에서 채택된 것이므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남과 북의 정부가 화해하고 협력하여야 하며, 그에 따라 남(한국)에서도 정부, 정당, 사회단체들이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 상호공조하여야 한다. 이것은 6.15공동선언실현운동이 관철하여야 하는 원칙이다.

그런데 남(한국)에서 진행되는 총선투쟁은, 남과 북의 정부가 화해·협력하는 것과는 무관하며, 남(한국)의 정부, 정당, 사회단체들이 공조하는 문제와도 무관한 것이다. 총선은 진보정당, 개량정당, 수구정당이 입법권을 쟁취하기 위하여 벌이는 치열한 권력투쟁이다.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총선정국에서 정부, 정당, 사회단체들의 상호공조를 원칙으로 하는 6.15 공동선언실현운동을 총선투쟁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만일 총선정국에서 6.15 공동선언실현운동을 총선투쟁의 기준으로 삼으면, 사회변혁노선과 사회개량노선 사이의 경계선을 없애고 진보정당 대 개량정당의 권력투쟁을 포기하는 우경적 오류에 빠지게 된다. 6.15 공동선언실현운동에서 관철되는 정부, 정당, 사회단체들의 상호공조원칙은 반미자주화운동이나 민중생존권투쟁에서 관철될 수 없다. 진보정당, 개량정당, 수구정당이 입법권을 쟁취하기 위하여 권력투쟁을 벌이는 총선정국에서는 반미자주화운동과 민중생존권투쟁의 사회변혁노선을 기준으로 하여 투쟁방향을 정하여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일부 민족민주운동단체가 시민사회운동의 사회개량노선으로 퇴보한 두 번째 원인은, 미국의 남(한국) 지배정책이 수구세력을 통해서 관철된다는 시대착오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지배 = 수구세력의 집권이라는 판에 박힌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 노무현 정부의 '개혁'(실제로는 민족자주권과 민중생존권을 전혀 보장하지 못하는 사회정치적 개량이다)이 미국의 남(한국) 지배체제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이는 착각에 빠지게 되고, 지난 대선에서 청와대를 빼앗긴 미국이 17대 총선에서 여의도까지 빼앗기게 될 것 같으니까 수구세력을 배후조종하여 '의회쿠데타'를 자행한 것이라는 식의 정치만담 같은 이야기를 정세분석이라는 이름으로 내놓게 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한나라당이 미국의 배후조종에 따라 앞으로 총선 연기, 내각제 개헌 따위의 제2, 제3의 정치쿠데타를 일으켜 개량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책동을 벌이게 될 것이라는 추리소설을 정세전망이라는 이름으로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정치만담과 추리소설을 즐기는 논객들은 미국의 남(한국) 지배정책이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 같은 개량세력을 통해서 관철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남(한국) 지배정책이 수구세력을 통해서 관철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1997년 대선에서 벌어진 개량세력(김대중세력) 대 수구세력(이회창세력)의 대결에서 상대적으로 약세였던 개량세력이 승리하여 집권한 것이나 2002년 대선에서 벌어진 개량세력(노무현세력) 대 수구세력(이회창세력)의 대결에서 상대적으로 약세였던 개량세력이 승리하여 집권한 연속적인 정치이변이 왜 일어났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1997년 이후 개량세력이 수구세력을 누르고 연속적으로 집권한 것은, 개량세력이 수구세력을 집권시키려는 미국의 비밀정치공작을 파탄시키고 집권에 성공한 것이 결코 아니다. 김대중에서 노무현으로 이어진 연속적인 집권성공은 미국의 남(한국) 지배정책이 이회창-최병렬-박근혜로 이어지는 수구세력이 아니라 김대중-노무현-정동영으로 이어지는 개량세력을 통해서 관철되고 있음을 입증하는 사건이다.

그런데 민족민주운동권 일각에는 진보정당이 집권하기 위해서는 이번 17대 총선에서 수구세력의 정치적 대표체인 한나라당부터 먼저 '심판'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열린우리당을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 사이에 있는 중간정당으로 평가하고 있다. 만일 그들의 견해대로 개량세력을 수구세력과 진보세력 사이에 있는 중간세력으로 본다면, 진보세력이 중간세력과 공조하여 수구세력을 고립시키고 타격하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결론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개량세력이 수구세력과 진보세력 사이의 중간세력이므로 진보세력이 개량세력과 공조하여 수구세력을 고립·타격하여야 한다는 견해는, 미국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일본이나 유럽연합 같은 나라들의 정치지형에나 어울리는 것이다. 진보세력이 수구세력을 고립·타격하기 위해서 개량세력과 공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미국의 지배력이 관철되고 있는 남(한국) 정치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착각이다. 

명확히 인식해야 할 것은, 남(한국) 정치권을 양분하여 점거하고 있는 수구세력과 개량세력은 모두 미국의 지배력 안에서 존립하는 친미예속세력이라는 사실이다. 한나라당은 미국의 지배력 안에 있는 수구정당이지만, 열린우리당은 미국의 지배력 밖에 있는 개혁정당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야말로 남(한국) 정치권이 미국의 지배 아래 있다는 기초상식조차 알지 못하는 소리다. 

미국의 지배력에 의해서 생겨났고, 미국의 지배력에 의해서 존립하고 있으며, 미국의 지배정책을 위해서 이용당하고 있는 열린우리당을 민주노동당의 반한나라당 공조체제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대담한 발상은 미국의 남(한국) 지배체제에 대한 무지가 빚어낸 환상이다. 

백 번 양보해서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과 공조하여 한나라당을 고립·타격하는 전술이 가능하려면, 민주노동당이 미국의 지배체제 안으로 뚫고 들어가서 열린우리당을 반미자주 대 친미예속의 중립지대로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미국의 지배체제 안으로 뚫고 들어가서 열린우리당을 중립지대로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재미난 정치만담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앞에서 기술하였던 19세기말의 역사적 경험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찾는다.  

첫째, 일제침략세력과 정면으로 맞서서 투쟁하였던 갑오농민군이 일제침략세력의 배후조종을 받는 김홍집 친일정권과 어떠한 형태의 공조전술도 취할 수 없었고, 또 취해서도 안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김홍집 친일정권이 추진하였던 갑오개혁은 일제침략자들의 식민지예속화에 복무하는 개혁이었다는 것이다. 셋째, 김홍집 친일정권은 일제침략자들에게서 버림받았을 때 성난 군중에 의해서 처단되어 비참한 종말을 고했다는 것이다.

100년이라는 시간적 거리를 두고 있는 19세기말과 21세기초의 사회정치적 현실상황은 무척 다르지만, 제국주의 지배체제에 의해서 예속되어 있고 민중의 생존권이 짓밟히고 있는 사회정치적 기본구도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제국주의자들의 지배를 반대하고 민중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투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19세기말의 갑오농민군의 투쟁이나 21세기초의 민중운동의 투쟁은 조금도 다르지 않게 보인다.

17대 총선정국에서 민주노동당이 의지해야 할 투쟁력의 중심은 광화문에서 촛불을 든 중산층 시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현장에서 투쟁하는 조직화된 기층민중에게 있다. 따라서 민족민주운동권은 중산층 시민의 사회개량노선이 아니라 기층민중의 사회변혁노선에 확고히 서야 하며, 되지도 않을 민주노동당 대 열린우리당의 공조전술을 논하면서 시간을 헛되게 보낼 것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총선승리에 모든 힘을 집중하여 투쟁하여야 할 것이다.

108년 전 성난 군중이 김홍집을 참살하는 것으로는 일제침략자들의 식민지예속화책동을 막을 수 없었듯이, 오늘 친미파 개혁정권을 옹호·지지하는 중산층 시민의 촛불시위로는 미국의 침략전쟁책동을 막을 수 없다. 남(한국)에서 저들의 책동을 막을 수 있는 길은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자주적 민주역량을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정치세력화하여 진보정당 집권의 전략적 교두보를 구축하는 것밖에 없다. 이것은 민족민주운동에게 주어진 역사적 임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17대 총선은 그 임무를 수행하느냐 못하느냐를 판가름하게 될 것이다. (2004년 3월 31일 작성)